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89년의 독일유학 시절: 2. 디플롬 시험 후반부 준비와 응시

백조히프 2021. 8. 10. 19:20

<1989년의 독일유학 시절>

 

2. 디플롬 시험 후반부 준비와 응시

 

학업을 생각하면 언제나 불편한 맘이 가시지 않았던 가운데서도 자그마한 삶 속의 기쁨을 준 은돌이의 돌잔치와 그 여운도 사라지며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망쳤던 졸업 클라주어(Klasur)의 초반부를 만회할 후반부를 준비하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비록 ‘88년 하반기에 치룬 클라주어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성적들로 도배를 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아직 12척 배가 남아있다는 정신으로 ‘89년에는 남은 클라주어 시험과 디플롬 학위 논문을 잘 치고, 잘 작성 제출해 독일에서 예상보다 훨씬 늘어진 디플롬 과정을 늦었다고 여길 때가 가장 빠른 때다라는 독일 속담을 주문처럼 외며 얼른 해치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이제 남은 한 과목인 개도국의 발전이론과 발전정책에 매진해 괜찮은 성적으로 합격하고, 디플롬 아르바이트만 테마 잘 잡아 써내면 근 7년이 걸린 함부르크 대학에서의 경영학(BWL,베붸엘) 디플롬 학위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한국인 동료 유학생들처럼 이 학위가 주목표가 아닌, 박사과정에 들어가 박사쯩을 건지는 게 최종목표임을 당연히 인지하였기에 이 무렵 그 길로까지 가야한다는 압박감이 초조함 속에서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지금까지 겪어온 내 인생의 고비 때처럼 또 어찌 되겠지!’하는 운세빨을 믿고, ‘돌파해 보리라!’ 하는 맘을 다잡았다.

 

개도국 발전이론과 발전정책과목에서 다루는 내용

 

이 과목은 원래 국제경제학의 후반부에 있는 파트 내용들인데 난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 Entwicklungsland) 또는 중진국에 대한 경제발전 이론과 성장정책에 대한 테마들을 다루는 이 분야가 연세대 대학원 시절부터 항상 익사이팅하고 흥미진진했다.

 

독일대학에서 박사과정에 들어가 전공할 국제경영학(International Business) 분야에서 논문테마 하나 건지려면 국제경제학, 국제마케팅, 그리고 이 개도국 발전이론 및 정책론과목에 대한 해박한 배경지식 축적이 필수였다.

 

개도국의 경제발전에는 균형발전전략과 불균형발전전략이 있는데 전자는 자국 내수시장 규모가 크고 자원이 풍부하지만, 과거 식민지 시절 종주국과 선진국 기업들에 의해 수탈 당한 경험이 큰 나라들, 즉 인도, 브라질, 멕시코, 터키 같은 나라들이 6, 70년대에 채택한 성장전략이었는데 80년대 들어와 보니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제조업 각 분야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며 자국의 국민경제를 탄탄하게 성장시키겠다는 균형발전전략에서는 해외시장과 관련되는 수출촉진보다는 여러 업종에서 수입대체를 할 수 있는 데 더 큰 방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해당 업종에 똘똘한 자국기업 하나 정도를 내수시장 보호 하에 잘 키워 수입을 줄이는 무역수지 흑자나 적자폭 완화를 꾀하려 했다.

 

하지만 중남미 국가들은 식민지 시절 종주국에 의한 1차산업 의존도가 특별히 높은 산업구조를 고착시켰기에 2차산업인 제조업 기반이 현저하게 열악했다. 그리하여 제조업 기반이 튼튼한 선진국과 1차산업 기반의 중남미 개도국이 교역을 한다면 시간이 갈수록 교역조건이 개도국에 나빠져 이들의 국부가 교역상대국인 선진국에 부당하게 약탈당한다는 소위 종속이론에 의해 중남미국들은 자유교역을 포기하고 보호주의 교역과 수입대체정책을 추종했다. 그 결과 자국시장에만 안주하고 해외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술경쟁력의 모멘텀을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인도 역시 ‘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네루총리 때부터 외국자본 도입을 가급적 배제하는 사회주의 경제 색채가 짙은 자국기업 중심적 균형발전 전략을 추진했지만 시장경쟁이 미약하고 그로 인한 기술혁신 마인드가 자국 간판 기업들에 장착되지 않아 90년대 초까지 성장세가 저성장의 답보상태에 빠졌다.

