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온 길영공을 만나다
2021. 1. 8
작성자: 김재민
어제(1/7) 집안 일 처리하러 11월 중순 부산에 잠깐 귀국한 이길영공이 부인과 송도해수욕장 입구에 있는 부부 소유 아파트에 지난 12월 초부터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소생도 며칠 전 부산에 내려왔었기에 후딱 방문하고 왔네요.
부산 날씨도 어제는 역대급으로 추웠지만 백민호 총장으로부터 전해 받은 폰번호로 연락해 쇠뿔도 단김에 뺀다는 심정으로 달려가 반갑게 해후하고 저녁까지 잘 얻어먹고 돌아왔심다. 전화를 받은 길영공은 예의 호탕한 웃음으로 ‘Anytime, Welcome!’이라 반겨주며 아파트명과 위치, 찾아오는 길을 찬찬히 알려주데요.
오후 3시반 경 냉장고에 있는 사과와 천일봉 등 과일 몇 개와 굵은 밤 여나믄개, 마스크 2개를 보따리 장수처럼 챙겨 좌천동 집을 출발했심다. 시키는대로 부산역 앞에서 26번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내리니 그 앞에 있는 파리바켓트가 보이데요. 거기에 들려 몸이 불편한 부인을 위해 파운드 케익 하나와 제 처 박모도 좋아하는 슈크림, 소보루 등 빵 한 다섯 개를 사서 나오자 때마침 도착한 26번에 얼른 올라탔심다.
이 버스가 충무동을 지나 송도 밑길을 달릴 때 그 옛날 고1 시절 호연지기를 키운답시고 자전거로 서대신동 집에서 도청과 경남중 앞을 지나 충무동으로 접어들어 같은 길을 달렸던 그 시절이 불현듯 떠오릅디다. 1970년이었으니 벌써 50년도 더 흘렀네요.
길거리 코스는 여전했지만 주변 건물들은 많이 바뀌었고, 팔팔했던 까까머리 소년이 어느 새 60대 중후반 노인이 되어 이 길을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로이 촉촉해집디다. 감상에 젖기도 잠깐, 부산역에서 20분도 채 안 걸려 길영공의 기산비치타운 아파트가 보이는 송도해수욕장 정류장에 닿았기에 아쉽게도 하차할 수 밖에 없었네요.
길을 건너 단독세대가 사는 이 주상복합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니 1층에 우리마트라는 대형슈퍼점이 있었고, 그 옆에는 여러 장르의 음식점들이 코로나라 드나드는 손님은 뜸했지만 그런대로 아파트 주민들에게는 안성마춤 격으로 포진하고 있었심다. 주거환경은 아주 그저그만이라 할 정도로요.
7층으로 올라가 벨을 누르니 길영공과 싸모님이 환한 얼굴로 맞아 주었심다. 길영공의 사람좋은 미소빨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싸모님은 큰 병치레한 사람답지 않게 하얀 얼굴에 소담스러운 자태를 보여줍디다. 거동이 많이 불편할거라고 지레 짐작했던 부인이 휠체어 신세도 안지고 반듯하게 서있어 크게 안심이 되었네요.
대화술은 약간 어눌한 발음에 느린 말 속도였지만 길지 않은 자기 의사는 충분히 전할 수 있었고, 길영공과 내가 하는 속사포같은 대화도 거의 다 알아듣는다 해 아, 작은 기적이 일어났구나 싶습디다.
길영이 이 문디가 맨날 우리 홈피에서 신체마비된 늙은 마누라 가리늦게 재활훈련시킨다고 자신의 황금같은 노년이 다 떠내려간다며 징징거리던 푸념들 속에서도 드디어 그 지극정성을 보답받고 있다고 여겨지데요. 순간 내가 다 콧등이 찡합디다.
싸모는 작은 봉지 두 개나 들고온 김모가 크게 기특했던지 자리에 앉아서 대화하는 중간에도 내 앞에 뭣이 떨어지면 자기서방에게 얼른 다시 채워놓으라고 교시를 내려쌌데요.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이 있는 법.. 소생도 마님 모시는 충복처럼 길영공이 자기집 여동생들과의 유산송사에 대해 신나게 떠드는 중에도 내가 고개를 돌려 우리 대화 말귀 다 알아듣느냐고 상태를 살피면, 염화시중의 미소 속에 고개를 끄떡여 줍디다. 나도 내친 김에 길영공이 내어놓은 귤을 하나 까서 앞에 놓아 권하니 ‘니, 합격!’하는 눈도장을 날려주데요.
