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17. 대학원 후반부와 짧은 취업 후 단신 渡獨 준비 시절

백조히프 2019. 4. 3. 17:17


17. 대학원 후반부와 짧은 취업 후 단신 渡獨 준비 시절

 

 

필자 주: 동기 여러분이 많은 성원을 보내주신 제 졸고 회상록은 17편 작성을 끝으로 1부를 중간휴식도 필요할 듯해 잠정 완료하려 합니다. 예정된 다른 동기들의 자서전 소개들이 한 바퀴 돌아 끝나면 그 때 독일유학 시절과 귀국 후 직장시절의 회상기억들을 끌어모아 2부를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이 점 양지해 주시기 바라네요.

 

<1981년 전반부의 대학원 졸업과 후반부의 느긋한 시절>

 

1. 빡빡했던 논문제출 시험준비

 

국내에서는 말도 안되는 정권 도적질이 일어난 상황에서 암울한 우리의 정치적 앞날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가 오리무중인 상태에서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듯 ‘80년도 저물어 갔다. 난 이해 겨울 미국도 가지 않을거면서 주위에서 모두 열을 올리는 토플 강좌를 연대 내에서 들어봤다. 점수 올리려는 목적보다 영어 실력을 좀 더 정교하게 닦아보려는 것이 내심 의도하는 바였다.

 

다른 한편 ‘813월에 내정된 마지막 학기 석사논문을 쓰기 위한 자격인정 시험을 준비해야 하기도 했다. 시험과목들은 앞선 석사코스에서 수강한 전과목들이었다. 꼴에 연대라고 필요한 학점 획득만 하면 당연히 논문은 자동뻥으로 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80년 여름 3학기를 마치고 이 시험을 쳤는데 시원치 않은 준비 때문이었는지 꽤 많은 과락이 나와 보기좋게 한학기 낙제했다. 그래서 같이 입학한 우수 동료들보다 한학기 더 이수해야 하는 학기 재수의 코오스를 밟아야 했다. 뭐 나만 그랬던 게 아니고 상당한 수의 낙오자들이 있어 그리 외롭지는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유명 구성원들과 주요 저작>

 

이 기회에 좀 더 내실을 다지자 하고 가을까지는 조직행동론에서 자주 언급된 사회사상사 책들을 많이 찾아 읽었다. 이 때 독일의 유명한 좌파철학자들로 계보를 잇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주요 인물(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벤야민, 마르쿠제, 하버마스, 프롬 등)들의 사상에 대한 페이퍼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으로 유명했던 칼 포퍼를 만날 수도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며 위에 언급한 토플공부와 함께 이번에는 자격시험에 또 떨어져서 안된다는 마음이 자연히 일어 지난 번에 과락했던 과목들을 중점으로 파고들며 그해 겨울은 연대 도서관에서 사시 준비하는 고시생들처럼 제법 열심히 죽쳤었다.

 

특히 약한 생산수리경영(OR), 경제수학, 통계학, 재무투자론, 원가회계 같은 과목들을 좀 더 집중적으로 시간배정하여 살펴 보았다. 해당과목 교수들은 대부분 두꺼운 영어원서들을 핵심 텍스트로 추천했지만 두달 남짓의 기간 동안 술술 읽어가는 영어실력도 갖추지 못한 터에 그 책들 갖고 공부할 여가가 없었다.

 

그래서 해당과목의 전체 내용흐름과 주요 개념들을 좀 더 신속하고 명료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국내 저자들의 한국어로 된 책들을 잘 골라 얼른 읽고 습득한 뒤 형편이 되면 원서들을 띄엄띄엄 비교하면서 접촉해 보자는 계산을 했다.

 

결과적으로 이 계산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연대 김기영 교수의 생산수리경영, 서울대 김정식 교수의 재무투자론과 통계학, 이화여대 이효재 교수의 경제수학 책들을 통해 앞선 학기들에서는 제대로 된 배경지식이 부족해 따라가기가 막막했던 이 과목들의 전체 흐름을 파악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김정식 교수의 책들은 예전에 조순 교수의 경제학 원론책을 읽듯 그 풍부한 예시들을 통한 여러 딱딱하고 모호했던 개념 설명들에서의 명쾌함에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가며 눈물이 다 날 정도였다. 왜 이런 책들이 진작 눈에 띄지 않아 그렇게나 오래 암담한 세월을 보냈을꼬 하는 뒤늦은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입학면접시 독일어 관련 돌발 질문으로 날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던 김기영 교수도 자기가 쓴 저서를 통해 선형계획(LP, Linear Programing) 비선행계획, 게임이론 등등 수학적 기법들을 이용한 문제해결 방식에 대한 나의 무지함을 많이 깨쳐주었다.

 

3월 초에 실시된 자격시험에서 나는 생산수리경영 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 대충 합격했지만 이 과목 만은 제법 열심히 공부했음에도 수학적 사고와 계산능력이 애시당초 약한 내게 또 거의 과락 수준을 안겨주었다.

 

할 수 없이 비슷한 수준으로 이 과목을 망친 동료 원우 몇이서 돈을 모아 양주 한병 산 뒤 해당 추교수집을 방문해 인사 올리고는 논문 좀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한 뒤에서야 자격시험을 가까스로 통과했다.

 

2. 국제경영 전공의 논문작성 시절

 

2년 간 4학기에 걸친 대학원 수업과 학점들을 이수하고, 논문자격시험까지 통과한 후에야 드디어 논문을 써서 제출하는 마지막 학기가 내게도 찾아왔다. 일단 전공파트는 정구현 교수가 지도교수로 있는 국제경영 파트로 하고 테마를 뭘로 할까 하고 한 며칠 간 궁리에 들어갔다.

 

같이 논문 쓰는 친구들 중 가장 많은 이들이 회계파트를 선호했고, 그 다음이 마케팅, 그리고 인사관리였고, 국제경영 쪽은 딱 나 하나 뿐이었다. 그 당시 연대 상대에는 국내 공인회계사 시험 출제위원이기도 했던 송자 교수가 건재해 많은 친구들이 이 양반의 강의빨과 영향력에 솔깃해 석사학위 논문을 회계전공 테마로 해서 많이 제출했다.

 

그 다음 마케팅 분야도 국제경영과 관계있는 국제 마케팅이 아닌 일반 마케팅 쪽이었는데 회계 쪽이 아닌 친구들은 이쪽을 두 번째로 많이 선택했다. 아마도 다양한 케이스 스타디를 많이 한 탓이었는지 이쪽에서 논문테마 감을 많이 찾을 수 있어서 그랬으리라 여겨졌다.

 

조직행동론이나 인사관리 분야는 여학생들이 어떤 부분에서 끌렸는지 논문제출시에 많은 선호감을 보였다. 짐작컨대 이쪽은 인문학과 사회학 분야와 연관이 많아서였는지 학부 시절 이 분야 전공 여학생들은 십중팔구 이쪽을 선택했다.

 

국제경영 파트는 그 당시만 해도 국내에 소개된 지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다른 파트들에 비해 여전히 일천했다. 거기에다 내게 두 학기에 걸쳐 AB+ 학점도 주지 않을 정도로 깐깐한 정구현 교수가 지도한다 해서 그랬는지 누구 말대로 정무적 판단이 출중한 연대 경영학과 졸업의 성골들은 이 분야에서 논문 쓰기를 꺼리는 듯 했다. 대부분이 회계와 마케팅 쪽을 선택했다.

 

나는 진작부터 이 분야 공부가 (세계사와 세계인문지리 좋아하는) 내 적성에 제일 잘 맞는 듯 했고, 정교수를 학문적으로나 교수 자질로나 연대 상대 내에서는 가장 흠모하는 입장이었기에 논문 작성과 통과의 용이함 같은 것은 다른 친구들처럼 영리하게 따지지도 않고 바로 이쪽을 택했다.

 

정교수는 자기가 내심 키워보려 했던 우수 제자들은 마케팅이나 회계 쪽으로 다 가버리고 자기 수업 중에 질문 피하려 고개만 숙이고 있던 쭉정이 김모가 유일하게 이 분야 논문 한번 써보겠다고 덤벼드니 약간 김새며 난감했던 모양이었다.

 

큰 기대는 걸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테마 정해 프로포잘이나 한번 내보라고 한 3주를 주었다. 난 이 기간 동안 국내외 국제경영 전문 저널들에서 소개된 이 분야 논문들을 찾아내어 읽어보며 어떤 테마를 정해야 지금 읽고 있는 페이퍼들을 유용하게 잘 인용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적절한 테마 찾기에 골몰했다.

 

한동안 논문 테마감을 찾으려 이런저런 국내외 국제경영 파트 전문 저널들을 찾아 읽다 국제경제학 교과서에도 소개되었던 레이몽 버넌(Raymond Vernon)제품수명주기(PLC, Product Life Cycle) 이론과 국제교역의 입지적 형태변화라는 테마가 딱 눈에 꽂혔다. ‘바로 이거다!’ 하는 감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원래 PLC 이론은 일반 마케팅 분야에서 제조된 제품도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신제품 도입기->성장기->성숙기->소멸기의 수명주기가 있다는 전제 하에 이 시기에 맞추어 제품, 가격, 촉진, 유통4요소로 구성되는 마케팅 믹스 전략이 각 시기에 따라 적절히 변화하며 동태적으로 구사되어야 한다는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이 이론을 당시 하버드대 교수였던 R. 버넌은 국제교역이론으로 확장하여 선진국과 중진국, 그리고 후진국 사이에 벌어지는 교역형태 변화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였다. 예를 들어 컬러 TV 같은 전자제품의 첫 개발은 신제품 개발을 위한 기술적 혁신 인프라가 우월한 미국이나 유럽국에서 발생해 중진국이나 후진국으로 수출된다고 했다.

