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의 독일유학 시절> ①
1. 둘째 아들 돌잔치 치루기
88올림픽도 끝나고, 전두환 부부의 백담사 행도 지켜보며 한국의 정치상황이 점점 민주화의 정상궤도로 근접하는 것처럼 나 역시 이제 독일생활의 중간매듭을 지어야 하는 시기가 닥쳐왔음을 크게 느꼈다. ‘89년에 접어들어 전 해부터 시작된 졸업시험 클라주어를 마저 마치고, 디플롬 논문까지 얼른 써낸 다음 독일 대학에서 ’독토아 파터‘(박사논문 지도교수)를 만나 올 한해 잘 보내지기를 ’88년 12월 31일 ‘질베스터’ 날 폭죽 불꽃이 터지는 알스터호를 지인들과 함께 방문하며 제법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했다.
○ 번민 속에 맞은 돌준비 작전
사실 이 무렵은 박사과정에 들어가지 못한 채 예비단계 격인 디플롬 과정에 수년 째 매달려 있는 나 자신에 대해 적지 않은 자괴감을 느끼던 터라 심정적으로 억눌린 때가 많았다. 내가 그 어떤 인생의 ‘세월 덫’에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홀로 자는 서재 겸 내 방에서 아침에 눈 뜰 때마다 ‘아, 여기가 한국 아닌 독일 땅이제.. 내가 가족들 데리고 와서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허망감을 떨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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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둘째놈 돌이 다가와 수년 전 큰놈 돌잔치 때 함부르크 유학생들 왕창 초대해 성대한 한국음식 대접한 전례가 있던 지라 이번에도 이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어 박애숙의 음식제작 개인기를 믿고 한 50 여명 모일 것을 예상하며 판을 벌렸다. 우울한 기분도 떨칠 겸 해서 1/19일이 올 때까지 한국 식품점을 비롯해 독일 대형마트들에 2~3일에 한번 꼴로 식구들과 장보러 다녔다. 꼼꼼한 박애숙이라 허투루 돈을 쓰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생각한 메뉴에 드는 음식재료들은 최고의 상태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다 들어가야 한다는 자의식 집착이 강해 ‘예라 모르겠다. 설마 이 정도에 살림 거덜이야 나겠나’ 싶어 하자는 대로 다 구입하게 했다.
아직 한창 시절이었던지 와이프는 일 무서운 줄 모르고, 모처럼 얼굴 내세울 기회가 또 왔다 여겼는지 D-데이 한 열흘 전부터 만들어야 할 메뉴판을 짜고, 이 몸을 운전수 삼아 음식 식자재들을 꼼꼼이 적은 채 호텔 세프처럼 직접 구입하러 다녔다. 그 와중에 은돌의 기저귀와 이유식, 그리고 목욕용품 등을 ‘부드니콥스키’라는 전용 체인마트에도 들려 사는 바람에 집에 도착해서는 그 방대해진 구매품들을 이번에는 나 혼자서 낑낑거리며 집안까지 들어날라야 했다.
박은 자신의 후덕한 음식 만들기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주특기 킬러 메뉴들인 빈대떡, 육개장, 쇠고기 갈비, 잡채, 새우튀김, 쇠고기전과 생선전을 중심으로 혼자서 며칠에 걸쳐 만들어 냉장고와 베란다에 무슨 개미나 꿀벌처럼 비축을 했다. 아, 저 인간이 공부를 저런 집중력과 저돌성으로 파고 들었다면 박사과정 진입과 박사쯩 취득도 나보다 훨씬 더 빨리 이뤄냈을 것 같았으리라 싶었다. 북한의 속도전 돌격대원처럼 두 아들놈 킨더가르텐 보내고, 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그 많은 일들을 무슨 노하우 유전자가 들어앉은 듯한 우렁각시처럼 단독으로 해치워내는 것이었다. 요 때는 박애숙이 제법 많이 경탄스러웠다.
