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1989년 독일유학 시절: 이 해의 국내외 주요사건과 전체 소감

백조히프 2021. 9. 12. 00:16

1989년 독일유학 시절: 이 해의 국내외 주요사건과 전체 소감 

 

 

5. ‘89년의 국내외 주요 사건

 

천안문 사태

 

일당독재 속에 중국의 압축적인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며 꽌시(關係)’에 의한 관료들의 부패도 같이 증대되어 빈부격차가 격화되자 대학생과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민주화와 개혁에의 열망이 80년대 후반부로 갈수록 거세어졌다.

 

<천안문 집단시위>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이런 흐름 속에 1989415일 공산당내 개혁파였던 후야오방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그 추모제를 계기로 베이징 소재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본격적인 개혁운동을 시작하고 의식있는 시민들이 20만명까지 늘어나며 속속 가세하자 통치체제에 커다란 위협을 느낀 덩 샤오핑 주도의 중국공산당은 64일 인민해방군과 탱크부대를 동원해 500~2,000 명의 사망자를 내며 무자비하게 유혈진압한 사건이다.

 

<진압 동원된 탱크대를 단독으로 막아선 시위 참가자>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강력한 유혈진압에 전세계가 경악했다. 마오시대 때부터 유연한 실용주의적 사고를 가졌다고 평가받은 덩이 이런 택도 없는 유혈진압책을 선택한 데 대해 전세계인은 덩과 중국공산당의 숨겨진 잔혹성을 봤다고 그 전율스러움을 더 크게 느낀 것이었다.

 

중국사회의 발전을 수십년 후퇴시켰다고 평가받는 마오 시대의 문화혁명을 거스르려 했던 주인공인 덩이 설마 이런 광기어린 초강경 진압책을 쓰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기에 중국의 지식층을 비롯한 세계의 수많은 이가 받은 배신감은 말로하기 힘들 정도였다.

 

 

<초강경 진압 후 쌓인 시위대 시신들>

 

어쨌든 시위대를 무력진압하고, 권력을 공고히 확립한 공산당은 대학생들의 사상교육을 강화하는 전국적 운동을 실시했다. 1989년에 졸업하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2주 간의 정치수업을 의무적으로 이수하게 하고, 대학신입생을 3만명이나 감축시켰다. 또 신입생들에게는 베이징대의 경우 1년간 혹독한 군사교육을 시켰고, 텐진·상하이·시안 등에 소재한 대학에서도 8주 간의 군사훈련이 부과되었다.

 

출판물에 대한 탄압도 철저히 진행되어 블랙 리스트에 오른 지식인들의 저작과 자유사상을 포함하는 문학서와 철학서는 당연히 출판금지 처분을 받았다. 결국 천안문 참사 후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는 완전히 소멸했고, 중국의 문화적 파워는 현저하게 위축되었다.

 

나는 당시 한국언론과 독일언론을 통해 천안문 유혈진압 전후의 사태전개를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서방언론들은 덩의 통치철학에 크게 실망하고, 서방국들이 중국에 공동으로 경제적 제재를 내린다고 보도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중국시장의 성장세와 세계경제의 불황세를 볼 때 공동제재의 실효력에 의문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옳았음을 얼마 안가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덩이 장쩌민에 국가주석직을 물려주며 사퇴하고, 실용주의자인 주룽지를 경제분야 총리로 기용하며 유화적인 대서방 개방정책을 펼치자 1년도 못되어 대중국 공동제재 전선에서 이탈하는 서방국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2년이 채 못가 중국과 서방측의 관계는 경제적 측면에서 다시 원상회복되었다.

 

하지만 독일 TV에서는 중국정부가 내부질서 확립을 위해 서방측 기준에서는 사형선고가 의문시 되는 경제사범이나 마약사범, 그리고 절도사범 등을 일벌백계 시범 케이스로 마구 사형집행하는 모습을 화면에 자주 내보내자 나와 독일시청자들은 저런 야만적 사법제도를 아직도 갖고 있구나 하며 경제발전에 걸맞지 않는 낙후된 국가이미지를 머리에 새겼다.