 

그 다음 시장이 확대되는 성장기를 거쳐 생산기술이 표준화되는 성숙기에 이르면 이 때는 제품 경쟁력이 값싼 가격여부에 가장 크게 의존하기에 최초 개발국인 미국 소재의 기업들은 임금이 비싼 자국에서는 더 이상 생산할 수가 없어 임금이 싸지만 대량생산기술 능력이 있는 한국이나 대만 같은 곳으로 입지를 옮긴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컬러 TV의 최초 수출국이었던 미국이나 유럽은 이제 한국산이나 대만산 제품의 역수입국이 된다는 얘기였다. 이 이론에 따라 이제는 한국과 대만보다도 더 싸게 생산할 수 있는 중국과 베트남 등이 이런 전자제품의 최대수출국이 되는 것을 보면 버넌은 PLC 이론을 일찍부터 무릎을 탁 칠 정도의 매력적인 국제교역 이론으로 변신시킨 것이었다.

 

나 역시 당시 이 이론에 홀딱 빠져 제품수명주기 이론을 통해 본 국내 전자제품들의 교역형태에 관한 실증적 연구라는 제법 긴 제목을 붙인 논문의 프로포잘을 정교수에게 제출하며 면담을 나누었다. 이 양반도 쭉정이가 자신의 처음 기대보다는 제법 뭐 좀 있는 것 같은 테마를 갖고 오니 약간 안심이 되었는지 , 생각보다 테마 괜찮아 보이네. 김재민씨, 한번 잘 엮어 보세요하며 격려를 해주었다.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한국산 컬러 TV가 미국에 소나기 수출하여 덤핑제소 판결을 미정부로부터 받는다는 등의 기사 보도가 자주 나던 때라 이 이론은 이미 개념적으로는 입증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시계열적 수출입 통계를 통해 이 현상이 확고부동함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기만 하면 되었다.

 

한 2주일간 강남에 있는 관세청과 여의도 국회도서관에 들려 4가지 전자제품(라디오, 컬러 TV, 세탁기, 냉장고)들의 최근 10년 간의 방대한 연도별 지역 수출입 통계치 자료들을 일일이 목적에 맞게 분류 기입하고. PLC 관련 연구 페이퍼들을 복사하여 끌어모았다.

 

그리고는 내용목차와 입증할 가설들을 나름 영감을 받은 듯 그럴 듯하게 세워 말 그대로 실증적인 통계들을 통해 이 이론이 지난 10년 간 한국 전자제품들의 수출액 변화를 설명하는 데 상당히 그럴 듯한 설명력을 가진다는 결론을 도출해 논문을 마무리 지었다.

 

정교수는 쭉정이가 기대이상의 글빨로 이론 소개 부분을 제법 정교하게 서술하고, 학술적 냄새가 좀 풍기는 가설 수립도 그럴 듯하게 끌어낸데다, 발로 뛴 흔적도 꽤 많이 보이는 필드 리서치의 발품팔이에도 만족감을 보였다. 내가 자기 수업시간에 후배 학기생들 앞에서 본 논문을 목차 소개하며 예비 발표하자 수고 했네!’ 하며 여기서는 이미 통과되었음을 시사해 주었다.

 

결국 논문의 본 심사에서도 자신감이 붙은 나의 발표와 의례적으로 행해지는 다른 심사교수들의 비판적 태클도 전공이 달라서였는지 그리 심하지 않은 채 내 논문은 큰 수정요구 없이 통과되었다. 그 순간 지난 2년 여의 신촌 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새로운 공부가 아득하기만 했던 내게도 이렇게 세월이 가니 석사쯩도 하나 떨어지는구나 하고 여겨져 그저 감회가 무상하기만 했다.

 

3. 석사학위 취득 후 직장 취업과 독일유학을 갸름하던 시절

 

‘818월 말 하계졸업식을 통해 난 5학기에 걸친 대학원 경영학과 코스를 마쳤다. 같이 졸업한 원우들끼리 어이 김석사, 최석사!‘ 어쩌고 하면서 말이었다. 졸업식장에는 옆동네에 있던 여동생이 찾아와 기념사진도 찍고 식사도 하며 나름 한 시절의 방점을 찍는 자그마한 세레모니를 같이 가졌다.

 

대학원 생활 중 타대학의 타과 전공자였던 육두품들과 연대출신이지만 비경영학과 졸업의 진골들과는 지내다 보니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서로 자연스레 가까워졌는데 이들이 나의 졸업을 축하해 준다며 자리를 마련해 줬다.

 

특히 대구쪽 국립대에서 지리학을 전공한 후 나보다 한 학기 늦게 여기 대학원에 온 K는 사람이 다정다감하면서도 한 살 위 내게 친형제 같은 우애 속에 조언을 많이 해준 특급 멘토같은 존재였다. 자신이 조교생활을 하며 보고 들은 경영학과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과 다른 학우들에 대한 동향들에 대해서도 아는 만큼 항상 거리낌 없이 잘 전해 주었다.

 

이 친구를 통해 또 다른 원우 중 진골 2명을 더 알게 되어 우리 4명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한 패거리처럼 서로 격의없이 지내게 되었다. 대학원 후반부 생활은 이들이 있어 초반의 외톨이 같은 포지션에서 벗어나 인간관계에 있어 훨씬 더 풍성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선입선출식으로 내가 제일 먼저 석사쯩을 얻게 되자 이들은 어느 날 나를 신촌 역 앞 자부동 방석집으로 데려갔다. 나중에 몇 번 구경하게 된 요정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맥주 한 박스, 과일 및 마른 안주, 부침개 등이 기본으로 오른 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에 방문객 수에 맞춘 여인 도우미들이 들어와 옆에 앉아 그런 대로 약식의 부어라, 마셔라분위기는 조성 되었다.

 

도우미 아그들은 자기 파트너를 챙기면서도 매상을 올리기 위해 과장된 호들갑을 떨며 맥주 소비에 열을 올렸다. 아무래도 이런 쪽에 이골이 나지 않은 책상물림 범생이들이라 좀 소심하게 술잔을 주고 받으며 학교쪽 얘기나 하니까 도우미 중 왕언니인 듯한 친구가 분위기 반전을 위해 자기는 물론이고 다른 도우미와 우리에게도 상의탈착을 제안하는 게 아닌가.

 

이때부터 분위기는 순식간에 점입가경으로 빠져들었다. 남자들은 런닝, 여인들은 가슴가리개만 찬 채 술잔 돌리기가 가속이 붙고, 노래판이 전개되자 젓가락 장단이 난무하고 영화에서나 소설 등에서 흔히 묘사되던 니나노 집의 전형적인 풍경이 그대로 펼쳐졌다.

 

막내뻘 쯤 되어 보이던 도우미가 무슨 한이 서렸는지 그 와중에 혼자 초고속으로 술을 마신 채 만취되어 옷을 다 던져버린 올 누드가 되어 예상보다 훨씬 빠른 클라이막스의 아싸리 판을 만들어 버렸다. 그 친구의 파트너이던 우리 중 누구는 술김에 이게 웬떡이냐 하며 자기도 바지 벗어가며 한 보조 맞춰주려 들었다.

 

K와 나는 이건 아니다, 까딱하면 주인집의 상술에 놀아나 옴팡 뒤집어 쓰겠다하는 공감대가 바로 생겨나 판을 마무리 짓는 수습국면으로 서둘러 몰아갔다. 우리 두 사람은 이런 타입의 유흥문화는 확실한 물주가 없을 때는 질정없이 즐겨서 안되는 것임을 서로 나름의 한계를 아는 성격상 잘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해프닝이 있은 후 나는 경제경영연구소 쪽에 취업을 하려 신문 광고에서 하반기에 있다는 국제경제연구원의 석사급 연구원 모집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졌고, 다른 한편 독일대학들에 입학허가(Zulassung)에 대한 안내를 요구하는 문의서신들을 작성해 보내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 같은 게 없었기에 독일대학들의 주소나 문서 수신처들에 대한 정보를 남산에 있는 독일문화원(괴테 인스티튜트)’을 방문해 입수해야 했다. 독일 전역에 퍼져 있는 50 여개의 4년제 독일 국립대들의 주소, 제공 커리큘럼, 경영학과의 존재 여부를 파악한 뒤 알만한 도시 소재의 10개 대학을 골라 문의 서신을 보내었다.

 

서신은 외대 독어과 시절 김광요 교수 수업에서 다룬 독작문과 문서작성법책을 찾아 공식편지 문틀을 참고하며 작성해 나갔다. 오류가 한참 있었을 서신내용이었겠지만 그래도 혼자서 낑낑거리며 타이핑 하여 A4 한페이지 반 정도의 독일어 편지를 작성했다는 게 내심 대견스러웠다.

 

항공우편으로 각 대학들에 보낸지 한 2주 후부터 프랑크푸르트, 쾰른, 베를린, 함부르크, 하노버, 도르트문트, 뮌헨 대학교에서 커다란 봉투에 안내 브로슈어들을 가득 담은 답신들이 속속 내가 있는 하숙집 주소로 도착했다. 그냥 혼자서 얼기설기 엮어보낸 독일어 문장들을 용케도 알아보고 친절한 답신과 함께 ‘Made in Germany’의 원단 브로슈어와 카탈로그들을 인심 좋게 보내준 독일대학들의 신속한 반응이 신기하면서도 뿌듯했다.

 

, 이제는 독일행이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어, 정구현 교수가 어느 날 자네, 대구 계명대에 내려갈 생각은 없는가?’ 하는 제안도 신경 써주셔서 대단히 감사하지만 저는 지금 독일유학을 먼저 생각하고 있심다하고 정중하게 거절할 정도였다.

