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헝가리 부다페스트 탐방여행
아무튼 논문 하나 써내는 것을 남겨놓고 암울한 상황이 계속되는 중에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마침 작년처럼 유학생 지인들 중 우리 클란의 주축 인사인 김YB로부터 세 가족 정도 모여 한 닷새 예정으로 남쪽여행이나 한번 다녀오자는 제안이 왔다. 최종 목적지는 이해 4월 동구권 국가 중 한국과 처음 수교한 헝가리였다.
‘개도국’ 한 과목을 빼고는 4 과목을 죽을 쒀 여행을 편히 다녀올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 억눌린 마음을 좀 심기일전하고, YB가 그동안 성님네와는 여행도 한번 같이 못갔다고 이번에 꼭 갔으면 하는 열망을 전하는데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라는 목적지가 아주 신선하게 여겨져 ‘그래 까짓 것, 이판사판 같이 한번 갑세’하고 가는 쪽으로 맘을 다잡았다.
한 가족 더 물색해보니 우리 기숙사에 작년에 들어온 젊은 표HB씨와 오SH씨 부부가 떠올려졌다. S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온 표씨와 같은 학교 전산학과를 마친 오씨는 아직 아이도 없는, 말 그대로 신혼 분위기가 여전한 수재 재원 부부였다. 나보다 7~8세 연하인 표씨는 사람이 수재 티를 별로 내지 않고 서글서글해 유학생 사회에서 평판이 썩 괜찮았다. 부인이자 당시 한국에서 매스컴을 타기 시작한 오세훈 변호사(후일 서울시장)의 여동생이었던 오씨 역시 똑 부러진 성격에 자기 전문성에 대한 당찬 기운이 장난이 아니어서 유학연수 잠깐 다니러 온 커리어녀 같았다.
이번에는 차 두대로 가지 않고 12인승 봉고차를 하나 렌트해 가기로 했다. 좋아하는 VW봉고가 없어 돈 조금 더 주고 차체가 약간 더 큰 벤츠봉고를 빌렸다. 다둥이 아들을 가진 YB집이 총 5인, 우리가 4인, 표부부 2인 해서 자리 하나가 더 남았다. 싱글을 물색하니 나, 그리고 YB와도 그 무렵 크게 친해진 송IH씨가 생각났다.
S대 조선공학과를 졸업한 뒤 스웨덴을 거쳐 함부르크대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하러 온 대전출신 송씨는 당시 가족들을 한국에 남겨놓은 채 혼자서 먼저 온 처지였다. 느릿한 말씨의 충청인이었지만 공학도답지 않게 한국사회상 전반에 걸쳐 호기심이 많은데다 인성까지 겸손하고 관대해 나와는 금방 친해진 사이였다.
이곳에 오자말자 사람들과 같이 남부독일->오스트리아 뷘->헝가리 부다페스트 여행 한번 가자했더니 두말 없이(속으로는 쌍수를 들고) 오케이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또 한번 장거리 여행단을 꾸려 북독에서 남독을 지나 오스트리아를 관통한 뒤 한국과 막 국교수립한 동유럽국 헝가리를 찍고 돌아오는 투어를 ‘89년 8월 어느 날 시작했다.
○ 함부르크에서 뮌헨까지 가는 길
렌트한 벤츠사의 누런색 12인승 미니버스는 동급의 VW버스보다 차체가 약간 큰데다 매끈하지 않고 투박한 느낌이 들었지만 실내공간은 성인 7명(부부 3쌍, 싱글 1), 아이 5명(김재민부부 2, YB부부 3)이 들어앉아도 그리 좁아 보이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한국처럼 승용차 면허증이 1종과 2종의 구분없이 필기시험만 합격하면 공통된 독일 승용차(PKW) 면허증이 발급되기에 한국에서 보통 2종을 가졌던 나도 독일면허증으로는 12인승까지의 미니버스를 몰 수 있었다.
당시 독일면허증을 갖고 독일 땅에서 차몰던 사람은 나와 YB 밖에 없었기에 우리 둘이서 교대로 이 차를 몰기로 했다. (기사가 한 사람 더 확보되었더라면 딱이었겠다 싶었지만..) 떠나는 날 아침에 렌트사에 들려 약정했던 렌트비와 보험료를 치루고 내가 사는 기숙사 케머러우퍼로 차를 갖고 오게 되었다. 작은 승용차만 몰던 내게는 운전석에 올라탔을 때 운전 조망이 높아지고 넓어져 좀 낯설었으나, 한 5분 쯤 몰다보니 금방 승용차처럼 익숙해졌다.
