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독일생활 잠깐 뒤 귀국 결혼 후 긴 독일 장정
필자 주: 동기 여러분, 안녕하신지요? 오랜 만입니다. 작년 6월 초에 시작하여 9월 중순까지 소개한 소생의 1부 자서전 17편을 마친 지가 어느 듯 1년이 되었네요. 그간 요런조런 여행기 잡문들은 계속 써올렸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에는 2부를 때늦기 전에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내면의 숙제에 대한 압박감이 제법 컸었네요.
이제 올라가야만 하는 거대한 히말라야나 알프스 산정을 눈 앞에 둔 등반가처럼 아득하기만 한 산행을 한번 더 힘닿는 데까지 행하려 합니다. 1부 때처럼 동시대를 같이 살아온 우리 동기들과 함께 8, 90년대를 거쳐 새 천년시대 15년까지 추억의 시간여행을 해보려 하네요. 이 기간 동안 제 쪽에서는 파란만장했던 제 독일생활과 귀국후 좌충우돌한 직장생활까지를 기억나는 만큼 짜내어 소개할까 합니다.
<1982년 후반부의 6개월 간 도독 시절>
1. 낯선 곳에 떨어진 당혹감 속에 도착한 독일 땅
1982년 9월5일 밤 김포공항에서 여러 친지들의 배웅을 받으며 난생 처음 해외여행길을 위한 대한항공의 보잉 747기에 올라탔다. 좌석은 앞 셋째열 정도 되는 창가에 배정되었다. 이제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으로 나 홀로 날아가는구나 하며 어둠 속 차창을 내다보니 바깥은 안보이고 내 얼굴만 비쳐졌다.
만감이 교차하여 그 당시는 기내흡연이 허용되었던 시절이라 내 주위에 다른 승객도 아직 없고 해서 담배 한가치를 입에 물며 연기를 푸우하고 내뿜었다. 그 담배 맛이란.. 영화-‘암흑가의 두 사람’에서 주인공 알랑 들롱이 자기를 야멸차게 감시하던 담당형사를 순간 욱하는 기분으로 살해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뒤 집행의 단두대에 오르기 직전 피우던 그 담배 맛일거라 여겨질 정도로 비애어린 감정의 해소제였다.
<대권항로 이해도>
드디어 한국 땅을 떠나는 이륙을 한 뒤 비행기는 파리로 가기 위한 최단코스라는 북극권을 지나는 대권항로에 접어들어 일본 열도를 지나 짐작컨대 사할린, 오츠크 해를 지나 중간 기착지인 알래스카 앵커리지 공항으로 날아갔다. 한 너댓시간 비행한 뒤 앵커리지에 닿았는데 통과승객으로 내려 한 두 시간 머문 것 같았다.
기내에서 도시락을 얻어 먹었지만 한 밤중에 내리니 좀 출출하여 승객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공항 우동가게에서 면빨 굵은 우동을 한 그릇 사먹었다. 내가 머리털 나고 처음 도착한 외국 땅, 그것도 미국 땅에서 처음 접해 먹어본 우동이라 평생 길이길이 이 우동에 대한 기억은 남았다. 무슨 버얼건 고춧가루가 뿌려져 나온 대전역 가래우동 같았던..
미국 땅을 어쨌거나 처음 밟아봤다는 기억을 간직한 채 다시 탑승한 기내에는 승무원들이 새로 교체되어 있었다. 모두가 세련된 용모와 표정으로 승객들을 맞아 주었다. 새 비행기를 타는 기분으로 착석했지만 좀체 흥분된 마음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누가 일러준대로 잠자기 위한 수면용으로 독한 스카치 위스키를 한 잔 시켰다.
한국정부가 제공한 풀 차지의 항공권 승객이다 보니 위스키 서비스는 일도 아니었다. 한 잔으로 안되어 두 잔째 마시고 나자 드디어 긴장감도 좀 완화되어 잠이 들었다. 눈을 뜨고 보니 창 밖이 훤한 채 파리공항에 곧 착륙한다는 기내 방송이 들렸다. 아, 드디어 유럽 땅에 들어섰구나 하고 아래를 내려보니 영화에서 자주 보던 유럽의 잘 다듬어진 정갈한 녹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착륙 후 드넓은 샤를 드 골 공항내를 관통하며 항공 티켓에 표시되어 있는대로 4시간 후에 출발하는 프랑크푸르트 행 비행티켓을 얻기 위해 루프트한자 부스로 향했다. 짙은 푸른색 제복을 입은 매부리코의 금발 독일 아지매가 영어로 응대할 포즈로 뚱하게 앉아 있다가 “잇히 뫼히테 나하 프랑크푸르트 압플리겐!(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가려 함다)” 하니 ‘어쭈, 일본놈 같이 생긴 친구가 독일어 어데서 좀 배웠네’ 하며 급친절 모드로 변하며 티케팅을 해주었다.
나로서는 한국에 들어온 독일인들이 아닌 유럽 본토에서 만난 최초의 독일 현지녀와 처음 독일어로 말을 주고 받은 게 꽤 신기하고 대견스러웠다. 티케팅 후 한국에서 준비해 간 국제통화 카드로 우리집과 나보다 일주일 먼저 독일 땅에 도착한 종화형에게 파리 공항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차례로 했다.
울보 모친은 전화를 받자마자 눈물부터 한사발 흘러내어 대화가 잘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부친에게 큰 문제 없이 여기까지 잘 도착했으며 네 시간 후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둘어간다고 상황을 전했다. 옆에 있던 막내 여동생도 ‘오빠, 단디 하이소’ 하며 우리집안을 대표해 유럽 땅에 첫 발을 디딘 큰 오라배를 성원해 주었다.
S대 기계과를 나온 종화형은 나와 산업경제연구원(KIET) 시절 만났는데 이 아재도 나를 보며 그랬는지 독일대학에서 공부 좀 더 하고 싶다며 다름슈타트 공대에 지원해 일주일 먼저 독일 땅에 도착했다. 하루 볕이 무섭다고 그 사이 독일의 대중교통망을 대충 터득했는지 내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리면 마중 나가겠다고 알려왔다.
드디어 루프트한자 기내로 들어서니 독일 스튜어디스들의 떡대가 장난이 아니었다. 모두 중년 아지매들이라 몸매 가느스름 하고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한 시간 여 비행 속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독일 땅에 들어섰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안착했다. 공항 나가는 문에 종화형이 미소를 띤 채 ‘독토르 김, 잘 쫒아왔구먼’ 하고 날 맞아주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최근 사진)>
우리 둘이는 종화형이 파악한대로 공항 전철로 프랑크푸르트 본역으로 한 시간이 넘어 타고 갔다. 바삐 오가는 독일인과 유럽인들로 가득 찬 내부를 훑어보니 내가 드디어 유럽땅에 제대로 입성했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프랑크푸르트 역에 도착해 다시 차표를 꾾어 종화형이 거처하고 있는 다름슈타트로 향했다. 우리의 무궁화호 같은 완행이었는데 또 한시간 여가 걸린다 했다.
프랑크푸르트와 가까이 위치한 다름슈타트는 당시 차범근이 독일 프로축구단에 들어가려 몸값과 계약조건들을 타진하고 있었을 때 제일 먼저 괜찮은 조건으로 받아줘 국내에서도 익히 알려진 지명이었다. 다름슈타트 역에 도착해 종화형이 이끄는 대로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가니 종화형 거처가 나타났다.
여러 명이 세들어 사는 주택 공간 속에 한 방을 얻어 살고 있었는데 그 1인용 크기의 방에서 짐을 내려놓고 휴식을 잠깐 취했다. 아직 정해진 게 아무 것도 없으니 막막하지만 하루이틀 여기서 묶으며 내가 정착할 대학도시를 정해야겠다고 맘먹었다. 그 전에 프랑크푸르트에 한 두달 여 먼저 도착한 연대 후배뻘인 C와 K에게 내가 오늘 도착했다고 알려준 전화번호로 연락했다.
2. 기괴한 인상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낸 첫날 밤
신학과를 끝마친 C와 응용통계를 전공한 K는 연대 상대에서 응용통계학을 가르치던 독일박사 이상우 교수를 통해 서로 독일유학을 하려하는 처지라는 공통분모로 소개받아 알게 되었다. 나보다 한 두어살 아래들이었지만 곧장 친구처럼 죽이 잘맞는 사이가 되었다. 집이 좀 먹고 사는 C가 자기 차로 K와 함께 프랑크푸르트에서 다름슈타트로 날 데리러 오겠다며 꼼짝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오금을 박았다.
나를 마중하러 거의 하루를 투입하며 프랑크푸르트 공항까지 달려와 자기 거처까지 데려다 준 종화형을 봐서라도 최소 하루 정도는 묵어주는 게 도리였지만, 요 인간들이 그래도 형빨이 왔다고 저그가 독일의 첫 밤을 챙기겠다 고집하며 바로 차로 달려오겠다 하니 그냥 종화형과 결례를 무릅쓰고 작별하는 수밖에 없었다.
C는 새 차나 다름없는 노란 중고 BMW를 몰고 왔다. 그 당시는 네비도 없던 시절이라 자동차 도로 지도만 갖고 주소지만 알고 목적지를 찾는 게 일상적이었는데 이 친구들이 거침없이 찾아오는 게 참 대단해 보였다. 아우토반으로 올라서자 이게 말로만 듣던 아우토반인가 하고 주위를 눈여겨 살폈다. 표지판들은 한국과 달리 녹색이 아닌 짙은 푸른 색 바탕에 흰 글씨체로 써있는 것이 다를 뿐 시스템은 우리와 같았다.
C는 BMW 속도자랑이라도 하듯 평균 시속 160~180 Km로 밟으며 여기서는 특별한 제한속도 표시가 없는 한 무제한으로 달리는 곳이라며 쌩쌩 날아갔다. 초행길인 나는 도착 첫날 도로변 객사하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했지만 이 친구는 베테랑 드라이버처럼 능숙하게 차를 몰아 한 30분도 안되어 프랑크푸르트 시내로 들어왔다.
인적이 끊어진 밤거리로 들어올수록 무슨 석유냄새가 풍기고, 불길하게 비춰지는 주황색 가로등들이 옅은 안개 속에서 아주 낯설고 기괴한 정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생각했던 푸근하고 정갈한 독일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좀 많이 있었다. 그 이미지와 웬지 벗어나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현실 場과의 적지 않은 차이가 그날 밤의 내게는 아, 독일생활이 앞으로 만만치 않을 거라는 그 어떤 예감으로 각인되어졌다.
이 친구들은 그 사이 친분을 맺었던 어느 교민의 집으로 나를 안내해 그 집에서 나를 묵게 했다. 나는 그 전날 김포공항을 떠나 프랑크푸르트에 닿은 뒤 종화형과 다름슈타트로 갔다 다시 한밤 중에 이름도 성도 모르는 한인교민 집에까지 오게 된 여정을 잠깐 복기한 뒤 피곤함이 몰려 와 숙면에 들면서 독일에서의 첫 밤을 그렇게 보냈다.
하룻밤을 재워준 교민가족과 아침 식탁에서 수인사를 나누며 독일식 아침을 하고나니 이 친구들이 찾아왔다. 주인장에게 우리 선배는 국비장학생으로 온 양반이라며 조만간 박사과정에 바로 들어갈거라고 시키지도 않은 ‘마에가리’ 소개를 해대었다. 초면에 좀 민망했지만 아니라고 극구 부인할 사항도 아니어서 그냥 ‘흠흠’ 하고 놔두었다.
<유럽 금융의 중심지 프랑크푸르트>
아침 나절을 보낸 뒤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구경시켜준다 해서 노란 BMW에 몸을 싣고 따라나섰다. 낮에 본 프랑크푸르트는 전날 밤보다 한결 나았지만 그래도 이곳은 아니다 싶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 한인 성당, 그리고 본역 근처에 있는 유곽거리까지 순회하게 되었는데 첫인상이 별로여서 그랬는지 이 도시는 처음 정착할 후보지는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두 친구는 내가 여기 머물기를 바랬겠지만 나는 이들에게 다른 도시들도 한번 살펴본 뒤 정착지를 최종 결정하겠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아침 이곳을 떠나 함부르크, 베를린을 먼저 보고 이들이 내키지 않으면 너그가 있는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친구들도 그리 하라고 동의했다.
3.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함부르크에 정착 결정
한국에서 올 때 함부르크에는 외대 독어과 출신 선배인 이상협 형과 최길수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기에 함부르크에 가면 이들을 만나 현지정보를 습득할 생각이었다. 베를린에 가면 독어과 또 한해 선배인 이성영 형이 있다는 소식도 들어놓았다. 중부독일인 프랑크푸르트에서 남쪽으로 경영학과가 개설되어 있는 곳으로는 슈투트가르트, 뮌헨, 뉘른베르크 등이 있어 북쪽에서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이쪽으로도 들릴 작정이었다.
<독일 전도>
프랑크푸르트에서 두 밤을 보낸 뒤 상협이 형에게 연락하고는 함부르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한 600킬로 거리였는데 다섯시간 조금 넘어 걸린 것 같았다. 올라가며 차창을 통해 보니 독일 땅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산악이 아닌 평원이 펼쳐진다는 사실이었다. 탱크전 하기 딱 좋아 보였다.
<함부르크 알스터 호수 옆 융퍼른스틱(최근 사진)>
베를린 다음의 인구 200여만으로 독일 제2의 도시인 함부르크는 독일 언론의 메카이며, 근세에 브레멘, 뤼벡과 함께 무관세 공동체인 ‘한자동맹’을 구성하여 발틱해 교역을 주도하던 중심지였다는 명성이 이 도시가 가까워올수록 내 맘을 끌었다. 해상이 아닌 바다에서 엘베강을 90여 킬로나 거슬러 올라가는 곳에 위치한 ‘하상도시’라는 특징도 그 옛날 고교시절 조영태 지리선생으로부터 들었던 기억도 언뜻 났다.
