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5. 마이스터적 기반 수련의 초입 시절 1

백조히프 2018. 6. 3. 16:02

 

5. 마이스터적 기반 수련의 초입 시절 1

 

 

<경남중 1학년 시절>

 

경남중 입학식을 마치고 난 후 배치된 반 소속을 보니 1-8반이고 담임은 미술담당인 유용만 선생이었다. 첫 인상은 금테 안경 쓴 그저 그런 세속적 속물형 풍모였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아 얼마 후 반 친구들이 돈용만선생이라 부를 정도로 처음 만난 경남중 교사치고는 영 아니 올시다였다.

 

국어, 영어, 수학 선생도 그리 큰 인상이 남지 않는 그만그만한 캐릭터였지만, 생물 여선생(허재순)과 지리(윤종태), 세계사(전병기), 체육(김영민), 음악(신중학) 선생들은 꽤 개성도 있어 다른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꽤 많았던 걸로 기억된다.

 

임신 중이었던 생물 선생은 초등시절 배웠던 자연과목 중 좀 더 심화된 내용들을 소개했지만, 내게는 이 선생이 수업 중에 알프렛 히치콕 감독의 영화 사이코스토리를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학우들에게 소개하던 여담 시간이 훨씬 더 기억에 남는다. (나는 이 영화를 초등 3학년 때던가 미성년자 관람절대불가임에도 부친이 극사정해서 현대극장에 슬쩍 묻혀 입장해 본 적이 있다).


<자넷 리 주연의 60년작 영화-사이코>

 

영화사적 의의와 전체 내용보다는 주인공 여배우가 샤워하다 비명 지르며 칼에 찔려 죽는 장면이 아주 쇼킹했던 기억 밖에 없었는데도 이 여선생의 입담은 그 영화에 대한 관심을 다시 크게 돌이키게 했다. , 중학교에 들어오니 입시기계로만 살았던 초등 때와는 차원이 다른 이런 여유있는 얘기 듣는 시간도 있구나 싶어 생물시간이 한참 기다려질 정도였다.

 

국토지리와 세계지리를 1, 2학기에 나누어 가르쳐주었던 지리 선생 수업도 웬만한 내용들은 초등 6학년 때 한번은 훑어본 내용들에 조금 살을 붙여주는 정도였고, 세계사도 비슷했지만 내가 이들 과목들에 관심이 많다보니 자연히 채택 교과서들의 범위를 넘어서는, 시험준비용 참고서에 나오는 내용들을 통해 더 폭넓게 학습했다.

 

또 한사람 이 시절 내게 커다란 사랑을 베풀어준 김영민 체육선생을 잊을 수 없다. 내 동생 이름과 같다 하니 그럼 형이라 불러주까하며 처음부터 호의 만땅으로 나와 수업시간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김선생을 같이 기억하는 동기들은 당시 인기 좋았던 호남배우 이대엽분위기를 많이 풍겼다 해도 과장이 심하다고 타박줄 것 같지는 않다.

 

운동신경이 제법 발달한 미소년풍의 꼬맹이가 귀여워 보였는지 체육시간에 내가 뭐를 해도 잘한다고 추켜주어, 지금 생각하면 좀 남자아이 롤리타적 성향이 내재되지는 않았을까 할 정도로 김재민 편애주의자였다.

 

집이 학교 바로 밑에 있었으니 오후 수업 마치고 집에 갔다가 도서관에도 들렸는데 초등시절 도서관보다 훨씬 커다란 규모의 장서가 들어차 있어 꽤 많이 압도되었다. 여기서 <플루타아크 영웅전><그리스 로마 신화> 전집 등을 발견해 입학 후 한 달 동안 계속 들락거렸다. 상급학교에 와서 이런 책들도 편하게 접해 보는구나 싶어 몹시도 뿌듯했다.


