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코로나로 얼룩진 2020년을 보내며

백조히프 2020. 12. 27. 15:06

코로나로 얼룩진 2020년을 보내며

 

2020. 12. 23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가 코로나 펜데믹으로 움츠러든 한해를 보내는 지금 이 시점에서 감회가 새롭다. 남들처럼 수입원이 많이 봉쇄당해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빡빡해졌지만, 다른 한켠에서는 새로운 도전적 삶을 경험할 기회도 더러 있었기에 마냥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이제 열흘 정도면 또 바뀔 한 해를 보내며 올해 일어났던 일을 정리할 겸 반추해 본다.

 

1. 경성대 퇴임과 지식서비스업 준비

 

작년 12월 중순 마지막 2학기를 보내며 나의 사실상 경성대 생활은 끝이 났다. 4년 근무했는데 65세 생일이 다가오자 어김없이 떠나야 하는 상황이라 많이 아쉬웠다. 마음은 아직 한번도 노년이라 생각한 적 없이 한창이라 여기는데도 자연 나이와 사회적 나이는 어느 듯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아야 하는 노약자 계층에 들어서게 되었다.

 

<좌천동 집 거실>

지하철과 전철도 공짜, 노령연금도 수입이 없어졌다고 19만원이나 받게 되고, KTX 같은 고속철도 경로우대 30%의 승차권 할인까지 받는 반갑지만, 사회로부터는 생산가능 인력에서 열외가 되는 상황이 다가온 것이다. 남은 2, 30년 정도를 메꿔갈 생각을 해보니, 정기적 수입은 떨어졌지만 국민연금과 노령연금을 합해 120만원을 기본 버팀목으로 삼아 강의와 용역 같은 지식서비스 수입이 매월 50~100만원 정도만 들어온다면 그런대로 최소한의 생활은 꾸려나갈 듯 했다.

 

물론 코로나 때문에 올 한해 강의 수입은 한푼도 없이 여름에 재난지원금 45만원, 가을 석달 간의 지식서비스 용역비 210만원이 내가 창출한 수입이었다. 하지만 주식에 신중하게 밝은 와이프가 보유주식가들의 꾸준한 상승으로 차익실현하며 벌어온 수입도 있어 이런 추세 속이라면 최소한 밥은 굶지 않고 지식서비스업 기반을 좀 더 오래 구축해도 되리라 싶었다.

 

<액티브 시니어 관련 도서>

 

2월 말 공식적인 퇴임 후 액티브 시니어층을 겨냥한 플랫폼 사업을 하려 옛 제자들과 창업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응모했지만 바로 되지는 않아 좀 더 여러번의 정교한 수정을 거쳐 내년에 다시 응모해 보리라 마음을 느긋하게 잡았다. 시기가 무르익을 때가 조만간 도래하리라 기다리면서..

 

2. 영산대에서 우연히 시작한 법학공부

 

2월말 그 앞 해에 편의점 하며 본부와 송사가 벌어질 뻔했을 때 많은 법률적 조언을 해준 독일 유학 후배이자 영산대 법학과에 봉직 중인 서교수가 내게 전화가 왔다. 혹시 20~30대 중 대학공부 하고 싶어하는 똘똘한 젊은이 아는 사람 없냐고.. 왜 그러냐 하고 물었더니 자기학교측에서 유망한 학생들 한 15여명 정도 첫학기 입학금 면제와 전액 장학금으로 유치하고자 교수들에게 1명씩 데리고 오라고 할당을 했다는 말을 전했다.

 

내가 경성대 제자들 많이 알고 있으리라 여겨 부탁했지만, 몇몇 친구들에게 운을 띄워 보니 취업공부 하기도 바쁜데 첫학기 장학금만 받고 양산에 있는 대학까지 다니며 법학공부 새로 시작하려는 친구들은 별로 없었다.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올라 그 자리 내가 가면 어떻겠소?’ 하고 물으니 잠깐 멈칫하다 그래요.. 못할 것 없지요. 선배님이 와주신다면..’.

