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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교수에서 안달 난 중독자로... 최민식이 무너졌다
[리뷰] 넷플릭스 시리즈 <맨 끝줄 소년>
26.07.02 16:24 | 최종 업데이트 26.07.02 16:24 | 김동근(rabbitgumi)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개의 이야기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웹툰을 읽고, 게임을 한다. 이 모든 건 세상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단지 형태가 다를 뿐이다. SNS를 열면 누군가의 삶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우리는 그 콘텐츠들을 보면서 웃고, 분노하고, 안타까워한다. 때로는 내가 모르는 낯선 사람이나 이야기 속 인물들의 인생에 내 감정을 쏟아붓기도 한다. 우리가 수시로 접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이제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됐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쉽게 빠져드는 걸까. 단순히 재미있기 때문에 거기에 몰입하는 걸까. 어쩌면 그건 다양한 콘텐츠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의 성공을 보며 나의 부족함을 떠올리고, 누군가의 실패를 보며 위안을 얻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자신의 기준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던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꺼내 바라보게 된다. 넷플릭스 시리즈 <맨 끝줄 소년>은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야기에 중독된 인간은 결국 무엇을 잃게 되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가 가장 먼저 무너뜨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첫 번째 감정] 허문오의 자격지심

허문오(최민식)는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꽤 그럴듯한 인물로 보인다. 그는 소설을 발표한 경험도 있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다. 까칠하고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다소 권위적인 꼰대처럼 보일 뿐, 적어도 자신의 분야에서는 인정받은 어른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강을 학생으로서 만나게 되고 그가 제출한 과제를 읽는 순간부터 허문오라는 인물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내게 된다.
이강의 과제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그건 허문오가 평생 갈망했던 글쓰기 재능이었다. 현실과 허구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문장, 독자의 감정을 흔드는 능력. 허문오는 학생의 과제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끝내 갖지 못했던 재능을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는 점점 이강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실제 자신이 아는 인물들이 이강의 이야기에 등장하면서 허문오는 온전히 이야기 속으로 자신을 던져버린다. 그건 점점 단순한 흥미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열등감을 표출해내는 과정이 되어간다.
시리즈가 후반부로 갈수록 허문오의 얼굴은 눈에 띄게 변한다. 처음의 냉정하고 권위적인 교수는 사라지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지 못해 안달하는 이야기 중독자의 얼굴이 남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첫사랑에 대한 미련도, 성공한 친구 김수훈을 향한 질투도, 작가로서의 실패감도 모두 드러낸다. 결국 허문오를 무너뜨린 것은 이강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숨겨두고 있었던 자격지심이었다. 그게 온몸으로 표출되는 순간, 그의 주변과 현실은 완전히 무너져간다.
[두 번째 감정] 이강의 희열

이강(최현욱)은 조용한 인물이다.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도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방법을 알고 있다. 어떤 장면에서 이야기를 멈춰야 하는지, 어떤 사실을 감춰야 더 궁금해지는지를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다. 이 시리즈 전체에서 이강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주변 인물 대부분은 모두 허문오가 아는 인물들이고, 이강의 과거나 가족은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그가 쓰는 이야기만이 이강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 미스테리함 속에서 인상적인 건 허문오가 점점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모습을 바라보는 이강의 표정이다. 그는 다음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상대의 반응을 읽는다. '새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라는 짧은 말 한마디로 허문오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리고 그 순간 이강의 얼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희열이 스친다.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를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 그것은 아마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쾌감일 것이다.
하지만 시리즈는 그 희열을 낭만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이야기는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지배하고 파멸시키기도 한다. 허문오는 점점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자존심마저 내려놓는다. 그렇게 보면 이강은 단순히 글을 잘 쓰는 학생이 아니다. 이야기가 가진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 힘을 끝까지 밀어붙일 줄 아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미소는 아름답기보다 어딘가 서늘하게 다가온다.
[세 번째 감정] 조현숙의 상실감

허문오의 아내 조현숙(진경)은 이 시리즈에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직업은 심리상담사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하고, 부부 갈등을 상담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남편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자신과 남편의 부부관계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점점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해결해보려 애를 쓰지만, 돌아오는건 냉담한 허문오의 반응 뿐이다. 이유도 모른채 남편에 의해 바닥으로 내던져지는 현숙의 상실감은 커져간다.
처음에는 단순한 집착처럼 보였던 허문오의 변화는 시간이 갈수록 가족의 일상을 무너뜨린다. 그는 눈앞의 사람보다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 더 많은 감정을 쏟고, 현실보다 이야기의 다음 장면을 더 궁금해한다. 심지어 앞에서 같이 식사를 할 때도,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빠져 앞에 앉은 사람의 말을 무시해버린다. 현숙은 그런 남편을 붙잡아 보려 하지만, 이미 허문오의 마음은 현실이 아니라 이야기 속으로 깊이 중독되어 버렸다.
어쩌면 조현숙은 이 작품이 가장 안타깝게 바라보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이야기에 중독된 사람은 자신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그 주변 사람들도 함께 소외된다. 결국 이야기는 현실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기도 한다. 현숙이 느끼는 상실감은 남편을 잃어버린 감정이 아니라, 현실을 잃어버린 사람을 바라보는 슬픔처럼 다가온다.
이야기는 인간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
<맨 끝줄 소년>은 단순한 미스터리 스릴러가 아니다. 이 작품은 '이야기'가 무엇이고, 우리는 왜 '이야기'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지를 해부한다. 우리는 왜 이야기를 만들고, 왜 이야기에 빠져들며, 왜 그것을 현실보다 더 믿게 되는가. 시리즈는 그 질문을 허문오와 이강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야기가 주는 힘은 이 시리즈 내내 끝까지 강력하게 이어진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배우들의 연기다. 최민식은 허문오라는 인물이 조금씩 무너지는 과정을 압도적인 설득력으로 보여준다. 권위적인 교수에서 시작해 자신의 자존심을 하나씩 내려놓고, 결국 이야기 앞에서 한 명의 독자가 되어버리는 변화는 그의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된다. 최현욱 역시 전혀 밀리지 않는다. 말수가 많지 않은 캐릭터임에도, 상대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묘한 분위기와 미소만으로 극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허준호, 김윤진, 진경, 한지은 역시 각자의 위치에서 이야기에 현실감을 더한다. 특히 선민희를 연기한 한지은은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작품의 미스터리를 더욱 깊게 만든다. 누구 하나 과하게 튀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감정을 설득력 있게 쌓아 올린다.
연출 역시 인상적이다. 시리즈는 반전이나 자극적인 사건에 집중하기보단, 이야기에 빠져드는 인간의 심리를 따라간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조금씩 흐려지는 과정은 관객 역시 허문오와 같은 위치에 서게 만든다. 어느 순간 우리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있다. 허문오와 같이 이강의 재미있는 이야기에 빠져 따라가다 보면, 강력한 현실이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다.
<맨 끝줄 소년>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정말 이야기를 소비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야기를 핑계 삼아,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던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계속 꺼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 우리는 오늘도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에 감정을 쏟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결국 가장 오래 들여다보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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