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6. 마이스터 수련 초입시대 2

백조히프 2018. 6. 7. 09:45


6. 마이스터 수련 초입시대 2


 

 

<다사다난함을 예고하는 1968>

 

경남중 1년의 시간을 보내고 2학년이 되기 위한 첫 겨울방학을 맞았다. 크리스마스와 신정을 보내며 영화관 순례와 과외 학습장에 다니던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1월 중순을 지나면서 커다란 사건들이 막 터지는 것이었다.

 

1.21 무장공비 침투 사건

 

북한의 정찰총국이 대규모 무장공작원 30여명을 서울에 침투시켜 청와대 기습으로 박통을 암살하려던 ‘1.21 무장공작원 침투사건이 그 첫 스타트였다.

 

신문과 TV 방송에서는 연일 이 뉴스 보도로만 도배질을 했다. 휴전선의 파주 침투로를 통해 거침없이 북악산까지 진출한 공비부대는 이틀 후 청와대 외곽 경비소인 자하문 파출소에서야 첫 제지를 받고 교전 후 각개 도주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매스컴들은 토끼몰이식으로 이들을 쫓던 군경추격대가 오늘은 몇 명 사살 성과, 총 몇 명 누적사살 전과하는 식의 발표문을 사살 시체들과 함께 매일 보여줬다.


<1.21 침투조에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

 

그러던 중 김신조가 체포되어 방송에 나와 우리는 박정희 목따러 왔수다하는 회견 내용을 듣고, ‘, 저놈 흉악한 적이지만 간뎅이는 엔간히 크네. 어쩌다가 안죽고 저리 사로 잡혔을꼬.. 안됐지만 조만간 죽을 목숨이제..’ 하며 묘한 양가적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이 아재는 그후 한국에서 직업적인 반공강연 강사가 되어 3,000번이나 돌려졌어도 꿋꿋하게 버티며 나중에는 개신교 목사가 되어 지금까지도 현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2.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무장공비 침투가 벌어진 121일 이틀 후에는 미해군의 정찰선 푸에블로호가 일본 쿠슈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톡 해상에서 대소련 정보수집을 하다가 원산쪽으로 옮겨 공해상을 들락거리던 중 북한 초계정 3척과 미그기 2대에 의해 나포되어 원산으로 끌려갔던 사건이다.


<푸에블로호(67/10)> 

 

이 사건이 무장공비 추적전 중에 한국신문들에 또 대문짝 만하게 터지자 , 이러다 제 26.25가 또 벌어지는 것 아니가? 북괴놈들은 왜 저리 간뎅이도 크고 공격적이제.. 미국놈들 코털 제대로 잡아당기네..’ 하고 사건 전개에 흥미진진해 했다. 다른 한편 만화나 영화에서 북한군은 한국군 밥이던데 실제로는 안그렇는갑네 하고 약간 의아함이 품어지며 한국과 미국이 요로콤 당하는 데 대한 부아가 치솟기도 했다.


<대동강에 전시된 푸에블로호(2009/05)> 

 

사건 초기에 미국은 당시 매체에 하도 보도되어 지금도 기억나는 핵항모 엔트프라이즈호와 호위 구축함들을 원산 앞바다로 이동시켜 당장이라도 폭격에 들어갈 것처럼 무력과시를 했지만 북한은 꿈쩍도 하지 않는 듯 했다. 마치 역사에서 배웠던, 구한말(1866) 대동강까지 들어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군민의 저항 속에 선체가 소각되고 미선원들이 처형되었다던 그 사건처럼 말이다.


<억류된 푸에블로호 승조원> 

 

당시 미 존슨 행정부는 베트남전에 막 휩싸여가던 시기라 한반도에서 또 하나의 전쟁을 수행할 입장이 못됨을 간파한 북한 측의 계산된 도발이었다. 결국 예상대로 미국은 판문점에서 북한측과, 남한을 제킨 채 비밀협상전을 벌리며 질질 끌려 다닐 수 밖에 없었다. 1년 후에야 미국은 비공식적으로 북한에 자신들이 영해침범 했음을 사죄하고서야 배는 빼앗긴 채 82명의 승무원을 겨우 돌려 받았다.

