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19. 여전히 괜찮았던 초반기의 독일생활

백조히프 2019. 7. 13. 19:00


19. 여전히 괜찮았던 초반기의 독일생활

 

 

<1984년의 독일유학 시절>

 

1. 기숙사 얻어 이사

 

‘83년과 ’84년의 연말연시를 이태리 밀라노에서 보내고 올라온 우리는 2월 초에 드디어 고대하던 부부 기숙사 방을 하나 얻었다. 우리가 살던 회펜 27’에서 북쪽으로 한 5킬로 더 올라간 피비거 슈트라세기숙사에 입주 허가가 난 것이었다. 여기는 조태영씨 부부, 상협형 부부, PS 부부 등등 해서 한국 유학생 부부들이 다섯쌍 정도 거주하고 있었다.

 

독일 주인영감에게 그간 신세 많이 졌다 인사하고 내 차로 짐들을 부지런하게 실어 날랐다. 학생 기숙사라 침대, 옷장, 책꽂이, 책상, 의자, 전기 스탠드는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었다. 거기에다 싱크대가 있는 주방 공간, 샤워기가 있는 화장실, 그리고 자그마한 꼬맹이 방도 하나 놓여 있는 꽤 쓸 만한 공간이었다.

 

<새로 옮긴 피비거슈트라세 기숙사 앞에서>

 

거기 사는 한국인 부부들과 평소 애숙이표 저녁을 많이 얻어먹은 독신 유학생들이 많이 와 이삿짐 정리와 방에 카펫 깔아주는 작업까지 도맡아 해주니 한나절에 기본 배치는 다 마무리 지어졌다. 애숙이는 싱크대 앞에서 이 일꾼 아재들을 해먹일 식사준비 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요즘의 한국 같으면 중국집이나 피자집에서 주문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덴데 그 시절은 이리 하는 게 대세이자 관행이었다.

 

그 다음 날부터 박애숙의 집안 꾸미기가 시작되었다. 회펜에서 미처 풀지 못했던, 한국에서 부쳐져온 짐꾸러미 속에 보료니 민화그림이니, 장식용 문갑이니, 심지어 원앙 베게까지 나와 완전히 한국식 신혼부부 집으로 알콩달콩 꾸며놓았다. 그러고도 그 사이 백화점과 가구점들 부지런히 혼자 돌아다니며 봐 둔 독일식 주방기구들과 벽 장식품, 자그만 옷장 등 나는 듣도보도 못한 물건들을 막 사들여 지가 미혼시절 꿈꾸어 왔을 공간 만들기에 온 힘을 경주했다.

 

<애숙이 꾸민 집구석>

 

같은 기숙사에 사는 유학생 부인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면 입을 떡 벌릴 정도로 무슨 돈많이 먹은 아파트 내부 인테리어를 방불케 하는 공간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어릴 때부터 하라는 공부는 별로 하지 않고, 요런 집꾸미기와 의상 스타일 챙기기, 요런조런 음식 손맛 키우기를 삶의 동력으로 삼아온 듯 했다. 음식 손맛 말고는 내가 내켜하지 않는 집과 옷차림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나와는 많이 배치되었다. 하지만 은근히 나쁘지도 않았다.

 

<책상 앞에서>

 

공부는 니가 하고, 비공부 쪽은 내가 맡으마하는 쪽으로 역할 분담이 되니 그간 살아오며 다사다난했던 사건사고로 찌지고 뽂고 해싸아도 그리 결정적으로 크게 부딪힘 없이 갈라서지 않고 살아오게 된 상호보완적 생활철학관이 되지않았나 싶었다.

 

2. 박애숙의 첫 임신

 

이렇게 이사를 마무리짓고 찾아오는 유학생들과 환담 또는 한번씩 고스톱도 치며 대접하는 맛에 살아가던 2월의 어느 날 밤 박애숙이 몸의 이상한 변화를 감지했다는 것이었다. 늦은 밤이라 의과 공부하며 나와 동갑으로 절친이 된 광주출신 윤PS를 찾아가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다. 이 친구가 상태를 살펴보고 변화조짐에 대해 몇가지 질문을 통해 답을 듣더니, ‘재에민아, 내가 보기에 니 안사람이 암만해도 아이를 가진 것 같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PS 자기부부도 이 무렵 아이를 생각하고 있어 근처에 다니는 산부인과가 있다기에 소개해 주었다. 그 다음 날 그 병원을 찾아갔더니 의사가 예상대로 ‘4주째 된 임신이라 판정했다. 혹시 원치 않은 임신이었는가 싶어 당신, 페어휘퉁(Verhuettung)은 제대로 했냐하고 물어왔다. 대화문맥 상 짐작컨대 요 단어는 피임으로 여겨졌다.

 

사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임신 소식이었지만, 의사놈의 말뽄새가 훈계질책조로 들려 무슨 소리냐, 결혼한 지 1년이나 되어 오랫동안 기다리던 일이었다하니 요 문디가 그제서야 , 엔트슐디궁(미안), 잇히 글라투리어레 이넌 헤르츠리히 다쭈(진심으로 그 소식 축하하네요)’ 하며 얼른 사과쪼 축하말을 했다.

 

짧게 끝나는 신혼의 달달했던 시기가 막을 내리는 게 아쉬웠지만 2세를 하나 만들어준다는 사실은 경이롭고도 기뻤다. 한국에 있는 양쪽 집에 전화로 소식 전하니 크게, 진짜로 축하한다는 말이 이구동성으로 들려왔다. 이제 박애숙이는 10월 말까지 아그 무사 출산레이스에 들어갔고, 나는 생전 안해 본 머슴형 동반자로 처지가 바뀌었다.


3. 개성충만한 둘째 처제의 방문

 

이런 차에 4월 중순 무렵 둘째 처제(별명 옥상)가 언니 형편도 살피고 자신의 유럽 견문도 넓힐 겸 겸사겸사 방문하겠다는 소식이 왔다. 애숙이 말에 의하면, 저그 집에서 하늘 같은 권위의 외동아들 오라배가 성장기 동안 4 여동생(별명 애찌, ()옥상, 계스, 경구)을 모아놓고 밥상에서 어이, 애귀계경!’ 하면 모두 숟가락만 들고 모여 깨갱하며 받들어 총!’ 했다는 거였다.

 

비빔밥을 큰 양푼에 담아놓고 오빠가 숟가락을 한번 딱 밥상에 치면 1번인 애찌가 한 술, 두 번 딱딱 치면 두 번째 옥상이 한 술 하는 식이었다. 나는 이 정경을 그리다 영화-벤허(1958년 작)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주인공 찰톤 헤스턴(벤허 역)이 로마 전투선의 노젓는 노예로 차출되어 배 아랫칸에서 로마인 속도조종 마스터의 나무망치 소리에 따라 여유속도->정상속도->전투속도->돌진속도로 젓는 속도를 한계치까지 올리며 탈진할 때까지 뺑이치는 비로마인 노예 수부들이 연상되는 것이었다.

 

장인, 장모님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오빠의 이런 무한대적 권위에 어린 여동생 4명은 반항해 봤자 무위로 그친다는 것을 경험상 체득했기에 이 작은 독재자에게 굴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듣고 보니 나도 21녀의 집안에서 장남으로 제법 막강한 특별 권위를 누리며 컸지만 우리 손위처남의 그것에 비하면 이빨도 나지 않아 보였다.

