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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막동어멈, 여기 '공주와 사는 여자'도 있습니다
13살 터울로 낳은 늦둥이 딸... 어른들 틈에서 혼자 크느라 힘들었겠구나
26.04.04 19:35 | 최종 업데이트 26.04.04 19:36 | 정현주(joo520808)

"저도 그 안에 있습니까?"
"부디 그대 손으로 강을 건너게 해 달라."
스피드퀴즈도 아닌데 벌써 "정답! 왕과 사는 남자!(아래 왕사남)"를 외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딩동댕~. 요즘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영화 <왕사남>은 개봉 50일째(3월 25일 기준), 누적 관객 1500만 명을 돌파하며 역대 박스오피스 3위로 올라섰다.
단체줄넘기에 들어갈 타이밍을 놓친 사람처럼 볼까 말까를 반복하다가 결국, 지난 주말 <왕사남> 열차에 늦게 탑승했다. 웃다가 울다가 두 시간을 보내고 나오는 길, 사람들은 물이 오른 유해진 촌장을 이야기하고, 단종 눈빛을 장착한 박지훈을 이야기한다. 남편은 유해진을 티 나게 칭찬하더니 입 모양을 세모로 만들며 묻는다.
"어땠어? 당신은 당연히 박지훈이지? 성시경과 박보검은 이제 어쩌냐."
"땡! 나는 이 영화에 공감되는 사람이 따로 있어. 바로 막동어멈!"
막동어멈은 단종의 삼시세끼를 책임지는 흑수저 요리사다. 매일 왕의 밥상을 차리고, 오늘은 얼마나 드셨는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피는 사람. 수라가 조금만 남아도 표정이 굳고, 한 그릇을 다 비운 날에는 세상을 다 얻은 얼굴로 웃던 사람. 그 장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저거 난데.'

