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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은 미친 상태…" 최악의 시기에 탄생한 최고의 걸작

백조히프 2026. 6. 2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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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절반은 미친 상태…" 최악의 시기에 탄생한 최고의 걸작

 

[미술로 만나는 인문학] 인간과 광기 ③ 이성과 광기의 공존

 

26.06.20 19:46 | 최종 업데이트 26.06.20 19:46 | 박홍순(zorva1)

빈센트 반 고흐 <붕대를 감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 1889년 ⓒ 퍼블릭 도메인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광기의 화가로 불린다. 일상생활에서 극단적인 감정 기복을 보였고, 발작적인 증상 후에는 탈진과 함께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게다가 발작에 가까운 상황이 지나면 자기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나중에 요양원에 있을 때는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환각과 피해망상에 시달리기도 했다.

<붕대를 감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은 그의 광기 어린 행동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고흐의 자화상 가운데 우리에게 꽤 익숙한 작품이다. 극도의 가난과 정신 분열에 시달리던 그가 고갱과의 갈등 격화를 계기로 자기 귀를 자른 후에 그렸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자화상이지만 그가 겪은 광기와 이후 닥칠 비극적 삶을 예고하는 듯하다.

광기의 화가 고흐

귀가 잘린 자리를 감싼 붕대에만 광인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정면을 응시하는 시선이나 파이프를 문 입술 모양은 너무나 침착하다. 대신 붉은색과 주황색으로 양분된 배경이 그의 분열된 두 인격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발작과 침착 사이의 단절 분위기가 오히려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곧이어 그를 삼켜버릴 더 큰 발작을 암시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귀를 자른 사건의 현상적 계기는 동료 화가 고갱과의 갈등에 있었다. 1888년 말 고갱과 공동 작업실을 꾸렸지만, 동거는 순탄하지 않았다. 의견 충돌이 잦았고, 말다툼 끝에 고갱에게 술잔을 던지기도 했다. 고갱은 곧 떠나겠다고 통보했고, 얼마 후 다시 한번 위협을 느껴야 했다. 고갱에 의하면 "발걸음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칼을 든 고흐가 덤벼들려고 했다. 내가 째려보자 그는 멈추고 집으로 달아났다."

집으로 돌아간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다. 그 전부터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광기를 인지하고, 또한 자신을 광인 취급하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광인으로 취급받는 처지를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그런 취급으로 적어도 사회생활에 관한 한 실제로 광인이 되고 있다. (…) 내가 광인 취급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나는 하나의 예술가가 되어간다. 창조적인 예술가가!"

귀를 자른 사건 이후에 정신 상태는 더 나빠졌다. 자신이 독살될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 정신병원을 오가다 1890년 7월, 해 질 무렵에 밀밭을 산책하던 중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아 37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고흐의 극적인 최후를 미리 알려주는 느낌이다.

총으로 자살하던 달에 제작한 작품이고 최후를 맞이한 바로 밀밭이기도 하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도의 슬픔과 고독을 표현하고자 했다"라며 벼랑에 선 심정을 토로했다. 갈라진 길은 갈 방향을 찾지 못하는 절망을, 금방이라도 폭풍우를 쏟아낼 듯한 하늘과 화려한 금빛 밀밭의 대조는 정신의 분열상을, 하늘을 무리 지어 나는 까마귀는 막다른 상황에서의 마지막 선택을 묘사한 게 아닐까.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년 ⓒ 퍼블릭 도메인


고흐는 정신병원을 오가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던 최후의 몇 달 동안 초인적 창작열을 발휘해 7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즈음 "철저하게 작업에 몰입할 때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항상 절반은 미친 상태로 남아 있다"라며 자기 상태를 진단했다. 정신 분열에 휩싸여 있던 시기에 예술가로서 가장 풍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생애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광기를 위험으로 규정하고 격리하다

하지만 고흐의 광기와 관련하여 주위 사람들의 인식은 전혀 달랐다. 고흐가 정신 분열에 시달릴 때 주민들은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해야 한다는 탄원서를 관청에 계속 보냈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유럽에서 정신병원을 비롯한 각종 수용시설을 만들어 광인을 강제로 격리하던 현실을 반영한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현대인에게 비이성은 광기의 한 현상 형태"라며, 근대에 와서 광기를 비이성과 연결하는 경향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성을 벗어난 영역, 혹은 미성숙한 사유는 정상적 인간 범주에서 벗어난 광기로, 배제와 격리의 대상으로 규정되었다.

