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땅콩 회항' 피해자가 말하는 '스벅 탱크' 정용진의 잘못
[1%를 위한 제1보] 낡은 언행 일삼던 회장, 구성원들은 침묵하거나 물들어가거나
26.06.05 14:49 | 최종 업데이트 26.06.05 14:49 | 박창진(firenzedt)

오랜 시간 항공 승무원으로 일했던 내게 스타벅스는 단순한 카페가 아니었다. 초록색 상징은 해외에서 자연스럽게 접했던 하나의 문화였다. 스타벅스는 작은 매장에서 출발해 전 세계인의 일상으로 스며든 성공 신화기도 했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하고, 커피 소비문화를 바꾼 기업. 한때 스타벅스 경영 철학과 기업 문화 열풍이 분 이유다. 스타벅스는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문화 아이콘이었다.
그렇기에 최근 스타벅스를 둘러싼 5·18 민주화운동 폄훼 논란과 대응 과정을 바라보는 마음이 더 착잡하다. 시민들은 사건 자체에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분노했지만, 그 이후 보여준 태도와 대응 방식에서 더 큰 실망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이번 사태를 보며 궁금증이 하나 들었다. 정용진 회장은 사인인가, 공인인가. 소비재 회사의 최고경영자는 국민이자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회사의 자세를 책임진다. 기업이 제품과 서비스, 가격과 품질로만 소비자를 만나던 시대는 20세기다. 소비자들은 착한 소비를 하고 싶어 한다. 의류업체 '파타고니아'처럼 착한 소비를 제시하지 못하면 역사라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정용진 회장은 그동안 정치·사회 현안에 대해, 여러 차례 자신의 반공(反共)적 견해를 밝혀왔다. 아슬아슬했다. 친구들과의 비공개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하느냐도 다 문제가 되는 세상인데 공개석상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그걸 드러내는 건 인화물질을 지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일 아닌가.
어디서부터 이번 5.18 탱크 이벤트가 나왔을까 돌이켜보자. 정 회장은 특정 정치적 확신과 편향이 반복 발신해 왔다. 조직 구성원들은 그 메시지가 회사가 나아가도 괜찮은 방향과 신호라고 느낀다. 최고경영자의 편향된 사고는 조직 내 편향된 사고로 증폭되고 시간이 지나면 문화로 자리 잡는다.
주변엔 비슷한 사람들만 있었을 것이다. 반대 의견이나 비판적 시각은 자연스럽게 위축된다. 조직의 시야 또한 좁아지거나 필터 버블 현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사회 보편적 가치나 다수의 감정과 인식을 알지 못해 공감 능력이 약해진다.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사회적으로 비뚤어진 뭔가를 확신할수록 참모들은 침묵했을 것이다. 이것이 신세계 위기의 본질이다.
이번 사태 역시 단순한 '홍보 기획 실수'가 아니라 본다. 이후 대응을 보다 보면, 기업 수뇌부가 민심이 요구하는 문제가 뭔지 이해는 했는지 의심이 든다.
생각이 다른 게 아니라 역사 인식이 없는 것
회장이 틀리니까 직원도 틀리고, 그 직원이 틀린 걸 회장이 사과하는 자리도 틀렸다. 정용진 회장은 사과문 발표 후반부 돌연 이 말을 꺼냈다. "지금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더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이건 가해자의 사과가 아니다.
이번 논란은 진보냐, 보수냐 정치 견해 차이가 아니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적 인식이 있는지가 발단이었다. 5.18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과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정 회장의 잘못된 사과는 신세계가 이번 파문에 대해 사과할 의사가 있는지를 의심하게 했다.
사과에는 원칙이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확실히 인정해야 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감정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하며,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구체적인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 최근 십여 년간 사회적 '국룰'처럼 된 절차이자 공식이다.
