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1989년 독일유학시절: 3-3. 헝가리 탐방후 귀행 대장정

백조히프 2021. 8. 26. 14:47

1989년 독일유학시절: 3-3. 헝가리 탐방후 귀행 대장정

 

 

헝가리 국경도시에서 1박 후 부다페스트 입성

 

뷘을 벗어나 한 두어 시간을 달리니 헝가리 국경지역에 도달했다. 마침 그해 봄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동유럽국 국교개설 외교정책에 의해 헝가리가 1호국으로 한국과 수교가 되었다. 한국인 학생여권으로는 아마도 우리가 최선두 그룹으로 헝가리 땅을 밟게 될 터였다.

 

<헝가리 전도 1(주요도시별)>

 

헝가리 국경선에 도달하니 국경검문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타 서유럽이나 동유럽 국적의 방문자들처럼 비자신청을 해야 했다. 사실 서유럽국 간의 무비자 여행을 습관처럼 하던 터라 비자를 따로 발급받고 들어가는 것이 좀 특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독일 내 헝가리 영사관이 아닌 국경선 현장에서 바로 발급받을 수 있는 게 어디냐 싶었다.

 

헝가리가 입국객들 상대로 비자장사를 하는 듯 인당 20마르크를 비자비로 요구했는데 예상보다 비싼 비용이었지만 공산권 국가를 한국여권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그나마 고마워 할 수 밖에 없었다. 노태우 정권이 88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동유럽권 국가들과 수교 드라이브 정책을 펼친 덕분에 우리는 그 첫 수혜그룹이 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의 빈-죄르-부다페스트 진입노선>

 

헝가리 국경경찰이 우리 여권들을 다소 놀란 듯이 살펴봤지만 의례적인 방문 목적을 묻더니만 특별한 까탈을 부리지 않고 흔쾌하게 입국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우리는 다소 감격스러운 기분 속에 헝가리 국경을 넘어 이 나라 제2의 도시라는 죄르란 곳이 눈에 보이자 부다페스트 입성을 내일로 미루고 여기에서 하룻밤 묵으며 여독을 풀려했다.

 

<헝가리 전도 3(주요 공공건축물별)>

 

독일 신문 빌트지에서 독일 여행객들이 헝가리에서 휴가를 보내고 온 방문 체험기사에 의하면, 여기서는 공산품이 귀해 웬만한 일제 카셋레코더 신품 하나를 제공하면 괜찮은 민박집에서 한 일주일은 머물 수 있었다는 내용을 보았다. 그리고 동구권에서는 달러보다 독일 마르크가 더 환영받는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죄르는 서유럽국 도시들보다는 훨씬 규모가 작고 한적한 시골 소도시 같았다. 독일인들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어느 거리에 들어서니 독일어로 ‘Zimmer frei’(묵을 방 있음) 라는 방을 붙인 집들이 몇 군데 보였다. 옳다구나 여기서 묵고가자 싶어 여인네들이 추천하는 집을 찾아가 방이 있는가 물으니 시원스레 있다는 답을 들었다.

 

<헝가리 전도 4(산업분포면)>

 

뷘에서처럼 방 2개를 요구하니 침대와 집기들을 다소 투박했지만 가성비 좋은 큰 방들을 내어주었다. 우리는 흡족해 하며 헝가리에서의 기념비 적인 첫 숙박을 하게 되었다. 짐을 풀고 샤워들을 한 뒤 주인이 알려준 바대로 근처 파출소 같은 데에 가 우리가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간다는 서식 신고를 한 다음 체류 허가증을 따로 발급받았다. 경찰 제복이 독일에서보다는 약간 촌스러워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박한 인상을 풍겼다.

 

<죄르에서 1박집 주인부부와>

 

돌아오는 길에 우유와 콜라 같은 탄산음료를 사러 어느 가게에 들렀더니 우유는 우리 어린 시절 오렌지 주스처럼 삼각 비닐봉지에 포장되어 있었고, 콜라는 빈 병에 주유기 같은 걸로 채워서 팔았다. 예상치 못한 진풍경이었다. 6, 70년대 한국 시골에 있는 구멍가게들에서나 자주 보던 풍경들이 여기서 여전히 재현되니 마치 타임머쉰 타고 과거로 되돌아 온 것 같았다.