 

아무튼 이 두 사건 이후 우리나라에는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모든 고교 이상 학교에는 교련 과목이 필수로 채택되었다. 전교생이 동원되어 구덕운동장에 모여 김일성 규탄대회와 화형식을 지켜봤던 기억이 삼삼하다. 이런 엄청난 사건들과 함께 펼쳐진 68년에 내게는 지나고 보니 곡절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꽤 괜찮았던 중2 생활이 시작된다.

 

<김준곤 선생과 새로 만난 학우들>

 

3월에 2학년 반편성이 되어 2-2반에 가니 담임은 국어 담당인 김준곤 선생이었다. 첫모임의 키재기에서 이번에는 1학년 때보다는 6명이나 제낀 52번을 받았다. 김선생은 전해오는 별명이 똥걸레거지니 할 정도로 후줄근한 양복 맵시에 얼굴도 까무잡잡한데다 무슨 불독처럼 큰 주름들이 많이 잡혀있어 상당히 꼬질꼬질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입을 열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세련된 표준말을 구사하는데다 국어과목 수업에 대한 열정이 장난이 아니었다. , 모처럼 제대로 된 선생 한 양반 만났구나 하는 흡족함이 팍 들었다. 더군다나 성적 상위권으로 온 친구들을 미리 파악했는지 첫수업에서 내 이름을 이미 아는 듯 불러주니 그저 국어시간에 대한 동기부여를 왕창 받았다.


<중 2 때 하복 입고 우리집 마당에서>  

 

난 이 양반에 의해 우리 국문법을 상당 부분 깨쳤다고 생각한다. 나만큼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한 와이프가 지금도 구별 못하는 관형사와 형용사, 부사의 차이, 구와 절의 용법, 그리고 불완전 명사의 종류와 띄어쓰기법 등등을 이때 다 습득했다. 이렇게 고교시절까지 연결되는 국문법의 기반과 함께 선생이 제시하는 좋은 글읽기 텍스트들과 귀에 쏙쏙 들어오는 해설을 통해 우리 말의 풍성한 표현력을 맛볼 수 있었다.

 

학급반장에는 1학년에서 올라온 석차 순이었는지 성욱조가, 부반장에는 박승준이가 임명되어 아마도 이 둘이 1, 2등으로 우리 반에 온 것임을 짐작케 했다. 3~5 등에는 누굴까 궁금했지만 2학년 시절을 지나면서 보니 나와 함께 유일성, 문규상이가 해당되었지 싶다. ‘망키라는 별명을 앞 학년에서부터 들고온 뒤통수 짱구 박승준이는 1학년 때 우리반 김태우-신명철 라인처럼 성욱조-박승준 라인을 구축하여 저그 둘이 1, 2등을 계속 다해 먹은 것으로 기억한다.

 

수년 전 부경대 경영학과 교수 하다 캐나다에서 불의의 졸음 교통사고로 작고한 유일성이는 그 때나 고교 때나 가시나 같은 용모나 말투, 행동가짐으로 45번대 이후에서 공부와 운동, 결기(깡다구) 보임 등을 통해 영향력을 약간 누린 김모의 괜찮은 놀이 파트너가 되어주었다.

 

사실 이 친구가 집에서 독학만 하는 것 같은데도 공부를 곧잘 해 과외빨이 일상적이었던 내게는 묘한 열등감을 주니 성적 경쟁을 하면서도 장난을 빙자해 괴롭히기도 꽤 했다. 나쁜 놈.. (난 이때 잠깐 이 친구의 공부 호적수가 되었을 뿐 고교 이후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고, 80년대 초 문교부가 IBRD 국비장학금으로 보내주는 경영학 교수요원 양성 프로그램에서 만나 지는 텍사스 가고, 나는 함부르크 가는 석달 사이 S상대 파견학습 연수장에서 다시 조우했다).

 

내 주위에는 1학년 같은 반에서 올라온 조용수, 김영수, 어청우, 정광모 등이 있었고, 다른 반에서 온 양재균, 박상국 등이 기억에 남는다. 중간 이후에는 우리 반 싸움짱이었던 한장호, 중간체급에서 집사같은 행동책까지 데리고 씨니컬한 미소로 분위기를 장악하던 드러머 한용칠이, 그리고 태권도 하던 김용섭이가 떠오른다.

