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역사 이해

에도시대(1603~1868)에 조선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

백조히프 2025. 9. 2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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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1603~1868)에 조선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

 

 

2025. 9. 21.

 

1. 정유재란 종료와 국토 재건 (1598-1620년대)

 

1598년 정유재란 종료 이후 조선이 직면한 과제는 단순한 물리적 복구를 넘어선 국가 체제의 전면적 재편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인적 손실은 전체 인구의 약 40% 수준에 달했으며, 특히 양반층의 피해가 컸다. 이는 기존 신분제의 동요를 가져왔고, 공신책봉을 통한 새로운 지배층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대동법 실시>

 

경제적 측면에서는 전국 농지의 약 30%가 황폐화되어 국가 재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대동법이 경기도(1608년)를 시작으로 점진적으로 확산되었다. 대동법은 기존의 공납제(貢納制)를 쌀 중심의 금납제로 전환한 것으로, 농민의 부담 경감뿐만 아니라 상품화폐경제 발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공인(貢人) 제도의 등장으로 상업 자본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군사제도 개편도 중요한 변화였다. 기존 조선 전기의 군사제도가 왜란으로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서, 훈련도감(1593년 창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군제가 정착되었다. 이는 직업군인 위주의 상비군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했으며, 이후 조선 후기 군영 체제의 기틀이 되었다.

 

사회문화적으로는 전쟁 경험이 조선인의 정체성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 의식이 강화되면서, 이후 정축호란 이후 소중화(小中華) 의식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또한 왜란 중 활약한 의병 활동은 향촌 사회의 자율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2. 인조반정 (1623년)

 

인조반정은 단순한 정치적 쿠데타를 넘어서 조선 후기 정치 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다. 광해군 정권의 중립 외교는 실용적 관점에서는 합리적이었으나,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정 세력의 핵심인 김류, 이귀, 최명길 등은 모두 서인 계열로, 이들의 집권은 동인 정권(광해군 정권은 대북 세력)에서 서인 정권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이는 이후 예송논쟁과 환국 정치로 이어지는 붕당 정치 격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인목대비 유폐와 영창대군 처형이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에 대한 반발이었다. 광해군은 정유재란 직후의 현실을 고려하여 명·후금 양쪽과 등거리 외교를 추진했으나, 이는 사대주의와 명분론에 입각한 서인들에게는 배신행위로 인식되었다.

 

반정 이후 인조 정권이 추진한 친명 정책은 국제정세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미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급성장이 명확한 상황에서 무리한 친명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정묘호란과 정축호란의 원인을 제공했다. 이는 현실보다 명분을 우선시하는 성리학 정치 문화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3. 정묘호란 (1627년)

 

정묘호란은 조선이 동아시아 국제질서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1619년 사르후 대전에서 명군이 대패한 이후 동북아시아 세력균형이 명에서 후금으로 기울고 있었음에도, 인조 정권은 여전히 친명 정책을 고수했다.

 

후금의 1차 침입은 아민이 이끄는 3만 군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선군의 대응은 극히 미약했는데, 이는 7년간의 왜란으로 인한 국력 소모와 함께 새로운 군사 정세에 대한 준비 부족 때문이었다. 특히 기병 중심의 후금군 전술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인조의 강화도 파천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의주 파천과 유사한 패턴이었으나,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더욱 소극적인 방어책이었다. 이는 조선 왕실의 위기 대응 능력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정강화약(丁卯和約)의 내용은 후금과의 형제관계 설정, 명군 지원 중단, 연간 세폐 제공 등이었다. 이는 조선이 처음으로 명 이외의 세력과 맺은 대등한 외교관계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실제로는 후금에 대한 굴복을 의미했다. 특히 조선이 여전히 명과의 관계를 유지한 상황에서 후금과도 관계를 맺게 됨으로써 외교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4. 정축호란 (1636-1637년)

 

정축호란은 동아시아 전통적 국제질서의 완전한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1636년 청 태종이 황제 즉위를 선포하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한 것은 단순한 외교적 요구가 아니라 새로운 국제질서 구축의 의지 표명이었다.

 

청군의 2차 침입은 1차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청 태종이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것은 조선 정복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청군은 개전 3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는 등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보였다.

 

인조의 남한산성 피난과 45일간의 항성은 조선 왕조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남한산성 내에서의 정치적 대립도 주목할 만하다. 최명길로 대표되는 주화파와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척화파의 대립은 단순한 전술적 견해차이가 아니라 조선 후기 대외정책의 근본적 방향성에 대한 갈등이었다.

 

<정축호란-삼전도 항복>

 

1637년 1월 30일 삼전도 항복은 조선사상 최대의 굴욕이었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한 것은 조선이 완전히 청의 속국으로 전락했음을 의미했다. 이후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훗날 효종)의 심양 체류 경험은 조선 지배층의 세계관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축호란의 결과 조선은 매년 막대한 세폐(歲幣)를 청에 바쳐야 했다. 은 1만 냥, 금 100냥을 비롯하여 각종 토산물과 공예품 등 총 방물의 가치는 조선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이는 조선 후기 재정 구조에 지속적인 압박 요인이 되었다.

 

5. 청나라 복속 체제 확립과 소중화 의식 (1637-1650년대)

 

정축호란 이후 조선의 대청 관계는 전형적인 조공-책봉 체제로 재편되었다. 조선은 매년 정기사행(定期使行)으로 동지사, 성절사, 천추사를 파견해야 했으며, 각종 주문사(奏聞使)와 진하사(陳賀使) 등 비정기 사행까지 포함하면 연간 10여 차례의 사행을 파견해야 했다.