 

독일 대도시에서 살다보니 이곳 일상에서 만나는 자그마한 문화충격처럼 여겨져 32년이 지난 지금까지 뇌리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집주인에게 한국제 라면들을 보여주며 몇 개 선사한 뒤 먹는 법을 가르쳐주니 꽤 신기해 하며 좋아라 했다. 우리는 내일 부다페스트 입성을 위해 비교적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 다음 날 모두 꿀잠을 자고 아침을 적당히 챙겨 먹은 뒤 주인집에 작별을 고하고 나서는 부다페스트로 여정을 잡았다. 하룻밤을 자고나니 낯설어 보이던 이 나라도 제법 구면인 것처럼 익숙하게 여겨졌다. 50년대 세계축구계를 주름잡던 축구강국의 이미지와 작곡가 리스트, 컴퓨터 CPU를 고안한 천재 폰 노이만, 인텔 회장 앤디 글로브를 배출한 헝가리로 다른 한국인들보다 먼저 입성하는 행운을 누린 게 꽤 흐뭇했다.

 

헝가리는 당시 동독을 제외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2차대전 종전 후 동유럽 공산권 3대 주요국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부다페스트로 접근할수록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못지 않은 세련된 유럽의 풍모들이 드러났다.

 

<14C(1328년) 헝가리와 주변국들>

 

이 나라는 고대 켈트계 원주민이 정주하며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서로마가 무너진 후 동로마의 느슨한 통치 속에 지내다 10C 경 동쪽에서 쳐들어 온 마자르인들이 주류가 되어 헝가리라는 이름을 가진 초기 국가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13C 초 몽골군의 침입과 지배를 받았고, 그 세력이 쇠퇴하자 16C부터는 오스만 터어키와 오스트리아의 완충지역으로써 준속국적 운명을 맞았다.

 

<중세 헝가리언 기사>
<마자르 헝가리군과 오스만 터어키군의 공성전>

 

서구 열강의 부상에 의해 오스만 터어키의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그 공백을 메웠고, 그 왕가 역시 19C 중반 이후 이탈리아 통일전쟁과 비스마르크 프로이센과의 보오전쟁 패배 여파로 실추된 영향력을 최소한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18675월 헝가리인들과 대타협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수립해 헝가리인들에게 외교와 군사쪽을 제외한 자치정을 부여했다.

 

<1850년대 오스트리아(붉은색)-헝가리(녹색) 제국과 크로아티아 공동통치령(하늘색)>

 

이 자치정 기간 중 헝가리인은 자국에 사는 독일계 주민을 제외한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들에게는 상대적인 우위를 유지하며 루마니아의 영토인 트란실바니아 지역까지 통치자의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1, 2차 대전에서 패한 주축국 진영에 속한 탓에 트란실바니아 할양과 그로 인한 국민사기의 저하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1930년대 전 유럽에서 가장 자살율이 높았던 사실도 이러한 역사적 환경에 기인하는 듯 했다.

 

사실 우리 일행이 부다페스트에 들어섰을 때 이 도시가 보이는 서유럽적 세련됨에 적지 않게 놀랐던 부분들이 당시로서는 몰랐지만 헝가리가 걸어온 역사의 궤적을 살펴보니 그제서야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도나우(영어권의 다뉴브) 강 서편의 부다와 동편의 페스트가 합쳐져 부다페스트가 되었고, 80년대 중후반까지 인구 200만명을 가진 동유럽 최대의 도시였다.

 

부다페스트 입성 신고식과 발길따라관광

 

우리는 부다페스트 중심가라는 안드라시 거리 어디에 벤츠 봉고를 세워놓고 숙소를 정하기까지 좀 늦은 점심 외식이라도 하고 가자는 의견을 모아 거리 탐방을 시작했다. 파리나 베를린, 뷘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 중심가를 일행들과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거니는 데 어느 동양 부인네들의 얼굴이 띄었다. 그런데 우리를 쳐다보는 눈매가 강력한 적의감을 품은 듯 여겨졌다.

 

<부다페스트 관광도>
<부다페스트 구 중심지 안드라시 거리>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중년 여인네들이 이곳에 주재하는 북한 외교관들의 부인이라는 직감을.. 우리 일행 모두도 뷘에 이어 다시 조우한 북한 사람들을 그 어떤 섬뜩함에 놀라 인사라도 붙일 염도 품지 못한 채 우리를 째려보고 등을 돌리는 그녀들을 그냥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어느 광장 근처에 이르자 현지인 청년 두 명이 우리에게 사요나라!’ 하며 접근해 왔다. 달러나 독일 마르크화 있으면 공식 은행환율보다 4배나 더 쳐 환전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현지 포린트화가 필요해 은행에 들려 바꾸려 했는데 암환전상이 4배나 더 후하게 쳐주겠다 하니 옳다구나 하고 200 마르크를 내놓았다.

 

돌아다니면서 본 공식 환전소 마르크 환율을 알았기에 곱하기 4해서 계산된 포린트를 줄 수 있냐 했더니 오케이 하며 10, 20, 50, 100, 500, 1000 단위의 포린트화 한 묶음을 내어놓았다. 헝가리 화폐는 새겨놓은 돈 단위만 다를 뿐 지폐 크기와 색깔이 달러처럼 단일 녹색에다 똑같은 크기 임을 그때서야 알았다. 회계 돈지갑을 맡은 오SH씨가 들어온 돈 금액이 좀 모자란 듯 하다 해서 헝가리 친구들에게 어찌 된거냐고 묻자 이상한데? 하며 누구 한 사람 오면 보는데서 다시 확인하고 잘못 계산되었다면 맞춰 주겠다고 했다.