사실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면서 빨리 독일 땅에 나만의 독립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웬만하면 함부르크에 말뚝 박으리라 내심 마음을 정했다. 일단 이 도시에 한학기라도 머무르면서 타 지역에서의 수학도 차차 고려할 심사였다.
함부르크 본역에 내려 상협이 형에게 전화 연락하니 자기는 오늘 수업이 있어 직접 마증가지 못하는 사정이라 최길수에게 연락하라고 그의 전화번호를 전해주었다. 나보다 1년 먼저 와 경제학을 전공한다는 최길수는 상협이 형 서울고 후배로써 외대 독어과에 재수하여 들어왔으니 삼수생인 나보다 한 학번 위 선배뻘이었으나 서로 동갑이어서 보자마자 편한 니네돌이를 하기로 했다.
길수가 거주하고 있는 학교근처 기숙사 원룸에 들어가서 일단 짐을 풀고, 학교로 따라가 내가 거처할 방을 기숙사 사감을 찾아가 알아봤지만 당장은 모든 학생기숙사들에서 빈방이 없었다. 게시판에 나와 있는 ‘침머 프라이(빈 방 있음)’라는 사설 광고를 보고 한 두어 군데 찾아갔지만 주인들이 아시아계인 내가 방값이나 제대로 낼까 싶었는지 ‘방금 방이 나갔다’는 둥 딴소리를 했다.
할 수 없이 그날 밤은 길수의 기숙사 방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밤에 길수가 뭐 사러 잠깐 나간 사이에 책상에 놓여있던 카세트레코더에 한국에서 가져온 김연자의 트롯가요 메들리 테입을 넣었다. 첫 곡인가가 ‘김포공항’이라는 노래였는데 가사와 멜로디가 어찌나 김포공항 막 떠나온 내 심정을 후벼 파던지 그냥 눈물이 핑 돌았다. 다른 노래들도 낯선 타지에 떨어진 막막한 나그네에게 위무의 감정이입을 잘 시켜주었기에 그 날로 연자언니의 왕팬이 되어버렸다.
길수 방 바닥에 담요 깔고 자고난 다음날 길수를 따라 함부르크대 상대 건물로 찾아 갔더니 일군의 한국 유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거기서 며칠 전에 서울에서 여기 왔다며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니 모두 잘 왔다고 악수를 청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 나와 유학기간 동안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된 경제학 전공의 서울고-연대 정외과 출신 조태영씨도 알게 되었다. 이 아재도 나와 갑오생 말띠 동년배였지만 어쩐지 서로 신중하게 대하고 싶다는 이심전심이 통했는지 말을 바로 트지 않고, 그 이후로도 오랜 세월 학문과 예술세계에 대한 대담 동반자로써 좀 격이 있는 관계를 유지했다.
<조태영씨와 랑엔호른-마크트 역에서('82년 가을)>
서울 출신인 조는 나보다 1년인가 2년 먼저 독일 남쪽 어느 소도시에서 미술사 전공하려는 동갑내기 와이프와 함께 어학 코스 등을 마친 뒤 경제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함부르크도 같이 올라 왔었는데 어학의 귀재라 할 정도로 독일어를 이미 빵빵하게 마스터해 있었다. 독일의 정치판에도 해박했고, 특히 클래식 음악에서 매니어 수준의 내공을 보유한데다, 연극계에도 연대시절 단역 배우생활까지 하며 이 분야 일가견이 장난이 아니었다.
독일서 처음 시작한 경제학에도 남쪽에서의 예비공부가 잘 되어 있었는지 디플롬 과정을 별 어려움 없이 헤쳐나가고 있어서 이 전공분야 한국 유학생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자기도 내가 한국에서 외대 독어과와 연대 대학원 경영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IBRD 국비장학금으로 이곳에 왔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내게 특별한 호감을 보여줘 우리는 급격히 친해졌다.
이상협-조태영-최길수는 서울고 선후배인데다 상협이 형과 길수는 나와 외대독어과 인연, 조와 길수는 서울고 동기, 이런 식으로 얽혀 이 시절 내가 함부르크 정착을 굳히는데 커다란 인맥, 학맥이 되어주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민간인 방 광고 정보를 획득해 함부르크 북쪽 어느 한적한 주택가에서 다소 비싼 방세였지만 신청한 기숙사에서 방 날 때까지 머물기로 했다. 기숙사 방의 2배 이상인 월 300 마르크였지만, 민가 방 구하기가 어렵던 상황에서 지불능력은 충분했기에 친위대 출신 같았던 독일 영감 집에라도 드디어 들어갈 수 있었다.
<회펜 27가 집 앞에서('82년 가을)>
독일 땅에 떨어져 한 일주일간 동가숙 서가식하며 지내다 내가 누워자고 생활할 독립공간이 생기니 이제사 정착의 안정감이 생겼다. 집 근처 ‘Safeway’라는 수퍼마트에 가서 쌀과 달걀, 소세지 등을 사서 처음으로 냄비에 쌀을 안쳐 밥을 하며 소세지를 프라이팬에 굽고, 거기에 달걀 프라이까지 전적으로 내 혼자서 만들어 첫끼를 해먹으니 ‘야, 이제 됐다!’ 싶어 너무 행복하면서 내 스스로가 한참 대견했다.
4. 예열 달구듯 천천히 따라간 함부르크대 경제학·경영학 교과 과정
나는 상협이 형과 조, 그리고 길수의 조언을 적극 수용하며, 함부르크대에서 처음 온 외국인 학생들이 치루어야 할 독일어 수학자격 시험을 치루었다. 통상적으로 한국유학생들은 한학기나 두학기 동안 독일어 수업 코스를 듣게 마련이었다.
내 경우 한국에서 어느 정도 준비해온 독일어 실력으로 문법시험, 받아쓰기, 긴 지문 듣고 내용요점을 요약정리하기 시험에 바로 합격함으로써 독어 맛만 쬐끔 보았거나, 독어 독자도 모르고 온 여느 유학생들과는 달리 따로 한 두 학기의 어학코스 수강없이 바로 경제·경영학 수업과목들을 신청하여 학점을 딸 수 있었다.
거기다 한국의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쯩까지 건져왔으니 독일 대학의 어느 교수가 나와 내가 제출하려는 박사논문 테마를 잘 보고 자신의 박사연구생(Doktorrand)으로 받아주기만 한다면, 그 아래 학부과정(Diplom Kurs)을 이수할 필요도 없이 논문 테마 잡고 수년에 거쳐 박사논문 한편 써내어 통과하면 ‘독일 박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극히 예외적인 그림으로써 이공계에서나 어쩌다 일어날 법 하지 상경계나 인문계 쪽에서는 거의 일어날 수 없는 ‘Lotto 당첨’, 아니 발생불가한 케이스였다. 후자에서는 오랜 기간 독일대학 학부에서의 다양한 과목 이수를 통해 단련된 배경지식들의 기반 위에서 떠오른 학술적 연구가치가 있는 학위논문 테마를 지도교수에게 프로포잘한 뒤 그의 관심을 받아 고급학술 독일어로 논문을 작성할 능력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모두가 ‘세월이 약이겠지요’ 식의 적지 않은 세월 때움을 얄쩐없이 요구하는 독일식 학부학업 수련과 그 과정을 통과한 뒤 지도교수인 독토아 파터를 찾아 도제적 관계 속에 지내다 어느 날 ‘학위 논문(Dissertation) 한번 써보지?’ 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수년에 걸쳐 논문 초고를 만들어 내면 ‘퇴짜->수정->퇴짜->재수정->또 재수정 요구..’의 지루한 과정을 거쳐서야 거지같은 ‘독일博’이 한참 늙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아직 요런 끝없는 세월흐름을 겪어보지 않아 모르는 나로서는 경영학에서도 국제경영 쪽을 스페셜 전공으로 삼아 이 분야에서 박사과정을 지도해 줄 독토아 파터(Doktor Vater)를 찾는 것부터가 막막했다. 한국에서 전공한 International Business 과목이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한국과 달리 학문흐름에서 보수적인 독일대학들에서는 개설된 곳이 별로 없이 그냥 이쪽의 한 파트인 International Financing 같은 과목만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글로벌 기업의 해외사업 형태 연구’쪽에서 깊은 내공을 가진 적당한 양반을 발견할 때까지는 독일대학에서 행하는 경제학(폴크스 뷔르트샤프츠 레어레, VWL)과 경영학(베트립스 뷔르트샤프츠 레어레, BWL)에서 제공되는 기초과목들에 대한 섭렵이나 해야겠다고 마음을 느긋한 체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함부르크 상대 건물 앞('82년 가을)>
예비학기 과정에서 외국인 학생을 위한 ‘국민경제학’과 ‘일반경영학 원론’ 과목이 있어 들어갔는데 교수가 칠판에 글로 쓰는 것은 바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더 중요한 말로 설명하거나 학생들과 질의응답하는 토크 내용은 오리무중이었다. 기초 과정이었으니 깊이 있는 내용은 아니었을텐데도 주고받는 말귀를 극히 일부만 캐치하는 정도라 그 갑갑함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중남미나 타유럽국에서 온 친구들은 온 지 얼마 안되었는 것 같아 보이는 데도 함께 말섞고 말귀 알아듣는 데는 나보다 한참 윗길이었다. 하지만 리포트 과제를 내어줘 집에서 작성을 하게 한 뒤 발표를 했을 때 담당 교수가 ‘헤어 킴, 당신이 발표한 내용은 정말 끝내줬소. 여기 경제학 초급자들 수준에서는 너무 깊이 파고 들었을 정도요’ 하고 큰 칭찬을 해주었다. 수업 중에는 입도 떼지 않던 코리안이 모처럼 제 존재감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4. 예비학기의 갑갑함 속에서도 사람 사귀며 무난하게 보내다
하지만 수업내용을 청맹과니처럼 제대로 못알아듣고 텍스트들을 통해서야 따라가는 내 학습방식은 조만간 그 한계에 봉착할 게 불보듯 뻔하니, 이 말귀 못알아 듣는 리스닝 능력이 크게 개선되지 않는 한 내 앞길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다가왔다. 그럼에도 독일에서 맞은 첫 학기는 그럭저럭 흥미롭게 굴러갔다. 조태영씨와 자주 만나며 독일 경제학에 대한 흐름도 많이 압축해서 들었고, 클래식 음악이나 발레 같은 예술공연장에도 심심찮게 따라다녔다.
또 어느 날 함부르크대 상대관 로비에서 울산 출신으로 ‘부산중-경복고-고대상대 경제과’ 학벌을 가진 박윤성씨를 만난 것도 멋진 인연이었다. 나보다 한 살 아래였지만 호남형의 체구 단단한 ‘컴퓨터 돌쇠’ 같은 캐릭터의 아재였다. 동기와 선배들에게도 잘했지만 뒤에 도착한 후배 유학생들에게 ‘큰 형님’ 같은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줘 거의 롤 모델의 숭앙을 받았다.
또 이 무렵 고교 선배이자 태권도 사범으로 10여 년 전에 와 이미 이곳에 자리잡은 서영철 선배(19회)와도 알게 되었다. 이 양반이 나를 잘봤는지 툭하면 자기집에 불러서 밥을 먹여주며, 자기 도장에도 초대해 수많은 파란 눈과 터키계 제자들을 호령하는 모습도 자주 보여주었다. 주요 교민들에 대한 평판도 전해주면서 그해 말에는 형수씨와 함께 독일 중부 하르츠에 있는 스키장 구경까지 살갑게 시켜주었다.
<상국이 함부르크 방문(길수+상협)>
그 사이 이태리 밀라노에 있던 박상국이가 업무출장차 프랑크푸르트는 뻔질나게 방문했지만 함부르크는 거의 와보지 않았다는데 나보러 온다고 함부르크에도 들러 회펜에 있는 내 방에서 하루 자고도 갔다. 독어과 출신인 상협이 형, 길수도 불러내어 한국식당에서 밥도 사고, 우리와 홍등가인 상파울리 래퍼반과 이곳의 최고 부촌 동네인 블랑케네제도 둘러보았다.
그래도 낯선 독일땅에서 불원천리 찾아온 옛 동기놈을 만나니 훨씬 맘이 든든했다. 이 친구를 통해 밀라노는 그 뒤로도 나의 단골 방문지가 되었다.
5. 세명의 여인을 앞에 두고 일시 귀국하다
연말이 다가오자 부산집에서는 모친이 자기 계모임 친구 딸인 신부감도 찾아놓았으니 한번 귀국하는 게 어떠냐고 의사타진을 해 왔다. 가만히 생각하니 독일공부가 어차피 장기전이 될 듯 하니 와이프 감을 하나 건져 같이 지내며 뒷바라지도 좀 받음시롱 유학생활을 하는게 그럴 듯해 보여 ‘알았음!’ 하고 잠깐 들어가겠다 통보했다.
그런데 내쪽에서는 한국 떠나기 한달 전에 여동생과 부경대에 있는 고교선배로부터 소개받은 두 여인이 있어 이 친구들과 함부르크에서 편지질도 좀 했기에 한 친구와는 한번 더 독일행 합류를 설득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둘 다 공교롭게 나와 성씨가 같은 K1과 K2였다. 둘다 모친이 좋아하는 4년 연하인 58 개띠들이었다.
고대 가정과를 나온 K1은 첫 눈에 미모에다 애련미가 있었다. 원래 도발적인 행동에다 도도한 인상을 좋아하는 내게 이런 취향 쯤은 훌쩍 뛰어넘는 자연미인이었다. 게다가 효심도 지극한 듯 지병이 있던 부친에 대한 걱정도 장난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런 따뜻한 마음가짐의 사고방식도 맘에 드는데다 지도 내가 그리 싫지 않은 포즈를 취해 한국에서 늦게 만나 오래 사귀지 못하고 떠나는 나를 더 안타깝게 했다. 한국 들어가면 이번에 꼭 한번 설득하리라 다짐했다.
다른 한편 K2는 K1보다 한달 여 앞서 소개받았는데 부산여대 나와 부경대(당시 수산대) 학장 비서실에 있었다. 인상이 깜찍하면서도 환했고, 매사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부산역 근처 어느 커피샵에서 만났는데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중간을 넘어가며 말꼬리가 짧아지더니 지쪽에서 말을 먼저 놓아버리는 것이었다.
