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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소개글 10: 폴 고갱(1848~1903)의 그림 세계

백조히프 2018. 4. 26. 15:53


폴 고갱(1848~1903)의 그림 세계

 

 

작성자: 김재민

2006. 11. 12


고갱은 1848년 2월 혁명의 여파로 정치적 소요가 심했던 시절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남미로 이주해 페루의 리마에서 4년 간 머물렀다. 이 시절의 이국생활이 후일 남태평양의 섬에 대한 동경심을 키운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865년 하급선원이 되어 대서양 항로를 오가는 무역선에서 일했고, 몇 년 후 파리 소재 금융회사인 베르탕 상사에서 근무했다.  



캔버스 앞 자화상

팔렛을 든 자화상(1894)

1873년 거리에서 알게 된 덴마크 여인 소피와 결혼해 다섯 아이를 얻으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고갱의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부터인가 '회화의 악마'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27~28세 때부터 인상파 작품을 수집하며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6년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하여 피사로, 세잔 등 인상파 화가들과 사귀게 되었다. 특히 피사로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본격적인 화가가 되기로 결심해 1883년 증권거래소 직업을 포기했다. 그러자 곧 생활이 어려워져 부인과 자식들은 고갱을 떠나 코펜하겐으로 가버렸다. 

 

1886년 6월에는 생활고에 지친 나머지 남불 퐁타방 지역으로 이사한 뒤 종래 인상파 풍의 외광 묘사기법을 탈피해 자신만의 명확한 선과 특이한 색조로 구성되는 장식적 화법을 추구했다. 같은 해 11월 파리로 다시 돌아와 고흐와 로트렉 등을 알게 되었다. 

특히 고흐와 깊이 사귀게 되어 1887년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 섬을 다녀온 뒤 아를 지방에서 잠깐 같이 살게 되었다. 하지만 화풍과 기질상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차이점들이 속속 발견되어 심각한 갈등을 겪다 고흐의 귀 절단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갈라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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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과 고흐가 묘사한 지누 부인>


고흐, '아를의 여인 지누부인'(1888)


그림 속 주인공은 아를의 한 카페 여주인인 '지누 부인'인데 고흐는 그녀의 왼쪽에서, 고갱은 오른 쪽에서 동시에 그리게 되었다. 고흐는 그녀를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하기 위해 아를의 전통 민속옷을 입도록 부탁했고, 책 좋아하던 자신의 취향을 배경 속에 반영해 몇 권의 읽던 책을 테이블에 펼쳐놓았다.

실제로 부인 뒤에는 술 취한 손님들과 동네술집 특유의 흐트러진 분위기가 보였지만 고흐는 그 배경을 과감히 생략한 채 자신이 꺼집어내고자 했던 그 부인의 숨겨져 있을 수도 있는 그윽하고 고혹적인 내면을 표현하는데 전념했다.


고갱, '아를의 밤의 카페'(1888)


반면 고갱은 고흐의 이러한 예술관을 작위적이라고 못마땅해 했다. 있는 그대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 모습을 포착해 내려 애써는 고흐의 그림관을 억지스럽다고 이맛살을 찌뿌린 것이었다. 고흐가 45분만에 '지누 부인'을 완성한 데 비해 고갱은 구도를 잡는 스케치만으로  이 자리를 뜬지 한참 후에 그림을 완성했다.

고흐가 놓은 몇 권의 책 대신 압셍트 술병과 술잔을 놓았고, 고흐와 친하던 우체부 룰랑을 비롯한 술집 손님들을 창녀들과 히히덕거리는 속물들로 묘사하며 지누부인 역시 계산빠른 창녀 뚜쟁이 같은 모습으로 그려놓았다. 술에 취해 널부러져 있는 인물은 고흐의 동네친구로써 고흐와 그림도 같이 그렸던 군인 밀리에였다.


이렇게 고흐가 좋아하던 이웃들과 지누부인을 모두 타락한 인물들로 좀 과장되게 묘사한 것에 대해 고흐는 고갱이 자신의 화풍을 속으로 꽤 많이 업신여긴다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불만들이 누적되어 고흐는 고갱에게 술취한 채 권총을 겨누다 자기 귀를 자르는 엽기적 사건을 일으켰고, 둘의 짧았던 동거생활은 파국을 맞아 고갱이 타히티로 떠나게 된 단초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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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해져 마침내 1891년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떠났다. 유럽의 문명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현지인들과의 교유를 통해 원시적 삶의 역동성을 만끽하며 서구 미술사를 크게 바꾸어 놓을 뛰어난 명작들을 차례차례 만들어 내었다.