<중 1 시절 필자를 사로잡은 플루타아크 영웅전>


 

주말에 학교 운동장에 동생 및 동네 아이들 데리고 야구연습하려 가면 초등시절에는 그렇게도 우리를 눈에 띄기만 하면 쥐잡듯 내쫓으려 하던 경비 아재도 이 학교 학생이요하면 끔뻑 놀라면서 그래.. 그렇다면 너그가 다른 꼬맹이들 못들어오게 운동장 관리 좀 해라하며 입장관리 위임권까지 주니 야, 이런 신분상승감을 여기서도 느끼네 하는 그 자족감이 참으로 쏠쏠했다.

 

그 무렵 방과 후에는 각 학급끼리 교복입은 채로 야구시합도 벌어졌는데, 우리반 게임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주장격인 이상득이란 친구에게 나도 좀 끼어달라 하니 체육시간에 내가 공 던지고 받는 모습을 봤던지 바로 니가 투수 함 해봐라하고 중책을 맡기는 것이었다.

 

초등시절부터 야구볼은 제법 많이 만져 봤는지라 속구는 제법 먹혔다. 하지만 우리 포수가 마스크도 안쓰고 하던 시절이라 연식공임에도 빠른 볼이 가면 지레 겁을 먹고 눈을 감는 모양인지 조금만 스트라익 존을 벗어나면 번번히 볼을 놓쳤다. 캐처의 중요성을 새삼 다시 인식해 후일 고교, 대학, 직장 야구팀에서 내가 캐처를 자청한 동기가 되었다.

 

그런데 상대팀 주장 쯤 되는 친구가 우리팀 수비시에 내가 공을 던지려 하면 퍼스트 쪽에서 커다란 고성으로 악다구니성 야지를 막 놓는게 아닌가. 어찌나 승부욕이 강하고 애살머리도 많은지 동네야구에서 스트라익이나 아웃 판정을 놓고 저리 맹렬하게 어필하는 친구는 처음 본다 싶었다. 그 게임은 우리 수비의 자멸과 방맹이 침묵으로 패했지만 그 친구는 , 저런 놈이 다 있노하고 내 머리 속에 오래 남았다. 알고보니 짱쇠라는 별호를 그 당시부터 가졌다던 장세영군이었다.

 

<기억에 남는 친구들>

 

입학식날 새로 맞춘 교복과 모자, 그리고 생전 처음 신어보는 가죽구두를 신고 집에서 학교건물로 가는 길에 나처럼 똑 같은 복장을 한 친구가 부평동 쪽에서 걸어 올라오는 게 아닌가. 서로 동급생임을 알아보고 목례를 나눈 채 같이 입학식장에 참석한 뒤 배치된 반도 같아 그때서야 반갑게 통성명을 했다. 하창우였다. 내 인상으로는 일본육사에 갓들어온 집안 좋은 어느 지방호족의 자제처럼 보였다. 어린 눈에도 그 어떤 신념과 야심이 꽉 차 보이던 보통내기가 아닌 기운이 몸전체를 감쌌다.

 

교실에 들어서니 누가 봐도 니는 반장감이라 여겨질 정도의 아우라가 훤한 학우가 눈에 띄었다. 김태우였다. 나중에 들리는 얘기로는 남일 출신으로 입학시 다른 반에 있던 김경종이와 공동수석을 했다든가 단독수석을 한 친구라는 것이었다. 뭐 투표랄 것도 없이 담임인 돈용만 선생이 바로 반장으로 임명했고, 다른 학우들이 뭐라 궁시렁거릴 틈도 주지 않는 카리스마를 뿜었다.

 

역시 반장질도 똑부러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학우들의 흠모감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기관리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는지 1년 내내 반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김태우를 보좌하는 듯한 단골 2등은 신명철이가 했다. (이 친구도 고교 때 모친상 당하고 학업과는 거리를 두는 일탈의 길로 빠졌다. 83년 경 내가 신혼여행으로 제주행 대한항공 티케팅을 할 때 부산지점에서 얼굴 한번 본 후 소식이 감감하다).