 

이러한 빈번한 사행은 조선에게 경제적 부담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굴욕이었으나, 역설적으로 청의 선진 문물을 접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다. 연행사들이 북경에서 가져온 서양 과학기술과 천주교 서적들은 조선 후기 학문 발전에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이러한 현실적 굴복 상황에서 정신적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발달시켰다. 이는 명이 멸망하고 청이 중국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조선이야말로 중화문명의 정통 계승자라는 자부심이었다.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 학자들이 이러한 사상의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소중화 사상의 위치>

 

'존화양이(尊華攘夷)' 사상은 소중화 의식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조선은 중화를 존중하고 이적을 물리친다는 명분하에 청을 오랑캐로 규정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사대 관계를 유지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명분과 현실의 괴리는 조선 후기 대외정책의 근본적 모순이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시기 조선의 예학(禮學) 발달이다. 청에 대한 정치적 굴복 상황에서 조선은 예악문명의 순수성을 강조함으로써 문화적 우월감을 유지하려 했다. 이는 이후 예송논쟁으로 이어지는 예학 중시 풍조의 배경이 되었다.

 

6. 효종의 북벌 계획과 한계 (1649-1659년)

 

효종의 북벌론은 단순한 복수 의식을 넘어선 체계적인 국가 전략이었다. 효종은 봉림대군으로서 8년간 심양에 인질로 체류하면서 청의 내부 사정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북벌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북벌 준비의 핵심은 군제 개편이었다. 효종은 송시열 등 서인 정권과 함께 5군영 체제를 완성했다. 훈련도감의 정비와 함께 어영청(1651년), 금위영(1656년)을 신설하고, 기존의 총융청, 수어청과 함께 5군영 체제를 구축했다. 각 군영은 약 5천~1만 명 규모의 상비군으로 편성되어 총 4만여 명의 상당한 군사력을 확보했다.

 

화포와 화약 기술 발전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화포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으나, 효종 시기에 이르러 더욱 정교한 화포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전래된 홍이포(紅夷砲) 제조 기술을 습득하여 방어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왕권과 국방력, 국가 인프라 강화를 위한 북벌론>

 

성곽 수축 사업도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전국 주요 거점에 성곽을 수축하거나 보강했으며, 특히 북방 지역의 방어 체계를 집중적으로 정비했다. 이는 청군의 재침에 대비한 방어 전략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북벌 계획의 근본적 한계는 명확했다. 첫째, 조선과 청의 국력 차이가 절대적이었다. 청은 이미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인구 1억 명 이상의 대제국이 된 상황이었다. 둘째, 지정학적 조건이 불리했다. 조선은 청과 육로로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어 기습 공격에 취약했다. 셋째, 국제적 지원 세력이 전무했다. 명의 잔존 세력들도 대부분 소멸한 상황이었다.

 

효종이 1659년 급서하면서 북벌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 시기 구축된 군사 체제와 상무 정신은 조선 후기 국방력 강화에 기여했다. 또한 북벌론은 이후에도 조선 지식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계속했다.

 

7. 예송논쟁과 붕당 정치의 격화 (1659년, 1674년)

 

예송논쟁은 조선 후기 붕당 정치의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예학 논쟁이었지만, 실제로는 왕통의 정통성, 신하의 정치적 지위, 나아가 성리학적 정치 질서의 해석을 둘러싼 근본적 갈등이었다.

 

1차 예송(기해예송, 1659년)의 쟁점은 효종 사후 자의대비(인조 계비)의 복상 기간이었다.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아들이므로 차남의 예에 따라 1년상을, 남인은 효종이 왕이므로 적장자의 예에 따라 3년상을 주장했다. 이는 단순한 예학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효종 왕위의 정통성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을 반영했다.

 

서인의 1년상 주장은 효종을 인조의 차남으로 규정함으로써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반면 남인의 3년상 주장은 효종의 왕위를 절대화함으로써 왕권의 숭고성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1차 예송에서는 자의대비가 직접 1년상을 선택함으로써 서인의 견해가 관철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남인의 예학적 역량이 주목받으면서 윤휴, 허목 등이 정치적으로 부상했다.

 

2차 예송(갑인예송, 1674년)은 자의대비 사후 인선왕후(효종비)의 복상 기간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서인은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의례라는 관점에서 1년상을, 남인은 국모에 대한 국모의 의례라는 관점에서 9개월상을 주장했다.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관철되면서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예송논쟁의 의미는 여러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첫째, 성리학 예학의 고도한 발달을 보여주었다. 조선의 예학은 중국을 능가하는 수준에 도달했으며, 이는 소중화 의식의 학문적 근거가 되었다. 둘째, 붕당 간 경쟁이 학문적 토론의 형태로 승화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이 있었다. 셋째, 하지만 예학 논쟁이 정치적 도구화되면서 붕당 갈등이 더욱 격화되는 부작용도 낳았다.

 

8. 숙종의 환국 정치와 권력 구조 변화 (1674-1720년)

 

숙종 재위 46년간 일어난 4차례의 환국은 조선 정치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환국 정치는 ‘왕권이 주도하는 급격한 정권 교체 현상’으로, 기존의 점진적 정치 변화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경신환국(1680년)은 남인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허견의 복선군 추대 모의 사건을 계기로 남인의 영수 허목, 윤휴 등이 실각하고 서인이 재집권했다. 이 과정에서 남인은 청남과 탁남으로 분열되었으며, 청남의 영수 허목은 온건한 입장을 취한 반면, 탁남의 윤휴는 보다 급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기사환국(1689년)은 인현왕후 폐출 사건과 관련하여 일어났다. 숙종의 총애를 받던 희빈 장씨(훗날 장희빈)가 원자(훗날 경종)를 낳자,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책봉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서인이 이를 반대하자 남인을 재집권시켜 인현왕후 폐출을 단행했다.

 

갑술환국(1694년)은 인현왕후 복위와 함께 일어났다. 숙종이 장희빈에게 싫증을 느끼고 인현왕후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자,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을 재집권시켰다. 이 과정에서 남인의 핵심 인물들이 대거 유배되거나 사사되었다.

 

마지막 신사환국(1701년)은 장희빈의 저주 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사건이 발각되자, 이를 계기로 남인의 잔존 세력까지 완전히 제거하고 서인의 일당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다.

 

환국 정치의 특징은 승자독식의 정치 문화였다. 정권을 잡은 세력은 상대방을 완전히 제거하려 했으며, 이는 정치적 관용과 타협의 전통을 약화시켰다. 또한 왕권이 정치적 균형자 역할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환국 정치는 서인의 최종 승리로 귀결되었으나, 서인 내부에서도 노론과 소론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노론은 송시열의 정통 제자들로 보다 보수적이고 원칙주의적이었으며, 소론은 윤증을 중심으로 보다 현실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이러한 분열은 이후 조선 후기 정치 갈등의 새로운 축이 되었다.