<해변의 타히티 여인들>, <이아 오라나 마리아>, <언제 결혼하려나>, <아레아레아> 등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그럼에도 타이티에서의 현실적 생활은 여전히 빈곤과 고독, 그리고 병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에 매료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시련 속에서 인생 후반부에 만개한 그의 예술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고갱은 인상주의에 접하며 회화세계에 입문했지만 인상주의가 추구했던 시각적 효과보다 꿈과 상징, 그리고 내면성에 더 비중을 둔 표현을 선호했다. 이를 위해 점묘적 기법보다 널찍하게 분할된 원색 화면과 평면적 구성으로 대상의 장식성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회화정신은 문명과 관습에서 무한히 자유로운 원시주의로 흘렀고, 드디어 타히티의 원시림 속에서 강렬한 색채와 건강한 인간의 내면에서 뿜어 내어지는 근원적인 역동성을 발견하여 완성시킬 수 있었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1891)

 

이 그림을 처음 대했을 때 받는 인상은 색채의 화려함과 풍성함, 그리고 다채로운 충실감일 것이다. 오른 쪽 앞에 아이를 어깨에 태운 채 비스듬히 선 여인, 그 옆쪽에 두 손을 모으고 경배를 드리려는 듯 한 몸짓을 보이는 두 여인은 물론이고, 주위 풍경인 바나나 배경의 수목, 꽃, 잎사귀, 나무 사이의 오두막에 대한 각각의 명확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가 바로 그 인상을 구성하는 대상의 내용들이다.

어느 한 구석도 과감한 생략 없이 색채와 형태로 메워진 것이 인상파인 모네나 피사로의 그림들과 구별되는 고갱의 회화 세계이다. 다시 말해 고갱은 공간보다는 이국적인 장식성을 추구함으로서 입체감이 있는 광대한 공간을 화면에 붙잡으려 하지 않고 2차원의 화면 그 자체에 그 어떤 틈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이다.  

 

이 그림의 의미 내용에 대해서는 화면 왼쪽 구석에 고갱이 써넣은 그림의 제목인 <IA ORANA MARIA>의 글귀가 단서처럼 여겨진다. 이것은 "마리아여, 우리는 당신에게 예배를 드립니다"라는 타이티 말로 기독교의 '아베마리아'에 해당하는 뜻이라 한다. 그렇다면 고갱은 타히티섬의 정경을 그리면서 서구의 기독교적 의미를 넣은 셈이다. 요컨대 분명히 의도적으로 타히티인 마리아와 예수를 그리려 한 것이다.

어머니와 아이의 머리 위에 걸려 있는 원광이나 두 타이티 여자의 경배 모습이 영락없는 실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얼핏 이국 풍물 정경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기독교적 도상화를 바탕으로 한 타히티 버전의 성상 종교화이다.           

 

      해변의 타히티 여인들(1891)

 

고갱은 타히티에서 나른한 여인들의 자태와 우수 어린 시선 등에 매료되었다. 그는 이 그림에서 해변가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을 아주 가까운 근경에서 묘사했는데 대담한 구도와 색채가 돋보인다.

반면 화면이 전면의 여인들이 앉아 있는 공간과 뒷 배경을 구획짓는 수평띠에 의해 강조됨으로서 그 깊이감은 약화되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대로  고갱이 의도한 바이다. 왼쪽 여인의 옆 얼굴과 앞으로 내민 오른 팔, 오른쪽 여인의 뭉툭한 발바닥과 툭 불거져 나온 무릎 선이 이루어내는 시각적인 조응은  화가의 치밀한 장식적 조형의식을 반영한 것이리라...  

 

언제 결혼하려나(1891)

 

타히티의 원주민 처녀 두명이 순진무구한 시선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앞의 처녀는 뒤의 처녀와 달리 조신한 포즈를 잡으려 해도 자신의 내면에 들어있는 활기찬 에너지를 더 이상 감출 수 없다는 듯 동적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강렬한 원색으로 이글거리는 원시적 생명력을 가감없이 표출시킨다. 

