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아니(1884~1920)의 그림 세계
작성: 김재민
2007. 3. 17
우리에게 <목이 긴 여인>의 그림으로 친숙한 아마데오 모딜리아니(Amadeo C. Modigliani)는 이태리 북서부 해안도시 리보르노에서 유대계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을 유복하게 보냈으나 부친이 파산한 후 건강까지 악화되어 중학과정을 중퇴한 뒤 모친과 이태리 내 유명 미술관을 방문하며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미술학교를 다녔다. 이 시기에 14세기 시에나파 조각가 티노 디 카마이노의 작품에 감동하여 조각예술에 심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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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22세가 되던 해에 단신으로 파리에 왔다. 여기서 피카소를 알게 되고, 유럽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보헤미언적 예술가들을 사귀었다. 초기에는 루마니아 출신 조각가 브랑쿠시의 권유로 조각품 제작에 열중하였으나, 건강상 사유로 육체적 힘이 많이 드는 조각보다 회화쪽에 더 전념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각 경험은 자신의 회화에서 간결한 볼륨과 유려한 선의 독특한 양식으로 나타났다. 아프리카 원시조각들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가면같고 평면적인 양식을 통해 초상화 속 인물들의 심리를 절묘하게 묘사해 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풍경화는 거의 그리지 않은 채 인물 초상과 누드화에 전념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독특한 형태와 단순한 색채, 그리고 세부적 묘사가 생략된 배경을 통해 슬픈 존재의 애상과 고독감을 진하게 풍기는 형이상학적인 동시에 미적인 존재로 재탄생되었다. 그가 창조한 인물상 중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길고 가느다랗게 그린 목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원시미술과 인체를 의도적으로 길게 왜곡시켜 그린 매너리즘적 화풍에 영향받았지만, 이 가면처럼 평면적이고 도식화된 양식이 차갑고 무표정하게 느껴지는 대신 저마다 살아 숨쉬는 듯한 개성을 보이는 것은 전적으로 모델의 심리를 절묘하게 잡아내는 모디의 순간 포착 능력 때문이었다.
파리 보헤미언들의 집합체였던 <에콜 드 파리> 내에서도 여성 편력이 다양한 바람둥이이자 로맨티스트였던 모디에게 마지막 연인이자 아내로서 죽음까지도 같이 하며 헌신적 순애보를 바친 쟌느 에뷔테른은 <얼굴이 길어 슬픈 여인>이라는 그만의 캐랙터를 완성시키는 원천이 되었다.
하지만 화가의 사색적이면서도 모성애를 자극하는 애잔한 예술가적 향취에 매료되어 기꺼이 모델이 되어 준 수많은 여인들 역시 각각의 그림에서 저마다 우수와 기품, 우아함과 연약함, 궁핍과 슬픔이 묘하게 어우러진 분위기 속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영혼의 표정들을 표출했다.
20세기 초 온갖 미술사조가 만발할 무렵 활동한 화가임에도 어느 사조의 카테고리에도 넣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가장 광범위한 애호가층을 거느려 온 것은 인간의 진솔한 영혼의 표정을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36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화가는 살아 생전 알콜과 마약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힘겹고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고통 속에서만 그 누구보다 예민한 예술적 감수성과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모름지기 위대한 예술가의 길이 요구하는, 구원이자 절망의 연속인 전형적 예술신화의 삶을, 불세출의 미남화가 모디 역시 어김없이 밟아가야만 했던 것이었다.
큰 모자를 쓴 에뷔테른(1918)
우리에게 <목이 긴 여인>으로 더 잘 알려진 이 그림에서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로 남아달라.."는 모디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모디가 눈을 감은 바로 다음날 만삭의 몸으로 투신한 쟌느 에뷔테른의 애절한 망부가가 들려오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한 평생 바람기 많은 모디였지만 죽음이 임박한 말년 무렵 쟌느에 대한 절대적 사랑은 모디 역시 쟌느에 못지 않았다. 그 무한한 애정이 이 그림 속에 그대로 녹아져 스며있다.
얼굴과 목, 어깨 선의 부드러운 연결을 통해 가난에 찌들은 예술가의 아내 쟌느는 르네상스기의 우아한 고전 여인으로 재탄생된다. 눈동자가 없는 푸른 눈은 모디가 좋아한, 자유와 무한을 상징한다는 파란색의 신비를 사랑하는 여인에게 입혀보려는 열망의 반영이었으리라..
모자 쓴 아가씨(1916)
미남자였던 모디가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는 사실은 그의 전기 어디에서나 언급되고 있다. 이 작품의 모델인 로롯트라는 젊은 여인도 약간 들뜬 듯한 분위기의 용모로 인해 차분함과는 거리가 좀 있어 보인다. 모디의 전매특허 여성상인 우수 어린 표정은 이 그림에서만은 좀 예외인 듯 하다.
그녀의 왼쪽 어깨에 그려진 꽃은 모디가 마음먹고 정물화를 그렸다면 훨씬 더 도드라지게 나타났을 거라는 아쉬움까지 품게 할 정도로 이 모델과는 약간 이질적인 매치를 보인다. 그럼에도 모디의 모델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따사롭게 비쳐진다.