 

9. 영조의 탕평책과 정치 개혁 (1724-1776년)

 

영조의 탕평책은 단순한 인사 정책을 넘어선 정치 철학의 전환이었다. 52년간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것도 이러한 정치 철학의 일관성 때문이었다. 영조는 붕당의 폐해를 근본적으로 인식하고, 왕권 중심의 새로운 정치 질서 구축을 시도했다.

 

탕평책의 이론적 기초는 '군주 중심의 정치 통합'이었다. 영조는 붕당을 '사사로운 무리'로 규정하고, 모든 신하는 오직 임금에게만 충성해야 한다는 '일군만민(一君萬民)' 사상을 제시했다. 이는 기존의 붕당 정치가 가진 분권적 성격을 부정하고 전제왕권 확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탕평책의 구체적 실행은 시기별로 다른 양상을 보였다. 초기의 '완론탕평(緩論蕩平)'은 노론과 소론을 모두 등용하되 온건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이었다. 이 시기 김재로, 이광좌 등이 활약했다. 중기의 '준론탕평(峻論蕩平)'은 보다 엄격한 기준으로 인재를 선별하는 정책으로, 노론 중에서도 온건파만을 등용했다.

 

탕평비 건립(1742년)은 탕평 의지의 상징적 표현이었다. 창덕궁 금천교에 세운 탕평비에는 "탕평(蕩平)"이라는 글자와 함께 "편당을 없애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가 새겨졌다. 이는 영조 정치의 핵심 이념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붕당 명칭 사용 금지령도 중요한 조치였다. 노론, 소론, 남인 등의 당명 사용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엄벌에 처했다. 이는 붕당 의식 자체를 근절하려는 시도였으나, 실제로는 지하로 숨어든 붕당 활동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했다.

 

균역법(1750년) 시행은 탕평책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개혁이었다. 기존의 군포 2필을 1필로 줄여 농민 부담을 경감하고, 부족한 재원은 결작, 선무군관포, 어장세 등으로 충당했다. 이는 농민의 생활 안정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려는 정책이었다.

 

영조의 탕평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경제가 발전했고, 인구도 크게 증가했다. 또한 문화 예술도 발달하여 조선 후기 문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붕당의 완전한 해소에는 실패했으며, 왕권 강화라는 부작용도 낳았다.

 

10. 정조의 문예부흥과 개혁 정치 (1776-1800년)

 

정조의 24년 재위기간은 조선 후기 문화의 절정기였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면서도 보다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왕권 강화와 문예부흥을 동시에 추구한 점에서 계몽절대군주의 면모를 보였다.

 

규장각 설치(1776년)는 정조 정치의 상징이었다. 규장각은 왕실 도서관, 정책 연구기관, 인재 양성기관의 복합적 기능을 담당했다. 특히 규장각 검서관 제도를 통해 젊은 인재들을 발탁하여 기존 정치 세력과는 독립적인 새로운 정치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은 '규장각 학사'라고 불렸으며,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는 핵심 세력이 되었다.

 

정조 자신이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였다. 『홍재전서』에 수록된 그의 저작들은 당대 최고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보여준다. 정조는 경학, 사학,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깊은 조예를 보였으며, 특히 실용적 학문을 중시했다.

 

실학자 후원 정책도 주목할 만하다. 정조는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 실학자들을 적극 후원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성리학의 틀을 벗어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했으며, 이는 조선 후기 사회 변화의 사상적 동력이 되었다.

 

수원 화성 건설(1794-1796년)은 정조의 개혁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업이었다. 화성은 단순한 성곽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 기반을 구축하려는 원대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정조는 화성을 통해 기존 정치 세력으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권력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화성 건설 과정에서 정약용이 설계한 거중기 등 새로운 건축 기술이 사용되었으며, 이는 조선의 과학기술 발전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장용영 설치(1785년)는 정조의 군사 개혁을 상징했다. 장용영은 왕실 호위를 전담하는 친위부대로, 기존 5군영과는 별개의 독립적인 군사 조직이었다. 이를 통해 정조는 기존 정치 세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서얼 차대법 완화도 중요한 개혁이었다. 정조는 서자와 얼자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여 이들의 관직 진출 기회를 확대했다. 이는 신분제 완화를 통해 인재 풀을 확대하고, 기존 양반 세력에 대한 견제책이기도 했다.

 

정조 시대의 문예부흥은 다방면에서 나타났다. 문학에서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이 활약했으며, 회화에서는 김홍도, 신윤복 등이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특히 서민 생활을 소재로 한 풍속화의 발달은 사회 의식 변화를 반영했다.

 

하지만 정조의 개혁에도 한계가 있었다. 신분제의 근본적 변혁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며, 왕권에 의존한 개혁이라는 한계로 인해 정조 사후 급속히 위축되었다. 또한 천주교에 대한 정조의 관용적 태도는 보수 세력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1. 실학 사상의 발달과 사회 변화 (17-18세기)

 

실학은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발달한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문 경향으로, 성리학의 관념적 성격을 비판하고 현실 개혁을 추구한 사상이었다. 실학의 등장 배경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충격, 정축호란 이후의 현실 인식 변화, 그리고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양 문물의 영향이 있었다.

 

경세치용학파는 유형원(1622-1673년)을 시조로 하여 이익(1681-1763년), 정약용(1762-1836년)으로 이어지는 학파이다. 이들은 토지제도와 정치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주장했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균전제 실시를 통한 토지 개혁과 관료제 개편을 제시했으며, 이는 조선 후기 사회 개혁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익의 『성호사설』은 실학의 백과사전적 저작이었다. 이익은 한전론(限田論)을 통해 토지 사유의 상한선을 두자고 주장했으며, 이는 현실적 토지 개혁 방안이었다. 또한 그는 신분제 완화를 주장하여 노비제 폐지와 서얼 차별 철폐를 제시했다.

