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1989년독일유학시절: 3-2 뮌헨에서 오스트리아 국경 넘어 뷘에서 하루 숙박

백조히프 2021. 8. 19. 12:37

1989년독일유학시절: 3-2 뮌헨에서 오스트리아 국경 넘어 뷘에서 하루 숙박

 

○ 뮌헨에서 오스트리아 국경 넘어 뷘 들어가 하루 숙박

 

뮌헨을 떠나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향했다. 휴가철이라서 그런지 최단거리에 있는 국경으로 가는 국도길이 꽤 붐볐다. 국경 검문소에 다다르자 차들이 주욱 늘어서 있어 통과하는 데 1시간도 더 걸릴 것 같았다. 차 안은 덥고 갑갑해 운전대를 잡은 나와 남자 몇이서만 차내에 있고 나머지 식구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휴게소를 들리며 휴식을 취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영역>

 

신성로마제국(962~1806) 시절 이래 유서깊은 유럽왕족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가의 근거지로써 오스트리아는 19C까지 서유럽과 중유럽에서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와 함께 최강의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 군사 및 문화 강대국이었다. 유럽사를 배울 때 등장한 각 방면의 유명인사들을 배출한 나라였다. 모차르트, 슈베르트, 말러, 클림트, 쉴레, 프로이트, 뷔트겐슈타인, 하이예크, 슘페터, 멘델, 슈레딩어, 곰브리치, 포퍼, 히틀러, 포르쉐 등등 부지기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역>

 

11C 십자군 공격로의 기점이었으며 17C 오스만 터키의 침공을 막아낸 기독교 문화의 수호국이었고, 18C 이후 중유럽의 맹주국으로 부상하여 나폴레옹군에 연패를 당할 때까지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에는 유럽의 구질서를 회복하는 외교회담을 주관하며 다시 중심국의 위치를 되찾았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구축하여 왕년의 영화를 재현하는 듯 했다.

 

<보오전쟁(1866)과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쾨니히그라츠 전투>

 

그러나 19C부터 제국내부에서 곪기 시작한 다민족 국가의 취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정치사회적으로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 속에 1860년 북독일의 새로운 군사강국 프로이센과 독일어권의 패권을 놓고 붙은 ‘보오전쟁’에서 전격적으로 패하자 강대국의 면모를 완전히 상실하고 제국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1차대전(1914~1918)에서는 독일 편에 붙었다 연합국에 패하자 남아있던 영토도 국경을 맞댄 인근국들에 할양해 주며 인구 900만에 한국 영토보다도 작은 소국의 운명을 감수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골치 아팠던 민족문제가 영토 할양으로 해결되자 유능하고 생산성 높은 게르만계 주민들끼리 뭉쳐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한 성취를 이루며 강소국의 위상을 또 다시 구축했다.

 

<2차대전 후 줄어든 오스트리아 전도>

 

그런데 이 나라 출신의 히틀러가 독일로 건너가 나치스 집권을 한 뒤 1938년 오스트리아를 독일 제3제국에 합병하는 군사력 과시에 또 한번 희생양이 되었다. 2차대전에서 속절없이 나치스 독일의 일원이 되었던 이 나라는 패전 이후 연합국의 분리지배를 받기도 했으나 타고난 외교역량으로 ‘영세중립국’을 선언한 뒤 냉전시대 이후 구소련과 동유럽 공산진영과의 군사적 대치의 완충국과 교역 거점국으로써 스스로의 역할을 솜씨있게 창출해 내었다.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을 당시에는 이 나라에 대한 이만한 역사적 배경지식이 축적되어 있지 않고, 문화예술계, 인문과 자연과학계, 경제학계에 유명인물들을 배출한 문화대국의 전통과 중립국의 지정학적 이점을 보유한 ‘저지(저지) 독일어’ 사용국이라는 정보만 갖고 있었다. 짐작대로 막상 영내로 진입해 보니 남부 독일에서 보던 풍경과 인프라에서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익숙했다. 국가간이 아닌 지역간 이동 같았다.

 

<우리가 화살표 방향으로 주행한 뮌헨-뷘 구간>

 

우리는 국영 너머 환전소에서 독일 마르크를 이 나라 쉴링 화폐로 좀 바꾼 뒤 린츠를 향해 한참을 달렸다. 국도와 아아토반을 번갈아 올라타며 린츠 근교에 닿아 어느 식당에서 뷘 슈니첼과 부어스트 등으로 저녁을 한 뒤 너무 늦기 전에 뷘 입성을 해야 했기에 린츠 시내 구경은 포기하고 뷘을 향해 야간 주행을 재촉했다.

 

사실 나중에 알고 보니 린츠는 오스트리아 제 2의 도시였으며, 유명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와 작곡가 안톤 브루커너의 출생지이자 히틀러가 이 근교인 브라우나우-암인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뷘 도달이 급했기에 지나간 이정표만 찍고 밤중에 이곳을 스쳐갈 수 밖에 없었다.