 

그럼에도 세계의 공장으로 도약하며 200112월 미국이 크게 반대하지 않는 분위기를 틈타 중국은 WTO에 가입했고, 이 이후 연 두 자리수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며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 때는 화끈한 내수성장책을 펼쳐 불황의 고리에 빠진 세계경제를 구하는 역할까지 도맡았다.

 

평양 청년축제와 임수경 사건

 

세계청년학생축전은 1947년 체코 프라하에서 시작된 사회주의 국가와 좌익계열 청년들의 행사로 냉전 시기 제3세계나 공산권 국가에서 주로 개최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크게 자극받은 북한정권은 소련과 동구블록권의 체제전환 분위기 속에 대외경제적 여건이 크게 악화되는 와중에서도 정치허세적 프로파간다를 위해 1989년 제13회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이하 평양축전으로 칭함) 개최를 덜컥 받아들였다.

 

<북한을 경제파탄과 고난의 행군으로 내몬 평양청년축전>

 

북한정권은 대내적인 체제 다잡기를 위해 대규모 경기장(능라도 5.1경기장, 양각도축구경기장), 공연장(평양국제영화회관, 동평양대극장, 평양교예극장, 만경대소년학생궁전), 호텔(고려, 류경), 고층 아파트 등 관련 인프라를 신축하며 물경 32~40억불(서울올림픽 35억불)을 소요했다.

 

결국 ‘897/1~7/8일까지 개최된 이런 낭비적 정치쇼는 북한경제에 치명타를 가해 배급체제도 무너지고 그 후유증은 ‘95~’97100~300만 명의 아사자를 낸 고난의 행군기를 맞이함으로써 절정에 달할 정도로 그 대가를 끔찍하게 지불했다.

 

이런 북한의 자기파괴적인 정치선전장에 남한의 학생운동권을 주도하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는 북의 참가초청장을 받고 당시 3기 회장 임종석의 지휘 아래 참가준비위원회를만들어 참가 실현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전세계적 탈냉전 분위기 속에서 북한과도 일시적인 데탕트 무드에 있던 노태우 정부였기에 어쩌면 전대협의 정식참가를 허용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해 3월 문익환 목사와 작가 황석영의 밀입북 사건이 터져 이들이 김일성과 면담 포옹도 하고 북체제를 찬양하는 행태가 남쪽에도 대문짝만 하게 보도되자 우리사회 우익보수 세력의 잠시 휴면기에 있던 반공 보안 이데올로기에 대한 심리적 뇌관에 불을 당겨 정국은 삽시간에 공안정국으로 얼어붙게 되었다. 6/6일 문교부 장관 정원식이 평축은 북한의 반미·반한 선전장이라는 이유로 전대협의 평양참가 요구를 공식적으로 불허했다.

 

<평축에 참가한 전대협 임수경>

 

그러자 전대협은 산하 용인/성남지역 총학생회 연합에서 활동하던 임수경(당시 외국어대 불문과 4)을 선발하여 앞서 황석영이 선택했던 베를린->모스크바->평양우회로 노선을 통해 임이 평양에 들어가게 했다. 평축 개막식장에 등장한 임은 극적인 선전 요소가 필요했던 북정권에 그야말로 자다 떡받은 형상이 되어 남북한 뿐만 아니라 전세계 뉴스의 초점을 단숨에 받게 되었다.

 

<김일성과 포옹하는 임수경>

 

처음에는 북한 측이 제공한 북한식 흰저고리 검은 치마를 입고 민족자주통일과 미군철수 등의 구호를 스타디움과 대중연설 장소에서 외쳐 북정권이 어디서 이런 보물단지가 제 발로 굴러들어왔나 하고 쾌재를 불렀겠지만, 얼마 안가 점점 계륵이 되어가는 임의 존재감에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평양 대중집회에서 연설하는 임수경.

 

면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캐주얼한 용모로 북한의 대학가와 대중동원장에 자주 등장함으로써 북한 기준으로서는 아슬하기 짝이 없는 자유분망한 생각을 거침없는 언변으로 전하자 기존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청년세대와 평양시민들에게는 당혹감과 신선감을 동시에 제공했다.

