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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단식하는 광대를 구경했을까

백조히프 2026. 1. 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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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람들은 왜 단식하는 광대를 구경했을까

 

 

[주짓떼라의 유튜브 생존기] 더이상 쇼에 곁눈질 하지 않는 이유

 

26.01.03 11:03 | 최종 업데이트 26.01.03 11:03 | 양민영(soyongdori)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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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단식 광대> ⓒ 문학동네


프란츠 카프카가 쓴 <단식 광대>라는 소설이 있다. 한 광대가 40일간 단식을 공연하면서 구경꾼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야기다. 그러나 단식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점점 흥미를 잃고 광대를 잊어버린다. 무리하게 단식하던 광대는 결국 굶어 죽는다.

사람들은 왜 단식하는 광대를 구경했을까? 단식은 영적인 행위이자 금욕적인 이상의 실천이다. 교리에 따른 단식이나 투쟁으로서의 단식 등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와 동시에 지금은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양의 음식을 먹어치우는 행위가 인기인 시대이기도 하다. 단식과 반대로 먹는 건 가장 사적이고 세속적인 행위다. 애초에 구경꾼에겐 이상인지 세속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걸까? 극단에 가까운 볼거리와 자극만 있다면 말이다.

먹방이 등장하기 전에는 기술적으로, 맛있게 먹는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남이 먹는 장면을 구경하지도 않았다. 계급을 반영하는 호화로운 식탁은 수백 년 전에도 존재했지만 먹는 행위 자체에는 특별히 '잘 먹는다'랄 게 없었다. 오히려 '부자든 가난하든 하루에 세 끼 먹는 건 똑같다'라고 했으니 먹는 건 비교적 평등한 행위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먹는 행위에도 우열이 생겼다. 모델이 입으면 평범한 옷도 특별해 보이듯 구경하는 사람까지 식욕이 동할 정도로 맛있게, 또는 탈인간급(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인터넷 유행어)으로 많이 먹는 이들이 등장했다. 이들의 영상은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코앞에 있는 것 같은 구도, 저작 운동에 맞춰 귀에 꽂히는 음향으로 무장한다.

먹방에서는 음식을 먹는 모양새가 가장 중요하지만 삼키는 속도나 젓가락질 등의 디테일도 중요하다. 여기에 '맛잘알'(맛을 잘 아는 사람의 줄임말)로서 음식을 조합하는 센스도 필요하다. 같은 음식이라도 어떻게 조합해서 먹느냐에 따라 콘텐츠의 흥행이 좌우되고 그 조합이 정식 상품으로 출시되기도 한다.

은밀한 길티 플레저

비건인 나에게 먹방 유튜버란 세속의 바다를 대신 헤엄쳐주는 존재다. 내가 먹지 않는 종류의 음식을 쌓아놓고 입안 가득 밀어 넣는 모습을 가끔 구경하곤 했다. 구경하는 음식은 항상 치킨이었다. 고기가 그립지 않으냐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건 사실이다. 누구보다 고기를 좋아했지만 끊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최후까지 그리웠던 게 바로 치킨이다. 다시 말하지만 닭고기가 아니다. 내 뇌는 오직 치킨 앞에서만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한다.

치킨은 음식이 아니라 도파민 그 자체다. 치킨과 관련된 모든 것이 쉽고 빠르다. 심지어 주문하고 배달되는 과정마저도 자극적이다. 터치 몇 번이면 눈앞에 치킨이 나타나 모종의 효능감을 선사한다. 맛을 느끼는 속도도 빠르다. 첫입에 아니, 냄새부터 강하게 코를 자극한다. 입에 넣으면 여러 가지 맛이 미뢰를 공격하다시피 하면서 금세 피로하다. '맛있었나?'하고 되물으면 약간 얼떨떨하긴 하지만 맛있었던 것 같다. 자극에 몰두하는 동안 모든 걸 잊었으니까.

반대로 비건 음식에 적응하던 몇 달 동안 나는 이렇게 맛없는 음식을 평생 먹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원래는 동물의 지방, 내장, 뼈에서나 얻을 수 있는 기름지고 응축되고 짙은 맛을 좋아했다). 그래도 채식이 불러온 긍정적인 변화를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맛있다고 느끼는 기준선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다. 냉장고 안에는 수수한 재료들이 가득했다. 마치 색조 화장품처럼 입맛을 당기던 강렬한 소스들이 사라졌고 그 안에서 자극적인 맛이라고 해봐야 씨 겨자, 토마토소스, 콩으로 만든 비건 마요네즈 정도가 전부다.