캐머러우퍼에서 우리 식구와 표-오 부부를 태운 뒤 YB 식구와 송씨를 마저 태우기 위해 이들이 사는 욀뮬렌벡 기숙사로 향했다. 도착하니 평소 껄렁거림을 캐릭터로 하는 YB가 검은 선그라스와 연회색 벙거지 모자를 쓴 채 ‘아이고, 김재민씨 오십니까? 우리 쪽도 떠날 채비가 다 됐심다’ 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우리 일행과도 인사를 나눈 채 그의 와이프 조씨와 꼬맹이 아들 셋, 그리고 뉴페이스 송씨와 함께 모두 차를 한 바퀴 둘러본 뒤 안에 올라탔다.
내가 먼저 모는 차속에서 우리 모두는 모처럼 같이 하는 여행에 설레임과 기대감을 한껏 내뿜으며 북독지역 아우토반 1번을 타고 하노버까지 논스톱으로 내려갔다. 하노버를 지나서는 괴팅엔->뷔르츠부르크->퓌센의 경로로 하행했다. 퓌센을 목적지로 정한 것은 디즈니 영화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등에서 자주 나오는 그림 같은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100킬로씩 달리고 나면 나와 YB가 서로 운전대를 바꾸어 잡았다, 휴게소들에서는 아이들 먹을 간식거리를 사고, 어른들은 커피나 차를 주문해 마셨다. 점심과 저녁 끼니를 위해서는 고기와 소세지를 굽어먹을 수 있는 장소에서 준비해간 숯과 그릴 기구들을 펼쳐놓고 이것들을 구운 뒤 밥과 김치 및 다른 밑반찬들과 함께 일회용 접시에 담아 식사들을 했다. 여행에서의 별미였다.
첫 날의 두 번째 식사인 저녁까지 마치자 날이 벌써 어둑해졌다. 일단 퓌센에서 1박을 하고 내일 아침에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방문한 뒤 두 시간 정도 둘러보고는 뮌헨으로 들어가 시청광장 쪽을 살펴본 뒤에 이 도시를 떠나기로 했다. 오후에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린츠를 경유해 부지런히 달려 뷘(Wien)까지 도착해 거기서 둘째 날 숙박을 행할 작정이었다.
우리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 열심히 달려 날도 어둑해질 무렵 퓌센 지역에 도달했다. 운전대는 YB가 잡고 있었고 갈대밭이 있는 지방도의 어느 한적한 구간에 들어왔을 때 송IH가 1차 목적지에 무사히 들어선 가벼운 흥분 속에 잠깐 일어나서 “승객 여러분, 긴 승차 속에 얼마나 피곤하십니까? 그럼에도 우리를 여기까지 안전하게 모셔다준 YB 기장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감사의 박수 한번 쳐줍시다!” 하는 멘트를 날렸다.
모두 기분들이 같이 들떠 ‘짝짝짝!’ 박수를 쳐주자 우리의 YB가 ‘캄사하무니다!’하고 뒤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 앞에 급커브 길이 나타나 미처 핸들을 통제할 틈도 없이 미니버스는 ‘우당탕탕!’ 하고 갈대밭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 3, 4초간 내 머리 속에는 ‘아, 이번 여행길은 이렇게 복싱경기에서처럼 초반에 불의의 일격을 맞고 허무한 KO패로 끝나는 것인가’ 하는 순간 생각흐름이 스쳐갔다. 천만다행으로 밭두렁에 꽂히는 사고는 없이 한 15미터 여 밭 안으로 맹렬히 돌진하다 천천히 서행 정거했다.
