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영화-작가미상 리뷰

백조히프 2020. 4. 15. 10:01

​영화-작가미상 리뷰

글쓴이: 김상일


2018. 10. 6



자신의 첫 장편 <타인의 삶>(2006)을 이후 다시 독일의 격동기로 돌아온 플로리안 헨켈
폰 돈너스마르크 감독(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국내에서도 많은 감상자들의 공감을 자아낸 <타인의 삶>으로 유명한 플로리안 헨켈 폰 돈너스마르크 감독 은 다시 한 번 독일의 분단역사에 눈길을 향한다. 이번에도 관심은 한 ‘타인’이 불러일으키는 한 개인의 인생사에 대한 파장이다. <타인의 삶>에서 타인을 비츨러가 드라이만에게 행하는 행동으로도, 그리고 드라이만이 비츨러에 대한 헌사를 표하는 것으로도 읽어낼 수 있었지만, 이러한 나약한 개인들의 협력을 선행하는 거대구조의 거대한 타율성 또한 <타인의 삶>의 가장 주요한 '타인'이었다.

​▲ 게하르트 리히터의 생을 영화로 옮긴 <작가 미상>(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그래서 돈너스마르크는 그러한 거대한 타인의 영향을 다시 한 번 포착한다. 여전히 그러한 타인의 영향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는 예술가의 시선에서, 그리고 2차대전을 겪은 이후 분단을 겪고, 이후에 동독에서 서독으로 옮겨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타인으로써의 국가가 일으킨 파장과 상흔을 결코 지워내리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본 영화 <작가 미상>에서 포착한다. 영화의 연출은 보다 전형적인 내러티브 영화의 구성을 따른다.


독일의 화가 게하르트 리히터의 일대기를, 쿠르트라는 이름을 대신 내세운 예술가의 일대기를 연대기 순으로 포착하고, 그 인물에게 기록된 거대한 역사의 상흔들을 포착한다. 2차 대전이나 독일의 분리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포착하고 무겁게 진행될 법도 하지만, 한 개인의 일대기에 더 초점을 두는 만큼 보다 가볍고 일상적인 씬들 또한 주를 이룬다.

<작가 미상>중에서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시점숏과 대비에 있다. 우선 시점숏은 쿠르트의 이모인 엘리자베트에 의해서 포착되는데, 진실을 목도하는 시선을 결코 굴해서는 안 된다는 강건한 천명이요, 국가 및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타인’으로부터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에 상응한다. 그리고 대비의 경우 거대권력의 차갑고 권위적 임을 차갑고 딱딱한 숏들로 드러내는 반면, 보다 일상을 살아가는 쿠르트를 둘러싼 삶을 포착하는 숏들은 역동적이다.

이는 제반트의 권위적이고도 지배적인 정사와, 엘리와 보다 상호교류하는 부드러운 정사를 나누는 쿠르트의 장면을 통해 보다 극적으로 대비된다. 극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이전, 중심인물 쿠르트의 직접적인 모델이 되는 게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세계를 간략히 살펴보고 가자.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업은 사진을 회화로 옮겨내는, 사진회화(포토페인팅) 작업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그의 사진회화 작업은 마치 포커싱이 나간 사진처럼, 미메시스(모사, 模寫) 과정을 거치며 피사체를 의 도적으로 불투명하게 그려내거나, 대상의 이목구비에 짙은 색채를 강렬하게 덧칠해내는 등 단순한 재현에 서 멀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렇게 모더니즘의 끝자락에서 사진과 독자적으로 회화만이 가능한 재현을 모색한 작가라 할 수 있다.

리히터는 이러한 화풍을 통해 기계적이고 투명하게 찍어내는 사진이 아닌, 명백한 작가의 개입을 드러낸다. 이렇게 주관성을 개입하며 사진을 미메시스하는 리히터의 작업은 사진을 온전히 미메시스하지 않으며, 그의 작품 자체가 현실과는 또 다른 독립적인 층위를 지니는 하나의 시뮬라크르(상사성, 相似性, 원본과 복제물 사이에 級이 없이 서로 주고받는 놀이)로 작용한다. 사진이 무한 복제되는 시뮬라크르라면, 리히터의 회화는 대량복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작품의 단수성은 왜 그려져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이는 그가 선택한 사진들의 주요한 일상성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는 피해자를 포착하든, 가해자를 포착하든 대단히 일상적이고, 심지어는 화목하며 친근한 사진들을 주로 택했다. 이를 통해 피해자에 있어서는 지배권력들에 의해 짓밟힌 일상의 평온을, 그리고 가해자에 있어서는 일상에서도 목격할 수 있는 보편화된 악을 포착한다. 그리고 사진으로 포착된 바를 다시금 그려내는 그의 회화작업은 이를 기억하기 위한 반성적인 행위가 수반되었다고 할 수 있다.

