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디플롬 졸업논문 준비와 학위 획득
헝가리 가족여행을 마친 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디플롬 학위 취득과 박사과정 진입을 결정지을 디플롬 졸업 논문을 좋은 평가 속에 써내야 하는 과제를 맞이했다. 사고신고와 함께 차를 렌트회사에 반납한 뒤 나와 와이프는 꼬박 하룻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수면을 취했다.
잠에서 깨어나자 첫 식사를 끝낸 뒤 내 방 서재에 앉아 디플롬 논문을 어떻게 작성해 낼 것인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경험상 목차구성은 대충 임시적으로 얼기설기 정해놓고 관련서적과 페이퍼들을 여러 측면에서 숙독한 뒤 적절한 꼭지들로 수정보완하며 채워나가는 작업방식을 따르는 게 보편적이었는데 이번에도 그리하려 했다.
작업은 ‘88년 가을에 친한 유학생 동료 이SH의 권고를 받아 구입한 아타리 컴퓨터의 ’지그넘‘ 운영 프로그램 속에서 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당시 다른 학생들은 IBM의 명성에 빠져 도스 운영프로그램을 선호하기도 했지만, 나는 IBM 환경이 구사하지 못하는 마우스와 클릭으로 문건작업을 편하게 할 수 있고, 무엇보다 구입가가 매력적이었던 아타리의 운영 프로그램을 이용하기로 했다.
잘 모르는 운용방식들은 PC작업에 밝은 친한 유학생 동료 이SH씨의 친절한 도움을 받아 IBM-도스 프로그램의 작동 명령어들을 따로 배우거나 외울 필요없이 바로 논문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타이프로 리포트를 작성하던 시대는 그 때를 기점으로 흘러간 과거가 되어버렸다. 아무튼 이 때 수월하게 익힌 지그넘 프로그램은 나중에 박사과정에 들어가 박사논문을 쓸 때에도 그대로 연결해 사용했다.
나는 마케팅 분야에서도 기업과 소비자 간의 의사소통 정책, 즉 커뮤니케이션 정책(Kommunikationspolitik)에 대한 본 디플롬 논문의 평가자 A. 벤쉬 교수의 저서를 찾아와서 첫 한 두 장과 중간 장들에서 제목에 표기된 용어들의 개념 및 맥락관계, 그리고 사용사례들에 대한 설명들을 열심히 읽었다. 하지만 문체가 매끄럽지 않고, 복잡 모호한 데가 많아 한번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여러번 읽어야만 했다. 그러고도 100% 이해가 되지 않는 찜찜한 구석들이 제법 되었다.
이런 경우 같은 테마를 다른 각도에서 기술한 책이나 페이퍼 문건들을 찾아 읽어보면 많은 경우 첫 번 째 책에서 이해되지 않던 부분들이 스르르 이해되었다. 결국 좋은 글을 쓰려면 가능한 한 여러 연관 텍스트들을 읽고 스스로의 종합적인 개념틀을 구축할 수 있느냐의 여부였다. 난 이 기간을 최소한 한 달로 잡고 빌려온 다른 책들과 복사해온 문건들을 읽고 또 읽었다.
동시에 내 논문 초고들을 읽고 비독일인적 표현과 복잡한 문장구조로 쓴 내용을 수미일관적인 문체 속에서 산뜻한 독일어 표현들로 단순명료하게 다듬어 줄 문장 도우미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그런 도우미를 찾는 것은 웬만큼 운이 좋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꿩 아니면 닭이라고 내가 쓴 텍스트를 읽어보고 문법적 오류나 어색한 단어 사용 정도를 발견해 고쳐줄 정도의 단순 도움 도우미에 만족해야만 했다.
사람 찾기도 쉽지 않아 이전 학부 수업에서 그룹 스타디 하며 알게 된 몇몇 독일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저그도 졸업해 취업생활한다고 바쁜지 도와줄 수 없다고 미안해 했다. 할 수 없어 사람은 좋지만 범생이 타입과는 거리가 먼 발터라는 나이 좀 든 친구에게 부탁했더니 예상대로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실력은 차치하고 美배우 ‘닉 놀테’를 닮은 인간성 좋은 발터가 아쉬운 대로 고마왔다.
