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중학입시에 맹진하던 시절
<토성교 5~6학년 시절>
괜찮았던 64년을 보내고 65년 3월 5학년에 들어서자 남녀 분반에 의한 대대적인 학급 개편이 일어났다. 후일 중고교 시절에는 해마다 맞이하는 행사였지만, 그 때는 4년 만에 처음 맞이하는 상황이라 새로운 변화 환경이 상당히 낯설고 적응에의 심적 부담이 적지 않았다.
아마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던 4학년 시절을 떠나보내고 미지의 환경 속에서 기득권 내려 놓고 다시 나를 올려 세우는 적응을 해야 한다는 불확실성 때문에 더욱 그랬을게다.
반 편성이 어떻게 나눠졌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짐작해 보니 경남중에 들어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친구들을 많이 배정한 반이 5-2반으로 기억되는 우리 반이었다. 담임은 토성교 고학년 교사진 중에서 수년 간 높은 합격생 성과를 보여줬다던 김해주 선생이었다. 거기에 대한 학교측의 기대가 컸던지 이 반에는 4학년 시절 반에서 1~3등 안에 든 친구들이 특히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물론 다른 반에도 내가 아는 한 성욱조, 박문수, 전창민, 조군제 등을 비롯해 6학년 때 사립 남성교로 전학 간 박성근, 박필성 등의 걸출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와 같은 반에서 5, 6학년을 보낸 적은 없었다, 우리 반처럼 학급석차 1등을 해봤던 친구들을 4명이나 모아놓은 반은 없었다. 해주 담임은 다른 동료 담임들에게 ‘우리 반은 1등짜리 공부쟁이가 무려 4명이나 모여있는 드림팀’이라고 공공연히 자랑하며 흐뭇해 했다.
<김진회와의 조우>
그 4명이 김모를 비롯해 김진회, 김종성, 정중진이었다. 김종성이는 우리집 옆동네에 살았으며 광복동 동아극장 앞에 있는 시계포집 아들이었다. 정중진이와 함께 나와도 4학년 같은 반에서 지내며 올라왔지만 중진이와는 달리 백선생 과외팀에서도 같이 공부한 기간이 제법 되는 친구였다. 먹고 사는 집 도련님답게 천성이 부드럽고 유순해 결기 같은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친구라 우리 세명은 한 수 아래로 취급했다.
중진이는 반이 바뀌었음에도 낯설음을 크게 내색하지 않고, 모타리 작은 우리 세명을 앞에다 앉혀 놓고 자기는 뒤에서 꼬마들이 어떻게 노는 가를 굽어보는 듯한 포지션을 취하는 듯 했다. 내 기억으로는 5학년 내내 담임의 신임을 받아 우리 반 반장을 지낸 것으로 안다. 학업성적 1~2등을 다투는 요런 짓은 ‘꼬맹이들 너그끼리 해라’ 하는 듯 중학교 들어갈 만한 학습 내공만 닦으며 성적 1위 쟁탈전에 크게 연연해 하지 않았다.
<67년 2월 김진회와 졸업식에서>
드디어 내 인생에서 오랜 기간 애증의 관계를 맺으며 은행지점장을 부친으로 둔 집 막내아들 김진회를 5-2반에서 처음 만났다. 4학년 2학기 때 동신에서 우리 반 옆 반으로 전학 왔다던데 오자마자 그 반을 성적으로 석권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나도 많이 들었다. 어떤 친군지 궁금했는데 2년이나 같이 지낼 반에서 운명처럼 만나게 되었다.
첫 인상은 재간둥이라는 느낌에 걸맞게 작은 몸집에도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주눅드는 법 없이 가진 끼들을 다 풀지 못해 안달하는 듯한 친구라는 것이었다. 머리도 영특했지만,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솜씨가 요즘 같으면 연예기획사 연습생처럼 학우들 기를 팍 죽일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거기다 바둑도 당시에 벌써 2~3급이나 되어 겨우 바둑 두는 길만 알던 나와는 한 수 둘 수도 없는 아득한 기력을 갖고 있었다.
