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마그리트의 그림 세계
2006. 10. 6.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익숙한 우리의 감각을 뒤집고 관습을 거부하며 실제의 세계를 시험하기 위해 한 평생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창의성을 회화속에 표명함으로서 '어떤 불가능한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려 애썼다. 그리하여 화가라는 이름을 거부하며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음악이나 글로 생각을 나누듯이 회화를 통해 사람들과 생각을 교류하려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 젊은 시절 마그리트 |
![]() 노년의 마그리트 |
그에게 회화란 현상세계를 넘어서는 '메타 리얼리티'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이자 존재의 평범함에 대항하는 영원한 반항정신의 전달체였다. 그럼에도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는 달리 비현실적이고 터무니 없는 대상 창조에 지나치게 탐닉한 적은 결코 없었다. 일상의 익숙한 오브제들에 자신의 '시적 아이디어'를 가미하여 '뭔가 익숙하지 않은 다른 것'을 만들어 내었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에서 최초로 중요한 시기였던 1920년대 후반에 그는 영감처럼 떠오르는 수많은 관념에 사로잡혀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려 빠른 속도로 작업했다. 사실상 이후 작품에서 보이는 다양한 구성 요소와 부차적 이미지에 대한 주요 주제들이 이 시기에 형상화 되었다. 이 무렵의 대다수 작품들은 일상 세계의 요소들을 기발하게 재배치하여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정신 상태를 뒤흔드는 시적 이미지로 가득 차 있었다.
1930년대는 예술가, 탐구가, 철학자로서 큰 성과를 이룬 시기였다. 그가 초기 작품에서 암시했던 여러 아이디어와 문제의식들을 구체화시켰으며, 완전한 시각적 결실을 맺는데 성공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죽음에 대한 몰두가 그의 회화세계를 지배했다. '관' 시리즈의 작품들이 이 시대의 경향을 대변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는 여러 형태와 크기의 바위에 매혹되었다. 이 시대에 유명한 <피레네 산맥의 성채>를 통해 바위의 무거움과 부동성에 대한 일반의 고정관념을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공중부양'의 개념으로 깨어버렸다. 그림 <아르곤의 전투>에서도 바위는 구름처럼 공중에 붕 뜨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지 공간속에 일시 정지하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게 했다. 이것은 400년간 지속된 뉴턴의 절대공간과 시간관을 뒤엎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과학관에 회화적으로 동조하는 격이 되었다.
1960년대 초부터 사망한 67년까지는 현실과 환상의 이분법을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유리창과 이젤의 이미지를 계속 변용 실험했다. <폭포>에서 '그림 안의 그림'이라는 주제를 통해 '현실을 보는 창문'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여 숲의 외부와 내부 세계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면서 실재像과 그림像의 통합을 모색했다.
한편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는 마그리트 자신의 특성은 말년 작품들에 자주 나타난 중절모를 쓴 남자의 익명성속에 반영되었다. 이 남자는 배출할 길 없는 재능을 타고난 듯하지만 그 어떤 형이상학적인 고독감에 둘러쌓여 있는 분위기를 풍겨 철학하는 예술가로서 마그리트가 평생동안 부대낀 고달팠던 내면을 생생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길잃은 기수(1942)
마그리트의 회화적 철학이 가장 아련하게 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 실제로 보이는 것 이상의 신비하고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 같은 시적 관념을 도입한 <길잃은 기수>의 연작 시리즈 중 최종 완결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마그리트는 시적 탐구를 위해 형태에 대한 모든 연구는 잠정적으로 유보시킨 듯하다. 달리는 말에 올라탄 기수의 격렬한 움직임은 주위에 꼼짝않고 쥐죽은 듯 서있는 나무들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며 그 어떤 시지프적 숙명감을 자아낸다.