 

<맨 왼쪽 뽀글머리가 옥상>

 

하지만 이런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에서도 한번씩 강력한 저항을 시도한 게 둘째 옥상이었다. 저그 오빠의 강력한 본보기 체벌에도 굴하지 않고 고문받는 유관순의 깡다구로 꼿꼿이 버텨내 작은 폭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독종 내지는 별종의 캐릭터를 거머찬 대찬 구석이 있었다.

 

다른 한편 자신의 원하는 바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웬만한 꼴통짓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해치우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전진, 전진의 무댓뽀 정신과 눈치 체면은 개나 주라지하는 강력한 철면피적 속물끼도 병행해 갖고 있었다. 맏딸로써 약간의 특혜를 누리며 크다 보니 좀 멍청한 낭만파적 기질이 배여 매사 악착스럽지 못하던 저그 언니 애찌가 수틀리면 옥상의 만만한 밥이었다.

 

이런 옥상이 ‘845월 어느 날 함부르크에 나타났다. 나야 이 친구의 캐릭터 파악이 아직 안된 상태였지만 뭔가 주눅듦이 없는 말투와 거침없는 행동거지가 몇 번 겪어보지 않아 눈치채어졌다. 독일 마트나 백화점에 가서 자기 맘에 드는 것 있으면 웬만한 가격대는 아랑곳 없이 일단 쓸어담고 나서 나중에 주머니 사정보고서야 아쉬운 듯 빼는 형이었다. 이 문제로 나와도 어느 날 한번 크게 부닥쳐 길가에서 분기탱천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4. 처제 동반 유학생들과의 파리여행

 

4.1. 파리로 가는 길

 

이런 찜찜함의 기분도 털고 박애숙의 입덧조짐과 있을 수도 있는 임신우울증도 완화 내지 예방할 겸 파리여행을 계획했다. 거기다 우리의 갈색 VW골프의 장거리 주행도 한번씩 해주는 게 차에 좋다고 누가 권고하여 우리는 결심했고, 셋이 앉아 스페어 운전사 한 명을 물색했다.

 

마침 유학생 사회에서 치밀한 성격이면서도 어려운 사정에 있는 사람을 잘 도와주는 의협심 발휘가 주특기인 박윤성씨가 물망에 떠올랐다. 파리행 동행해 줄 수 있겠냐고 조심스레 물었더니 명성 그대로 흔쾌하게 바로 수락해 주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 소식을 들은 엄마 유학생 한 사람이 따리를 붙었다. 미술사 전공하는 이MY씨였다.

 

상당한 미모의 이 언니는 나보다도 몇 살 연상이었는데 듣자니 수년 전에 독신으로 파리에서 미술 전공 유학을 하다 함부르크에서 해양학 공부하던 박YS 선배와 장거리 연애 끝에 결혼하면서 독일 함부르크로 넘어온 여인이었다. 자기가 파리에 빠싹하니 이번에 네델란드 암스텔담에서 유학하는 여동생을 보려 가는데 거기까지 동승시켜주면 파리일정과 숙박지 잡기 및 관광지 안내 조언도 해주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우리 쪽에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차내는 좁았지만 바로 수락했다. 그래서 떠나는 날 윤성씨와 내가 운짱들이라고 앞에 앉고 애숙, 옥상, MY씨가 동행한 두서너살 짜리 아들과 함께 뒷좌석에 좌정했다. 길눈 밝고 지도 잘 보는 윤성씨가 보조석에 앉아 길 가이드를 하며 우리는 함부르크에서 서쪽으로 브레멘을 지나 아래쪽으로 꺾어 오스나브룩을 경유하는 코스로 네델란드 국경에 접근해 갔다.

 

중간중간 고속도로 휴게소에 내려 음식도 사먹고, 고기 구워먹는 그릴시설이 있는 곳에서는 준비해간 고기나 소세지를 구워먹으며 여행자의 여유를 즐겼다. 골초지만 여자의 얌체끼를 십분 발휘하던 MY씨는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면 꼭 다가와서 저도 잊지말아 주세용하며 뇌쇄적인 눈웃음 속에 담배 1개비씩을 탈취해 갔다.

 

드디어 총 대여섯시간 정도 달려 네델란드 국경을 넘어 암스텔담에 도착했다. 내 사랑하는 애마인 골프차가 50마력에 배기량 1100cc도 안되는 소형엔진을 달았지만 독일차답게 내구성과 가속성이 좋아 평균 150~170 Km/h로 계속 달려도 기름 많이 먹지 않고 차체가 흔들림 없이 추월도 잘하고 고속도로에 착 달라붙는 듯 안정성 있게도 달려주었다.

 

국사시간에 이준열사가 외교사절로 와 분사했다고 배운 헤이그와도 근접거리에 있는 암스텔담은 독일의 여느 도시들과 다를 바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잘 나갔던 해양국가답게 그 자유스러운 도시문화가 독일에서 최고라는 함부르크보다 어느 면(공창과 마약합법화)에서는 좀 더 앞서 보이기도 했다.

 

MY씨 안내로 여동생의 거처를 찾아갔다, 여동생은 독신으로 유학와 있었는데 언니만큼이나 미모였다. 그런데 두 자매가 만나자마자 얼마 안있어 언쟁이 붙는 게 아닌가.. 나는 얼른 자리 피해주자고 윤성씨와 박애숙을 데리고 나왔는데 호기심 많은 옥상은 귀를 쫑끗 세우며 자리 피하는 체 들어보니 여동생이 유부남과의 열애사에 얽혀 이 문제에 대해 옥신각신하는 것 같다고 우리에게 전해줬다.

 

<이준열사 묘 앞에서 박윤성씨 꿰찬 옥상> 

 

아무튼 이 여동생 집에서 우리 일행은 하루 유숙한 뒤 다음 날 여동생까지 낑겨타게 해 근교에 있다는 이준열사 묘를 찾아갔다. 그 자리는 자그마했지만 그래도 주변 정리는 꽤 잘되어 있었다. 참배와 함께 인증 사진도 찍은 뒤 여동생을 집에까지 태워 내려준 뒤 작별인사를 하고는 기수를 남서쪽으로 꺾어 벨기에를 경유하며 파리로 향했다. 벨기에 고속도로에 구간 전체를 통해 설치된 가로등들이 인상적이었다.

 

운전대를 박윤성씨가 바꿔 잡았는데 역시 안정감 있는 노련한 운전솜씨를 보였다. 한 두 서너 시간 달렸을까 프랑스 국경을 통과하는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그러자 독일도로에서는 보지 못했던 프랑스차 드라이버들의 자유분망하면서도 위협적인 운전문화가 드러났다. 거의 우리나라 수준이었다. 독일에서는 엄격히 금지된 2차선에서의 추월은 가볍게 무시하며 다반사로 이뤄졌고, 2, 3차선에서 1차선으로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이른바 칼치기추월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독일넘버를 단 차는 이들에게 완전 호구였다. ‘소세지 안주에 맥주만 퍼마시는 독일 촌놈들아, 맛 좀 봐라!’ 하는 듯이 특히 우리 앞으로 칼치기 추월이 집중되는 듯 했다. 그동안 좀 우습게 봤던 프랑스제 시트룅, 뿌조, 르노 차의 순간가속 능력이 장난이 아닐 정도로 날렵했다. 노련한 베테랑 드라이버 박아재도 프랑스 놈들의 곡예주행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난 이런 고삐풀린 듯한 프랑스적 운전문화가 이 시절 꽤 맘에 들었다.