 

정약용은 실학의 집대성자였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의 저작을 통해 정치, 행정, 사법 제도의 전면적 개혁안을 제시했다. 특히 그의 지방 행정 개혁론과 사법 제도 개혁론은 근대적 행정 체계의 맹아를 보여주었다.

 

이용후생학파는 홍대용(1731-1783년), 박지원(1737-1805년), 박제가(1750-1805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상공업 진흥과 기술 개발을 통한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지전설을 주장하고 중국 중심의 화이관을 비판했다. 그의 지전설은 단순한 과학 이론이 아니라 기존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다. 또한 그는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북학론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소개하고 조선의 현실을 비판했다. 그는 청나라를 오랑캐로 멸시하는 조선의 태도를 비판하며, 실용적 관점에서 청나라의 장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상공업 진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구체적인 상공업 진흥책을 제시했다. 그는 수레, 선박, 벽돌 등의 기술 도입을 주장하고,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는 새로운 경제 사상을 제시했다. 이는 절약을 강조하는 기존의 유교 경제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실증사학파는 한백겸(1552-1615년)을 시조로 하여 이종휘(1731-1797년), 안정복(1712-1791년)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문헌 고증을 통한 실증적 역사 연구를 추구했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는 실증적 지리서의 효시였으며, 안정복의 『동사강목』은 조선사를 중국사와 대등한 위치에서 서술한 최초의 통사였다. 이는 조선 중심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실학 사상의 한계도 명확했다. 실학자들 대부분이 양반 출신으로 현실 정치에서 소외된 처지였으며, 이들의 개혁론이 실제 정책으로 구현되기는 어려웠다. 또한 실학 내부에서도 개혁의 범위와 방법을 둘러싸고 견해차가 있었다.

 

그럼에도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 변화의 사상적 동력이 되었다. 실학자들의 현실 비판과 개혁 의식은 19세기 개화 사상의 토대가 되었으며, 근대 사회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역할을 했다.

 

12. 세도정치 체제와 정치적 모순 심화 (1800-1863년)

 

세도정치는 정조 사후 조선 정치사에 나타난 가장 부정적인 현상 중 하나였다. 이는 단순한 외척 정치가 아니라 기존 정치 체제의 근본적 변질을 의미했다.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시작된 세도정치는 철종까지 약 60년간 지속되었다.

 

정순왕후 수렴청정기(1800-1804년)에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다. 김조순은 정순왕후의 친족이면서 동시에 순조의 장인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중적 지위를 바탕으로 안동 김씨는 정치권을 독점할 수 있었다.

 

세도 가문의 권력 독점 방식은 치밀했다. 첫째, 왕실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둘째, 주요 관직을 가문 내에서 세습하거나 문벌 간 연합을 통해 독점했다. 셋째, 경제적 특권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이를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 활용했다.

 

안동 김씨 세도는 김조순 → 김유근 → 김좌근으로 이어졌다. 김좌근은 헌종의 장인이자 철종의 장인이었으며, 이를 통해 40년 이상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안동 김씨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풍양 조씨는 조만영을 중심으로 일시적으로 세도를 잡기도 했다.

 

세도정치의 폐해는 다방면에서 나타났다. 정치적으로는 왕권이 극도로 약화되었다. 임금은 세도 가문의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정책 결정권도 세도 가문이 장악했다. 이는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었다.

 

행정적으로는 관료제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관직이 세도 가문의 사유물화되면서 능력보다는 혈연과 지연이 인사의 기준이 되었다. 이로 인해 행정 효율성이 극도로 저하되었고, 부패가 만연했다.

 

경제적으로는 세도 가문의 경제적 특권이 국가 재정을 압박했다. 세도 가문들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각종 특권 사업을 독점했으며, 이는 일반 농민과 상인들의 경제 활동을 제약했다.

 

삼정의 문란이 심화된 것도 세도정치의 직접적 결과였다. 전정(田政)의 경우, 토지 대장인 양안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실제 경작지와 장부상 기록 사이에 큰 차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세금 부과가 불공정해졌고, 농민들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군정(軍政)의 문란은 더욱 심각했다. 양반층의 군역 기피가 심화되면서 농민들이 이중삼중의 군포 부담을 져야 했다. 또한 실제 군역을 수행하지 않는 허위 군사들이 양산되어 국방력도 약화되었다.

 

환정(還政)의 문란은 농민들의 생계를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국가가 흉년에 대비해 비축한 곡식을 농민들에게 빌려주는 환곡 제도가 관리들의 횡령과 고리대로 변질되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기근 시에도 구제받지 못했고, 오히려 더 큰 부채에 시달려야 했다.

 

세도정치기의 사회 모순은 민란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는 기존 체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다. 또한 지역 간 불균등 발전으로 인한 갈등도 심화되었다.

 

13. 천주교 전래와 박해의 역사적 의미 (18-19세기)

 

조선 후기 천주교 전래와 박해는 단순한 종교 문제를 넘어선 문명사적 충돌이었다. 천주교는 18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서양 문명과 조선 전통 문명의 첫 본격적 만남이었다.

 

천주교 전래의 배경에는 실학자들의 서양 학문 연구가 있었다. 홍대용, 박지원 등이 북경에서 가져온 천주교 서적들이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 유포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특히 이벽, 권철신, 정약전 등 남인 계열의 젊은 학자들이 천주교 교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784년 이승훈의 북경 영세는 조선 천주교사의 출발점이었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곤베아(Gombaud)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 최초의 천주교도가 되었다. 귀국 후 그는 이벽 등과 함께 천주교 전파에 힘썼으며, 명동성당 터에서 최초의 미사를 올렸다.

 

초기 천주교는 주로 남인 계열의 중간 지배층 사이에서 확산되었다. 이들은 현실 정치에서 소외된 처지에서 새로운 사상과 종교에 관심을 가졌으며, 천주교의 평등 사상은 이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특히 신분제 사회에서 억압받던 계층들에게 천주교는 정신적 해방구 역할을 했다.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단행되었다. 신유박해(1801년)는 정조 사후 정순왕후 수렴청정 시기에 일어났으며, 이때 이승훈, 정약종 등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이 박해는 천주교가 기존 질서에 미치는 위협을 제거하려는 보수 세력의 의지 표현이었다.

