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의 그림 세계
궁정화가이자 풍자화가로서 이중적 면모를 보이며 18~19세기의 스페인 역사를 화폭 속에 개성있게 옮긴 고야는 끝없는 예술적 상상력으로 괴기스러운 실체를 과감하고 깊이있게 창조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살다 간 시대는 예술사적으로 후기 로코코 시대에서 낭만주의에 들어서는 시기였는데 사회사적으로는 민중혁명과 외국의 침략, 내전으로 얼룩져 있었다. 계몽되지 못한 왕정 지배체제와 인간성이 상실된 전쟁 속에서 극심하게 억압받는 민초들의 저항심을 극적으로 묘사했던 그의 작품 세계는 그칠 줄 모르는 위정자의 권력욕과 우매함에 대한 냉소적 항변으로 가득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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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에 제작한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서 이전의 궁정화가들이 가능한 한 왕족들을 위엄있고 우아하게 묘사하려 한데 반해, 고야는 한사람 한 사람의 심리적 상태까지 포착하여 이들의 무기력하고 심드렁해 하는 분위기를 가감없이 보여줌으로서 자신의 권력에 대한 조소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었다.
표현주의를 예고하는 산 안토니오 교회의 천장벽화인 <옷입은 마하>와 <벌거벗은 마하>에서도 스페인의 전통적 여인 모델이 '잠자는 비너스'라는 고전적 주제를 벗어나 그녀들의 도발적인 관능성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 시기의 고야는 권력의 세속성에는 거침없는 반항심을 발산했지만, 매력적인 여인들에 대해서는자유 연애주의자의 태도를 취하는 예술가적 특유의 기질을 그대로 답습했다.
이러한 경향에서 대변신을 하게 된 동기는 성병치유를 위한 수은요법을 받던 중 수은중독에 의해 청각을 잃을 정도로 거의 한계상황까지 다다랐던 병마와의 투병 체험과, 나폴레옹군의 스페인 침입으로 야기된 민족의식과 전쟁의 잔혹성에 대한 자각이었다. 1808년 나폴레옹군이 스페인을 점령했을 때 고야는 왕정붕괴와 함께 시민적 자유가 펼쳐지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점령군의 야만적인 스페인 민중 탄압은 고야로 하여금 후일 인상파의 마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유명한 <1808년 5월 3일>을 그리게 한 계기를 부여하였다. 이어 연작 판화인 <전쟁의 참화> 시리즈에서도 전쟁판에서의 살육, 광기, 허무, 잔학성, 용기를 철저히 극사실적으로 재현했다.
말년에는 특유의 허무주의적 시각화를 시도하여 자신의 별장인 '귀머거리의 집'(La Quinta del Sordo) 벽면을 소위 '검은 그림들'(Las Pinturas Negras)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작품들로 장식하였다. 후일 이 음산한 검은 그림들을 본 앙드레 말로가 "현대미술의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평할만큼 시대를 뛰어넘는 비관습적 표현으로 인간의 복잡하게 뒤틀린 내면심리를 섬뜩하게 묘사했다.
고야는 이렇게 무한히 독창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자신의 예술관을 통해 700여 점의 회화, 900여 점의 드로잉, 300여 점의 판화 작품을 빼어난 기법으로 제작해 남겼다. 후반기로 갈수록 악마적이라 할만큼 투철한 리얼리즘으로 병든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여기에 대해 들라크루아는 '가장 이상적인 예술적 양식이란 미켈란젤로의 예술과 고야의 그것을 결합한 것'이라고 평해 고야의 대가적 예술성에 높은 경외감을 표하였다.
1808년 5월3일(1814)
고야의 감동적 작품 중 상위에 드는 이 그림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나폴레옹군이 일렬로 늘어서서 무장하지 않은 양민들을 폭도로 몰아세워 총살을 집행하고 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마드리드 근교 프린시페피오 언덕 아래에는 커다란 등불이 켜진 가운데 교회 종탑이 보인다.
그림 왼쪽에는 총살 당한 시체들의 피가 땅을 적시고, 흰 색 셔츠를 입은 남자는 침략군의 야만성에 항의하듯 두 팔을 높이 치든 채 저항의 자세를 취하며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 주위의 다른 양민들은 이 참혹한 학살 현장을 놀람과 두려움, 역겨움이 교차된 표정으로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있다.
한 사람의 용감한 남자를 제외하고는 총구 앞에서 체념하고 공포에 떠는 인간들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 중앙의 등불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했다. 고야는 이 그림을 통해 유럽에 시민적 자유를 가져 왔다는 나폴레옹 전쟁의 역사적 실체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군인들에 의해 자행되는 광기를 섬뜩하게 그려냈다.