▲ 극중 크루트의 유년 시절 예술적 영향을 끼친 이모 엘리자베트(사스키아 로젠달)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영화는 이러한 게하르트 리히터의 유년기에 해당하는 2차대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리히터가 투영된 어린 쿠르트에게는 이모 엘리자베트에 의해 진실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한 진실을 바라보는 시선을 결코 굴하지 않아야 함을 계승받는다. 온 세계가 나치즘 및 파시즘의 광기에 휩싸여도, 그리고 나치들이 모더니 즘 미술들을 퇴폐미술이라 규정하고 탄압하여도, 그러한 예술의 자율성 및 퇴폐미술이라 규정된 바에서 드러나는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치들이 지향하는 고전으로의 회귀는 진실을 드 러내지 않는다. 그들이 바라는 그리스 고전주의의 이상화는 오히려 현실의 왜곡에 다름 아니다. 진실은 그 들이 현실을 왜곡하여 화폭과 매체 속에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퇴폐미술 속에 녹아있다. 그 ‘왜곡된’ 표현이야 말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진실한 고통의 투영에 다름 아니다. 이는 오프닝에서 퇴폐미술 전시회에 가는 엘리자베트와 쿠르트를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엘리자베트가 육화한 예술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것은 온 몸으로 청각을 느끼며 이 세계와 교응하고 공명하는 것이요, 결코 진실을 마주하는 시선을 굴하지 않고 있지만, 시대의 물결이 굴복하기를 강요하며 행하는 폭력과 고통을 드러냄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본인에게 육화된 예술을 드러내는 엘리자베트는 이내 곧 광인으로 낙인찍힌다. 이렇게 엘리자베트가 광인으로 낙인찍히며 나치즘이 행했던 우생학을 통한 비인류로의 추락이 포착된다.

위대한 아리아인들만이 지배하는 이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그들에게 열등하다 여겨지는 인종들을 학살하고, 더욱이 그러한 아리아인으로서의 보편성에서 벗어나는 이들과, 그 기준에 못 미치는 열성들을 사회로부터 소거해낸다. 그들에게 인권은 모든 인간이기에 누리는 당연한 권리가 아닌, 우월하다고 규정된 인간들이 누리는 권리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보편화를 일삼는 그들에게 진실한 예술을 육화하여 그것을 내비치는 엘리자베트는 광인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광인은 그들의 획일화를 위협하고, 무엇보다 진실을 내비치는 광인은 그들이 단단히 유지시키고 싶어 하는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렇기에 그들은 우월성을 지향하고 거짓을 일삼는 그들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광인을 이 세계로부터 제거해낸다. 하지만 그 광인의 정신은 쿠르트에게 이미 계승되어 있다. 이렇게 나치즘 및 파시즘의 광기가 온 유럽을 뒤덮은, 인류가 비인류로 추락한 시대가 끝이 나지만, 이내 곧 독일은 포츠담 조약 및 이념대립 속에서 분단을 겪는다.


▲ 영화 속 쿠르트가 대학 수업 시간에 그린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림(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반면 나치즘 및 파시즘과 열렬히 대립하던 소련은 여전히 퇴폐미술에 대한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나치즘이 지향하던 고전주의로의 회귀는, 그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강령 하에, 특히나 예술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레닌의 모델만을 지향하며 예술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예술은 개인의 삶을 반영하지 아니하고 국가에 의해 집단적으로 주도되어 그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여전히 전락된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가 열어젖혀졌지만 쿠르트에게 진정으로 새로운 시대는 열리지 않는다. 그는 선전화를 그릴 뿐이 고, 한스 홀바인의 <헨리 8세의 초상>을 연상케 하는 제반트의 권위를 비호하는 초상만을 그릴 수밖에 없다. 역사 속에서는 전쟁은 완전히 종언되고, 이러한 과거를 완전히 청산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만 같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연속선상, 특히나 그 과거와 현재가 거대 구조 및 이데올로기와 연관된다면, 나약한 한 개인은 이로부터 온전히 자유롭기 어렵다.

