랙타임(Ragtime)
장병익
'재즈는 뉴 올리언즈에서 탄생했다'.
재즈사 맨 앞에 나오는 이야기다. 오랜 세월 동안 자꾸 반복되고 유포되어 오다 보니, 이제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는 이야기다. 재즈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너무나 당연한 상식으로 통하고 있는 명제다. 그러나 잠자고 있는 이성을 조금만 깨워 보자.
머잖아 20세기 전체를 뒤흔들 예술 양식의 맹아가 그 말대로 뉴 올리언즈라는 지방 도읍 단 한 군데에서 뿌리 내리고 있었다면 어딘지 너무 극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그 '극본'은 어느덧 고정 관념으로 굳어 버렸다.
이렇게 고쳐야 한다. '19세기 말, 재즈의 기운은 미국의 남부와 중서부에 만연해 있었다. 멤피스, 세인트 루이스, 달라스, 캔저스 시티가 그 예이다. ' 별 왕래도 없던 사람들이 각각 시작한 웬 흥겨운 새 음악들이 알고 보니 서로 너무나도 유사했던 것이다. 뉴 올리언즈는 말하자면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경우였다.
자, 재즈사의 고정 관념을 하나 더 깨자.
뉴 올리언즈라는 도시가 재즈의 유일한 탄생지가 아닌 것처럼, 이른바 '뉴 올리언즈 재즈' 역시 최초의 재즈가 아니었다. 뉴 올리언즈 재즈가 만개하기 이전에 '랙타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랙타임이 재즈였다고 확정짓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 랙타임은 작곡된 음악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이다.
다시말해, 모든 음들이 악보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재즈라면 필요불가결하게 가져야 할 특징인 '즉흥성(improvisation)'이 철저하게 결여돼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재즈의 또 다른 특징 하나를 모르고 하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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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le leaf Rag, recorded on Pianola Roll actually played by Scott Joplin
http://www.youtube.com/watch?v=pMAtL7n_-rc (Maple Leaf Rag by Scott Joplin)
http://www.youtube.com/watch?v=fPmruHc4S9Q (The Entertainer by Scott Joplin, 1902, 영화 '스팅' 주제곡)
http://www.youtube.com/watch?v=unGmMmD8kPQ (The Ragtime Dance by S. Joplin,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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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swing)'.
랙타임은 작곡되긴 했으나 바로 그 '스윙'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그 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스윙'이란 자유로움의 음악적 표현이다.
그런데 그 '스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렇게 생각해 보자.
유럽의 음악은 기준 박자가 주어지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갔다. 클래식이건 민속 음악이건 그 점에 있어서는 똑 같다. 그것은 또박또박 구획지어진 선율이었다. 목끝까지 단단히 단추 채운 유럽 귀족의 복식을 연상해 보라.
스윙은 그같은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와지지 못하고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박자 감각이다. 이 점은 재즈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재즈 공연장에 한 번 가 보라.
점잖게 차려 입은 사람들이 무대의 연주에 맞춰 손이나 발을 까딱거리고 있는 것을 반드시 보게 된다. 재즈에는 듣는 이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하는 속성이 있다. 그것은 점잖은 클래식 콘서트에서도, 또 이내 미친 듯 들뜨는 팝송 콘서트에서도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스윙하지 않는 것은 재즈가 아니며, 재즈가 아니면 스윙 않는다'는 재즈의 대명제가 있다. 이 길을 처음으로 튼 장본인이 바로 랙타임이다. 그러므로 랙타임은 신대륙의 음악이 유럽과 최초로 결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랙타임의 자유로움, 즉 스윙감은 아프리카 음악의 감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랙타임에는 또한 19세기 유럽 음악을 반영하는 측면, 역시 많았다. 랙타임이 탄생한 때가 겨우 1890년 경이었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그럴 법 한 일이다. 미국의 사회적, 문화적 근간은 아직 유럽의 것을 기꺼이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때 민중의 음악은 '나는 분명 구대륙의 음악과는 다르다'고 떨쳐 일어 났으니, 그 첫 주자가 랙타임이었다. 랙타임이 특히 인기 있었던 곳은 노동 현장, 그 중에서도 대륙 횡단 철도 공사장의 노동자 숙소였다. 민중에 의한, 민중의, 민중을 위한 음악이었기에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음악적 색채는 너무나도 차분하고 아름답다. 지적이며 쿨(cool)하다. 그 니그로 음악은 뜻밖에도 '세련된 도시 백인풍'의 음악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천재적 랙타임 피아니스트가 있었기에 그것은 가능했다. 선술집 음악 정도로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을 랙타임을 예술로 승화시킨 장본인은 스코트 조플린(1868~1917)이다.
