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스탈린그라드 확보 명분과 獨蘇 양군의 처절한 사투
2022. 4. 16.
(스탈린그라드 격돌 직전 상황)
◆ 독소 양군의 교착 속에서 소련의 위기 상황 계속
전편에서 살펴봤듯이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점령을 목전에 두고 주코프의 소련군과 증오 및 공포심에 빠진 민중의 필사적 저항에다 동장군을 만나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히틀러의 무리한 현지 사수 명령에 따라 후퇴 시기도 놓쳐 도리어 소련군에 포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스탈린이 주코프 등 군 수뇌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하며 곤경에 빠진 독일군에 무리한 공격을 몇 번 시도했지만 독일군의 능숙한 방어에 의해 격퇴되었다. 포위망은 뚫지 못했지만 독공군의 포위망내 물자공급으로 독일군은 그럭저럭 ‘41~’42년 겨울을 날 수 있었다. 4월이 되어 얼음이 녹아 전장터가 진흙수렁으로 변했을 때도 양측은 휴지기를 유지하며 곧 도래할 열전의 시기를 기다렸다.
<참호속 경계 중인 소련군>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간신히 방어하였지만 이 무렵 소련은 사실 심각하게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극심한 소모전에서 300만 병력이 포로로 잡히고, 310만명이 죽었다.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를 빼앗겨 공급량이 절반으로 줄어든 빵과 육류로 점령되지 않은 영토에 사는 1억3천만의 소련인이 간신히 연명했다. 돈바스 공업지역까지 잃는 바람에 중공업 생산은 1/4로 줄어들었다.
숙련노동자 수백만명이 죽거나 사로잡혀 네배나 더 큰 공업력을 보유하게 된 독일에 맞서게 된 소련의 전망은 암울하기 그지 없었다. 독소전에서 가장 놀라왔던 장면은 바로 이렇게 붕괴 직전까지 몰렸던 소련의 운명이 스탈린그라드전의 역전으로 인해 극적으로 소생했다는 데 있다. 이 희대적 전투의 역전이 오기 전만 해도 소련의 패배는 거의 90%라고 서방 측은 예측했었고 그 전망은 거의 맞아떨어지는 듯 했다.
◆ 스탈린의 거듭된 군사적 실책과 자숙으로 전화위복 계기 획득
‘42년 5월이 되자 먼저 움직인 것은 스탈린이었다. 자신이 보기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대치하고 있는 독일 북부 집단군보다 남쪽에 있는 남부집단군이 약하다고 확신해 그리 준비가 잘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부의 중요 거점으로 독일측에 빼앗긴 하르코프와 크림반도를 탈환하기 위한 공격을 5/12일 개시했다. 하지만 첩보를 통해 미리 공격을 예상한 독일군은 덫을 친 채 기다리다 포위망 안으로 뛰어든 소련군 각 3개군 45만을 사로잡고, 나머지는 케르치 반도에서 바다 쪽으로 퇴치한 대첩을 거두었다.
<하르코프 탈환 시도하는 소련군>
특히 하르코프의 재앙은 스탈린 개인의 지도력에 치욕을 안겨준 패배였지만 이를 계기로 스탈린은 더 이상 군사지도자의 타이틀을 떼고 그 이후의 전투에서는 주코프 등 군사전문가에 지휘권을 과감하게 일임했다. 반면 기세가 되살아난 히틀러는 자신의 군사적 총기를 과신하며 군사권을 꽉 틀어지고 전권을 행사하자 시간이 가며 스탈린그라드전을 비롯한 독소전의 승패가 바뀌기 시작하는 양상을 스스로 초래했다.
◆ 히틀러의 과욕과 아프리카전의 패배 방치
히틀러의 사령관들이 모스크바 점령을 이제 마무리짓자고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소련군을 남부 초원지대와 카프카즈 지역에서 몰아내어 추축군이 중동과 연결되도록 하고, 그 후 북쪽으로 공세를 취해 모스크바와 우랄 지역에 최후의 일격을 가해 독소전을 종결짓겠다는 것이었다. 남부에는 풍부한 광물자원과 특히 중요한 석유가 있었기에 이들의 확보가 독소전 승리의 핵심이었다.