 

<‘81년의 주요 추억들>

 

1. 생산성본부 인턴과 국제경제연구원에의 입사

 

국제경제연구원 응시와 독일 유학건을 동시 병행하며 추진하던 중에 K로부터 생산성본부에서 기업체 방문의 설문과 인터뷰 조사가 함께 이루어지는 필드 리서치 프로젝트 수행에 투입될 석사급 인턴 연구원 의뢰가 과사무실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받았다.

 

나는 을지로에 있던 생산성본부를 이력서와 졸업증명서를 들고 방문해 담당 실장을 만나 첫 인사를 나눈 뒤 옆 방에 있는 본부 대표이사장에게도 찾아가 신고 인사를 했다. 그후 전체 5명 정도의 다른 인턴들과도 인사를 나눈 후 40대 중반의 실장으로부터 본 프로젝트의 성격과 수행기간, 조사대상 업종과 소속기업명이 담긴 문건들을 브리핑 속에 전달 받았다.

 

우리에게 맡겨진 미션은 생산성본부 측에서 만든 설문지를 전국 각 공단에 소재하고 있는 주요 기업들에 보낸 뒤 각자가 맡은 파트 기업들로부터 회수관리를 하고, 회수가 잘 안되는 중요회사일 경우 직접 방문하여 설문지를 직접 건넨 뒤 담당자들과의 면담을 통해 회사의 조직운영 분위기를 추가로 리포팅하는 일이었다.

 

나는 집이 부산이니 당연히 창원공단 쪽을 맡아 방문기업 리스트를 작성해 그 기업들과의 면담 약속을 한 뒤 한 일주일 간을 부산에서 왔다갔다하며 미션작업을 수행하였다. 앞으로 자주 있을 현장탐방 후 담당자들과 인터뷰 하는 노하우를 쌓는데 아주 괜찮은 경험을 쌓게 해주었다.

 

나의 격의없이 비공식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매끄럽지 않은 어투로 소탈하게 인터뷰원에 접근하는 뽄새가 의외로 그들에게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을 풀게 하여 마치 비공식적 자리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진솔한 대답들을 제법 많이 건질 수 있었다. 36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이 나는 그런 인터뷰 파트너들을 한일합섬, 유한양행, 한국철강 같은 기업들 방문에서 만났다.

 

10월 중순 무렵 국제경제연구원에서 연구원 모집한다는 공고가 떴고, 나는 이력서와 학력 졸업 및 성적증명서, 석사논문 한 부를 챙겨 보냈다. 1주일 후 서류 통과했기에 필기시험 치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때는 생산성본부에서 회수된 설문지들과 인터뷰한 내용들을 정리해 최종보고서를 작성하는 시기였지만 나는 본부 팀장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반나절 정도의 외출을 허락받았다.

 

시험은 국제경제학, 국제경영학, 영어 정도였던 것 같은 데 모두 서술적 답안이나 독해문을 쓰는 것들이라 망쳤다는 생각은 들지 않게 무난하게 치뤘다. 한 일주일 뒤 전화해 보니 합격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이때부터 나는 한동안 시험불패의 사이클을 타게 되었다는 사실을 독일가기 전까지 겪으며 알게 되었다.

 

서울역 앞 대우본사 건물에 있던 국제경제연구원에서의 면접은 아주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흐뭇하게 마쳤다. 늦어도 11월 말까지는 발령날 것이니 연락갈 때까지 신변정리 잘하고 기다리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11월 중순 무렵 정부의 공기관 통폐합 조처의 일환 속에 국제경제연구원도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와 통합하기 위해 해체된다는 신문 발표가 났다.

 

잘 나가다 돌뿌리에 걷어채인다더니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국제경제연구원 측은 언제 통폐합 될 지를 자신들도 모르니 신입연구원 13명의 발령은 무기연기 되었다는 다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해대었다. 제기랄, 했었지만 빠른 통폐합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단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2. LG 희성산업 야구팀에서 우승 맛보다

 

이 무렵 어정쩡한 기다림의 세월 속에서 독일유학 준비나 좀 제대로 해놓자는 생각으로 남산 독일문화원의 독어회화 초중급반에 동시 등록을 했다. 독일어와 떨어져 산 지 한 2년이 되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내가 얼마 안있어 발군의 실력을 보이자 초급반에서 주로 음대쪽 유학을 꾀하는 여학생들은 저 사람이 누굴꼬 하며 많은 관심을 내보였다.

 

중급반에서는 쾰른 출신 젊은 미모의 독일인 여선생이 ‘Brenpunkt’라는 시사 독일어교재로 수업을 진행했는데 여기서는 다양한 분야의 시사적 어휘력을 늘리고, 지문을 읽고 독어로 요약하는 쓰기 연습을 많이 시켰다. 후일 독일 가서 대학내 어학코스을 거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독어 읽기와 쓰기 내공을 단련했다. 빤질하지만 약간 차갑게 생긴 여선생에게도 한번 대쉬할 염을 품기도 했으나 사람들로부터 외국인 남자 애인이 있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듣고 제 풀에 그냥 포기했다.

 

다른 한편 이 시절을 보내며 삼은 한가닥 생활의 낙은 희성산업 야구팀에 묻혀 매주 주말에 있는 야구시합에 참가하여 뛰는 것이었다. 이 즈음은 나의 매서운 방맹이 실력이 물오른 때라 이 팀에서 1번 아니면 3번 타자로 나갔고, 포지션도 캐처보다는 땅볼 포구 후 송구 능력을 높이 사 유격수로 출전할 때가 많았다.

 

동네 야구에서 세 게임당 1번 정도는 더블 플레이를 성공시키는 정도였으니 아마야구시절 중에서는 최고의 기량을 보였을 때라 할 수 있었다. LG그룹 계열사 야구 리그에서 희성산업은 항상 중위권이었고, 반도상사가 중상위권이었으며 구미에 있던 LG전자 1팀이 부동의 최강자였다.

 

그 해 가을 리그에서 희성산업팀에는 마이클이라는 미국인 거포 한 명이 합류했다. 희성산업에서 해외광고용 카피문건 작업을 담당하던 뉴요커 마이클은 한국어도 제법 하는데다 고교시절 야구선수로도 좀 뛰어봤다 했는데 우리 동네야구에서는 그야말로 외국인 용병으로서는 대어급의 발군이었다. 4번에다 센터를 맡겨놓으니 우리 팀이 4강까지는 너끈하게 올라갈 강팀이 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슬슬 욕심이 생기는지 4강권에 근접하자 옥달혁 형이 어디선가 선수출신들도 포섭하여 야매로 뛰게 했다. 이런 움직임 속에 26회 선수출신 이영득 형도 모셔와 한 두 게임 같이 뛰었다. 상대팀으로부터 부정선수 분쟁에 휘말릴까봐 나도 객원초빙 전문가 직함을 하나 만들어 아예 명함까지 파주었다. 감독 겸 선수로 희성산업에 막 경력입사해 들어온 26회 송재명 형도 데려왔다.

 

8강전에서는 전설적인 허구연 선배가 세컨으로 뛰는 LG전관인가 하는 팀과 맞붙었다. 허선배는 당시 국가대표 선수로 시합 중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현역선수 생활은 포기한 상황이었는데 몸이 많이 일어 있었다. 옥형의 주선으로 다가가 내가 중고교 시절부터 항상 선배를 흠모해 왔던 후배 팬이라고 인사를 하자 흐뭇한 표정으로 악수해 주었다.

 

내가 첫회부터 런닝 홈런을 치는 등 계속 맹타를 휘두르다 마지막 9회초, 동점인 21, 2루 상황에서 투 스트라익 먹고서도 상대투수의 실투로 2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빠지는 결승타를 때려 1점 차 리드를 만든 뒤 수비 마무리도 잘해 승리를 낚아채며 그날 송감독의 치하대로 수훈갑의 역할을 제법 톡톡이 했다.

 

다음 주에 있는 반도상사 팀과의 4강전에서도 그 때까지 열세이던 승률을 비웃듯 마이클 등의 활약으로 단연 게임을 지배하며 이겼다. 마지막 타석에서 내가 친 장타는 상대팀 좌익수(27회 정택근 동기로 기억됨)가 입을 벌리고 쳐다볼 정도의 더럽게 큰라이너성 홈런이었다. 내 생애 아마게임에서 한 5개 정도의 홈런을 친 것 같은 데 가장 제대로 걸려 크게 잘 맞은 홈런이 아닌가 싶었다.

 

드디어 대망의 결승전에서 무적의 LG전자 1팀을 맞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 전날 어디선가 만취된 채 내 신촌 하숙방을 찾아 온 김진회를 맞아 온갖 주사 다 받아주며 꿀인삼차도 타주는 등 찾아온 손님 대접을 제법 오래 해주었다. 했던 소리 또 들어주며 늦게 잔데다 오류동 유신고 구장까지 9시 전에 도착한다고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잠을 거의 못잤다.

 

찰거머리처럼 붙어 도저히 떠날 생각을 안하는 진회놈을 끼고 오류동 가는 123번 버스에 올라탈 수 밖에 없었다. 간신히 구장에 도착해 보니 시합 시작 한 10분 전이었다. 필승의 선수 포지션으로써 송감독은 어깨가 좋아 수비범위가 넓은 마이클에게 유격수를 맡기고 나는 캐처로 뛰게 하는 카드를 내걸었다.

 

나는 컨디션이 최악이었지만 게임이 게임인지라 긴장감이 고조된 분위기 속에 최소한의 면피는 하자는 기분으로 캐처 미트질을 열심히 해대었다. 상대팀 피처는 미국인이었는데 40이 넘은 중년이었지만 동네야구에서는 충분히 통하는 속구 스피드와 변화구도 제법 잘 구사하는 야구 좀 해본 아재인 듯 했다.