 

고속도로에서의 프랑스 입성 신고식을 치룬 뒤 밤기운이 짙은 어둠 속에 파리 시내로 진입했다. 숙소로 예정된 씨떼 지역의 학생기숙사로 가는 동안 멀리 보이는 에펠탑과 바로 눈앞에 나타난 화려한 야경 속 개선문과 샹젤리제를 통과하자 옥상과 박애숙이 흥분하여 우와, 우리 형부 최고, 박윤성씨 최고, 우리 서방 최고!’ 해쌈씨롱 낯간지러운 환호성을 경쟁하듯 내질러대었다.

 

4.2. 파리에서의 숙박과 관광

 

씨테에 도착한 우리는 기숙사 사감과 유창한 불어로 대화를 나누던 MY씨의 통역에 의해 방을 세 개 배정 받아 좀 큰 방에 우리부부와 처제, 작은 데는 박윤성씨가, 중치에는 이여사가 아들과 함께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여사는 이날 하루만 여기서 묵고 내일 낮부터는 아들과 함께 자기 지인 집에 가 머물겠다 했다. 미리 얘기되었던 사안이었지만 이제 파리관광은 MY씨의 필수방문 사이트 권유에 따라 우리끼리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암스템담 동생 집에서 하루 재워줬고, 시떼에서 방 구해주는 것까지로 무료동승에 대한 자기임무는 더도덜도 없이 다했다 여긴 듯 했다.

 

하여튼 첫 밤을 그럭저럭 여독에 젖어 보내고 아침에 기상해 차쪽으로 가보니 약간 열린 창유리 사이로 철사를 집어넣어 유리창도 파손하지 않고 차문을 연 뒤 한달 전함부르크에서 구입해 설치했던 100마르크 짜리 차 오디오가 어느 누구에게선가 솜씨좋게 들치기 당한 것이 아닌가.. , 과연 프랑스네.. 고속도로 다음의 두 번 째 신고식이었다.

 

아침을 근처 빵집에 가서 바께트 같은 것을 사들고 와 함부르크에서 가져온 버터와 딸기잼, 마멜라이드. 땅콩버터에 커피 등으로 때운 뒤 이 언니와 함께 셋이서 마지막회합이 된 담배까지 맛있게 나눠 피우며 오늘 내일의 주요 일정을 잡았다. 오늘 오후의 주요 일정은 기차타고 베르사이유 궁전을 둘러보고 오는 것이었다.

 

차를 숙소에 남긴 채 역으로 나가 베르사이유 행 기차에 승차하려 했다. 역에서 잠깐의 작별인사를 나눈 뒤 함부르크로 떠나기 전날 자기에게 연락달라며 지인 전화번호를 남긴 채 MY씨는 아들을 데리고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났다. 처음에는 좀 황당했지만 우리에게는 그 사이 유럽단독 여행을 많이 해본 여행경험의 달인 윤씽씨가 있어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차편도 널널해질 것이라 오히려 홀가분하게 받아들여졌다.

 

이제 실질적 리더는 인포센터에서 파리 관광지도를 얻은 뒤부터 우리의 박아재가 맡았다. 이 아재의 여행 내내 헌신적인 리더쉽에 감명받은 옥상이 흘낏 연정을 품은 것은 여행 갔다와서 한국 돌아간 뒤 한참 후에서야 알았다.

 

아무튼 이때부터 우리는 4명의 일행으로 구성되어 기차에 올라타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향했다. 서울역에서 인천까지 전철로 가는 기분이었다. 1, 2차 대전의 항복 조인식이 일어났던 역사적 장소이자 태양왕루이 14세가 자신의 권세를 후세에 길이 뽐낼 요량으로 지었다는 파리의 또 다른 랜드마크 베르사이유 궁전이 바로 그곳이었다.

 

 

<베르사이유 궁 앞에서>

 

도착해 보니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관람객들로 바글바글했다. 우리는 궁전 건물 앞에서 인증샷을 찍은 뒤 한 시간 이상 줄을 선 끝에 드디어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만 해도 유럽 건축사나 실내 장식들에 대한 배경지식이 빈약하여 그냥 눈에 들어오는대로 발길 닿는대로 건성건성 살펴볼 수 밖에 없었다.

 

<베르사이유 궁 유리방에서>

 

그럼에도 내 기억에는 아주 멋진 기하학적 디자인 속에 궁전 앞 정원들이 설계되었으며, 온통 황금색 장식물로 채워진 황금방과 거울로만 채워진 거울방35년이 지금도 인상깊게 뇌리에 남았다. 그 밖에도 수많은 여러 방을 들어가 봤지만 이 두 방만큼 기억에 새겨지지는 않았다.

 

<몽마르트 언덕 야경 속에서>

 

베르사이유 방문을 마치고는 한 밤에 택시로 몽마르트 언덕 쪽으로 올라가 거리의 화가들에게 자화상을 그리게 했지만 나하고 별로 닮지도 않았는데다 그림 값도 니가 주고 싶은대로하는 바람에 과감하게 1프랑 동전을 제시했다가 얻어맞을 것 같아 서둘러 도망치듯 현장을 벗어난 기억도 지금에사 연결되어 떠올랐다.

 

<파리 시내에서>

 

남은 날에는 에펠탑에 올라갔더니 요즘 한국에 몰려온 중국인 유커들처럼 탑꼭대기에서 온통 독일어만 들리던 체험도 그 당시는 내가 독일놈이나 된 것처럼 좀 우쭐거리게 만들었다. 파리 시내가 생각보다 한산한 듯해 윤성씨에게 물어보니 파리쟝들이 휴가시즌이라 파리를 떠나 외국인들만 이곳을 거닐기 때문이라 했다. 이 아재는 아는 것도 참 많다 싶었다.

 

내가 파리에 머물면서 인상적으로 본 것은 파리시내에는 널지막한 도로에 도로선이 독일만큼 정교하게 그으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대충 운전자의 자율적 상식선의 판단에 따라 알아서 주행노선 찾아가며, 또는 만들어가며 눈치껏 가라는 게 나는 너무 맘에 들었다. 국가가 정해준 교통질서 틀을 벗어난 널찍한 자율적 자유로움바로 그것이었다.

 

두 번 째는 길가에 주욱 늘어서서 주차한 차들이 들어갈 때나 나올 때 앞 뒤 차들을 쿵쿵 받으며 드나드는 걸 소위 관용의 이름으로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는 장소이동을 해주는 기능만 손상되지 않으면 되지, 대중차들 간에 주차과정에서 발생하는 외관의 짜잘한 상처는 품앗이 식으로 서로 퉁치자는 사고관이 참으로 그럴 듯해 보였다.

 

독일의 경우 차문 열다 옆 차에 살짝 긁히게 해 실날같은 흠집만 나도 전화번호 적은 쪽지 하나 놓고 가지 않았다가는 누군가의 신고에 의해 뺑소니 벌금 왕창 물 정도로 주차문화가 더럽게 쫀쫀했다. 거기에 비해 이 나라는 별세계 같은 푸근한 주차문화를 가졌다고 여겨져 엄청 인상깊게 받아졌다.