또 고교 때 보여준 기타연주 실력으로 내가 지금까지 흠모하는 조윤건이와 우리 동기회에서 프로 수필가급 글쓰기로 명성이 높은 박찬용이도 그때 처음 만났다.

 

토성교 시절 먼발치에서나마 서로 아는 척했던 성욱조는 예전에 내가 겪은 정중진이 이상으로 우리 2-2 반에서 엄청난 카리스마를 누린 것으로 생각된다. 싸움짱들과도 좋은 관계를 가지는 걸로 봐서 이 친구들과도 좀 어울리는 줄 알았는데 공부면에서는 2학년 기간 내내 전교 1등을 거의 독식할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강자였다.

어떻게 공부벌레가 아닌 듯 하면서도 압도적인 1등 지위를 지속적으로 누리는가 지금도 그 공부량과 학습방식이 베일에 가려져 있어 더 신비로울 정도이다.

 

이 천하의 성욱조가 한번은 체육시간에 여름 체육복 하의를 갖추지 않아, 맘에 들지 않으면 선생들도 옥상에 데려가 줘팬다는 사이코 체육선생 황선길에게 걸려 몇 명의 다른 학우들과 하얀 삼각빤스만 입고 토끼뜀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아니, 황선길이 저 무식한 노무 시키가 꼴랑 체육복 안 입고 왔다고 성욱조에게까지도 저리 개모욕을 주다니..’ 하고 속으로 한참 분개했던 기억도 난다.

 

조용수는 여전히 얌전한 범생이 모드로 내공을 닦으며 미래의 학업 추진력을 모우는 듯 했고, 가느다란 눈매에도 사극 연기력이 대단했던 양재균이는 주위 학우들이 당시 양장군이라 불러줬다. 덩치는 작았지만 부당함에 대드는 깡다구가 있어 작은 거인이라 충분히 불릴 만 했다.

 

그리고 나와 중고교, 대학, 하숙, 유럽생활까지 같이 하게 된 박상국이는 당시 뒤통수가 툭 튀어 나온데다 혈색이 항상 벌거스럼해 아그들이 고구마라 불렀다. 지가 꼽았던 공부 호적수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승부욕으로 시험기간만 되면 며칠씩 밤을 새운 듯 눈퉁이가 부어 있었지만 절대 밤따위 새우지 않고 잠을 너무 자서 눈쪽이 부은 거라는 말같잖은 내숭을 떨었다.


<독일유학 시절 밀라노에서 함부르크 찾아온 박상국이와 엘베강변에서> 

 

커가는 덩치에 비해 그때까지도 변성이 되지 않아 앵앵거리는 목소리에 양장군이 붙인 암년이라는 별명을 지금도 중학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들 사이에는 지가 싫어하든 말든 애용하고 있다. 나와는 차차 소개하겠지만 잠깐씩 끊어졌다가 또 다시 엮여지는 끈질긴 실타래 인연을 질질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처음 만나는 색계에 홀딱 빠지다>

 

작년에 암으로 타계한 김영수는 내게 색계의 세상을 처음 인도해준 잊지 못할 친구이다. 토성인가 어딘가에서 한해 꿀린 뒤 경중 들어온 친구인데 1학년 때에 이어 2학년 때에도 내 뒤에 앉아 공부 이외의 세상에 대해 자기가 아는 만큼을 아낌없이 내어놓던 잡기의 왕자였다. 탁구와 당구의 세계에는 그 시절부터 만만찮은 자질의 내공을 갖춘 듯 했다.

 

2학년 여름이 되자 이 친구가 어느 날 남녀 간의 열합지정과 출생의 비밀을 제대로 알려 주었다. 물론 초등 시절에도 남녀가 x구리 뜬다하면 뭔지는 몰라도 해서는 안되는 금기행위인 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실제로 어떤 행위인지 꼬맹이급 우리는 사실 잘 몰랐다. 그때까지 나는 아이가 탯줄로 연결되는 것을 봐서 아마도 배꼽이 있는 배가 아니면 항문을 통해 나오는 줄로만 알았으니 말이다.