뭐 이런 캐릭터가 있나 하고 약간 당황했지만 보조를 맞춰주기 위해 나도 당연한 듯 첫 만남부터 같이 말을 트게 되었다. 그럼에도 자주 보지 못했던 그 당돌스러움에 양가적 감정이 일었다. 나를 쑥맥 범생이처럼 여겨 만만하게 보는 건가, 아니면 이것저것 재지말고 바로 사귀어보자는 의도적인 자기표현인가 하고..
한 두 번 더 만나면서 후자로 생각했다. 이틀 후에 자기는 시간이 있다며, 내가 괜찮다면 이번에는 실내수영장 데이트를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와, 뭐 요런기 있노 하고 내가 야시에게 홀린 건가 생각했지만 기죽기 싫어 그러자고 했다. 수영장에서는 얌전한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나왔지만 몸매도 아담 사이즈를 넘어 꽤 귀여운데다 매사 행동거지에 거침이 없었다.
얘기를 더 나눠보니 자기는 부친을 여윈 뒤 여동생이 하나 있으며 모친과 세식구가 같이 살지만 경제적으로는 문제없는 중산층 집안이라 전했다. 결혼을 빨리 하고 싶어 재민씨만 괜찮다면 자기는 바로 오케이라고 선언했다. 갑자기 예기치 않은 멍석을 깔아주니 내쪽에서 좀 캥길 정도였다. 이 친구의 요청으로 세 번째 만남은 우리 집에 인사하는 것으로까지 진도가 나갔다.
마침 모친만 집에 있어 만나게 되었는데 얘기를 나눈 모친은 애는 밝으며 괜찮은데 니 배우자감으로는 어딘지 미덥지 않고 부족해 보여 나는 크게 찬성 안한다는 소감을 전해주었다. 나도 결혼까지는 당장 아니라 하더라도 데이트는 좀 더 하고 싶어 그 후로도 몇 번 더 만났다. 볼 때마다 성심으로 따뜻하게 나를 대해주니 언젠가는 내 마음이 기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무튼 히든카드로 남겨놓고 한국을 떠났다.
<1982년 후반부~83년 사이 챙겨야 할 주요 국내외 사건>
1. 소련 전투기에 의한 KAL 007편 피습 추락 사건
1983년 9월1일 뉴욕공항을 출발하여 앵커리지를 거쳐 김포로 향하던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기가 사할린 근처 모네론 섬 부근 상공에서 소련의 수호이-15 전투기에 의해 미사일 요격을 당해 승객과 승무원 269명 전원이 추락 후 사망했다. 비무장 민항기가 전투기에 피격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자 전세계가 경악했다.
<KAL 007기의 피격 지점>
한국정부는 당시 자국민 수백명이 몰살되었음에도 소련과 외교 채널이 없어 미국을 통해 항의했으며, ‘대한항공 007기가 제3국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었다’라고 발표했다. 소련은 처음에 피격사실을 부인하다 5일째가 되어서야 격추를 인정했으며,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을 침범한 KAL기가 경고사격을 했는데도 도리어 기수를 올리고 속도를 낮추는 등으로 적대적인 회피기동을 한 것으로 오인해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주장했다.
<수호이 전투기의 미사일에 피격되는 KAL기의 추정도>
이 사건으로 레이건 정부는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지탄하며 대소련 군사예산의 대폭증액을 미의회로부터 비준받음으로서 소련과의 군비경쟁을 본격적으로 야기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소련경제가 파탄이 나게 함으로써 80년대 말 냉전의 최후승자가 될 수 있었다.
<KAL기 피격에 대한 당시 국내신문 보도>
당시 나는 이 사건을 독일언론과 모친이 보내준 중앙일보를 통해 상세 보도를 접했는데, 국내신문은 민항기에 미사일 발사를 명령한 소련군부의 무지막지함을 규탄하고 약소국의 비애를 울분 속에 토로하며 소련에 대한 한국민의 분노를 극대화하는 데 보도의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프랑스를 비롯한 이곳 언론들은 시간이 가며 소련군의 방공능력을 테스트하려 이들의 통신을 감청하던 미 정보당국이 관성항법장치의 오작동으로 KAL기가 경로를 이탈해 소련영공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청사실을 감추기 위해 한국 민항기에 경고를 하지 않았던 비인도적인 음모론을 소개했다.
그에 비해 소련당국은 미 정보국이 정찰기를 민항기로 위장하여 자국영공을 염탐하는 경우가 많다고 확신하여 운항오류에 빠진 KAL기를 미국에 경고하는 본보기용으로 격추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 결과적으로 한국 비행기의 미끼적 희생을 불러일으킨 소련군부의 고지식한 대응으로써 미국 측의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해설하기도 했다.
1983년 10월9일 미얀마(당시 버마)의 수도 양군 중심지에 있는, 이 나라 독립영웅 아웅산을 모신 묘소에 공식방문한 전두환이 장차관급 수행원들과 들려 의전절차상 참배 세레머니를 행하려 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공작원들이 전날 미리 천장에 설치한 폭탄을 원격조종으로 폭파시킴으로써 현장에 지각 참석한 전두환만 구사일생으로 살고 미리 도열해 있던 대다수 수행원들이 집단폭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천장 폭탄 폭발 직전에 도열해 있는 공식 수행원단>
당시 전두환은 서남아(미얀마, 인도, 스리랑카, 브루네이)와 오세아니아(호주, 뉴질랜드) 6개국 순방길에 나서 한국보다 북한과 더 가까운 미얀마를 첫순위로 방문해 외교적 성과를 얻어 북한에 일격을 가하고, 국내에서 임계점에 달하려는 한국민들의 불만을 완화하려 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한국과 북한은 초기에 정치지도자의 대외적 위신 손상과 핵심동맹국으로부터의 국교단절이라는 외교적 손실을 각각 입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역설적인 체제안정의 이득을 얻었다.
<폭발 직후 아수라 속 수습현장>
먼저 급귀국한 전두환은 한국군부의 보복 움직임을 미국의 강력한 만류에 의해 가라앉히고, 미국의 미-한-일 동맹에 가담하는 조건으로 현무 미사일의 개발권을 얻고 한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불만도 약간 완화시킬 수 있었다.
북한 역시 이 사건의 여파로 형성된 미-한-일 동맹에 대한 균형을 원하는 중-소-북의 동맹 전선을 이루게 됨으로써 김정일 후계로 인한 체제불안을 상당부분 해소하고 이 후계체제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모멘텀을 얻게 된 것이었다.
<아웅산 묘소 피격에 대한 당시 국내신문 보도>
KAL기 피습사건을 접한 지 한달 만에 독일 땅에서 이 사건을 다시 접한 나는 이번에는 묘한 양가적 감정을 품었다. 처음에는 ‘왜 하필 전두환이만 살고 애꿎은 테크노크래트들만 다 갔을꼬.. 하늘도 무심하다’ 하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가며 전두환이 골로 갔다면 한국내 혼란은 더 극심해져 ‘보복->응전->전면전’ 또는 박통 암살 때처럼 ‘다른 군부세력의 제2 쿠데타’의 가능성도 더 커질 수 있었겠다 여겨졌다.
아무튼 무조건 피해야 할 게 전면전으로 에스컬레이트화 하는 그림이었으니 무인방자하던 전두환이 식겁한 것만으로 만족하며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경제경영학 전공학도로써 유능한 경제전문 관료들이었던 서석준 부총리, 김동휘 상공장관,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을 한꺼번에 현장에서 잃어버린 것은 상당히 안타까왔다.
<1983년에 일어난 개인적 주요 사건>
1. 단기 귀국후 얼마간 배우자 탐색 실망기를 가지다
83년 1월 말 한국으로 가기 위해 티케팅을 했는데 이번에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두바이를 거쳐 서울로 들어가는 코스였다. 이 코스를 택한 것은 항공편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이태리 상국이가 여기서 한번 만나자고 제의해 왔기 때문이었다. 마침 LA에서 건축학 석사과정을 마친 조용수가 귀국길에 유럽을 한번 둘러본다고 연락이 왔다며 이 기회에 세명이 스위스 땅에서 한번 보자고 했다.
루프트한자로 취리히 공항에 내린 뒤 어느 모텔에서 하루 밤을 유숙했다. 그 다음 날 밀라노에서 온 상국이를 만나 용수가 어디선가 타고 온다는 기차를 같이 취리히 역에서 기다렸다. 하차하는 용수를 수년 만에 보니 참 반가왔다. 상국이가 안내하는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곁들여 식사하며 용수의 LA 학업시절을 경청했다.
용수는 박사까지 미국에서 공부할 생각이 없었는데다 마침 한국에 자리가 생겨 그냥 석사과정 마친 채 귀국한다고 전했다. 박사코스는 일단 한국의 대학에서 자리잡고 난 후 추후 생각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그 때는 그냥 그렇거니 하고 들었는데 나중에 독일에서 발목잡혀 장기수처럼 살수록 용수의 발빠른 의사결정이 나보다 몇 수 위였음을 실감했다.
레스토랑 모임을 마치고 나는 상국이와 용수의 아쉬워하는 배웅 속에 취리히 공항으로 들어가 대한항공 비행기에 착석했다. 네시간 여 비행해 두바이 공항에서 또 서너시간 지루하게 중간 기착한 뒤 승무원과 기체가 바뀐 비행기를 타고 김포로 들어왔다. 착륙하자마자 부산행 비행기에 올라타 밤 8시 쯤 되어선가 김해 공항에 도착했다. 함부르크 공항을 떠난 지 약 28시간이 걸린 뒤였다.
공항 대합실에서 나를 기다리던 부친, 모친, 여동생이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모친이 나를 보자 대뜸 한다는 말이 ‘아이고, 우리아들이 박사공부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으면 얼매나 좋았을꼬..’ 였다. 사실 내 심정도 바로 그랬다. 서대신동 집에 도착해서 그간의 독일생활을 마르코폴로가 저그 나라에 돌아가 중국에 대한 인상기를 썰풀 듯 나도 비스무리하게 읊어대자 모친은 ‘역시 우리아들이다. 처음에 방 찾을 때 독일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했노? 여기서 한번 해봐라’ 해싸며 마냥 신기해 했다.
나는 그 다음 날 K1에게 연락해 한번 보자 했더니 의외로 그리 하겠다 했다. 그래서 그 다음 날인가 광복동 어느 커피샵에서 만났다. 여전히 미모는 그대로였지만 얼굴은 다소 수척해 보였다. 내가 지난 6개월 간 했던 독일생활을 요약해 전하며 거기서 당신 생각 많이 했는데 나와 같이 독일 가는 것은 생각해 봤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곧 단호한 어조로, ‘난 독일이라는 곳에 대해 너무 모르며 이런 생소한 곳에 아프신 아빠를 두고 선뜻 따라가기가 지금으로써는 쉽지 않은 사정이다’ 라며 완곡한 거절의 뜻을 밝혔다. 쉬운 설득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K1의 뜻을 면전에서 바로 들으니 지난 몇 달 간의 가슴졸임이 한 순간에 허물어진 꼴이 되었기에 마음 한 곳이 많이 아려왔다.
잠깐 휴! 하며 앉아 있다 일어나며, ‘K1씨, 편찮으신 아버님 잘 간병하면서 항상 건강하고 의미있는 삶을 사소!’하고 작별의 인사를 하니, ‘재민씨, 좋은 대답 못드려 정말 죄송해요. 독일에서 품었던 꿈 부디 이루고 돌아오세요’ 하며 끝까지 품격있는 결별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후일 들으니 어느 의사 신랑을 맞아 배필을 이루었다 했다.
집에 돌아와 모친에게 사정을 말하니 ‘그 아는 암만해도 독일생활 하기는 어렵겠더라.. 하지만 엄마 친구 딸 뭐어시는 니 하고 간다면 얼마든지 가겠다 하더라.. 내일 한번 만나 보자’ 해서 그 다음 날 OOO 호텔로 좀 다운 된 기분 속에 따라나갔다. 자기 모친하고 꾸미고 나왔는데 아뿔사 첫 인상이 그리 끌리지는 않았다.
두 노친네는 서로 막역하던 사이라 우리와 좀 떨어진 곳에서 같이 앉아 서로 혼사날과 예단교환, 독일 보내고 나서의 각자 지원폭을 화기애애하게 논의하는 듯 했다. 유유상종이라더니 죽이 잘맞는 앗싸리한 한 쌍 같았다. 앞에 앉은 친구도 자기는 중고교 때부터 저그 옴마를 통해 내 얘기를 하도 들어 나를 우상처럼 여겨왔다 했다.
맞선 보러 온 자리에서 내가 그리도 좋았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이 친구가 기특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 민망하며 안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내 스타일은 아닌 듯 했다. 내가 정략결혼을 해야만 하는 처지도 아닌 데 안끌리는 상대와 눈 꾹 감고 해야만 하는 그림은 피하고 싶었다. ‘뭐어씨, 난 아직 그쪽을 잘 모르겠네요. 나를 예전부터 좋아했다는 말은 참 듣기 고맙지만 나로서는 그래도 한 두 번 더 만나본 뒤 내 뜻을 전하고 싶네요’ 하고 헤어졌다.
집에 와서 내 뜻을 전하니 모친은 이 무슨 낭패의 말이냐며 내 체면 참 많이도 깎이게 생겼다 하고 한 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평양감사도 지가 싫다는 데야 대수가 있겠냐며 ‘니 뜻을 중간에 사람 넣어 전할거시’ 하고 내키지 않는 수습국면으로 돌아섰다.
그 이틀 후인가 누가 또 소개해준 아가씨를 만났지만 K1에게서 보던 외모 기준의 눈이 제법 높아졌던 터라 또 아니다 싶었다. 벌써 2월 말인데 암만해도 내 짝을 못만나고 들어갈 팔자인갑다 하고 포기 모드로 들어갔다. 이런 상황 속에 K2 생각이 다시 떠올라 전화번호도 아물사물하고 해서 부경대로 그냥 찾아갔다.