 

우리 팀이 계속 이 아재의 구위에 눌려 노히트로 0의 행진을 하는 동안 상대는 3점이나 득점하여 구미에서 우승을 예상하고 전세버스로 대거 올라온 그쪽 응원단은 승부는 이미 끝난 듯이 벌써 운동장 한 켠에서 고기 굽고 술판을 벌리는 분위기였다. 우리팀이 타자 일순한 뒤 4회가 되었고 내가 선두타자로 나섰다. 노털투수가 아무래도 힘이 좀 떨어졌는지 구위가 약해진 듯 했다.

 

나의 자그마한 체구를 보고 좀 만만해 보였는지 초반부터 직구승부를 해왔다. 내가 변화구에는 약했지만 강속구에는 상대적으로 공 좀 맞추는 능력이 있음을 당연히 모른 채 계속 속구로 삼진이나 땅볼로 맞춰잡을 심산으로 공을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3구에도 직구가 들어왔다. 스피드가 좀 떨어진 듯 공이 잘 보였다. 가볍게 휘둘렀는데 센터 앞에 떨어지는 첫 안타가 되었다.

 

갑자기 우리 팀 분위기가 살아났다. 송감독이 다음 타자에게 번트 지시로 내가 2루에 진루한 채 4번 타자 마이클이 타석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모두 , 여기서 미국놈과 미국놈이 붙네그려하며 침을 꼴깍 삼키며 세기의 명승부를 보듯 숨죽여 다음 장면을 기다렸다. 나도 2루에서 이 게임의 승부처를 놓칠세라 긴장해서 이 대결을 지켜봤다.

 

역시 젊은 마이클의 힘이 늙은 미국 아재의 공 구위를 압도했다. 3구째인가 아재의 정직한 속구성 직구가 들어가자 마이클이 기다렸다는 듯이 풀스윙을 하며 좌중간을 가르는 홈런성 장타를 날렸다. 나와 마이클이 홈을 밟으며 점수는 순식간에 승부의 향방을 아무도 모르게 하는 32가 되었다. 하지만 그 한 방이 게임의 흐름을 그대로 바꾸었다.

 

상대팀 감독은 미국아재를 강판시키고 구원투수를 올렸는데 게임 분위기가 우리에게 왔다는 믿음 속에서 우리 타자들이 공도 잘 골라 나가고 처리하기 손쉬운 범타들도 상대야수들이 마치 무엇에 씌인 듯 적시 에러를 해주었다. 이 바람에 우리는 거의 타자 일순하며 한 5점차를 리드하며 완전히 게임을 갖고 왔다.

 

이 리드를 지키려는 듯 마지막 2회 정도를 마이클에게 던지게 했다. 야구선수 출신 답게 공도 적절한 스피드를 유지하며 사기가 왕창 떨어진 상대타자들을 삼진처리와 범타유도를 하며 게임을 마무리 지었다. 믿을 수 없는 역전패를 당한 LG전자팀은 완전히 망연자실한 채 몇몇은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우리는 우승 트로피를 들고 누가 발빠르게 예약해 놓은 유신고 근처 회식집에 가서 점심겸 우승 자축연을 벌였다. 진회도 옆에서 우리 팀 소리질러 가며 응원해 준 사의로 함께 동행 시켰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착석하기 전에 나와 잠깐 마주친 마이클이 미스터 김, 정말 멋진 트랜지스터 라디오 같아요하며 오늘 게임에서와 함께 앞서 같이 뛴 몇 게임들에서 내가 자그만 체구를 넘어서며 보여준 펀치력을 높이 평가해 주는 것 같았다.

 

하여튼 희성산업에서의 객원선수 생활은 이 날의 하이라이트를 끝으로 일단 마무리 지었다. 햇수를 헤아려 보니 딱 2년 간이었다. 옥형 덕에 합류하여 여기 선수들과도 어느 듯 같은 식구 대접을 받을 정도로 친숙해졌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이 다 하는 취업조차 유예한 채 대학원생이랍시고 어정쩡한 생활을 하는 중에 직장인들 문화를 유일하게 접해 본 2년 간이었다.

 

<81~82년에 발생한 국내외 주요 사건>

 

1. 장영자-이철희의 거액어음 사기 사건

 

‘825/7일 대검찰청은 장영자-이철희 부부를 어음사기 혐의로 구속함으로써 이 사건의 전모가 세간에 드러났다. 이들 부부는 각각 15년씩을 선고받았는데 주범인 장영자는 10년의 복역 후 가석방되었다.


<구속된 장영자-이철희 부부의 법정 출두>

 

사채시장의 큰 손 장영자는 국회의원과 중정 차장을 역임한 남편 이철희를 얼굴마담으로 삼고, 청와대 이순자 집안과의 친분을 들먹이며 자금난에 시달리던 공영토건, 일신제강 등을 찾아가 현금을 빌려주고 그 댓가로 2~9배의 어음을 받아 이를 시중에 유통시키고 그 자금을 착복했다.

 

이런 식으로 받아낸 어음의 총액은 7,100억원이고, 이를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착복한 금액은 6,400억원에 달했다. 여기에 걸려든 상기 두 기업들은 부도처리되었고, 많은 쿠데타 실세들이 전두환에게 이순자 처삼촌들을 처벌하라고 압박하다 자신들이 도리어 괘씸죄로 팽 당한 정치적 파문을 일으켰다.



<당 사건의 당시 보도 기사>

 

난 당시 이 사건을 접했을 때 도덕성이 결여된 세력들이 정권을 잡으면 어떤 식으로다도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도덕적 해이의 누적이 때 되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일 뿐이라 짐작했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하는 게 만고의 법칙인데 워낙 엉터리들이라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역대급 천문학적 금액으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비교적 냉소적인 시선으로 이 사건을 쳐다봤다. 장영자 정도의 범죄라면 이런 정권의 속성상 민심무마용으로 당연히 사형시켰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는 전두환의 속물성을 한번 더 확인했다.

 

2. 영국-아르헨티나 간 포클랜드 전쟁

‘824/2일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정권은 국내의 높은 인플레와 실업률, 국제적인 인권범죄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100여년 이상 영국과 영유권 분쟁을 해온 포클랜드(말비나스) 섬을 4,000여명의 병력을 파견해 전격 점령했다.



<포클랜드 섬 전도>


군부정권은 경제력이 약화된 영국이 막강한 전비를 쓰며 본토에서 11,000Km나 떨어진 변방의 섬 하나를 탈환하려 올 가능성은 아주 낮다고 봤기에 자국내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군사적 도박을 감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영국의 여수상 마가렛 대처는 파나마 운하 봉쇄시의 대체항로이자 자국의 남극 전진기지로서의 전략적 가치와 함께, 필패가 예상되는 차기선거에서의 유일한 승리수단이라는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 즉각 탈환전을 선포했다. 자국에 유리한 포석을 위한 외교전을 펼쳐 미국과 칠레, 그리고 EU(독일, 프랑스)의 지지를 획득했다.



<포클랜드 탈환을 위한 영해군의 본토와 지브랄타로부터의 원정로>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적극 지지한 나라들은 페루, 중국, 스페인, 러시아 정도였다. 영해군은 만 여명의 병력과 영국 본토 및 지브랄터에 산재한 함정들을 모두 긁어 모아 포클랜드로 향했다.

 

미 레이건 정부의 다양한 정보제공과 아르헨티나와 이웃한 칠레 피노체트 정권의 자국 영공 경유 허용은 영국군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5/2일 포클랜드 근해에서 첫 조우한 양국간의 해전에서 영 핵잠수함은 아르헨 해군의 경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호를 어뢰로 격침시킴으로써 초전 승기를 잡았다.


<엑조세 미사일을 맞고 침몰하는 영해군의 구축함 셰필드호>  

 

하지만 이틀 후인 5/4일 영국의 최신 구축함 셰필드호는 아르헨티나군이 보유한 프랑스제 전폭기에서 발사한 엑조세 미사일 공격을 받아 침몰함으로써 전세계를 경악시켰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극적인 반격은 거기까지였다.

 

아르헨티나 군부의 구조적 취약점인 수입무기체제는 초전의 무기 소모를 메울 길이 없어 영국의 공세에 더 이상 효과적인 저항을 할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6/14일 영국군은 포클랜드섬을 완전 탈환하였고, 아르헨티나 군부는 패전으로 붕괴되었다. 대신 대처는 영국의 위신을 전세계에 과시한 공로로 철의 여인이란 칭송 속에 차기선거는 물론 ‘90년까지 집권하는 정치적 발판을 확보했다

 

나는 당시 이 전쟁을 접했을 때 처음에는 아르헨티나 갈티에리 군사정권의 속이 뻔히 보이는 무모한 군사적 도박에 우리의 정권 이미지가 겹쳐 영국이 이 기회에 제대로 한번 손을 봐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영국이 내게는 밉상이었던 레이건 정부의 노골적인 도움을 받아 어린아이 팔 비틀 듯 다소 오만하게 공개적인 군사적 게임을 펼치자 서서히 약자동정의 마음으로 돌아섰다.

 

영국이 아르헨의 경순양함 벨그라노호를 침몰시켜 500명을 수장시킨 이틀 후 아르헨군이 엑조세 미사일로 5,000억 파운드짜리 구축함 셰필드호를 가라앉히는 복수혈전에 성공하자 한 때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헨이 완연한 전력격차로 항복할 수 밖에 없는 결과를 만나자 아쉽기는 해도 사필귀정이라 받아들이고, 여걸 대처의 뱃심과 전광석화같은 승부수에 혀를 내둘렀다.   