○ 잔치 당일의 정경
드디어 1/19일이 된 당일 오전 나는 마트에 가서 500ml 24캔 들이와 350ml 24병 들이 맥주 각 한 박스, 콜라와 환타 및 과일주스, 그리고 생수 2리터짜리 12병을 사러갔다. 이리저리 최소 50명은 방문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한인 부부가 운영하는 봔스벡 떡방앗간에도 들려 주문한 시루떡 케이크와 기타 떡들도 챙겨와야 했다.
개최 장소는 살던 캐머러우퍼 기숙사의 로칼 바였고, 그 며칠 전 여기를 하루저녁 사용하겠다는 허가를 받기 위해 기숙사 관리소장 격인 하우스마이스터를 찾아갔는데 이곳은 기숙사 모든 학생들의 공용장소이기 때문에 이들도 방문 가능하다는 방을 게시판에 붙여야 그 시간대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라는 대로 하겠다 하고 장소를 빌렸다. 우리는 터키나 이란 친구들이 자국민끼리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행사를 하면 와도 된다는 게시문을 보더라도 그냥 안가 주는 게 예의인 양 행동했기에 불청객이 많이 올거라고는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 장을 보는 동안 우리 집에는 아는 지인 부인들과 독신 여학생들이 몰려와 빈대떡과 전들을 굽고, 개최 장소의 테이블들을 세팅해 주는 다양한 도움을 주었다. 원래 교회나 성당에 소속되면 이런 행사가 있을 때 그 교인들의 단합을 과시하듯 각자 음식까지 도맡아 만들어 제공하는 것이 통상적이었지만, 나는 무교파였기 때문에 이런 개인적 행사시에 그런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당백의 쉐프 박애숙이 있고, 우리 사교클란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기 때문에 큰 문제없이 개최할 수 있었다.
개최시간이 다가오며 이 친구들은 피쉬마켓에 가서 구입한 연어회를 떠오고, 맥주 박스와 위스키, 코냑, 와인 등을 추가로 들고 오며 개최장의 분위기를 띄워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객들은 그 날 참 많이도 왔다. 나중에는 게시판 글보고 왔다며 기숙사내 개털 독일 싱글 남녀 학생들도 예상치 않게 네 댓명 정도가 빈손으로 찾아왔다. 그래도 찾아온 손님이자 이 장소를 원만히 사용하게 해주는 원군이라 여겨 다른 하객들과 똑같이 한식부페와 음료들을 먹고 가게 해주었다. 아무튼 3년 전 후명이 돌 때보다 훨씬 더 온 것 같았다.
모두 동방박사들처럼 준비해온 선물들을 축하인사와 함께 전해주고는 개최장소인 로칼 바로 내려갔다. 여기에는 일찍 온 도우미 지인들이 준비한 식음료들로 장소 세팅을 근사하게 해놓았기 때문에 도착한 손님들은 뷔페식 음식들에 박애숙표 빈대떡과 육전 및 생선전, 그리고 양념되어 굽혀진 소갈비 몇 점씩에 육개장 한사발씩 공급받고는 모두들 하하호호하며 모처럼 만난 한식메뉴를 흐뭇하게 즐겼다. 주문한 떡케이크가 도착하고, 몸단장 좀 한 박애숙이 주인공인 은돌이를 안고 나와 하객들에게 인사를 올리자 분위기는 팍 달아올랐다.
애숙이의 어학코스 시절 동급생들로써 몇 번 우리집 한식 식객이 되며 나와도 절친이 된 상하이녀 싱싱과 베이징남 창 부부와 일본 샤프사 함부르크 주재원이었던 다니와 와이프인 요시코 부부도 은명이와 비슷한 무렵 태어난 아들 겐타로를 유모차에 태워 나타났다. 그리고 호메니이 집권 후 테헤란을 탈주해 함부르크대에 학생 적을 둔 전직 비밀경찰 샤바크 출신인 듯 싶은 무슨 알리도 우리 집에 올 때마다 가져오는 피스타치니언 대용량 한 봉다리와 뭔가 작은 선물 하나를 준비해 방문해 주었다. 이들은 한국인들이 이런 행사시에 왕창 모여 먹고 떠드는 모임에 일견 놀라면서도 저들과 비슷한 듯 조금 다른 모습들에 약간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이 무렵 싱싱은 우리 부부를 만날 때마다 ‘이번에는 한국제 LG 전자렌지를 샀는데 가격대비 성능과 품질이 죽이더라’ 하며 한국에 대한 호의감을 표출했다. 이 해 늦여름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을 때 내가 같은 기숙사에 있는 자기네들 집에 잠깐 차 한잔하러 방문하던 중이었는데 도중에 중국인 유학동료 서너명이 방문해 저그끼리 중국어(상하이어)로 현 상황에 대해 우려섞인 견해들을 심각하게 교환했다. 말귀는 전혀 못알아 들었지만 그 침울한 분위기는 감지할 수 있었다.