 

<부다페스트 야바위꾼에게 사기당한 입성 신고식을 치룬 후>

 

우리 중 한 사람이 대표로 따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 친구는 전체 돈을 세어보더니 어, 좀 모자라네 하며 지폐 몇 장을 더 얹어 부족한 부분을 채운 포린트 지폐 한 뭉치를 주며 눈을 찡긋거리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 친구가 떠난 뒤 숙소에 같이 가서 나눠 먹을 수박 한 통을 근처 노점상에게 흥정한 뒤 돈을 지불하려 환전된 돈다발을 살피다 첫 한 두장 20포린트와 10포린트 아래는 1, 2, 5의 저금액 지폐로 좌악 깔려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무슨 야바위꾼처럼 돈을 세는 체 하며 돌려줄 때 단위 낮은 포린트화 다발뭉치로 바꿔치기를 한 것이었다. 우와, 60년대 한국 시장통에서나 있었을 법한 야바위 사기술을 여기서 만나다니 하며 일동 모두 아뿔사! 하는 소리를 내질렀지만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다. 총금액을 공식환율로 계산해보니 20마르크 남짓한 가치였다. 200마르크가 1/10로 변신한 것이었다. 헝가리에 대해 괜찮았던 국가 이미지가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 사기 야바위꾼의 나라 같으니라고..

 

각 가족마다 공동해손을 당했다 여기고 비상금을 털어내어 쪼그라던 공동사용 경비를 좀 더 추렴해야 했다. 일단 중심가 구경을 위한 어슬렁거림을 기분도 그렇고 해서 중단한 뒤 두 밤을 지낼 숙박소를 먼저 찾기로 했다. 중심가를 벗어난 지역으로 오니 민박이 가능한 ‘Zimmer Frei’라는 벽광고들을 여인숙 같은 데서 다시 볼 수 있었다. 죄르에서처럼 방 2개를 빌려 숙박팀을 나눈 뒤 여장을 풀었다.

 

샤워도 하고 사온 수박도 깨어먹으며 휴식을 좀 취한 뒤 숙소를 나와 가라앉은 기분들을 좀 더 회복시키기 위해 시내로 나가 어느 레스토랑을 발견하고는 유명하다는 헝가리식 쇠고기 스테이크인 굴라쉬메뉴를 어른들 용으로 7인분을 시키고 아이들은 수프나 감자 으깬 메뉴를 주문했다. 웨이터들은 유복한 일본인 관광객들인 줄 알고 최선을 다해 아이들 의자도 챙겨주며 서빙을 해주었다.

 

<우리가 시식한 형태의 부다페스트 굴라쉬 메뉴>

 

백포도주, 적포도주, 미네랄 워터 등을 곁들여 쇠고기 굴라쉬 요리 맛을 감상했는데 감칠 맛 나는 소스와 야채 및 감자 샐러드 등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기대 이상의 맛이었다는 호평을 내어 놓았다. 이제야 기분들이 풀리며 계산서를 받으니 독일에서보다는 확실히 가성비가 탁월한 가격대들이라 꽤 만족스러웠다. 마르크화로 팁을 약간 추가해 지불하고는 헝가리 국회의사당 쪽으로 차를 천천히 몰고 갔다.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을 뒤로 하고>
<우리 가족과 표씨 부부>
<놓쳐버린 야경 속 국회의사당>

 

1904년에 건립되어 도나우(다뉴브) 강변 페스트 지역에 위치한 국회의사당은 영국 국회의사당을 본따 지었다는 듯 장려하면서도 숭고미가 살아있는 네오 고딕식 건축미를 뽐내었다.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와 통합되었다 독립한 헝가리 만의 정체성을 축하받으려는 것처럼 약간 과장된 웅장함도 엿보였다. 동시에 단아한 분위기도 함께 풍겨 헝가리인들의 만만치 않은 문화지성적 저력도 같이 내비치었다.

 

국회의사당을 근경과 원경에서 살펴본 뒤 그 근처에 포진되어 있는 성 이슈트반 대성당도 눈에 띄기에 놓칠 수 없다 여기고 찾아갔다. 요즘처럼 인터넷에 즐비하게 올려놓은 세계 유명 관광지에 대한 여러 국내 방문객들의 탐방기와 사진 정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30여년 전 우리 일행은 막 국교가 수립된 헝가리같은 신생지에 그야말로 사전정보 없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발길따라 눈에 띄는명소 탐방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유럽 최고라는 부다페스트의 야간 관광도 놓치고 말았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 전경>
<이슈트반 성당 내부>
<야경 속 이슈트반 성당>

 

온갖 풍상 속에 근 60년 간에 걸쳐 1906년 완공되었다는 성 이슈트반 대성당은 우리의 세종대왕급인 헝가리 왕국의 초대국왕 이슈트반 1세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했다. 헝가리의 주요 국가행사들을 이곳에서 도맡아 치룰 정도로 국가 상징성이 돋보였다.