기쁨(1926)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같은 소녀가 살아있는 새를 먹어치우는 엽기적 형상을 보여주는 이 그림에서 마그리트가 로트 레아몽이나 막스 에른스트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이유없는 잔학행위를 통한 환각적 詩情 표출 방식에 어느 정도 경도된 듯함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시대 이후 그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약간의 객기가 묻어난 작품이다. 어쩌면 이것도 불가능함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마그리트 회화정신의 정상적인 발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위기에 처한 암살자(1926~27)
이 그림은 1920년 후반 사악한 악마적 천재로서 초현실주의자들 사이에 숭상되던 범죄영웅 '팡토마'(Fantomas)의 스토리 중 하나를 회화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형사처럼 보이는 중산모를 쓴 두명의 침입자가 문밖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방안에는 끔찍한 여인의 시체가 침대위에 널부러져 있으며, 축음기 앞에 수상하게 서있는 암살 용의자같은 남자는 그의 모자, 외투, 서류 가방이 놓인 정황으로 봐서 이 방에서의 탈출을 노리는 듯하다. 방 저쪽 창문가에는 3명의 남자가 방관자처럼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회화적 이미지를 통해 긴박한 상황을 형상화하는데 성공한 마그리트식 범죄스릴러물이다.
연인(1928)
이 그림에서 엿보이는 유령같은 이미지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헝겊이나 스타킹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는 팡토마의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잠옷으로 얼굴을 감싼채 익사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라 할 수 있다.
불길한 날씨(1928)
구름을 밀쳐 내고 하늘에 떠있는 방해물들인 세가지 오브제의 부조화스러운 결합은 이 그림의 역설적 의미를 푸는 열쇠가 된다.
거대한 나날들(1928)
이 그림 역시 '팡토마'(Fantomas) 시대의 엽기적 블랙유머 분위기가 묻어나게 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강간의 폭력성을 여자가 남자로 변하는 카프카적 변신감을 통해 완화시키는 폼이 이 시대의 전도된 예술 및 도덕관을 재치속에 냉소감을 머금은 채 전하는 듯 하다..
불가능한 것의 시도(1928)
이 그림에서 우리는 2차원의 회화가 3차원의 공간적 현실을 창조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마그리트는 '불가능한 것의 시도'라는 제목을 붙인다. 예술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듯이 시도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일깨워주면서.. 이를 통해 우리가 언젠가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떨어버릴 계기를 발견하리라고 보면서.. .
예고(1930)
둥근 공을 연상시키는 선반으로 가공된 난간 또는 탁자용 다리는 마그리트 그림에서 자주 사용되는 전이된 오브제이다. <길잃은 기수>와 <비밀스러운 경기자>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숲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바람의 소리(1931)
공기 중에 떠있는 거대한 구체들은 무슨 UFO(미확인 물체) 같다. 무엇이든 간에 눈에 보이는 사물의 음향적 속성을 이용하여 시적으로 바람의 소리를 표현하려 한다.
"그림 그리는 철학자"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마그리트는 그림의 역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하는 데 있다"라고 했기에 한 그림이 주는 영속적인 영향력 같은 것에는 무관심했다. 여기에서처럼 그림을 처음 봤을 때의 이미지는 결국 나중의 느낌까지도 규제하기 때문에 첫 느낌에서 작품의 효용성은 일단 끝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1933)
실제의 대상과 그림으로 묘사된 것 사이에 존재하는 애매모호함을 '그림 안의 그림'이라는 주제를 통해 마그리트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도대체 방 안 캔버스 위에 그려진 풍경을 보는건가 창문 밖 풍경을 보는 것인가?.. 저기 서있는 나무는 우리 머리 속에 있는 관념상인가, 아니면 실제로 바깥에 존재하는 실상인가?..
가짜 거울 The False Mirror(1935)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눈의 형태를 하고 있고, 그 속의 둥그런 것은 안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 보면 하얀 구름이 떠있는 맑은 하늘이고, 동공이라 생각했던 중앙의 검은 원은 LP 레코드 판 같기도 하다. 눈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눈과는 전혀 다른 사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이것에 우리는 습관적으로 눈의 이미지를 품게 된다.