본관 쪽으로 가서 사람을 통해 연통을 넣으니 조금 있다 이 친구가 나타나며 얼굴이 바알게진 채 나를 보고서는 너무 반갑다 했다. ‘재민씨 바깥물 먹더니 더 헤사해졌네’ 하며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듯 다독거려주기 바빴다. 자기가 한 시간만 더 있으면 퇴근이니 학교 밖 다방에서 커피 한 잔 하며 기다려달라 했다.
한 시간 후 찾아온 K2는 내게서 독일생활을 요모조모 물어보며 내가 대견해 보여 죽겠다는 듯이 친밀감을 보여줬다. 니는 이제 내꺼다 하며.. 밤이 이슥해지자 버스로 부산대 쪽으로 가자며 같이 팔짱끼고 갔다. 내려서 어디선가 화기애애하게 밥도 먹었다. 한 며칠 절망과 실망 속에 부닥끼다 K2가 이리도 살갑게 대해주니 ‘김재미이 그래도 살아있네’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한참 대화를 하다 이 친구가 부산대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 같이 산책이나 좀 하다 헤어지자 하고 나를 데려갔다. 이 길을 잘 아는 듯 요리조리 잘도 헤쳐가더니 어느 포근한 언덕배기 같은데서 멈추며 여기 별빛도 밤하늘에서 반짝반짝 쏟아지는 데 잠깐 쉬었다 가자는 게 아닌가.. 이 친구의 의도를 알았지만 ‘에이, 이건 아니다’ 하고 바로 팽개칠 처지도 아니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모든 게 결정되기 전까지 선은 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K2의 체면이 깎이지 않을 정도의 포옹은 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결코 진도를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 K2야 나가는 진도 다 받아줄 기세였지만 나는 어쩐지 내 모든 것을 저당 잡힌다는 생각이 들어 끝까지 마지노선을 지켰다. ‘K2야, 그래도 옛정을 잊지 않고 날 요리 환대해줘서 정말 고마와.. 며칠 있다 다시 연락할게’ 하고 자존심을 많이 회복한 채 헤어지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K2와는 내가 배신 때린 그날 밤이 마지막이었다.
2. 드디어 박애숙을 만나다
차타고 오면서 꽤 많이 고민되었다. 나 좋아하고, 나도 그리 싫지 않은 이 친구와 결국은 결혼을 해야 하는갑다 하고.. 다른 한편 지금 다급하다고 꿩 아니면 닭을 잡아 나중에 후회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서로 팽팽하게 경합하듯 왔다갔다 했다. 집에 오니 모친이 동대신동 사는 누구를 통해 또 중신이 들어왔다며 가능하면 내일 서라벌 호텔로 같이 나가자는 것이었다.
상대 집은 부친이 경남도청 넘버 3인 기획실장이라는데 1남4녀 중 맏딸이라 했다. 아니, 조금 전에 내 마음이 많이 기울어진 K2를 만나고 왔는데 오자마자 또 미지의 새로운 여인을 만나러 가야한다는게 타이밍 상으로 참 뭐같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공식 약속인데다 내 운명을 한번 더 테스트해 보고도 싶어 다음 날 약속장소에 가니 박애숙과 자기 모친이 짠하고 나타났다.
힐껏 보니 중키에 얼굴도 가르스름하고, 몸매도 약간 말라보여 어, 괜찮네 하는 느낌이 왔다. 그쪽 모친도 근래에 만나본 다른 모친들과는 좀 급이 다르게 귀부인 같은 자태의 세련미가 넘쳐 흘렀다. 박과 수인사를 한 뒤 단독회담에 들어갔다. 머리는 돈 좀 먹은 듯한 뽀글파마를 했고 얼굴도 원판이 계란같은 타원형인데다 눈이 좀 작다 여겨졌지만 화장빨로 잘 처리해 야, 이 친구가 지 얼굴공사는 제법 하는가배 싶었다.
꾸민 뽄새는 제법 그럴 듯 한데 이름은 우짜다가 ‘애숙’이라 지었을꼬 하고 그 곡절도 알고 싶었다. 그런데 입을 여니 나긋한 서울 억양의 표준어를 구사하는 게 아닌가.. 한 동안 부산 억양의 아가씨들만 만나다 모처럼 신선하게 들렸다. ‘고향이 서울인교?’ 했더니 ‘아뇨, 태어나기는 아빠의 고향 밀양서였어요. 국민학교까지 다니다 중고교는 서울서 진성여중과 창덕여고를 다녔고, 그후 상명여대 생활도 서울에서만 했어요. 엄마는 서울 토박이고요’ 하고 제법 조신하게 ‘이거 왜 이래?.. 나, 막커지는 않았어’ 하는 듯한 답이 돌아왔다.
첫 대화 1합에서 난 맘에 들었다. ‘듣자니 재민씨는 독일유학 생활 조금 하다 들어오셨다던데 어디서 무슨 공부를 하시는지요?’ 하며 독일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내가 이러저러하다고 대답해주니 ‘전 학창시절 재민씨만큼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책을 많이 읽었으며, 항상 재력보다 머리에 든거 많은 사람을 동경해 왔어요’ 하며 ‘나도 니가 일단은 맘에 쫌 든다’ 는 듯 내숭이나 튕기는 것 없이 바로 속마음을 전해 주었다.
‘책은 여고시절까지 도스토옙스키 소설 전집을 다 독파했으며, 대학시절에는 독일문학에도 심취했어요. 그리고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읽고는 혼자서라도 독일생활 경험을 해보려 을지로에 있는 ‘독일어 어학원’을 다녔어요‘ 하고 자신의 러시아문학과 독일사랑의 강도를 보여주었다.
뭐 이 정도에서 내 맘은 결정되었다. 바로 이 친구네! 하는 느낌이.. 첫날은 밥을 같이 먹지 않는 게 예의라 해서 광복동으로 걸어가 뉴욕제과인가에서 각자 취향대로 우유와 팥빙수 같은 것을 먹었다. 첫 만남에도 서로 호감 만땅의 느낌들이 오고갔다. 헤어지는 곳에서 버스를 먼저 타고 떠나려 하는데 동전을 찾으려 주머니를 뒤척거리는 나를 보고는 ‘여기!’ 하며 토큰 한 개를 얼른 챙겨주는 것이었다.
하, 가시나 음전만 떠는 줄 알았더니만 요런 것도 살갑게 보필할 줄 아네 하고 흐뭇해 했었다. 집에 와서는 ‘옴마, 나는 결심했네.. 야와 결혼하기로,,’ 했더니 ‘무슨 소리고? 그리 성급하게.. 나는 아가 마른 게 좀 연치같았고, 나온 학교도 약간 맘에 안들더라.. 모레는 대한항공 스튜어디스 하는 아아집에서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왔으니 그리 알아라..’ 하는 반응을 보였다.
‘마 됐소.. 그 만남은 취소하소’ 하며 여자만남의 다다익선을 좋아하는 내가 그 때는 웬일인지 그만 끊고 싶었다. 괜히 또 괜찮은 친구 하나 다시 나타나면 갈 길도 바쁜데 선택의 헷갈림에 빠질까 싶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박과의 두 번째 만남은 한 이틀 뒤 미화당 근처 광복동이었다. 이번엔 무슨 경양식 집이었는데 나는 돈가스, 자기는 무슨 오무라이스를 시켜 먹었다. 계산을 하려는데 자기가 하겠다고 방방거리는 게 아닌가.. 내 여동생도 처음보는 남자와 밥먹으면 괜히 여자랍시고 남자에게 베껴먹는 것 같아 그게 싫어 지가 먼저 총을 빼든다 하던데 이 친구도 그 과인가 싶었다. 아무튼 요런 계산 자세도 내게서 점수를 땄다.
며칠 후 세 번째 만남은 미화당 근처 '오향장육’ 집에서 식사를 한 뒤 잠깐 들린 그 옆의 하얀풍차라는 빵집에서 내가 결심한 듯 ‘박양, 우리 같이 독일 갑시다’ 하고 약간 자신있게 본론을 꺼내었다. 이 문디가 순간 어찔한 척 하다가 ‘집에 가서 부모님과 상의한 뒤 답을 드릴께요’ 하면서도 크게 싫지 않다는 내색을 내보였다.
거처가 어디냐고 물으니 자기가 가족들과 사는 집은 서울 잠실의 진주아파트지만 지금은 자기 아빠의 부산 사택에서 머물고 있다 했다. 알고보니 우리 집에서 한 1킬로도 떨어지지 않은 동아고에서 내려오는 위치의 어느 아파트였다. 그러면 우리집에 잠깐 들렸다 자기집에 가라 했더니 그리 하겠다 했다. 모친에게 전화로 같이 가니 준비 좀 해 놓으라 일렀다. 버스 타고 집에 도착해 모친과 부친에게 인사시킨 뒤 차와 다과를 나누며 우리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틀 뒤인가 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저그 집에서 음식 한 상 차려놓고 재민씨를 초대했으니 오후에 꼭 방문해 달라는 것이었다. 오, 내 프로포즈를 수락했구나 싶어 득달같이 달려갔다. 가보니 장인어른과 장모, 저그 조부와 조모, 이모들, 그리고 처제뻘 1명도 자리 잡고 있었다. 어른들께 차례로 큰 절을 올리고 나니 말 그대로 한 상 그득 진수성찬이 펼쳐졌다. 장인어른도 내가 대견한 듯 ‘우리 애숙이 잘 부탁하네’ 하고 연방 미소 속에 양주 잔을 권하는 것이었다.
3. 일사천리로 진행된 결혼과정
며칠 후 코모도 호텔 일식집에서 우리 부친이 애숙이 부모님들을 초대하며 상견례 하는 자리를 가졌다. 우리 부친도 평생을 접대하고 접대받는 자리에서 부대낀지라 장인어른을 보자말자 자기는 세무직 공무원 말단에서 퇴직했기에 고위 공무원인 사돈을 만나 정말 영광이라는 자세를 취해 딸 가진 부모의 낮은 포지션을 바로 세워주었다.
평생을 귀부인 모드로 살아오며 체면에 죽고 체면에 사는 장모님 최여사도 우리 모친 급은 바로 깨갱하게 만드는 의상과 악세사리 치장으로 클레오파트라 옴마의 포즈를 유지했다. 계속되는 덕담 배틀로 하하호호 하면서도 내 사정을 생각해 약혼식 과정은 생략하고 한 2주 내에 결혼식으로 바로 가자고 상호 합의했다.
<함잽이 마부 조용수+길잽이 성보('83년 3월)>
일주일 뒤 잠실 진주 아파트로 함을 들여 가기로 했기에 부산에서 성보, 경효. 용수 등이. 서울에서는 진회와 외대 후배들인 석훈, 창영, 영주 등이 함잡이 행렬에 합류했다. 보통 함값 네고로 밀고 당기는 실랑이 과정이 하나의 의전처럼 있었지만 처가쪽에서 함맞으러 나온 양반이 달라는데로 다 드릴테니 일단 올라가자 해서 함을 진 마부 용수를 필두로 실랑이 한 점 없이 모두 바로 올라갔다.
커다란 아파트 거실에 처가쪽 인척과 애숙이 오빠, 세 여동생, 그리고 지 대학친구들이 포진해 우리 일행을 맞았다. 한 상 차려진 한쪽에 한복 치장한 애숙이와 풋풋한 차림의 저그 여동생들, 그리고 대학 친구 몇이가 장인어른과 함께 맞은 편에 앉았고, 우리 일행이 그 앞에 자리하게 되었다. 장모님과 처가 친척은 옆 방에서 함 트렁크 받아 펼치며 모친이 챙겨 보내준 물건들을 품평하는 과정에 있었고..
진회가 함잡이단 대표로 장인에게 함값 좀 주십사 네고의 태세로 말을 건네니 우리 장인은 준비해온 봉투를 여러 일행이 보는데서 ‘얼마 되진 않지만 섭섭치 않게 넣었네’ 하며 진회에게 전했다. 진회가 투명성을 강조하듯 받은 내용물을 공개하자 50만원짜리 수표가 들어 있었다. 그 당시 중산층 집안끼리 혼사할 때 평균적으로 지불하는 함값은 20~30만원 정도를 두고 양측이 밀고당기는 것이 관례였는데 아예 20을 더 넣어 우리 일행에게 밀당의 시간을 없애주며 처갓집의 배포를 과시하려는 듯 했다.
그 장면에서 난 맘이 좀 불편했다. 사위감 체면을 세워주고 첫 출가시키는 맏딸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표시하려는 장인 맘은 잘 알겠으나 다른 한편 고위 공무원의 신분으로 왜 관행을 크게 넘어서는 금액을 선사하는 통 큼을 여기서 보이려 했을까 하는 미심쩍은 의문이 드니 제법 많이 찝찝했다. 내가 어째 돈많은 고위직 권력가 집에 팔려간다는 느낌도 은연 중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 앞에서 순간 수치스럽기조차 했다.
그런 내 기분을 알 리가 없는 친구들은 예상외 횡재를 한 듯 이 돈을 어떻게 나누어 쓸꼬 하는 흐뭇함에 빠져 부어라 마셔라 하며 왁자지끌 분위기를 띄웠다. 그 날 따라 애숙이는 자기 옴마의 강권에 많이 따른 듯 무슨 요정 에이스 도우미의 차림새로 꽃단장을 하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았건만 주체적인 사람 냄새나는 박애숙이 아닌 미녀역할 꼭두각시 마네킹이 존재하는 듯 했다.
<함 피로연에서 애숙이와('82년 3월)>
그 날에 대한 내 기억 속에서 어쩌다 남아있던 그 분위기를 포착한 스냅 사진 한 장을 보니 먼저 결혼한 장발의 강성보가 그 와중에도 맞은 편에 앉은 신부측 친구 쪽에 건질 만한 미색이 없나 하고 쬐려보는 장면에서 그래도 꽤 뒤틀렸던 그 당시의 내 추억을 제법 웃음 띄게 많이 완화시켜 주었다.