 

북도 체제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라고 발언하며 김일성의 친가 유적지로 변모한 만경대 방문을 당연지사로 여기지 않고 뻗댐으로써 북의 선전종사원들을 난감하게 했다든가, 자신에게 보내진 북측의 여러 선물들을 북의 안내원들에게 재선사하며 자신의 옷가지나 장신구까지 만난 징표로 나눠주는 행위들을 전해들은 남측의 공안 인사들도 임수경이가 생각지도 않은 열일을 하네..’ 하며 같이 당혹해 했었다.

 

당시만 해도 시장자본주의의 신봉자로써 독일에서도 정통기독교 우파인 기민당(CDU)과 사회주의 노선의 사민당(SPD) 사이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던 자민당(FDP)에 더 끌려하던 중도우파의 정치적 포지션을 가졌던 나는 임수경의 평축 스타디움 등장을 이 무슨 철딱서니 없는 객기 쇼인가!’ 하고 참으로 마뜩찮게 생각했다.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폭압적인 세습독재체제에 눈에 콩깍지가 씌인 듯 북체제를 과도하게 떠받드는 한국 학생운동권의 행태가 상당히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당시 독일에서 접할 수 있었던 한국언론은 중도보수를 표방하던 중앙일보와 한국일보 둘 뿐이었기에 임수경의 북정권을 뜨끔하게 만든 자유분망한 발언과 행태들에 대한 보도는 많이 빼고, 북한의 정치쇼에 좋은 소도구로써 쓰일 수 있는 임의 언동들과 사진들만 집중적으로 부각했던 탓도 있었다 하겠다.

 

30년이 지난 지금의 보다 조망적인 시야 속에 평가한 기록들을 쭉 살펴보면 임수경의 남쪽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활약이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남북 양쪽에 양날의 칼같은 영향력을 보였던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남쪽에 예기치 않았던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더라도 현행법을 위반하고 적 지역에 잠입해 그들의 정치선전장에서 그들이 원했던 정치구호들을 외친 46일 간의 이적행위는 그 후 남으로 돌아와 3년 반의 옥고로써 그 죄과를 추궁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1961813일 소련의 사주로 동독정부에 의해 구축된 이후 28년간 동독 영내에 있던 베를린을 동서로 갈라놓았던 냉전의 상징 같았던 장벽이 1989119일 양독 간의 통독이 실현되었음을 확인시켜주듯 무너졌다. 그야말로 세계사적이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역사적 우연이 아닌 오랜 기간 다지고 다져진 다양한 인과관계의 축적물이 마침내 구현된 최종 계산서처럼 다가왔다.

 

<'61년 동독당국에 의해 세워진 동서 베를린 장벽>

 

이 장벽붕괴를 이끌어 낸 요인들은 국제적 측면과 국내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국제적 측면에서는 먼저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역할을 들 수 있다. ‘85년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비는 전임자들과는 다른, 냉전경쟁 종식과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개방개혁적 신사고에 입각한 통치책을 자국과 동구권 동맹국들에도 전파시키려 했다. 이리하여 동독같은 동유럽국들에 자유로운 체제전환의 기회를 주었다. 전환을 도모하더라도 자신의 소련은 5, 60년대 동독, 헝가리, 체코에서처럼 탱크로 그런 선택을 결코 무력화 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둘째, 냉전의 위협고조를 완화시킬 필요에서 양 진영의 나토와 바르샤바 동맹은 197581일 헬싱키 프로세스를 가동시켜 헬싱키 의정서를 상호합의 하에 채택했다. 여기서는 집단적 평화확보, 경제적 공동협력, 국가주권, 국내내정의 불간섭 같은 기본원칙들 외에도, 인권존중, 기본권 및 자유권 보장, 그리고 인도적 분야에서의 공동노력에 대한 사항들도 포함되었다. 특히 인권조항은 동독과 동유럽국들의 위정자 그룹에 많은 인식적 영향을 주었다.

 

셋째, 서독의 오랜 세월 수미일관적인 통일정책의 견지에 있었다. 흔히 콘라드 아데나워, 빌리 브란트, 헬무트 콜 수상들이 모두 현재와 미래의 상황에 대해 통찰력있는 판단으로 선제적인 통일정책을 제대로 펼쳤기 때문이었다.

