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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화가의 뮤즈>모딜리아니와 쟌느 에뷔테른

백조히프 2009. 1. 31. 12:23

<화가의 뮤즈>모딜리아니와 쟌느 에뷔테른

  

큰 모자를 쓴 쟌느 에뷔테른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누구보다도 가난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던 파리의 모헤미안 모딜리아니. 부드러운 목을 감싸는 화려한 머플러에 밤색 코르덴 코드와 커다란 녹색 펠트 모자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귀족풍의 미남이 몽마르트 언덕 노천 카페 라 로톤드에 앉아 있다.

우수에 잠긴 눈망울은 젖어 있고, 조각같은 입술에서는 단테와 니체, 보드랭과 랭보의 시가 흘러나온다. 바로 곁에서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멋쟁이 파리지앵 여인들의 가쁜 숨결이 들려온다

 

얼마후 '야자 열매'란 별명을 가질 만큼 붉은 기가 도는 밤색 머리에 청순한 눈동자를 지닌 19세의 소녀가 그림 공부를 위해 몽파르나스에 드나들기 시작한다. 가난한 서른 세살의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미술학도이자 아카데미 콜라도시의 모델인 잔 에뷔테른을 만난 것은 1917년 7월 파리의 이방인이라는 쓸쓸함에다 이탈리아인 특유의 정열, 그리고 음주와 폐병으로 뒤범벅된 모디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쟌은 엄격한 카톨릭 신자였던 부모의 반대를 뒤로 한 채 그랑 쇼미엘 거리의 셋방에서 모디와 무작정 동거를 시작한다. 그녀가 모디의 마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이후 두 사람이 함께하는 3년 동안 온화하면서도 몽상적이고 농익은 쟌의 아름다움은 모디에게 무한한 창조의 원천이 된다. 싀웨터 차림을 하거나 밀짚 모자를 쓰거나 혹은 나체의 ' 긴 목에 슬픈 눈망울을 가진 여인상'이라는 모딜리아니의 양식은 이렇게 해서 급속도로 만개한다

 

 

쟌느 에뷔테른의 초상

 

 

윤곽이 뚜렷한 형태에 열매 모양의 눈, 좁게 세워진 코, 그리고 단순하면서도 목이 길쭉한 모딜리아니의 스타일은 사실 독자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세부묘사를 생략하는 것을 특징으로하는 루마니아 출신 현대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작업실에서 처음 접한 아프리카 조각품들이 그에게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물론 이 시기에 아프리카 미술의 영향을 받은 화가는 한 둘이 아니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전에 최고조에 달했던 미술 혁신 운동에서 ' 원시 미술'에 대한 예찬은 거의 열병처럼 퍼졌다. 당시 골동품 가게에서 아프리카 조각품을 싸게 구입할 수 있었도, 다양한 경향을 띤 젊은 미술가들이 이 영향 아래 한데 묶일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화가인 피카소가 아프리카 미술을 소화해서 표현해낸 강한 힘과 거칠게 뒤틀려진 형태가 모딜리아니에게는 이질적이었다. 그가 원시미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조형적인 완벽성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딜리아니의 그림에는 단순함과 세밀함이 세련되게 공존한다

 

유태계 명문 태생답게 고전적인 교양이 몸에 밴 모디는 앞서 말했다시피 파리에서 사귄 파블로 피카소의 재기를 높이 평가했지만 변화무쌍한 변신은 싫어했다. 그는 파리 화단의 전위적 조류인 미래파의 속도감에도 무관심했고, 너나없이 몰려다니는 어떤 사조에도 속하지 않았다. 이런 젊은 아웃사이더에게 파리의 삶은 외로움과 고단함의 연속이었고 세기말 고뇌는 하나의 특권이었다.시대를 넘어선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세상의 안목은 아직 따라가지 못했다

 

현실에 무심했던 모딜리아니는  폴 기욤, 한카 즈보로프스키 등 일부 화상에게서 간혹 그림값이라도 받은 날엔 어김없이 술집으로 직행했다. 심지어는 마약까지 하면서 안그래도 허약한 신체를 학대했다. 쟌은 이 절제 없는 카사노바 남편을 찾아 카페 라 로톤드를 수시로 들락거려야 했다.모디가 다른 여자한테서 애까지 낳았는데도 쟌은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의 일생은 귀공자풍 얼굴처럼 아름답게 흘러가지 않았다. 어릴 때 앓은 결핵은 영광을 바로 눈앞에 둔 파리의 보헤미안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1920년 1월 24일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마지막으로 ' 카라 이탈리아'(그리운 이탈리아)를 중얼거리며, 모디는 서른 여섯살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은 지 딱 여섯 시간 뒤 만삭의 잔은 첫딸 '잔'(모딜리아니가 아내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잔은 후일 커서 아버지의 전기 <모딜리아니라는 남자의 신화>를 쓴다)을 남겨둔 채 친정 집 아파트 5층에서 몸을 던진다.

 

'천국에서도 모델이 되어달라' 고 평소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남편의 말에 따라 기꺼이 몸을 내던짐으로써, 잔은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여인'이 된 것이다

카톨릭 교육을 받고 자란 여성이 아니더라도, 임신 9개월의 여자가 모성 본능을 초월해서 남편을 따라 투신 자살한 이 사건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마침내 파리의 전설이 되었다. 이들은 지금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함께 잠들어 있다

 

죽어서야 온통 꽃에 파묻힌 것처럼,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그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인정을 받는다. 생전에는 5프랑에 팔렸던 그의 드로잉이, 그가 죽은지 이틀 후 갑자기 뛰어오르더니 15년만에 50만 프랑이 된다. 식당 주인이 음식 외상값으로 받고는 마음에 안든다며 국수가락을 내던진 그림은 지금 몇 천만 불을 줘도 구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_ 정은미 지음 아주 특별한 관계 중 

네이버 황금거미 블로그에서

 

출처 : 베아트리체를 위하여
글쓴이 : borea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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