<이 시절 김진회를 연상하게 하는 영화-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
경남중고교에 다니는 형들이 많은 집에서 막내로 자란 탓인지 저그 모친의 늦둥이 사랑도 많이 받은데다 형과 누나들이 보던, 집에 굴러다니는 책들을 많이 주워읽어 생각이 또래들 보다는 훨씬 조숙했다. 나는 무슨 애늙은이를 대하는 듯한 느낌이었고, 반대로 본인은 나를 포함한 다른 친구들이 좀 유치하다고 여겨 항상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말투나 자세를 보였다.
당연히 겸손 같은 것은 모르는 이런 재승박덕한 방자한 태도에 한참 재수가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담임은 이 친구의 재기넘치는 총명함을 항상 높이 평가했고, 소풍 등의 오락회 시간 때 저그 형들에게 배운 듯한 팝송을 부르고, 당시 유행한 루이 암스트롱의 탁성 창법을 차용한 가수 김상국의 ‘쥐구멍도 볕들 날 있다’ 같은 곡을 얼추 비슷하게 모창해 내니 많은 반 친구들이 열광하며 ‘대단한 괴물이 떴다’고 탄복을 했다.
<영화에서 방자한 모차르트의 천재적 재능에 신을 원망하던 작곡가 살리에리 >
내가 하지 못하는 특기들을 갖고 있는데다 사고수준도 꽤 조숙해 보이니 좀 요망스러워 보였지만 그 존재감은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부는 설렁설렁 하는 것 같은데도 어디서 선행학습을 했는지 시험은 쳤다 하면 거의 반 수석을 도맡아 했다. 한 때는 나도 공부 좀 했다는 소릴 들었는데 이제는 천재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앞에 선 범재 작곡가 살리에리가 된 기분이었다.
<사회과목에서 위축된 존재감을 찾다>
김진회가 공부로써도 우리 반을 독주체제로 평정할 기세였지만 한번씩 까불거리다가 시험실수 할 때도 꽤 있었는데 그때는 내가 1등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요놈은 실수한 게 분하다며 시험채점지 받던 날 아이들과 선생 앞에서 펑펑 울면서 1등 놓친 것에 액통하다는 쇼도 할 줄 알았다. 문디 자슥, 1등 나눠 먹을 줄도 알아야지 지만 1등 독점할라꼬..
하여튼 5학년에서 만난 김진회는 이런 승부욕 강한 애살덩어리 친구였다. 비록 손님 실수할 때 이삭 줍듯이 간간이 1등 맛도 봤지만, 김진회도 내 앞에서 꼼짝 못하고 지가 하수임을 선선히 인정한 분야가 사회과목이었다. 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위인전집과 부친이 사다 준 ‘국민생활 대백과’를 끼고 살다 보니 일반사회와 세계사 배경지식에서 또래들과는 차원이 다른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거기다 5학년 중반부터는 부친이 구독하던 국제신문도 호기심에 한자를 외국어 익히듯이 부친에게 물어 읽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쓸 줄은 몰라도 자주 나오던 한자들은 그림 문자처럼 해독을 하니, 국제면을 통해 세계토픽란에 나오는 지구촌 소식과 미소 우주선 경쟁 같은 사안들을 실시간으로 파악해 수업시간에 좀 아는 척 하니 담임선생도 깜짝 놀라 나중에는 자기도 미심쩍은 세계시사적 사안들은 아이들 앞에서 내게 꼭 자문을 구하며 확인할 정도였다.
<중학입시에 올인 하던 시절>
드디어 66년 6학년이 되어 중학입시 모드에 돌입했다. 이 무렵 정중진이가 타교로 전학 갔었는지 6학년 때 같이 있던 기억이 별로 나지 않는다. 대신 나, 김진회, 김종성이가 담임의 촉망을 가장 많이 받는 상위권 트리오로 대접 받았다. 그래서 담임은 우리 셋을 합숙시키듯 자기가 가르치는 과외팀에 데리고 있으려 했다.
