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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 좋은 게 국가에 좋은 시대?

백조히프 2025. 12. 1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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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재벌에 좋은 게 국가에 좋은 시대? 

 
  • 수정 2025-12-18 20:50
  • 등록 2025-12-18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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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하이닉스의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부지. SK하이닉스 제공.
 
 

이본영|경제산업부 선임기자

 

 미국 자동차 업체 제너럴모터스(GM) 최고경영자 출신인 찰스 윌슨은 “지엠에 좋은 게 미국에 좋다”는 말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1953년 국방장관으로 지명돼 인사청문회에서 한 발언이다. 본인은 “미국에 좋은 게 지엠에 좋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였다”며 자신의 경험을 말한 게 오만하게 들리는 발언으로 왜곡됐다며 억울해했다. 어쨌든 앞의 표현은 거대 기업의 힘과 오만을 상징하는 말로 굳어졌다.

 

올해 한국에서도 원래 표현이든 다소 왜곡된 버전이든 저런 말의 적실성을 생각해볼 만한 기회가 있었다. 미국이 한국산 자동차 품목관세율을 애초 밝힌 대로 25%에서 15%로 내리지 않고 한국 정부의 대규모 투자 약속을 요구하며 애를 먹일 때였다. 미국 시장에서 한국산과 경쟁하는 유럽연합(EU)이나 일본산 관세율은 15%이니까 경쟁이 어려워진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미국에서 현대차 쏘나타 값이 일본 도요타의 캠리보다 비싸진다며 공포심을 한껏 자극했다. 가격은 판매자가 손익 구조, 시장 상황, 소비자 반응을 종합적으로 따져 정할 텐데도 멋대로 ‘관세 결정론’을 편 것이다. 자동차 대미 수출 감소에는 현대차의 현지 생산 확대도 영향을 미쳤지만 모두 관세 탓이라는 큰소리에 묻혔다.

 

이런 분위기에서 ‘현대차에 좋은 게 국가에도 좋은가’를 차분히 따져볼 틈도 없이 관세 협상은 3500억달러 대미 투자 합의로 결론 났다. 일각에서는 현대차가 감당할 연간 영업이익 감소분은 수조원인 데 반해 미국의 투자 요구액은 수백조원이니까 버텨볼 여지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협력업체들, 역시 품목관세 대상이었던 부품 업체들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정부를 압박했다.

 

요새 상황을 보면 ‘현대차에 좋은 게 국가에 좋다’에 이어 ‘에스케이(SK)하이닉스에 좋은 게 국가에 좋다’거나 ‘삼성전자에 좋은 게 국가에 좋다’는 게 ‘상식’으로 굳어지지 않나 싶을 정도다. 정부가 에스케이하이닉스의 투자를 위해 법을 고쳐가면서까지 금산분리 예외 등의 특혜를 주기로 한 것은 패러다임의 큰 전환을 상징한다.

 

민관 합동으로 150조원을 투자하겠다며 출범한 국민성장펀드가 이런 통로를 이용해 상당한 액수를 투자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정부는 내년에 국가 자산을 이용해 대규모 한국형 국부펀드도 만들어 유망 산업에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반도체 등 정부가 강하게 미는 ‘전략 산업’으로 돈이 집중되는 양상이다.

 

대기업에 좋은 게 국가에 좋은 경우는 분명히 많다. 기업이 돈을 벌어 일자리를 늘리고 세금도 많이 내는 게 좋은 건 당연하다. 문제는 “지엠에 좋은 게 국가에 좋다”에서 끝나버릴 경우의 부작용이 만만찮을 것이라는 점이다. 저런 표현은 대기업은 국가와 일체 내지 동격이라는 뉘앙스를 물씬 풍긴다. 어느새 우리는 그런 사고방식에 더 깊이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지난 10일 산업통상부가 중심이 돼 관계 부처들이 함께 내놓은 ‘인공지능(AI) 시대, 반도체산업 전략’을 보자.

 

국가 간 경쟁 상황을 놓고 “총력전” “전쟁 격화” “절체절명” “국가 대항전” “쟁탈전” 따위의 살벌한 표현이 난무했다. 전쟁 중인 나라의 국방부가 만든 문서 같기도 하고 반도체 업계의 청원서 같기도 했다. 총력전이 벌어져 절체절명의 상황이라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야 할 게 아닌가? 이런 식으로 몇몇 대기업은 생산 독과점을 넘어 국가의 기대를 독과점하는 시대가 됐다.

 

미국 등이 갖은 방법으로 핵심 산업을 지원하는 흐름에 따라 국가자본주의라는 표현까지 유행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전략적 선택’에 내몰리는 형국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정된 자원을 소수에게 몰아준다면 다른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또 큰 숙제로 여겨져온 재벌개혁의 방향에 역행하고, 재벌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낼 가능성이 짙다.

 

중요한 가치를 포기하고 부작용을 감수하면서 반대급부를 얼마나 챙길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엔비디아에 고성능 반도체의 대중국 수출 제한을 풀어주면서 판매 대금의 25%를 미국 정부가 받겠다고 한 트럼프의 우악스러운 방법에서라도 힌트를 얻어야 할까. 지엠 얘기가 나왔으니 빠뜨리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미국을 떠받치는 기둥이라도 된 듯 존재감을 과시하던 지엠은 2009년 파산보호 신청과 공적자금 투입으로 국가에 폐가 됐다는 사실이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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