 

이러한 배경지식이 전무했던 우리는 로마나 밀라노, 파리, 쾰른 등을 방문시 익히 보아왔던 여러 대성당들 중 한 곳이거니 하고 외부를 살펴보며 건성건성 거닐었다. 그러다가 나머지 지역은 내일 다시 다녀보자 하고 입성 신고식도 치르며 몸들도 피곤해 유명 야경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숙소로 철수하였다.

 

부다페스트의 첫날 밤을 우리끼리의 맥주 환담회 같은 것도 없이 모두 내일 일정을 위한 숙면으로 대신하자 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 아그들과 YB의 아그들도 여정이 제법 벅찼는지 칭얼거림들 없이 잘 자 주었다.

 

도나우 강 유람선과 부다 지역 관광

 

간밤을 숙면으로 잘 보내었는지 모두 밝은 아침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YB의 컨디션이 다소 가라앉아 보였다. 함부르크에서 여기까지 며칠 간 오며 나와 적절히 운전을 나눠맡으며 일행을 잘 이동시켰는데 어쩐지 몸살끼 같은 게 생겨 오한이 일기에 자기는 내일 귀향길을 위해 오늘 관광 동행은 포기하고 숙소에서 혼자 푹 쉬어보겠다는 것이었다.

 

<부다와 페스트 지역을 연결하는 야경 속 세체니 다리>
<정면에서 본 세체니 다리>

 

일행 운송에 대한 책임감으로 부다페스트 2일차 탐방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루 혼자서 운기조식하겠다는 그의 결심을 돌이킬 수 없어 그리하라 하고 나머지 일행들은 내가 모는 노란 벤츠 봉고를 타고 오늘 하루 시내 관광길에 나서는 수 밖에 없었다. 어제 둘러보고 온 국회의사당과 성 이슈트반 대성당이 있던 페스트 지역에 이어 오늘은 도나우강 양안을 가로지르는 세체니 다리를 지나 건너편 부다 지역을 살펴보기로 했다.

 

<언덕에서 본 도나우 강 전경>
<도나우 유람선 선상 위에서> 
<같은 유람선 위에서>

 

그 전에 마수걸이로 도나우 유람선을 타고 오스트리아 작곡가 요안 슈트라우스 2세의 곡 다뉴브 강의 푸른 물결로 유명한 도나우 강 위를 한번 거닐어 보자는 의견이 먼저 모아져 탑승 매표구로 향했다. 함부르크 엘베강 위를 운행하는 유람선들 탑승료와 비슷한 듯한 탑승권을 끊은 뒤 우리는 유럽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과 함께 유람선에 올라탔다.

 

30년이 지난 2019519일 이곳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들이 야간 유람선 관광을 하다 다른 대형 유람선과 충돌해 탑승한 선박이 전복되는 바람에 총 26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고를 접하는 순간 30년 전 같은 코스로 유람하며 강과 양안을 굽어보던 우리 일행의 도나우 강 여정이 다시 회상되었다.

 

이번 사고로 밝혀진 도나우 강은 수심이 얕고 강폭이 좁아 평시에도 유람선들이 몰리면 언제나 충돌과 전복사고에 노출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배경지식이 없었던 우리는 말로만 듣던 다뉴브강의 푸른 물결(그리 푸르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됨) 위에 한국인 관광객의 선발대 격으로 올라 타본다는 의미에서 더 매료되었다.

 

독일, 영국, 스페인 등 유럽 각국에서 찾아든 방문객들과 함께 섞여 1시간 여의 해상유람을 하니 그 연전에 했던 노르웨이 호수 여행과는 또 다른 흥취감이 생겼다. 요안 슈트라우스의 푸른 다뉴브 강의 푸른 물결곡 선율과 다뉴브 강과는 직접 연관이 없지만 헨델의 수상음악과 미국 작곡가 애디슨 와이즈만의 피아노 소품 곡 은파(silvery waves)’의 멜로디가 뒤섞여 머리 속에서 흥얼거려졌다.