 

정해박해(1827년)와 기해박해(1839년)는 세도정치 시기에 일어났다. 특히 기해박해에서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대거 순교했으며, 이는 조선 정부의 쇄국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통한 서양 세력의 침입을 우려했으며, 이를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탄압을 가했다.

 

마지막 병인박해(1866년)는 가장 대규모의 박해였다. 대원군 집권 초기에 일어난 이 박해로 8,000여 명의 천주교도가 순교했다. 이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위정척사 사상의 구체적 실현이었다.

 

천주교 박해의 명분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조상 제사 거부로 인한 효도 윤리 파괴였다. 천주교도들이 조상 제사를 우상숭배로 여겨 거부하자, 이를 유교적 효 윤리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했다.

 

둘째, 서양 오랑캐의 사교라는 화이론적 배척이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천주교를 중화 질서를 파괴하는 이적의 종교로 여겼다. 셋째, 기존 신분 질서에 대한 위협이었다. 천주교의 평등 사상은 조선의 신분제 사회에 근본적 도전이 되었다.

 

하지만 천주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천주교가 단순한 종교를 넘어서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서민층과 여성들 사이에서 천주교가 빠르게 확산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천주교 전래의 역사적 의미는 여러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첫째, 서양 문명과의 최초 본격 접촉이었다. 천주교를 통해 조선인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 철학, 예술 등을 접할 수 있었다. 둘째, 기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천주교의 평등 사상과 개인주의는 조선의 집단주의적 가족 제도와 신분제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셋째, 근대 개화 사상의 토양이 되었다. 천주교도들이 보여준 서양 문물에 대한 개방성은 이후 개화파 형성의 밑거름이 되었다.

 

14. 홍경래의 난과 지역 갈등 (1811-1812년)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 가장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자, 지역 차별에 대한 저항 운동이었다. 이 난은 단순한 농민 봉기를 넘어서 기존 정치 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으며, 조선 후기 사회 모순의 복합적 성격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평안도는 조선시대 내내 관서지방으로 불리며 정치적·경제적 차별을 받아왔다. 이러한 차별의 역사적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첫째, 고구려 유민의 후예라는 인식으로 인한 정치적 불신이었다.

 

조선 왕조는 평안도를 고구려의 옛 땅으로 여겨 정치적으로 견제했다. 둘째, 지리적으로 변방이라는 인식이었다. 한양에서 멀고 중국과 국경을 접한 지역이라는 이유로 중앙 정부의 관심에서 소외되었다.

 

이러한 차별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관직 진출에 있어서 평안도 출신은 문과에 급제해도 정3품 이상의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다. 이는 '서북인 불사이북(西北人不仕二北)'이라는 관례로 굳어져 있었다. 또한 혼인에 있어서도 중앙의 명문 가문들은 평안도 출신과의 혼인을 기피했다.

 

경제적으로도 평안도는 차별받았다. 상업이 발달하고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치적 발언권을 갖지 못했다. 특히 의주와 정주를 중심으로 한 대중국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의 정치 참여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다.

 

<홍경래군 점령지와 관군의 진격로>

 

홍경래(洪景來, 1780-1812년)는 이러한 지역적 불만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평안도 용천 출신의 몰락한 중인 계층으로,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고 있었으나 출신 지역 때문에 제대로 된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이 지역적 불만과 결합하면서 반란의 동기가 되었다.

 

홍경래와 함께 거사를 계획한 인물들도 주목할 만하다. 우군칙은 평안도 출신의 몰락 양반이었고, 김사용은 농민 출신이었다. 이들의 연합은 지역적 연대를 바탕으로 한 계층 횡단적 동맹이었다.

 

1811년 12월 거사가 시작되었다. 반란군은 먼저 가산을 점령하고, 이어 정주, 철산 등을 연이어 점령했다. 특히 정주성 점령은 상징적 의미가 컸다. 정주는 평안도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였으며, 이곳을 장악함으로써 반란군은 평안도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다.

 

반란군의 조직과 이념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서민정권(庶民政權)'을 표방하며 기존 양반 중심의 정치 질서를 부정했다. 또한 평등한 사회 건설을 목표로 삼았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이념이었다.

 

반란군은 평양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정부군의 반격이 본격화되면서 반란군은 수세에 몰렸다. 1812년 4월 정주성에서 마지막 항쟁을 벌이던 중 홍경래가 전사하면서 난은 진압되었다.

 

홍경래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그 영향은 지속되었다. 조선 정부는 평안도에 대한 차별 정책을 일부 완화했으며, 관서인의 관직 진출 제한을 어느 정도 완화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지역 차별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 난의 역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역 갈등이 정치적 저항으로 표출된 최초의 사례였다. 둘째, 신분제 사회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양반 중심의 정치 질서를 부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추구했다. 셋째, 농민 반란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했다. 기존의 농민 반란이 주로 경제적 요구에 그쳤다면, 홍경래의 난은 정치적 변혁까지 추구했다.

 

15. 19세기 전반 민란의 전국적 확산과 사회 모순

 

19세기 전반 조선 사회는 민란의 시대였다. 1862년을 전후하여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농민 봉기는 조선 후기 사회 모순이 극한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이러한 민란의 확산은 세도정치의 폐해와 삼정의 문란이 농민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임술농민봉기>

 

임술농민봉기(1862년)는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1862년 2월 진주에서 시작된 이 봉기는 곧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로 확산되어 전국적 규모의 농민 운동이 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최대 규모의 농민 저항 운동이었다.

 

진주민란의 직접적 계기는 진주목사 백낙신의 탐학이었다. 백낙신은 삼정을 문란시켜 농민들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징수했으며, 특히 환곡의 운영에서 심각한 부정을 저질렀다. 농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2월 15일 진주 장날에 시작되었다. 농민들은 진주 관아를 습격하고 백낙신을 축출했다. 이어 세금 장부를 불태우고 부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행동 양식은 당시 민란의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진주민란의 특징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다는 점이다. 농민들은 지도부를 구성하고 명확한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주요 요구는 탐관오리의 축출, 부당한 세금 징수 중단, 환곡 제도 개선 등이었다. 이는 단순한 파괴적 행동을 넘어선 정치적 요구였다.

