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시(詩) 곁(near) 시니어, 노년의 시는 마르지 않는다
제2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
“첫 손주 안을 때보다 기뻐” “차기작은 제주말 시”
철저한 블라인드 테스트…기성 시인 제치고 입상
- 수정 2025-05-19 17:48
- 등록 2025-05-17 07:00

“상금은 어디에 쓰실 겁니까?”(사회자)
“쓸데가 많아요. 약값도 해야 하고….”(수상자 이생문)
지난달 29일 오후 3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 회의실. 이생문(74)씨의 말에 참석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씨는 제2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10행 이하) 공모전 대상 수상자로, 이날 현금 200만원이 든 상금 봉투를 건네받았다. 꽃다발 주는 이 하나 없이 다소 단출하게 상을 받은 이씨는 수상 소감에 앞서 담담하게 자신이 쓴 시(‘저녁노을’)를 읊어 내려갔다. “저렇게 지는 거였구나/ 한 세상 뜨겁게 불태우다/ 금빛으로 저무는 거였구나.”
‘금빛’이라 썼지만 ‘칠흑’ 같던 때에 이 시를 지었다. “아내가 혈액암에 걸리고 투병 생활을 하니까 생이 참 고단하더라고요. 저녁에 노을을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치열하게는 살았는데, 나를 위해서 뜨거웠던 적은 있었나….” 언뜻 무르익는 금빛 노년을 찬양하는 시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방점은 ‘뜨겁게’에 있었다.
“내가 살아온 과정을 돌이켜보니 너무 서럽더라고요. 한 줄기라도 뜨겁게 살았어야 했는데 그것조차도 없어요. 철저하게 생존을 위해서만 살아온 삶이거든요.” 먹고사느라 매일이 너무나 뜨거워서, 정작 그의 마음은 70여년간 한번도 타오르지 못한 것이다.
6·25 때 전사한 아버지, 홀어머니 밑에서 외동아들이었다. 형편은 어려웠고 친척 집을 전전했다. 사는 게 너무 고돼 스무살에 출가하려 했지만, 어머니의 만류로 그마저도 못 했다. 전라도 청년은 부산 조선소에서 일을 배웠다. “일은 스리디(3D)”였고 실수라도 하면 “전라도 새끼”라는 말이 날아들었다. 이후 경기도로 삶터를 옮겨 슈퍼마켓도 해보고, 반도체 기계 설비도 잠시 해봤지만 돈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결국 “막노동”을 60대 중반까지 하며 1남 2녀를 키웠다.
시고 문학이고 모르고 살았다. 국민학교 이후 일기도 한번 못 썼으니까. 7년 전 은퇴 후 황금이라던 시간이 원 없이 주어졌을 때야 시 곁으로 갔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남들처럼 여행할 처지도 못 되고, 마지막까지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시를 한번 써보자 싶었어요.” 이씨는 유튜브 검색창을 두드렸다. ‘시 쓰는 법.’ 온갖 영상을 다 보고 ‘신춘문예 공모나라’ ‘민들레 시인학교’ 같은 데를 돌아다니며 시를 알아갔다.
“이렇게 하면 시가 되는 건가? 전문 지식이 없으니까 모르잖아요. 이곳저곳 공모전에 내보니까 대상도 받고 장려상도 받고….”
흔히 시니어의 시라고 하면 나이 듦에 대한 관조나 해학을 기대하지만, 그의 시에는 외로움과 슬픔이 도통 지워지지 않는다. “내 사는 게 서글프니 시가 슬프지.” 타지에서 생계를 꾸리느라 친구도 동료도 없었다. 아내에게 미주알고주알 속내를 털어놓는 성격도 못 됐다.
한평생 억누른 외로움은 시를 만나 폭발했다. 그의 내면에서 언어가 흘러나왔다. “시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덜 외로웠겠다 싶어요. (…) 자식들하고 싸운 날에도 컴퓨터를 두드리면 다 해소가 되더라고.” 이제는 “시를 떠나서는 못 살겠다” 싶다. 걷다가도 시상이 떠오르면 스마트폰에 끄적이고, 잘 때는 노트와 연필을 침대맡에 두고 잔다. “예전에는 화를 많이 냈는데요, 시 만나고 많이 죽었어요.” 그래도 한번씩 폭발할 때면 자식들은 이렇게 핀잔 준다. “무슨 시 쓰는 양반이 이래?”