더욱이 이는 여전한 우생학의 사상에 젖어있는 제반트가 우월한 이와 결혼하여 자손을 낳길 바라는 야욕 속에서 엘리의 낙태를 행하고, 그녀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기에 이른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한 개인을 구속하는 과거, 특히나 그러한 과거를 답습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쿠르트와 엘리는 탈출한다. 서독으로 향하여 자유로운 삶을 펼쳐낸다. 거대구조가 개인을 구속한다면, 그 거대구조로부터 탈출하여 이에 결코 순응하지 않겠다는 주체적인 두 명의 인간의 여정이다. 포스트모던의 담론들이 활발히 전개되는 뒤셀도르프로 향하여, 진정으로 자유로운 예술을 행한다.

쿠르트는 회화를 구식이라 칭하고, 해체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예술만을 지향하는 그 ‘물결’ 속에 그저 고찰 없이 가담하지만, 이내 곧 그 흐름에도 반하는 진정한 자유를 행한다. 그것은 예술의 자율성, 타인이 뭐라 평하더라도 자족적일 수 있다면 이에 굴하지 않는 예술의 자유, 그리고 엘리자베트가 쿠르트에게 일깨운 정신인 진실을 포착하는 자유이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고통이란 이름의 진실들, 쿠르트는 그것을 회화를 통해서 드러낸다.

▲ 극중 중요한 그림으로 재현된 '마리안네 이모'(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사진이 온전한 진실이라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사진보다 불투명하기에,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바는 지속적으로 유실되어가 희미하기에, 미메시스 하면서도 이러한 우리의 진실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과거의 답습이 아닌, 과거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고 과거와의 연속선상은 반성작업으로 이어져 우리와 구 조를 규정해야 한다는 바를 드러내기 위한 그의 트랜스 아방가르드 작업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물들은 현실의 피사체들을 미메시스하지만, 그 대상들을 지칭하진 않는다. 쿠르트는 이모와 자신이 놓인 그 작품 속에서, 재현된 대상이 이모임을 밝히지 않는다. 중요한 바는 그렇게 표현되는 바의 진실이다. 여인과 아이가 함께 놓인 바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진실성 그것만이 중요한 바다. 그것이 누구인지, 누가 찍었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표현한 바가 진실인지 아닌지 만이 중요할 뿐이다.

▲ 쿠르트는 진실을 그리려 한다. 억압적인 구조 속에서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엘리도 불임판정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아이를 잉태하는 등, 쿠르트와 엘리의 일대기는 부정의 과거에 대해서는 반성을 취하거나 이러한 구속을 뛰어넘으려 하는 주체성의 몸부림을, 긍정의 과거에 있어서는 이를 계승하는 여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과거라는 필연적인 바를 어떻게 마주해나가야 할지에 대한 방법론이 녹아있다.

이러한 그들 여정의 끝은 수미일관성을 취한다. 엘리자베트가 버스 경적소리를 온 몸으로 느끼던 그 육화된 예술을 쿠르트가 행하며, 다시금 복권된 엘리자베트의 정신을, 그리고 비로소 가능해진 진실과 자유의 시대를 천명하는 것이다.

방대한 볼륨 속에서 펼쳐진 독일의 일대기이자 예술의 일대기, 전자에 있어서는 2차 대전 및 나치즘의 시기와 분단시기를 관통해내고, 후자에 있어선 퇴폐미술로 규정된 모더니즘의 시기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기, 그리고 포스트모던의 시기를 관통해낸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은 거대한 타인으로서 결코 외면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흐름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야 함을, 그리고 범람하는 거짓 속에서 진실을 굴복해서는 안된다는 감독의 전언이 녹아있다.


한편 이러한 역사를 포착하기 위해 택한 3시간에 달하는 방대한 볼륨이 과연 적절했는지 의문이 들며,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는 제반트의 진실을 밝혀낼 것만 같은 태도를 취하다가, 그저 일련의 죄책감을 자극하는데 그치고 마는 맥거핀으로 소비되어 버린 전개는 본 영화의 한계로 느껴진다.

감상일 : 181006 제23회부산국제영화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