내가 3, 4일 간격으로 작성한 초고를 발터에게 보내면 그가 한번 읽어보고 단순 오탈자는 붉은 펜으로 직접 고쳐넣고, 자기가 고쳐주지는 못해도 뭔가 매끄럽지 않은 부분은 물음표 표시로 ‘새로운 표현으로 수정 요망!’이라는 표식을 해주었다. 농땡이 학생 발터가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내 논문을 더 낫게 만들어주려는 노고가 감사했다. 내 초고를 읽고 고치는 시간 당 10마르크를 발터에게 지불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발터의 꾸준한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논문 작성 두달 째가 되어가던 무렵 그에게 우리집에서 저녁식사 한번 하자고 했더니 우리가 못 본 사이에 동거하는 여인과 그 아이가 딸려 있는 가족이 생겼는데 데려와도 좋으냐고 물었다. 이 개털 발터가 여자와 가정도 꾸렸다니 어떤 파트너일까 하는 호기심도 일어 당장 데려오라고 등짝을 두들겼다.
약속한 날 와인 한병 들고 발터가 자기 가족과 함께 집 현관 앞에 섰는데 파트너 여인이 아시아계였다. 서너살 된 딸 아이도 마찬가지였고.. 유모차를 끌고 온 발터의 행색이 편견과 격의 같은 것은 없는 코스모폴리탄(지구인) 같았다. 마누라도 살짝 놀랬겠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양식 메뉴로 준비된 식탁으로 이들을 안내했다. 수인사를 하니 여인은 인도네시아 출신으로 수년 전에 네델란드에서 함부르크로 딸아이와 이주해왔다 했다.
함부르크의 어느 공장에서 일하다 알바생으로 같이 일하던 발터를 만나 혼인신고를 하고는 가족으로 같이 산다는 것이었다. 네델란드인이 한 400년간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통치한 인연으로 네델란드 땅에 인도네시아인들이 많이 이주해 산다는 사실은 알아도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는 당시 그리 많이 알지는 못했던 터라 이 나라에 관한 얘기는 식탁의 화제가 별로 되지 못했다.
우리집에서 밥먹은 게 한 두번이 아닌 발터는 와이프가 만들어준 쇠고기 스테이크를 마파람에 개눈 감추듯 쓱싹하고, 인도네시아 여인 역시 스테이크를 식욕 왕성하게 먹는 모습을 보이고, 딸아이 역시 앞에 놓인 이케아식 미트볼과 감자 으깬 것을 엄마의 도움으로 잘 먹자 저그 가족에게 크게 체면이 서는 양 으쓱해 했다.
‘재민, 내가 얼마나 오래 홀애비 개털로 살았는지 니도 알지 않나?’ 하며 자신이 가족을 이룬 사실을 축하해 달라고 했다. ‘그래 진짜 축하한다.. 발터 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위하여!’ 하며 건배를 제의하자, 발터는 혼인신고 때 자신의 가족 명을 인도네시아 여인의 가족 명으로 개명했다고 밝혔다. 이건 좀 많이 나갔다 싶었지만, 분위기 상 발음하기도 어려운 인도네시아어 가족 명으로 한번 더 건배를 해주며 들뜬 발터의 기분을 최고로 맞춰주었다. 독일어로 ‘헤뭉스로스’(hemmunglos, 고삐 풀린, 억제되지 않는)한 발터의 진면목이 제대로 보여졌다.
어쨌든 그 날 한번 더 뭉친 식사자리의 유대감으로 발터는 내 논문을 자신의 도우미 역량 한도를 풀 가동 시키며 살펴봐 주었다. 나는 한 7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작성된 디플롬 논문에서 먼저 짜증효과와 관련해서는 아래와 같은 결론들을 이끌어내며 완성할 수 있었다.
1) 의사소통적 메시지를 호소할 때 광고정책가는 자신이 의도한 원래의 영향력을 보다 적은 마찰 속에서 관철해야 함
2) 광고수용자들이 느끼는 짜증(Irritation)의 본질적 원인은 재품종류와 특정 목표그룹의 특성 및 광고수용 스타일을 고려함이 없이 자신의 판매의도 만을 막무가내로 관철하고자 하는 광고정책가의 쫓기는 듯한 집착에 있음
3) 짜증 발생에 대한 예방은 무엇보다 목적적합적으로 목표그룹들을 세분화하고, 공격적인 판매 의도를 억제하는데 있음을 유의하며, 감성에 호소하는 광고 스타일이 짜증예방에 기여한다는 연구결과들이 많이 나옴
4) 의도적으로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노이즈 광고는 브랜드의 인지도가 잠깐 높아지기는 하나, 그 효과지속의 제한성과 측정방법상의 신뢰성 저하로 그 지지도가 점점 떨어짐
반발효과에 관해서는 다음의 결론이 도출되었다.