 

한 두어 시간 더 달리니 드디어 뷘 표지판이 나타났다. 아, 드디어 말로만 듣던 뷘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구나 싶어 힘을 더 내어 뷘행 고속도로를 밟아 나갔다. 린츠를 스쳐 동쪽으로 한 140여 킬로 떨어진 뷘 외곽에는 중간 휴게소에서 커피 타임을 한번 가진 채 바로 달리니 두 시간이 못되어 도달했다.

 

뷘은 5C 말까지 서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이를 무너뜨린 게르만족이 거주했으나 9C 후반까지 마자르족의 통치를 받았다. 10C 후반 독일 황제군이 뷘을 재정복한 후에 독일계 가문의 주요 관저 터가 되었으나, 1273년에 이르러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됨으로써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류 자리로써 번성하였다.

 

<뷘 중심부 지도>
<마리 테레지에 여제의 여름 거주 궁이었던 쇤브룬 궁의 전경> 
<쇤브룬 궁 전경 2>

 

전성기에는 인구 200만이 넘는 대도시였고, 근세에는 오스만 제국군이 두 차례(1529년, 1683년)나 빈 입구까지 침공했으나 모두 저지되었다. 그후 나폴레옹 전쟁을 겪고, 프로이센과 독일연방의 주도권을 놓고 겨룰 때까지 유럽대륙에서 파리와 자웅을 다투는 정치·외교·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유럽 허브 도시를 자처했다.

 

<1890년대에 완공한 뷘을 둘러싼 대 순환로(Ring)>

 

하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의 뷘은 과거의 영화를 뒤로 한 채 조그만 영세중립국의 수도로써 차분하게 나타났다. 뷘 북서쪽으로 들어간 우리는 뷘 중앙역을 향해 차를 몰았다. 늦은 밤이라 도심에도 인적은 별로 없어 교교한 밤거리를 조용하게 스며들어갔다. 드디어 중앙역 표지판이 나타나자 근처에서 오늘 하루밤 묵을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모두 다 몹시 피곤했기에 눈에 띄는 허름한 모텔 같은 곳이 나오자 차를 세우고 들어가 방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충분히 있다 했다. 널찍한 방 두 개가 필요하다 했더니 매니저가 두 곳으로 안내해줘 우리 가족과 표씨 부부가 한 방을, 다른 곳에는 YB 가족과 송씨가 조를 짜 묵게 되었다. 침대는 애들과 엄마가 사용하고, 어른들은 갖고 온 담요와 이불을 같이 깔고 덮으며 방바닥에 누워 잤다. 나를 비롯해 모두 바로 꿀잠에 곯아 떨어졌다.

 

<뷘 시내 돌아다니다 어느 잔디에 앉아 휴식하는 일행>

 

다음 날 일어나 아침을 어떻게 어떻게 하고서는 헝가리 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뷘 시내를 한 나절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시내 쪽을 들어가니 여느 유럽국들의 수도들과는 달리 꽤 수수해 보였다. 파리나 로마에서 보던 화려한 건축물과 조각물, 동상들이 상대적으로 덜 눈에 띄었다. 독일의 쾰른 성당 같은 양식의 슈테판 성당이 눈에 띄었기에 차를 잠깐 세우고 주위를 둘러본 게 뷘에서의 유일한 문화재 답사였다.

 

<벨베데레 궁 전경>
<방문 못한 벨베데레 궁내 클림트 그림 전시장>
<누가 찍은 벨베데레 궁 다른 내부>

 

80년대 후반 당시에 구스타프 클림트를 알았더라면 그의 유명회화들이 전시되어 있는 벨베데레 궁과 뷘미술사 박물관 등을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살펴보았을텐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아쉽기 짝이 없는 뷘 방문길이었다. 지난번 피렌체 방문 시에 했던 무지렁이 짓을 다시 반복하는 어처구니가 벌어졌던 것이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세웠던 베르사이 궁에 대적하려 합스부르크가의 마리 테레지에 여제가 완공한 쇤브룬 궁도 몇 킬로 근교에 두고도 방문기회를 놓쳐버렸으니 그야말로 뷘에 다녀갔다는 영역표시 실례만 하고 지나쳐 온 격이었다.

 

<뷘 주택가 전경 1>

 

나중에 알아보니 빈 시가가 전체적으로 품격은 있었지만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게 보였던 것은 1차대전의 패배 후 뷘에서만 사회민주당 세력이 압도적 지지 속에 정권을 잡고 장기집권(1918~1934)한 ‘Red Vienna’(붉은 뷘) 시대의 끊임없는 공공임대주택 건설이라는 역사적 전통 속에 연유했다는 것이었다.

 

<뷘의 수수하면서도 소담스러운 전경>

 

뷘을 장악한 사회주의자들은 조세자치권을 바탕으로 뷘 주택과 상가의 임대수입에 세금을 크게 부과했고, 여기에서 얻은 세수로 저렴한 임대료를 받는 공공임대주택을 유명 건축가들 간 디자인 공모를 통해 모던한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표준화된 공법으로 가성비 좋게 공급할 수 있었다.

