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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이 그은 '파병' 기준선
[주장] 현명한 '파병 반대'를 위하여
26.09.18 18:01 | 최종 업데이트 26.09.18 20:13 | 김형민(sanha88)

월남 파병 이슈가 떠올랐을 때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그렇게 완강한 반대 쪽은 아니었다. 6·25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고, 우리도 국제 반공 전선에서 뭔가 활약하여 6·25 때 진 빚에 보은(報恩)해야 한다는 정서가 의외로 강력했다.
한일회담 반대 투쟁으로 계엄 사태를 맞으면서 학생운동권이 크게 위축된 때문도 있었겠지만, 한일회담 반대처럼 '월남 파병 반대'가 독립적인 대중 운동으로 크게 번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공산당'하고 싸운다는 데 대놓고 반대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였다.
그래도 정치권에서는 꽤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야당 의원 가운데도 월남 파병 찬성론자가 있었지만 대체로 반대했고 파병안 표결을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 '결사 저지'의 분위기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반대론이 좀 더 '가오'가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차지철에게 특명을 내린다. 쉽게 풀어쓰면 이랬다. "임자가 좀 반대하는 쇼 좀 하시오."
이유가 있었다. 미국과 파병 협상을 벌이려면 한국 정부로서도 카드가 필요했다. "우리도 보내고 싶지만 국내 반대가 이렇게 심해서 말입니다"라고 버텨야 미국으로부터 하나라도 더 받아낼 수 있을 것 아닌가. 자고로 핏값에 공짜가 있을 수 없고, 미국을 상대로 얻을 것은 최대한 얻어내야 했다. 그래서 박정희는 여당 안에 '반대'를 조직했다. 그런데 각하의 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차지철이 영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제대로 반대를 하려면 공부를 해야지!
차지철은 베트남의 역사와 당시 정세, 남베트남의 내부 사정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기이한 자가 발전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반대하는 척했던 사람이 정말로 파병에 회의적인 사람이 돼 버린 것이다. '잠깐, 이거 정말 파병해도 되는 건가? 남베트남 정부부터 문제가 많은 것 아닌가?'
차지철은 완강하게 파병 반대에 나섰다. 이제 슬슬 쇼를 끝내도 된다는 신호가 갔는데도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주장은 꽤 구체적이었다. 남베트남 정부가 외국군의 지원을 제대로 받아들일 태세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꼭 사람을 보내야 한다면 대한민국 정규군을 보내지 말고 원하는 사람을 모집해 의용군을 보내자는 주장도 했다.
애가 탄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찾아가 설득했다. 그런데 차지철은 이렇게 받아쳤다고 한다.
"해외 파병을 하는데 국회가 정부와 꼭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하겠소?"
이동원 장관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각하가 시켜서 시작한 반대였는데 이제 외무부 장관이 말려도 듣지 않는 진짜 반대파가 돼 버린 것이다. 대통령의 '진의'가 뚜렷이 전달된 다음에야 차지철은 반대 공세를 접었다.
"전쟁에 관여, 개입하는 파병은 없다"

나는 이 일화가 묘하게 재미있고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나 차지철이라는 사람에 대한 호오와는 별개다. 대통령이 협상용으로 '가짜 반대파'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 사람이 공부를 하다 보니 진짜 반대파가 됐다. 더구나 "국회가 정부와 꼭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하느냐"라고 외무부 장관에게 따지는 강골 반대파가 됐다. 차지철 살아생전 몇 안 되는 '별의 순간'이었으리라. 차지철은 그렇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곧 다시 감긴 하지만.
오늘날의 파병 문제는 1965년과 전혀 다른 문제다. 나 역시 미국의 압박에 떠밀려 대한민국 군대가 다른 나라의 전쟁에 뛰어드는 상황에는 결사반대한다. 6·25 때 미국이 우리를 도왔으니 이제 '보은'해야 한다는 얘기에는 콧방귀도 나오지 않는다. 월남전만 해도 이미 우리는 엄청난 피의 보은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생각을 끝낼 수는 없다. 미국과의 동맹은 엄연한 현실이고, 미국 정부가 한국에 더 많은 군사적 역할과 비용을 요구할 가능성 또한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국제정치의 한복판에서 대놓고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참할 수 없다"고 외치는 것이 외교적으로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싫든 좋든 협상해야 하고, 밀고 당겨야 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 몫을 챙겨야 한다.
오늘(18일) 이재명 대통령은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전쟁에 관여, 개입하는 파병은 없다."
동시에 우리 상선과 원유 수송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활동은 필요하며 기존 청해부대의 활동을 강화하는 방안은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는 이 구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쟁 당사자가 되어 전투병을 보내는 것과 위험해진 항로에서 우리 국민과 선박을 보호하는 것까지 몽땅 '파병'이라는 두 글자에 집어넣을 수는 없다. 다른 나라들도 자국 선박과 항로 보호를 위해 군사적 자원을 움직인다. 상황에 따라서는 실제 무력 충돌이 벌어지기도 한다(후티 반군처럼).
만약 홍해와 호르무즈 일대의 항로가 더욱 위험해지고 우리 원유 수송까지 심각한 위협을 받는 상황이 온다면 대한민국도 어디까지 그리고 무슨 일까지 해야 할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당장 기름이 들어오지 않는 상황을 생각해 보시란 말이다. 미국만 규탄하면 되는 일인가? 그렇다고 전쟁 개입의 문을 슬그머니 열자는 말은 절대 아니다. 전쟁에는 개입하지 않되 대한민국의 이익과 국민의 안전은 어떻게 지킬 것인지, 그 경계선을 더 치밀하게 따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파병 반대도 현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미국과 줄다리기를 할 때 국내의 강력한 반대 여론은 때로 협상 카드가 된다. 1965년 박정희가 차지철에게 반대 깃발을 들게 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파병 반대운동 역시 어떻게 하면 우리 정부의 협상력을 높이고, 우리 손해를 줄이고, 명분을 지키면서 실리도 챙길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이 등장한다. 무슨 사안만 터지면 기다렸다는 듯 철 지난 반미 구호를 꺼내 들고 모든 문제를 '미제 반대' 한마디로 정리해 버리는 사람들. 그런 구호가 점철되는 무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 젊은이들의 목숨이 걸린 문제이고, 한미 동맹과 동북아시아 안보가 걸린 문제이며, 에너지와 물류, 경제와 국민 안전까지 얽혀 있는 문제다. 반대하려면 오히려 더 많이 알아야 하고 더 치밀하게 따져야 한다.
1965년 박정희는 대미 협상력을 높이려고 차지철에게 여당 안에서 파병 반대 깃발을 들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차지철은 시키는 대로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베트남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대통령이 애초에 주문했던 선을 넘어섰다. 차지철도 공부하다가 깨달았다는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래도 '자주독립'하자고 하면 사실 할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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