 

1 때 초장에는 야구연습이나 시합관람, 독서폼 잡는 도서관 들리기, 해외뉴스 찾아보는 취미생활로 학급석차가 10등 대를 오르락거린 나는 여름 이후 배종구 선생의 영어과외, 조돈실 선생의 수학과외팀에 합류한 후 성적 향상이 꾸준히 있었다. 다시 초등시절의 공부 맛이 살아나는 시절이었다.



<요즘 나오는 흥미진진한 세계인문지리 책 시리즈>

 

그 하이라이트는 1학년 말 기말고사였는데 윤종태 선생의 제법 광범위한 시험준비를 요구했던 세계지리 시험을 학급 최고점인 50점 만점에 47점을 얻어 상위권 학생들 평균보다 10점 정도 더 되는 성적에 힘입어 처음으로 신명철이 다음인 3등에 오른 것이다. (자슥, 51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처럼 기억하네..)

 

학급에서 부여하는 출석번호는 키순서대로 정했는데 나는 당시 재어본 키가 134센치 정도라서 61명 정원 중 58번이었다. , 내가 이리 콩알만한 친구였던가 싶었다. 나보다 더 적은 채 옆반으로 갔던 김진회는 과연 몇 번이 되었을꼬 하는 생각이 그 순간에도 들었다. 맨 앞줄에 앉게 되었는데 옆에는 57번 받고 온 조용수가 앉아 있었다. 아마 59번은 방송 아나운서 딸내미 잘 키웠다던 정광모로 기억된다.

 

조용수가 지금에야 의엿한 학장출신 교수이자 부산동기회 회장도 오래 역임할 정도로 관록이 몸에 배였지만, 그 당시는 학우들이 조갈비라고 부를 정도로 깡마른 체격에 부자집 도련님인상의 약골 이미지로 꽉 차 있었다.

 

조교수가 강력 부인할 수도 있겠지만, 나와는 2학년까지도 같은 반으로 올라갔는데 나는 이 친구에게 내가 사수, 니는 부사수하는 기분을 아주 단기간에서나마 한번씩 느끼게 해줬을 정도인데도 갈등발생을 천성적으로 싫어해 뭐든지 양보해 주는 골수 평화애호주의자였다.

 

<서대신동 1-55로 이사 가다>

 

또 맹모지교 좋아하는 모친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그 당시 부산의 압구정동이라는 대신동쪽으로 살던 곳을 옮기게 되었다. 집보러 다닌다고 주말마다 부친모친은 나를 데리고 동대신동과 서대신동을 돌았는데 과연 단독주택들의 품새가 토성동 쪽하고는 물이 다를 정도로 큼지막하고 격조가 있어 보였다.


<인터넷에서 건진 최근의 서대신동 역 주변>

 

결국 공무원이 너무 눈에 띄는 집에 살면 남들에게도 민망하니 적당하게 수더분한 집을 구하자는 부친의 브레이크에 걸려 서대신동 1가 부산여고 옆 건물이 들어서 있는 길 안쪽에 화단과 작은 연못을 갖춘 아담한 기와지붕의 혼합형 양옥집을 구해 들어가기로 했다. 들어가서는 마당 창고를 허물어 별채동을 양옥 형태로 부친은 새로 지었다. 나는 이 집에서 독방 하나 챙겨받아 고교 졸업 때까지 살았다.

 

이리로 이사를 오니 걸어다니던 학교길을 부산여고 정문 앞에서 버스나 전차를 타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통학길에 익숙해지고는 빠른 걸음으로 서대신동->부민동->도청 뒷길->학교후문의 코스로 30분여에 걸쳐 다니는게 더 일상화 되었디.

 

이사온 뒤 우리집 뒤에 같은 반인 27회 어청우(경고 28)가 산다는 것을 알았다. 어청우의 집안은 그 때 가세가 기울어 모친이 길 건너에 있는 서대 시장에서 생선상을 하며 가장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청우는 그런 집안사정에 크게 주눅 들어하지 않고 당당하게 내게 다가왔다.