 

5. 함부르크 교민 야구대회 주최

 

파리여행을 다녀와서는 서사범과 함께 함부르크 교민 야구대회를 주최하는 이벤트 행사에 한동안 몰두하게 되었다. 계기는 우리 장인어른이 내가 야구 게임하는 것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 독일로 떠난 ‘83년 여름 경에 야구장비 일체(글러브 x10, 캐처 미트 및 얼굴 보호망, 배트, 베이스 x4 )를 박스포장해 선편으로 보내주신 것이었다.

 

아니 뭐 이렇게까지 하고 놀랐지만, 커다란 사위사랑이라 여겨 감읍하며 받아들였다. 한국에도 프로리그가 갓 출범한 시기였는지라 여기 교민들과 그 자제들에게도 야구경기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는 아주 높았다. 난 주말마다 함부르크에 널려 있는 동네 축구장에서 서사범, 조태영씨, 상협이형, 서사범의 외국인 청소년 제자, 교민 자제들과 캐치 볼로 몸을 풀며 시합연습하는 동호인 야구 모임을 결성했다.

 

<동네축구장에서의 김감독 시절>

 

장비제공자이자 야구볼 좀 만져본 내가 코치로 추대되어 내야 그라운드 볼 날리면 캐치해 퍼스트에 송구하는 연습, 외야 플라이볼 날리면 뛰어다니며 받는 연습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조태영씨 캐처로 앉혀놓고 내가 던져주는 볼 프리배팅 하거나 실전처럼 치고 퍼스트까지 달리게 하는 야구 연습을 ‘83년 여름부터 시작해 ’84년 봄까지 주말마다 모여 계속 시켰다.

 

‘84년 봄 어느 날 서사범이 어이 김감독, 우리끼리 요리 연습만 할 게 아니라 함부르크 교민들 상대로 친선야구대회 개최 함 해보자하는 제안을 해왔다. 듣고 보니 함부르크 교민사회에 야구 붐도 일으키고, 잘 몰랐던 교민들과도 자연히 알게 되는 계기가 될 법해 좋은 생각임다. 같이 한번 해 보시지요하고 수락했다.

 

나는 시합장에서의 야구게임 룰을 수기로 작성하고, 조태영씨가 검토 및 보충자문을 해주는 등 일을 도왔다. 당시 함부르크에는 교회단체가 한인교회(장로교), 선교회, 성당, 순복음 해서 4개나 되었다. 서사범은 이 종교단체 영향력 행사자들과 만나 대회취지를 설명하고 적극참여를 권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함부르크 총영사관에도 들려 총영사에게 대회 시구를 부탁하며 내락을 받았다 했다.

 

시간이 가며 차츰 야구대회에 대한 입소문도 퍼지고 각 교회와 성당들이 청장년 교도들로 팀을 꾸려 한국에서 야구장비 구입도 하며 연습에 돌입하기 시작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소한 친선 야구모임으로 여기며 시작했는데 갈수록 판이 커지는 조짐이 보였다. 각 교회단체로부터 개최추진비에 써달라는 격려금도 들어오고, 총영사관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보여주며 졸지에 큰 프로젝트성 행사가 되었다.

 

그동안 교민사회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일각에서의 영향력만 있었던 서사범이 졸지에 이 행사 추진의 중심인물로 부각되며 적지 않은 하이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서사범의 파트너로 이 야구대회 진행 실무를 총괄하게 된 나는 믿고 친한 유학생 동료들과 구수회의 속에 당일의 진행 프로그램을 짜며 진행요원들을 섭외하였다.

 

그러자면 진행 예산이라는 게 필요했는데, 내가 이미 상당액의 격려금이 서사범에게 전달되었음을 인지했는 데도 공식 진행요원들에게 지불할 일당 같은 것에 대한 개념이 이 양반에게는 없는 듯 했다. 사람들 불러모아 회동시 드는 식음료대 같은 것을 내가 한두번은 친한 동료들이 발벗고 도와주려는데 대한 사의로 지불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민자제로써 각 교회소속인 청소년이나 다른 유학생 진행요원들에게 자신들의 다른 알바시간 포기에 대한 기회비용으로써 당연히 일당이나 시급을 지급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경영학도인 나는 믿었는데 서사범의 셈법은 달랐다, 어차피 저그 교회행사의 일환으로 참여하는 것이니 무급봉사를 시켜도 무방하다고 여겼다.

 

이런 마인드로 서른이 넘은 유학생들에게도 무슨 고용일꾼 부리듯 귀빈석 만들고, 운동장에 선긋는 작업을 막 지시하며 시키니 이들 중 성격이 괄괄한 양반 한 두명은 아니 뭐, 이런 개같은 시츄에이션이 있나, 지가 사범이면 다야! 왜 이리 조폭두목처럼 우리를 함부로 대해..’ 하며 나도 들으라고 애둘러 불만을 터뜨렸다.

 

개최 하루를 남겨놓은 저녁 한국식당에서 조태영, 박윤성씨 등과 함께 한 최종점검 회합에서 내가 선배님, 도우미 요원들에 무급봉사를 시키는데 대한 말이 많심다. 최소한 시합 당일에는 진행요원들에 들어온 격려금으로 공식일당을 지불하십시다하고 건의하니, ‘무슨 소리고? 안써도 될 돈을 왜.. 니 자꾸 그런 소리 하려면 당분간 내 눈앞에서 사라져다고!’ 하며 화를 벌컥 내었다.

 

사람들도 있는데서 믿었던 서사범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니 우리도 한 성깔 하는지라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집에 와서 한 두시간 흥분을 삭이고, 그래도 그동안 많은 챙김을 받은 후배의 도리로써 늦은 밤에 서사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한참 울리고도 받질 않더니 당신, 누고? 난 지금 마이 졸려서 다시 잘라네하며 전화를 툭 끊는 것이었다.

 

후일 시간이 흘러 서사범과 최소한의 화해를 한 뒤, 영화-‘달콤한 인생에서 보스에게 배신당한 이병헌처럼 그 때 와 그랬는데요?’ 하고 물었더니 나 같았으면 전화를 하지 않고 한밤중이라도 바로 우리집으로 달려왔을게다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양반은 무슨 일본식 오야붕-꼬붕관계의 열렬한 신봉자 같았다,

 

아무튼 나는 서사범에게 모욕 2연타를 당하고 개최 당일 1회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침에 박윤성씨와 몇 청소년들이 우리집으로 찾아왔는데, 낌새를 느낀 서사범이 이 양반에게 전화하여 김재민이, 꼭 뎃꼬 오라는 특별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윤성씨도 그날 현장에 있지 않았소? 다음은 몰라도 오늘 만은 안갈라요했더니 퍼뜩 내 심사를 짐작하고 그래.. 그 기분 나도 아요.. 이번에 대회 개최한다고 참 고생 많았는데.. 서사범께 그리 전하겠심다하고 선선히 떠나주었다.

 

그날은 날씨도 참 화창했다. ‘이런 날 축제분위기에서 한게임 뛸 수 있었으면 얼매나 좋았을꼬하는 맘이 절로 들었지만 배부른 박애숙과 옥상 태워 북독 뤼벡 해안으로 향했다. 뤼벡은 함부르크-뤼벡-브레멘을 엮어 한자(Hansa) 경제동맹을 맺었을 정도로 북독 발틱해(독일명 오스트제’)에서 한가락 하는 상업 도시였다.