공모전에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수상한 터라, 자식들은 무덤덤하다. 이날도 그래서 혼자 왔다. 본인도 담담할까. “아직도 상을 받으면 첫 손주 안을 때보다 더 기뻐요.” 그는 노을 ‘덕후’다. 노을을 찾아 해변을 찾기도 하고 매일을 지내는 아파트에서도 노을이 지면 지겨운 줄 모르고 지켜본다.
그런 그가 꼽는 가장 아름다운 노을은 어떤 모습일까. “티 없이 맑은 하늘의 노을보다, 구름 몇 점 안고 저무는 노을이 훨씬 아름다워요. 그걸 보며 생각해요. 상처 몇 점 안고 가는 인생이 훨씬 아름답겠구나….” 인터뷰 내내 슬픔을 말하던 이씨의 얼굴에 잠시 햇살이 스쳤다.
이날 시상식에는 최우수상 수상자 김명자(85)씨도 참석했다. 분홍색 스카프를 두르고 같은 색 립스틱을 바른 김씨는 이날 시상식 참여를 위해 제주 모슬포에서 날아왔다. “보리밥도 못 먹던 시절이어서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다”던 김씨는 “지난해에 연필도 처음 잡아봤다”고 했다. 김씨는 신을 만나러 갔다 시를 만났다. 성당의 ‘솔로몬 대학’에서 처음 시를 배웠고, ‘봄 하면 떠오르는 꽃’에 대한 시를 써보라고 하기에 크레파스로 써낸 시가 최우수상을 받았다.
“오월이면/ 하얗게 핀 찔레꽃/ 어머니가 거기 서 있는 것 같다/ 엄마는 왜 맨날 수건을 쓰고 있었을까/ 묻고 싶었지만/ 찔레꽃 향기만 쏟아진다”(‘찔레꽃 어머니’)
수상 소감에 앞서 시를 낭독하는데, 김씨의 목소리가 제주 바당처럼 일렁였다. “엄마가 하얀 수건을 머리에 쓰고 다녔어요. 찔레꽃 밑에는 뱀이 잘 다니거든. 그런데도 일하다가 거 가서 쉬느라 앉아 계셨어. 하얀 찔레꽃을 보니 딱 엄마 생각이 나더라고. (…) 엄마만 떠올리면 이렇게 눈물이 나요. 8남매 키우느라 고생 많이 하셨거든.”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 ‘애순이’처럼 제주에서 태어나 줄줄이 동생 돌보며 10대를 보냈다. 자식 키우며 슈퍼마켓을 운영해 “계산기만 끼고 살던” 인생이었다. 한숨 돌리나 했는데 환갑에 병이 왔다. 자궁암이었다. 자궁을 들어냈는데 2년 전에 다시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았다. “의사가 항암치료를 하자는데 안 했어요. 너무 늙어서 이젠 힘들어….” 이날 시상식에 동행한 며느리는 “그래서 이번 상이 어머니에게는 남다른 의미”라고 했다.
“남편은 앞이 잘 안 보여서 오늘 같이 못 왔어요. 상 탔다고 하니까 읽어달라고 하더라고. 듣더니 ‘대단하네’ 하데요.” ‘차기작’을 묻자 김씨는 손사래를 치면서도 “제주말로 한번 시를 써보고 싶다”며 “시를 쓰니 없던 생각들이 마구마구 피어난다”고 했다. 김씨는 이날 시상식을 마치자마자 공항으로 갔다. “다리가 코끼리 다리가 됐어요. 자궁암 수술받을 때 림프절을 잘못 건드려서 이렇게 부어요. 얼른 공항 가서 다리 좀 펴야지….”

이 공모전은 주관사인 문학세계사 직원의 아이디어로 시작됐다. 이미 일본에서도 유사한 기획으로 시집이 나왔고, 국내에도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2024), ‘그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2025)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돼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큰 사랑을 받았다. 나이 듦의 고충을 유머로 승화시킨 노년의 골계미에 대중은 환호했다.
홍순철 출판평론가(BC에이전시 대표)는 “그동안 출판시장에서 시니어의 존재감은 콘텐츠 생산·소비 양쪽에서 모두 미미했다”며 “시니어가 책과 친해지게 하는 게 급선무인 상황에서 너무 진지한 것보다는 유머로 접근하는 전략이 더 유효한 측면이 있다”고 짚었다.