 

아레아레아(1892)

 

이 그림의 중앙에 그려진 땅은 따뜻한 색상으로 채워지고 있는데 실재하는 것이 아닌 상상의 공간이다. 있는 그대로 대상을 재현하려 하지 않고 선과 색의 배열 사이에 있는 그 어떤 신비감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왼쪽 위에 부드럽운 색상으로 채색한 신상은 달의 여신을 나타낸 것이고, 중앙의 인물이 연주하는 피리는 타히티의 밤에서 고갱이 느낀 고요함을 표현한 것이다.

왼쪽의 불그스름한 털 빛의 개는 그 어떤 악의 이미지로 대비시키기 위해 고갱이 집어 넣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마치 티치아노나 조르조네와 같은 르네상스의 거장들이 이원적 대치를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자주 등장시켰던 화면적 공식을 타히티의 무대에서 한번 실험해 보려는 듯이... 

    


 귀신이 지켜 본다(1892)

 

이 그림에 나타난 모델은 고갱이 타히티에 와서 얼마지 않아 동거하게 된 현지인 처녀 테후라이다. 고갱은 그녀의 모습을 통해 마오리족 사이에 살아 있는 당당한 원시적 생명력을 구현하려 한다. 이목구비가 크고 갈색 피부가 윤기 있는 마오리족 남녀는 이교의 신상을 연상시키는 모델로서 고갱에게 아주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정복자 코르테스의 현지처 말린체처럼 이국적 에로티시즘을 자극하는 테후라 임에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처녀는 화가의 주요 작품에 단골 모델로서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서 흥미있는 것은 인물의 배치와 구성은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듯해 고갱이 겨냥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마네의 <올랭피아>에서처럼 테후라의 도발성이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가 그들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1893)

 

이 자화상은 파리에서 타히티로 귀국해 그린 것인데, 자신의 1889년 작 '황색의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놓고 있다. 1889년 당시 예수를 농부같이 표현하여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그런 예수의 형상이야 말로 자신이 애호하는 질박한 신적 영상이라 여겨 자화상과 같이 놓음으로서 다시 한번 탄탄한 애정을 보여준다.    

 

자화상(1893~94)

 

1895년 파리생활을 청산하고 타히티로 떠나기 1년 전에 그린 그림으로 자신의 마지막 자화상이다. 앞서 제작한 다른 2점의 자화상에 비해 훨씬 어두운 색조로 그려져 이 당시 고갱의 힘겨웠던 생할 환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자신의 그림을 배경 속에 집어넣고 있다. 그 그림은 1892년에 그린 <마니오 투파파우>로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신의 날(1894)

 

이 그림은 고갱이 1894년 일시 파리로 귀환해 그린 작품이지만 단순하고  명쾌한 색채 구사가 완전히 타이티풍으로 정착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브루타뉴 시절 고갱이 추구하던 종교적 체험을 화폭에 담는 제작 모티브는 여기서도 실행되고 있으나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에서 추구하던 성서적 주제는 이제 토속신의 이미지로 대치되고 있다. 

   

다시 없을 타히티여 Never More, O Tahiti(1894)

 

 

고갱은 원시부족 신화와 이국적인 여체를 통해서 서양미술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염원을 끝까지 밀고 간다. 물론 긍극적으로는 서구 문화를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내심을 보유한 채... 그러나 타이티 생활이 시간과 함께 정착되어감에 따라 자신의 이곳 생활에 대한 자부심을 점점 자주 표출한다.

병마로 인한 죽음의 시간이 가까와 올수록 "나는 고상한 미개인이다. 문명은 첫 눈에 그것을 알아챌 것이다. 나의 그림에는 이런 서구적 관념을 초월하는 회화정신이 배어있다. 결코 그 누구도 이를 모방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며 자신의 만년 타히티에서의 생활에 자부심과 애정을 드러내었고, 그 심정이 이 그림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   

 

백마(1897)

 

타이티에서 그린 그림들 중 여기에서만큼 아늑한 목가적 분위기가 풍겨나오는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짙은 푸르시안 블루의 웅덩이에서 물을 마시는 하얀 말과 늪가에 피어있는 흰꽃, 붉은 말등에 앉아 등돌리고 가는 여인 등 풍경 전체가 이상한 침묵 속에 빠져있는 듯해 신비로움까지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