 

 

<씁쓸했던 뤼벡 해변가에서>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뤼벡 시내를 지나 고아한 분위기의 해안에 닿으니 기분이 많이 풀렸다. 옥상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생각지도 않게 펼쳐진 북독의 해안 정취를 접하니 기분이 째지는 모양이었다. 박애숙은 그래도 내 씁쓸한 기분이 전해져 가는지 이곳 정경을 열심히 챙겨보면서도 파리여행 때처럼 화들짝한 리액션은 애써 삼가한 채 서방의 심기경호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6. 첫 지도교수 후보와의 면담 실패로 독일 디플롬 과정 시작

 

‘83년 봄 한국에서 돌아온 이후 함부르크대의 외국인 학생 상담교수와 만나 나의 독일대학 경영학 분야 박사과정의 진입 가능성 여부를 타진했다. 나의 한국 대학과 대학원에서의 졸업과 성적 증명서들을 한참이나 살펴보던 그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헤어 킴, 당신은 학부에서는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고, 독일학제에서는 없는 한국의 경영대학원에서 국제경영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네요. 독일대학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에 들어가려면 독일 학부과정에서 취득한 경영학 디플롬(Diplom)학위가 있어야 합니다하고 바로 들어가는 것이 지금 상황으로는 힘들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의 한국어 석사논문의 전체 내용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테마와 내용에 관심을 보이는 독일교수를 발견한다면, 그리고 그 양반이 당신을 자신의 독토아란트’(박사과정 제자)로 받아준다면 박사과정 진입이 가능해요하고 약간의 희망적인 길 안내도 해주었다.

 

나는 그 권고를 받아들여 경제와 경영학의 몇몇 수업들을 학점취득 목적없이 말 그대로 청강만 하며,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 졸업하며 제출한 석사논문인 제품수명주기 이론을 통해 본 국내 전자제품들의 교역형태에 관한 실증적 연구의 전문 내용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요즘처럼 구글번역기나 파파고 같은 자동 번역 앱도 없던 시절이라 한독사전 갖다 놓고 내가 갖고 있는 한국어->독일어번역실력을 총동원하여 한 5개월에 걸쳐 한문장 한문장의 11 번역에 매진했다. 아무래도 영어에서처럼 양국 언어가 상이한 어순구조와 표현방식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보니 표현의 뉘앙스까지 살린 능숙한 의역이 아닌 단어 대 단어의 직역 번역으로는 오역 투성이일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국제경영분야에 전문성이 있어 내가 한국식 표현사고 속에 쓴 초벌 독일어 번역문 내용을 큰 오류없이 이해한 뒤 독일어 문장으로 매끄럽게 풀어쓸 수 있는 네이티브 스피커+문장가의 교정 도움이 절실했다. 사실 이런 독일인을 현지인 교우범위도 한참 좁았던 그 시절의 내가 도대체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이 때 서사범이 나를 만나 내 고충을 전해 듣고는 자신의 태권도 제자들을 풀어 ‘BWL’(경영학) 디플롬을 가진 아재 한 사람을 발견하여 내게 연결해 주었다. 나는 이 양반이 내가 상정한 그 조건에 맞는지를 알 수가 없어 내가 번역한 3페이지 정도를 주어 테스트 번역을 시켰다. 결과를 보니 독일어 번역본을 빨리 갖고 싶었던 그 당시의 내 눈에는 제법 그럴 듯해 보였다.

 

서사범이 중간에서 이 친구는 돈이 별로 없는 유학생이니 참작하여 우호적인 가격으로 번역해 주길 바란다고 우는 협상을 해줘 한 400~500 마르크 지불해야 할 100 페이지 남짓한 초벌 노트 번역본을 200 마르크 정도에 맡길 수 있었다. 독일 아재가 한달 정도 시간을 잡아먹더니 수기로 교정한 번역본을 보내 왔다.

 

독일인 먹물답게 슬쩍 건너 뛴 부분없이 양심적으로 꼼꼼하게 교정해 내 초벌 번역본보다 훨씬 그럴 듯 해 보였다.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한 2~3주여 간 독수리 타법으로 타이핑하여 한 20여부 복사한 뒤 학교 앞 제본소에 부탁해 물건을 받았다. 이제 내 한 몸을 받아줄 이 분야 전공 교수들을 찾기 시작했다.

 

함부르크 대학에는 국제금융과 외환리스크 관리쪽을 전공하는 교수만 한 사람 있을 뿐 내가 쓰길 원하는 글로벌 기업의 해외사업에 대한 이론적 체계와 다양한 사례를 연구하는 교수는 없었다. 학교도서관과 함부르크경제연구소(HWWA)를 들려 관련 전문저널들과 서적문헌들을 통해 독일 전역을 뒤져보아도 아직 이 분야는 독일 경영학계에서 그리 큰 관심분야가 아닌지 관련 페이퍼들이 가물에 콩나듯 드문드문 눈에 띄기만 했다.

 

그 와중에 한 3명의 관련 분야 페이퍼 저자들을 찾아 소속대학들 주소로 내가 인터내셔널 비즈니스분야에 관심이 많은 한국출신의 석사학위자로 한국대학과 대학원에서 독일문학과 국제경영을 전공했으며, 아래의 디플롬 아르바이트’(석사학위 논문) 제본을 보내니 살펴보고 한번 면담의 기회를 주면 커다란 영광이겠다는 요지의 편지와 제본을 부쳤다.


한 열흘 후에 프랑크푸르트가 있는 독일중부 헤센주에 소재한 기센(Giessen)대학의 경영학과 E. 파우젠베르거 교수가 당신이 연구하려는 국제경영 분야와 당신이 보내준 디플롬 아르바이트를 보니 당신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한번 만나보자하는 답신이 왔다. 나는 어렵게 발견한 기회가 날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박애숙과 갈색 골프를 타고 초조한 맘으로 하노버를 경유하며 A1 고속도로로 한 네시간 정도 내려갔다.

 

<기센의 독일 내 위치도>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북쪽 50Km에 소재한다는 기센에 도달하니 아주 한적한 인구 10여만의 소도시였다. 대도시 함부르크에 살다 갑자기 시골로 낙향한 기분이었다. 대처에서 살기 좋아하는 도시녀 애숙이도 활기찬 역동성면에서 좀 성에 안차는 표정을 보였다. 난 그래도 이 아재 밑에서 박사논문 한편 쓰고 한 4~5년 안에 한국으로 들어간다면 이런 시골생활도 감수하겠다는 맘으로 약속된 시간에 이 양반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파우젠베르거 교수와 면담한 기센대 주 건물>

 

파우젠베르거 교수는 자기 독토아란트 1명과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잔뜩 긴장된 마음으로 수인사를 하고 얼굴을 살펴보니 50대 초중반의 대머리에 금테안경의 좀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당신의 편지와 석사논문을 통해 국제경영 파트에 대한 관심도 알았다며 독일에 유학하게 된 동기와 앞으로 어느 분야에 대한 논문을 쓰고 싶은지 한번 프로포잘을 구두로 해 보라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많이 당황했다. 오늘은 서로 상견례만 하고 인간적 관계를 맺은 뒤 논문 프로포잘은 시간을 두고 테마를 교수와 상호 협의해 정한 뒤 문서로 작성해 설명하는 것이 상례인 줄 알았는데 이 양반은 니 준비성을 보자며 구두로 먼저 소개해 보라는 것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오늘은 테마 프로포잘 준비를 전혀 해오지 않았다고 버벅대며 내 상황을 솔직하게 전했다.