"광기는 이성에 대해 자율성을 갖지 못한 존재로 보였다. 광기는 미성숙을 의미한다. (…) 비이성은 언제나 판결의 대상이 된다. 비이성을 대상으로 하는 판결을 통해 이성은 비이성에 제재를 가하고 비이성의 잘못을 증명해 보이고, 고귀한 교정을 시도하며, 마침내는 사회적 질서를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사회에서 배제한다."


그에 의하면 근대적 사고는 비이성을 광기·범죄와 연결함으로써 비이성을 정복했다. 사고방식에 머물지 않고, 광기에 해당하는 사고와 행위를 범죄 범주로 취급하고 감금했다. 수용소로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여부를 판단하는 대상이 되었다. 비이성으로서의 광기는 타인에게 해를 입히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행동으로, 제재와 감금의 대상으로 정착되었다.

광인을 사회적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면서 강제 수용시설인 정신병원이 빠르게 증가했다. 광인을 제도적으로 격리하는 사회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정신병원이 없는 작은 마을에서도 자체적으로 광인을 감금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캐나다의 의학사학자 에드워드 쇼터는 <정신의학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참상을 전한다. "1817년 아일랜드의 한 농촌 마을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미쳤다고 간주되면 오두막 바닥에 1.5m 정도의 구멍을 파서 밀어 넣고 기어 나오지 못하도록 덮개를 덮었다. 생명을 유지할 정도의 음식을 넣어줬지만, 대개는 그 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정신병원은 영국 런던의 '베들렘'이다. 원래 13세기에 베들렘의 작은 성모 수도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곳인데, 14세기부터 정신질환자를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미치광이의 집'으로 유명해졌다. 18~19세기를 거치면서 유럽 전역에서 광인의 감금 시설 성격을 지닌 정신병원이 빠르게 확대되었다.

영국 화가 베르나르 렌스(1682~1740)의 <베들렘>은 조너선 스위프트의 <광기에 관한 여담>에 나오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앞의 광인은 "짚 더미를 갈기갈기 찢고 욕설을 퍼붓고 쇠창살을 물어뜯고 입에 거품을 물고 참관인의 얼굴에 요강을 쏟아버리는 자"를 옮겨 그렸다. 뒤편 벽에서 서성이는 광인은 "끊임없이 말하고 침을 튀기고 입을 크게 벌리고 되지도 않는 말을 떠들어대는 자"를 묘사한 듯하다.

<베들렘> (베르나르 렌스, 1710년 / 리처드 뉴턴, 1794년) ⓒ 퍼블릭 도메인


앞의 광인을 보면 손과 발이 쇠사슬로 묶여 있다. 광인으로 지목된 사람에게 쇠사슬을 채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광인들은 이 그림처럼 삭발을 당했다. 베들렘은 끔찍한 감금과 치료로 악명이 높았다. 치료 기록에 의하면 환자를 의자에 묶어 사슬에 매단 후 빠른 속도로 돌렸다. 회전 속도 증가, 급작스러운 정지와 반전이 반복되면 환자들은 배설물을 쏟아냈다.

리처드 뉴턴(1777~1798)의 <베들렘>은 환자들을 구경하는 관람객들을 보여준다. 한 환자는 변기를 모자처럼 쓰고 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상당수 정신병원은 귀족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환자들의 행동을 구경시켰다. 광인 수용소 구경은 상류층의 오락거리 중 하나였다. 관람객들이 손가락질하며 환자를 자극해서 놀리고, 작은 창을 던져 묶여 있는 환자의 발가락 사이를 맞추며 손재주를 뽐내기도 했다.