 

<겔러르트 언덕 위에서 국회의사당과 세체니 다리를 굽어보며>
<겔러르트 다른 장소에서>

 

약간 덥기는 했지만 화창한 날씨 속에 양안을 볼 수 있는 도나우 강의 수상여행을 마친 뒤 우리는 국회의사당 맞은 편에 있는 부다 지구 쪽에서 내려 강 너머로 보이는 국회의사당과 성 이슈트반 성당 등을 배경으로 한 인증샷들을 단체로 같이 찍고, 서로에게도 개별 포즈를 취하게 해 찍어주었다.

 

그 다음 도나우 강 전경과 양안을 굽어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언덕배기가 눈 앞에 띄기에 다른 관광객들처럼 우리 일행도 편안한 자세로 유모차까지 끌며 따라 올라갔다. 그 언덕 명이 겔러르트(Gallert)라 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12C 독실한 기독교인 겔러르트가 이곳에 기독교 전파를 위해 왔다가 이교도들에 의해 순교를 당한 역사적 사실을 기리기 위해 명명했다는 것이었다.

 

<가보지 못한 언덕 정상의 치타델라 요새>

 

언덕 정상에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인들을 위압하고 감시하기 위한 세웠다는 치타델라 요새가 있다는데 당시에는 아무런 사전 여행지 조사도 없이 왔기에 놓치고 온 것이 도리어 당연했다. 언덕 중간에서 국회의사당과 세체니 다리 등을 굽어본 것에 이 언덕의 위치적 역할을 다한 것으로 지레 간주하고 왼쪽 아래를 보니 또 무슨 왕궁과 요새 같은 것이 보이길래 옳다구나! 저기를 둘러봄으로써 우리의 부다페스트 여행은 그 대미를 찍을 수 있겠구나 싶어 방향을 바로 아래쪽으로 틀었다.

 

<부다 왕궁 전경>
<부다 왕궁 내부>
<부다 왕궁 내 조각상들>

 

어부의 요새부다 왕궁두 곳을 둘러볼 작정이었는데 후자가 가는 길에 더 가까이 있어 들어가게 되었다. 부다 왕궁은 13C초 몽골군의 침공을 피해 당시 헝가리의 벨라 4세가 이곳 언덕에 방어용으로 성터를 축성한 곳이라는데 세월이 흘러 마차시 왕 시절에는 르네상스식 건물들로 변형되었다 했다.

 

<야경 속 부다 왕궁>
< 좀 더 원경에서 본 부다 왕궁의 야경>

 

그 후 18C 오스트리아 마리 테레지에 여왕 시절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을 받은 건물양식과 구조물들로 재변형되어 당시에 이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들어갔을 때 전체 분위기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변방 영주들 아성답게 웅장한 건축미 같은 것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은 채 소박하고 수수함이 더 많이 배여 있었다.

 

우리는 서유럽국들에서 자주 보던 왕궁 양식을 이곳 부다페스트에서도 살펴본다는 데 다 큰 의의를 두고 한 시간 여 느긋한 산책을 하듯이 궁건물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고 외양과 바깥에 설치되어 있는 조각상 구조물들만 살펴보았다. 그 다음 이번 부다페스트 여정의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어부의 요새로 발길을 돌렸다.

 

<측면에서 본 어부의 요새>
<고혹적인 야경 속 어부의 요새>
<동화의 궁전같은 어부의 요새>

 

이 명소는 18C 초기 성의 기초형태가 건설되어 19C 말에 현재의 형태로 완공되었다는 데 도나우 강변 지역 어부들이 외적의 침공시에 시민군으로 동원되어 이곳 요새에서 요지들을 방어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했다. 우리가 들어서니 뾰쪽한 고깔 모양의 첨탑들이 마치 디즈니랜드의 동화 속 성처럼 독특한 풍모를 보여주었다.

 

<어부의 요새 내에서>
<현지인 악사 옆에서>

 

일곱 개의 탑들은 그 옛날 헝가리를 세운 일곱 마쟈르 부족들을 상징한다고 했다. 요새 내부 곳곳에는 서방국 탐방객들로 붐볐고, 우리 역시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성내 구석구석을 느긋하게 살펴보았다. 집시같은 현지인 거리 악사들이 여기저기 포진하여 피리도 불고 전통 악기들을 연주하며 방문객들을 불러모았다.

 

요새 어딘가에는 이 나라 국가영웅 같은 이가 말타고 있는 형상의 청동 기마상도 있었는데 헝가리의 세종대왕이라는 이슈트반 1세 왕이 그 주인공이었다. 우리 아들 두 놈도 모처럼 호기심이 많아졌는지 걸어다니는 큰 놈은 이곳저곳을 와이프가 잠깐 자리를 뜬 사이 작은 놈이 탄 유모차를 혼자서 끌며 거리낌 없이 돌아다녔다.