<인터넷에서 건진 최근의 경남중 전경>
나는 내게 공부 맛을 알게 해 준 백선생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5학년 말까지 담임이 이끄는 과외팀에 눈에 띄는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합류하지 않았다. 백선생팀에서 같이 공부하던 김종성이는 5학년 중반인가 담임팀으로 갔고, 과외라는 걸 하지 않는 줄로 알았던 김진회도 그 뒤 어느 날 담임팀에 들어갔다는 게 아닌가. (작년 하동에서 만났을 때 진회는 담임선생이 과외비 받지 않을테니 그냥 오기만 해라 해서 그 때 갔다 했다. 그 당시의 김진회였다면 자랑질로 바로 밝혔을 사실을 50년 이상 해주선생과의 엠바고로 지켜준 사실이 좀 놀라왔다).
우리 모친이 진회도 갔는데 니가 무슨 통뼈라고 입시 앞두고 담임과 척져가며 백선생과 의리 지킬 땐가 하고 담임팀 합류를 당장 하자고 강력한 압박을 가해 왔다. 한 며칠 버팅기다 못이기는 척 동의해야 했다. 백선생에게는 도저히 면목이 없어 ‘이 배신자를 용서해 주소서’ 하는 메시지를 모친에게 전하며 통보를 맡겼다. 편안함을 찾아 은사를 버린 죄책감에 맘이 몹시도 무거웠다. (경남중 붙고 나서 입학할 때까지 2개월간 백선생 다시 찾아가 ‘영어기초’ 지도를 받으며 나름 용서를 구했지만..)
담임인 해주선생은 내가 자기 집에 과외 받으려 첫 방문을 하니 마치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듯 아주 흐뭇하게 대해 주었다. 그 당시 다른 동기들도 그랬겠지만 우리는 모든 교과서를 2권씩 사서 한권에는 검은 색연필로 텍스트 내용 중 조사만 빼고 새카맣게 칠하여 지운 부분을 암기해 내는 식으로 공부했다.
그 앞의 해에 경기중 입시에서 벌어진 무우즙 사건 파동으로 모든 문제는 국정필 교과서에서만 내게 하는 문교부 방침에 따라 교과서에 나오는 그대로 일반명사나 고유명사들을 표기하는 답만이 정답으로 인정된다는 같잖은 시험문제들에 적응하는 식으로 입시를 준비해야 했다. 예를 들어 교과서에 ‘뉴우질랜드’라 되어 있다면 ‘뉴질랜드’나 ‘뉴우질란드’는 오답이라는 식이었다.
<11월의 막판 스퍼트와 초등시절의 마감>
혈청소였던가 봄소풍을 마지막으로 여름부터 10월까지 우리 3인방은 같은 반 친구 7, 8명과 함께 초장동 언덕 꼭대기 어느 학우 집에서 새끼 과외선생까지 붙여가며 거의 쉬는 날 없이 입시 전과목 총정리에 들어갔다. 공식 학교수업 마치고 저녁 먹은 뒤 이 집에 모여들어 과목당 포인트 정리를 하던가 자율학습을 하며 근 11시까지 강행군 했던 것 같다. 집에 돌아오면 모친이 밤참 챙겨주고 빨리 숙면을 취하라고 난리였다.
학교에서의 오전 오후 수업에서는 졸 때가 제법 많았지만 해주담임은 우리 3인방이 존다면 대체로 못본 체 해주었다. 이 때 음악시간에 나오는 노래들은 가사보다 ‘솔솔솔 솔파시도 파파파 미레미’(초록빛 바다 물에 두손을 담그면~~) 하는 식으로 계명으로만 외웠기에 후일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어도 한 손가락으로 곡들을 똥땅거릴 수는 있었다. 점심시간 방송에 자주 나오는 리스트의 '항가리 광시곡‘, 브람스, 모차르트, 슈베르트, 김대현의 ’자장가‘, 그리고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과 슈베르트의 ’군대행진곡‘ 등등의 음률들도 저절로 익히게 되었다.
11월부터는 담임이 우리 셋만 자기 집에 새벽에도 오라고 해 모친과 함께 새벽길을 걸어 거의 매일 5시 경에 들렸던 기억도 난다. 입시날 일주일 여를 앞두고는 내 스스로 이틀에 한번 꼴로 ‘나이트라짓트’ 같은 각성제를 먹으며 극기훈련 하듯 밤도 새워 봤다. 영화-디어헌터 속 러시안 룰렛 게임에 나가는 전사처럼, 때로는 그냥 절에서 무념무상의 정성공양 들이듯 식탁 상 하나 펴고 전등만 켠 채 ‘정진, 정진!’ 하며 책읽다 보면 밤이 저절로 새어졌다.