어른들은 모두 안전벨트를 착용했고 아이들도 운좋게 엄마들 품에 꽉 안겨있었는지 그 제동거리에서는 어른들과 함께 큰 탈없이 무사했다. 참으로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내려서 버스를 보니 차체 앞부분이 갈대줄기들에 부딪혀 약간 우그러졌고, 앞 유리창 한면에 금이 갔으며 사이드 미러 한쪽이 날아갔을 뿐 대체적으로 멀쩡했다. 모두 불행 중 천운이고, 우리 여행 운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는데 서로 자축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그래도 망연자실하고 있는 YB에게 다가가 ‘당신이 그 와중에도 놀래서 급브레이크를 콱 밟지 않고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나무나 돌부리 같은 큰 장애물들을 피해 능숙하게 운전한 공이 크다’하고 어깨를 토닥거려주니 그제서야 대형사고가 나지 않았음에 크게 안도하며 서서히 평상심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일행이 버스에 다시 오르고, 내가 운전대를 잡아 시동을 거니 큰 문제 없이 부르릉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때마침 비도 투득투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박할 숙소를 구하기 위해 퓌센 읍내로 들어갔다. 거기 현지 청소년 같은 친구들이 우리 버스 범퍼와 사이드 미러 근처에 엉겨붙은 갈대잎과 잔줄기들을 보자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박장대소들을 해대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미끄려졌던 그 급커브 길에서 이런 사고를 당하는 외지인 케이스가 우리만 처음이 아닌 상례적인 모양이었다. 문디 자슥들, 그런다고 낄낄거리다니.. 인성교육을 제대로 못받은 동네 띨띨이들이 틀림없어 보였다. 하여튼 우리는 불이 켜진 펍 같은 곳에서 일행이 유숙할 수 있는 장소가 없는가 하고 몇 군데에 들렸지만 한결같이 지금 시간에 이 인원을 수용할 곳은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할 수 없이 연전에 로마방문 때처럼 첫날 밤은 차내 노숙을 하기로 결정했다. 어느 농가 옆 허름한 창고 같은 곳을 발견해 그 옆에 차를 세우고 모두 앉은 곳을 중심으로 적당한 공간을 만들어 자는둥 마는둥하며 눈붙이는 시도들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우리집 아이 둘과 YB의 아들 3형제 중 맞이는 피곤함에 쉽게 골아 떨어졌으나, 갓난 아기와 두서너살 짜리 아이는 쉽게 잠이 오지 않는 듯 한참을 칭얼거렸다. 남자들은 바깥으로 나와 흐르는 비 속에 담배 한 대씩 피우며 내일 아침의 여정을 논의했다. 첫 밤을 또 노숙하다니 하며 헛웃음을 흘리면서..
보채는 아이들 울음소리도 그쳐지고 차내에 고요함이 흐르자 모두 몇 시간이나마 눈을 붙이고 나니 아침이 밝아왔다. 우리는 다시 차를 몰고 차정비소를 찾아다녔다. 수킬로를 돌아다니다 발견한 정비소에서 날아간 사이드 미러와 크게 금간 앞 유리창을 갈아끼우고는 간단한 차량정비도 받았다. 다행히도 차체 내부에 큰 이상은 없었다.
차량정비를 마치고는 어느 휴게소 공터에서 갖고 온 밥솥에서 밥을 해 가져온 밑반찬과 함께 아침을 해 먹었다. 휴게소에서는 아그들 우유와 브로첸 등을 간식거리와 함께 사서 먹였다. 두 시간 정도의 식사겸 휴식시간을 가지고는 첫 목적지인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있는 퓌센으로 다시 향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1868년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2세 왕(19세에 즉위)이 소시적부터 예술은 좋아하지만 즉위 후 오스트리아 편을 든 보오전쟁에서의 패배(1870)로 정무활동에는 환멸을 느끼는 가운데 군사적 목적과는 상관없이 성장기부터의 성쌓기 취향을 충족시키려 자신의 영내 산속에 3개의 성을 동시에 건축하던 것 중 하나였다.
괴짜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이 숭배했던 리햐르트 바그너의 중세 게르만 영웅 설화담을 다룬 가극‘ 로엔그린’에 심취하여 이 스토리에 나오는 풍의 성을 3개나 짓게 했는데 그 중 자신이 소년기에 살았던 노란 성 호엔슈방가우 성 근처에 로마네스크와 바로크 양식을 혼합해 짓게 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에 가장 큰 애착을 보였었다.
이 성의 이름은 새로운(Neu) 백조(Schwan)의 돌성(Steinschloss)이라는 뜻을 품었는데 예술적 스승이라 떠받들었던 정치망명자 바그너를 모셔와 그의 자문을 받으며 이 성을 1868년에 착공해 승전국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로부터 회유책으로 지원받은 바이에른 왕실재원을 이어 착공한 다른 두 성(린더호프 성, 노이에스 헤런킴제 성)과 함께 그 축성비용으로 몽땅 투입해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원성을 불러일으키며 결국 또라이 정신이상자의 불명예로 퇴위까지 당했다.
결국 노이슈반타인 성의 완공에만 28년이 걸렸는데 루트비히 2세 왕이 퇴위된 2년 후인 1886년에야 비로소 완공되었다.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탓인지 2차대전 중에는 독일군이 자기네는 이 성에 방어병력 투입을 하지 않았으니 포격이나 공중폭격은 하지 말라고 연합군에 서면으로 요청하면서 그 존재감이 타국에도 높아졌다.