알바 공작부인(1797)
고야는 당시 총리대신 마누엘 고도이의 정부였던 알바공작 부인의 초상화를 두 점 그렸는데 이 그림은 그 두 번째 작품이다. 화가와 모델로서 고야는 공작부인과 점점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 두 사람의 관계는 거의 애인 간이었다.
검은 만틸라로 머리를 감싼 공작 부인이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데, 확대 그림의 오른 손에 끼워진 두개의 반지에는 '알바'와 '고야'라는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모래 땅 위에는 '오직 고야 한 사람만을'이라고도 씌여져 있는 것을 보아 주문에 의한 초상화가 아니라 고야가 자기자신을 위해 소장하려 그렸음을 짐작하게 한다.
오스나 공작부인
이 그림은 알바 공작부인, 마리아 루이사 왕비와 함께 당시 마드리드 사교계를 삼분하며 고야를 후원했던 귀부인 중 한 사람인 오스나 공작부인을 그린 초상화이다. 알바 공작부인이 스페인 전통파를 대표하는 마하적 기질을 보인데 비해, 오스나 공작부인은 프랑스풍을 선호하는 조짐을 보인다.
화려한 프랑스 모드 의상으로 차려입은 부인을 로코코적 색조와 고야 특유의 세밀한 붓놀림으로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하지만 뭔가 모델이 자연스럽지 못한 자세를 보여주는 듯한 것은 이 여인이 풍기는 내면의 도도한 성정을 반항아 고야가 지나칠 정도로 정확하게 잡아 화폭에 그대로 옮긴 탓이 더 크리라..
옷입은 마하(1804~05)
옷입은 것과 옷벗은 그림 한 쌍으로 된 두 점의 '마하' 초상화는 당대의 관례적 누드회화 관습을 크게 뛰어넘는 대담한 관능적 표현 기법으로 인해 고야하면 바로 생각나게 할만큼 유명해졌다. 여기에 나오는 마하는 알바공작 부인이라는 주장이 오랜 기간 제기되었지만, 제작 연대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알바공작 부인은 1802년 42세로 세상을 떠났기에 1804년도부터 제작된 마하 그림에는 결코 등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마하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스페인어로 ' 마드리드의 쾌활하면서도 왈가닥 같은 기질을 가진 매력있는 여자'라는 정도의 인물 유형을 나타내는 의미라는 사실도 이런 주장을 부정한다.
<옷입은 마하> 그림은 <벌거벗은 마하> 그림을 은밀히 그릴 때 누군가가 제작 장소에 불시 들이 닥칠 것을 대비해 위장용으로 그렸다는 소문이 오래 나돌 정도로 벌거벗은 마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쌍둥이성 작품이다.
<벌거벗은 마하>가 빛을 통한 강력한 명암대비로 에로틱한 시각적인 분위기를 강조한 데 비해, 이 그림에서는 모델의 편안함과 안정된 자세가 질감과 색채의 부드러움 속에 나타난 차이가 미묘하게 인식될 정도이다. 아무튼 이 그림 한 쌍과 얽힌 여러 일화들은 인생 전반기 잘나가던 시절 자유분망했던 고야의 바람둥이 기질을 반영하는 증거들이라 할 수 있다.
벌거벗은 마하(1804~05)
<벌거벗은 마하>가 나오기 이전에 이런 류의 누드화는 카톨릭 전통이 엄격한 스페인에서 등장한 적이 없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가로 누운 비너스>가 거의 유일한 예인데 관능미를 풍기는 인간이 아닌, 인간의 형상을 한 신화 속의 여신을 묘사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조르조네와 티치아노도 관능적인 나부상을 즐겨 그렸지만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닌 요정이나 여신이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의 마하는 벨라스케스나 조르조네 등의 이상적 인체비례에 의해 형상화된 미인이 아니라 목과 몸통이 조금 이상하게 연결되어 있을 만큼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바로 이 점에서 고야의 나부상은 에로스적 욕망을 거침없이 내뿜는 사람냄새 나는 생생한 매력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게 된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도 마네의 <올랭피아>가 나부상을 너무 노골적으로 묘사했다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음을 볼 때 그 못지 않은 나부상을 60년이나 앞서 그린 고야의 예술적 대담성은 정말 입을 다물 수 없게 한다.