점점 입에 대지 않던 음식을 일부러 찾아 먹었다. 예를 들면 거의 평생 콩과 견과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콩을 먹지 않는 비건은 생존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거부감이 덜한 병아리콩과 두유를 시작으로 콩과 친해졌다. 지금은 콩과 견과류를 종류별 사놓고 두부조림, 콩국수, 수프를 만들어 먹고 소문난 식당에 찾아가기도 한다.

그런데도 한편으론 영양이 부족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몸소 겪었던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에도 채식의 온전함과 내 몸을 믿지 못했다. '그래도 고기를 먹어야지'라는 잔소리를 들은 탓일까? 확실히 잔소리를 많이 듣긴 했지만 문제의 핵심은 외부의 잡음이 아니라 내면의 불확실함이었다. 나는 여전히 자극을 원했고 그럴 때마다 무언가 비어 있는 느낌, 내가 아직 찾지 못한 채식의 진정한 가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날에 과식 쇼를 구경했다. 그러나 곧 대리 만족은커녕 불안만 더 부추긴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어느 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종일 먹는다는 한 먹방 유튜버의 영상에서 이런 댓글을 봤다. '이 유튜버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이상의 집약'이라는 것이다. 소화 능력이 남달라서 무한대로 먹을 수 있고 그런데도 살찌지 않고 또 먹으면서도 돈을 버니까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거다. 댓글에는 압도적으로 많은 '좋아요'가 달려 있었다.

수백만 구독자를 거느린 먹방 유튜버가 일면 부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자극은 어디까지나 오락이고 은밀한 길티 플레저가 아니었나? 눈치 보지 않고 자극에 몰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기 파괴로 이어지지 않고 돈벌이가 된다면 24시간을 자극으로 채울 수도 있다는 선언은 새삼스럽게 충격이었다. 그리고 먹는 행위가 왜 이렇게까지 자극과 끈끈해진 걸까?

삶의 느리고 불규칙한 호흡에 맞춰

마트 냉장 코너의 다양한 채소 ⓒ 연합=OGQ


시간이 흘러 비건이 된 지 2년이 넘었고 나에겐 맛없는 음식 중에서도 덜 맛없는 음식, 제법 맛있는 음식 같은 우열이 생겼다.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싶지만 맛없는 중에 맛있는 음식이 있다. 그리고 그 음식들의 공통점은 어떻게든 시간에 얽혀 있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면 비건이 되기 전엔 무엇이 제철 음식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설프게나마 시장에서 채소, 과일을 사고 비건 요리책을 보면서 처음으로 제철 음식을 찾아 먹었다. 또 채식의 맛을 끌어올리는 부재료는 모두 발효된 것들이었다. 발효는 시간의 산물이고 시간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식에 자연스러운 맛을 더하는 건 시간이다. 채소를 다듬어 오랫동안 말리면 그 과정에서 응축된 맛은 생채소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이런 음식은 만들기 어렵고 노동력이 많이 들고 무엇보다 오래 걸리기 때문에 자극적인 음식의 대항마로서 고려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일어난 많은 문제가 쉽고 빠른 것을 좋아하는 데서 비롯됐다. 쉽고 빠른 음식은 자극적이고 과식을 부른다. 과체중이나 고혈압 등의 질병을 얻으면 감량과 치료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따로 투입한다. 따지고 보면 어느 쪽이 더 비효율적인가? 극단적으로 효율을 추구한 결과는 막대한 비효율이다.

단식 광대가 굶어 죽었듯 먹방도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소진될지 모른다. 둘은 사람의 몸을 극단으로 끌고 가는 쇼라는 점에서 닮았다. 쇼는 쉽고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좋아한다. 반대로 느린 것, 비효율적인 것, 어려운 것을 기피한다.

먹는 것, 사는 것은 하루이틀에 결판나지 않는다. 대책 없이 길고 지루해서 쇼라는 틀에 욱여넣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삶의 느리고 불규칙한 호흡에 맞춰 지금까지와는 정반대로 가볼 법도 하다. 천천히, 느리게, 비효율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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