5) 반발이론은 특정조건 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들에 대해 학력이 높은 광고수용자들은 자신을 지력이 낮은 어린애 취급한다는 내면적 심리 때문에 언제나 반발한다는 가설적 논지에서 출발함
6) 반발효과에 대한 효과적인 예방책으로는 인적판매시에는 ‘쌍방 간의 자기주장 방법’과 ‘고압적 방법의 회피’가 있으며, 광고를 할 때는 ‘살금살금 비밀스럽게 하는 광고’(Schleichwerbung) 기법을 사용할 수 있음
결국 짜증과 반발의 두 부정적 광고효과에 대한 치료의 본질은 광고정책가의 신뢰감을 광고수용자들에게서 재창출해내는 데 있다는 종합적 결론을 내렸다. 이런 신뢰감 제고를 위해 인적판매에서는 양자간에 연대의식을 만들어내고, 광고시에는 단기적 ‘관련지향성’과 장기적 ‘이미지 지향성’을 조합한 치료대책들이 추천되어질 만하다고 보았다.
이렇게 석달이라는 마감기간까지 본 논문의 전체 개요인 ‘논문초록’과 내용작성에 인용한 참고문헌을 최종 작성하여 인쇄된 20부를 대학의 사무처에 제출하였다. 나름 논문의 질과 수준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여기며 1.5~2.0점 대의 고평가를 기대하며 결과가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한 3주가 지나서인가 제출 논문은 3.0점으로 평가되었다는 통지문과 함께 함부르크대의 디플롬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졸업성적이 표기되어 있는 디플롬-BWL 졸업증서가 우편으로 도달하였다.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하나는 길고도 긴 길을 돌아 마침내 별로 기쁘지도 않은 디플롬 과정을 이수했다는 소회였고, 다른 하나는 기대에 크게 못미친 논문 평점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이 실망감이 몹시도 아팠다. 이제 이 변변찮은 디플롬 성적으로 이 몸을 박사제자로 받아줄 지도교수감을 찾아나서자니 참으로 앞이 막막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박사과정 지도교수기 찾아졌으면 좋겠다는 갸날픈 희망 속에 그들을 찾아나섰다. 다행히도 그 무렵에는 독일대학들이나 경제경영연구소들에서 글로벌 마케팅이나 국제마케팅, 또는 글로벌 경영 분야 쪽 페이퍼들을 많이 발표하는 교수나 박사급 연구원들이 심심찮게 등장해 확실히 4~5년 전보다는 이쪽 전공자들의 저변이 늘어난 것은 그나마 고무적이었다.
어쩌면 한국의 가전 3사(삼성전자, LG전자, 대우전자), 현대차와 대우차 등의 ‘해외직접투자에 대한 동기 요인들과 현황 및 성공적인 해외경영전략‘의 논문 테마로 나의 박사학위 지도교수 후보자 중 누구에게서는 어필할 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적인 작전을 세우고 그들에게 제시할 내 박사논문 프로포잘을 다듬기 시작했다.
사실 이 무렵은 인도계 영국학자 산자야 랄(Sanjaya Lall)이 저술한 ‘제3세계의 Multinationals(다국적기업)’라는 책이 국제경영학계에서 관심을 받으며, 그 책에서 많이 예시한 한국경제와 한국 재벌기업들의 해외진출‘, 특히 미국과 유럽 등 서구국들에 해외직접투자의 형태로 진출하는 사례들이 독일 국제경영학계에도 적지 않게 소개되는 중이었다.
아, 세상만사 그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데는 다 때가 있음을 한번 더 느꼈다. 떠오르는 한국경제와 우리의 대기업 그룹들이 서구의 국제경영학계에서 일본 다음으로 관심을 받는 타이밍에 접어들었다 여겨지니 내게도 한참의 디플롬 과정 속에 세월을 보내다가 이 흐름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왔음을 바로 감지했다. 어떻게든 박사과정과 연결시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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