 

‘50년대 아데나워가 소련과의 교섭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냉전 속에서도 서방정책을 조율하려 했고, 6, 70년대 후임자 브란트는 나토보다 한발 앞선 적극적인 동방정책의 구사로 동독정권과 적대적 대결상황을 사전에 완화시키며 상부상조의 상생적 관계가 지속 가동하게 했다.

 

’83년에 통독 마무리 투수로 등장한 콜은 프랑스 미테랑과 소련 고르비와의 특별한 인간적 신뢰관계 구축을 통해 ‘89년 통독여건이 고조되었을 때 통독을 적극 반대한 영국 대처정부의 견제를 뿌리치고, 프랑스와 고르비의 동의를 이끌어내며 전광석화처럼 독일 재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이루어 내었다.

 

국내적 측면에서는 우선 동독의 경우 모든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사안들이 일당독재당에 의해 비판의 통로없이 결정되고, 국민 서로가 슈타지에 의해 상호감시되도록 하는 일상적 생활에 염증을 내면서도, 저항의 시기가 왔을 때 고르비의 소련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집단적 사고가 형성되었다.

 

둘째, 교조적인 계획경제의 비효율성과 비혁신성으로 서독과 대비해 점점 벌어지는 생활수준과 경제력 및 하부 인프라의 격차, 그리고 특권계급과에 대한 일반시민들의 고조되는 괴리감에 의한 체제불만감이 점증되어 저항의 비등점에 더욱 가까와졌다.

 

동독정권 역시 이러한 문제점들을 잘 알기에 독일분단 이후 28년간 정치적 안정화, 경제적 활성화, 그리고 사회적 평등성 지향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행해 동구권 블록 내에서는 모범적 사회주의 국가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칭송은 많은 부분 서독에 의한 막대한 재정지원(‘72~’89년 기간 140억 마르크 공식지원)에 의거한 바가 컸다. 대신 시간이 가며 확대된 동서독 주민간 방문건수는 이런 서독측 재정지원폭과 비례했다. 은연 중 동독은 서독에 대한 경제지원 의존도가 돌아갈 수 없는 다리의 지점까지 와버렸던 것이었다.

 

통독의 불쏘시개에 최초의 불똥이 떨어진 것은 ‘895월이었다. 나는 이 때만 해도 많은 다른 이들처럼 이 불똥이 거대한 화염의 소용돌이로 변모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5월 초 동독의 지방선거가 부정선거로 끝나자 해당지역 동독주민들의 시위가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공공연한 반정부 데모의 형태로 일어났다.

 

7. 8월에 접어들자 동독측 국경경비가 느슨한 것을 틈타 많은 동독 휴가객들이 동구권 형제국인 폴란드, 체코, 헝가리에 있는 서독 대사관에 모이기 시작했다. 프라하 주재 대사관에는 4,000명이나 수용하게 되었다. 당연히 동독 측은 자국민들의 이송을 요청했지만 당시 동독 서기장 호네커의 서독 방문을 계기로 콜정부는 특기인 캐쉬 외교를 풀 가동하여 이들 망명객들에 대한 인두세를 지급하고, 이들의 서독 이주를 가능하게 했다. 그 이후 89년 말까지 동독인들의 서독 이주는 약 35만명에 달했다.

 

이 같은 대량탈주는 남은 동독인들에게 커다란 동요를 일으켰고, 동독정부는 이런 탈주와 시위 대세를 더 이상 무력으로 막아볼 엄두도 못내었다. 체제에 대한 불만과 그 많은 자유 허용을 위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상사처럼 9~11월 기간에 펼쳐졌다. 그런 거리시위의 중심지는 바흐의 고향인 라이프치히였는데 월요데모로 유명해졌다.

 

이런 시위 장면들은 이 기간 연일 서독 시청자들에게 방영되어 이제 누구나 통일의 날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게 했다. 그리고 서독 땅으로 쏟아져 나온 동독 주민들은 서독 슈퍼들에 들려 제일 먼저 바나나를 동이 나게 싹쓸이 해갔고, 가전 품목들도 허겁지겁 구매해갔다.