 

같이 길에서 야구연습도 하고, 학교 등교도 같이 하고 그랬다. 아들 친구라 하면 까빡하는 모친이 제법 챙겨주는 덕에 우리집에도 자주 들려 놀면서 어리버리한 내게 학급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신의 생각으로 해석해 전해주기도 했다.

 

경중 교복과 교모 쓰고 집문을 드나드는 나를 보고는 부여고 3학년 누나뻘 여학생들이 목제건물 2층 복도 유리창에서 어이 경중, 몇학년이고?’ 하면서 여러명이 그룹지어 히야카시 하듯 말을 걸어도 1학년 때는 좀 부끄러워 대답도 못하고 못들은 체 하며 지나치기가 일쑤였다.

 

<67년에 있은 국내외 주요 사건>

 

1. 이수근 사건

 

이 해 3월 말에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이던 이수근이 판문점에서 전광석화처럼 탈북 귀순한 사건이 있었다. 우리집에는 국제신보 외에 중앙지로서 1년 전에 창간한 중앙일보를 부친이 구독신청했기에 이 신문을 통해 드라마틱한 탈북 성공 스토리를 부친과 함께 나눠보며 흥미진진하게 접할 수 있었다.


<위장간첩으로 사형선고 받는 이수근(69년 5월)>

 

그해 김수용 감독이 이 스토리를 반공영화 제작 차원에서 만들었기에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2년 후 이수근은 한국을 탈출해 홍콩까지 갔다가 라오스행 비행기로 갈아타려다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에서 우리 정보원들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위장간첩의 죄명을 쓰고 사형된다.



    <최인훈의 소설-광장에서 주인공이 빠진 딜렘머 내용 소개 >

 

노무현 정부 때 위장간첩 혐의는 사후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처럼 북도 싫고, 귀순해서 살아보니 사람을 체제선전용으로 진이 빠지게 돌리는 남쪽 정권에서도 환멸을 느껴 3국인 라오스로 탈출해 境界人적 자연인생활을 해보려던 한계적 상황에 몰린 인간의 비극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어느 훙칙한 이중간첩이 전국민을 속이다 정체가 폭로되어 해외도주 중 우리 정보원들에게 다행스레 붙잡혀 사필귀정의 벌을 받은 해피엔딩 스토리로서만 받아들였다.

 

2. 공화당의 선거 압승

 

5월 초에 치뤄진 6대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리턴매치로 도전한 윤보선 후보에게 이번에는 널널한 차이로 재선되었다. 절대적인 현직 이점에다가 야권에서 이렇다 할 공약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어 결과는 뻔한 전망대로였다. 문제는 6월에 있은 국회의원 선거였는데 우리 현대사에서 ‘60년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만큼이나 악명 높았던 ‘6.8 부정선거로 평가될 정도였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 보도>

 

내 눈에도 신문을 보니 전국적으로 제1야당인 신민당이 비례대표 의석까지 합쳐 근 40여석(공화당 130여석) 밖에 얻지 못한 게 약자 동정의 심사까지 더해져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그 당시 내가 본 신문들의 논조는 공화당이 해도해도 너무 하는 온갖 부정수단을 다 동원해 농촌지역에서는 거의 완벽하게 싹쓸이 했기에, 이제 박통의 3선을 위한 헌법개헌에 필요한 의원직수까지 거의 다가갔다는 우려들로 가득 찼다.

 

1이지만 부친으로부터 밥상머리에서 이런 얘기들을 전해 듣자 신문읽기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져갔다. 하지만 정치판에 대한 내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어른들의 얘기니까 비정치권 테마들과 함께 학생에게 초미의 관심사인 성적 향상과 유지에 최우선의 집중을 하자고 나는 마음을 돌려먹었다.

 

시간이 갈수록 한국언론들은 박정권에 경제치적 등의 우호적인 기사들만 쏟아내니까 나도 서서히 세뇌되었다. 이런 구국지사적 인물이란 세뇌감 때문인지 박통이 79년 암살될 때조차도 마음 한 켠에는 미우니 고우니 해도 한국경제를 일으켜 세운, 한국현대사에 커다란 스타 하나가 하극상을 당해 사라진 게 못내 아쉬울 정도였다.

