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40

10. 마지막 고교생활을 보낸 고3 시절

10. 마지막 고교생활을 보낸 고3 시절 다사다난했던 1971년을 보내고 드디어 고3생이 되는 ‘72년을 맞았다. 3학년으로 올라가는 3월이 되기 전 1~2월은 2학년 시절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기간이라 서로 1년 간을 잘 보냈다는 이심전심들 속에 좀 더 친했던 친구들과는 돈독한 우애나눔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같은 반으로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리라 예상되니 이제 다가올 고3 전투를 맞이해 서로의 학운을 빌어주는 애잔함까지도 풍겼다. 2월부터는 여러 과목마다 ‘책걸이 파티’라는 종강기념 가요무대가, 반장 부반장이 사가져온 과자와 음료수 먹어가며, 교탁 앞에서 펼쳐졌는데 우리반에서는 이 시간 진행 사회를 김세곤군이 주로 맡은 것으로 기억된다. 항상 입담좋게 진행을 하던 이 키..

9. 인문예술 독서에 빠졌던 고2 시절

9. 인문예술 독서에 빠졌던 고2 시절 호연지기를 키우던 고1 시절을 보내고 대입준비에 서서히 시동을 거는 고2 시절을 맞게 되었다. S대 합격자 수를 늘리기 위해 문과 2반, 이과 6반으로 나누었는데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S대 들어가 볼거라고 적성하고는 별 관계없이 이과반을 택해 2-3반에 배정되었다. 가보니 古文 담당인 영국신사 타입의 안평제 선생이 담임이었다. 1-4반 친구들이 일부 같이 옮겨갔지만 2/3가 새로 본 얼굴들이었다. 이과반이다 보니 수학-II를 하게 되었지만 S대 입시과목들이 이과계에도 국영수 외에 사회과목들과 제2외국어가 포함되어 있어 문과반 쪽과 뭐 그리 크게 차별화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학기 초의 좀 느슨한 분위기 속에서 책이나 많이 읽자 해서 4월 중순까지는 수업 마..

8. 의욕으로 가득 찬 고1 시절

8. 의욕으로 가득 찬 고1 시절 이 해 3월부터 꿈에 그리던 경남고 생활이 시작되었다. 중학 3년 동안 우리 부친은 자신의 내면에서는 무슨 동계진학교라고 이미 결정된 양 경남중 다니는 내게 경남고를 항상 ‘너그 학교’라 마에가리해 불렀다.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한 경남고에 대해 ‘어제 너그 학교가 또 이겼더라’ 하며 아예 세뇌의 못을 수시로 박는 것이었다. 사실 교명의 뿌리도 같고, 동일계로 지냈던 시절도 꽤 있었는지라 경남고는 경남중의 큰 형님집으로써 대부분의 경남중 재학생들은 받아들였지 싶다. 학우들 중 전국최고라는 경기고 진학을 희망하는 극소수를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우리 앞 수년 전 만 하더라도 경남중 석차 200등 내외만 하면 경남고를 모두 큰 문제없이 진학하는 학교로 여겼었다. 하지..

17. 대학원 후반부와 짧은 취업 후 단신 渡獨 준비 시절

17. 대학원 후반부와 짧은 취업 후 단신 渡獨 준비 시절 필자 주: 동기 여러분이 많은 성원을 보내주신 제 졸고 회상록은 17편 작성을 끝으로 1부를, 중간휴식도 필요할 듯해 잠정 완료하려 합니다. 예정된 다른 동기들의 자서전 소개들이 한 바퀴 돌아 끝나면 그 때 독일유학 시절과 귀국 후 직장시절의 회상기억들을 끌어모아 2부를 다시 시작할 겝니다. 이 점 양지해 주시기 바라네요. 1. 빡빡했던 논문제출 시험준비 국내에서는 말도 안되는 정권 도적질이 일어난 상황에서 암울한 우리의 정치적 앞날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가 오리무증인 상태에서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듯 ‘80년도 저물어 갔다. 난 이해 겨울 미국도 가지 않을거면서 주위에서 모두 열을 올리는 토플 강좌를 연대 내에서 들어봤다. 점수 올리려는 ..

1989년 독일유학 시절: 이 해의 국내외 주요사건과 전체 소감

1989년 독일유학 시절: 이 해의 국내외 주요사건과 전체 소감 5. ‘89년의 국내외 주요 사건 ○ 천안문 사태 일당독재 속에 중국의 압축적인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며 ‘꽌시(關係)’에 의한 관료들의 부패도 같이 증대되어 빈부격차가 격화되자 대학생과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민주화와 개혁에의 열망이 80년대 후반부로 갈수록 거세어졌다. 이런 흐름 속에 1989년 4월15일 공산당내 개혁파였던 후야오방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그 추모제를 계기로 베이징 소재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본격적인 개혁운동을 시작하고 의식있는 시민들이 20만명까지 늘어나며 속속 가세하자 통치체제에 커다란 위협을 느낀 덩 샤오핑 주도의 중국공산당은 6월4일 인민해방군과 탱크부대를 동원해 500~2,000 명의 사망자를 내며 무자비하게 ..

