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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빈 공간 채운 감독의 상상력, 결말 알고 봐도 재밌다

백조히프 2026. 2. 4.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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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역사의 빈 공간 채운 감독의 상상력, 결말 알고 봐도 재밌다

 

[리뷰] 영화 <왕과 사는 남자>

 

26.02.04 10:01 | 최종 업데이트 26.02.04 10:01 | 장혜령(doona90)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 ㈜쇼박스


아버지 문종의 죽음 이후 조선 어린 왕 이홍위(박지훈)는 계유정난을 겪고 강원도 영월의 광천골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지를 지키는 엄흥도(유해진)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하는 감시자 역할이었지만 이홍위의 처연한 상황에 마음 쓰여 경계가 점차 흐려진다.

사실 먹고살기 빠듯한 촌장 엄흥도는 옆 마을의 소식을 듣고 잘 살아보자며 유배지를 적극 자처했다. 잠시 머물다가 왕의 부름을 받고 금의환향할 거라고 지레짐작한 탓이었다. 후폭풍은 잔혹했다. 그저 잘 살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은 피바람 속에서 짓밟혀 버렸다.

결말 알아도 흥미로운 설정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 ㈜쇼박스


<왕과 사는 남자>는 실화에 상상력을 덧붙여 만든 웰메이드 사극이다. 엄격한 자문과 완벽에 가까운 고증, 연기 고수들의 의기투합과 호연, 스토리텔러 장항준 감독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재능과 실력을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남들이 안 하는 걸 해보고 싶었다며 농담처럼 말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뚜렷해진다. 역사가 지우려 했던 사실을 현대에 다시 꺼내 보는 일은 어떤 의미일지 말이다.

기득권 중심이 아닌 백성을 위하는 조선을 만들어 나가려고 힘썼던 단종의 기록을 재해석했다. 서로 다른 목적의 인물을 중심에 두고 역사의 빈 공간을 채워 나간다. 결말을 알고 시작하는 게 오히려 장점이다.

장항준 감독은 '엄흥도가 단종의 시체를 건지고 슬퍼하며 숨어 살았다'는 실록의 짧은 두 줄에서 착안했다고 밝혔다. 실록마다 기록도 다 다르고, 야사도 많은 단종의 죽음을 해체하고 이어 붙여 다시 쓰는 선택을 했다.

단종은 왕으로 태어난 인물이다. 대대손손 적통 중의 적통이었으며 총명하고 무예도 뛰어났던 굳은 심지의 호인이었다. 매체 속에서 굳어진 나약한 이미지는 어린 단종의 팔다리가 잘려 아무것도 할 수는 상황과 연결된 해석이다. 이런 선입견을 비틀어 새로운 단종을 스크린 앞에 불러냈다.

결과는 어땠을까. 이야기의 살 덧입힌 허구가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단종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면 조선을 이롭게 할 성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진정한 왕이 될 자, 진정한 리더의 자질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한명회와 수양대군을 합쳐 거대한 악의 축으로 인격화했으며 광천골 백성들과 촌장 엄흥도는 성난 민심을 대변하도록 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정설이 되고, 실패한 정의는 영원히 잊혀야 하냐고 묻는다. 씁쓸한 지점이라면 여전히 변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600년도 더 된 옛날이야기가 현대인들에게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크다.

사람 냄새 가득한 영화

유해진과 박지훈의 나이를 뛰어넘은 케미도 화제다. 서로를 향한 믿음은 신하와 백성을 넘어, 유사 부자 관계로 보이기도 한다. <왕의 남자>, <봉오동 전투>, <올빼미> 등 시대극 불패 신화 유해진이 촌장을 맡아 생활연기를 맛깔스럽게 펼친다.

박지훈은 아역부터 쌓아 올린 경험으로 첫 상업영화에서 물 오른 연기를 보여준다. 모든 것을 포기한 소년에서 왕으로 성장하는 짧은 시간을 압도적으로 이끌며 극의 흐름까지 바꾼다. 슬픈 눈빛의 군주, 카리스마가 포함된 외유내강 단종은 박지훈에 의해 완성되고 다시 쓰였다.

<라이터를 켜라>부터 이어진 인연으로 장항준과 유해진은 24년 만에 재회했다. 장항준 감독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유해진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실제 이들의 친분이 작품의 시너지로 연결됐다. 거기에 유지태, 전미도, 이준혁으로 이어지는 연기 앙상블로 밀도까지 높였다.

팩트와 상황을 떠나 '인간적'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영화다. AI가 삶에 깊숙하게 관여하는 시대에 인간 대 인간으로 맞서는 사람 냄새 가득한 영화다. 오랜 여운이 잔향을 남기며 사유를 부른다. 인간다움이야말로 <왕과 사는 남자>가 품은 미덕이다.

돌아오는 명절에 가족과 함께 보기 좋은 영화로 손색없다. 비싼 제작비와 역사 고증 논란을 피하기 힘든 사극의 한계를 넘어 한국 극장에 온기를 가져다줄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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