하지만 당시는 그런 석연치 않은 기분이 며칠 간 지속되어 애숙이에게도 좀 데면데면하게 대해졌고, 예식장도 부의 과시감이 별로 표현되기 어려운 부산역 앞에 있는 ‘새마당’(좀 후지게 보였던지 박애숙은 지금도 ‘헌마당’이라 부름) 예식장을 불뚝 밸로 계약해 버렸다. 눈치 빠른 애숙이 내가 대사를 바로 코 앞에 두고 계속 삐딱선을 타는 게 엿보였던지 ‘재민씨, 혹시라도 이 결혼에서 후회하실 구석이 있다면 저는 지금이라도 아무 원망없이 없던 일로 할 수 있어요’ 하고 푹 찔러왔다.
나는 앗 뜨거라 싶어 ‘아니, 그 무슨 씰데없는 소리.. 내가 아무렴 아 장난도 아니고 여기서 파혼을 하다니.. 걱정말게,, 우리는 문제 없이 그냥 갈거시..’ 하고 이 친구가 내심 품었을 우려감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내 내면에 꼬인 ‘부자들과 권력자에 대한 경멸감’을 ‘너무 과민한 열등감적 반발’이라 자책하고, 나를 기꺼이 선택해준 멍청한 낭만파 박애숙을 결코 내쪽에서는 버리지 않는 배우자가 될 것임을 한번 더 결연하게 마음 먹었다.
4. 제주 신혼여행과 짧은 애정 다지기 후 혼자 먼저 도독(渡獨)
1983년 3월19일 박애숙과 나는 ‘새마당 예식장’에서 제법 많이 찾아준 하객들 속에 부부의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 친구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는 모르지만 내게는 ‘아, 이제사 나도 결혼이라는 걸 해보네’ 하는 정도의 통과의례를 치룬다는 느낌만 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나혼자 그냥 시니컬한 채 꼴값 떠는 것 뿐이었는데도..
<애숙이와 혼례 세레머니('83년 3/19)>
<신혼여행 떠나기 전 친구들 파티 참석>
남 하는대로 전형적인 결혼식 세레모니를 치룬 채 우리 둘은 오후 5시 정도인가 항공편으로 제주를 향해 날아갔다. 어쩌다가 좌석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티케팅 되는 바람에 지는 내 오른 편에서 눈 붙이고 있었고, 나는 신문쪼가리 훑어보고 있는 중에 제법 자연산 미모의 스튜어디스가 꼬리치는 듯한 서비스 멘트를 해온 해프닝이 꽤 기억에 남았다.
내려서는 예약된 제주 KAL 호텔에서 체크인 한 채 근처 나이트클럽에 가서 맥주 마시고 부루스 좀 같이 추다가 나와서 제주 밤거리를 산책 잠깐 한 뒤 호텔방에 들어와 쫄아서 바들거리는 애숙이와 첫날밤의 의식을 그럭저럭 치루었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니 이제 내 사람이 된 이 친구가 드디어 애틋하게 여겨지기 시작하고, 같이 오래도록 해로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뭉게뭉게 일었다.
<서귀포 일출봉에서('83년 3월)>
<제주 용두석 배경으로('83년 3월)>
그 기분이 계속 연결되어 택시 대절로 제주 풍광을 구경하며 서귀포에 닿았더니 예정했던 유명 영빈관에는 방이 없다 해 속으로는 잘됐다 싶어 근처에 보이는 무슨 장급 여관 같은 곳에 투숙했다. 뭔가 버성거리는 별 다섯 개짜리 호화특급 호텔방보다는 이런 가성비 좋은 B급 숙박소 방이 언제나 내 마음을 더 푸근하게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애숙이도 내키지 않았겠지만 별 군말없이 따라와 주었고, 이번에는 하룻밤 만리장성을 같이 쌓아봤다고 훨씬 스스럼 없는 자세로 나와 두 번 째 밤은 그야말로 제대로 된 1~2합의 부부간 운우지정이란 것도 나눌 수 있었다. 그 날을 계기로 박애숙이 떨어질 수 없는 진정한 내 분신으로 여겨졌다. 이 친구와 한 세상 가는 데까지 함께 가보기로 결심하면서..
<독일 떠나기 전 태종대에서('83년 3월)>
<범어사에서 어화둥둥('83년 3월)>
신혼여행길에서 돌아와서는 서울 처갓집에서 한 이틀 머문 뒤 부산 집으로 같이 갔다. 거기서 4월 초 함부르크로 나 혼자 다시 떠날 때까지 한 2주간 태종대, 범어사 등을 막내 내경이 끼워서, 아니면 우리 부친모친과 함께 가족전체가 하와이 부곡온천 같은 데룰 다니며 마지막 시간을 보내었다.
<성보집 방문('83년 4월)>
떠나기 한 사흘 전에 서울 올라와서는 애숙이 사촌이모나 최여사 친구들이 우리 부부를 계속 초대해 밥을 사줬고, 이 시기에 성보가 사는 집에도 들려 미숙씨가 차려준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 떠나기 전날 밤에는 함잡이 친구들과 내 처제들, 엄선된 애숙이 친구들 모두와 함께 내게는 추억어린 크라운 호텔의 나이트장에 같이 가 파트너들 능력껏 바꿔가며 부루스도 땡기는 작별연의 시간도 가졌다.
5. 간 조마거리며 기다리던 와이프와의 재회
유학가던 첫 도독 때처럼 이번에도 크라운 호텔에서의 추억을 한 웅큼 만들며 나는 친구들, 박애숙과 처가식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결혼한 지 3주도 채 안된 4월 초 독일로 떠났다. 함부르크에 돌아오니 조태영씨와 박윤성씨, 서사범 선배를 비롯해 나를 아는 적지 않은 유학생 친구들이 결혼 축하한다는 덕담들을 건네 주었다.
그 중에는 나와 지난 6개월 간 제법 친했던 女유학생 K3와 B가 불편한 속내는 꽤 있었겠지만, 그래도 성숙한 자세로 ‘재민씨, 진심으로 축하해요. 멋진 부인 오시면 저희에게도 꼭 소개해 주세요’ 하며 자신들을 허망하게 만들었던 그 괘씸한 국내녀가 누군지 눈에 불을 켜며 확인하려는 기세였다.
그 사이 와이프로부터 첫 편지가 왔다. ‘재민오빠, 무사히 도착하셨어요?..’로 시작하는 박애숙 특유의 꼬불꼬불한 글씨체로 파아란 배경색 항공엽서에 앞 뒷장 가득 내용이 채워져 있었다. 자기는 서방된 인간이 벌써부터 보고 싶다며 지금 부산집에서 어머님 아버님 모시고 도련님과 아가씨와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다음 편지 보낼 때까지 오빠도 그곳 일 잘 헤쳐가라고 제법 어른스러운 편지를 내실있게 날려 주었다.
<서울 잠실집에서 독일행을 기다리며('83년 여름)>
나 역시 꼰대훈장체로 ‘애숙이 보거라.. 니 첫 편지 받아보니 우리가 부부가 된 게 맞긴 맞구나. 이 몸은 무사히 도착해 학교생활과 일상으로 잘 들어서고 있으니 큰 걱정하지 마라. 니 데려올 입학허가서를 받기 위해 지금 함부르크대와 근교인 킬대에 신청서 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 사이 운전면허증이나 따 놔라..’ 하는 내용으로 답신을 보냈다.
그 때만 해도 독일 유학생 배우자는 배우자 비자란 게 자동뻥으로 나오지 않아 와이프도 독일에 합류하려면 취업비자나 독일대학 입학허가서를 받아야 들어올 수 있었다. 박애숙이 상명여사대 미대 공예과를 졸업했으니 양 대학 미대쪽이나 교육학쪽으로 입학신청(쭈라쑹) 서류들을 작성해 보내었다. 함부르크대에서는 9월부터 시작되는 겨울 학기에는 자리가 없다는 회신을 먼저 보내어와 맘이 좀 초조했다. 하지만 얼마 후 함부르크에서 북쪽으로 한 60킬로 떨어진 킬대에서는 미술사과 쪽에서 마침내 쭈라쑹이 나왔다.
<회펜 27街 방에서 애숙이 공수작전 펼치는 중에('83년 6월)>
뛸 듯이 기뻐하며 전화통에다 ‘박애숙이, 니 허가쯩 킬에서 드디어 받았다. 9월 중순부터 학기 시작되니 초까지 올 수 있도록 서둘러 출국준비 해라’ 하고 다소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박도 ‘음머, 반가운 소식이네! 그래요, 재민씨, 큰 수고했네요. 바로 어머니와 우리 가족들에게도 알리고 빠른 시일에 날아가도록 준비하겠어요’ 하며 같이 흥분된 어조로 맞받아 주었다.
드디어 오는구나 싶어 하루하루가 빨리 가 재회의 날이 바로 왔으면 싶었다. 마침내 티케팅을 해 9/8일 아침에 함부르크 공항에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오기 한 달 전인가 600마르크 주고, 서사범이 소개해준 터키 아재 카 정비소에서 캐퍼(바퀴벌레)라 불리는 푸른 색 중고차도 한 대 장만 했기에 요것 타고 마중가면 되겠다 싶었다.
<박애숙 함부르크 행-처가 가족('83년 9월)>
<박애숙 함부르크 행-친구와 시누이('83년 9월)>
그런데 9/1일 미국에서 서울로 들어오던 KAL 보잉 747기 007편이 사할린 근처에서 방공식별구역 침범이라는 사유로 소련 수호이 전투기의 피격을 받아 269명의 승객과 승무원들이 몽땅 희생된 추락사고가 있었다. 전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 사건이 도저히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때가 때이니만큼 KAL로 티케팅 했다면 다른 나라 항공편으로 바꿔 타고 오라고 권고했다. 결국 김포에서 나리타로 가 JAL로 갈아탄 뒤 함부르크 공항에 직행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6. 애틋한 맘으로 진짜 신혼기간 보내다
우리 집에서 승용차로는 한 20분도 안 걸리는 함부르크 공항에 아침 5시에 일어나 득달같이 도착한 뒤 6시반경에 착륙한다는 JAL기를 한 시간 전부터 기다렸다. 드디어 중치마 차림에 붉은 가디건을 걸친 뽀글머리의 박애숙이 큰 짐 두 개를 카트에 실어 밀며 나타났다. 와따, 그 때는 적국 감옥에서 포로로 감금되어 꽤 오랜 영어생활을 하다 포로교환으로 풀려나온 우리편 인사를 맞이하는 것처럼 감개가 무량했다.
지도 6개월 만에 다시 본 꾀죄죄한 몰골의 서방이라도 반갑고 좋았던지 긴 여행에 피곤했을 텐데도 손을 흔들며 미소를 놓지 않았다. 짧은 포옹을 나눈 후 짐을 푸른 캐퍼에 옮겨싣고 차를 몰았다. 그리도 오고 싶다했던 독일의 거리를 감회깊게 쳐다보기에 한동안 말도 건네지 않았다. 회펜 내 집으로 같이 들어오던 그 20분이 참으로 아득하게 여겨졌다.
집에 도착해 아랫채에 살던 독일인 주인영감과 할매에게 방금 서울에서 도착한 ‘마이네 프라우 박’이라고 인사시킨 뒤 내 이층방에 들어서자 짐을 풀기도 전에 한번 더 와락 껴안았다. 짐을 풀기 시작했더니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끝도 없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한 시간을 넘어 정리할 것 대충 정리하고 나서 시차로 잠이 곧 쏟아질 테니 벽 옆에 있는 내 침대에서 눈 좀 붙일 것을 권했다. 그런데 잠이 아직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욜로 온나’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침대 위에서 먼 길 서방 찾아 온다고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며 ‘어디 검사 한 번 해보자’ 하고 재회의 부부지정을 듬뿍 나누었다. 이 친구도 결혼한 지 한 달도 못되어 훌쩍 떠난 서방이 못내 그리웠는지 6개월 만에 다시 만난 오빠신랑을 정성을 다해 맞아주었다. 잠깐 한국에서처럼 팔베게 해주고 누웠다가 샤워실로 안내한 뒤 마치면 여기서 같이 푹 좀 자자 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 보니 박애숙은 옆에서 여전히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평생을 내가 먼저 잠이 들고 자기보다 먼저 일어나 지켜보는 잠버릇 습성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소파 쪽으로 옮겨 가 담배 한 대 맛있게 태우는데 그 흐뭇함이 끝간 데가 없었다. 드디어 눈을 뜬 이 친구는 지가 동경하던 독일 땅에서 서방과 같이 첫 잠을 푹 자고 일어났다는 것이 못내 신선하고 그럴 듯 했는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오후 늦게서야 집을 나와 동네 근처를 같이 배회했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처음 함부르크 이 동네에 닿았을 때 느꼈던 이국적이면서도 품격 있던 정갈함의 정취를 같이 느꼈으리라 여겨졌다. 독일의 소담스러운 녹음을 계속 보며 전철이 아래로 지나가는 다리를 건너 마을 광장 쪽으로 함께 걸어갔다.
화장빨이 없는 민낯의 쪼그만 눈을 쪽찢어지게 반짝거리며 정경들을 요모조모 눈에 훑어담는 박애숙이가 꽤 듬직하고 사랑스러웠다. 아마도 공부 빼고는 나보다 훨씬 더 유연한 적응력으로 이 나라 생활을 헤쳐나가며 일상에서 어리버리한 나를 야무지게 챙겨서 끌고 갈 것임이 그 어떤 예감으로 다가왔었다. 그 예감은 살아보며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자주 확인시켜 주었다.
쇼트 퓨즈 같이 화 잘내는 단세포 성질머리의 소유자며 치마만 둘러도 눈길 잘 돌리는 여성애호가 놈을 여러 번 빠진 인생위기의 함정에서 동아리 던져 건져올려준 인간적 포용력과 충성심이 그때부터 언뜻언뜻 싹수가 있어 보였다.