 

난 사실 편의점 건으로 도움 조언 많이 받은 답례 차 서교수의 할당 인원을 손쉽게 채워주려 한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 옛날 독일에서 경영학 박사 구두시험에 최종 합격하고는 서교수 부부가 만들어준 축하자리에서 이젠 서형 당신 전공인 법학공부도 조만간 시작해 봤으면 한다라는 공언을 법학에 대한 경원감을 담고 한 적이 있었기에 25년이 지난 지금 그 기회가 우연히 왔네하며 제안한 것이었다.

 

이렇게 영산대 법학과 1학년으로 시작한 늦깎기 법학공부는 장학금 떨어지면 맛만 본 것으로 만족하고 그만두려 했지만, 1학기에 들은 민법총론, 상법총론, 헌법 I, 형사정책, 친족상속법, 상사분쟁 캡스톤 등 6과목 모두 올 A+ 학점을 받아 과수석을 했다. 대면시험을 쳐도 미리 알려준 시험문제 3개 중 하나나 두 개를 준비해간 답안을 보고 써내면 되는 것이고, 시험 대체 리포트를 내야 한다면 이것 역시 보고서 작성에 이골이 난 본인에게는 수석하는 게 별로 어렵지 않게 만들었다.

 

원래 주간학부 1년생으로 들어간 것이었으나 학교 측에서 어찌된 일인지 수업은 야간 특수반 3~4 학년생들 속에서 받도록 해놓았다. 물론 원한다면 주간반 수업을 들어도 되지만 수강생 구성이 5, 60대 일반인 만학도로 구성된 야간반에서 같이 수업 듣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할 거라 배려해 그리했다는 학교 행정실 조교의 설명이 있었다. 내쪽에서도 뭐 그리 크게 따지고 들 일이 아니라 여겨 그렇거니 하고 받아 들였다.

 

<서교수집에서의 각 팀장 모임>

그 사이 동부산대에서 금융경제학과 2년을 마치고 여기 법학과 3년생으로 단체편입된 50대 여사들 몇 명과도 같은 신참생으로써 법학스타디 카톡방을 하나 만들어 이 아줌마들에게 내가 작성한 리포트들 올려서 공유하며 같은 만학도반으로써의 인연을 자연스레 다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국제시장에서 일제 생필품 양품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영천 출신 천여사가 나를 공부의 신처럼 떠받들며 틈만 나면 밥 사주기, 짜잘한 가게물건 선물하기, 대면수업 있는 날은 해운대 캠퍼스까지 승용차로 태워나르기를 확실하게 해주니 나도 내가 작성한 지적작업 물건들을 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집에서의 학습>

천여사를 통해 한국장학재단이란 곳에서 만학을 하려는 늦깎기 학생들에게 소득수준에 따라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차등 지원해 준다는 사실도 알았다. 야간반 학생 20여명 중 절반 정도는 이 혜택을 받아 등록금 전액 부담없이 대학공부를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지난 9월 신청했더니 약 한달 반의 심사과정을 통해 나는 공식소득 없는 퇴임자지만 차와 집이 있어 소득분위 7등급에 해당한다 해서 270만원의 2학기 등록금 중 한 80만원만 지원이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과수석 장학금을 예전 같으면 전액 받았겠지만, 코로나 상황이라 학생들에게 지원할 게 많아 수석 장학금을 70% 정도만 커버해 준다는 학교 재무팀의 연락은 이미 8월 말에 들었다. 그래서 내 부담 80만원 정도를 4번의 분할등록을 하며 장학재단에도 지원요구 신청을 했는데 마침 그 금액만큼 재단에서 지원결정이 내려져 나는 2학기도 수석장학금과 장학재단 지원금으로 내 돈 따로 들 것 없이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자기부담분이 생기면 학교 때려칠까봐 노심초사하던 천여사도 무척이나 이 소식에 반가와 했다. 이번 2학기도 법률영어, 비교공법, 행정법총론, 형법각론, 사회보장법, 채권법총론 등 6과목이나 동영상 강의 시청하고, 내가 작성한 중간 및 기말 리포트들 우리 그룹 여사들과 공유하며 무사히 마쳤다. All A+가 나올 것인가 하고 자못 궁금하게 기다리지만 어떻게 나오든 또 과수석해 재단 지원금까지 챙겨 법학공부의 길을 나아가리라 결심 중이다.

