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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 일본은 전시사회주의, 조선 근대화를 오히려 방해했다”

백조히프 2025. 5. 17. 06:48

한겨레

 

“군국 일본은 전시사회주의, 조선 근대화를 오히려 방해했다” 

 

경제학자 전용덕, 식민지 근대화론 실증적 비판
일제의 자원 공출은 자유계약 아닌 수탈로 봐야
산미증식·공업화는 일본의 병참기지 활용 목적

  • 수정 2025-05-16 09:19
  • 등록 2025-05-16 05:00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촉발된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일제 관리와 지역 유지 등이 조선에서 강제로 수집한 놋그릇 등을 모아놓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물자에 대한 강제수탈은 이후 인력 강제동원으로 이어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올해는 해방 80주년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 사회에 ‘친일’의 뿌리는 깊고 질기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두자. 이때 친일은 이웃나라 일본과의 건강한 외교 관계나 우호적인 태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20세기 전반 군국주의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한 식민 지배를 지지·옹호하거나 정당화하고 비판을 회피하는 시각과 언행을 가리킨다.

 

2000년대 이후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의 ‘역사 전쟁’이 단적인 사례다. 낙성대경제연구소를 핵심으로 한 우파 경제학자들은 실증주의 역사관을 내세워 일제 강점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려 한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이영훈·김낙년·이우연 등 6명의 공저 ‘반일 종족주의’(2019)는 그 결정판이다.

 

‘식민지 근대화의 실상’은 “그들이 제기한 역사 이해를 바로잡기 위한 목적으로 쓴” 책이다. 지은이 전용덕 대구대 명예교수는 시장경제학회 회원으로, 여러 정치철학과 자유시장 경제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해왔다. 근래에는 “경제이론을 한국 경제사에 응용하는 일에 관심과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 책은 우파 시장경제학자가 쓴 뉴라이트 경제사관 비판서다.

 

식민지 근대화의 실상 l 전용덕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3만6000원

 

지은이는 국내 경제학자로는 드물게 오스트리아학파로 분류된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정부의 시장 간섭에 반대하고 사회주의의 지속 불가능성을 확신한다는 점에서 우파 시장주의 경제학이지만, 20세기 이후 경제학의 주요 방법론인 계량경제와 거시경제적 분석에 회의적이고 인간의 본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신고전파·신자유주의·시카고학파 등 주류 경제학과도 구별된다.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대표적이다.

 

지은이는 일제 강점기 연구자들이 자주 범하는 잘못으로 “일본 제국 또는 조선총독부의 목적, 그와 관련된 선전·선동, 공포에 의한 지배와 감시·감독, 억압과 처벌 등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꼽았다.

 

일제는 상황에 따라 다른 정책을 폈는데, 이는 “식민지 지배 비용은 적게 하고 지배에 따른 이득을 최대한 챙기”려는 의도였다. 지은이는 뉴라이트 경제학자들이 수집·정리한 데이터들을 적극 활용해 그들의 논리를 뒤집는다. 통계 수치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게 아니라 당대의 국제 관계와 정치·경제적 맥락 속에서 해석하는 방식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 소년들이 만든 쌀가마니를 파는 시장의 모습. 조선총독부는 쌀 수탈을 위한 가마니 짜기 노동을 학생들의 학비 마련을 구실 삼은 강제노역으로 해결했다. ‘사진으로보는서울2’(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2002)에수록.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1937년 중일 전쟁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산미증식 계획 등 철저한 농업중심 정책을 고수했다. 이는 일본 본토의 산업 정책과 연계된 후방 식량기지 경영 차원이었다. 일본으로의 쌀 반출을 포함한 각종 자원의 공출도 ‘계약의 자유’가 없었다는 점에서 ‘수출’이 아니라 ‘수탈’이자, “자율을 가장한 타율”이었다는 게 지은이의 해석이다. 한반도에서 농사회사 설립은 일본인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으며, 한반도 경제가 일본 경제와 통합된 것도 아니었다.