<카프카즈와 중동을 연결하겠다는 히틀러의 구상>
그러나 이것은 군사적 현실을 경시한 히틀러의 과욕이었음이 얼마되지 않아 판명되었다. 그는 파괴된 군사력과 경제력을 예상외로 빨리 복원시키는 소련의 놀랄만한 ‘잔존경제력’을 무시한 채 많이 소모된 독일 군사력의 보충없이 남부경제공간에의 야욕적인 점령을 추구하며 무리수를 계속 두어갔다.
‘41년 2월 히틀러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에 고전하고 있는 동맹국 이탈리아군을 돕기 위해 에어빈 롬멜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독소전 준비를 위한 대기전력 중 2개 기갑사단을 차출해 리비아 트리폴리로 파견했다. 그와 독일국방군 총사령부(OKH)는 롬멜에게 이탈리아군의 총붕괴를 막기 위한 방어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니 결코 적극적인 공세작전은 자제하라고 지시했다.
<영국군으로부터 사막의 여우로 불린 에어뷘 롬멜>
하지만 태생적인 싸움닭인 롬멜은 장비와 군대 사기가 열악한 이탈리아군을 측면지원하는 것 만으로는 총붕괴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사이 보급선이 길어진 영국군의 허점을 노려 기습공격해 격퇴에 성공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대안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한때 적으로부터 ‘사막의 여우’라는 별칭을 얻을만큼 기습전을 능하게 수행하여 그 해 8월에는 토브룩 교두보를 확보한 뒤 영국군 식민지인 이집트 엘 알라메인까지 진출하여 영국군과 처칠 수상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토브룩을 함락하고 엘 알라메인까지 진출한 무렵의 독일군 진격로>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전투들이 수행됨에 따라 한정된 병력과 연료 및 기갑장비(탱크 포함)들이 소모되었고, 롬멜이 국지적 전투에서 승리해 영국측으로부터 획득한 전리품으로 차기 전투를 치룬다 해도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40년 여름에 벌어졌던 영국 항공전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독소전을 다음 해인 '41년 6/22일 이미 개전한 상황에서 롬멜의 거듭된 군수품 지원요청을 들어줄 형편도, 의향도 없었다.
결국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에 대한 롬멜군의 초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소모 군사력 보충능력에서 구조적인 한계를 보인 롬멜의 아프리카군은 인파이터가 아닌 아웃파이터 성향의 대치전을 벌이는 영국군 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에게 엘 알라메인에서 예봉을 꺾인 이후, '43년 2월 말 튀니지에 상륙한 미2군 사령관 조지 패튼을 만나 중과부족으로 패퇴하다 '43년 5월 최종 궤멸되는 운명을 만났다.
히틀러가 롬멜을 위해 해준 것은 연합군에 아프리카군의 항복이 임박했을 무렵 그를 아프리카 전선에서 빼내어 소련과의 동부전선으로 이동배치한 명령이었다. 이 일로 인해 롬멜의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도 확 떨어져 수년 후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에 그가 묵시적인 동의를 하게끔 했다.
이리하여 한 때 롬멜군이 영국 세력권의 이집트와 이란을 돌파하여 카스피해 연안까지 진출하게 되었다면 러시아 남부 지역을 합동공략 하려던 히틀러의 꿈은 아프리카 군단에 군사지원 투자를 거의 하지 않은 댓가로 무산된 채 남부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에 이르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의 확보 명분)
◆ 히틀러의 점령 명분과 남부집단군 분리
남부군은 처음에 신속한 코카시스 지역 점령을 위해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 점령은 동맹군인 루마니아군에 맡기고 자신들은 지나치려 했으나, 카스피해와 북부 러시아를 잇는 교통요지이자 전략적 거점인 것이 점점 뚜렷해져 직접 점령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게다가 쾌속진격이 저지된 모스크바 공략과 북아프리카전에서의 패배로 의기소침해진 히틀러에게는 그 어떤 국면전환용 승리 소식이 꼭 필요했다. 스탈린그라드라는 지명이 상징하는 선전효과 역시 이런 승리 소식에 딱 부합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스탈린그라드의 지정학적 위치>
군사적 측면에서도 로스토프와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여 볼가강과 돈강 사이에 형성된 전선의 간극을 메우며 숨넘어가는 소련의 생명을 이어주는 전시경제를 지탱할 석유와 물자들의 주요 수송로를 차단함으로써 붉은군대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아야 할 필요성이 현지에 도착해 다시 살펴보니 더 크게 부각되었다. 루마니아군에 그 점령을 맡겨서는 결코 안되리라 싶었다.
