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버스 타는' 애들 탓에 스트레스받는다는 최상위권 아이들
[아이들은 나의 스승] 무한경쟁에 찌든 아이들에게 공정은 차별의 다른 이름
25.06.24 11:37 | 최종 업데이트 25.06.24 11:37 | 서부원(ernesto)

▲서울 한 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해당 기사와 관련 없습니다) ⓒ 사진공동취재단
"모둠활동 말고, 그냥 강의식으로 수업해 주세요."
몇몇 아이들이 교무실까지 찾아와 통사정했다. 각 학급에서 1~2등을 다투는 최상위권 아이들이다. 이른바 '버스 타는' 아이로 인해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소연했다. '버스를 탄다'는 건, 노력하지 않고 점수만 챙긴다는, 말하자면 '무임승차'를 뜻하는 요즘 아이들의 은어다.
몇 해 전부터 모둠활동 방식으로 수업 형태를 바꿨다. 한 시간은 기존의 강의식으로 수업하고, 다음 시간은 이전에 강의한 내용을 확인하는 모둠별 퀴즈 방식으로 진행한다. 기실 예습과 복습의 의미도 있지만, 수업 시간에 졸거나 딴청 피우는 경우를 줄이려는 고육지책이다.
과거 TV의 '장학 퀴즈'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한 건데, 모두가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며 재미있어한다. 목표한 바대로, 모둠별 퀴즈 시간만큼은 졸거나 딴청 피우는 아이가 없다. 꼴찌를 한 모둠에는 매시간 벌칙이 있어 긴장감에 심장이 쫄깃해진다고들 한다. 교과 성적을 기준으로 모둠장을 정하고 모둠을 편성하지만, 일정 부분 운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모둠마다 열심히 예습하고 참여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민폐'를 끼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벌칙은 모둠 내에 예외가 없다.
각자 예습하더라도 함께 토의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어서, 모둠 내에 차등을 두기가 어렵다. 학업 역량이 뛰어난 모둠장이 더 많은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벌칙을 부과하지 않는 건 곤란하다. 자칫 모둠활동이 유명무실할 수 있어서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모둠활동을 계속해 가는 과정에서 '버스 타는' 아이들이 줄어드는 경향도 보인다. 스스로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경우, 어떻게든 예습하고 최선을 다하게 된다. 물론, 워낙 학업 역량이 떨어져 차마 나무라기 뭣한 아이도 있다.
성적에 반영되는 수행평가만큼은 안된다는 최상위권 아이들
모둠활동에 대한 몇몇 최상위권 아이들의 반발은 수행평가 과정에서 터져 나왔다. 수업 시간 모둠별 퀴즈와 벌칙까지는 감당하겠는데, 성적에 반영되는 수행평가에서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는 거였다. 수행평가는 모둠이 아닌 개별 평가로 하는 게 공정하다고 주장했다.
모든 평가는 '계량화'를 전제로 한다. 수치로 환산해 등급을 내고 서열을 매겨야 한다는 뜻이다. 굳이 지필평가와 수행평가의 차이가 있다면, 일반 교과의 수행평가는 절대평가 방식으로 채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필평가와 합산하면 결국엔 서열이 매겨질 테지만 말이다.
애초 수행평가 문항의 조건만 만족하면 감점당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제시한다. 대신 모둠 내에서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고 토론한 뒤 합의된 내용을 정리해서 제출하면 된다. 개별적 기여도를 고려해 차등 적용하는 건 모둠활동의 취지 자체를 훼손할 우려가 크다.
이를테면, 장구한 중국 역사에서 어느 왕조를 전성기라고 생각하는지, 또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지 서술하라는 식이다. 중국사에 무지한 아이라도 각자의 생각 정도는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다양한 의견을 종합하는 능력이 반드시 성적과 비례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 모둠에 같은 점수를 주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과거의 가슴 아팠던 경험 때문이다. 모둠활동으로 수행평가를 했던 초기엔 모둠 내에서 개별적 기여도에 따라 점수에 차등을 두었다. 일말의 의심 없이 그게 가장 공정한 방식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당혹스러운 상황이 연출됐다. 모둠활동의 기여도를 판단하는 기준 설정부터 혼선이 빚어졌다. 누가 발언을 몇 차례 했는지, 누구의 의견이 최종 수용됐는지, 기록은 누가 담당했는지 등을 계량화해 순서를 정하는 건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번은 모둠활동 과정을 지켜본 뒤 나름 순위를 매겼는데, 예상치 못한 사달이 벌어졌다. 한 모둠장이 왜 자신이 모둠 내에서 두 번째냐고 반발한 것이다. 당시 이유를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는데, 평가에서 교사의 주관적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뼈저리게 깨달은 계기였다.