 

일본은 1937년 중국 본토를 침략한 중일전쟁 이후 한반도 북부와 경인 지역에 제조업 공장을 건설하며 광공업 비중을 높였다. 그러나 이는 전쟁물자 생산을 위한 병참기지 건설이 목표였고, 생산 물자는 대부분 전쟁터에서 소모됐다. 1937년 이후 한반도 공업화를 두고 일부 역사가들은 ‘군수공업화’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그런 변화를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전쟁 수행 목적의 공업화를 ‘전쟁 사회주의’, 또는 ‘전쟁 경제’로 정의한다. 전쟁 사회주의는 “국가가 영토 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원을 (시장원리가 아닌 명령과 지시로) 동원·배분·소모하는 경제 체제”로, 지속불가능할 뿐 아니라 경제적 부가 가치가 생활 수준 향상으로 직결되지도 않는다. 통상적인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얘기다.

 

일본 강점기에 노구치 재벌이 운영했던 흥남 조선질소비료공장. 무려 600만평의 면적에 비료, 석유, 카바이드, 유지 등 중화학 공업 시설이 밀집한 복합 공업지대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일제 강점 시기 한반도에 어느 정도 공업화가 진전된 건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농업 비중은 줄었다. 그러나 산업 비중 변화의 배경과 쓸모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낙성대경제연구소장을 거쳐 윤석열 정부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을 맡은 김낙년의 공저 ‘한국의 장기통계’에 따르면, 한일 강제합병 이듬해인 1911년부터 1940년까지 30년 새 한반도의 광업·제조업 비중은 5.0%에서 17.5%로 3.5배 늘었다. 같은 기간 농·축·임·수산업 비중은 67.8%에서 42.0%로 줄었다.

 

이에 대해 전용덕은 “한반도는 농업 중심 지역이면서 제조업은 일부 성장했지만 여전히 빈약한 상태(…), 그런 공업화마저도 제조업 중에는 군수공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이기 때문에 통상의 공업화라고 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권용덕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근대화’의 의미를 정확히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는 정치학자 정윤재의 정의를 인용해, △단위 민족의 정치적 독립 △공업화 △민주정 등 세 가지를 근대성의 핵심으로 꼽았다. 이 기준에 비춰보면 ‘군국 일본’은 서구 문물을 대폭 받아들여 외견상 근대화를 이뤘음에도, “천황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정치와 종교를 통합하고(…), 제국 내의 타민족을 ‘국민(=천황의 신민)’화함으로써” 근대화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지난해 1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일부 승소를 확정받은 뒤 기뻐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그가 보기에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경제적으로는 ‘근대화=경제성장’, 정치적으로는 (조선과 일본의) 동화주의, 사회적으로는 1912년 민법 시행과 초·중등 교육 도입과 확대 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경제적 의미로만 좁혀봐도 ‘근대화=경제성장’이라는 등식은 맞지 않는다.

 

“군국 일본이 한인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행한 경제성장 정책이나 제도가 실제로는 일본인 청부업자들과 지주들, 전·현직 총독부 관료들, 일본인 노동자와 기술자들, 재선 일본 공식 기관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산미증식계획과 수리조합사업이 강제로 시행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근대화의 핵심 표상은 자유와 평등의 확산일 테다. 그러나 군국 일본이 한반도에서 벌인 토지와 자원 수탈, 강제 징용과 징병, 공포에 의한 지배, 감시·감독의 일상화, 고용·임금·교육 등 전방위적 차별은 그와 정반대다. 지은이는 “일제는 한반도 한인의 자유를 정치적으로는 군국주의로 탄압했고, 경제적으로는 간섭주의와 사회주의로 생산성이 낮은 경제 체제를 강제했으며, 일본인에 비해 한인을 차별했기 때문에 식민지 한반도의 근대화를 오히려 방해했다”고 강조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