 

민란의 확산 과정도 주목할 만하다. 진주에서 시작된 봉기는 곧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영남 지역 전체로 번져나갔다. 이어 전라도의 광양, 구례, 순천 등지에서도 유사한 봉기가 일어났고, 충청도에서도 크고 작은 농민 저항이 발생했다. 이러한 확산 속도는 당시 민란의 전국적 성격을 보여준다.

 

 

 

각 지역 민란의 공통점은 삼정의 문란에 대한 저항이었다. 전정의 경우, 토지 대장인 양안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실제 경작하지 않는 토지에도 세금이 부과되는 일이 빈발했다. 군정의 경우, 양반층의 군역 기피로 인해 농민들이 이중삼중의 군포 부담을 져야 했다. 환정의 경우, 관리들의 횡령으로 인해 구호 곡식이 고리대로 변질되었다.

 

민란의 사회적 구성도 다양했다. 농민이 주축이었지만, 상인, 수공업자, 하층민들도 참여했다. 특히 지역의 토호들이 민란을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중앙 권력에 대한 지방의 불만이 계층을 초월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정부의 대응은 이중적이었다. 즉각적으로는 군대를 동원하여 민란을 진압했으나, 동시에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여 제도 개선을 시도했다. 삼정이정청은 대원군 이하응이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전정, 군정, 환정의 폐해를 조사하고 개선 방안을 마련했다.

 

삼정이정청의 개선 방안은 나름대로 현실적이었다. 전정의 경우 양안을 재정비하고 부당한 세금 징수를 금지했다. 군정의 경우 호포법 실시를 재추진하여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려 했다. 환정의 경우 사창제를 부활시켜 관의 직접 관리를 강화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선책도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세도 가문의 기득권에는 손을 대지 못했으며, 신분제의 근본적 모순도 해결하지 못했다. 따라서 일시적인 진정 효과는 있었지만 근본적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1862년 민란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크다. 첫째, 전국적 규모의 농민 저항으로서 기존 체제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노출시켰다. 둘째, 농민들이 단순한 경제적 요구를 넘어서 정치적 요구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의식 수준의 발전을 보여주었다. 셋째, 이후 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조직적 기반을 제공했다.

 

16.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강화정치 (1863-1873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권은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순원왕후)의 결정으로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 명복(고종)이 왕으로 즉위했다. 이때 고종은 불과 12세였기 때문에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맡게 되었다.

 

대원군의 집권 배경에는 세도정치에 대한 왕실의 반발이 있었다. 60여 년간 지속된 세도정치로 인해 왕권이 극도로 약화된 상황에서, 왕실 복권에 대한 열망이 높아져 있었다. 또한 연이은 민란으로 기존 체제의 한계가 노출된 상황에서 강력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있었다.

 

 

대원군의 정치 철학은 '강화정치(强化政治)'로 요약된다. 이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기존 정치 질서를 재편하고 국가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의지였다. 이를 위해 대원군은 세도 가문을 축출하고 왕권 중심의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경복궁 중건 사업(1865-1872년)은 대원군 정치의 상징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270여 년간 폐허로 남아있던 경복궁을 재건하는 것은 왕실의 권위 회복을 상징하는 사업이었다. 총 7,700여 칸 규모의 대규모 건축 사업으로, 당시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이 투입되었다.

 

경복궁 중건은 단순한 건축 사업이 아니었다. 이를 통해 대원군은 전국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할 수 있는 국가 권력의 위력을 과시했다. 또한 공사 과정에서 전국의 기능공들을 한양으로 불러들여 수공업 기술 발전을 도모하기도 했다.

 

서원 철폐령(1871년)은 대원군의 가장 과감한 개혁 조치였다. 전국에 산재한 600여 개의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철폐한 것이다. 이는 양반 세력의 경제적·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서원은 조선 후기 양반들의 정치적 결집지이자 경제적 이권의 원천이었다. 서원들은 광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면세 특권을 누렸다. 또한 지방 정치에 개입하여 사실상 지방 권력의 역할을 했다. 대원군은 이러한 서원의 폐해를 제거함으로써 중앙 집권을 강화하려 했다.

 

서원 철폐에 대한 양반층의 반발은 극심했다. 특히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 율곡 이이를 모신 소수서원 등 유명 서원들도 철폐 대상에 포함되자 양반층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강력한 의지로 이를 관철시켰다.

 

호포법 시행 시도도 주목할 만하다. 대원군은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을 시행하려 했으나, 양반층의 극심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는 신분제의 견고함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대외정책에서 대원군은 철저한 쇄국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외국 세력의 침입을 막고 전통 질서를 수호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등에서 보여준 강경한 대응은 이러한 쇄국 의지를 보여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6년 미국 상선이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조선군에 의해 소각된 사건이다. 대원군은 이를 주권 침해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대응했다. 이는 서양 세력에 대한 조선의 의지를 보여주는 첫 사례였다.

 

병인양요는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입한 사건이다. 조선군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가 이끄는 부대가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이 승리는 조선의 국방력과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신미양요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미국이 강화도를 침입한 사건이다.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이 광성보에서 결사 항전했으나 패배했다. 하지만 조선은 끝까지 통상 요구를 거부하여 쇄국 의지를 관철시켰다.

 

대원군 정치의 성과는 분명했다. 왕권이 복권되었고, 세도 가문의 발호가 억제되었다. 또한 민란이 진정되고 사회 질서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서원 철폐를 통해 양반 세력도 견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계도 명확했다. 경복궁 중건 등 대규모 토목 사업으로 인한 재정 부담이 컸다. 또한 양반층의 강한 반발로 인해 개혁의 지속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무엇보다 쇄국정책으로 인해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17. 서양 세력의 접근과 조선의 대응 (1860년대)

 

19세기 중엽은 동아시아 전통 질서가 서양 세력의 충격으로 근본적 변화를 겪는 시기였다. 조선도 이러한 변화의 파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860년대부터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조선의 쇄국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시기 서양 세력의 조선 접근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첫째, 중국과 일본의 개항으로 인해 조선이 동아시아에서 마지막 미개방국으로 남게 되었다. 1842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개항하고, 1854년 일본이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한 상황에서 조선만이 여전히 문을 닫고 있었다.