 

인도와는 달리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터키와 중남미국들에서도 내수시장의 과보호 속에 한때 잘나가던 국영독점이거나 과점적 기업들이 시간이 지나며 부패한 정치세력과의 유착결탁으로 국내에서의 독과점적 이익만 향유하며 기술혁신에는 소홀하다보니 해외시장에서의 경쟁력은 거의 없게 되었다.

 

반면 한국, 타이완, 홍콩, 싱가폴 등 아시아의 네 나라(4 Dragons) 기업들은 자국시장이 적다보니 70년대부터 해외시장을 겨냥한 수출 드라이브정책을 썼고, 성장발전전략으로도 수출경쟁력이 있는 소수의 전략적 업종에만 집중해 국가자원을 투입하는 불균형발전전략을 채택했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이 나라들은 사실 국가와 기업들의 명운을 해외시장에서 수출촉진책으로써만 걸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한국과 타이완은 섬유와 전자산업에 특화하여 국가와 기업들이 밀접한 협조 속에 해외시장을 공략하고 내수시장을 보호하는 일본식 국가자본주의발전 모델을 받아들여 80년대 접어들어서는 이들 분야의 중저가품 세계수출시장을 집중 공략하여 국부를 착실하게 쌓았다. 타이완이 다수의 중소기업들을 주축으로 해당 해외시장을 뚫었다면, 한국은 ‘7515개의 종합무역상사를 선정한 뒤 이들 대기업 간의 경쟁을 다시 유도하며 해외시장 개척을 독려하는 전략을 택했다.

 

수많은 중소수출기업들이 전자와 섬유부문에 주로 몰려들어 경쟁하며 국가경쟁력을 높이던 타이완과는 달리, 한국정부는 이들 대기업들을 통해 전자 외에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등 중화학 공업육성에도 힘을 쏟았다. 한국기업들은 여전히 일본이나 구미계 기업들과 각 분야에서 현격한 격차를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가며 기술 라이센싱의 학습효과와 후발자의 이익을 향유하며 발빠른 추격으로 그 격차를 좁혀갔다.

 

80년대 말이 되자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이나 비즈니스위크지, 그리고 독일의 경제전문지에서도 아시아의 작은 호랑이들이자 제조업 수출장인들인 한국과 타이완 수출기업들에 대한 경쟁력 분석과 함께, 중소기업 중심의 타이완과 대기업이 견인하는 한국의 성장전략에 대한 성패를 예견하는 기사들이 자주 등장했다. 특히 한국의 삼성, 럭키금성(LG), 현대, 대우 그룹의 세계시장에서 전방위적인 공격적 확장세에 주목했다. 경제 학술지에도 90년대부터는 이 테마가 계속 맥을 이어가며 본격적으로 다루어졌다.

 

동 과목에서 마침내 성적 획득

 

이런 국제경제학계의 흐름 속에 이 개도국 분야 과목을 클라주어에서 선택해 시험 준비하는 나도 눈이 반짝반짝해지며 호기심에 차서 관련 문헌이나 아티클들을 읽는 족족 그 내용들이 바로 이해가 되었다. 장차 국제경영쪽 박사과정에서 들어간다면 논문테마를 여기서 찾을거라 다짐하면서 많은 배경지식 기반을 쌓겠다는 욕심으로 차곡차곡 머리 속에 저장했다.

 

과목을 대하는데 이처럼 애착이 있으니까 이 과목을 담당하는 빈센트 팀머만 교수의 강의 내용도 쏙쏙 잘 들어오고, 강의계획서에서 소개해준 책들도 열심히 찾아 읽게 되었다.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인간미 있는 독일군 장교처럼도 생긴 교수는 이 과목을 클라주어에서 치겠다는 의사를 밝힌 나와의 면담 만남에서도 한국과 한국경제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보여주었다. 시험준비를 위해 자신이 지도한 박사 한명을 도우미 컨설턴트로 소개해 주었다.

 

사람 좋게 생긴 40대 초반의 이 독일 아재는 매주 내게 관련 테마 1개씩을 던져주며 답안을 작성하게 했다. 나는 이 테마에 대해 실제 클라주어에서 답을 쓴다는 생각으로 기승전결적 소제목을 붙여가며 관련 텍스트들을 찾아 읽고 정성껏 작성히였다. 제출한 답안에 대해 표현상 틀린 문장들을 고쳐주고, 어느 부분에서는 어떤 점이 좋고, 다른 어디에서는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좀 모호하다는 등 자신의 소감을 분명하게 붉은 펜으로 기술하며 전해주었다. 참 독일인다왔다.