 

3. 김대중 특별석방 후 미국 망명

 

‘805/17일 내란선동혐의로 김대중을 체포한 신군부는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내 비록 죽더라도 이 땅에서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정치보복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는 김대중의 최후진술 내용이 국제사회에 알려지자 큰 반향이 불러일으켜졌다.



    <사형선고 법정에 나온 김대중>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 지미 카터 전대통령,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를 비롯한 레이건 행정부 인사, 독일의 빌리 브란트 수상, 그리고 수많은 세계인권단체의 지도자들은 구명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레이건 정권의 리처드 앨런 안보보좌관은 신군부측 유병현 합참의장에게 김대중이 사형될 경우 한미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파국국면으로 갈 것이라 압박을 했다.

 

전두환은 이런 국제적 압박을 받게 되자 김대중의 형을 감형해주는 대신 자신을 레이건 취임식에 초청해 달라는 네고안을 제시하여 미국측이 받아들이자 무기로 감형시켰고, 이 댓가로 취임한 레이건의 첫 번째 국빈방문 원수가 되었다.



<미국망명 후 지지자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과>  

 

그 다음에는 광주항쟁의 폭압적 진압에 대한 국민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국민대화합의 기치 속에 무기에서 20년으로 또 감형시킨 뒤, 신병치료차 미국행 망명을 신청한 김대중으로부터 해외에서 절대 정치적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 제출을 요구하고, 이를 김대중이 요식적으로 써내자 형집행 정지와 함께 ‘8212/23일 미국행을 구속한 지 27개월 만에 허용했다.

 

나는 이 때만 해도 김대중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가 국내에서 보다는 엄청나게 높은 데 대해 많이 놀랐다. 김대중 망명건의 최대 성사조건이었음에도 레이건이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전두환을 초청하는 데서 의식있는 다른 국민들처럼 레이건 저 엿같은 넘, 나중에 불러도 될 걸 저 살인마를 1빠로 불러 면죄부를 씌워주냐하고 분개했었다.

 

사실 나 역시 박통 정권이 오랜 기간 구축한 영호남 지역대결 구도와 김대중의 친북성향 선동가적 이미지 프레임에 제법 많이 갇혀, 그가 용감한 반체제 인사 중 하나임은 인정했으나 특정지역에서 우상처럼 신격화되는 것을 방치하는 그의 권력욕에 대해서는 항상 일정 부분의 실망감을 가졌었다.


 

<김영삼과 '87년 대선에서 각축하던 시절> 

 

후일 영원한 정치적 라이벌인 김영삼과 협력하여 민주화 투쟁을 할 때에도 이 나라 야권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지지기반과 정치적 지분이 확연히 작음에도 떼를 쓰듯 자신이 먼저 대통령이 되도록 밀어달라고 김영삼에 고집을 부리는 대목들에서는 현실적 냉철함을 가진 정치인 재목감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박통과 전통시절 혹독한 죽음의 위협에 상시적으로 시달리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의연함을 잃지 않고, 후일 우여곡절 끝에 정권을 잡고서도 과거에 자신을 악랄하게 탄압했던 정적들에게 결코 정치보복을 가하지 않고 인내심을 발휘한 그의 정치적 결의를 보고서는 이 나라에서 정치보복 고리를 끊는 지성적 휴머니즘을 갖춘 최초의 지도자로써 평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82년에 일어난 굵직한 개인적 사건들>

 

1. 마냥 기다리기만 했던 ‘82년 초입 시절

 

국제경제연구원이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와 통합된다는 방침만 정해졌을 뿐 실제로는 언제 새로운 통합기관으로 발족한다는 소리는 전화를 해도 항상 미정이라는 답으로만 돌아왔다. ‘82년으로 접어들자 국제경제연구원 측에서는 가까운 장래에는 장담할 수 없으니 마냥 기다리지만 말고 좋은 일자리 있거든 찾아가셔도 좋다고까지 했다.

 

그러던 중 국방과학기술연구소라는 안기부 산하의 정부출연 연구소에서 해외의 국방 전문 저널들에 수록되는 최신 무기체계 동향 페이퍼나 기사들을 정리해 리포팅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석사급 연구원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가 떴다. 시험과목에는 행정학, 경제학, 경영학 중 택일, 그리고 영어와 특수외국어(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일본어) 부문도 있었다.

 

안기부 산하라는 게 좀 찜찜했지만 시험과목 자체는 그냥 흘려 보내기가 아까울 정도로 내 구미에 맞았다. 예라, 당장 갈 곳도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는데 한번 응시나 해보자 하고 서류들을 보내었다. 한 일주일 후 서류전형 통과했으니 필기시험 치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경영학 필기시험도 대충 아는 문제들만 나와 낯선 문제들에 당황해 낑낑거리지 않고 아는대로 담담하게 써내었다. 영어시험 역시 신문기사 지문 같은 것을 독해하는 것이라 모르는 단어들이 좀 있어도 전체 맥락 속에 충분히 비슷한 뜻으로 유추하여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감독관이 내 뒤에서 제법 자주 어른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여 주기까지 했다.

 

드디어 영어보다 (시험 난이도를 대충 알기에) 더 자신있던 독일어 시험이 다가왔는데 영어시험과는 달리 시사독일어 교재에 나오는 지문들을 번역하라고 나와 있었다. , 요거 하며 신나게 써내려 갔다. 아까 그 감독관이 다른 응시생들 답안작성을 보다가 내 앞에서 멈추고는 아니 이 분은 독일어도 능숙하게 써내시네하며 아주 맘에 든다는 듯 눈도장을 크게 찍어주고 갔다.

 

예상대로 필기시험에도 합격해 면접장에 갔더니 그 감독관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으면서 커다란 미소로 반겨주었다. 뭐 합격여부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본연구소의 향후 위상이 상당히 높아질 것이니 가진 재능 많이 풀어 연구소와 본인의 개인적 발전에 만전을 기해달라는 화기애애한 덕담으로 끝을 맺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 일주일도 못돼서 출근하라 할 것 같았던 이 국방과학연구소도 함흥차사가 된 것처럼 2월 중순이 다되도록 최종합격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신원조사를 철저히 한답시고 우리 부친 고향이자 내 본적이 기재되어 있는 함안까지 안기부 직원을 보내어 동네사람들과 면담하며 혹시 월북자라도 있지 않은가 조사하러 왔더라는 소리가 삼촌과 고모들로부터 들려왔다.

 

2. 산업경제연구원 입사 시절

 

이 연구소는 연좌제 걸이도 없다고 봤는지 3월 첫주부터 출근하라는 내용을 담은 최종합격통지서를 2월 마지막 주에서야 비로소 보내왔다. 늦장 행정 속에 기다린다고 진이 빠진 중에, 마침 국제경제연구원에서도 드디어 산업경제연구원’(KIET)으로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와 통합되어 발족되니 3월 둘째 주부터 출근하라는 통보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오랜 실업자 생활 끝에 큰 떡 2개를 손에 쥐게 된 나는 선택의 기로에서 좀 배부른 고민을 하게 되었다. 대책없이 사람을 기다리게 하던 국제경제연구원도 미웠지만, 국방과학연구소도 신원조사를 통해 안기부 냄새까지 한참 피우며 보여주던 늦장 관료주의에 대한 실망감 역시 그 못지 않았다.

 

며칠 숙고한 뒤에 그래도 경제경영 전공을 더 많이 살리려면 산업경제연구원에 가는 게 맞다싶어 미워도 다시 한번의 심정으로 결국 본연구원 행을 택했다.

 

드디어 신촌에서의 하숙생활도 정리하고 홍릉에 있는 산업경제연구원에 가깝게 출근하기 위해 제기동 쪽에서 새 하숙방을 구했다. 눈매가 동공동골한 채 지금의 강경화 외무장관처럼 은빛 머리칼을 가져 도회적 젊은 언니의 세련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중노년의 하숙집 아줌마가 맘에 들어 바로 거처를 정했다.

 

한옥집이라 방들이 그리 넓지 않은데다 노는 방 하나 가지고 은퇴한 노년부부가 살림에 보태려 사람을 받는 것이기에 나도 생전 처음 독방을 써보기로 했다. 마주 보는 다른 방에는 당시 대학 2년생이며 인물도 반반하던 주인집 딸이 쓰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드는 구조였다.

 

가스나가 좀 더 활달하게 굴었다면 내가 어리기는 해도 관심을 가져볼 수도 있었겠는데 어찌된 판인지 조선시대 규수처럼 음전 떠는 것을 캐릭터로 구사했다. 묻는 말에만 따박따박 대답하고 지쪽에서 예전의 누구처럼 시험공부 좀 도와달라는 식으로 오라버니!’ 하고 접근할 법도 했지만 저그 옴마가 값 떨어진다고 쥐약을 먹였는지 그런 일은 일체 없었다.

 

3월 둘째 주 월요일 첫 츨근을 했다. 태어나서 28살에서야 친구들보다 한참 늦게 정규 직장인 생활을 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왕창 개편된 조직구조에서 한 20 여명의 연구원과 책임 및 수석연구원들로 구성된 산업 1에 배치되었다. 1실 실장은 나중에 삼성그룹에 스카웃 되어가 제법 큰 계열사 사장까지도 맡은 박웅서 박사였다.

 

이 아재도 S대 상대 나와 호주 무슨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쯩 하나 건진 뒤 거기서 교수생활도 좀 하다 이 신생 통합연구원으로 나보다 조금 더 일찍 스카웃되어 부임한 둣 했다. 영어를 안 잊어버리려는 것인지 실력과시를 하려는 것인지 직원들만 모여 하는 회의에서도 개구리같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중간중간 영어로 발언을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제대로 못알아 들을까봐 떠들고 나서는 스스로가 한국어로 다시 통역까지 했다. 아니 뭐, 이런 과시욕 덩어리의 캐릭터가 있나 싶어 처음부터 내 스타일이 아니라 여져져 인간적인 정이 도저히 가지 않았다.