이후 기여도를 모둠 내에서 정하라고 했더니, 순위가 지필평가 성적순 그대로였다. 모둠장은 모둠 내 최고 점수를 부여했고, 지필평가에서 꼴찌는 모둠활동에서도 꼴찌였다. 문제는 모둠마다 순위에 예외가 없었다는 것과 모둠별 꼴찌 누구 하나 토를 달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일수록 성적에 민감했고, 뒤처지는 아이일수록 자기 성적에 둔감했다. 0.1점의 차이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니 성적이 좋은 것일 테다. 반대로, 하위권의 경우 자기가 몇 점을 받았는지 관심조차 없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성적과 자존감은 그렇듯 정비례한다.
일견 타당한 듯 보이는 모둠 내에서 기여도에 따라 차등을 두는 평가 방식이 반교육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애초 모둠활동에 서열을 매기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차라리 성취 기준에 부합하고 모둠 내 대화와 토론을 통해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좋은 평가 문항을 개발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이든 저든 '버스 타는' 아이들을 완전히 없앨 순 없다. 모둠활동을 통한 평가의 불가피한 부작용이다. 대신 반영 비율의 조정을 통해 평가의 등급 간 격차를 줄여 모둠장 아이들의 불만을 줄이는 한편, 수업 시간에 모둠활동의 교육적 가치와 필요성에 대해 수시로 설파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모둠활동 방식의 수행평가에 대해 아이들은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친구들과 토론하며 의견을 모아가는 게 재밌다고 말한다. 몇몇을 제외하곤 최상위권 아이들조차 어차피 지필평가에서 판가름이 난다며 '버스 타는' 아이들에 대한 노여움을 거두고 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흔히 학교의 교육활동은 수업과 평가로 나뉜다고들 한다. 수업을 통해 성취 기준에 따른 학습 목표를 달성하고, 평가를 통해 개별적인 성취 수준을 점검하는 게 교육활동의 메커니즘이다. 곧, 교육이란 교육과정에 따른 수업과 평가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평가는 서열을 매기는 것이고, 수업은 계량화한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한 과정쯤으로 인식하고 있다. 평가 결과에 따라 수업의 질이 결정되다 보니, 평가에 수업을 비롯한 모든 교육활동이 종속되는 상황이 됐다. 평가의 정점에 수능이 자리한다.
지필평가든 수행평가든, 줄 세우기식 평가가 존속되는 한 교육의 파행은 불가피하다. 성적에 대한 불만으로 친구들과의 모둠활동조차 거부하는 아이가 올곧은 시민으로 성장하리라 기대한 건 연목구어다. 무한경쟁을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아이들에게 공정이란 차별의 다른 이름이다.
이게 어디 공교육만의 문제이랴마는, 지금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절실한 가치는, 단언컨대 공정이 아니라 연대다. 사회경제적으로 극단적 불평등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공정은 허상일 뿐이다. 공정의 가치는 되레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해 왔다.
길지 않은 학창 시절, 또래 친구들과 몸을 부대끼고 마음을 나누는 경험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고작 4명인 모둠 안에서조차 순위를 매기려는 그들의 삭막한 정서가 안타깝다. 점수와 등급에 매몰되어 학교를 전쟁터로 여기는 아이들이 이끌어갈 대한민국의 미래가 심히 두렵다.
모둠활동을 폐지해 달라는 최상위권 아이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왜 다른 친구들을 위해 금쪽같은 자기 시간을 빼앗겨야 하는지를 물어올 땐 딱히 대꾸할 말이 마땅찮다. 대답 대신 메모지에 이 경구를 적어 건네곤 하는데, 그들에게 '이심전심'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건 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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