한참 후 싱싱이 중국어로만 얘기해 미안하다 하기에 뻘쭘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그 데모 시위자들은 체포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재민, 그들은 당연히 수감되겠지만 중국 깜방이란 것이 니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곳이야’ 하며 한숨을 푹 내쉬는 것이었다. 중국 국영철도사 고위간부의 딸이라는 이 친구도 유럽과 비교한 자국의 정치적 낙후성에 점점 많은 수치심을 느끼는 듯 했다. 그 무렵 개선된 정치상황과 발전된 산업구조를 가진 한국을 상대적으로 꽤 많이 부러워하면서..
한편 다니-요시코 부부와는 요시코가 애숙의 어학코스 동기라는 인연을 통해 우리 집에 놀러오며 같이 친하게 되었다. 남편인 다니는 쿠슈 소재 소도시 구마모토 출신으로 오사카가 홈그라운드인 샤프사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에게 샤프 펜슬로 오랜 기간 잘 알려졌으며 당시는 같은 日기업인 카시오와 함께 액정계산기의 세계점유율을 양분하던 강자였다.
다만 가전에서는 80년대 내내 글로벌 시장 1, 2위 기업인 소니와 파나소닉 다음의 포지션을 차지함으로써 日자동차 업계의 혼다와 같은 브랜드 이미지를 자랑했다. 나도 이런 강소형 브랜드를 좋아해 이 부부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소형컬러 TV와 카셋레코더를 샤프제로 장만하였다. 우리집에 올 때마다 이들을 보고 요시코가 감사하다는 ‘헤어 킴, 아리가도!’를 연발했다. 마치 싱싱이 LG렌지를 샀다고 했을 때 우리부부가 품었던 그런 뿌듯함을 느끼는 것처럼..
요시코 부부는 그날 박애숙표 구운 갈비와 빈대떡 맛을 보고 오금을 저려했다. 싱싱부부도 그 전에 우리집에서 불고기 맛은 이미 봤지만 갈비 맛은 처음이었는지 그 맛에 놀라는 기색은 역력했지만 국가 자존심상 요시코네처럼 광분하는 리액션은 애써 자제했다. 아무튼 이 두 부부는 한국인 내방객들처럼 한식 대표 메뉴들에 까빡 가는 식욕들을 보여주었지만, 수많은 한국손님 접대하기에 바쁜 우리를 보고 초대해 주어 고맙다는 큰 인사를 보여주며 적당한 시간에 떠나주었다.
식사를 마친 한국 방문객들도 평소 친분에 따라 소그룹별로 옹기종기 모여 맥주와 와인 및 위스키 등을 탄산음료와 함께 마시면서 편안한 환담을 나누었고, 한 팀은 한 구석에서 고스톱 판까지 벌려가며 떠들썩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모두 다 팍팍한 유학생활에서 모처럼 이런 자리를 만나니까 감회가 새로운 듯 해보였다. 나도 덩달아 흐뭇했다. 한 300~400 마르크(18~24만원)의 음식재료값으로 근 50명이 넘는 사람을 접대하며 그들에게 소소한 기쁨과 삶의 고달픔을 위무해 주는 식공간을 제공했다는 사실에..