그 날 저녁에 나를 늘 큰 형님의 자세로 챙겨주던 서사범 집으로 데려가 인사를 시키자 좋은 제수씨 만난 것 축하한다는 덕담을 들었고, 그 다음날은 학교로 찾아가 대학캠퍼스 구경도 시키며 궁금해 하던 한국 유학생들에게도 만나지는 족족 도착 신고를 했다. 주말에는 조태영 부부와 박윤성, 상협이 형과 길수, 그리고 K3와 B 등까지 집에 초대해 박애숙이 지체있는 집안 도시녀답지 않게 음식솜씨와 사람접대 능력도 만만찮다는 것을 함부르크 유학생 사회에 각인시켰다.
장모님이 두둑하게 챙겨보내준 달러 지참금에 내가 분기별로 수령하는 문교부 장학금이 보태지자 유학생답지 않은 재력이 형성되어 차도 새차 같은 중고 갈색 VW 골프로 바꾸었다.
한번 씩 생활고로 힘들어 찾아오는 친구들에게는 갓 파더처럼 돈을 빌려주는 금고 역할도 하며, 주말마다 ‘위대한 개츠비’ 마냥 개털 독신 유학생들을 불러 애숙이표 육개장과 오뎅탕을 해먹이며 맥주 환담용 안주빨까지 이슥토록 제공하니 어느 듯 김재민이가 ‘함부르크 황태자’라는 별칭의 명망인으로 변해 있었다.
7. 킬 대학 어학코스 보내기
독일체류 허가를 받고, 독일대학에서의 유학을 위해서는 어학코스를 다니는 게 필요하다 여겨져 부산에서 마산가는 거리인 함부르크-킬까지 기차통학으로 주중에 매일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킬(Kiel)은 우리의 진해 역할을 하는 군항도시로 1, 2차대전 당시 독일해군의 총사령부가 있던 곳이었다.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주의 주도로써 유명한 독일잠수함의 건조사 HDW(하데베)가 위치하는 핵심건조창이기도 했다.
오가는 코스를 익히기 위해 킬대학까지의 첫 방문시는 나와 전철과 기차로 가기로 했다. 우리집 근처에 있는 랑엔호른-마크트 역에서 U-반으로 켈링후젠까지 타고가 거기서 S-반으로 환승한 뒤 알토나 역까지 가 기차로 킬까지 티케팅해 타고가는 코스였다. 킬 역에 내려서는 버스로 몇 정거장 타고 가면 킬 대학에 다다르는 것이었다.
그래도 예전에 ‘을지로 독일어학원’을 다닌 덕분인지 독일어 표지판을 사전 찾아가며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든든한 힘이 되었다. 길눈 어두운 나도 정신 바짝 차리며 교통지도를 손에 꽉 쥐고 킬 대학을 찾아 나섰다. 차로 가면 한 50여 분 거리가 전철-기차-버스로 가니 얼추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 걸렸다.
킬 대학 사무처에서 가져간 쭈라쑹을 보이며 어학코스 초급반에 등록을 완료하고 배울 장소도 둘러보았다. 대학 캠퍼스를 나와서는 지역 분위기도 익힐 겸 킬 역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함부르크만큼 번화가가 운집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이곳 주도답게 도시 전체가 깔끔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조금 더 가니 바다와 요트장도 보였다.
킬 역 근처에는 커다란 건물의 ‘헤르티(Hertie)’라는 백화점이 있었기에 같이 들어갔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못보던 ‘메이드 인 저머니’ 제품들이 즐비해 애숙이는 자기가 이곳에 온 보람을 얼른 느끼는 모양이었다. 보나마나 어학코스 마치고 킬 역에서 기차타기 전에 꼭 거쳐야 할 필수건물이 될 거라 짐작되었고, 나중에 보니 그 생각이 그대로 맞았다.
첫 어학코스에 참석하는 날은 내 차로 같이 킬로 떠났는데 가장 단거리로 달렸던 터라 대학까지 한 시간여 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린 자식이 처음 접하는 낯선 강의장에 쫄레쫄레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아배처럼 저 인간이 쫄지 않고 혼자서 적응해 독일어 수업 잘 받아낼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들여보내고 한 세 시간 후 마칠 때까지 난 대학 밖으로 나와 킬 시내와 해변가, 그리고 헤르티에서 시간을 보내다 끝나고 나올 무렵 애숙이를 데리러 갔다.
치를 세우고 들어가니 이 친구가 걸어나오는 데 활짝 미소를 띠는 것을 보고 맘이 놓였다. 할 만 했다는 듯 자신감에 배여 씨익 쪼개는 웃음 속에 드러나는 하얀 강냉이들이 그때는 제법 싱그럽게도 여겨질 정도였다. 포상의 의미로 헤르티를 나는 이미 시찰했건만 한번 더 들려 이것저것 많이 보고 쇼핑도 하게 함으로써 독일의 일상에 빨리 적응하도록 내 딴에는 배려했다.
그 다음 날부터는 집 근처 랑엔호른-마크트 역에서 전철을 같이 타고가다 킬 행 기차를 타는 알토나 역 S-반으로 갈아타기 위해 중간지점인 켈링후젠 역에서 자기는 혼자 내리고, 나는 그대로 함부르크 상경대가 있는 할러슈트라세 역으로 그냥 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예행연습을 한번 했다지만 저 인간이 독일와서 며칠도 안되어 킬까지 제대로 갔다 오려는지 휴대폰도 없던 시절 걱정이 많이 되었다.
갈라지는 길에서 무심코 헤어졌다 운명의 장난으로 영원히 못만나게 된 남녀 스토리가 동서고금을 통틀어 얼마나 많던가.. 켈링후젠에서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하차하며 문이 닫기는 차창으로 손을 흔들던 이 친구가, 저녁에 다시 볼 텐데도 영원으로 넘어가는 여인처럼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다행히도 우리 두사람에게 운명적 헤어짐의 시간은 아직 멀었는지 저녁에 집에 먼저 와 초조하게 있는 내게 유선전화가 왔다. 킬에서 수업 잘 받고 기차로 알토나에 잘 닿았다고.. 어찌나 대견스럽던지 거기서 중간지점 쯤인 S-반 담토어 역에 내려 그 입구에 있는 맥도날드 집에서 기다리면 나도 차로 가 접선한 뒤 같이 학교 근처 돌아보다 들어오자 했다.
아무튼 이렇게 시간이 가며 애숙이는 독일생활에 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익숙해져 갔다.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안주감들로 술자리도 제법 품격있게 만들어주고, 식사까지 잘해 먹이니 많은 인간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면서, 덩달아 나의 사회적 자산 폭도 계속 쌓여갔다. 한마디로 ‘김재민 초기 함부르크 시대의 전성기’가 막 시작되었다 할 수 있었다.
8. 밀라노 상국이집 방문
연말이 가까워 오면서 밀라노에 있는 상국이로부터 같이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10월 중순인가 박애숙이 보겠다며 함부르크로 왔는데 집밥 제대로 먹여준 데다 잠까지 하루 재워준 답례라 여겨졌다. 더군다나 잘 때 우리 침실 침대에 내가 중간에 눕고, 애숙이는 왼편에, 상국이는 오른 편에 눕게 해 세 명이 한 침대에 같이 누워 이바구를 나누는 그림도 연출하며 무슨 에스키모 아재를 흉내낸 것 같은 방문객 접대 호의도 베풀었는데 그 빚갚음이 틀림없었다.
그 때 상국이가 처음에는 ‘이 무슨 같잖은 짓거리고!’ 해쌌지만, ‘그냥 잠깐 누웠다 얘기만 나누다 잠 오면 니는 저쪽 거실 소파에서 자면 안되나?’ 했더니 그제서야 특별친구에 대한 내 의도를 알아차린 양 침대 한 쪽으로 들어와 같이 한 이불 덮은 채 누워주었다. 같이 캥겼을 박애숙도 상국이 자존심 상하지 않게 애써 요런 돌발적 상황을 못이기는 체 받아주었다.
막상 누워서 세 명이 이바구를 나누게 되자 애숙이도 예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상국이 말을 잘 받아주었고, 상국이도 차츰 요런 분위기에 익숙해지며 나를 중간에 두고 저그 둘이서 더 많은 얘기의 꽃을 피웠다. 한 30여분 어둠 속에서 같은 침대 위 환담을 나누다 상국이가 ‘이제 나는 잠이 와서 나가 잘란다. 너그 둘이도 ’Gute Nacht!‘ 해라’ 하고 거실 소파로 갔다.
이렇게 한 이불에서 같이 대담했던 인연의 연대감이 좀 남달랐는지 연말연시를 이번에는 자기 ‘나와바리’에서 우리부부를 한번 접대하겠다며 초청한 것이었다. 우리는 기차로 한 8~9시간에 걸쳐 全 독일을 종단하며 스위스를 거쳐 알프스 산맥을 가로지르는 터널을 지나 밀라노 역에 닿았다.
첫 날은 밀라노 시내 한국 레스토랑에서 상국이의 거한 식사대접을 받은 뒤 우리집과는 비교가 안되는 커다란 규모의 이 친구 집에서 첫 밤을 보냈다. 이번에는 우리 둘이만 푹 쉬라고 ‘세명 침대놀음’ 같은 것 없이 방 한 칸을 통째로 내어주었다.
<코모호수 유람선에서('83년 12월)>
그 다음 날 오후 상국이의 알파로메오 차로 밀라노 근교 코모 호수로 데려가줘서 세 명이 함께 유람선 보트도 타며 기억에 남을 망중한을 즐겼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정적들에 이해 체포될 위기에 몰린 무솔리니가 히틀러의 독일로 탈출을 꾀하다가 여기 코모 근교에서 빨치산들에 의해 잡혀 이 호수에서 애인 클라라 페타치와 처형되었던 역사적 장소임을 나중에사 알았다.
상국이 집에서 하루 밤을 더 묵은 다음 날은 느즈막한 오후에 이태리 반도 북동쪽에 위치한 수상도시 베네치아로 안개 낀 밤의 고속도로를 뚫고 갔다. 이곳은 세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을 필두로 독일어권의 유명작가 토마스 만의 소설 ‘베네디히에서의 죽음’에서 나타나듯 우리의 개성 상인같은 그악한 이미지의 상인들이 득시글거리고, 다른 한편 오스트리아의 식민지가 잠깐 되기도 한 역사적 전력 때문인지 독일어권 예술가들에게는 이국적이면서도 편안한 휴양지로써 제법 각광을 받아온 도시였다.
<베네치아 리알토 다리에서('83년 12월)>
아무튼 괜찮은 꼬치친구를 가진 서방 덕에 박애숙이는 유럽 땅 온지 얼마되지 않아 ‘83년에 이미 파리와 자웅을 겨루는 유럽패션의 메카 밀라노는 물론 물의 도시이자 곤돌라의 본산이기도 한 베네치아를 한 방에 떼는 행운을 챙겼다. 산 마르코 성당이 있는 이곳 광장을 거닐다 대운하를 넘어가는 랜드마크 리알토 다리에서 템즈강 다리의 영국 여배우 비비안 리 같은 포즈도 취하면서..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수년 내에 다가올 독일생활의 하강커브 속 고난의 시기가 땅밑에서 용암처럼 기운을 모으고 있는 동안 우리의 ‘벨 에포크’였던 좋았던 시절의 전반부는 이처럼 달달하게 흘러갔다.
여자 얘기는 독자들의 흥미유발을 위해 한번씩 조미료를 쳐가며 꽤 부풀려 하는 얘기지 실제는 많이 깎아서 들어야 할겜다. 와이프도 젊은 시절 같았으면 교화소가 아니라 처형장에 보내어 그 고깃덩이 들개들에게 던줘졌을 것임다마는 이제는 많은 부분 구라라는 것을 알기에 쥐톨만한 여성편력으로 독자들 끌 수 있다면 자기가 좀 뭉개져도 약간은 봐주겠다며 어느 정도는 풀어주고 있네요..
살 맞대고 살아 온 정으로 삽니다.
길영공의 observation은 나도 동감합니다.
사진을 가만히 보면 박여사의 시선이라든지 몸과 머리의 방향이 항상 김박쪽으로 기울어 있든지 향하든지 아니면 머가 짝 달라붇어 있심니다.
험험..
그 짧은 시간에 일사천리로 해결이 되어간 것을 보면 원익법사말대로 천생연분이 분명하고...
장인어른의 함값에 팍 삐지는 김박도 은근 웃깁니다.
본인 나름 원리원칙이 있는 것 같기도하고
아니면 패기? 반골기질?
떵고집??
젊다보이 그런 것이 당연 더 심하기도 했겠지요?
1.나는 왜 유학갈 엄두를 내지 않았을꼬? 집에 돈이 없긴 했지만 사학과 지원할때 모친한테 이태리 유학자금 부탁하긴 했었는데...한국밖으로 뛰어나가지 못한거 너무나 아쉽다. 더 많은 경험하며 더 많은 사람을 사귀었을건데...
4.아웅산 테러로 숨진 김동휘장관은 경고 6회. 우리 동창회로서 아까운 분을 일찍 잃은셈이었음.
5. KAL기 폭파때 김선영이 부모님이 희생당하신거 같은데...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다.
말 하는 것을 듣고 그 길로 바로 내려 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잘 난 아들은 사돈의 아들...
김동휘 장관이 우리 선배였구나. 그 당시 신문보도에도 이 양반의 빈틈없는 업무스타일과 모든 이를 감탄시키는 상황묘사 기록의 달인이었라는 기사들이 떠오름다.
그리고 선영사장의 부모님이 KAL기 사건의 희생 당사자였다니 금시초문임다. 본인에게 심심찮은 위로를 전하며 늦게나마 그의 부모님들 명복을 비네요.
지도 고난의 시기를 한참 지혼자 겪으며 싱가폴이니 홍콩이니, 중국을 한참 사업차 돌아다니다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2010년 이후였던 것 같심다. 힘들었다는 그 중간 시기 얘기는 띄엄띄엄만 알려줘서 상세한 흑역사는 나도 잘 모르네요.