<남부집단군에서 양분되어 스탈린그라드로 북상하는 독 6군>
히틀러는 ’42년 7월23일 남부집단군을 A와 B로 나누어 A군은 코카사스로, B군은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소련의 방어군인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이 수비를 위한 선제공세를 취했으나 초반 잠깐 선전 후 독일군에 곧 대패하고 말았다. 7월 말이 되자 B 집단군의 주축인 독 6군은 스탈린그라드 포위를 눈 앞에 두었고, 스탈린은 절대 사수를 명령해 소련 62군과 64군을 주력으로 해서 독일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 스탈린의 사수 명분과 명령 227호 발동
독일군의 쾌속진공에 군사경제력의 2/3를 유린당한 소련으로서는 이제 1/3의 잔존경제력으로 버텨야 하는데, 저항의 상징적 거점이자 핵심보루로써 스탈린그라드를 부각시켜야 했다. 러시아 혁명후 2년 여 벌어진 적백전 당시 청년장교 주코프의 도움으로 스탈린이 볼고그라드 방어에 성공하자 볼세비키 동료들이 이 소도시 이름을 ‘스탈린그라드’로 개명해 부르며 스탈린의 전공을 치하했다. 그런 연유로도 이곳은 히틀러군에 손쉽게 유린당하며 내어줄 수는 없는 곳이라 결사 항전지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의 사수 명령을 받은 소 62군의 필사적 저항>
다른 한편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되면 극동에서의 일본군 참전이 크게 우려되는 상황이라 스탈린은 무조건적 사수를 명령했다. 피차 빼앗아야 하고, 빼앗겨서는 안되는 상황들이 맞물리며 양측 200만 병력이 소모되는 사상 최악의 살상전에 돌입하게 되어 결국 2차대전의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적인 거대전투장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로 접근해가는 광활한 초원지대에서 라스푸티아도 없는 7~8월의 전투는 독일군에게 절대 유리했다. 소련군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항공기와 합동공격을 펼치는 독일 기갑부대들의 진격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스탈린은 독일군이 남부지역 공격보다 모스크바 대공세를 준비 중일거라고 확신하며 방어병력의 주력을 북쪽에다 배치해 놓았기에 남부의 소련군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그때서야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를 작심하고 공격한다는 것을 감지한 스탈린이 과오를 속으로 인정하며 군사지도자 역할을 확실히 내려 놓았다. 이제 부하들인 군사전문가들에게 이 난국을 타개하게 완전한 전권을 일임했다. 기묘하게도 이 결정이 결과적으로 스탈린그라드전의 최후 승리를 가져오게 한 전화위복의 한 수였던 것으로 추후 드러났다.
<소련군 형벌부대 돌격대>
하지만 스탈린은 그냥 권한을 일임하지 않고 그 유명한 명령 227호를 7/28일 이 지역 소련군에 내렸다. 그것은 ‘니 샤구 나자드(Ni Schagu Nazad!’, 즉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말라!’는 명령으로 군인들에게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요구한 독재자다운 군령이었다. 이 지시를 지키지 않는 소위 ‘공황 조장자’와 ‘겁쟁이’들은 즉결처형에 처해지거나 ‘시트라트바트(Shtratbat)’, 다시 말해 ‘형벌부대’에서 근무하며 거의 95% 죽음이 예견되는 돌격대 역할에 투입되었다.