 

그 때만 해도 PC나 타이프가 아닌 노트에 만년필로 직접 작성해 가져갔는데 한번은 헤어킴, 당신은 손필체가 신기할 정도로 단정하다(ordentlich)’는 뜻밖의 칭찬도 해주었다. 사실 적지않은 독일인들의 필체가 알아보기 힘든 악필성의 개발새발체인 것을 감안하면 인쇄체 소문자 알파벳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내 한석봉 필체에 감동먹었을 만하다고도 여겨졌다. 우리 아시아인들은 당신네 유럽인들보다 평균적으로 손감각이 좀 더 예민해 필체들도 알아보기 쉽게 따박따박 잘쓰는 모양이다 하고 슬쩍 눙쳤다.

 

이런 식으로 서로의 호감과 덕담을 교환하며 이 과목의 시험준비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막판에 접어들자 이 아재가 작년 기출문제들이 담긴 문제지를 전해주었다. 5문항 정도가 나왔는데 모두 본 과외를 통해 다뤘던 문제들이었다. 옳다구나, 이 문제들에 대한 예상답안을 만들어 머리 속에 잘 정리해 가면 이 과목은 모처럼 고득점을 할 수 있는 내 성적 리스트의 간판이 되겠구나 하고 쾌재를 불렀다.

 

결국 이 과목 시험은 작년과 동일한 문제가 3개나 제출되었고, 나머지 하나도 준비연습에서 다뤄봤던 테마였기에 모처럼 시험에서 행복감을 맘껏 누리며 뿌듯하게 4시간을 꽉채운 채 원도 한도 없이 써내었다. 나중에 평가가 나온 것을 보니 독일에서 나로서는 처음으로 A+1.4(sehr gut) 평점으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다른 과목들에서 C+~D+로 깔아 총평균 평점은 3점대 후반이라 기쁨도 잠깐 뿐이었다. 이 성적으로 독일 대학들에서 독토아 파터(박사논문 지도교수)를 만나기란 사실 하늘에 별따기였다.

 

이제 남은 하나인 디플롬 아르바이트(석사졸업 논문)를 하나 그럴 듯하게 작성해 1~2점대 평점을 받아야만 그래도 한번 독토아 파터를 찾아 말이라도 붙여볼 수 있을거라는 가느다란 희망을 품었다. 다시 한번 아쉬운 점은 함부르크 대학에서는 디플롬 졸업이 코앞인데도 여전히 국제경영학 과목이 개설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80년대 초보다는 독일대학들에서 이 과목 전공교수들이 조금씩이나마 등장하기 시작했기에 이런 교수들을 알아놓았다가 논문 써내고 디플롬 코스를 졸업하면 이들 교수들이 있는 만하임이나 도르트문트, 아우구스부르크, 베를린 자유대 등에 접촉을 시도해 볼 요량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논문은 그나마 국제경영학 파트에 근접하고, 함부르크대에 개설되어 있는 국제금융학이나 마케팅 파트에서 테마 하나 정해 쓰려고 마음 먹었다. 그중에서도 먼저 국제금융학의 헬무트 리퍼트 교수를 면담요청 후 만나 이 과목에서 한국기업의 외환리스크 관리 방안이라는 테마로 디플롬 논문을 쓰고 싶다는 내 의사를 꺼내었다.

 

그랬더니 한국의 외환시장이 과연 선진권 시장만큼 개방적이고 탈규제적인가 하고 묻기에 아직 그 수준까지는 되지 않고 규제도 여전히 상당하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한국기업들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외환시장조차 규모가 작고 규제적인 상황에서 당신의 테마를 순조롭게 지도할 자신이 도저히 없다며 내 제안을 거부했다. 또 한번 일이 꼬임을 느끼고 논문테마 선택지를 하는 수 없이 마케팅 쪽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늦게 마케팅 분야에서 디플롬 논문을 써야했기에 이미 정해진 조건들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다행히도 악셀 벤쉬라는 마케팅을 가르키는 교수에게 당신에게서 이번 학기 디플롬 아르바이트 쓸 수 있느냐고 문의했더니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교수에게 면담 신청을 하고 찾아갔더니 이미 다른 학생들에게 다 나가고 남은 마지막 테마를 가져가 3달 안에 한 60~80 페이지 분량의 아르바이트를 작성해 제출하라고 했다. 테마 제목은 광고효과에 관한 의사소통 정책상 문제로서의 짜증 및 반발효과’(Irritations- und Reaktanzeffekte als Probleme der Kommunikationspolitik) 였다. 처음보는 용어들로 점철된 테마였기에 좀 얼떨떨 했지만 나 자신을 믿고 한번 물건을 만들어보자고 의욕을 불태웠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