 

산업 1실은 수석-선임-일반 연구원 2명 해서 모두 4명으로 구성된 4개의 팀과 실장 따까리(S대 석사) 및 전용 여비서, 그리고 4개팀 공동지원 여비서로 구성되어 돌아가는 조직이었다. 내가 소속된 1팀에는 수석에 송모 석사, 선임에 한모 석사, 그리고 일반 연구원에 나와 성대 경제학과를 나온 30회 김기업 후배 학사가 같이 자리했다.

 

산업 1실은 같은 공간에서 통합된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사람들 하고도 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쪽에서 출근 며칠 만에 26회로 S대 기계공학과를 나온 이종화 선배를 만났다. 이 아재는 나와 독일유학도 비슷한 시기에 가 중서부 도르트문트 대학에서 디플롬 엔지니어 학위를 건져오는 세월 동안 이리저리 특수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나는 오랜 기다림 끝에 하게 된 직장생활이라 그랬는지 이 시절이 내 인생에서 몇 안되는 짧은 호시절일거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침 9시 조금 전에 출근하면 상냥한 우리의 여비서 정혜영씨가 우리 직원들에게 타주는 찻잔 커피 한잔을 하는 것이 별미였다.

 

주위 동료들과 자리에서 담배까지 서로 나눠 피우며 잡담하다 업무를 시작하는 준공무원 스타일의 좀 널널한 국책연구원의 일상적 분위기가 너무 맘에 들었다.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하다가 연구원 주위에 늘려있는 음식점에서 동료들과 얻어먹기도 사주기도 하며 사람관계를 돈독히 했다. 가끔 대학이나 대학원시절 친구들이 멀리서 찾아오면 유명하다던 홍릉갈비집에 데려가 갈비 정식을 사먹이기도 했다.

 

4월 들어서며 원내에 있는 연못과 주위에 만개해 있는 벚꽃나무 주위에서 아는 사람들과 추억기념용 사진도 꽤 많이 찍었다. 주로 종화형, 기업이 후배, 27회 동기이며 나중에 수원대 교수로 간 박동구 등이 이 무렵 자주 사진 찍거나 점심 나누는 멤버였다.

 

연구원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총무실의 행정실장은 또 18회든가 하는 후배 잘 챙겨주는 우리 선배님이 좌정하고 있었다. 내가 조만간 독일유학 건이 가시화되는 바람에 석달만에 퇴사를 하게 되었을 때도 최대한 내 근무경력을 늘여주려 무던히 애를 써주던 의리의 돌쇠같은 양반이었다.

 

3. 이 시절의 주요 사건과 연구원 퇴사


3.1. 박실장과 틀어진 회식 자리

 

4월 중순이든가 산업 1실 사람들 모두가 강남에서 단체 회식을 하게 되었다. 식사 후 술이 몇 순배 돌자 박실장이 평소 자신의 권위주의적이고 과시적인 카리스마 분출의 이미지를 좀 전환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대각선 건너편에 있던 나를 지목하며, ‘거침없이 호탕해 보이는 김재민씨는 그동안 몇 명의 여인들을 침대로 데려가 봤나요?’ 하며 여직원들도 있는데서 요즘으로 치면 압박면접식으로 뜬금없는 도발적 질문을 해왔다. 요놈, 어쩌는가 보자는 식으로..

 

순간 또 삐딱이 기질이 발동했다. 내가 이 연구원에 뼈를 묻을 처지도 아닌데다 당신 같은 상사에게 야코 죽을 수는 없겠다 싶어, ‘이 나이 먹도록 숫총각은 아님다. 카사노바는 아니지만 틈틈이 좀 데려가 봤네요. 그런데 실장님은 호주생활을 오래 하셨다던데 백마여인들은 어느 정도 경험해 보셨는지요?’ 하고 되치기까지 걸었다.

 

박실장은 헉, 하는 듯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나도 김재민씨가 한 것만큼은 해봤네요. 자주는 아니었지만..’ 하고 내 대답을 미러링 하듯 돌려주는 순간 총기를 발휘하며 더 이상 요런 쪽으로 화제를 몰아가는 자세는 거뒀다. 보통의 경우 이런 해프닝을 통해 서로 가까워지는 계기로 삼는 데 비해 박실장은 당돌한 아랫놈에게 만장의 장소에서 엎어치기를 당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날 출근 하니 내 옆에 있던 한선임이 ‘You’re a Hero!‘ 하면서 엄지척과 함께 어제 밤 내 겁대가리 없음을 확인했다는 윙크까지 보내왔다. 주위에 있던 기업이와 또 다른 S대 출신 한석사도 시원하게 댓거리 잘했다는 지지의사를 확실히 보여줬다. 심지어 저 뒤켠에 있던 종화형도 찾아와 독토르 김, 어제 그쪽 회식에서 한껀 했다며?‘ 하고 마지막 바람을 잡아 주었다.

 

3.2. 현대중공업 출장에서 풀코스 접대를 받다

 

5월에 들어서자 우리 팀은 실장, 실장 따까리와 함께 기업이만 뺀 총 5명이 울산으로 업무출장을 가게 되었다. 실무스케줄을 짜던 한선임이 내가 부산 출신임을 간파해 부산소재 산업경제연구원 지부 사람들과 업무 협의를 한다는 일정을 넣어 부산까지도 들리게 했다. 나도 우리팀 송수석과 한선임은 호텔 숙소가 아닌 서대신동 우리집에서 묵고 갈 수 있도록 모친에게 미리 손을 썼다. 당연히 대환영이었다.

 

그 당시 전정권은 국내업계의 과잉 중복투자를 통폐합함과 동시에 1기업 독점생산체제를 경쟁효율성 제고라는 슬로건 속에 복수기업 체제로 이식하려고도 했다. 그결과 우리 팀에 떨어진 과제가 국내 전동기 모터 분야에서 독점생산하던 효성중공업에만 맡겨 놓지 말고, LG산전이나 현대중전기 등에도 경쟁생산하도록 하는 정책의 타당성 조사였다현대중전기가 소속되어 있던 현대중공업 사람들은 당연히 이러한 정책 방향의 전환을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우리가 현대중공업에 먼저 도착해 이 회사에서 잡아준 정문 앞 다이어몬드(현대) 호텔에 숙소를 정한 뒤 뒤늦게 도착한 박실장과 수행비서인 구선임 일행을 맞았다. 오후 5시 쯤인가 회사로 같이 들어가서 중전기 사람들과 상견례를 하고 이 양반들이 준비한 복수경쟁체제의 타당성에 대한 논리를 경청한 뒤 그 논리 중 그럴 듯한 부분을 우리 보고서에 좀 더 첨가해 내면 이번 출장의 현장방문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었다.

 

중전기 측은 이 기회에 자기들이 노리던 효성중공업의 국내 모터 독점생산 체제를 깨며 이원화해야 하는데 대한 근거 자료들을 잔뜩 제공하며 방문한 우리를 우군화하려고 바짝 달려들었다. 첫날 미팅이 끝난 뒤 다음 날의 두 번째 미팅을 남겨놓고 그날 밤 요정접대 모임에 우리 일행을 모셨다.

 

상대쪽에서는 전무급 본부장과 그 수하 임원들이 몇 명 나와 요정로비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박실장을 본부장과 동급의 상석에 앉히고, 우리 세사람 졸개들에게도 전담 접대임원들을 붙여 오늘 너그를 주지육림 속에 한번 빠지게 하겠다는 각오로 접대 세레모니의 시동을 걸었다.

 

제법 점잖은 대화가 오고가던 전반부의 식사시간이 지나고 술잔이 급히 오가는 유흥타임이 돌아오자 마담이 참석한 사람들 머리 수에 맞춘 아리따운 도우미들을 데리고 입장했다. 미리 우리 일행에게는 서열 순으로 아가씨 배정도 끝냈던 듯 그냥 자기자리 찾아오는 것처럼 내 옆에도 묘령의 여인이 한복 입고 조선시대 기생의 포즈로 사뿐 앉았다.

 

쓰윽 살펴보니 얼굴과 외모는 이런 자리 나올 정도의 수준이 충분히 되었고, 대화술도 나와 몇마디 얘기 나눠보더니 청순가련형보다 좀 도발적인 당당한 스타일을 선호한다는 것을 감지했는지 바로 그런 친구로 변신해 거침없는 입담을 뽐냈다.

 

내가 이런 자리는 처음이지만 한국기업들의 로비문화가 이처럼 저돌적이고 화끈한지는 미처 몰랐다고 운을 떼자, 외국인들이 오면 그리도 이 문화에 환장하는 이가 많다고 설명을 부연했다. 그리고 저 앞에서 저그 보스에게 딸랑이처럼 주접떠는 임원들도 자기들 앞에서는 무슨 생사여탈권을 쥔 주인이라도 된 양 비인격적으로 거칠게 대하는 인간들이 적지 않다고 신랄한 사람 평을 해대었다.

 

난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이 친구가 바로 맘에 들었다. 마담이 주재하는 별별 놀이가 계속 진행되며 전체 분위기를 점점 동물적 본성이 드러나는 쪽으로 달리게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친구가 전해주는 여러 인간군상들의 작태들에 대한 입담에 빠져들어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왕처럼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더 많이 몰입했다.