우리나라 시니어도 뛰어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는 출판사 직원의 확신에 대한노인회(2024년 행사 주최)와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2025년 주최)가 응답했고, 한국시인협회가 공동주최하면서 지난해 첫 행사가 치러졌다. 2회째인 올해는 지난해(5800여편)보다 46.5% 증가한 8500여편이 응모했다. 커다란 화선지에 정갈한 붓글씨로 써낸 작품도 있었고, 시 옆에 사인펜으로 시화를 그린 이도 있었다. 응모자 연령 분포는 65~100살. 전국 팔도는 물론 일본과 미국에서도 응모작이 날아들었다.
문학세계사 편집부가 심사 요건을 충족하고 시집에 수록해도 될 만한 작품 107편을 추리는 데 꼬박 한달이 걸렸다. 문학세계사 관계자는 한겨레에 “하루라도 심사를 안 하면 응모작이 쌓여 매일 심사를 했다”며 “너무 현학적인 시들은 최대한 배제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추려진 시들은 이름·직업 등을 가리고 제목, 응모자 나이, 본문만 프린트해 심사위원단(김종해, 나태주, 김수복)에 전달됐다. 심사위원단은 4시간30분가량의 숙의 끝에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등 입상작을 확정했다.
나태주 심사위원은 “작품의 수준이 매우 높아 어떤 작품을 솎아내야 할까 논의를 거듭했다”며 “(작품의 양적·질적 향상은) 그만큼 어르신들의 정신세계가 건강해졌다는 증거다. 인생을 꿰뚫어보는 통찰이 담긴 이 시들을 못 봤으면 어쩔 뻔했냐”고 했다. 문학세계사 관계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몇몇 기성 시인도 본심에서 탈락했다”고 했다.

최고령 수상자는 지난 6일 100살을 맞은 조규원씨. 그는 한 신문에서 공모전 소식을 접하고는 외손녀에게 부탁해 이메일로 시를 투고했다. 우수상을 받은 시 ‘살아보니’는 이렇게 끝맺는다. “100세 살아보니/ 요양 병원에 있는 놈이나, 공원묘지에/ 있는 놈이나”
문학세계사는 응모작 가운데 본심에 오른 작품 107편 중 77편을 골라 지난 1일 ‘꽃은 오래 머물지 않아서 아름답다’를 펴냈다. 응모작들은 지혜로움, 인자함 같은 우리 사회가 노년에 기대하는 이미지를 유쾌하게 배반한다. “햄버거 하나 먹고 싶단 말에/ 뛰어나간 남편// 한참 후에 돌아와/ 현관문을 발로 찬다// 양손에 햄버거 콜라 한 보따리씩// 키오스크 덕분이라고”(신명숙)
“뇌졸중이 와서 후유증으로/ 손녀와 함께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다.//(…)// 손녀는 두세 발짝만 걸어도/ 모두 웃고 박수 쳐주는데// 나는 열 발짝을 넘게 걸어도/ 아무도 응원해 주지 않는다.”(정진홍)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는…/(…)/ 남편이 내려주는 스타박씨 커피/(…)/ 어제 먹다 남긴 바싹 마른 빵조각마저 맛있게 만든다”(변묘숙)

한평생 고였던 마음들을 텍스트에 실어 흘려보내는 어르신들은 또 있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2019)의 주인공 순천 할머니들이다. 뒤늦게 한글을 깨치고 이제야 텍스트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할머니(권정자 외 13인)들은 최근 출간된 ‘글을 몰라 이제야 전하는 편지’(남해의봄날)에서 드디어 편지로 마음을 전한다.
나양임 할머니는 육십 된 아들에게 “목도리 잘하고 다니라”고 신신당부하고, 김정자 할머니는 돌아가신 엄마를 향해 뒤늦게 볼멘소리를 한다. “우리는 학교 안 보내주고 의붓아버지 자식들만 학교 보내줬지. 책보에 책하고 필통 넣어 두르고 뛰어가면 짱글짱글짱글 필통에 연필 구르는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 부러웠어. (…) 그래도 난 엄마 옆이 늘 좋았어.”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까지 어우러진 이 글들을 보고도 눈이 말라 있을 이는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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