훗날에도 고스톱이나 포커 친다고 밤은 새워 봤어도 공부한다고 밤샘한 기억은 결코 없었을 정도로 12세 밖에 안된 놈에게 무슨 제례 치루듯 정신력 기합이 단단히 들어갔던 모양이다. 난 이때 내 일생의 벗이 된 국사와 세계사, 세계인문지리에 대한 인문학적 DNA를 특히 많이 생성시켜 놓았다고 여긴다. 좋아하는 분야를 밤새워가며 접해 봤다는 그 자족적인 뿌듯함을 말이다. 이러한 경험은 나중에 중학시대에도 자주 발현 되었다.
<부친의 접대내공으로 졸업식 때 무슨 표창장을 타는 필자>
아무튼 각자의 운기조식 방식으로 키운 공력이 효험을 봤는지 우리 3인방은 12월 초순에 개최된 경남중 입시에 모두 거뜬히 붙었고, 토성교 전체로서는 현역생이 8명 정도 붙었다고 들었다. 내 수험번호는 임진왜란 다음에 발발한 정유재란 연도인 1597이라 지금도 머리 한켠에 남아있다. 전년 보다 전반적으로 문제가 쉬워 12개인가 11개 반 아래로 틀리는 게 커트라인이었는데 나는 신문 답안지로 맞춰 보니 8개 틀린 것으로 나타나 어느 정도 합격선에 든 것은 예상했었다.
자신이 그 옛날 진주사범에 응시했다 떨어진 응어리를 큰 아들놈이 풀어줬다고 부친이 얼마나 좋아하던지.. 물론 우리 동기들 중에서도 입시라는 이 첫 허들을 못넘어 어린 가슴에 적지않은 상처를 입은 친구들도 많았겠지만, 나는 운이 좋아 이 관문은 잘 넘겼다. 그 뒤 경남고 입시에서도 再修 없이 어째어째 제 때 입학했지만, 결국 대입에서 합격 운빨이 다 되었는지 2년 연속 실패하는 인생의 중간 변곡계산서가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로 말이다.
6년 개근하며 다닌 토성교를 졸업할 때 나는 대여섯명에게 교장인지 교감인가가 주는 표창장을 위에 올린 사진에서처럼 받았다. 해주 담임이 우리 모친에게 연락해 6학년 선생들 저녁 회식 한번 시켜주면 재미이 표창장 받을 기회를 마련하겠다고 제의했다. 가문에 영광인 합격생을 내고 조리전에 빚을 내어서라도 소 잡을 판에 부친이 얼씨구나 좋다해서 잘 아는 동래 온천장 요정에 모시고 가 한턱 단단히 쏜 모양이었다. 돌아와서 "와따, 선생님들 얌전한 줄 알았더니 모두 말술에다 유흥문화들에는 어찌나 빠싹한지 많이 놀랬네.." 하는 접대소감을 모친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우리 3인방과 성욱조, 조군제, 양창근, 이종화, 김경수 등등이 토성교 졸업하자 말자 67년 3월 경남중 입학식에 같이 참석했다. 정중진이가 토성에서 같이 진학했는지, 전학 간 초등교에서 들어왔는지는 기억이 아물사물하다. 아무튼 경남중에 같이 다닌 것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모두 머리 빡빡 깎은 채 쌍백선이 달린 교복을 입고, 다음 고입으로 가는 레이스 앞 부분을 막 들어서면서 말이다.
'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마이스터 수련 초입시대 2 (0) | 2018.06.07 |
---|---|
5. 마이스터적 기반 수련의 초입 시절 1 (0) | 2018.06.03 |
3. 머리통 굵어지는 초등 3~4 학년 시절 (0) | 2018.05.26 |
2. 공부 맛 좀 알게 된 초등교 시절 (0) | 2018.05.24 |
1. 태어남과 아스름한 유년시절 (0) | 2018.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