 

둘째, 조선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 러시아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셋째, 조선의 천연자원과 시장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대동강에 출몰한 미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 8월)은 조선과 서양 세력 간 최초의 본격적 충돌이었다. 이 배는 미국 상인 프레스턴(Preston)이 소유한 무장 상선으로, 통상 목적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조선 정부는 통상을 거부하고 퇴거를 요구했으나, 제너럴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 상류로 올라갔다.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조선과 미국 측의 인식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미국 측은 단순한 통상 목적이라고 주장했으나, 조선 측은 이를 침입 행위로 규정했다. 특히 배에 대포가 탑재되어 있고, 조선 관리들을 위협하는 행동을 보인 점은 조선의 경계심을 자극했다.

 

결국 조선군과 평양 시민들이 합세하여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했고, 배는 불에 타 침몰했다. 승무원 24명은 모두 사망했다. 이 사건은 서양 세력에 대한 조선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병인양요(1866년 10-11월)는 천주교 박해에 대한 프랑스의 보복 침입이었다. 1866년 대규모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프랑스는 자국 선교사들의 처형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조선을 침입했다. 로즈(Rose)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고 조선 정부에 통상과 종교 자유를 요구했다.

 

프랑스군은 초기에는 순조롭게 진격했다. 갑곶진, 덕진진 등을 연이어 점령하고 강화도 전체를 장악했다. 또한 강화도에 있던 각종 문화재와 서적을 약탈하기도 했다. 특히 외규장각 도서 약탈은 조선의 문화적 손실을 가져왔다.

 

<병인양요-강화도 정족산성 전투>

 

하지만 조선군의 저항도 만만하지 않았다.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0월 26일 정족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 지휘관이 전사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조선의 완강한 저항과 겨울이 다가오는 계절적 요인으로 인해 철수했다. 비록 단기간이었지만 서양 군대를 물리친 이 승리는 조선인들의 자신감을 크게 높였다.

 

신미양요(1871년 5-6월)는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 규명과 통상을 목적으로 조선을 침입한 사건이다. 로저스(Rodgers) 제독이 이끄는 미 아시아함대가 강화도 일대를 공격했다. 이는 조선이 겪은 가장 큰 규모의 서양 세력과의 충돌이었다.

 

미국의 침입 명분은 이중적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 규명과 표류민 보호 협정 체결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조선 개항이 주목적이었다. 이는 당시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조선군을 제압했다. 갑곶진,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로 진격했다. 광성보 전투(6월 11일)에서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은 절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저항했다. 어재연을 비롯한 조선군 수백 명이 전사했지만 항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도 예상보다 큰 저항에 부딪혔다. 조선 정부가 끝까지 교섭을 거부하고,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이 계속되자 미군도 철수를 결정했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조선 침입에 대한 비판 여론이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충돌을 통해 조선과 서양 세력 간의 문명사적 차이가 드러났다. 서양 측은 국제법과 통상의 자유를 내세웠으나, 조선 측은 전통적인 조공 질서와 자주권 수호를 강조했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근본적인 것이어서 쉽게 해소되기 어려웠다.

 

조선의 저항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서양 열강들로 하여금 조선이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인식시켰고, 무력을 통한 개항 정책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는 이후 일본이 보다 세심한 전략으로 조선 개항을 추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의 쇄국 정책도 한계가 분명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 부족과 군사 기술의 절대적 격차는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또한 중국과 일본이 이미 개항한 상황에서 조선만의 고립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 시기의 충돌은 조선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국제 질서가 형성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또한 군사력의 근대화와 외교 정책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인식 변화는 이후 개화 정책과 근대화 노력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참고 자료>

 