 

마누라는 우리 서방이 이러다 로스쿨까지 넘보겠네 하고 은근히 언감생심 하면서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졸판에서 A+ 학점 좀 받았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촐랑거릴 군번이 아님을 지금까지 세상 살아온 연식으로 잘 알고 있다. 다만 내년 학기에도 같은 상황이 되면 천여사와 우리 카톡방 여사들을 위해 재능보시도 좀 하며, 오래 전부터 살펴보고 싶었던 새로운 공부에 대한 호기심을 상황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 밝혀 볼 작정이다.

 

3. 자다 떡받은 큰 아들 개혼

 

7월에는 결혼하고는 거리가 멀 것 같았던 큰 놈 후명이에게 짚새기도 짝이 있다는 듯 지 결혼의 상수(常數)적 핸디캡 같았던 경제적 제약조건을 받아들이겠다는 안성마춤격 신부 후보가 나타나는 바람에 이게 웬 떡이냐 하며 11월 중순 결혼식까지 속전속결로 치루게 되었다.

 

<처음만남 자리>
<양가 상견례>

첫인사를 받는 자리에서 알아보니 이 친구도 가정적 상황으로 20대 초반부터 부모의 도움없이 스스로 자신의 앞길을 개척하며 대기업체에 들어갔고, 타고난 외모에 사람관계도 원만해 현재까지 직장내 자기 포지션을 잘 굳혀간 능력녀였다. 이재술과 세상살아가는 생활력 면에서도 후명이놈보다 더 능숙한 듯해 결혼하면 이놈을 채찍질하며 잘 조련해 한 10년 안에 경제적으로는 우리부부보다 더 나아질 것 같았다.

 

<김모의 성혼낭독>
<공식 기념 사진>

결혼식 과정도 나와 박애숙이 때와는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저그끼리 모든 것을 계획하며 일사천리로 진행시키는 것이었다. 양가 예물예단 교환 같은 것 일체없이 스몰웨딩 준칙을 지향하며 사원전용 예식장 빌리기, 확실한 인원예상 하객접대, 무주례 세레머니 등 필요없이 과시적이고 관례적으로 돈 들어가는 구석은 현명한 며느리 슬기 선에서 확실하게 걸러진 듯 했다.

 

<하이라이트적 장면>

맘에 쏙 들었다. 결혼 후 거처도 부모들에 손 벌리지 않고 저그들의 직장 신용으로 은행대출 내어 목동에 아담한 빌라 전세를 적당한 가격에 하나 얻어 들어가는 재주를 보였다. 뭐 이런 애늙은이 같이 시근이 꽉찬 친구들이 있나 싶을 정도로 야무졌다.

 

<못할 줄 알았던 결혼식을 다해보며>

와이프와 내가 아들 부부를 위해 해준 것이라고는 상징적인 소액의 결혼축하 주식증여와 들어온 결혼 축의금 중 일부를 보태준 격려가 모두였다. 하지만 저그가 2세를 출산하면 그 부양과 함께 훈육에 필요한 문화지식 자산들을 아낌없이 뿜어줄 작정이다.