(독공군의 맹폭과 시가전 전개)
◆ 독 루프트봐페의 선제 맹폭으로 시가 초토화
8/23일 일요일은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하루’가 되었다. 리히트호펜이 지휘하는 독공군 제4항공함대는 보유하고 있던 슈투카, 하인켈, 융커 등의 폭격기 600여기를 총동원하여 볼가강 서쪽 강둑을 따라 아름다운 정원들과 함께 도심의 하얀 고층 건물들로 고혹스러움과 현대적 분위기를 동시에 아우르던 이 도시를 맹폭함으로써 단 하루 만에 불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독공군에 맹폭 당하는 스탈린그라드>
소련측 추산으로는 총 거주민수 60만 중 4만 여명이 공습 첫 1주 만에 사망했다고 했다. 지하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들 말고 거리를 헤매거나 목조주택과 아파트에 머물던 주민들에게서는 생존자가 극소수로 꼽힐 정도였다. 쏟아지는 소이탄들 속에 이들 건물은 삽시간에 불바다를 이루었고, 남은 것이라고는 초현실적 분위기의 공동묘지를 암시하듯 일렬로 늘어선 굴뚝 뿐이었다.
◆ 소련군의 궤멸 위기
다른 한편 그처럼 엄청난 희생자 수가 발생한 데는 전형적인 소련체제의 인명경시적 특성에서도 기인했다. 전쟁을 관장하는 내무군사인민위원회(NKVD)는 강 위로 병력을 실어나르는 모든 선박의 통제권은 압도적으로 행사한 반면, 민간인을 강너머로 소개하는 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스탈린 역시 병력이동을 방해하고 공황상태가 발생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겨 민간 시민들을 볼가강 건너편으로 피신시키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지역 출신 방어군이 더 결사적으로 방어전을 펼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8월 하순 스탈린그라드 도심으로 진입하는 독일군 선발대>
리히트호펜의 항공대가 스탈린그라드를 강타하는 동안 독 16기갑사단의 선봉은 그야말로 눈에 띄는 저항없이 쾌속으로 평원을 가로지르며 40여 Km를 진군했다. 8/19일 파울루스의 독 6군은 이 도시에 첫 지상군 공격을 가할 태세를 갖추었다. 8/23일 북쪽 볼가강에 이르러 강변을 따라 8 Km 너비의 돌출부를 만들자 주력 독일군 부대가 도시 근교에 도착했다. 파울루스는 향후 2주면 스탈린그라드 장악이 충분하리라 확신했다.
<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공격로>
독 우크라이나 사령부는 축제 분위기에 빠졌고, 베를린의 독일 언론들 역시 ‘스탈린그라드 점령 종료“’라는 가제의 기사들을 작성해 놓고 독국방군총사령부(OKH)의 최종확인 발표를 카운트다운 하듯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반면 스탈린은 독일군이 볼가강까지 도달했다는 보고를 받자 불같이 화를 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 도시의 사수를 외치면서 공장파괴나 기계설비 이전 등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행위를 일체 금지 시켰다.
◆ 소련군의 시가전 유도와 필사적 저항
8/25일 독공군은 지상군 공격을 앞두고 이 도시 전역을 폐허로 만들 듯이 맹폭을 재개했다. 많은 시민들이 가진 것을 모두 상실했지만, 그나마 남은 것을 살아남은 다른 상실자들과 함께 나누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 나누는 사람들은 그들 역시 다음 날이면 없는 자의 처지가 될 것임을 본능적으로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서야 여성과 어린이들이 NKVD가 할당한 소수의 선박편으로 강너머 도강하는 게 허락되었다.
스탈린그라드 방어를 맡고 있던 소 62군은 전장을 지탱할 수 없어 사령관 알렉산더 로파틴이 부대원들을 볼가강을 건너 동쪽 강변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NKVD 수뇌부는 이를 직무유기 행위로 간주해 그를 면직시키고 후임 사령관에 바실리 추이코프를 9/12일 임명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교체는 현명한 결정이었음이 후일 판명되었다.
<교체되어 스탈린그라드 방어에 성공해 반격 기회를 만든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
그는 야전군 장교로써 잔뼈가 굵어진 직업군인이었는데 독소전 내내 오랜 패배를 통해 독일군의 전투습성과 자국군의 약점들을 잘 파악해 더 나은 문제해결능력을 갖추고자 매진하던 중이었다. 어느 정도 군사적 내공을 갖추자 스탈린그라드 전장터라는 실전의 ‘무쇠 솥’에 투입되었다.