내가 회사의 주재원으로 미국 온 지 한 두 주 후에 독일로 떠났군요. 여기서 유학생 사회와 주재원 사회와는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공부와 학위 통과에 대한 압박이 늘 있었겠네요. 칼기 사건 때 LA 지역 지사 상사 인원들도 교민들과 함께 공원에 모여 소련 규탄 대회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돌아가신 분들만 불쌍타 해야 하나...
법사가 회사주재원으로 미국생활 시작했다는 것도 첨 듣는 얘기임다. 법사 전담 취재통신원인 서토가 전에 얘기했던가.. 기억이 아물사물 하네요. 서토의 해태처럼 중견기업 주재원이었능교? 어떤 하늘의 교시를 받아 LA불교계의 거목으로 변신했는지 그 시작과 과정이 몹시 궁금하외다. 한 얘기 보따리 들려줍시요.
불교계 거목은 무슨, 어찌 하다 보니 부풀려지고 잘못 알려져서... 그냥 사람들이 너무 편견이 심해 보여 일러 주고, 참 안돼 보여 이것 저것 거들다 보니 그리 된 것 같심다. ㅎㅎ
법사는 삼미그룹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셨구만요. 이 그룹도 참 풍운의 이미지를 지닌 기업이었지요. 삼미 슈퍼스타즈, 특수강이 간판기업들이었던 걸로 기억되네요. 그 오너 2세 이름이 김현철씨였던가요? 이 양반도 뭐 하는지 연결되어 궁금하네요. 얼마전에 합천출신 정태수 한보 오너의 넷째아들이 파나마에서 국내 송환된 사건으로 또 오버랩됨다.
통폐합으로 대우에도 잠깐 몸을 의탁하셨구려. 법사에게는 여러모로 맞지 않았을 공간이었겠지만 사바세계는 확실히 체험했겠다 여겨짐다. 법사의 정신세계에 많은 울림을 줬을..
강주필님 말씀처럼 김박은 진짜 팔푼이예요
제가 대신 사죄드릴께요
기억의 오류도 조금씩 있겠고요
결혼전 남편 친구들과 크라운호텔 나이트클럽 갔을때 블루스 타임에
사모님 춤 한판 땡기실까요? 그런 장난스런 뉘앙스 였습니다
김재민씨 자체가 자유분방한데다 그 친구분들도 좀 그러시다고 느꼈었지요
친구분들이 신부라고 손 좀 잡아주고 좀 돌려주신거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엽기적일 정도로 자유분방들 하시구나 하고 느낀 정도였는데..
강주필님
부디 노여워 마시와요
말씀하셨듯이 정무감각이 영 제로입니다, 쯔쯔
제가 남편에게 평생 어떤 결핍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게 걸리고 미안했던지
이 기회에 남편이 작심하고 아지나모도를 뿌린것 같습니다
소설 작법에도 안맞고
팔불출 처럼 느껴지시겠지만
저는 저 msg를 별가루인양 생각하려구요..
참 부끄럽게도 결혼했지만
제가 사람을 잘못 본거는 아니더라구요~^^
너무 보기 좋아서
마음에 여운이 남아 어제 오늘 문득 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김박도 박여사님도
그리고 우리 동기들. 어부인 님들.
모두 다 저리 빛나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입니다..ㅠㅠ
어디부터 시작해야 될찌 모르겠씀..ㅎㅎ
독일로 떠난 시기도 내가 미국으로 떠났을 때와 비슷함..
나는 1982년 9월 말이나 10월초 쯤이었나 싶은데..
그러면 8월 말에 미국 지사로 나온 원익법사가 출국한 뒤, 그 다음은 김박, 그 다음은 내가 출국한 것 같네요.
그 당시는 그런 사정을 서로 몰랐지만 지난 세월이 묘하게 얽히는 것이 신기함다.
또 83년 1월경에 용수를 만나는 것도 재밋는 것이 나는 용수가 미국을 뜨기 직전에 김성중 동기 집에서 만나게 되었슴.
성중이는 아버님이 주유소 사업을 성공적으로 하고 계시고 하여 "엘에이의 황태자"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원래 성중이 경남중 26회라 당시
하여간 그 때 만났던 용수가 곧 출국을 해서 다시 유럽으로 가서 상국이와 김박을 만났다고 하니 그 무언가 참 신기함..
스위스 취리히에서 만난 조용수가 그 앞에 LA에서 지박도 참석한 송별연을 받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구료.. 36년 만에 알아진 비사외다.. 내 하루 앞 건너편 공간에 지박이 포진했다는 사실이 참 공교롭심다.
지박을 비롯한 그 인연들이 용수를 통해 그 다음날 내게도 유럽에서 전해졌다는 게 말이지요. 이전에 말한 이문동 연결 건도 있고보니, 지박사와 내가 의외로 삶의 공간 연결고리가 탄탄하다 여겨짐다.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에 옆자리에 젊은 이민 선배와 동석을 하게 되어 좋은 말을 많이 듣고 각오를 다지기도 하면서 왔던 것도 생각나고...
꾸준히 준비해 오던 유학의 꿈이 이루어지고 멀고 험할지 몰라도 목표가 분명한 상황에서 차근차근 시작하는 마당이었고 거기다가 소중한 인생의 반려자를 맞아 알콩달콩 시간을 보냈으니 그거야 말로 인생에 3번 찾아온다는 첫번째 기회?? 비스름한 것이 아니었겠나 싶으며.. 참 행복한 시간이었겠다 싶어 나까지 흐뭇해집니다
내 경우는 마음 속에 생존의식만 활활 타올라 그런 여유같은 것은 전혀 없었지요..
물론 부모님, 누님등 가족들이 미리 살고 있었으니 뭐 외롭거나 불편한 것은 없었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만 머리속에 가득했었슴..
우리처럼 황태자 소리 들으며 탱자탱자 하다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하세월하는 케이스도 있었지만, 소생도 막판에는 똥끗이 타니까 택시운짱도 하며 가까스로 쯩을 건졌지요. 한 65점 짜리 독일유학기라 하겠심다.
돈을 벌려고 하면 학문의 길로 가면 안되지요.석사만 하고 취업을 하는 것이 장땡입니다.
공부는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는 길입니다.
아니면 자기 사업에 골몰하고 있는 건지?
이 시기에 서토는 무엇을 하고 살았심니까?
수십년 후에 '블루오션.. 어쩌고' 하는 글을 쓰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기요?
만물은 계속 변하며 흐르니, 모든 게 고통 뿐인 우리네 이 세상을 어찌 벗어날꼬..
옥도사가 던져준 이 불법 화두를 안고서 계속 곱씹어 보리다.
47년 전 고3 이래 처음 만나게 된 불교용어라 그냥 뜻풀이만 대충 살펴봤소이다.
왜 이 화두를 던졌는지는 우리 옥도사가 언젠가 한번 풀어서 설파해 주시구려..
유학에 이은 결혼 전후 그리고 부부의 독일이주 과정의 이바구가 아주 상세히 잘 전개되어 있네요.
선을 보고 합하게 된 아주 전형/모범/표본/이상 적인 당시의 혼약으로 여겨집니다.
제행무상/제법무아 란 말이.. 2부 시작의 분위기에 아주 잘 어울리는듯 -^^
지박사 말슴대로.. 태종대까지 에서도 일찌기 자리를 같이 한 흔적이(?) 남아 있군요.
내가 봐도..뒷모습이 서토가 맞는듯 함미다.^^
조용수, 강성보 등의 동기들이 출연하고 있는 점이 신기하기도 하고요.
서토는 중매가 아닌 연애를 통해 와이프를 만났지 싶은 데 어떤 코스를 밟았능교?
저의 큰 형님이 앞장서서, 생전에 저희 부친관련 자서전을 발간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하는지 모르지만.. 당시만 해도 비교적 생소한 개념이었지요.
별다른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형제들과 분담하여 관련 자료를 모으는 등의 애로가 많았고..
시간과 공이 많이 소요됩디다.
쓸데없이 왜 만드려 하냐며.. 형제들간 이견이 있기도 했지만..
다는 아니지만.. 그나마 부친에 대한 전반적 회고가 될 수 있는 내용이 되더군요
새로 더해지는 가족들과 후손들에게 쉬이 참고되는 자료도 되고..
수백년 후에 발견된다면, 당시의 사회상이.. 역사책 보다 더 생생히 전개되는 사료가 될 수 잇겟다는 생각도-^^
암튼 지금처럼 세밀히 계속 잘 전개시켜 나가기 성원합니다.
그런데 이 무식한 모친이 '평생 바람 피우다 집안 다 말아먹은 당신 인생이 뭐 볼거 있노!' 하고 어느 날 방 치우는 체 하고 쓰레기 속에 다 버렸다는거 아입미까? 우리 아배가 그 홧병으로 세상 더 빨리 뜬거라고도 나는 믿고 있심다. 그 원고내용을 기록할 수 있었다면 서토 말대로 우리부친 세대의 생활상과 노친네의 생존투쟁기를 얼추 살펴 볼 수 있었을텐데 말임다.
애숙이 오빠인 우리처남이 그당시 마산 mbc 기자를 거쳐 sbs 라디오 방송 피디로 자리잡은 시절이었는데 장인 자서전 출간에 앞장선 걸로 기억함다. 마산에서의 출간 축하식에 처남과의 인연으로 지금은 거물 좌파방송인이 된 손석희가 참석해 나와도 인사 나눈 적이 있었네요.
아, 바람둥이 우리 아배가 오뉴월 한이 서린 모친 덕에 날려버린 그 육필원고 내용이 너무 아까와 죽겠심다. 내가 낑낑거리며 자서전이라고 쓰는 동력이기도 하네요.
여인들은 아일 업고 걸리고 머리엔 짐을 지고 남자 뒤에 따라 왔습니다.'
부부가 같이 나란히 걷는 것도 이목을 끌었던 시대가 있었는데,지금은 46세가 되는 조카를 자형이 광복동에
업고 갔는데,사람들이 쳐다보고 수근거리 하였지요~~~
우리야 중간에 낑겨서
어릴 땐 아버지를 왕으로 모시다가
나이 들어서는 와입을 여왕으로 모시고
머슴 내지 돈벌어오는 노예 비스름한 신세..
그러고 보니 서토의 집안이 아주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 같이 사위 놈들이 처가의 재산을 토지의 조 준구 같이 강탈하는 집안 하고는 천양지차입니다.
누가 "변태"인지 모르니 댓글도 가려서...ㅎㅎ
그당시 그런 글을 정리한다는 자체가 참으로 귀한 작업이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저희의 경우는 무슨 뼈대가 있는 집안이어서 그런 것은 전혀 아니고..큰 형님이 그런 분야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분이라, 책으로 묶어낼 수 있었다 돌이켜 집니다.
이제 김박사가 본격적 자서전 서술에 들어가니..저의 레드블루오션은 이후 2편의 군대생활로 마감하고..
이후로는 김박사 글에 댓글로, 시기에 맞게 추임새를 넣어 병진서술하는 형식을 택하도록 하겠습니다.
서토의 자서전 글도 서둘러 마치지 마시고 내 글과 병행해서 같이 가십시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어렵게 시작한 글을 어떻게든 후일의 기록을 위해 갈무리해 놔야지요.. LA시절 얘기가 마이 궁금함다.
격추라는 진실너머로..왜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다른 견해가 삽입되어 있어..
김박사의 국제적 시사 감각을 엿보이게 합니다.
어느 쪽을 진실로 선택할 것인가..는 사건을 보아내어 해석하는 인식에 달려 있겠지요.
실제적 사실을 알고나면..대개가 같은 통찰을 내보일 터인데..사실을 호도하는 세력들 때문에
그 정확한 내용은 늘 흐릿한 저편에 존재하게 됩디다만-^^
E.H. 카가 설파했듯이 역사적 사건이란 역사가가 의미있는 것이라 여기고 당대의 '시대정신'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절대적으로 영원한 실체적 진실은 없다고 여김다. 오직 재해석관의 대결 만이 있을 것이고, 지배적 해석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일정 기간만 유효할 뿐이지요.
김정남이 죽었다는 사실도 모두 알고는 있는데..누가 왜 죽여야 했는지..그 또한 저편 희미한 언덕에 있슴미다.
5.18때 전두환이 발포명령을 내렸다는데..그 자신은 아니라고 하니..그럼 누가 명령을 내린 것인지도 아리숭-
천안함이 피격되었다는데..누가 우짜다가 그리했는지도 여태껏 아리숭..
머 하나 제대로 똑바로 명확히 밝혀지는 사례없이 그냥 물탄듯 계속 넘어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시사에 그리도 관심이 많다는 서명식 동기조차(?) 이러한 정황에 대해
어떤 의문도 제기치 않고 잇으니..이게 도무지 우찌된 판인지 - ^^
너무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마치 내가 부산대 캠퍼스에 그 별빛이 반짝거리던 언덕배기에 있는 것 처럼
어둠 속에 풋풋한 풀냄새 같은 것 마저 나는 것 같심다..ㅠ
살다보이 깨달았는데
막상 중요한 순간에 여자들이 더 직선적인 같심다..
나는 큰소리만 쳤지 막상 중요한 순간엔 항상 삐질거렸습니다..
더 적극적이고 솔직한 쪽은 외려 여자들이던 것 같은데..
나만의 경험인지..
물론 '들이대기'의 장인인 수인공 같은 사람도 있지만..ㅋㅋ
그냥 넘어가기가 아쉬워 재탕 삼탕 읽고 있심다..
K2가 인물도 반반했는데도 너무 저돌적으로 내게 대쉬하니 말 그대로 잡아놓은 고기다 싶어 도리어 내가 찌질삐질 해집디다. 뭐 괜찮은 친구가 더 없나 하고요. 그러다가 박점주가 나타나 집안도 그렇고 독일행에도 더 적격이다 싶어 욜로 기수를 틀었지요.
난 지금도 K2를 배신한 그날 밤이 기억 속에 숨었다가도 때되면 나타납디다. 이 친구의 저주를 각오하게끔 말임다.
그냥 지껄인 말임미다. 안 그렇겠지만 혹 기분상하지 마소..
말이란게 참 위험한 것 같기도 하니.. 그냥 노파심에 하는 말이고..