레오폴드 즈보롭스키 초상(1917)
즈보롭스키는 폴란드 귀족의 후예로서 문학공부를 하러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 유학 온 시인이었다. 나중에는 화상이 되지만 당시 화가들을 등쳐먹는 탐욕적인 화상들이 우글거리던 몽파르나스에서 고호에 대해 끝없이 신실했던 동생 테오와의 관계처럼 진실로 모디의 작품을 이해하며 이 화가의 예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의리의 관계를 구축했다. 1916~19년까지의 모디 작품들은 전적으로 즈보롭스키의 재정 지원 아래 제작 가능한 것들이었다.
이 그림에 대해 평론가 웨르나는, "모디가 추구했던 정신과 영혼의 모든 고귀함이 즈보롭스키의 표정에 모두 그대로 녹아 있다"고 평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진실된 우정의 표시가 더 이상 나타날 수 없다는 극찬을 늘어 놓으면서..
머리푼 채 누워있는 여인 누드(1917)
서양미술사에서 여성의 누드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인간 중심의 사고가 싹튼 르네상스 이후였다. 이 당시 여성 누드화의 유행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피렌체의 보티첼리(비너스의 탄생)와 베니스의 티치아노(우르비노의 비너스)였다. 전자가 여성의 아름다움을 순결미 창출 속에서 보았다면, 후자는 육감적 에로티시즘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이런 전통에 따라 모디는 처연한 순결함과 육감적 관능미가 절묘하게 어울리는 그만의 여인 누드상을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장미빛 누드 Reclining Nude(1917)
모디의 누드화 중 가장 관능미가 넘치는 작품이다. 여인의 피부색 마저도 농익은 장미빛 색상으로 표현되어 육감적인 에로티시즘이 절정으로 치달은 듯한 느낌이다. 가식없이 자신의 치부를 다 드러내면서도 당당함을 뿜어대는 모델의 포즈에서 그 어떤 성적인 충동감보다, 도회적 여인에게서도 이처럼 다이내믹한 원시적 건강함을 뽑아내는 모디의 타고난 솜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동서고금의 수 많은 모디 팬들이 열광하는 예술성과 통속성의 절묘한 배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앉아있는 누드(1917)
모디의 누드 모델이 되어 준 여인들은 즈보롭스키의 부인 안나 즈보롭스카, 쟌느를 만나기 전 애인이었던 베아트리스 헤어팅스, 그리고 쟌느 에뷔테른 등이었다. 1917년 12월 모디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개인전을 파리의 벨트 에일 화랑에서 열게 되었다.
대부분의 전시 작품들이 관능적인 여인 누드화들이어서 풍기문란이란 스캔들로 경찰이 개입하는 사건을 불러 일으켰다. 모디와 화랑 여주인이 일시 체포되는 소동 끝에 누드화 5점이 철거되는 상황으로 폐막된다. 하지만 이 사건은 모디라는 화가의 이름을 파리시민들에게 각인시켜주는 효과도 있었다.
이 그림 속 검은 배경 앞에 수줍은 듯 앉아 있는 모델의 몸매 선은 아담하면서도 풍만하고 여유로와 보인다. 눈매 속에서는 어렴풋이 삶의 애잔함을 언뜻 내비치는 듯 하면서도...
풍만한 누드 Grand Nude(1917)
이 그림에서는 다른 누드화에서와는 달리 보다 더 생생한 여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대상 표현에 몰입하는 화가로서가 아닌, 육감적인 여인을 앞에 두고 정욕을 느끼는 한 남자로서 모델을 대하는 듯한 분위기가 짙다는 뜻이다. 여체의 풍만함에 대한 묘사는 거의 르누아르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연한 핑크빛 피부색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모디가 얼마나 에로틱한 감정에 빠졌는 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서있는 금발 여인의 누드(1917)
이 그림의 누드 여인에게는 잔잔한 정감이 여울물의 파문을 일으키며 교교하게 감싸고 있는 듯 하다. 금발 머리 아래 푸른 눈 빛은 화가에 대한 신뢰와 모성적 본능을 동시에 뿜어내는 것 같다. 관능성을 최대로 자제한 채 청순함을 자아내는 모디의 역작이다.
오른팔에 얼굴을 기댄 누드(1919)
티치아노가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통해 누드 모델이 몸을 뒤로 기댄 채 자기 몸의 전면을 보여주는 누드화의 전범을 제시한 대로 모디 역시 이 전형적 구도에 충실하게 제작해 본 것이 이 그림이다. 모델은 쟌느인 듯 한데 눈을 감은 표정은 약간 토라진 듯도 하고 꿈을 꾸고 있는 듯도 하다.
한편으로 잔잔한 미소를 짓는 듯도 하고.. 다소 날카로운 얼굴에 비해 소담스레 영글찬 몸매를 가진 이 여인 누드에서 관객은 그 어떤 내밀한 슬픔과 허망함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다가올 모디와 이 여인의 애잔한 운명을 생각한다면..