그는 독공군에 의해 폐허화된 스탈린그라드 시가지가 소련군에는 더없이 유리한 싸움터가 될 것임을 한 눈에 꿰뚫었다. 무너지고 파편화된 건물들을 엄호 공간으로 삼아 독일군과 ‘껴안기’와 같은 초근접전을 펼치면 이 도시를 단번에 독일군에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술을 바로 개발했다.
<독일군과 초근접 시가전을 행하는 소련군>
독일군 소부대들과 폐허로 파괴된 공간 속에서 뒹구는 자세로 전투들을 하다보면 독일군의 장점이던 기갑부대와 항공부대, 그리고 포병대의 공격들을 오폭에 의한 두려움으로 자동 차단하는 효과를 얻기에 더 이상 잃을 게 없던 소련군으로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의 전장터가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추이코프의 이런 전투기술 개발은 소련군에 충분히 해볼만 하다는 희망적인 항전능력을 부여했고, 이 도시의 90%를 점령한 독일군에게는 갑자기 이게 뭐냐 싶을 정도로 당혹스러웠고, 뭔가 새로운 함정이나 늪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게 하며 병력을 끝없이 소모시키는 교착전으로 끌려가게 만들었다.
<원치 않는 ‘쥐들의 전쟁’을 벌이는 독일군>
몇 주에 걸쳐 독일측이 ‘쥐들의 전쟁’이라 부른 소규모 백병전들이 도로 하나, 심지어 벽 하나 두고도 벌어졌는데 양측은 엄청난 인명소모를 겪었지만 소련군이 점점 밀리게 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0/26일 경에는 독일군이 곡물창고, 트랙터 공장, 백화점 지역을 제외하고는 소련군을 거의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10월 말에는 방어군 62군이 시내와 볼가강 서쪽으로 양단되었다. ‘독안의 쥐’ 형상인 시내 병력은 거의 전멸 위기에 봉착해, 독6군 사령관 파울루스는 11월10일까지 완전 장악을 다시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유일하게 포위되지 않은 볼가강 동쪽 연안에서 소련군 지휘부(스타브카)는 이 교두보를 유지하기 위해 갓 들어온 신병부터 정비병, 행정병, 취사병까지 닥치는대로 투입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시내에 고립된 한줌의 방어군조차 결사 항전을 하자 독일군도 극심한 병력소모를 당해 이들을 쓸어버릴 마지막 예비전력의 부족으로 결국은 교착상태에 빠져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완전점령을 목전에 두고 또 한번의 동장군이 돌아오자 독일군에게 꼭 1년 전 모스크바 점령이 소련 민중과 군의 필사적 저항 속에 무산되었던 악몽이 떠올려졌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번 겨울은 작년과는 차원이 다른 그 어떤 대재앙의 시기가 될 것 같다는 공포감이 장교나 사병들 모두에게 꼭 집혀지지는 않았지만 확실하게 느껴졌다.
<윤곽 잡은 반격작전을 숙의 검토하는 주코프와 추이코프>
해가 넘어가며 그러한 두려움은 현실로 다가왔음이 바로 나타났다. 작년 모스크바 공방전을 놓고 스탈린에 달려들었다 경질된 수호천사 주코프가 스탈린에 의해 한달 반 전인 8/27일 다시 스탈린그라드 방어군 부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8/29일 볼가강 전선을 현장시찰한 주코프는 신임 참모총장인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 만나 스탈린그라드를 완전무결하게 구할 ‘또 다른 해결책’을 구상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독 6군을 완전 역포위해 나락으로 빠뜨릴..
(다음 회에 계속)..
김재민 작가·경영 컨설턴트 photo 김재민
<필자 소개> 김재민은 한국외대 독일어과,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나온 뒤 산업경제연구원에 근무하다 도독(渡獨)하여 함부르크대와 함부르크 국방대에서 경영학 디플롬과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경영학 분야에서는 글로벌경영, 전략경영, 마케팅, 창업경영, 인문경영 분야를 주력으로 연구하고 강의했다. 이 과정을 현대경제연구원, 현대중공업, 부산 경성대에서 근무하며 수행하다 2020년 퇴임 이후에는 본격적인 프리랜서 글쓰기 작가와 스타트업 기업들의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출처 : 미디어빌(http://www.mediavill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