 

세헤라자데도 틈만 나면 못된 손으로 주물탕 놓으려는 다른 치들과는 달리 자기 얘기 잘 들어주는 먹물형의 내가 싫지 않았던지 이런 손님 모처럼 봤다며 신이 나서 입담 보따리를 전속력으로 푸는 것이었다. 드디어 이곳 자리가 마감되는 시간이 되자 계산담당 과장이 등장하여 아가씨들에게 오늘 자리 봉사료를 지불하며 공식행사를 마쳤다.

 

세헤라자데는 손님이 배신만 하지 않는다면 오늘밤 우리 둘은 어차피 같이 만리장성을 쌓을 인연이니 2차 만남에서 남은 얘기 마저 들려드리겠다고 눈을 찡긋했다. , 가시나 프로 중에 상프로네 하고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박실장은 저쪽 윗대가리들과 2차장소로 따까리 비서와 옮겨갔고, 우리 셋에게는 계산과장이 우리 젊은 사람들끼리 한잔 더 하러 가십시다하며 다이아몬드 호텔 지하 라운지로 데려갔다.

 

맥주 한잔 더 하다 연구원님들, 아까 파트너들 룸으로 보내드릴까요?’ 하니 송수석이 허리가 뿌득하니 불러주면 안마라도 시키지요하고 오케이 답을 주었다. 자리를 파하고 방에 가 기다리니 세헤라자데가 활짝 미소를 띄우며 들어왔다. 나는 얘기 값을 내어놓고, 같이 아담과 이브로써 목욕재계를 했다. 세헤라자데가 밤 이슥토록 펼쳐줄 이야기와 남녀상열지사에 대한 기대감으로 그 밤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3.3. IBRD 교육차관에 의한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다

 

긴 기다림 끝에 출근하게 된 산업연구원에서의 첫 정규직장 생활이 아주 뿌듯하게 잘 흘러가는 중에 대학원 단짝 K로부터 4월 중순 쯤인가 연락이 왔다. 교육부가 주관하며 S대 측이 인원선발과 유학준비 트레이닝 과정을 맡는다는, IBRD 은행 차관에 의한 경영학 교수요원 양성프로그램이 곧 진행되니 응모해 보라는 것이었다.

 

난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아이가, 이 재미있는 연구원 생활을 맛 좀 보려는 순간 어쩌면 숟가락 내려놓은 채 미지의 독일행이 전격적으로 앞당겨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어 움찔했다. 1년 후에 이러한 상황이 다가왔었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랠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내 이기적 바램일 뿐이고 독일행 순례를 운명적으로 거치지 않으면 내 존재와 삶은 영원히 미완성의 회한 속에 마쳐질 것 같아 꼭 이 시험에 합격하리라 하는 각오를 다시 굳혔다. 그 무렵 나는 시험이 내게 붙어 시험운이 따른다는 믿음도 생겨 어떻게든 치기만 하면 붙을 것 같다는 자기확신감이 아주 컸다.

 

플레시보(위약) 효과가 진짜로 크게 작용하는 지를 살필 겸 나는 지난 국방과학기술연구소에서의 시험에 제시된 시험과목들을 서울대 경영학과 건물에서 비숫한 수준으로 치룬 뒤 발표를 기다렸다. 열흘 후 광화문 정부청사에 붙은 게시판을 보니 그 믿음의 힘 때문이었는지 내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들어있었다.

 

선발자들에게 첫 3년간 1년에 만불씩 유학자금을 대어준다는 이 국비유학생 시험에서 총 15명이 최종 선발되었다. 그런데 12명이 모두 미국 가는 S대 석사들이고, 미국행 지방국립대 석사 1, 유럽권인 프랑스에 가는 고대석사가 1, 그리고 독일에 가는 연대석사 1명 몫으로 연대에서도 비주류인 내가 (아마도 모종의 구색 갖추기식) 나눠먹기 배정에서 횡재하듯 선발되었지 싶었다.

 

S대와 연고대, 지방국립대 이외의 석사쯩 합격자는 나중에 교육 받으려 가서 보니 아무도 없었다. 철저하게 S대가 국립대로써 선발권의 헤게모니를 쥔 채 자기 새끼들 선발하던 와중에 연고대와 지방국립대에도 예의상 한자리씩, 그것도 국가까지 배려하며 배정한 형상이었는데 나는 정말 이런 와중에 운좋게 선발된 것 같았다. 나보다 훨씬 우수했던 많은 연대졸업 석사 응시자들이 전멸한 것은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정구현 교수도 자신의 모교 S대가 다해먹은 내막을 아는지 내가 연대 출신으로 여기에 유일하게 합격했다고 인사하러 갔더니 좀 뜨악한 표정이기는 해도 예상 밖의 소식이라며 독일행의 장도를 빌어주었다. S대 측은 선발자들에게 6월 첫째 주부터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5주간 집체교육이 있으니 필히 참석해 받은 수료증과 해당대학 입학허가서를 교육부에 제출해야 된다고 했다.

 

6월 첫째 주부터 시작되는 집체교육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석달 밖에 안 다닌 연구원을 사직해야만 했다. 가을부터 학기가 시작되는 독일대학에 가려면 9월 초나 되어야 갈테니 집체교육 기간만 휴직처리를 해주면 8월말까지는 더 다닐 수 있을 법도 했다. 최소 6개월간의 근무경력 확보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그림이었다.

 

팀장인 송수석은 실장인 박박사도 해외공부를 해 본 사람이니 이런 정도의 편의는 분명히 봐줄거라 하며 한번 얘기 해보라고 권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는 지라 박실장을 찾아가 우연찮게 국비장학생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가을에는 독일로 떠나야 할 것 같다고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예비교육 소집기간이 6월부터 한 5주간 진행되는데 그 기간 일신상의 사유로 잠깐 휴직처리해 줄 수는 없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박실장은 몇 마디 듣더니 대뜸 요즘 젊은 친구들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너무 없어 자신의 이해관계만 좆아 조직을 헌신짝 버리듯 한다는 둥의 첫 반응을 보였다.

 

지난번 회식사건도 있고 해 나에 대해 평소 고깝게 여기던 심사를 애둘러 내보인 것이었다. 이어 조직도 나의 개인적 사정을 관대하게 봐줄 형편이 못되니 5월말까지 사직서를 제출하라고 오금을 박았다. 나도 이 정도 인물에게 구차하게 더 매달리기도 싫어 알았다 하고 군말없이 방을 나왔다.

 

송수석도 의외의 반응을 봤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국책연구소에서 평판관리를 조금이라도 중시하는 상사라면 이런 경우 웬만하면 나가는 부하직원에게 후한 퇴직처리를 해주는 게 상례인데 이 양반은 좀 별종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던 듯 했다.

 

아무튼 김재민이 5월 말까지만 근무한다는 소문이 돌자 연구원내 여기저기서 송별연을 갖자는 연락이 자주 왔다. 짧은 기간 근무했지만 우리 팀과 옆 팀들에서, 그리고 18회 선배가 있는 총무팀에서도 밥 같이 먹자는 기별이 쇄도했다. 모두 내가 원하는 코스를 짧은 기간 내에 잘 밟고 와서 여기서도 다시 만났으면 한다는 덕담을 건네주었다.

 

4. 다가온 渡獨을 예감하고 아쉬웠던 한국에서의 마지막 나날들

 

4.1. 독일행이 결정된 후의 마지막 한국생활

 

산업경제연구원을 ‘825월말일 부로 공식사임한 뒤 나는 S대에서 주최하는 집체교육에 참가했다. 여기에서는 주로 수리경영학, 조직행동론, 통계학, 조사연구방법론 등 미대학에서의 박사학위 논문 작성과 관련한 과목들을 중심으로 최종 정리식의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여기서 나는 중고교 동창인 류일성이를 만난게 그래도 많이 반가왔다. 그리고 지방국립대 한자리로 온 양반이 당시 수산대(부경대)에서 회계학 전공한 25K선배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 3명은 수업 마치고 가끔씩 모여 소주 한잔씩 하며 곧 다가올 서로의 외국행 진로에 대해 생각들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 형은 나중에 자기학교에 근무하는 미모의 여직원을 내 배우자감으로 소개해 주기도 했다.

 

이 무렵 신한은행에 취업한 김진회가 왕년에 내게 제법 많이 삐댄 신세를 일거에 갚겠다는 듯이 특별히 관대한 향응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자슥이 저그 언제 인간될꼬 했는데 세상에서 인정해 주는 밥벌이 직장을 갖게 되자 반듯한 생활인의 모습으로 바로 변신하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특히 내게는 특수관계라는 사실을 강조라도 하듯 툭하면 불러내어 룸살롱 구경을 시켜주는 것이었다. 은행원 봉급만으로는 도저히 저리 쓰지 못할 건데 하고 의문이 일었지만 무슨 눈먼 돈이 생기는 구석이 있는갑다 하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아무튼 사람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진회의 이런 나에 대한 향응제공 놀음은 내가 독일가기 직전으로 갈수록 그 수위가 계속 올라갔다.

 

4.2. 짝을 찾기 위한 마지막 탐문 여행

 

나는 이 무렵 독일 가기 전 짝이라도 하나 붙여 보내고 싶어하는 모친의 집념 속에 틈만 나면 부산으로 불려와 맞선이란 것을 집중적으로 봤다. 어느 주말에는 하루에 세 번씩이나 이런 세레머니를 치루기도 했다. 물론 그 사이사이 나 혼자서 추진하는 연애도 있긴 있었다.

 

기억에 남는 연애는 하숙집 어느 후배가 소개해준 E대 영문과 나온 P와 한 두서너달 사이에 벌어졌는데 내가 좋아하는 예쁜 고양이상의 도도한 팜므 파탈형이었다. 인천 출신의 P는 홍대대학원에 가서 회화나 미술사 공부를 더하고 싶어 했는데 나의 경영학 석사쯩은 티끌만큼도 안 여겼다.