여러번 우리 홈피에서 길영공이 호소했던, 물욕에 눈이 어두워 외동오빠와도 안면몰수하고 재판송사를 불사하는 아래 두 여동생과 그 배우자들 4명을 상대로 펼쳐지는 유산 유류분 분쟁에 대해 손님 접대한다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 입담을 뿜어내기에 중간중간 추임새도 넣어주고 중간 휴게타임도 가지며 열심히 들었심다.
4명이 대형로펌 세종에 송사를 의뢰해 그쪽 변호사 4명이 달려들어 길영공의 약점을 찾으려 기를 썼지만, 멘탈 갑인 길영공이 장풍으로 막으며 꿋꿋하게 버텨내자 이제는 꽃놀이패 같은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며 근 1시간에 걸친 이바구가 대미를 찍을 무렵, 본인의 결혼 스토리에 대한 질문으로 테마를 드디어 돌렸네요.
부산출신인 부인 임명숙 여사는 59년 돼지띠로써 일찍이 은화여중->부산여고->부산대 약대를 나온 빵빵한 학력을 자랑하며 탄탄한 약국집 외아들 길영공과 서로 아다리가 맞아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다 합디다. 그런데 임여사가 문제의 막내 여동생 친구라 하니 참 인생만사가 오묘하다고도 생각되네요.
하여튼 타계하신 길영공 부친께서 며느리가 어찌나 흡족했는지 임여사 명의로 본 아파트를 한 30년 전에 증여했다 하니 그 선견지명 덕분에 치열한 남매간 송사전에서도 끄떡없고, 코로나 사태 중에도 부산에서 든든하게 머물 생활공간이 있게 된거라 여겨집디다. 길영공이 매일 업어줘도 그 공덕이 가당치가 않을텐데 다행히도 이 아재가 알아서 잘 기데요.
집을 둘러보니 전세인이 얼마 전에 집을 비운 탓인지 가재도구는 아무것도 없이, 식탁겸 노트북 올려놓고 작업할 수 있는 탁자 하나와 대우 클라세 냉장고가 주방에, 안방에는 이불과 요 밖에 없는 무소유적 단촐한 절간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디다. 그럼에도 송도 앞바다와 주변 위락시설들이 거실에서 한 반 쯤 보이는 멋진 공간이라 하겠데요.
길영공은 최소한 5월까지는 이곳에서 머물 것 같다고 얘기하데요. 매일 지팡이 잡고 완전무장한 임여사를 부축하여 송도 해변가를 재활훈련겸 산보를 하고는 집에 들어와 자신은 인터넷 놀이동산에서, 싸모는 맞은 편에서 아이팟으로 유튜브 탐색여행을 다정하게 하는 노년의 귀거래사를 쓴다고 합디다.
지금 우리 홈피에서 찾아주는 이는 별로 없어도 유럽사와 세계지리, 근세문예사에 관심있는 한 줌의 친구들은 적지않은 호응을 보이는 ‘미리 가보는 여행기’ 시리즈를 지금처럼 관련 자료들을 찾아 계속 꾸준히 작성하며 내년 쯤 와이프와 실제 탐사여행을 해보려는 야무진 꿈을 갖고 있다 하데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우다 배에서 꼬로록 소리가 나자 아파트 1층 음식가로 가서 우리 둘이는 곰탕, 임여사는 선지해장국을 시켰심다. 아니 단아한 여인이 선지국도 들 수 있는가비요? 하고 물으니 우거지 국물을 먹기 위해서 주문했다고 합디다. 선지는 손도 안되고요.
아무튼 우리는 모처럼 만나 편안한 얘기 많이 나누고 저녁도 같이 하며 늦은 오후부터 초저녁 시간 잘 보냈심다. 코로나 사태도 좀 완화되고 봄기운이 서리는 3, 4월에 한번 더 만나기로 약속하고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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