마그리트는 이런 방식을 통해 우리의 인식과 지각이 얼마나 관습화되어 있는가를 상기시킨다. 이런 효과를 위해 마그리트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거부하고, 시간도 정지된 것으로 한번 비틀어 본다. 그리하여 그림을 대상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한다.
여행자(1937)
분명한 연관관계가 없는 오브제의 결합이 구형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제시되어 여러 다양한 상상력을 유발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고정된 시간(1939)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물들 간에 그 어떤 관계가 맺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마그리트는 여기서도 기상천외하게 보여준다. 증기 기관차가 천연덕스레 여기에서 나오다니.. 관습화되어 있는 고정관념의 허를 찌르며 칙칙폭폭 밀고 들어오는 기관차가 아주 그럴 듯해 보인다. 우리의 경직된 상상력에 해방의 물꼬를 틔워주려는 듯이..
향수(1941)
이 그림은 독일이 2차대전 초 벨기에를 점령한 시기에 제작되었다. 이 나라 출신인 마그리트는 조국의 국가문양인 사자를 앞발 하나 뒤집은 채 등장시킴으로서 강점을 당한데 대한 자신의 아픔을 보여준다. 점령 전에 누렸던 자유의 향수에 젖어 다리 난간에서 명상하는 날개 달린 남자의 형상은 다름 아닌 자신을 묘사한 것이었으리라..
The Good Omens(1944)
모처럼 마그리트의 시적 환상이 대상에 대한 비틀림이 없이 표출된 작품이다. 천지가 창조되는 첫 날 혼돈과 공허한 흑암 속에서 한 순간 폭발하듯 찬란한 빛이 터지고, 그 순간 휘황찬란한 천공을 날아다니는 창조주의 메신저 가루다 새가 이런 용모는 아니었을는지?..
장롱속의 철학(1947)
감추어야 할 신체의 특징을 표현하는 주제는 이전 작품들에서도 간간이 나타난다.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발과 신의 결합이 다소 낯설기는 하나 익살스러움이 훨씬 더 느껴진다.
기억(1948)
마그리트가 이런 주제로 그린 초기 작품들 중 하나이다. 관자놀이를 다친 고전적 조각상의 머리는 조르지오 데 카리코의 <사랑의 노에>를 참조하였으며 부차적으로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도 참조하였다. 그가 참조한 이 두 작품은 초현실주의의 신비적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다
개인적 가치(1951~52)
빗, 브러시, 컵, 성냥개비의 크기 관계를 변화시켜 잠자는 침실에 배열해 놓음으로서 침실을 하늘 밖으로 트여있는 새로운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전이시키려는 크기변화 시리즈 작품 중 하나이다.
자연의 은총(1952)
새들이 비슷하면서도 약간씩 다른 나무잎으로 변형되어 보이는 가운데 바다 저멀리 떠있는 상상의 섬들은 이 변형놀이에 그 어떤 신비감을 덧붙인다. 즉 비슷한 이미지들의 미세한 변형에 의해 일상적 상투성이 제거되자 자연 속에 숨겨져 있던 무엇인가가 갑자기 보여지는 듯 하다.
골 콩드(1953)
유사(類似)의 관계는 원본과 복제 사이에 위계질서가 있으면서 그 동일성에 집착하나, 상사(相似)의 원리에서는 그 집착에서 벗어나 복제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속에 서로 간의 차이를 전개시킨다. 이 그림에서는 마그리트는 바로 그런 상사놀이의 진수를 보여준다. 즉 복제물 간에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를 만들며 동일한 이미지를 여러번 반복할 때 얻어지는 시각적 효과가 바로 그것이다.
공동의 발명(1953)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읽어온 독자들이 이렇게 상하체가 뒤바뀐 반신반어적 물체를 처음 보면 그 어떤 충격과 함께 상당히 낯설어 보일게다... 하지만 누구라도 한번 쯤 이런 존재에 대한 상상은 마그리트가 아니라도 이미 해보지 않았을까?..