 

<결혼식 후 첫 저녁 모임(내 여동생 포함, 우리 모친은 코만 보임)>

혹시라도 내가 원하는 딸이 먼저 태어나면 세상이 사랑하는 인간미 넘치는 재원으로 양육할 각오가 왕창 되어 있다. 여건이 안되어 바로 낳을 형편이 안된다면 그것도 크게 개의치 않고 저그 부부 둘이서 잘 살아가도록 적극 응원할 생각도 언제나 품은 채...

 

정말 어디 가도 빠지지 않을 조건을 갖춘 친구가 사회진입기에 갑자기 불우해진 가정형편을 홀로서기로 극복하고서도, 경제적 지원을 할 수 없는 부모를 가진 노총각 후명이에게 동병상련적인 연대감을 품으며 기꺼이 배필이 되어주겠다고 제 발로 나타나니 시쳇말로 우리식구 중 누군가가 나라를 구하는 복덕을 쌓지는 않았나 하는 흐뭇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목동 저그 신혼집 첫 방문>

하지만 살아온 경험으로 봐서 인생만사가 새옹지마임을 잘 아는 이상 살아가며 닥칠 비오는 궂은 날에 대한 경계와 대비도 하는 마음을 언제나 놓지 않을 생각이다. 그저 저그 둘이 인간적 신뢰감이 넘치는 가정을 이루어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한 세상 잘 헤쳐가기를 바랄 뿐이다. 나와 와이프가 지금까지 그리해 왔던 것처럼..

 

4. 지방자치단체 보고서 용역팀 합류

 

코로나 사태가 연초부터 지속되고 내년까지도 너끈하게 펼쳐질 거라는 예상이 팽배한 올 한해는 많은 이들에게 참 허탈하게 여겨진다. 그럼에도 내게는 상대적으로 좀 낫게 지나가는 듯 하다.

 

퇴임 후 강의와 창업 기회가 팍 사라져 경제적으로는 여러모로 불안감이 높아졌지만, 나다니며 돈쓰지 않고 책상머리에 앉아 독서와 글쓰기, 인터넷 서핑하기, 그리고 최소한의 사람 만나기 등을 일상으로 하는 노년의 생활에서 위안과 자존감을 얻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여긴다. 어쩌면 행운이라고도 여길 정도로..

 

<박대표와 여의도 첫모임>

8월 중순 독일 함부르크에서 같이 유학생활하며 역사학 박사쯩을 건진 후배 박박사가 한국에서 내가 하고 싶어하는 지식용역 서비스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영산대 서교수가 우연히 전해줘 연락을 취했다. 오랜만에 만난 해후 인사를 나누고 근황을 물으니 자기는 대학전임 자리가 날 것 같지 않아 후배 몇 명과 2000년대 중반부터 여의도에 지식용역 중개서비스사를 차려 망할 고비도 몇 번 넘기며 지방자치단체를 주고객으로 하는 연구보고서 제작과 워크샵 같은 켄벤션 대행업을 한다는 것이었다.

 

듣고보니 관심이 바짝 당겨 나도 보고서 작성 필진으로 끼어들자 하니 그래 주시면 자기야 고맙다며 한번 같이 해보자고 흔쾌하게 받아주었다. 나도 보답으로 이 군번에 대단한 보수는 기대하지도 않으니 가성비 좋고 작성능력도 아직 꽤 쓸만한 나같은 퇴임백수 먹물들 활용하면 박박사도 B급 지식용역 시장에서 제법 괜찮은 경쟁력을 갖출거라고 화답했다.

 

<장성의회 중간보고회>

10월 초 박박사가 자신이 태어난 전남 장성의 지방의회에서 지방자치분권의 역량강화라는 타이틀로 연구용역을 하나 따왔기에 프로젝트 진행 논의차 형님도 한번 여의도 사무실로 와주십사 한다는 전갈이 왔다. 물론 그 전에 전화 상으로 한 건 물었다는 반가운 연락을 통해 , 나도 이제 모처럼 여기 집필진에 끼어 한 두 파트 글쓸 일이 있겠구나하고 모임을 예상하기는 했다.