그가 작곡한 랙타임 곡들은 모두 하나 같이 걸작이다. 별 교육도 받지 못 한 채 억압 그리고 가난과 평생을 씨름해야 했던 한 흑인 피아니스트로부터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운 선율이 나올 수 있었는 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어쨌든 재즈는 그렇게 출발했다. 그리고 뉴 올리언즈 재즈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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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gtime>에 대해
19세기 말 미국 남부의 프랑스계 혼혈인 크레욜(creole)에 의해 연주되기 시작해 1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까지 재즈의 본산 뉴올리언스에서 유행했던 '피아노 독주음악'이다. 프랑스인 노예주인은 다른 국가에 비해 흑인 노예에 대해 관대한 편이어서 그들과 결혼도 했고, 그 자제인 혼혈에게는 백인과 동등한 신분을 보장해주었다.
덕분에 크레욜들은 어려서부터 교양으로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을 배울 수 있었고 나아가 유럽에 유학하는 특권도 누리게 되었다. 흑과 백의 만남, 아프리카의 토속적 리듬감과 유럽 클래식의 만남을 통해 등장한 음악이 바로 랙타임이다. 그 흑인 요소 때문에 처음에는 외설적이고 선정적이라는 비난, 깜둥이 음악이라는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곧 (대륙의 영향을 벗어난) 미국 최초의 대중음악 형식이라는 역사적 규정이 주어졌다.
비록 뉴올리언스에서 크게 유행했지만 발원지는 미주리이며 거기서 파생되어 나중 두 유파로 발전한다. 하나는 '랙타임의 왕'으로 불리는 스코트 조플린(Scott Joplin)이 태어난 세달리아 유파이며 다른 하나는 역시 스코트 조플린이 옮겨가 바(bar)의 주인인 랙타임 피아니스트 탐 터빈(Tom Turbin) 등과 함께 활동했던 세인트루이스 유파다.
상기한 두 사람 외에 대표적인 랙타임 작곡가로는 제임스 스코트(James Scott), 유비 블레이크(Eubie Blake), 럭키 로버츠(Luckey Roberts)를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흑인이었으며 백인 중에는 스코트 조플린의 친구였던 조셉 랩(Joseph Lamb), 조지 보츠보프(George Botsford), 찰스 엘 존슨(Charles L. Johnson), 퍼시 웬리치(Percy Wenrich)가 꼽힌다.
랙타임은 결코 재즈의 원조나 효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재즈 태동의 중요한 단서로 다루어진다. 주어진 악보를 연주한다는 점, 그리고 왼손의 비교적 간소한 화음 반주와 오른손의 빠른 패시지의 선율 연주가 주를 이룬다는 점(그래서 스트라이드 피아노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재즈의 핵심인 즉흥연주(improvisation)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유럽의 전통적인 소나티네(sonatine : 입문자용 피아노 독주 음악)에 보다 가깝다. 하지만 선율부분의 다양하고 풍부한 싱코페이션(syncopation)은 재즈처럼 흑인 특유의 리듬감과 스윙(swing)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형식적인 측면은 역시 클래식 기반의 A-B-A-C-A의 전개가 주를 이루는데 익숙한 선율의 A부분을 처음, 중간, 끝부분에 위치시킴으로써 음악의 전체적인 통일감을 이루고 그 사이사이 전혀 다른 조성의 새로운 멜로디를 첨가시킴으로써 변화를 꾀하는 모습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곡은 스코트 조플린이 활동하던 클럽의 이름이며 랙타임의 명곡으로 꼽히는 'Maple leaf rag'이며 틴 팬 앨리의 작곡자들도 랙타임을 수용, 당대의 팝송으로 만들어냈고 랙타임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대표적인 곡을 꼽으라면 어빌 벌린(Irving Berlin)이 1911년에 써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Alexander's ragtime band'(비록 그는 랙타임이 뭔지도 몰랐다지만...)이 되겠고 조지 거신의 초기 대표작 'Swanee'(1919년)도 랙타임의 영향이 나타난다.
무엇보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폴 뉴먼 주연의 영화 < 스팅 >(1974년)을 잊을 수 없다. 이 영화에 주제곡으로 삽입된 스코트 조플린의 'The entertainer'가 마빈 햄리시(Marvin Hamlisch)의 연주로,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무려 50년 만에 랙타임이 부활해 대대적인 열풍을 일으킨 것이다. 클래식과 재즈분야에 걸쳐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조수아 리프킨(Joshua Rifkin)이 < Joplin Rags By Scott Joplin >이란 제목으로 내리 3장의 앨범을 팝 앨범 차트에 올려 조플린 바람을 일으킨 것도 1974년이었다.
조수아 리프킨 말고 재즈클래식 분야의 거목인 건세르 슐러(Gunther Schuller), 앙드레 프레빈(Andre Previn) 등은 지금까지도 랙타임을 연주한다. 하긴 1910년대에 유럽에서 랙타임이 커다란 인기를 모으면서 스트라빈스키는 1918년과 이듬해에 'Ragtime' 'Piano rag music'을 작곡하기도 했으니 그리 놀랄 것도 없다.
2005/10 임진모 (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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