 

한번은 함부르크에서 주유하는 내게 웬 멀끄럼한 입성을 한 똘망한 동독청년 하나가 동독제 트라반트(2기통 동독 국민차)를 몰고 와서 ‘Sie’()라는 존칭어를 깎듯이 붙이며 셀프주유를 어찌하는 지를 묻는 것이었다. , TV 뉴스에서만 보던 동독인들이 드디어 내 앞에도 나타나는구나 싶어 주유 시범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1119일 드디어 베를린 장벽 붕괴의 날이 왔다. 동독 내각의 공보상 샤보롭스키가 새로운 동독정부의 여행규정에 대한 발표를 하게 되자 한 기자가 그게 언제부터 효력을 발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그는 얼떨 결에 즉시(Sofort)!’라고 답했다.

 

<서독측 청년들의 장벽파괴 시도>
<동독측에서의 관통>

 

이 대답은 TV 생방송에서 나왔기에 이를 본 양 베를린 시민들은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장벽초소로 몰려들었고, 동독 초병들의 통제기능이 마비된 상태에서 장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역사적 장면은 방영권을 선점한 독일 TV사들을 통해 유럽과 전세계로 생중계되었다. 그 방영을 보고 있던 나 역시 감격에 겨워하는 독일인들을 원도 한도 없이 살폈다.. 우리에게도 언제 한번 이런 날이 다가올까 되물으면서..

 

<갑작스러운 장벽 개통에 얼떨떨해 하는 동서독인>

 

장벽 붕괴 후 10일 동안 1,100만 명의 동독 주민이 서베를린과 서독 전역을 방문했다. 그 무렵 신문매체에 바이체커 대통령은 평화혁명을 자유의 승리로 풀이했고, 시대적 석학 칼 포퍼는 역사상 민주주의와 관련해 국민에 대한 통제는 있었어도, 이처럼 국민에 의한 완벽한 지배는 없었다며 동독인들의 박력있는 평화적 저항 힘을 극찬하는 기사들이 실려졌다.

 

이 대사건은 독일의 재통일을 기정사실화했으며, 그 후 10 여년 간 서독의 막강한 경제력이 동독지역의 인프라 수준을 80% 수준까지 올리며 유럽의 강국으로 자리를 잡자 통일독일은 자연스레 ‘EU의 실질적 맹주국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6. ‘89년의 마지막과 본인의 전체 소감

 

‘89년 마지막까지 확정되지 않은 박사과정 진입

 

함부르크대에서의 졸업 디플롬 총평균이 3점 중반대로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독일의 대학들에서 독토란트(박사과정자)로 들어갈 가능성이 상당히 낮았지만 한국경제와 기업들의 해외진출에 대한 관심이 독일의 국제경영학계에도 최근 수년 사이 크게 높아진 점은 적지 않은 가능성 상승요인으로 여겨졌다.

 

나는 글로벌 마케팅 분야에서 독일기업들의 해외직접투자 사례와 그 성공요인들에 대한 페이퍼를 많이 소개한 도르트문트대의 M. 마이스너 교수와 보쿰대의 M. 페를리츠 교수에게 내 소개와 함께 유럽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의 해외직접투자 요인과 장기지속적인 현지경영모델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싶다는 프로포잘을 보냈다.

 

답신은 한 열흘 후 마이스너 교수로부터 먼저 왔다. 당신의 프로포잘에 흥미를 느낀다며 한번 자신의 도르트문트대 연구실에서 만나보자고 했다. 도르트문트대는 80년대 초 막 독일에 도착했을 때 고교 선배이자 산업경제연구원에서 같이 근무하기도 한 이JH 형이 여기 공과대학에서 학업을 막 시작했기에 한번 들러본 곳이었다.