아이가 딸린 다른 손님들은 서서히 작별인사와 함께 각자 집으로 귀가하였고, 결국 우리 사교클럽 멤버들만 이슥토록 남아 한국정세와 유학사회의 다양한 가쉽거리들을 갖고 얘기들을 나누며 남은 술과 음식을 확인 사살하듯 마무리지어 주었다. 밤 서너시가 다 되어서야 술도 떨어지고 해서 이들이 남은 뒤치닥거리 청소와 정리정돈을 해줌으로써 은돌이의 돌잔치 모임은 드디어 그 대미를 찍었다.
○ 그 다음 날 정경과 파생된 단상
다음 날 내가 좀 늦게 일어나보니 아들 두 놈은 먼저 일어나 후명이의 통제 하에 TV 만화영화를 시청하고 있었다. 세면과 샤워를 하고 아직도 곪아떨어져 있는 와이프를 깨우니 오만 인상을 다쓰며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봐라, 어제 사람들이 전해주고 간 선물들 한번 챙겨보자!’ 하니 그제서야 스프링처럼 벌떡 몸을 튕기며 일어났다. 번개처럼 세면만 하고 오길래 아이 두 놈과 함께 전 가족이 흥부집 박타는 기분으로 선물들을 방 한복판으로 가져와 쌓았다.
모처럼 흐뭇했다. 사람들을 접대하며 기분좋은 시간을 같이 만든 것도 멋있었는데 이들이 전해주고 간 마음의 정성들을 확인하는 것도 참 짜릿했다. 훗날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라고 여겨 선물들을 풀지 않고 모아서 쌓아놓은 채 즐거워하는 은명, 후명, 박애숙 세 명을 그 뒤에 앉히고 영원 속 한 순간이 될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학생 기숙사의 좁아터진 공간이었지만 그 속에서 행복해 하는 세 식솔을 카메라 렌즈를 통해 굽어보니 그 무렵 우울감에 자주 빠졌던 일상에서 모처럼 적지 않은 위안을 받고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준 치유의 기운을 듬뿍 얻은 듯 했다.
그 날 사람들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은 탓인지 은돌이는 후명이 때보다 어리버리한 면으로 속깨나 태웠지만 사랑스러운 구석도 간간이 풍기면서 외모는 건실하게 성장해 주었다. 큰 놈같은 조숙한 총기는 언감생심이고, 언어 이해도나 사리분별력 같은 게 또래들 보다 너무 느려 이거 자폐아는 아닌가 하는 걱정도 제법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런 마음은 애숙이도 똑 같이 품었던 모양이었다.
한번씩 누적된 실망감에 ‘내 씨를 도대체 어찌 발아시켰길래 아아가 이 모양이고..’ 하며 말도 안되는 억지로 마누라의 속을 휘뜩 뒤집기도 했지만, ‘무슨 말 같잖은 개소리냐?’ 하며 맹렬하게 달려들 에너지도 아깝다는 듯 애숙은 헬렌 켈러를 인내와 사랑으로 훈육한 설리반 선생처럼 둘째 캐어에 한층 더 정성을 쏟아붓는 것이었다. 이처럼 뭔가 어리숙하고 환경에 대한 스스로의 깨침 정도가 부실한 듯해 이놈 돌보는데 좀 더 많은 신경을 써다보니 후일 후명이 놈은 자신이 그 시절 부모 사랑을 졸지에 다 빼앗긴 것 같아 적지 않은 박탈감을 느꼈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내심 우리집의 에이스이자 집안을 빛낼 아들은 언제나 후명이라 여기고 든든해 했다. 그런데도 당시 같은 어린애였음에도 영특한 놈이라 너무 과신한 나머지 행동으로는 보여주지 못한 채 모자라는 구석이 많아 보인 은명이에게 연민의 정을 더 눈에 띄게 주었던 게 큰 놈에게는 유아기의 상처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자식이 그런 마음을 품고 큰 줄은 최근까지 짐작도 못했다. 돌이켜보니 사춘기에 저그 동생을 그리도 무시하고 못살게 굴었던 곡절 한 자락이 슬쩍 풀리는 것도 같았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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