헤겔의 휴일(1958)
여기서도 물을 받아들이는 물컵과 물의 스며듬을 막는 우산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오브제를 병치시켜 그 어떤 대응관계를 모색해 봄으로서 물질세계의 모든 독단적인 고정관념을 깨려 한다. 그 결과 역설의 개입을 통해 예기하지 못한 연관성을 재발견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다.
피레네 산맥의 성채 (1959)
이 작품은 우리의 오래된 고정관념을 깨어버리려는 의도 속에 바다위에 풍선처럼 띄워진 거대한 바위성채라는, 거의 생각하기 어려운 역설을 기발하게 보여주고 있다. 허공에 떠있는 바위성채는 자신은 단단하게 지상에 뿌리박고 있어 안전하다 여기는 고정관념자들에게 사실은 언제 뒤집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더없이 불안한 상황에 그들이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역발상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빛의 제국(1954)
여기에서 보이는 것은 창문 안과 가로등에서 발산하는 빛에 비춰지는 잎이 풍성한 나무와 그 사이에 놓여있는 집 건물 뿐이다. 이상한 것은 구름으로 덮힌 대낮의 푸른 하늘이다. 가로등 빛이 눈에 띄는 밤의 풍경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푸른 하늘이 천연덕스럽게 그려진 것이다.
이렇게 현실의 양극적 대상들을 '낯선 병치'를 통해 서로에게 스며들게함으로서 그 어떤 그럴 듯한 '실제적 화합물'로 재탄생시키려는 마그리트의 회화철학적 시도는 이 후 본격화된다.
유클리드의 산책(1955)
<인간의 조건>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창문 밖 정경의 일부가 동일한 광경을 묘사하는 실내 캔버스에 의해 감춰진 장면으로 다시 회귀한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요소가 첨가되어 색다른 대응관계가 성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원근법에 의해 멀어져 가는 거리의 형상을 탑의 원뿔 형태와 유사하게 대응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시각적 모호함을 최대한 이끌어내고 있다.
걸작 또는 수평선의 신비(1955)
중절모를 쓴 남자는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는 마그리트 자신의 심성적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어떤 구속도 받지 않고 떠돌며 살지만 자신의 내면적 욕구를 언제나 감추고 살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듯 하다.
아르곤의 전투(1959)
<피레네 산맥의 성채>에서처럼 여기서도 바위는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채 공중에 붕 뜨있을 수 있다. 그런데 위로 뜨는지 아래로 떨어지는지 , 아니면 공중에 일시 정지하고 있는지는 갸름하기가 어렵다. '내부'와 '외부'의 애매모호함과 마찬가지로 마그리트는 '여기'와 '저기'라는 양극성을 통한 절대적 최종 배치를 결코 확정짓지 않는다.
모험정신(1960)
여기에서도 중절모를 쓴 남자는 배출할 데 없는 재능을 타고 났지만 금욕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고독감에 둘러싸여 있는 듯하다. 그는 또 평범함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항상 그것을 전복시키려는 모험정신에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레디메이드 부케
이 그림에서 언급할 만한 부분은 등에 그려진 귀부인같은 여인과 마그리트의 내면을 반영하는 중절모 신사가 등돌린 채 붙어 있는 의미를 찾아보는 것일게다. 등 뒤에 상류층에 속하는 여인이 그려져 있는 것은 남자의 세속적 성공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은 성공한 자에게 의례 따르는 기성품 같은 것으로서 예술적 창작과는 거리가 멀다.
이 그림에서 마그리트는 숲을 예술적 진리를 찾아야 하는 본질적 대상으로 보고, 세속적 상징인 레디 메이드화 된 귀부인과 부케에는 등 돌릴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내면적 다짐을 한번 보여주는 듯 하다.
우편엽서(1960)
화가는 눈 앞에 떠있는 거대한 사과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저 산들 너머 존재할 법한 <메타 리얼리티>의 세계에 무한히 자유로운 상상력의 보따리를 사과에 비추어 전달시켜 보겠다는 염원을 갈구하면서.. 어쩐지 화가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상상력이 넘쳐 슬픈 존재처럼..