마흔에 임신을 하고, 큰아이와 열세 살 차이 늦둥이를 키우며 나는 막동어멈이 되었다. 반찬은 입맛에 맞는지, 오늘 기분은 괜찮은지 눈치를 살피게 된다. '늦게 낳은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외치면서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괜시리 미안한 자세가 된다.
그녀는 공주님이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처음 듣는 단어였다. 둘째를 낳기 전, 삼남매 맏딸인 나는 아들 하나였고, 여동생과 남동생도 아들만 둘인 집이었다. 친정엄마 입에서 처음으로 "우리 공주님"이라는 말이 나왔다. 혀가 김밥 말듯 굴러가는 소리였다. 시댁 쪽도 비슷했다. 조카들이 있긴 하지만 모두 외국에 살아 대부분 사진으로만 본다. 그런 집안에 실물 공주님이 나타났다. 양가 사람들은 우리 마을에 왕이 온 것처럼 흥분했다.
남자 아이만 있는 집안의 첫 딸
너무 예뻤다.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픈지, 눈을 크게 뜨고 실험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오랜만에 울려 퍼지는 갓난아기 울음소리를 들으려고 친정엄마는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고, 시아버지는 전화를 걸어 겨우 재운 아기를 깨워 울려달라고 무서운 주문을 하기도 했다.
늦둥이 베네핏도 있었다. 큰아이를 키울 때는 시간도 돈도 늘 부족했다. 방송작가로 밤샘과 늦퇴가 많았고 친정엄마 손을 빌리는 날이 많았다. 죄책감은 기본값이었다. 그런데 늦둥이 상황은 달랐다. 재택도 가능했고, 지갑도 두툼해졌다.
분유도 제일 좋은 걸로 먹였고, 면역력이 중요하다며 골드키위를 박스 단위로 주문해 삼시세끼 디저트로 먹였다. 모든 이유식에는 쌀보다 소고기가 먼저 들어가 앉아 있었고, 아기가 밀어내면 임영웅이 '사랑은 늘 도망가'를 부르며 울었고,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면 데이식스가 'HAPPY'를 부르며 응원단이 된 것처럼 춤을 췄다. 나는 막동엄마였고, 늦둥이를 키운다는 건 왕을 모시는 일과도 비슷했다.
시계 바늘이 패스트로 돌아 2026년 3월에 멈춘다. 늦둥이 딸은 어느새 만 열여덟, 재수생이 되었다. 4인용 식탁에서 당당하게 수라상을 받던 모습은 사라졌고, 대입 실패 이후로 식탁 참석률은 제로에 가까워졌다. 컨디션도 자존감도 바닥에 붙어 있다.
"요즘 재수는 기본이고 삼수는 선택이라잖아. 딸, 당당하게 하자. 오케이?"
"재수를 어떻게 당당하게 해. 그저께 아빠 퇴근할 때도 인사했는데 시큰둥하게 받더라고. 내가 대학 붙었으면 웃으면서 인사받았을 텐데."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손발을 흔들며 오버를 떨었지만 그럴수록 아이의 어깨는 더 작아졌다. 며칠 뒤, 남편의 야근으로 두 자리가 공석인 4인용 식탁에 아들과 둘이 앉아 밥을 넘기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딸 이야기가 나왔고,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들이 준비해 둔 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면 쟤도 불쌍해."
"뭐가 불쌍해. 어렸을 때부터 최고로, 공주님으로 얼마나 귀하게 키웠는데!"
"쟤는 태어났을 때부터 주변에 다 어른들뿐이잖아. 그것도 꼰대 어른들. 내가 한두 살 터울의 오빠였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한테 혼나고 울고 힘든 모습도 보여주고. 같이 커가는 사람이 있었으면 덜 힘들었을 것 같아. 특히 사춘기 때."
늦둥이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었다. 나는 늦둥이는 더 많이 누리고 더 귀하게 자란 '복 받은 아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쩌면 늦둥이에게도, 늦둥이만의 외로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들 말을 듣고 십여 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본다. 딸이 다섯 살쯤 되었을 때였다. 고등학생이던 아들은 밤늦게 들어왔고, 안 자고 기다리던 꼬마 여동생은 달려 나가 매달린다. 지친 오빠는 영혼 없이 쓱 안아주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과외 선생님이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간다. 자신에게만 닫힌 문 앞에서 여동생은 대성통곡을 한다. "나도 오빠랑 같이 공부할래요. 저도 같이 시켜주세요.... 떤땡님." 그렇게 공부를 좋아하던 아이가, 공부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 사이 오빠는 유학을 다녀왔고, 군대를 다녀왔고, 사회 초년생이 되었다.
딸의 시선으로 따라가 본다. 오빠는 늦잠을 자도, 늦게 들어와도 혼나지 않는다. 아빠와 엄마는 밤이 되면 TV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모두들 고민 없어 보이고 편안해 보인다. 이 집에서 시험을 걱정하고, 결과에 따라 혼나고, 눈치를 보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어쩌면 나는 평화로운 집안에 늘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벌칙 같은 일상을 사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금쪽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귀하게 키운 늦둥이였지만, 어른들 틈에서 혼자 자란 아이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무언가 놓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꺼이 공주와 사는 사람이 되련다
그러다 며칠 전 오랜만에 딸과 둘만의 외출을 했다. 재수 종합학원 상담을 예약해 둔 날이었다. 불합격 후유증으로 거의 방콕하던 아이가 오랜만에 지정석에 앉는다. 괜히 내가 더 말이 많아졌다. 엄마 때는 지금 가는 학원이 원탑이었다느니, 여기 다니면 잘 될 거라며 학원 홍보실장처럼 떠들었다. 상담은 잘 되었다. 돌아오는 길, 딸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엄마, 배고파. 집에 반찬 뭐 있어?"
"뭐가 있는 게 중요해?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바로 다 만들어 줄텡께."
순간, 막동어멈이 빙의된 것처럼 어설픈 사투리가 튀어나왔고, 딸이 피식 웃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가 애정하는 자작한 곱창볶음을 만들고, 두부를 부치며 냉동실을 뒤졌다. 피자보다 찌개를 좋아하는 입맛도 어른들 틈에서 자라서 그런가 싶다가 '지금 뭐가 중헌디' 하고 고개를 저었다. 딸은 밥 한 공기를 매콤한 볶음에 쓱싹쓱싹 비워 냈다. 막동어멈의 입이 귀에 걸쳐져 저절로 브이라인 리프팅이 되었다.

윗집 노산 동생과 점심 약속이 있다. 마흔한 살에 낳은 첫째가 중학생이 되며 사춘기가 시작됐다며 걱정을 늘어놓을 것이다. 나는 어른들 틈에서 자란 우리 늦둥이 이야기를 해줄 생각이다. 늦게 낳은 아이는 귀하게 크지만, 어른들 틈에서 혼자 크기도 한다는 걸. 그렇다고 너무 겁내지는 말라고, 새살 돋는 연고를 대화 사이사이에 발라가면서.
노산의 비애일까, 늦둥이에도 양면이 있다. 다소 놓친 그 마음을 기억하며 나는 오늘도 막동어멈 역에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다. 외롭지 않은지 곁을 맴돌며 밥을 차리고, 괜시리 말을 걸어 보고, 기회가 될 때마다 말해줄 것이다. 너는 공주고, 나는 막동어멈이라고. 늦둥이와 함께 사는 나는, 오늘도 기꺼이 <공주와 사는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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