 

<함부르크-도르트문트 간 아우토반 구간>

 

그 사이 세월이 7년이나 흘렀고 JH형은 이미 디플롬 엔제뇌어(공학도) 과정을 졸업하고 한국에 귀국했기에 이번에 들려도 만날 길은 없었다. 드디어 방문 약속 일에 함부르크에서 내 VW 골프를 몰고 서쪽으로 향해 브레멘을 거쳐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내려가 오스나브뤽을 지난 뒤 계속 더 내려가면 있는 도르트문트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83년 기센대의 파우젠베르거 교수를 만날 때와는 달리 박사논문 테마에 대한 프로포잘도 제법 준비해 내려가니 서로 궁합만 잘 맞으면 얘기가 잘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지며 만남 시간 오후 3시 전인 2시 반 정도에 도르트문트대 교정 입구로 들어섰다. 그런데 공대 중심으로 운영되던 도르트문트대였기에 상경학부는 한참 외진 곳에 위치했는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공대 중심의 도르트문트대 전경>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마이스너 교수 연구실 건물에 간신히 도달했는데 주차공간을 찾는데 또 시간이 지체되어 연구실 문 앞에 닿았을 때는 이미 315분이 다 되었다. 문을 여니 안경 쓴 50대 후반의 교수가 지각한 게 좀 못마땅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여기까지 온다고 땀을 뻘뻘 흘리며 후줄근했던 내 첫 모습이 그리 쏙 눈에 차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의례적인 수인사를 나눈 뒤 노교수는 나의 디플롬 졸업증(성적 포함)과 프로포잘 및 이력서 문건들을 살펴보더니 헤어킴, 당신 연령이 이미 30대 중반인데 내 밑에서 같이 연구하며 박사학위 논문을 써내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 보이네요하며 대뜸 나이 타령으로 휘하에 받아들임을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몇 번 나이를 넘어서서 당신 밑에서 좋은 논문 한편 쓰려는 나의 학문적 열정을 봐달라고 간청했으나 이미 얘기는 물 건너 간 듯 했다. 다른 교수 찾아보라며 자신은 20대 중후반의 젊은 독토란트를 받아들이고 싶다는 의사를 분명히 전했다. , 졸업성적도 그렇고 그래서 또 이렇게 나이핑계로 딱지를 맞는구나 생각하며 원래 쉽지 않았다고 여겼던 여정 아니던가 하고 나 역시 더 나아감을 포기하고 작별 인사를 나누고는 그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초조하게 기다릴 와이프에게 상황이 여차여차하여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고 전화를 하니 , 그리됐구나.. 휴우.. 다음 기회를 다시 노리기로 하고 너무 실망 말고 아우토반 밤길이나 조심해서 올라오라하는 애써 대범한 자세로 실망감에 잔뜩 젖은 나를 위로하려 했다. 올라오는 길에서도 나를 받아줄 아재가 어딘가는 있을거라..’는 자기위안적 암시를 하며 두 번 째 낙방의 심사를 쓰라리게 달랬다.

 

‘89년에 대한 전체 소감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89년은 나의 독일유학시절에 있어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본 때였다. 학업전선에서 수년간 정체된 상황을 한번 돌파할 모멘텀을 잡아보고자 내 나름 최선을 다했으나 그저 실패를 자인해야 할 최종 결과만 얻었다. 클라주어 한 과목 잘 친 것 외에는 기대했던 졸업논문 점수도 그리 잘 나오지 않은데다 마이스너 교수와의 면담도 불발로 끝났으니 말이었다.

 

오직 고생스레 남독과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 여행 한번 한 게 그나마 이 해에 건진 가장 긍정적인 추억 축적일 뿐, 특별한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7년이나 걸려 디플롬 과정 한번 더 반복한 허송세월 외에는 박사쯩은 포기한 채 한국으로 피치 못하게 귀국하는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일만 남았다 생각되었다.

 

그해 12월을 보내면서도 독일에서의 내 유학생활은 최종 뜻도 펼쳐보지 못한 채 이런 중간 마감으로 끝낸다 싶으니 사람들도 만나기 싫어 집에서 근신하며 칩거하는 자세로 연말을 맞았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 모든 일은 끝나봐야 끝난 것이라는 믿음도 마음 한 켠에서는 불씨 살리듯 꼬옥 움켜쥐면서.. ‘89년은 이렇게 내게 여러 회한을 남겨주며 이제 그 끝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