카를로스 4세 부부와 가족(1801)
이 그림은 자신을 궁정화가에 임명했던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을 그린 단체 궁정 초상화이다. 여기에서 어린 왕자들은 왠지 겁에 질린 모습이고, 왕은 어질어 보이지만 좀 우둔해 보이며,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의상만 화려하고 눈부실 뿐 얼굴은 늙어서 쭈그러진 모습이 속속들이 드러난 무참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한 마디로 권력의 화려한 외양 속에 숨겨진 왕실 가족의 자기기만적 공허함을 냉소적으로 화폭에 닮고 있는 것이다.
또 왕과 왕비 사이에 부자연스럽게 뚫려있는 공간은 세간에 떠돌던 왕비의 애인이었던 총리 고도이의 자리임을 암시하여 왕비의 부도덕성과 왕의 무기력함이 억지로 맺어져 있는 국왕 부부의 허위적 관계를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이사벨 코보스 데 포르셀(1808)
옅은 갈색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배경을 뒤로 한 채 밤색머리, 풍만한 앞 가슴, 두툼한 입술, 강한 의지를 머금은 듯한 눈매를 한 이사벨을 모델로 하여 고야가 정성들여 제작한 여인 초상화의 또 다른 걸작이다. 생동감 넘치면서도 단아한 자태를 보이는 당대 스페인의 이상적 여인상을 이 여인에게서 찾으려 했던 듯 화가의 붓 터치와 내면의 표현이 다른 모델들에 비해 예사롭지 않다.
연애편지
이 그림은 리르 미술관에 소장된 고야의 걸작 중 하나이다. 젊음과 늙음, 미(美)와 추(醜), 삶과 죽음 등을 대비하는 고야의 특징이 이 그림을 그릴 무렵 전후로 점점 강렬해짐을 보여준다. 이 그림의 배경이 된 곳은 고야가 즐겨 찾은 만사나레스 강변이다. 하늘은 중간 톤으로, 원경의 건물들은 밝게, 중간 구도의 군상(群像)들은 하프톤으로 처리하며, 주 대상인 마하들은 가장 밝고 어두운 강렬한 색조속에 앞으로 끌어당겨 눈에 확 띄게 한다. 한 마리의 강아지가 연서를 보는 마하에게 기어오르는 정경이 정감 어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마을의 투우
스페인에서 투우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행사로서 마드리드 뿐만 아니라 지방 마을에서도 전통처럼 즐긴다. 이 그림도 지방에서 벌어진 투우 경기 중 관중들이 숨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창으로 황소를 찌르는 투우사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긴박한 순간이 멀리 아늑해 보이는 원경의 배경속에 묘한 대조를 이루며, 서민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스페인적 흥취가 잘 고조되어 있다.
자화상(1815)
고야가 남긴 20여 점의 자화상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69세 때의 자신을 그린 것으로 보통 사람 같으면 노쇠기에 이른 연령이지만 이 그림에 나타나듯이 젊은이 못지 않은 삶의 의지력과 예술에 대한 왕성한 정열 같은 것이 엿보인다. 큼직한 얼굴, 깊이 꿰뚫는 듯한 예리한 눈, 굵은 목둘레, 딱 벌어진 가슴 등에서 화가의 깊이와 위엄을 겸비한 정신력이 이런 건장한 육체 속에서 우러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고야와 의사 아리에타 (1820), 미니애폴리스 예술 연구소
이 그림 아래 쪽에 "1819년 말 위중한 병에서, 뛰어난 의술과 정성으로 73세의 나를 구해준 벗 아리에타에게 감사하며, 1820년에 제작한 이 그림에는 "생명의 은인에게 바치는 그림"이라 씌어져 있다. 죽음에서 가까스로 소생한 고야가 '검은 그림' 연작을 시작한 게 이때부터이다.
의사에게 부축되어 약을 먹으려는 고야의 모습에서 사경을 헤매는 중환자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다. 인생 전체를 통해 이러한 중병을 세 차례나 겪으며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보았던 처절한 경험이 그의 예술관을 더욱 심오하게 벼루어 주어 말년에 들어 불후의 걸작들이 줄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19-23), 프라도 미술관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의 신 우라누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로 태어난 사투르누스(또는 '크로노스'로도 불림)는 우라누스의 폭압에 진절미가 난 가이아의 사주로 우라누스의 성기를 낫으로 거세하여 바다에 던졌다.