1989년 독일유학 시잘: 4. 디플롬 졸업논문 준비와 학위 획득

4. 디플롬 졸업논문 준비와 학위 획득 헝가리 가족여행을 마친 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디플롬 학위 취득과 박사과정 진입을 결정지을 디플롬 졸업 논문을 좋은 평가 속에 써내야 하는 과제를 맞이했다. 사고신고와 함께 차를 렌트회사에 반납한 뒤 나와 와이프는 꼬박 하룻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수면을 취했다. 잠에서 깨어나자 첫 식사를 끝낸 뒤 내 방 서재에 앉아 디플롬 논문을 어떻게 작성해 낼 것인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경험상 목차구성은 대충 임시적으로 얼기설기 정해놓고 관련서적과 페이퍼들을 여러 측면에서 숙독한 뒤 적절한 꼭지들로 수정보완하며 채워나가는 작업방식을 따르는 게 보편적이었는데 이번에도 그리하려 했다. 작업은 ‘88년 가을에 친한 유학생 동료 이SH의 권고를 받아 구입한 아타리 컴퓨터의..

1989년 독일유학시절: 3-3. 헝가리 탐방후 귀행 대장정

1989년 독일유학시절: 3-3. 헝가리 탐방후 귀행 대장정 ○ 헝가리 국경도시에서 1박 후 부다페스트 입성 뷘을 벗어나 한 두어 시간을 달리니 헝가리 국경지역에 도달했다. 마침 그해 봄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동유럽국 국교개설 외교정책에 의해 헝가리가 1호국으로 한국과 수교가 되었다. 한국인 학생여권으로는 아마도 우리가 최선두 그룹으로 헝가리 땅을 밟게 될 터였다. 헝가리 국경선에 도달하니 국경검문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타 서유럽이나 동유럽 국적의 방문자들처럼 비자신청을 해야 했다. 사실 서유럽국 간의 무비자 여행을 습관처럼 하던 터라 비자를 따로 발급받고 들어가는 것이 좀 특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독일 내 헝가리 영사관이 아닌 국경선 현장에서 바로 발급받을 수 있는 게 어디냐 싶었다. 헝..

1989년독일유학시절: 3-2 뮌헨에서 오스트리아 국경 넘어 뷘에서 하루 숙박

1989년독일유학시절: 3-2 뮌헨에서 오스트리아 국경 넘어 뷘에서 하루 숙박 ○ 뮌헨에서 오스트리아 국경 넘어 뷘 들어가 하루 숙박 뮌헨을 떠나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향했다. 휴가철이라서 그런지 최단거리에 있는 국경으로 가는 국도길이 꽤 붐볐다. 국경 검문소에 다다르자 차들이 주욱 늘어서 있어 통과하는 데 1시간도 더 걸릴 것 같았다. 차 안은 덥고 갑갑해 운전대를 잡은 나와 남자 몇이서만 차내에 있고 나머지 식구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휴게소를 들리며 휴식을 취했다. 신성로마제국(962~1806) 시절 이래 유서깊은 유럽왕족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가의 근거지로써 오스트리아는 19C까지 서유럽과 중유럽에서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와 함께 최강의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 군사 및 문화 강대국이었다. 유럽사를 배..

1989년 독일유학시절: 3-1. 남독 퓌센과 뮌헨 탐방

3. 헝가리 부다페스트 탐방여행 아무튼 논문 하나 써내는 것을 남겨놓고 암울한 상황이 계속되는 중에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마침 작년처럼 유학생 지인들 중 우리 클란의 주축 인사인 김YB로부터 세 가족 정도 모여 한 닷새 예정으로 남쪽여행이나 한번 다녀오자는 제안이 왔다. 최종 목적지는 이해 4월 동구권 국가 중 한국과 처음 수교한 헝가리였다. ‘개도국’ 한 과목을 빼고는 4 과목을 죽을 쒀 여행을 편히 다녀올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 억눌린 마음을 좀 심기일전하고, YB가 그동안 성님네와는 여행도 한번 같이 못갔다고 이번에 꼭 갔으면 하는 열망을 전하는데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라는 목적지가 아주 신선하게 여겨져 ‘그래 까짓 것, 이판사판 같이 한번 갑세’하고 가는 쪽으로 맘을 다잡았다. 한 가족 더 물..

89년의 독일유학 시절: 2. 디플롬 시험 후반부 준비와 응시

2. 디플롬 시험 후반부 준비와 응시 학업을 생각하면 언제나 불편한 맘이 가시지 않았던 가운데서도 자그마한 삶 속의 기쁨을 준 은돌이의 돌잔치와 그 여운도 사라지며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망쳤던 졸업 클라주어(Klasur)의 초반부를 만회할 후반부를 준비하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비록 ‘88년 하반기에 치룬 클라주어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성적들로 도배를 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아직 12척 배가 남아있다’는 정신으로 ‘89년에는 남은 클라주어 시험과 디플롬 학위 논문을 잘 치고, 잘 작성 제출해 독일에서 예상보다 훨씬 늘어진 디플롬 과정을 ’늦었다고 여길 때가 가장 빠른 때다‘라는 독일 속담을 주문처럼 외며 얼른 해치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이제 남은 한 과목인 ‘개도국의 발전이론과 발전정책’에 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