폭포(1961)
여기에서 그림 속 그림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나뭇잎의 존재는 공간 규칙이 서로 다르다. 그런데 이렇게 상이한 존재양식을 고정관념을 깨는 상상력 속에 밀접하게 연결함으로서 이제까지 몰랐던 그 어떤 통합의 가능성이 슬쩍 나타난다. 결국 마그리트가 자신의 회화세계에서 줄곧 추구했던 비현실적 현실이 <메타 리얼리티> 속에서 가능함을 예시한 좋은 사례들 중 하나가 이 작품이다.
거대한 테이블(1962)
대상의 크기를 바꾸고 낯선 장소에 병치시킴으로서 사람들에게 고정관념을 벗어나게 하는 '생각의 불꽃'을 당기게 해준다. 떠있는 초생달을 보면 밤인 것도 같고, 뭉개구름의 질감으로는 낮인 듯도 하고..
아른하임의 영역(1962)
이 작품에 대해 마그리트 자신은 같은 제목의 이야기를 쓴 에드가 알란 포우가 무척 좋아할 '예술가적 상상력을 현실화한 것'이라 평했다. 웅장한 산은 자신을 두 날개를 펼친 새의 형태 속에 자신을 나타내어 보이지만 앞에 놓여있는 창문 난간 위 새둥지와 그 속 알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다시 거대한 새처럼 여겨진다. 여기서도 마그리트는 우리에게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환상의 창문을 제공하고 있다.
대가족(1963)
저 커다란 새처럼 보이는 작품의 제목이 "대가족"이라니... 어쩌면 마그리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양 보여주고 관람자들이 당혹해하는 것을 즐기려 했는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의식과 지식에 대한 그의 이율배반과 역설은 많은 논란과 비판을 불러일으켰지만, 우리에게 이런 모호한 그림을 제시함으로서 저 새의 날개처럼 상상력의 나래를 한껏 펼치게 한 것도 사실이다.
무한한 감사(1963)
화가의 분신인 중절모의 뒷모습 신사 둘이 세속적인 삶의 세계에서 드디어 저 멀리 모든 것이 허용되는 상상력의 세계로 승천해 떠나는 모습이다. 마그리트가 평생을 염원해 온 세계로 마침내 들어서는데 대한 감회가 이 그림의 타이틀인 감사의 감정으로 구현되고 있다.
백지 위임장 The Blank Check(1965)
말이 분할된 부분들이 모호하게 보여 나무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 갸름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마그리트가 즐겨 다루었던 '현실과 환상간의 대립'에 빠져든다. 마그리트는 객관적 세계인 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가를 묻는 듯하다..
좋은 관계(1967)
세 개의 전이된 요소들은 하늘에 감추어진 미묘한 우주의 자취인 듯 하다. 이들은 우화적 의미 속에 새롭게 융합되기 위해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얼굴과 맞지 않는 기구라는 사물은 안구라는 새로운 대상으로 융해되는데, 이는 어떤 사물을 다른 것으로 대치시키는 마그리트의 창작 기법의 하나이다.
살아있는 예술(1967)
이 그림에서 인간의 육체가 의식의 감옥을 상징하는 신사복을 빠져나와 머리속에 뭉쳐진 채 공중에서 부유하는 형상이 그려지고 있다. 즉 이렇게 부유하는 해탈적 상태가 살아 있는 예술의 진정한 형태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마지막 절규(1967)
낯선 방법으로 연관되는 대상을 중복시킴으로서 감추어진 존재의 비밀을 느긋하게 드러내 보이는 대가의 농익은 솜씨가 물씬 풍긴다.
아름다운 현실(1967)
여기에서 사과와 테이블의 관계는 상대적 위치, 바다 배경, 공중에 떠있는 듯한 설정으로 인해 완전히 도치되어 나타난다. 먹는 과일로서의 사과에 대한 일반적 관념은 사라지고, 낯선 도치속에 전혀 새로운 이미지가 창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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