 

<영문도 모른 채 혼나는 은돌이>

 

어른들이 각자의 기분대로 여기저기 다니는 중에 유모차에 탄 채로 은명이가 출입이 금지된 장소에 들어갔었는지 헝가리 순찰경찰에 의해 뭐라뭐라 지적질을 당하고 있었다. 나와 와이프가 찾아가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바디 랭기지로 몰라서 그랬다고 선처해 줄 것을 최대한 공손하게 사정해야만 했다. 첨탑 구조물 사이로 보이는 도나우 강 전경과 멀리 강 건너편 국회의사당과 성 이슈트반 성당이 꽤 그윽하게 눈에 들어왔다.

 

부다페스트 마지막 밤의 아쉬움과 함부르크 귀행 대장정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여긴 우리는 부다페스트의 마지막 관광 타임을 아쉬워 하며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봉고차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숙소에 홀로 있는 YB의 경과도 궁금했고, 내일 아침 일찍 함부르크로의 귀행 대장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유럽내 3위권에 든다는 명성을 당시에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숙소에서 좀 쉬었다 다시 나왔을텐데 몰라서 놓친게 너무 아쉬웠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좀 차도가 있을 줄 알았던 YB의 상태는 도리어 오한이 가시지 않은 채 몸살끼에도 억눌려 있었다. 혈색이 파리해지며 끙끙거리는 것으로 보아 내일 귀행길에 운전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할 예감이 크게 들었고 이 불안감은 그 다음 날 바로 현실로 확인되었다. 나는 그래도 밤사이 YB의 컨디션이 어쩌면 호전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데 낙관론을 품으며 이번 여정의 마지막 밤 숙면을 우려 속에 청하였다.

 

낮에 많이 돌아다닌 탓에 잠은 다행히도 푹 잘들었다. 그 다음 날 일어나보니 YB도 부인의 간병과 일행들의 문안 등에 약간 기력을 차렸지만 운전대를 맡길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오늘 일행 10명의 무사 귀행은 내 손에 달렸구나 생각하니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웠지만, 가는 도중에 YB의 기력이 회복되면 운전교대를 할 수 있겠거니 기대하며 숙소에서 취사한 아침식사를 든든히 하며 9시 못미쳐서 귀행 길에 올랐다.

 

<체코, 구 동독지역을 지나는 최단 부다페스트-함부르크 육로 구간(1,170Km)>

 

당시 한국인인 우리는 체코와 수교전이고, 통독 전이라 체코와 동독을 가로지르는 최단 육로 코스(1,170Km)를 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부다페스트를 출발해 오스트리아를 가로 질러 독일 국경도시인 파사우에 도달한 뒤 뷔르츠부르크->카셀->하노버 노선을 타고서야 함부르크까지 도달하는 노선으로만 와야했는데 총거리를 대충 계산해 보니 무려 1,700Km에 이르렀다. 올 때와는 달리 중간 방문지가 없기에 직접 달린다 하더라도 어디선가 1박은 하고 갈거라 내심 예상했다. 혼자서 좀 비장한 마음으로 운전대에 앉았다. 일단 첫 목적지는 헝가리 국경을 벗어나 뷘으로 잡았다.

 

<우리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오스트리아 경유 우회 노선(약 1,700Km)>

 

일행은 부다페스트에서 보고 체험한 인상들을 나누는 가운데 나는 그 얘기를 들어가면서도 옆자리에서 경로 지도를 봐주는 표HB와 바로 뒷좌석에서 기사 심기경호를 담당하며 이런저런 가벼운 얘기를 건네주는 다정다감한 송IH 덕분에 혼자서 가야한다는 중압감을 많이 완화할 수 있었다, 표씨 뒤에는 부인 오SH가 자리하며 자기 남편과 이번 여행에서 느꼈던 여러 소감들을 부부대화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도 들려주었다.

 

중간 좌석대에는 우리 식구와 YB 식구가 각자 아이들을 건사하며 나란히 앉았고, YB는 맨 뒷자리에 자리잡아 앉아있다 누워있다를 반복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든 스스로 호전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그에게는 이번 여행이 길이 기억될 여행 중 하나일 걸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 다음날 한 밤중 4시 반 경에 함부르크에 도착할 때까지 호전세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아 그는 만감이 교차되었을 성 싶은 고독한 내면여행을 귀행길 내내 펼치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나는 앞 조 일행의 존재로 인한 심리적 도움을 받아 비교적 담담한 심사 속에 편한 운전을 할 수 있었다. 정오 경에 헝가리 국경을 벗어났고 중간에 보이는 휴게소 등에서 패스트 푸드와 커피 타임을 가지며 짧은 휴식을 취하고는 오스트리아 영내로 열심히 미니버스를 몰았다. 운행능력이 탁월한 KAL 여객기 수석기장이 비행 중 운항을 못하게 되어 그 옆에 있던 부기장의 심정으로 일행을 사건사고 없이 함부르크까지 무사히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차를 모는 내내 쉬지않고 들었다.