사과 도중 자기 입장을 변호하면 진정성을 의심받는다. 사과문은 피해자에게 하는 글이고, 그들의 감정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당연한 얘기다. 그럼에도 정용진 회장은 책임을 얘기하면서도 자기 억울함과 입장을 설명했다. 사과문 발표 후에도 민심이 분노한 이유다. 그는 여전히 돈과 편견이 낳은 잘못된 권력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오너 심기만 보는 경영에 미래는 없다

나는 이런 일들을 뼈아프게 경험한 사람이다. 2014년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을 기억한다. 당시 국민은 재벌 권력이 조직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그 권력 앞에서 구성원들이 얼마나 쉽게 입을 다무는지 목격했다. 기내 서비스 문제가 끝나지 않고 더 큰 문제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많은 국민이 기억하는 대로, 돈에 기반한 권력이 시민의 상식을 압도하는 순간을 고스란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기업 전체가 얼마나 큰 신뢰를 잃고 구성원들이 고통을 겪었는지는 다 알려진 일이다.
몇 해 전 한 기업의 임원으로부터 ESG(기업 경영이 지속 가능하기 위한 3가지 핵심 요소, 각각 환경, 사회, 지배구조) 강연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사회(Social) 분야를 주제로 임원 교육을 하고 싶다 했다. 땅콩 회항 사건을 사례로 이야기해 달라는 제안에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오너 한 사람의 행동이 기업에 얼마나 큰 손실을 입히는지, 조직 문화가 왜 중요한지 전하고 싶었다. 기업이 어떻게 신뢰를 잃는지 알리고 싶었다.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다음 날 다시 연락이 왔다. 내부 사정으로 강연 진행이 어렵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확인해 보니 강연자는 다른 교수로 변경되어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많은 기업이 진심으로 배우고 바뀌고 싶어 하는 것일까. 조직의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 채 형식적으로 교훈만 들으려는 건 아닐까?
어쩌면 지금도, 우리 사회의 상당수 기업은 '벌거벗은 임금님'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아닌가 싶다. 오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참모는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리더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만 한다. 그 대가는 조직 전체가 치른다.
진정한 리더십은 책임지는 태도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의 핵심은 승리가 아니라 '불태(不殆)', 즉 위태롭지 않음에 있다.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의미로 이해하지만, 손자가 강조한 점은 '위험을 피하는 지혜'였다. 최고의 장수는 백 번 싸워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애초에 싸울 필요가 없게 하는 사람이다.
기업 경영도 다르지 않다. 전쟁은 승리하더라도 수많은 상처와 희생을 남긴다. 민심과 싸워 이기는 기업은 없다. 고객과 논쟁해서 승리하는 브랜드도 없다. 설령 '이겨도' 출혈이 엄청나다.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면 먼저 이유를 듣는 게 좋다. 억울함을 설명하기 전에 상처를 살피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자기 체면보다 조직 구성원들과 고객 신뢰를 생각해야 미래가 위태롭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는 민심을 읽어내는 능력이 부족했고, 리더십이 부족했으며, 위기 관리를 못 한 거다.
'오너리스크'가 무서운 이유. 단기 손익계산서에만 결과가 반영되지 않는다. 신뢰를 깨고, 브랜드의 상징성을 훼손한다. 소비자와 지금껏 쌓아온 '관계'가 사라진다. 그 비용은 숫자로 환산하기 어렵다. 오랫동안 지속된다. 나는 이전에도 기업이 손해 보는 과정을 직접 봤다. 이번 사태가 더욱 안타까운 이유다.
기업은 개인 소유물이 아니다. 수많은 노동자의 삶과 고객의 신뢰, 그리고 사회의 기대 위에 존재하는 공동체다. 그렇기에 리더의 책임은 권한보다 무겁다. 진정한 리더십은 책임을 감당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부디 이번 논란이 특정 기업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기업 문화 전반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민심은 약하지 않다. 물 한 방울은 연약해 보이지만 수많은 물방울이 모여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어떤 리더도 자기 권위를 가지고 국민의 힘을 막을 수 없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오래된 경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의 전문은 피렌체의식탁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firenzedt.com/news/articleView.html?idxno=33017
필자 박창진은 대한항공 객실 승무원 출신의 노동운동가이자 KAC공항서비스 기획본부장이다.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자랐고 부산 동아대학교를 졸업했다. 어릴 적부터 뱃사람인 아버지가 타지에서 보내온 엽서를 보며 먼 이국을 동경해오다가 우연히 접한 항공사 모집 공고에 매료돼 대한항공에 승무원으로 입사했다. 땅콩회항 사건의 직접 피해자이자 내부 고발자로, 사건을 사회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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