 

<슈테판 대성당 전경>
<들어가보지는 못한 대성당 내부>

 

왕년의 기득권이었던 귀족 지주층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재산권 행사를 막는 시정부의 압박에 땅을 팔고 뷘을 떠나게 되고, 싸게 싼 부지에 뷘 시는 영구공공임대주택을 끊임없이 지어 서민과 중산층에 저렴한 가격으로 비교적 풍족하게 공급하니(시민의 60%가 임대주택에 거주) 90년대 당시나 지금이나 주거와 문화 환경에서 세계 5위 안에 드는 ‘살기좋은 도시’로 부상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몰랐기에 눈에 비치는 뷘 시가의 분위기가 수더분하고 소담스럽기는 해도 ‘파리나 로마처럼 뭐 그리 웅장하고 화려한 풍모는 느껴지지 않네..’ 하는 생각들을 품으며 천천히 중심부 지역을 차안에서 관망하다 헝가리 국경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어느 커브 길로 돌아드니 길 모퉁이에 북한식 글씨체로 ‘평양식당’이라는 옥호가 보이는 음식점이 나타났다.

 

갑자기 우리 일행에게는 미지의 곳에 들러보고 싶은 강한 호기심과 들렀다 잘못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동시에 일어났다. 영세중립국이라 뷘에는 당시나 지금이나 동서 양진영의 온갖 국적 스파이들이 다 모여든 ‘스파이 천국’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말로만 듣던 뷘 소재 북한대사관이 근처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1982년 설립한 뷘 주재 북한 금별은행이 들어앉은 건물>

 

하지만 우리 대사관과 영사관도 있을 것이라 여겨 공중전화 부스에 있는 전화번호부로 우리 대사관 번호를 찾아보니 과연 수록되어 있었다. 번호를 발췌해서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바로 연락을 취하리라 마음 먹었다. 나와 YB, 송씨는 여기까지 와서 좀 쫄리더라도 선발대로 평양식당에 들어가 우리 일행 모두가 냉면 한 그릇씩 할 수 있는지 분위기를 살펴보자는데 의기투합했다.

 

<뷘 주재 한국 대사관>

 

여인네와 아이들은 표씨 부부와 함께 차안에서 기다리다 우리가 30분 내에 안 나오면 한국대사관에 바로 연락하기로 약속하고 우리 셋은 와이프인 박애숙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년같은 모험심으로 탐방에 나섰다. 식당으로 걸어가는 중에 어느 골목안에 ‘태껸도장’이라는 한글 간판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무심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짧은 스포츠형 머리를 한 도복차림의 운동선수 같은 2, 30대 동양계 청년들이 도장 안에서 좌정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직감적으로 이들이 한국인들이 아니며 여기가 북한인들의 도장인데도 오인해서 들어왔음을 바로 깨달았다. 아직도 이곳을 한국인 도장인 줄 알고 있는 일행을 데리고 서둘러 빠져 나오려 했다.

 

그때 문이 다시 열리며 50대로 보이는 북한인과 30대 중반 무렵의 일행 두 명이 들어오는 바람에 정면으로 마주쳤다. 서로가 화들짝 놀랐지만 양복과 트렌치 코트를 입은 50대 양반이 “어떻게 오셨지요?” 하고 평양식 액센트로 물었다. 내가 대표로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남쪽 출신인데 독일 함부르크에서 유학하는 사람들입니다. 뷘에 들렸다 평양식당을 보고 다른 일행들과 냉면식사 할 수 있는 가를 살펴보려다 여기 한글 도장명이 보이기에 잠깐 들어왔다 북측 도장임을 확인하고 나가는 중입니다.” 하고 최대한 정중하게 부산 액센트로 우리의 신상과 들어온 상황 설명을 했다.

 

<뷘 주재 북한 대사관>

 

그 역시 “아, 그러시구만요.. 남쪽 유학생 분들이라.. 반갑습네다. 어쨌든 피양 냉면집을 찾아왔으니 한번 맛이나 보고 가십시오.” 하고 특별한 적의감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식자층답게 신사적으로 응대해 주었다. 그 옆의 북한인들은 여차하면 적대적으로 돌아설 기세를 물씬 풍겼음에도.. 살아 생전 처음 맞닥뜨린 북한인들과 그들의 공간에서 경황없이 만났음에도 크게 쫄지 않고 침착하게 말을 나눌 수 있었던 내가 그 순간 제법 대견하게 여겨졌다.

 

차안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일행에게 좀 의기양양하게 겪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뭐, 들어가도 큰 문제 없겠더라.. 한번 가 보자!” 하니 그제서야 쫄보 마누라도 호기심이 두려움보다 더 크게 동하는지 들어가겠다고 아이들과 함께 나머지 일행 모두와 차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북한도장 오인 방문에서 시간을 지체했던 모양인지 식당 앞에 가니 점심영업 시간이 이미 지나 브레이크 타임이 시작되어 5시부터에야 저녁 손님들을 받는다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어찌나 아쉬웠던지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하늘이 우리가 그 어떤 불행을 당할까 미리 손써줬는지도 모른다고 억지 자위를 하며 근처 오스트리아 간이식당 같은 데 들려서 끼니를 해결했다. 그리고는 뷘을 벗어나 헝가리 국경지역으로 서둘러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