 

이 아재는 많이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헤어 킴, 당신은 오늘 면담을 위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네요. 더군다나 당신의 의사소통 독일어는 편지로 쓴 독일어 수준보다 많이 못해 보이네요. 우선 독일어 문제를 좀 더 개선시킨 뒤 독토아란트 문제는 그때 한번 더 얘기해 봅시다하고 이번에는 자신의 박사과정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사실상 거부했다.

 

가슴은 한없이 쓰렸지만, ‘잘 알겠심다. 더 준비해서 한번 더 연락드리겠네요하고 문을 나왔다. 같이 있던 독일인 독토아란트가 나를 따로 부르더니 영국의 Giddy라는 저자가 쓴 책들을 찾아서 보고 테마 감을 찾아 다음번에 프로포잘할 준비 좀 잘 해오소하고 먼 길 왔다 쓸쓸히 돌아서는 코리안을 위로겸 한마디 거들어 주었다. 나는 오늘 면담의 전체 분위기상 파우젠베르거 교수는 내가 이미 눈 밖에 나 웬만해서는 앞으로도 받아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직감했다.

 

터벅터벅 나오니 차 세운 근처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거닐던 박애숙이 나를 보고 걱정스레 다가왔다. 추레해진 몰골을 보고 일감에 얘기가 잘 안된 걸 알아채고 잠깐 실망의 표정을 짓더니 내가 전하는 상황을 듣고는 이내 위로 모드로 들어왔다. ‘너무 걱정 말아요.. 준비 좀 다시 해보지 뭐.. 나도 이 도시가 작고 단조로와 보여 바로 옮기고 싶은 맘은 별로였는데..’ 하며 내 심정을 추슬러주려 애를 썼다.

 

우리는 함부르크로 올라가는 상행선 아우토반에 올랐다. 얼마가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초행길이라 빗발 속에 나가야 할 중요 출구(아우스파르트)를 놓쳐 원하지 않는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어 다음 출구까지 한 15킬로나 더 달리게 되었다. 마음도 침울한데 나가는 길까지 나타나지 않은 채 속터지게 달리는 그 때의 심정과 순간은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나의 독일유학사에서 잊혀지지 않는 한 컷으로 각인되어졌다.

 

나는 함부르크로 돌아와 며칠 간을 숙고했다. 더 이상 경영학 학부과정도 밟지 않은 한국 석사쯩으로 독일 박사과정에 바로 올라타는 요행적 시도는 하지 말고,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독일 디플롬 과정을 제대로 밟아 학자적 실력을 탄탄하게 쌓은 뒤 정상적인 코스로 독토아파터를 다시 찾기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덧붙여 함부르크 소재 괴테인스티튜트 중급반에 등록해 독일어 듣기와 쓰기 표현력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보자고 결심했다

 

7. 출산 도우미로 장모님 방문

 

기센에서의 충격을 내면적으로 추스리고 학업진로 변경을 모색하고 있던 ‘849월 중순 경 이번에는 장모님이 해산이 다가온 딸 뒷바라지도 하고, 겸사겸사 유럽 구경도 할 겸 오신다 했다. 그해 7월 초에 귀국한 옥상이 독일유람 자랑을 제법 많이 한 모양이었다.

 

우리 장모님은 서울에서 중상층 의사 부친의 11녀 집에서 태어나 타고 난 미모 속에 덕성여고까지 졸업하며 공주처럼 성장하다 한국전쟁(6.25)으로 남쪽 피난길에 올랐다. 이대 입학원서까지 넣었다가 자기 오빠의 만류로 진학취소를 한 걸 빼고는 어째 이 시절 우리 모친의 결혼행로와도 엇비슷했다.

 

모친 역시 지역토호집 셋째 딸로 에헴 하고 지내던 경북 영해에서 한국전쟁 발발시 포항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 와 언니집에서 남성여고 다니며 몇 년 지내다 경남 함안 출신으로 해군중사 계급달고 부산-일본항구 간 군수송선 타다 막 제대한 부친의 훤칠한 외모와 입담, 그리고 빈한한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청년적 패기 같은 것을 보고 결혼했다 했다.

    

장모님 역시 밀양 부농 51녀 집안의 맞자제로써 당시 밀양 어느 지역 면서기로 직장생활을 막 시작했던 장인을 만나 우직하면서도 자신을 여왕처럼 떠받들 각오가 충만했던 순정파 시골청년에 끌려 운명처럼 결혼까지 가게 되었다 했다.

 

결혼 후 밀양 시댁에서 나 어린 시동생들 거두며 양품점을 열어 도시적 세련된 유행패션 감각과 나중에 박애숙에게까지 물려준 교양있는 고객접대 태도로 단숨에 시골 아낙네들과 아재 손님들을 끌어모우는 비즈니스적 수완도 보였다.

 

동시에 장인의 공무원 생활에 있어서도 온달장군 만드는 평강공주의 후광발산식 내공으로 승진의 길목에 있는 요인들의 부인들을 상황에 맞는 다양한 수법으로 공략하여 9급으로 시작한 장인어른을 산청군수를 거쳐 1급인 경남도청 No. 3의 포지션에까지 밀어올리는 내조신공을 과시했다.

 

물론 여기에는 여색과는 거리가 먼 채 평생 미인부인 바라기하는 자세와 상사들 잘 보좌하고 아랫사람 따뜻하게 챙기며, 동시에 업무 전반을 조망할 줄 아는 장인의 인간관계 능력과 전체 통찰력도 두 요소가 선순환적으로 서로 밀어주고 끌어당겨주는인터랙션(interaction)의 힘으로 작용했다.

 

아무튼 집안에서 이렇게 카리스마 있는 장모님이 함부르크 집을 방문하셨다. 박애숙은 철들고 성장할 때부터 자기옴마에게 어리광 부리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좀 격식있는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래도 먼 타국 땅에서 같이 지내게 되니 모처럼 맘이 든든한 모양이었다. 내가 학교에 가있는 동안은 도보나 전철과 버스로 갈 수 있는 시내 중심가 쇼핑장을 찾았고, 주말엔 내 차로 근교 대형 마트나 한국식품점과 한식당 순례를 하였다.

 

 

 

<함부르크 시내에서 딸, 사위와>

 

장모님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구매력이 있었기에 백화점 같은데서 고급취향의 물건들을 보면 별 망설임 없이 척척 구매했다. 입은 의상과 몸에 밴 자태가 나, 귀부인입네 하고 별 내색하지 않아도 독일점원들이 최상의 예우로 알아서 대접해 주었다. 동네 마트에서 생필품 구입할 때는 우리의 계산을 막고 대신 해주셨는데, 지불할 때는 지전과 동전처리를 한다고 카운터에 우아하게 내려놓으면 캐셔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동전부터 먼저 처리해주고 지전에 대한 거스름을 말 한 마디 할 필요없이 전해주는 것이었다.

