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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미국 결정론’에서 벗어나자

백조히프 2025. 12. 25.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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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제는 ‘미국 결정론’에서 벗어나자

 

 

[정의길의 세계, 그리고]

 
  • 수정 2025-12-24 18:49
  • 등록 2025-12-2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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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일(현지시각) 워싱턴의 미국평화연구소에서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 및 펠릭스 치세케디 콩고민주공화국(DRC) 대통령과의 평화 협정 서명식에 참석하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한국의 진보와 보수 모두에겐 공통된 사고가 있다. 한국의 사회·경제·정치, 한반도의 운명은 미국에 의해 결정 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에 ‘부처님의 손바닥에 있는 손오공’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는 ‘죽으나 사나 미국에 붙어야 한다’는 것이고, 진보는 ‘자나 깨나 미국으로부터 홀로서기 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쨌든 모두가 ‘미국 결정론’이다.

 

12·3 불법 계엄 뒤에 중국 간첩들이 선관위 연수원에서 부정선거를 하다 미군에 체포돼 오키나와로 압송됐다거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항공모함을 보내 윤석열 전 대통령을 구하러 온다거나 하는 주장이 고위 공직을 했다는 인사들이나 집권당 일각에서도 거론됐다. 한국 내의 미국 결정론이 정신병 수준임을 보여준다.

 

한국 현대사를 볼 때 미국의 존재는 절대적이기는 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한반도의 남쪽에 진주했기에 대한민국이 성립됐다. 미국의 철수와 개입 때문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휴전했다. 냉전 시기 미국의 봉쇄와 동맹 부흥 정책이 한국 경제개발의 조건이 됐다. 미국이 없었다면, 분명 지금의 한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지금의 한국을 가능케 한 미국이 주도한 국제질서가 저물고 있다. 2기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패권국가’로서의 역할을 방기한다. 패권국가란 자신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서 의무를 행해야 한다. 자국 시장을 개방하고, 동맹들을 보호하는 등의 역할이다. 트럼프의 미국은 오히려 동맹국에 방위비를 더 부담하라고 강요하는 것을 넘어서 관세를 무기로 거액의 투자를 강요하는 등 현금 뜯어내기까지 자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아메리카 대륙으로 퇴각하려 한다. 지난 4일 발표된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NSS)은 서반구를 미국 대외전략 대상의 1순위로 규정하는 ‘트럼프의 먼로주의 계승’을 천명했다. 1기 때 국가안보전략에서는 중국과 러시아를 기존 국제질서를 바꾸려는 ‘수정주의 세력’이라며, 인도·태평양이 그들을 막기 위한 미국의 사활적인 이익지대라고 규정했다. 이번엔 중·러에 대한 그런 언급은 사라졌다.

 

트럼프의 미국은 러시아의 몫을 인정하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을 유럽에 강요한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사태’ 발언을 놓고 중-일이 충돌하는데, 트럼프는 일본에 중국을 자극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반면, 자신들은 군사력을 동원해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을 전복하려 하는 등 중남미 국가들의 목덜미를 쥐어 잡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은 전세계를 아우르는 패권국가가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을 세력권으로 하는 열강으로 자리매김하려 한다. 다른 지역에선 다른 열강의 세력권을 인정하겠다고 시사했다. 중·러가 주장하는 ‘다극화’ 세계로 갈지, 세력권을 분할하는 19세기 때의 제국주의 열강 질서로 갈지 오리무중이다. 우크라이나·대만·베네수엘라 주변을 보면, 미·중·러가 이제 세력권 짬짜미를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확실한 게 있다. 국제정치의 고상한 용어로 말하면, 미국이 이제 ‘역외 균형 전략’을 쓸 수밖에 없다. 미국이 직접 개입하지 않고, 동맹을 내세워 각 지역의 세력 균형을 꾀하는 전략이다. 트럼프의 미국은 퇴각하면서 동맹에게 뜯어내기를 하며 앞세우고 있다. 역설적으로 동맹에 대한 의존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는 한·일을 향한 거액 투자 강요, 한국에 배를 만들어달라는 ‘마스가’(MASGA) 프로그램, 한국에 대한 핵추진 잠수함 건조 허용 등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성장은 미국이 주도한 국제질서라는 조건뿐만 아니라 주체적 의지와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경이 된 국제질서가 증발하면, 주체적 의지와 역량이 더욱 중요해진다. 거액 투자, 마스가, 핵잠 건조 사업의 결과는 한국이 어떻게 대처하냐에 따라 달라진다. 거액 투자가 국익에 안 맞으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집행을 트럼프 퇴임 뒤까지 미뤄야 하고, 그럴 수 있다. 핵잠 카드도 손에 쥐고 필요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정부 내에는 여전히 미국에 먼저 보고하고, 눈도장을 받아 승승장구하려는 관료들이 있다. 북핵 문제 등을 먼저 미국과 협의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자주파-동맹파 논쟁이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하지만, 죽으나 사나 미국과 같이 가야 한다는 보수 우파의 미국 결정론은 시효가 오래전에 만료됐다. 미국과의 모든 거래·협상은 미국 종속을 심화시키는 것이라는 진보의 미국 결정론도 마찬가지이다.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세력 변이를 볼 때 진보도 운명론적 미국 결정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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