<에로스와 프쉬케의 연애>

 

초등시절 과외스승이었던 백선생에게 , 아이는 어디로 나오능교?’ 하고 물어도 씩 웃으며 나중에 차차 알게 된다하거나 너그 부모님께 물어봐라하고 즉답을 항상 비껴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부친이 어디선가 갖고 오는 미군잡지들에서 서양미녀들이 치부를 보일 듯 말 듯한 비키니 차림으로 있는 것에 아랫도리가 빳빳해 지는 것을 자연의 이치처럼 경험했지만 남녀관계의 속시원한 내막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영수에게 니는 혹시 애가 어디로 나오고, x구리가 정확하게 무언지 아나?’ 하니 이 친구가 씩 쪼개며 아직 그것도 모르나? 애는 여자의 그곳에서 나온다. 그리고 x구리라 불리는 섹스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상대의 그것을 계속 보고 있으면 남자 것은 빠딱 서고, 여자 것은 그 틈이 저절로 둥그렇게 벌어져서 그때 같이 교합을 할 수 있게 되제.. 그 결과로 아이가 만들어지는기라..’ 하며 십몇년 동안 알고 싶었던 비경의 이바구를 드디어 속시원하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열어서는 안되는 판도라 상자>

 

그 다음 날부터 가만 둬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본 죄값처럼 눈앞에 나타나는 내 또래 이상의 여학생들과 성인여인들은 모두 신비로운 보물을 가진 특별한 존재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인간으로써가 아니라, 제대로 한번 벗겨 눈이 빠지도록 여체를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는 욕망의 대상으로 하루사이에 바뀐 것이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새는 줄 모른다고 여체와 섹스에 대한 환상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했지 줄어들지 않았다.

 

오직 했으면 모기가 되어 그 당시 영화계의 히로인들이었던 문희나 윤정희가 샤워하는 목욕탕에 들어갈 수 있기를 소망하거나, 의대를 나와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장래 희망을 품었을 정도이다. 다른 한편 김영수가 소개해준 꿀단지같은 책을 보수동 책골목에서 사와 집에서 들키지 않게 한밤중 소등한 채 이불 덮어쓰고 플러시 전등을 켜고는 숨이 막힐 정도로 흥분해 읽기도 했다. 한마디로 꼴림이 뭔지를 드디어 제대로 알게 된 시기였다.



<모딜리아니-장미빛 누드(1917)>


 

몽정의 단계를 넘어 수음이라 부르는 용두질도 신체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나 주위 친구들로부터 좀 더 자세히 전해 들으며 서서히 익혀 갔다. ‘선데이 서울’, ‘주간경향같은 엘로 매체들은 집으로 사들고 와서, ‘아리랑같은 음란기사 전문의 잡지들을 만화방 같은데서 죽치고 앉아 광분하듯 섭렵했다.

그럼에도 성적은 다행스레 별로 떨어지지 않고 그해 말에는 오히려 최고 수준까지 올라갔다 (전체석차 16/540). 아마도 사그라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번쩍거린다는 회광반조의 현상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되기도 한다

 

당연히 인과응보처럼 계산서는 서서히 전해져 왔다. 이런 환상의 세계에 빠져 혼자서 거의 범죄적 수준의 온갖 몽상을 하다보니 중3 때부터 성적이 완만하나마 하강기에 접어들었고, 경남고는 그때까지 어찌어찌 쌓아놓은 기본역량으로 들어갔지만 고교시절은 한번도 초등과 중학시절의 공부맛을 못본 채 그냥저냥 보내게 되었다.

 

<68년에 있은 국내외 주요 사건>

 

이 해 1월 말에는 곧 미국의 승리로 베트남전이 종료될 것이라던 웨스트모얼랜드 미현지 사령관의 호언장담에도 월맹군과 베트콩이 그간 모아온 전력을 집중한 구정 대공세가 펼쳐졌다. 한때 사이공에 있는 미대사관이 점령될 정도로 베트남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며 미군의 단기 승리 전망은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교착전이 지속되자 미국내에서는 반전시위가 점점 가속화 되었으며 결국 미군은 70년대 초 무렵부터 베트남에서 철군하는 쪽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구정대공세 때 생포된 베트콩의 처형> 


4월에는 흑인인권 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백인 인종주의자에 의해, 6월에는 63년에 암살된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유력한 민주당 대권주자이던 로버트 케네디가 남부에서 유세를 돌던 중 중동계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되었다. 국내 신문들에는 특별한 심층보도 없이 그냥 사실 보도로만 소개 되었다.