 

진회처럼 경영학도 학문이냐며 좋은 밥벌이 잡 찾는 속물들이나 기웃거리는 분야 아니냐 하고 예술을 모르는 인간을 자기는 별로로 여긴다고 일갈했다. 사실 그 무렵 중매시장에서는 제법 먹히는 내 석사쯩이 이 친구에게서는 그냥 속물의 징표처럼 여겨졌으니 내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계속 앙콤한 매력을 흘리며 다가가려 하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던 P루 살로메식 남자 채찍질 페이스에 만날 때마다 대책없이 끌려만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마음의 조화가 일었는지 재민씨, 우리 이번 주말에 서울근교로 바람이나 한번 쇠러 가요하며 생각지도 않은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황감한 마음에 어찌나 고맙던지 인터넷 검색도 할 수 없던 시절 갈만한 곳 생각을 쥐어짜다 재수시절 강성보와 같이 간 적이 있던 안양의 백운호수 유원지가 떠올랐다. 번호는 기억나지 않는 버스를 같이 타고 갔는데 이 친구가 의외로 이 코스가 꽤 맘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유원지 내 숲속 길을 걸으며 모처럼 천진한 소녀처럼 즐거워하는 이 뺑야시가 그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람도 별로 없어 보이는 시간에 둘이만 탄 보트 노를 저으며 고요한 호수 물살을 호젓하게 가르니 아,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얼마나 좋을꼬 싶었다. 나는 조만간 독일 갈껀데 P도 같이 따라가 하고 싶어하는 예술사 공부 더 할 수 없겠소?’ 하니 웬일로 한번 그래 볼까나?’ 하고 내가 원했던 대답을 성큼 뱉어주는 게 아닌가..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P는 많이 피곤했던지 내 어깨에 자기 머리를 얹으며 이제부터 오빠라 부를거야. 재민씨, 오빠 되죠? 오빠.. 오빠..’ 하며 처음 보는 교태를 부리다 나 눈 좀 붙일래하자마자 곤한 잠에 떨어진 듯 쌔근쌔근 들숨과 날숨만 내쉬었다. 나는 오는 내내 어깨를 내어주며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며 이 행복감이 영원했으면 하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하지만 그 만남은 사그라들기 전 마지막 불꽃이 이는 회광반조같은 해프닝이었음이 곧 밝혀졌다. 일주일 후 다시 만났을 때 이 친구는 내게서 뭐가 그리 또 못마땅했는지 처음부터 뜨아한 심사를 드러내며 툴툴거렸다. 아마도 추레한 돗바차림으로 나간 내 외양이 일주일 전 내게 잠깐 품었던 환상을 제법 깨버렸나 싶었다.

 

아무리 그랬다 치더라도 사람이 또 바뀌었는지 원래의 자기모습으로 돌아갔는 건지, 사람의 본질을 봐주지 못하는 그녀의 외면지향 조변석개함에 나는 적지않은 실망감과 함께 이젠 정신을 차리자 하며 내 자신에 대한 질책을 엄혹하게 했다.

 

이 친구와의 인연이 계속 이런 식이라면 억지로 더 나아가봤자 조울증 환자같은 변덕쟁이와는 조만간 성격차이로 파탄이 날 것 같다는 깨우침이 확 들어왔다. 나는 그동안 이 친구에게는 한번도 보이지 않았던 내 내면에 숨어있는 B형의 나쁜 남자성격을 본격 발동시켰다.

 

명동에서 만나 서로 기분이 상해 서둘러 마쳐진, 을지로 2가 지하철 역까지의 귀가길에 15여분 간 같은 방향이라 어쩔 수 없이 뒤떨어져 따라오는 P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앞만 보며 앞서 갔다. 그동안 먹을만큼 먹은 내 식의 단호한 결별의사 표시였다.

 

4.3. 떠나는 마지막 주의 27야구단 송별연

 

드디어 8월 중순부터 독일대학들로부터 입학허가서가 연이어 도착하기 시작했다. 쾰른,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브레멘, 뮌헨대 등에서 왔었다. 교육수료증과 이들 대학 입학허가서들을 교육부 담당부서에 제출하니 며칠 후 대한항공 9/6일자 저녁 830분 김포공항발 프랑크푸르트행이 적혀 있는 항공권이 우편으로 보내져 왔다. 이제 드디어 날이 잡혔구나 하니 갑자기 만감이 교차했다.



<渡獨 전 찍은 가족 사진>

 

부산에 이 소식을 전하니 울보 모친은 전화 상에서 바로 대성통곡을 했고. 부친도 그날 밤 집 정원에서 휘영청 보름달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큰아들 놈이 드디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독일유학길에 오르는구나 하고 끝없는 줄담배로 심사를 다독이더라고 나중 모친이 전해왔다.

 

9/6일 떠나는 날 사흘인가를 앞두고 기별 야구에 출전하던 27회 동기야구단이 김재민의 도독 송별연을 겸한 단합모임을 모처럼 한번 가지자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퇴계로쪽 극동빌딩 근처에 있는 어느 일식집에 팀멤버들이 얼추 다 모였다. 내 기억으로는 김수인, 김진회, 황수영, 배기용, 최극림, 윤원호 등이 참석했던 듯 하다. 나는 그 무렵 학창시절 흠모하던 배기용 감독과 27야구단에서 서드를 맡으며 함께 두 서너번 시합한 적이 있기에 이 친구와 많이 가까와져 있었다.

 

장소는 김수인이가 잡았는지 일식집이면서 접대 도우미도 제공하는 약간 변칙적인 영업장이었다. 미모이면서 지적인 인상의 도우미를 한명 불렀는데 내가 그날의 주빈이라고 내 옆에 앉혀줬다. 이 친구도 자신의 주 파트너가 나임을 알고 계속 나와 대화의 화제를 맞추려 총명해 보이는 머리를 열심히 돌리는 듯 했다.

 

친구들이 이 모임의 주요 이슈가 독일유학건 송별연임을 주지시키자 얼른 자기도 독일계 회사에 근무한 경력이 있다고 하며 구텐 모르겐, 뷔 게에츠 이넨, 헤어 킴? 잇히 하이쎄..’ 하는 인사말을 제법 능숙하게 구사하는 게 아닌가.

 

내게는 자신의 독일과 독일문화에 관한 호감도를 나에 대한 호감의 표시로 연결시켜 전하는 대화술이 참 매끈해 보였다. 나는 , 왜 이런 얘기가 잘 통하는 여인이 어디있다 이제사 나타나나. 내일모레 먼 길 떠나는 놈에게 하늘은 누굴 약올리나?’ 하는 아쉬움이 순간순간 애타게 지나갔다.

 

그러던 중 밴드가 나타나 반주 넣어주는 노래타임 시간이 되었는데 이 때 그 전설적이었던 황수영이의 장미라는 노래 가창이 펼쳐졌다. 수영이는 그날 따라 자기 애인 만나는 약속을 아무래도 더블로 잡아 놓은 듯 했다.

 

한껏 멋을 부린 검은 양복과 붉은 타이, 그리고 자연 곱슬머리에 무스깨나 바른 외양에다 원곡가수 못지 않은 가창력과 율동감으로 좌중을 까빡 죽게 사로 잡았다. 무슨 신내린 사람처럼.. 참 대단했던 한 순간을 우리 모두에게 길이 기억에 남도록 선사했다.


그 공연에 대한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진회가 밖에 잠깐 나갔다 들어오며 나를 호출했다. 자기가 다음 코스를 책임지겠다고 친구들에게 선언하며.. 나는 남아있는 친구들에게 손 흔들고 작별의 눈빛 인사를 날리며 그 자리를 떴다. 배감독이 특히 잘 가라고 맞손질을 크게 해주었다.

 

나오니까 어느 새 독일 파트너도 의상을 바꿔입은 채 따라 나왔다. 진회 역시 그 무렵 자기가 결혼까지 생각할 만큼 아끼던 여인을 불러내었다. 4명은 택시로 남산입구 크라운 호텔로 달렸다. 호텔 바에서 위스키와 칵테일을 취향대로 한잔씩 하며 각자 파트너와 남은 대화의 물꼬를 이어갔다.

 

나는 그날따라 내일 새벽이면 죽으러 가는 편도 길의 가미카제 특공 조종사처럼 대화의 즐거움 중에도 문득문득 끼어드는 비감스러움의 그림자를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독일 가서도,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흘러 돌아온 지금에도 결코 잊지 못할 비애감을 내 삶에서 아주 강력하게 저장시켜준 하이라이트적 하루밤이었다.

 

그 이름도 형상도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여인이지만 그 친구도 직업적 타산을 떠나 한 인간의 순수한 감정으로, 내가 원해 떠나는 것이었지만 그 누구도 모르는 길을 찾아가는 하루저녁 남자의 독일행 학운장도를 진심으로 빌어주었다. 그 고마웠던 마음에 대한 기억은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결코 잊을 수가 없는 추억의 한 장면으로 떠오른다.

 

나는 이렇게 우리 친구들의 우애어린 배려로 짜릿한 송별연을 마친 채 드디어 9/6일 밤 김포공항에서 부모형제와 찾아온 친구들의 마지막 배웅 속에 싸아한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는, 10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독일유학 생활로 가는 첫 비행의 스타트를 끊었다.

 

    

※ ​어줍잖게 쓴 제 자서전 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1부를 이쯤에서 종결짓고, 휴식기를 좀 가진 뒤 2(독일유학기, 한국내 직장생활)의 스토리 라인을 구상해 다시 집필하려 하네요. 넓으신 마음으로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