 

박애숙은 출산할 때까지 자기옴마 덕에 먹고 싶은 것에 대해서만은 확실히 챙겼다. 배 안에 있는 후명이 놈이 나중에 4.1Kg으로 세상에 나온 것도 다 이런 연유일거라 짐작되었다. 해산일이 다가오기 한 2주 전에는 좀 안면이 있는 철학 전공하는 한국 여유학생에게 적절한 보수지급과 함께 한 45일간의 밀착형 가이드 역할을 맡겨 파리여행도 다녀오도록 보내드렸다

 

8. 큰 아들 후명 출생

 

드디어 10/15일 주치의의 권고대로 나와 박애숙, 그리고 장모님은 기숙사집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하이데베르크 병원을 출산을 위해 방문했다. 초산이기에 나와 애숙은 제법 긴장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출산준비의 첫 체크를 한 지 두 시간마다, 나중에는 한 시간 사이에 다녀가며 경과를 지켜보았다.

 

배 안에 든 태아가 아들 같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난 뛸 듯이 기뻤다. 지금 같으면 당연히 딸이었겠지만 그 때는 그랬다. 남아 이름으로 내가 좋아한 둔황의 사랑을 쓴 작가 윤후명의 이름을 따라 후명이라 미리 지어놓았다. 그런데 이 놈이 세상에 쉽게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박애숙이 정상분만을 하려면 무터 문트라 하는 자궁문이 13cm 이상 열려야 하는데 이 친구의 문은 4~5cm에서 더 열리지 않았다. 간호사들이 출산결정 서너 시간 전에는 한 30분마다 와서 살폈지만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시간은 흘러흘러 어느 듯 아침부터 15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본인도 그랬고, 장모님과 나도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점점 긴장의 도가 더해 갔다.

 

옆 방에서는 어느 독일인 산모의 으아아하학!’ 하는 출산의 단발마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가 고문당하는 것처럼 섬뜩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애숙이는 점점 빨리 찾아오는 진통의 파고에 어쩔 줄 몰라하며 차츰 기진맥진해 가는 데도 독일 간호사들은 무터 문트의 열림 지름만 재며 담당의사에게 상황보고만 하러 긴박하게 왔다갔다 했다.

 

독일 의사는 끝까지 정상분만을 시도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양수는 이미 터져 태아가 계속 마시고 있었고, 자궁문은 여전히 7cm 정도에서 더 열릴 것 같지 않으니 그제서야 자기들끼리 긴급회의를 하는 것 같았다. 얼마 후 나를 부르더니 아무래도 카이저슈닛’(제왕절개술)을 해야겠다며 퇴근한 자기병원 쉐프 아르츠트’(수석의)에게 연락해 그의 집도를 허락받았다며, 이 사실을 프라우 킴에게 알려달라 했다.

 

문디 자슥들, 내가 봐도 한 대여섯시간 전에 이 결정을 내릴 법도 했겠건만 사람 진을 있는대로 다 빼놓고 이제사 한다꼬.. 헷띵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다급한 상황에 늦게라도 이런 결정 내려준 게 고마웠다. 애숙과 장모님께 상황 전하니 애숙은 자기 배를 내려다 보며 손으로 가르는 포즈를 취하며 여기를.. 화이고!’ 하는 반응을 보였다.

 

, 나는 그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만큼 미안해 죽겠다 싶었다. 멀쩡한 배를 절개하게 하는 책임이 온통 내게 다 있는 것 같았다. 수술 준비를 하던 독일 간호사들이 그 와중에 나를 찾더니 문서서식 한 장을 내밀었다. 살펴보니 본 수술로 인한 의료사고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동의서였다. 내가 사인하려 하니 사인 주체는 당신 프라우라며 완전히 널브러져 있는 박애숙의 손에 볼펜을 쥐어주며 서명해 달라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안간힘을 다해 사인해 주는 애숙이를 보니 너무 애처로와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 한명 세상에 내어놓기 위해 남자보다 몇십배는 더 되는 치명적인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여인들의 운명이 너무 가혹하기에 애잔스럽기 짝이 없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장모님과 좀 떨어진 바깥에서 난 신파적 감정인지 뭔지 자꾸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난산 아들 안고 겸연쩍어 하는 JM>

 

30분이 넘었을까 한 간호사가 나오더니 헤어 킴, 당신 프라우의 제왕절개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쳐져 아들을 얻었으며, 그 아그는 폐에 양수가 차 지금 막 인큐베이터실에 보내졌는데 프라우 킴과 당신은 내일 오전에 들려서 볼 수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이렇게 첫아들 후명이놈은 저그 옴마를 무슨 살모사처럼 보채듯 애를 먹이다 지도 양수 꽤 마시고 이 세상에 4.1킬로로 첫 출생신고를 했다.

 

<생고생 진통 끝에 첫아들 보고 기뻐하는  애숙>

 

애숙을 찾아가니 일생일대의 숙제를 해치운 안도감에 휴 하며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들은 얘기를 전하자 마취가 풀리는 통증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양수 먹고 인큐베이터실로 옮겨간 아그의 상태를 더 궁금해 하면서도 내일 첫대면 한다는 기대감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장모님도 자기 딸이 자랑스럽고도 대견한 듯 꼬옥 껴안아 주었다. 벽시계를 보니 새벽 4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1984년의 국내외 주요 사건>

 

1. LA하계 올림픽 개최

 

1932년에 열린 이래 52년만에 같은 도시 같은 스타디움에서 다시 개최된 84LA하계 올림픽은 마지막 냉전시대의 여파로 소련과 대부분의 동구국들(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만 참가)이 불참한 반쪽의 대회였다. 하지만 조직위원장 피터 위버로스의 그악한 상업성 추구로 최초의 흑자(250만불)를 기록한 대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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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올림픽 개막 행사>

 

한국은 차기 개최국으로써 전두환 정권의 3S(스포츠, 섹스, 스크린) 정책 강화에 힘입어 우리선수단은 이 대회에서 금 6, 6, 7개를 획득해 반쪽 대회이기는 했지만 전체 10위를 하며 동독이나 쿠바같은 작은 스포츠 강국으로써 국가 이미지를 전세계 시청자들에게 각인시켰다.

 

나는 여러 게임들을 독일 TV를 통해 시청했기에 한국선수단의 활약상은 별로 보지 못한 채 독일선수단이 저그 강한 종목들만 집중해서 보여줬기에 우리 선수단 것은 메달 레이스 보도나 교민사회에 파고 든 한국일보 해외판이나 모친이 매주 보내주는 중앙일보를 통해 상세 보도를 접했다.

 

<칼 루이스의  역주>

 

다만 기억에 남는 방송들은 한국여자팀이 이긴 독일과의 핸드볼 시합이었으며, 미국의 칼 루이스가 육상에서 금 4관왕, 중국이 리닝이 기계체조에서 금 3, 2, 1로 최다 메달리스트가 되는 과정을 시청한 게 인상 깊었다.

 

2. 민정당 중앙당사 점거 사건

 

84년 여름 망원동 일대를 강타했던 물폭탄 홍수 이후 전정권은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반체제 야권인사들에 대한 일련의 해금 유화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해금에서 풀린 정치인들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구성하더니 ‘85년 총선을 향해 맹렬한 반정부 활동을 전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1/14일 연대, 고대, 성균관대 등 대학생 264(여학생 57)이 종로구 관훈동 민정당 중앙당사를 급습헤 12시간 반 동안 농성을 벌이다 전원 강제연행되는 사건이 발발했다. 이들은 유인물을 통해 노조탄압 중지와 노동악법 개정학원탄압 중단과 폭력경찰 철수를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민정당 중앙당사 농성 구호>

 

당시 민정당의 대표위원 권익현은 이들 농성학생들에게 우리는 민한당이 아닌 집권당이다, 이건 학생운동이 아닌 폭거일 뿐이며, 여기는 교내가 아닌 공권력의 보호를 받는 여당 중앙당사이다. 빨리 자수하는 것 만이 정상을 참작받을 수 있다며 시종일관 강경 자세의 대응을 고수했다. 학생들은 그 후로도 농성을 풀지 않은 채 반체제 구호를 외쳤으나, 다음날 새벽 5시 경 농성장 문을 부수고 들어온 전경들에 의해 전원연행되고 말았다.