 

여의도 인도네시아 대사관 근처 박박사 사무실을 찾아가니 40대 초반의 독일 유학파 배박사가 함께 있다 같이 맞아주었다. 고대에서 정외과를 졸업한 뒤 한국 온 박박사와 무슨 인문사회 계통 연구원에서 인연을 맺은 사이라 했는데 거기 연구원 생활 그만 두고는 30대 중반에 독일 유학을 떠나 베를린대에서 국제정치학 디플롬을 하고, 중부 마부르크대에서 박사논문을 작성해 제출한 뒤 한국에 나왔지만 코로나 사태로 근 1년 째 못들어가는 상황이라 했다. 뭐 딱 보니 독일박사 되는 게 시간문제라 여겨져 그냥 마에가리 배박사로 호칭해 주기로 했다.

 

<최종보고서 표지와 목차, 본인의 참고 서적>

첫 미팅에서 집필진에 나와 배박사 및 박박사 외에 전남도청 퇴임 공무원 출신이자 행정학을 전공한 윤국장도 포함되었음을 알았다. 박박사와 배박사가 초벌구이로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목차를 보니 지방분권의 역량 강화를 위해서는 지방정부와 지방의회 간의 유기적인 소통시스템을 활성화하는 것과 함께 사회적 기업과 마을기업들의 생태계를 건강하게 구축하는 사회적 경제 네트웍을 제대로 정착시키는 쪽으로 짜여져 있었다.

 

내용목차는 작성하는 중에 몇 번의 수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연구배경, 기대효과, 민관협치적 주민자치와 사회경제적 기업, 사례조사, 장성군 주민자치와 사회경제적 생태계 현황분석과 문제보완, 그리고 결론과 정책제안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강화 교동도 마을기업 방문>
<공주 마을기업 방문>
<함안 사회적기업 대표 면담>
<함안군청 담당직원 면담>
<부산 사회적기업연구원 탐방>

그 사이 타 지역 사례 벤치마킹을 위해 배박사와 강화 교동도, 공주를 같이 다녀왔으며, 함안과 부산지역은 나 혼자 방문해 취재여행을 끝마쳤다. 모처럼 연구랍시고 이곳저곳으로 다니니 현역 때처럼 뭐 좀 하는 것 같아 기분이 꽤 쏠쏠했다.

 

장성군청에서 11월 중순 중간보고, 1218일 최종보고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드디어 이번 보고서 작성 여행도 큰 위기없이 순조롭게 마쳤다. 젊은 40대 배박사가 이번 프로젝트 총관리를 맡으며 자기 파트 글을 쓰면서도 2번의 프리젠테이션 PPT 파일도 만들며 이런저런 뒤치다꺼리 일을 아주 아금받게 잘 처리해준 덕분이었다.

 

<장성의회 최종 발표 자리>

이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12월 중순까지 열흘 사이 6개나 되는 법학과 기말 리포트를 작성하면서도 연구보고서에서는 마지막 결론과 정책적 제언 파트에 한 두 꼭지만 작성해도 되었던 마무리 작업이 기간 내 큰 문제없이 끝마쳐 질 리가 결코 없었다. 자기 파트 집필에만 끙끙거리는 늙다리 작성자들을 배려해 혼자서 묵묵히 자기집필분과 함께 전 프로젝트를 이끌고 나가 깔끔하게 종결 지어준 배박사의 헌신성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아무튼 전세계와 온나라가 신음하는 코로나 난세 속에서도 나는 올 한해 여러 행운 같은 일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어 어쩌면 표정관리까지 좀 해야할 정도로 의미있게 보내었다. 이 기세가 내년까지도 유지될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중장년 복은 그렇다 해도 노년 복은 확실히 쫌 있네하는 오래 전부터 들어온 점괘를 계속 믿어가며 맞아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