 

<그 밖에 기억에 남는 국외 발생 사건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 해에는 6월 이스라엘과 중동 이슬람권과의 전격적인 ‘6일전쟁에 대한 국내 보도를 열심히 접했던 기억이 난다. 1억명의 아랍국들에 둘러싸인 600만 인구의 이스라엘이 승리하여 수에즈 운하 오른 쪽의 가자 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접수하고, 애꾸눈 모세 다얀이 이 전쟁의 군사적 영웅이 되었다.



 <전광석화 같았던 6일전쟁의 경과도>

 

7월에는 <6.8 부정선거>의 급격한 규탄여론 악화를 호도하려 중앙정보부가 기획하여, 동베를린에서 포섭하려온 북한 인사들에게 생활비 좀 얻어쓰며 북한체제에 유화적이 되어가던 가난한 독일유학생과 재독동포 44명을 당시 수도 본 옆에 있는 쾰른 공항에서 우리 국적기에 유인해 서울로 압송한 동베를린 사건이 있었다유명 재독 작곡가인 윤이상, 재불 화백 이응로, 국내 천상병 시인 등이 이 조작 스캔들에 걸려들어 고초를 당했다.


 <동베를린 사건의 공판 광경(맨 왼쪽이 윤이상)>

 

서독 영토내에서 벌어진 이런 대규모 납치사건으로 한국정부는 후일 ‘일본에서의 김대증 납치사건만큼이나 두고두고 독일 브란트 좌파정부와 외교적 분쟁이 있었지만 그 때는 국내 보도관제 속에 많은 한국인들은 이런 분쟁이 있는 줄도 거의 몰랐다.

 

중국대륙에서는 50년대 후반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찌그러져 가던 마오쩌뚱의 권위회복을 위해 마오 지지세력들이 젊은 고교생과 대학생 홍위병을 동원해 생산방식에 시장자본주의적 요소를 가미하려던 실용노선의 수정주의자들과 마오의 정적들(류 샤오치, 펑더화이, 팅 새오핑 등)을 한꺼번에 박살내려 66년부터 시작한 친위 쿠데타인 문화혁명이 점점 더 기승을 부렸다.



 <중국의 현대화를 30년 후퇴시켰다는 문화혁명 광풍>

 

그 당시 한국신문이나 매스컴에서는 중공 내부의 대숙청 작전이 끝간데를 모르게 펼쳐지고 있으며, 제발 좀 그리 되어 끝이 없는 대혼란 속에 빠져라는 식으로 보도했던 것 같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차관경제의 한계 속에 ‘2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 추가 공업화 투자를 위한 외환부족의 경제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베트남전 반대 시위로 궁지에 몰린 미 존슨 행정부와 외화벌이용 대규모 군대 파견 딜을 행한 박정권의 베트남 전투부대 파병 결정등이 벌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백마부대 출정식에 참석한 박통>

 

내 머리 속에는 자유통일 위하여 님들은 떠어났으니~~’ 하는 맹호부대 출정가를 학교에서 배우며, 영화관에 가면 첫머리에 빰빰빰, 월나암 소식하며 나오던 이 무렵의 대한뉘우스가 떠오른다.

 

이들 모두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역사적 의미들이 제대로 드러나고 평가받는 시절이 되었지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우리 동기들에게는 당시에는 그냥 파편적으로만 잠깐 알려진 채 학업수행 경쟁과 사춘기의 정신적 방황 속에 그냥 스쳐 보낸 사건들이라 생각된다.

 

사실 당시의 나는 언급한 사건들의 아주 미세한 부분만을 그 무렵의 보도 속에 만났기에 고입을 위한 학업수련의 대의 앞에서 13세 짜리가 뭔가 쿵하고 느낀 바 있어 이들을 파고들 게제는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짧은 스침의 기억들이 먼 훗날 재평가되고 재해석된 사건 본질의 전모들을 새로이 알게끔 보내어준 귀중한 연결 단초였음은 확실하다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