 

항로사 표씨의 권고에 따라 지리적으로 구석진 곳에 위치하는 뷘행보다 직선코스로 독일 국경에 최단거리로 갈 수 있는 린츠행을 택했다. 독일국경을 넘어서면 가성비 좋은 독일 숙박소에서 1박이라도 할까 생각했으나, 지도를 보니 국경을 넘으면 파사우가 있고, 거기서부터 익숙한 독일 아우토반으로 올라타면 밤 12시 좀 넘어서는 함부르크 근처에 다다를 것도 같아 무리를 해서라도 무박의 논스톱을 하기로 결정했다.

 

오후로 들어서며 혼자서 하는 운전이다 보니 집중력 저하와 졸음운전의 함정에라도 빠질까봐 한 시간 여 운전하고는 눈에 띄는 휴게소에 들려 잠깐 휴식을 취하고 떠나는 주행을 반복하자 정상 컨디션 때의 예상시간보다 중간 경유지 도착시간이 훨씬 지체되었다. 그래도 일행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만 했다.

 

결국 독일 국경을 넘어 파사우 쪽에 도달하니 낮이 긴 유럽의 하계에도 날이 어두컴컴해진 밤 9시가 다 되어서였다. 그래도 독일 땅에 마침내 들어섰다는 사실이 뭔가 육로 외국여행을 막 끝낸 것 같은 안도감과 푸근함을 나와 우리 일행들에게 가져다주었다. 휴게소에서 감자 및 크라우트를 곁들인 소세지 메뉴를 다른 이들과 같이 시켜 먹은 뒤 남은 여정을 위해 차에 먼저 가서 눈 좀 붙일테니 한 30분 간 여기 있다 탑승하라고 부탁했다.

 

차에 올라오니 YB도 잠 좀 들었는지 모르지만 담요를 덮어쓴 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난 운전석을 최대한 뒤로 젖힌 채 잠을 청했다. 그야말로 꿀잠이었다. 일행이 약속시간 후 들이닥치자 더 잘 수도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그래도 이 시점에서 긴요한 토막잠을 짧게라도 잤다는 사실이 심적인 안도감을 크게 주었다.

 

다시 뽀빠이 시금치를 먹은 듯 새 힘을 얻어 운전대를 잡았다. 일행 역시 식사와 볼 일도 하고 봤겠다, 독일 땅에도 들어왔겠다 기분이 모두 올라와 한동안 차 안이 수일 전 함부르크에서 출발할 때와 같은 분위기가 재현되었다. YB를 빼고는 서로가 서로에게 함께 같이 한 여행체험을 공유한 데 대한 자족의 격려사들이 이어졌다. 이 분위기에 편승해 뉘른베르크를 거쳐 뷔르츠부르크까지는 2시간 여 논스톱으로 차를 몰 수 있었다.

 

뷔르츠부르크 근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밤 11시가 넘어있었다. 아이들은 벌써 잠에 빠져 있어 어른들만 근교 휴게소에 내려 거의 마지막일 것 같은 커피와 티 타임을 가졌다. 이제 지도를 보니 함부르크까지 한 450여 킬로 남았는데 계속 직선으로 북상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제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해 멍한 정신상태에서 오직 목적지까지 주파해야 하는 지옥의 자동차 장거리 레이스에 참가한 기사처럼 비장한 책임감과 깡다구에 의존하는 정신운전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최선을 다해 150여 킬로 떨어진 카셀까지 몰고는 짧은 휴식 후 또 150여 킬로 거리에 있는 하노버까지 간 다음에 토막잠 한 숨 자고는 나머지 150여 킬로 남은 목적지 함부르크로 입성하리라 표시와 송씨, 그리고 나 3명이서 주행계획을 세웠다. 내가 졸음에 빠지지 않게 둘이서 돌아가며 날려주는 말걸기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으며 카셀까지는 무사히 도착했다.

 

<독일 아우토반의 야간 휴게소>

 

셋이서만 내려 휴게소에서 커피타임과 담배 한 대씩 나눈 뒤 하노버까지만 가면 함부르크에 거의 다 온 마지막 구간만 남아있다고 서로를 격려하며 하노버행 아우토반에 올라탔다. 시계를 보니 밤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운전대를 잡기에 당신네들보다 집중력이 좀 더 남아 있으니 두 사람에게 마지막 스퍼트 구간을 위해 눈 좀 붙이라고 했다. 둘은 알았다며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깨워달라는 말을 하고 여기서부터는 체력 비축을 위해 서로 간에 대화도 삼간 채 비몽사몽 모드로 들어갔다.

 

당시 독일의 고속도로는 속도 무제한 구간이 대부분인데다 한 밤중이라 차도 띄엄띄엄 오가는 화물트럭들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어 시속 140~160 킬로를 계속 유지하며 몰 수 있었다. 고요하고 적적한 야밤에 혼자서 잠자는 일행을 등덜미에 업은 듯 뒤로 하고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기분은 색다른 체험이었다.