 

그 사이에 있던 5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기폭되어 서유럽 전체에 요원의 불길처럼 치솟으며 ‘6.8 좌파 청년혁명이 전개되었다. ‘45년 이래 형성되었던 냉전체제 속에서 지나치게 우경화 되었던 프랑스와 서독에서 기성체제에 반발하던 대학생 세력들이 급진좌파적 이념 속에 체제전복을 시도했지만 침묵의 다수라는 기성세대들과의 선거투표전에서 패해 극심한 좌절감을 맛봤다.


<프랑스에서 기폭된 6.8 청년혁명>



이들 중 일부는 붉은 여단’(이태리)이나 바더 마인호프 그룹’(서독) 등의 테러단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좌파급진 세력으로 구성된 적군파가 모습을 내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전세계사적 운동이 별로 소개되지 않은 채 박정권의 3선개헌과 유신체제로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프라하의 봄(1968)>


8월에는 서구권의 6.8 청년혁명에 대응하듯 3월에 발생한 폴란드 대학생들의 봉기운동에 이어, 체코에서는 프라하의 봄을 한 때 기대할 수도 있게끔 체코 대학생과 체코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두브체크가 선두에 선 반소저항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국내언론들은 서구권의 6.8혁명에 대해서는 인색한 보도를 했으나, 체코의 상황은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당시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탱크를 앞세운 강공진압에 두브체크는 실각하고 프라하의 봄은 잠깐의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10월에는 64년 일본에 이어 멕시코에서 개발도상국으로서는 처음으로 19대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특히 여기에서는 4월에 암살당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추모하고, 미국 주류사회의 여전히 드높은 인종차별주의에 항의하여 육상 200미터 1위와 3위자인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 두 흑인선수가 시상대에서 초유의 성조기에 대한 저항 세레모니를 행하여 전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멕시코 올림픽-블랙 파워(1968)>

 

나도 이 방송을 당시 녹화중계로 봤는데 아직 전후 맥락을 잘 몰라 저 흑인선수들이 왜 자기조국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외국에까지 나와 머리를 숙인 채 검은 장갑을 낀 손을 치켜세우는 저런 불경스러운 포즈를 취하나에 대해 잠깐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이것이 세계 유색인종 인권투쟁사에서 한 획을 그은 커다란 상징적 사건이라는 걸 그때는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한국선수로는 도오쿄 올림픽의 정신조처럼 강원도 원주출신 지용주가 복싱 경량급에서 준우승하여 은메달을 획득했다


<울진-삼척 공비침투 사건 보도(조선일보)>

 

11월에는 1월에 이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또 일어났다. 이번에는 북한이 120명의 대규모 병력을 며칠에 나누어 파견했다. ‘이승복 어린이 살해 사건으로 기억되기도 했지만, 남한에서의 혼란조성과 게릴라전에 대한 산간 오지에서의 시험전 성격이 짙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두 달여에 걸쳐 공비병력은 그해 발족한 우리 향토예비군에게 실전훈련만 시켜준 채 거의 모두 사살되고 말았다.

 

<68년에 대한 단상>

 

68년은 국내적으로 정초에는 1. 21 사태, 푸에블로호 나포, 연말에는 울진-삼척 공비침투 등으로 점철되었고, 국외적으로는 베트남전에서의 미국철수 조짐, 유럽에서의 6.8 청년혁명, 체코의 민주화 바람, 멕시코 올림픽 등으로 풍미되어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이런 격변하는 대내외 환경 속에 나는 지구촌의 변화무쌍함을 이제 좀 굵어지기 시작하는 머리로 제법 또렷하게 감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성인남자로 성장하는데 당연한 통과의례인 사춘기의 에로스 세계에 너무 빠져 허우적거리며 누구보다 격심한 성장통을 겪었던 것 같다.

 

향후에도 수 년 이상 이쪽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 바람에 그 이전에 유지했던 명징스러운 이성의 총기들을 많이 손상시켰던 것 같아 서서히 아쉬움이 더해지는 첫 해로써 기억된다. 물론 학업 면에서는 마지막 찬연한 시절로서 뜻깊게 보내기도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