디즈니가 자신들의 만화영화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등에 나오는 성의 형상과 이미지를 이 성에서 따왔다는 사실이 공표되면서, 이 성은 옆에 있는 호엔슈방가우 성과 한 묶음으로 지금은 전세계 관광객이 매년 130만 명이나 방문하는 바이에른 주의 황금거위 같은 관광수입원이 되었다, 축성기간 당대에는 그리도 원성을 받던 곳이..
우리는 거의 준거지 꼴로 이 성 근처에 도착하여 때마침 도착한 대규모 일본 관광단 틈에 끼어 왕궁 입구까지 도착하여 이 성을 배경으로 한 인증샷을 많이도 찍었다. 사실 이 때만 해도 이 성의 역사적 유래를 제대로 모른 채 뮌헨 근교에 가면 놓치지 말고 한번 쯤 둘러봐야 할 명소라는 정보 밖에 입력되지 않았다.
따라서 공적이 아닌 사적가문 소유라서 성내 관람장소와 관람시간도 제한된다 해 꽤 비싼 단체입장료를 내면서까지 성내 진입은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인근 전망이 다 나온다는 마리엔 다리로 언덕 타고 한참 올라가 멀리 보이는 호엔슈방가우 성과 그 옆에 펼쳐진 알프 호수를 조망해 본 것에 만족하고 이곳 방문을 종료했다.
이 성의 관광을 마치고는 독일 제3의 도시라는 뮌헨을 한 나절 불러보고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려 했다. 뮌헨 중심부에 들어서니 시청사가 있는 마리엔 광장과 소피아 성당 같은 게 눈에 보이기에 이곳에 들러 구경도 하고 인증 사진들이나 좀 찍자고 해서 차를 근처 어디에 세웠다.
뮌헨은 당시나 지금이나 인구 140여만을 오르내리며 전독일에서 베를린, 함부르크에 이어 제3의 인구를 자랑하는 대도시지만 시 전체가 아기자기한 장난감 마을 같다해서 지금도 타 유럽인들로부터 ‘밀리오넨 도르프’(백만인이 사는 마을)라 불린다. 1,180년대부터 신성로마제국의 중심부로써, 1,506년 이후는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로써 독일 르네상스의 핵심도시였다. 1,700년대부터는 바로크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한 40년 간 받았다.
남독일에서 문화와 예술의 허브 역할을 한 도시였으나 같은 바이에른 주에 속해있는 인구 51만 여명의 뉘른베르크와 함께 1차대전 후 독일 나치스의 본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바이에른주는 평균 주민소득이 독일에서 제일 높은 곳이 되어있었고, 지멘스·BMW·MAN·Linde 같은 유명 제조기업 뿐만 아니라 독일 최대의 보험사 Allianz의 본사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한국인들에게는 ‘옥토버 맥주축제장’과 ‘뮌헨 올림픽’(1972) 및 ‘월드컵 축구개최지’(1974)로도 유명세를 얻었다.
하지만 당시 북독 함부르크에서 살아왔던 우리에게 뮌헨은 한국유학생들에게 체류허가를 얻는데 최악의 깐깐함을 보여준다고 원성이 자자했으며, 일반주민들이 사용하는 독일어도 제주도 사투리 같은 ‘저지(低地) 독일어’를 쓰는 지방색이 짙은 곳이라 해서 웬지 외지인에 배타적일 것 같은 선입견을 품게 했다.
더군다나 당시 분데스 리가에서 함부르크 HSV와 바이에르 뮌헨 팀은 항상 우승을 다투는 숙적같은 분위기도 있어서 더 그랬다. 아무튼 이곳은 크게 선망했던 곳이 아니었기에 지나가는 길에 눈에 띄는 곳만 내려 인증샷을 찍을 뿐 따로 유명지를 찾아 방문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려서 사진 찍은 마리엔 광장과 시청사 건물은 첫 눈에도 잘 가꾸어진 중세 분위기의 아우라가 감도는 문화유적지 다왔다. 우리는 언젠가 이곳과 뮌헨 지역 전체를 기회되면 한번 더 찬찬히 살펴보겠다고 각자 느슨하게 다짐하며 해떨어지기 전에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백조의 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89년 독일유학시절: 3-3. 헝가리 탐방후 귀행 대장정 (0) | 2021.08.26 |
---|---|
1989년독일유학시절: 3-2 뮌헨에서 오스트리아 국경 넘어 뷘에서 하루 숙박 (0) | 2021.08.19 |
89년의 독일유학 시절: 2. 디플롬 시험 후반부 준비와 응시 (0) | 2021.08.10 |
1989년의 독일유학 시절: ① 둘째 아들 돌잔치 치루기 (0) | 2021.08.08 |
부산에 온 길영공을 만나다 (0) | 2021.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