- 송호정 외, ‘아틀라스 한국사’, 사계절, 2022

- 고려대학교한국사연구소, ‘한국사’, 새문사, 2020

- 임소미,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한국사’, 빅피시, 2024

- 나무위키, ‘대동법’, 2025

- 나무위키, ‘북벌론’, 2025

- 나무위키, ‘환국(조선)’, 2025

- 나무위키, ‘탕평책’, 2025

- 나무위키, ‘실학’, 2025

- 나무위키, ‘세도정치’, 2025

- 나무위키, ‘조선의 천주교 박해’, 2025

- 나무위키, ‘홍경래의 난’, 2025

- 나무위키, ‘임술농민봉기’, 2025

- 나무위키, ‘흥선대원군’, 2025

- 나무위키, ‘병인양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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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닐라공
  • 25.09.26 17:28
  • 첫댓글 당시의 시대상과 그 영향을 잘 소개해 놓았군요.
  • 두 양요 때 차라리 강제적으로 문호 개방이 되었다면
  •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 허수아비 왕을 세워놓고 무조건 반대당을 반대를 위한 반대하는 것은
  • 지금이나 그때는 같군요!
  • 박터지는 것은 저거들끼리 싸우더라도 민생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가진 놈들이었다면 애초부터 싸우지 않았겠지
  • 되도 않는 인간들이...
  • 김재민작성자 25.09.27 12:02 새글
  • 나도 마공과 비슷한 생각을 해봤네요. 차라리 병인과 신미양요 때 개방 조약으로 가는 왁진을 일본처럼 맞았더라면 조선의 근대화 스타트가 좀 더 빠르지 않았을까 하고 말임다.
  • 한국인은 유연한 문화적 적응력이 일본인들 못지 않았으리라 믿기에 딱 그렇게 시험해 봤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데요. 일본보다 한 30년이 늦어 하필이면 일본에게 잡아먹힌게 역사적으로 참 액통합디다.
  • 마닐라공25.09.27 13:28 새글
  • @김재민 당시의 격동의 30년 차이로 결과적으로 조선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리게 되었습니다.
  • 당시의 우리 사대부의 두뇌가 아주 뛰어났다는 것이 서양 선교사의 평가였습니다.
  • 처음으로 영어 교실을 열었을 때는 통역관이 필요하였지만,한달 후에는 통역관 없이 수업이 가능하였고
  • 그냥 필담으로 의사 소통을 하다가 이윽고 아주 능숙하게 붓글씨로 영어를 쓰고 수준 높은 회화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지요.친일파 매국노 이완용은 일어는 전혀 못하였지만,영어는 아주 잘했습니다.그래서 주미공사로 역임했습니다.
  • 이법사25.09.27 08:25 새글
  • 대원군에 대해서는 우리가 부정적으로 많이 배웠지만 내 생각에는 잘한 점이 잘못한 점보다 좀더 크다고 봅니다.
  • 특히 집권 전반기의 개혁 정책은 평가를 해 줘야겠지요.
  • 후기에 며느리와 추잡한 권력투쟁을 한 것은 특히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 당시로는 쇄국 이외에는 나라를 보전할 다른방법이 없었음을 이해해야 할 것 같고 일단 국내의 단결과 안정을 찾은 후 국제정세에도 눈을 돌리고 제한적이고 통제된 일부 개국 및 개화의 길로 나갈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별 의미가 없기는 합니다만.
  • 아무튼 나라가 망하려니 천하에 병신같은 아들에다, 장고 끝에 악수라고 고르고 골랐는데도 민비같은 악녀가 집안에 들어온 것이겠지요.
  • 경복궁 중건시 화재만 나지 않았다면 백성을 그리 쥐어짜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양반층의 반발도 덜했을 것인데 아마도 반대파들이 고의로 불을 지른 것이겠지요.
  • 역사의 중요한 고비에는 항상 요런 근시안적인 쥐새끼들이 물꼬를 옆으로 돌려서 일을 망쳐 버리기 일쑤인 것 같습니다.
  • 작성자 25.09.27 23:33 새글
  • 법사가 우리 근세사에 대한 내공도 출중하네요. 역사 공부를 해보니 상가집 개소리까지 듣던 대원군이 수렴첨정의 권력을 잡자 삼정을 문란시킨 세도정치 세력과 영양가없는 붕당정치의 본원이자 훈구 유학파가 또아리 틀고있던 전국의 서원들을 강력하게 철폐한 개혁정치는 잘 나가던 정조시절만큼이나 익사이팅 했심다.
  • 하지만 이들 기득권 세력을 쓸어버릴 왕권강화를 위해 임진왜란 이후 소실되었던 경복궁 재건 카드를 꺼내든게 발상은 나쁘지 않았으나 막상 실행을 해보니 여러 돌발 요소들의 발생으로 국가재정을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빨아들여 자신의 정치생명까지 크게 잠식시켰지요. 거기다 성장한 아들 고종과의 피치못할 불화도 자신이 간택한 왕후 민비와 민비 척속들이 발호하게 된 빌미를 제공했심다.
  • 민비는 오늘날 드라마나 뮤지컬에서 일본 야쿠자들에 의해 당한 죽음이 국민감정상 그 비통한 드라마틱성으로 '명성황후'라는 떠받들림을 받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아무런 국가적 비전도 없이 한 나라를 쥐락펴락했던 이 여인의 어이없는 권력행사가 조선의 망국화를 더 촉진했다는데 거의 동의를 합니다. 임오군란을 촉발했고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 조선의 나락화에 가속도가 붙었지요.
  • 마닐라공25.09.27 13:34 새글
  • 흥선대원군이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하여 자신의 부인의 친청 피붙이 중에서
  • 주위가 변변치 못한 민비를 며느리를 삼았지만避獐逢虎(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나는 상황)라 오히려 임오군란의 뒷배로 흥선대원군은 원세개에게 끌려가서 그후 4년후에 풀려납니다.
  • 서토25.09.27 20:24 새글
  • 정리된 본문을 보노라니..조선 오백년사에 외침과 반란 등 참으로 많은 역경들이
  • 있었지만 그런대로 꾸려간데는.. 전반적 민중들의 의식이 당시.. 여타 나라들 보다
  • 많이 깨어있었기 때문이라는 짐작이 되기도 하는군요.
  • 홍경래난이 1810년 경이라면..프랑스 혁명과 미국독립선언 보다 같거나
  • 불과 10-25년 정도의 차이이고..러시아 혁명보다는 훨씬 앞선 것이라
  • 당시 일반 조선사람들의 의식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함미다.
  • 일제시대를 거치며 막연히 엽전이라며..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을 지니게 되는
  • 시기도 있었지만 결국 연혁깊은 민족적 정신문화의 힘은 여전히 물밑 뿌리에 숨어 잇엇으며..
  • 이것이 이후 3.1운동이나 4.19 의거, 6.10 항쟁 등과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새삼 돌이켜집니다.
  • 김구선생의 바램을 이루어가고 있는 이즈음..
  • 행여라도 다시금 조선말기와 같은 유사한 상황이 재현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야-
  •   김재민
  • 작성자 09:29 새글
  • 서토의 견해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네요. 아놀드 토인비가 설파한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반복과정'이란 말처럼 우리 한국사에서도 수많은 외침과 국내 학정에 반발하며 생존의 길을 찾는 민중들의 저항력과 복원력을 찾아볼 수 있었심다.
  • 조선 후기로 들어서며 발생한 홍경래의 난이나 진주민란, 그리고 동학농민전쟁 같은 것에서 역경을 만나자 무능하고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한 지도층을 제끼고 스스로 삶의 길을 찾으려는 민중들의 결집된 의지를 읽을 수가 있네요. 이런 움직임은 한국사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역사를 살피는 세계사의 무대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서토가 언급한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 외에도 러시아의 '푸가체프의 난이라든가 고대 로마의 '스팔타쿠스의난',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 등이 억눌린 민중들의 에너지가 대폭발한 대표적인 사례들이지요. 후자의 난들은 비록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거기에 참여한 민중들의 저항 DNA는 역사에 기록되어 후세에 집단 유전으로 전승되고 있다고 봄다.
  • 우리나라의 이런 저항 에너지가 극동 3국 중에서 가장 터프하게 발현되는 것은 이런 역사의 단련대에서 더 많은 담금질을 경험했기 때문이라 사료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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