광기의 인정을 통한 공존과 자유

광기는 극소수 특별한 사람들만의 비정상적 현상일까? 혹시 본래 대다수 사람에게 내재해 있는, 어느 한 극단의 감정과 행위가 아닐까? 단지 워낙 거칠고 평소에는 마음속에 숨어 있어서 마치 외부의 무엇처럼 느끼는 게 아닐까?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이 <팡세>에서 언급한 다음 내용은 이러한 의문에 다가설 단서를 마련해준다.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미쳐 있다. 그래서 미치지 않은 것도 또 다른 형태의 광기라는 점에서 미친 것과 같다. (…) 인간의 이중성은 너무나 명백해서 우리에게 영혼이 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다. 단일한 주체라면 터무니없는 오만에서 끔찍한 절망으로 갑작스럽게 변화할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파스칼에 따르면 광기는 외부의 영향으로 소수의 특별한 사람에게 생겨난 이상 증상이 아니다. 본질상 모든 인간은 내부에 광기를 갖고 있다. 다만 발현되는 정도가 사람에 따라 다를 뿐이다. 광기라고 규정짓는 상태와 정상적 상태는 동전의 양면, 혹은 간발의 차이에 해당한다는 문제의식이다.

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 미쳤다는 것의 또 다른 형태일 수 있다고 할까? 자신이 완전히 이성적이고 정상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이성과 정상의 기준으로 삼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상태를 비이성과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이성과 비이성,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리하고 전자에 문명을 후자에 야만을 배치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스스로가 이성과 정상의 기준이라고 확신하는 쪽에서 다른 사람이나 지역을 박해하거나 침략하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중세 후반에 유럽을 휩쓴 마녀사냥, 2백 년에 걸친 참혹한 십자군 전쟁, 근대 이후 현대 초반까지 이어진 식민지 전쟁과 지배처럼 극단적·집단적인 광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성이 비이성을, 정상이 비정상을, 문명이 야만을 제거하고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문제는 이러한 사건들에서 나타나는 대규모적·폭발적인 광기다. 그러므로 "불행하게도 천사가 되려는 자가 짐승이 된다"라는 파스칼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자신이 완전히 이성적이고 정상이라는 사람이나 집단일수록 광기에 휩싸일 가능성이 대폭 증가한다.

영혼이 둘이 있다고 생각할 만큼 '인간의 이중성'을 인정할 때 인간 내부의 다양성을 받아들인다. 이성과 정념, 의식과 무의식 등 이질적인 요소를 정상과 비정상이 아니라 '다름'으로 이해하는 순간 포용이 생겨난다. 본래 상반된 특성을 가졌기에 내적인 싸움이 불가피하고, 그래서 파스칼은 "인간은 항상 분열되고 자기 자신을 거역한다"라고 한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주장한 다음 내용은 파스칼의 문제의식과 비슷하다.

"스위프트의 광기, 루소의 정신착란은 각자의 작품 속에 포함되어 있다. 마치 작품 자체가 작가에게 포함된 것처럼. 그들의 작품과 삶에서는 똑같은 폭력이 말하고 있고 똑같은 통렬함이 포함되어 있다. 확실히 양자 간에는 전망의 교환이 일어난다. (…) 니체와 고흐의 광기는 똑같이 근원적으로, 그러나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각 작품에 속해 있다."


푸코에 의하면 이성에 기초한 합리주의적 인간관을 넘어설 때 진정한 인간 이해가 가능하다. 인간은 이성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사유는 객관적이기보다는 스스로에 의해 언제나 휩쓸릴 수 있고, 비이성 요소에서 자신을 상기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몰이해의 장소다. 즉 사유는 신화나 무의식, 혹은 광기처럼 흔히 비사유'라고 말하는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

과연 고흐의 광기를 배제하고 그의 작품을 논할 수 있을까? 보다 근본적으로 광기 없이 그의 작품이 가능하기는 했을까?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느끼는 전율 안에는 이미 광기가 떼려야 뗄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광기가 예술작품에 도전하여 작품이 가진 상상의 지평을 환각이라는 병리학적 세계로 만들어 버리는 영역이 존재한다. 이를 통해 통념적 사고와 평균적 표현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망을 열 수 있다.

광기와 관련하여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을 비롯한 타인의 광기와 자기 안에 숨겨져 왔던 광기를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사고, 더욱 현명한 삶을 실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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