우라누스가 죽어가며 "너도 자식에게 똑같은 죽음을 당할 것이다"라는 저주가 마음에 걸려 다섯명의 자식을 낳는 족족 삼켜버렸다. 그럼에도 나중에 자신의 아들 중 하나인 지혜로운 제우스에게 죽음을 당해 결국 저주의 마법에서 빠져 나오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보는 관객들은 너무나 끔찍하고 엽기적 장면에 고개를 돌리지만 끝내는 손가락 사이로 다시 보게 될 정도로 그 쇼킹한 매력에 빠져든다. 사르투누스는 아들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우적우적 씹어먹는다. 이미 머리와 오른 팔이 뜯겨 나간 채 막 왼팔이 씹히는 중이다.
고야는 잔인하게 제 자식을 뜯어먹는 사투르누스를 통해 인간의 악마적 본성과 폭력적 무의식을 섬뜩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고야 말년에 벌어진 對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황폐화된 스페인 민중 내면에 서려있는 파괴적 광기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며 이성에 의해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메시지를 암암리에 전하는 것 같다.
곤봉 결투(1820-23), 프라도 미술관
농부인 듯한 두 사람이 무릎까지 진흙에 빠진 채 서로를 곤봉으로 공격하고 있다. 이들은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하느데도 상대방을 죽이려 애쓰고 있다. 아마도 앞서처럼 나폴레옹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 국가들의 민심에 대한 정치적 은유인 듯 하다. 더 나아가 내면에 숨어 있는 인간의 파멸적 광기와 그로 인해 눈먼 폭력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라 할 수 있다.
성 이시돌의 축제 (1819-23), 140 x 438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1788년 고야가 42세 때 매년 5월15일에 벌어지는 마드리드의 수호 성인 이시돌 축제 처음으로 그린 그림에는 밝고 흥겨운 분위기가 넘쳐 흘렀다. 그러나 인생의 쓴 맛을 여러번 보아온 30년 후에 그린 이 그림에는 첫 그림에서의 수려한 목가적 분위기는 사라져 버렸다.
대신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 속에 어떤 환영에 씌인 듯 허위적거리며 무엇인가 절규하는 듯한 군중들의 그로테스크한 표정과 양태들이 강렬하게 부각되고 있다. 인간 고야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크게 바뀌었나를 그대로 드러내려는 듯이..
죽음이 올 때까지
노파의 머리에 얹은 화살표 다이아몬드는 <카를로스 4세 가족>에서 등장한 마리아 왕비가 머리에 꽂은 바로 그것 같다. 또 노파의 빨갛게 물들여진 눈매가 젊은 시절의 음란한 욕망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빗댄 듯 하다. 이 그림을 통해 고야는 끝없이 허위적인 자기기만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권력층에 대한 측은한 마음을 거의 직격탄식으로 표출하고 있다.
두 노인(1820~23)
귀머거리 집 1층 입구 벽면에 그려진 작품으로 프라도 미술관 목록에는 <2인의 수도사>로 제목이 표기되어 있다. 흰 수염의 인물이 고야인 듯 하며, 등뒤에서 외치는 자는 고야의 청각 상실을 상기시키는 설정인 것 같다.
복장으로 보아서는 깊은 산중의 수도사들로도 보이는데, 교회나 수도회를 탄압했던 나폴레옹 정책을 비판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아무튼 갑갑한 시대상에 대한 고야의 자조적인 내면 심리가 이들 <검은 그림> 연작에서 자주 표출되고 있다.
두 마술사(1820~23)
검은 그림 시리즈 중 하나로 <스프를 먹는 2명의 노인>이라고도 불린다. 1828년의 목록에는 <2인의 마술사 >로 기재되어 있다. 노파가 스푼을 들고 웃음 짓고 있으며, 오른편의 해골 같은 노인은 두터운 책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 지식인을 조소하는 듯도 하고, 물질주의를 비판하는 내용같기도 하다.
어쩌면 허위적이고 공허한 남녀나 부부 관계에 대한 고야 특유의 염세적 심정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계통 그림 중에서도 음산하고 전율을 느끼게 하는 강도가 특별한 그림임에는 분명하다.
성 베드로의 참회 (1823-25), Phillips Collection, Washington
고야가 조국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에 망명하기 직전에 그린 작품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천국의 열쇠를 바위 위에 놓고 기도하는 성 베드로 상이다. 간결한 구도속에 그 어떤 장엄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베드로의 표정에서 삶의 비애가 선연하게 느껴진다. 화가 자신의 내면적 느낌을 가장 중시했던 엘 그레코 풍의 사도상(使道像) 그림들과 많은 면에서 흡사한 예술적 감각이 군데군데 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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