 

독일 빔 벤더스 감독의 84년작 영화-‘파리 텍사스에서 주인공 트레비스가 자신의 의처증으로 이혼한 전처이자 고객을 볼 수 없는 밀폐공간에서 유흥접대부로 생활하는 제인을 수소문 끝에 거울 벽 밖에서 만나 회한의 대화를 나눈 후 아들 헌터의 양육을 부탁하며 데려다 준 뒤 헤어져 한 밤의 고속도로를 온갖 비감스러운 만감이 교차한 채 고물 차를 몰고 가는 마지막 인상적 씬이 떠올랐다.

 

다른 한편 1927년 뉴욕에서 파리까지 단엽기로 33시간 논스탑 대서양 횡단비행을 성공시킨 항공우편배달 야간비행사 출신인 찰즈 린드버그가 총항로 구간 1/3을 남긴 지점에서부터 허기와 수마에 저항하며 졸면 대서양 바다에 바로 다이빙한다!’라며 스스로를 옥죄던 그 결기어린 깡다구 정신이 트레비스의 마지막 고속도로 질주 씬과 함께 연속적으로 떠오르며 졸음운전에 맞서려는 내 결의에 적지 않은 힘이 되어주었다.

 

<가로등, 통행료, 속도제한이 없는 고독한 독일 야간 아우토반 주행>

 

하지만 어느 구간에서인가는 군대에서 격심한 야간행군시 자면서 걷는다는 체험담처럼 나는 눈을 떠있다고 여겼지만 순간적으로 가수면 상태에 빠진 적이 몇 번 있었음을 화들짝 놀라면서 깨달았다. , 가호의 여신이여.. 이 몸이 하노버까지만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우리 일행을 보호해 주소서 하며 무신론자 주제에 다급히 삼신할미로도 칭호를 바꾸며 매달렸다. 우리 운이 다하지 않았는지 수마의 치명적인 화는 다행히 입지 않은 채 우리는 하노버 휴게소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아직도 비몽사몽인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깨우자 비로소 깜짝하며 일어났다. 셋이서 손님도 없는 적막한 휴게소에서 커피 한잔 씩 하고 담배도 한 대씩 힘나게 해주는 대마초처럼 의미있게 깊숙히 빨아들였다. 한결 살 것 같았다. 함부르크까지 도달한 마지막 에너지를 얻은 듯 우리는 함부르크를 향한 봉고에 다시 올라탔다. 눈 좀 붙인 두 사람이 새로 깨어난 듯 열성을 다해 말을 붙이며 마부가 최후의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애를 썼다.

 

<멀리서 보이는 함부르크 엘베 다리>

 

드디어 우리가 아는 함부르크 남쪽의 지명들이 줄줄이 표지판에 나타나자 잠에 빠져있던 여인네들도 자다 일어나 떡받는다는 기분으로 함부르크 근접 소식에 기뻐하며 새 아침을 맞는 기분을 드러내었다. 나도 이제 마지막 원기를 쥐어짜 함부르크 진입을 위한 엑셀을 밟았다. 함부르크로 들어와 엘베강이 흐르는 다리 교각으로 들어서자 언제나처럼 주황 불빛의 가로등들이 이제 니들은 확실히 여정 끝낸게 맞아!’ 하고 우리를 다정하게 맞아주었다. YB가족과 송씨를 욀뮬렌벡 기숙사에 내려다 주고 표씨 부부와 우리는 같이 사는 케머러우퍼 기숙사 주차장에 도달해 길었던 여행의 대미를 찍었다.

 

독일 남부, 오스트리아, 헝가리까지 이르는 67일간의 여행 길에서 마지막 무박 이틀 간의 귀행 오딧세이가 특히 말도 못하게 힘들었지만 이 또한 세월 지나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으리라 여겨져 독일 생활에서 무슨 큰 방점을 찍는 순간들처럼 뇌리에 아로 새겨졌다. 32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대장정이 주마등같이 떠올라져 이렇게 기술되는 걸 보면 그 추억이 얼마나 생생했나를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아무튼 우리가족은 80년대를 마무리 짓는 마지막 해에 일주일 간의 긴 여행을 큰 사고 없이 비교적 무난하게 마친 것에 감사해 했다. 학업전선에 예기치 않은 차질들이 와 스트레스와 우울한 기분에 빠져 있던 시절 이 여행은 여러모로 내게 힐링을 시켜줘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충전해 주었다. 뭐 앞으로 어떤 험한 일이 다가와도 이 또한 부대끼다 보면 알아서 지나가리라 하는 낙관적 환경적응능력을 새로 장착시켜준 것 같았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