검은 타이를 맨 여인(1917)
<큰 모자를 쓴 에뷔테른>에서처럼 채워지지 않은 공허한 눈동자로 인해 불가사의한 마력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다. 붉은 입술 속에 침묵이 가라앉아 눈동자를 지워버린 듯 하다.. 허허한 처연함이 가득 찬 무채색의 눈은 은밀히 영원을 관통할 내면적 광채를 뿜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새하얀 셔츠 위의 검은 타이는 슬픈 듯 무표정한 여인의 얼굴을 결코 잊지 않게 하는 기억의 끈, 바로 그것이다...
쟌느 에뷔테른(1917)
이 초상화는 쟌느를 처음 만났을 때 그린 듯 하다. 활달하면서도 단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표정에서 처음 시작하는 사랑에 대한 기대와 열정이 배여있다. 그럼에도 보는 이에게 슬픈 운명적 사랑에 대한 애잔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푸른 옷을 입은 소녀(1918)
이 그림은 모디와 쟌느 사이에 첫 딸이 생기기 얼마 전에 그려진 것이다. 친구들에 의하면 모디는 몽파르나스 하층 이웃의 아이들을 좋아했다 한다. 이 그림의 소녀 역시 모디가 좋아했던 아이 가운데 하나이다. 어린 소녀는 다소곳이 두 손을 모은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소녀의 눈은 깊고 푸른 물 빛의 호수같아 천진한 듯 하면서도 어린 나이에 벌써 그 어떤 인생의 비밀 하나를 깨친 듯한 눈길의 그윽함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하지만 저 눈 빛을 보면 볼수록 보는 이들의 마음은 공연히 쓸쓸해 진다. 모디가 즐겨 쓴 멜랑코리한 푸른 색이 마술을 부린 때문일까?.. 이 당시 모디의 태어날 아이에 대한 애정과 가난하고 소외된 자신에 대한 내면적 페이소스가 소녀의 눈길과 푸른 옷의 다소곳한 용모 속에 제대로 배여나 서늘한 아련함을 느끼게 하는 그림이다.
노란 스웨터의 쟌느(1918)
이 그림에서 우리는 쟌느가 임신 중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제작연도로 보아 첫 딸을 갖고 있는 상황인 듯 하다. S자형 구도는 조형상의 유연성을 겨냥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몇 년 후에 닥쳐 올 모디 부부의 꼬인 운명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엄격한 카톨릭 가정에서 고생모르고 자란 쟌느가 부친과 의절까지 무릅쓰며 가난한 유태인 화가 모디의 반려자 길을 선택했을 때 보였던 그녀의 내면적 강단과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이 표정에 잘 드러나 있다. 쟌느의 초상화 중 따뜻한 모성적 본능이 가장 많이 깃들어 있는 작품이다.
흰옷 차림의 쟌느(1919)
이 그림 속의 쟌느는 아마도 둘째 딸을 가진 모습으로 추정된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의 푸르스름함이 깃든 흰 색은 화가 아내로서, 태어날 두번 째 아이의 엄마로서 쟌느가 모디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앳된 어린 아내에서 고결하고 성숙미가 물씬나는 어른스러운 여인으로 변신했음을 알려주는 징표이다.
아마도 이때가 쟌느와 모디 부부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한 순간이었으리라.. 그림 곳곳에서 부부가 주고받는 정감어린 교감의 끈이 너울거리는 듯 하다.
자화상(1919)
다른 동료 화가들에 비해 모디는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림의 대상과 마주 보는 교이 생겨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주장하던 그였기에 자기자신을 그린 다는 것은 그리 예술적 흥취가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자화상 한 점을 유일하게 남긴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 이 무렵 알콜과 마약에 찌든 속에서도 모처럼 맑은 정신 속에 있을 때 자신의 모습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그 어떤 계시를 받았는가 보다..
1920년 1월 24 일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서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제작한 화가의 자화상은 헬쓱하게 수척한 용모이기는 해도 득도한 예술가의 자족감 같은 것이 얼굴 면면에 서려 있다. 불꽃이 지기 전에 마지막 빛을 발한다는 '회광반조'의 예술혼 같은 것이 고호나 렘브란트에서처럼 어른거리는 듯 하지 않는가?..
부채 든 루냐 체호프스카 (1919)
이 그림 속 모델은 즈보롭스키 부부의 친구이며 기품있는 용모의 여인이었다. 파리로 이주한 폴란드 망명객의 딸로 이국 땅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밝고 쾌활한 성격보다 사려깊고 조용한 품성이 내면에 더 많이 자리잡은 듯 하다. 모디는 이 여인에게서 자신의 내면을 잘 전이해 표출시킬 수 있는 그림 대상으로서의 매력을 한 눈에 알아보고 쟌느 다음으로 많은 30여회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그녀 역시 위대한 화가로서 모디를 깊이 사모했으며, 쟌느도 이를 알았지만 나중에는 어느 정도 묵인했을 정도였다. 이 그림은 모디와 모델 간의 내밀한 이성적 교감이 상당한 예술적 경지로 우아하게 승화한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되는 걸작이다. 모디적 형태성, 즉 데포르마시옹이 거의 대가적 완성도 속에 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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