게다가
찔끔 찔끔씩 댓글로 쓰다보이 또 오해의 여지가 더 많은 것도 분명한 것 같심다.
하여간 과감히 남자답게 들이댈 줄 아는 것이 '능력'인데 그게 부족한지라 아쉬움이 있고 부럽다는기 솔직한 심정이요.
이제 들이대는 힘마저 없으니 인생 쫑난것...
일단 돈이 없고, 두번째는 나에게 호의를 가진 여인도 네이버 검색해 내 나이가 예순일곱인걸 알고는 더이상 연락 안옴 ㅋㅋ
나도 이민수속 관계로 반년여 이상 떨어져 있게 되었는데
미쿡넘들이 대사관이며 비자발급 등에 은근 콧대가 쎄고 까탈스러워 혹시 먼가 잘못될까 노심초사 했지요.
마치 김박이 오만 걱정 끝에 JAL기로 도독을 하게 어레인지 한 그런 심정도 잘 이해가 됩니다.
ㅎ..
짐도 풀기전에 와락 끌어안는 장면이며
밀린 거사를 치르고 나른히 골아떨어진 깊은 잠..
글고 한모금 담배연기..
이거 머..
내 이야기가 아닌가 싶음..
자서전 or 회고록이 함 써 볼만한 것이란 것을 김박이 단단히 잘 보여주고 있심다.
인자 팍 늙어뿌릿지만 좋은 추억으로 미소짓고 삽시다.
끼어맞추는 것은 아닌데 지박과 나는 무슨 '초끈 이론' 처럼 그 시절에 서로 멀리 떨어진 쌍둥이적 삶을 살았던게 아닐까 여겨지기까지 하는구려.. 그렇다면 지금도 그럴란지.. 계속 두고 봅시다.
진회와의 각별한 우정, 이문동 시절 등등..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공유하는 것도 많고..
우찌 과거에 그리 한번도 조우하지 못했을까 외려 좀 더 신기할 정도입니다.ㅎ.
이후로 시간이 지나며, 점차 가장 팩트에 근접했던 이바구였음을 알게되면서는.. 서토를 보다 더욱
사랑하는(?) 모습을 내보이더군요.^^
2018년도 언젠가.. 김박사와 서토가, 산내의 옥자집을 선약 방문하여 담소를 나눈 사실이 있음에도..
그 사실이 만약 옥자가 어느날 김박사의 부산하숙집을 불쑥 방문하여 서토와 김박사를 우연히 만났다는
진실로 되어버린다면..
원래의 사실은, 강주필의 말대로 저 먼 하늘의 전설이 되고..
왜곡인 진실은, 그 어느 시대가 바라는 바대로의 각색된 역사가 되어버리겟지요.^^
황당한 가설 기반이 아닌 꽤 그럴 듯한 예견력으로 논리 비약이 없는 시나리오를 제시해 줄 수 있는 탄탄한 근거제공 능력만 갖춘다면 소수적 이견에 항상 큰 관심을 보이는 서토의 상상력과 호기심이 제대로 멋진 빛을 발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이다.
무슨 내용이건.. 글쓴이의 열정과 성의가 담긴 글은, 보다 큰 감흥과 동감을 일으킨다는 생각입니다.
나의 경우는 신혼이 아니고 결혼후 4살배기 아이까지 있던 싯점에 미국에 건너온 때문인지
이후 6개월여만에 아이와 함께 아내가 미국에 도착한 것이 매우 큰 안도감과 반가움을 안겨주긴 했으나..
당시의 장면이, 김박이나 지박이 묘사하듯, 애틋한 바와는 정확히 일치가 되지 않는군요.^^
암튼 유사장면들이 던져지니..오래묵은 기억도, 보다 선명히 살아나는 감이 있슴미다.^^
어떤 과정으로 결혼이 이루어졌던가 하는 사항들도-
재회감정이 미적지근했다는 얘기의 흐름을 봐서 서토는 미국땅에 떨어지자 말자 매끈한 외모를 바탕으로 총각인 체 하고 미국현지녀든 교포아가씨든, 아니면 한국유학녀와, 또는 이 모든 여인네와 한꺼번에 문어발식 초장 염문을 피웠을 가능성이 꽤 되어 보이외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식으로 세월이 한참 흘렀으니 여기 독자 동기들을 위해 한번 까보소..그리고 첫부인과의 결혼 과정도..
"북" 이란 단어만 나오면 그 즉시로 확 돌아버리기(?) 때문에...
암만 설명하고 자료를 갖다 대도.. 남북미 사안은 정말이지 설득이 잘 안됩디다.
파블로프 식으로..상식과 논리가 제대로 통하지 않게 되기 때문인데..이곳 대학 동문회 분들도 정확히 같은 모습 - ^^
그러니..김박사 같은 분만이라도 행여나마 그런 혼돈에서 깨어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저는 대만족-^^
많습디다만..사실 저는 그러한 간주에, 항상 의아함 혹은 섭섭함이 많슴미다.
남녀를 불문, 사람과 사람간 만남의 인연을 중시, 그 과정 중에 나누어지는 진솔한 대화를 즐기며..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에 항시 성의와 예의를 다하려 나름 노력해 가는 바..
그런 사람을, 한갖 시중의 바람둥이로 간주해서야 말이 되겟슴미까.^^
대화가 통하는 사람과는.. 골프나 바둑같은 놀이를 같이 즐기기도 하며 보다 밀접한 사이로 발전해가게
되는 바.. 때로 그 상대가 이성일 경우는..자연스레 교접행위가 일어나기도 하는 것일 뿐 -
설령 상대가 그런 요구를 한다해도.. 결코 발생할 수 없는 일이 되는것.
따라서 이성과의 교제에서도..굳이 교접행위를 하려기 보다는, 주제를 둔 대화나
아니면 당구나 골프를 같이 친다거나 하며 친한 관계를 유지해가는 편임미다.
어찌보아 이렇듯 단순한 일인데..그걸 가지고 이렇니저렇니 하는 경우에 접하다 보면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울 때가 많습디다.
그러나.. 우짜겟슴미까. 사회전체가 그런 인식이라면.. 그냥 죽은 척하고 따라가야 겟지요.^^
이 무슨 희한한 궤변이요..ㅎㅎㅎ
마..
나도 따라하고 싶소만 능력이 안됨을 한탄할 따름임다..^^
항상 댓글로 묘사되는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 조심, 또 조심 하겠심다.
물이 만땅고 된 상태하고 말라 있는 상태하고 여자 보는 자세가 다릅니다.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간 사례가 있슴미다만..아내가 온 뒤로 곧바로 그런 귀한 인연을 고의로 끊어야 했지요.
남남이 무엇이며, 부부가 무엇인지, 그리고 남녀는 무엇인지..참....^^
보게 한다 거나 만지게 한다 거나 신체적인 접촉을 오직 둘 사이에서 행사를 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한쪽이
성관계를 요구 할 때 특별한 요구가 없는 한 이에 응해야 하며,이유 없이 고의로 오래 동안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혼의 수순을 밟게 되지요.그러니 그냥 동거 중 성행위와 결혼 생활과 거시기의 무게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본처가 나타나면 동거녀는 물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가건물과 둥기된 건축물이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가건물은 망가지면 뜯어내지만,등기 된 것은 수리 해서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추세에 맞춘, 미래지향적 개선된 혼인계약서 초안을, 길영공께서 한 번 만들어..
만방에 공지해 주시기를-^^^
누구말대로..얼굴을 마주 보며 말을 나누어도 오해가 생기는 판이니..
글로 표현하다보면 공연한 헛 오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당연히 있는것 아니겟슴미까.
하지만 실제로 문제가 있을 경우라 하더라도.. 그런 경우, 별도의 채널을 통하여 개인적인
접촉을 통하여 이의를 제기하지..공공의 장에서 대놓고 언급을 할 리가 있겠슴미까.
아닌말로 누군가 서토를 바람둥이로 취급한다해서..그게 머 그리 문제될게 있겠슴미까요.
스스로 그런 자가 아니면 그 뿐인 것이지-^^
대화를 조금이나마 더 재미있게 하려면..김박사나 저나..상호 염화시중 미소를 믿어야-^^
나는 옛친구들이 지금도 바람둥이, 팔푼이, 변태놈이라 불러줄 때 오히려 반어적으로 더 으쓱해지던데 서토도 좀 그런 망가짐의 쾌감을 느끼는 속성이 제법 있는갑소.. 뭐 마조히스트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바람둥이 근처도 못가는 지금의 병들고 쇠잔한 몸에 그런 후카시를 넣어 불러주는 것은 참으로 눈물나는 고마운 격려사라 여겨지지 않습디까..
고임금 발탁되어 미국에 오게 된 여성이었던 바..
업무적으로 우연히 연결되어 대화를 하는 중에..아주 실력이 있어보여 결국 만나게 되는데..
당시 미국에 건너나와 있던 처지가 서로 아주 유사하여, 동감대가 있었고..그러다보니 빠르게 가까워졌댓슴미다.
근자 지박사가 즐거이 등산하고 있는 코스가.. 당시의 주된 데이트 장소였지요.^^
그녀 덕분에.. 일찌기 싱가폴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85년도 당시 이미 싱가폴은 미국보다 사회적 인프라가 더 발전해 있었다는 사실과..
싱가폴 국립대학이 서울대보다 훨씬 학력수준이 더 높다는 사실도-^^
나도 '81년 신촌 하숙집에서 대장할 때 대만 아가씨 하나가 연대 한국어 어학코스 다닌다고 우리 집에 들어왔었네요. 이름은 '시수청'이라 합디다. 인물은 미모가 아니었지만 하도 붙임성이 좋아 길 같이 가다가도 '오빠~ 쌀랑해요' 해싸 옆에 길가던 한국 유흥가 아가씨들이 '우히히~' 하고 놀리던 장면도 생각남다.
아그는 참 총명했네요. 한국어는 금방 배우고.. 영어는 원래 잘했고..
동갑인데다.. 비슷한 싯점 업무차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다는 동질성에(?).. 서로의 벽이 빨리 무너졌겠지요.
같이 무역계통 업무를 하는 사람으로서.. 그녀의 업무실력이 너무나 뛰어난 점이 부럽습디다.
게다가 영국식 표준어로 하는 그녀의 영어가 워낙에 돋보였는지..어디를 같이 가던, 주변 미국인들이
모두들 입을 대며 관심을 갖는 바람에..그런 기억들이 여전히 많이 남네요.
마치..오래전 서울 아가씨들이 부산에 내려와 서울 말씨로 말하면..경상도 친구들이 모두들 침을 흘리듯-^^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떠날 때 짐이 많아.. 와이프와 함께가서 도와주며 L.A 공항에서 배웅해 주었지요.
당시 어느정도 눈치를 챘던 와이프가, 지금도 때로 그 이야기를 꺼내며 나를 윽박지르곤 함미다만.^^
그런데, 그랬던 그녀를 이후 20여년이 지난 즈음에.. 우연히 미국에서 희안하게 다시 조우하게 됩미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 ^^
오 마이 갓...
진짜 '교접'이 무신 '악수' 비슷한 것이라 생각하는 모냥이요..
허..
초창기 싱가폴 여인과의 로맨스를 알면서도 모른 체 하며 띄엄띄엄 보아준 그 심정이.. 참 서토나 나나 젊은 시절 파트너를 많이 아프게 한 못된 인간들이라 여겨짐다.
수십년이 흘러 그녀와 희안하게 조우한 사연이 그럼에도 다시 침흘려지며 기다려지네요.
다만, 길영공께서는, 혼인에 대한 전통적 인식과 문화를 지켜내고자 하는 남다른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고.. 또한 구하지 않았을 것으로 저는 사료합니다.
적어도.. 배우자에 대한 예의와 의리를 지켜온, 극히 정상적 남성이자 남편이었던 것.
반면에 서토의 경우는.. 젊은시절 그런 의식이 극히 부족했고, 또한 철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
일련의 바람직하지못한 사건들로 간주된다 사료합니다. 무슨..도화살이 있어 그런 것은 전혀-.
지금의 어려운 여건을 초래, 늦은 나이에도 고생을 많이 하고 있슴미다.
때로..젊은 시절 철없던 언행이 돌이켜지며..그럴 때마다 극히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에..
등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경우도 잦습니다.
의도적으로 누구를 아프게 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상대의 심정이 아플 수 있다는 점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던 큰 아둔함과 부족함이 있었다는 반성이 됩디다.
그래서인지 그들 모두가.. 지금의 서토를 위한 보살이자 부처였었다는, 뒤늦은 고마움의 깨침마저도 -^^
나 역시 그 여인들의 내밀한 도움과, 그 와중에서도 중전의 포지션을 한번도 소홀히 한 적 없었던 의연한 박점주의 공덕으로 요렇게 친우들과 늙으막에 댓글놀음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네요..
그와 유사한 사례를 재미삼아 계속 쫌 만들어보라(?)며..애둘러 서토를 공연히 부추기시는듯 함미다만..
없었던 이바구를 우찌 계속 만들어 낼 수 잇겟슴미까요.^^
그래도 교접을 악수 정도로 여겼기에(?).. 그 정도에 그칠 수 있어 다행이었지
누구처럼, 무슨 대단한 일로 여겼다면..그에 전적으로 매진하느라..사태가 훨씬 더 확대되어..
지금쯤은 벌써 무덤에 들어가 누워 잇겟지요.^^^
아주 옛적 초딩 때에는 요상한 단어만 들어도 흥분이 될라고 하던 적이 있었지요...
서토의 단어를 듣고 있노라면 왠지 요상하게 그 초딩적 기분이 살살 되살아나는 것 같십니다..
사주에 물水자가 있어야 이성이 잘 꼬이고 따른답니다.
서토나 김박은 아마 물水자가 둬개 낑겨있는 모냥이요..
나는 모르긴해도 나무木, 쇠金 머 이런 것만 잔뜩 있었는지 우옜는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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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各有主(모든 것에는 그것에 맞는 주인이 있다)란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는 또 제수씨가 소환령을 내려서 김 박사를 교화소로 보낼까 심히 걱정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