 

<전경과의 농성 공방전>

 

이 사건을 독일언론들이 그리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 바람에 나는 한국신문들을 통해서야 비로소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 첫 일감은 아하, 이제사 운동권의 반체제 운동이 용틀임을 개시하는가 보구니. 앞으로 점점 진화되어 가겠지 하고 이 운동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지속되기를 제법 많이 기원했다.

 

<1985년의 독일유학 시절>

 

1. 후명이의 백일 잔치

 

첫아들 후명이는 인큐베이터에서 2주간 머물며 허파에 찬 양수를 다 빼고 나와 애숙의 품에 안겨 집에 오면서 안정감을 찾았다. 장모님은 귀국하셨고, 애숙은 드디어 자신이 몰두할 존재를 제대로 찾은 듯 첫아들 놈 육아에 혼신의 정성을 쏟았다. 나도 이제는 관심의 대상에서 슬슬 밀리며 아그 용품들 사거나 유학생 부부로부터 얻으러 갈 때 차몰아 주는 운짱의 역할에 더 충실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집과 처가 양쪽 집에서 한국제 아기 옷들이 많이도 왔건만 그건 그거고, 프랑스제 아가방메이커 옷이나 침대, 팸파스 기저귀, 유명한 독일제 분유 등등은 이곳에서 유명한 아기용품 및 생필품 체인점인 부드니코프스키나 백화점 등등에서 따로 사러 다녔다. 독일 킨더가르텐’(유아원)에서는 생후 3개월째부터 유아들을 받아주기 때문에 때되어 신청했더니 덜커덕 자리가 나왔다. 아침 9시 정도에 보내면 오후 서너 시까지 아이를 맞아주니 애숙이 비로소 한 숨 돌리며 서방에게도 좀 아는 체 해주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85년으로 넘어와 1월 마지막 주든가 후명이의 백일이 다가와 박애숙의 음식해 대고, 대규모 손님 치루는 장기가 진면목을 보이는 시기가 찾아왔다. 자기 혼자 손님맞이 메뉴를 뷔페식으로 짜고, 한 일주일 전부터 나를 족쳐 한국식품점과 독일 대형마트들을 거의 매일 순방하듯이 들려 소갈비찜, 잡채, 섭산적, 고구마와 새우 및 오징어 튀김, 그리고 박애숙표 명품 빈대떡, 육개장과 미역국 등을 순차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백일 세레머니에  참석해준 손님들> 

 

손님접대는 기숙사 지하 휴게공간을 사용허가 받아 아는 한국인 지인들을 많이 불렀다. 같은 기숙사내에 사는 유학생 부부들은 자동뻥으로 초대되어졌고, 이리저리 알게된 유학생 부부 독신유학생, 그리고 서사범 내외 등 신세진 교민들도 불렀다. 찾아온 한 30여명의 손님들은 혼자서 이 모든 준비를 한 박애숙의 스케일에 놀랐고, 그 주요 메뉴들의 손 맛 컬리티에 어머, 이건 예술이야 예술!’ 해쌈시롱 최대의 찬사로 불러준 데 대한 고마움을 극진하게 표했다.

 

<동네  뒷공원에서 망중한에 빠진 모자>

 

그 이후 함부르크 유학생 사회에서 백일이나 돌잔치를 하는 집에서 박애숙이 펼친 이 잔치 세레머니가 하나의 전범으로 자리잡아 부인들과 그 남편들도 한 며칠 간 한계상황으로 몰아치는 태풍 속에서 겪어내야 하는 통과의례처럼 생각하게 했다.

 

2. 80년대 후반을 함께 할 친구들의 속속 등장

 

4, 5월 쯤 되니까 남독 쪽에서 또는 한국에서 함부르크로 유학오는 새로운 학생들이 많아졌다.

 

먼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한 1년 간 어학코스와 예비과정을 밟고 올라온 이곳에서 경제학(VWL) 학부과정을 하러 김유찬씨(현 조세연구원 원장)가 올라왔다. 나보다는 몇 년 후배뻘이었지만 사람이 진중하고 학구적인 분위기라 바로 상경계 공부를 전공하는 도반으로 대접하며 서로 묵직하게 친해졌다. 한국에서 S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해서인지 경제학에 대한 내공도 탄탄해 보였다. 같은 경제학 전공자인 조태영씨와 박윤성씨 등과도 크나이페’(독일식 펍) 등에서의 맥주토론 모임을 통해 쉽게 가까워졌다.

 

두 번째는 우리의 김YB였는데 90년대 초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함부르크 사교계의 제왕같은 존재로써 나와 박윤성씨를 쌍두 선배로 받들면서 뒤에 온 또래나 후배 유학생들을 잘 챙겨 공부 만이 다가 아니며, 사람은 풍류에도 빠져봐야 보다 풍성한 인간이 된다는 사고관을 몸소 실천해준 친구였다. 나의 함부르크 유학시절 중반기를 흥미진진하게, 다른 한편 디플롬 과정을 오래 끌게 해준 일등공신이었다.

 

사교계에 강력한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다가 90년대 초 홀연히 귀국한 뒤 인생은 한방의 아이템이야!’라는 명언을 남기며 말 그대로 한 두 개 사업 아이템을 건져 자리를 잡나 싶었다. 그런데 2000년대 초반 파주창고에서 대화재를 만나 좋아하던 아이템 재고 홀딱 다 날린 뒤 수년 전 베를린으로 날아가 요식업을 하며 오뚜기 정신의 권토중래 기회를 모색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번째는 YB 아재의 대학 후배로써 경영학을 공부하러 온 김SP를 들 수 있는데 이 친구는 한국에서 운동권 물도 잠깐 먹다 이곳으로 왔다는데 처음에는 약간 얼치기성 분위기도 풍겼지만 박윤성씨와 YB를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센빠이로 모시며 아울러 내게도 큰 형님을 모시는 예로 항상 깍듯하게 대해 주었다. 우리집에서 벌어지는 맥주담론 파티에 참여하는 고정멤버로써 인간관계를 오래 쌓았다.

 

경영학 디플롬 과정을 마치고는 한국계 무슨 회사의 폴란드 1인지사를 맡으며 한 4년간 개고생을 했다는데, 그 때의 뚝심을 눈 여겨본 홍콩계 게임유통회사에 스카웃되어 한국지사 조택코리아의 현지사장을 수 년 째 역임 중이다. 작년에는 내가 관리하는 경성대 학생도 1명 입사시켜줘 내가 학교측과 재계약에 성공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함부르크 시절 맺었던 인간관계가 급할 때 동아리를 던져 준 사례였다.

 

네 번째는 함YK인데 박애숙의 어학코스 동기라 해서 집에 데리고 와 처음 만났다. 70년대 그룹 호랑나비의 가수 최헌을 닮은 분위기였는데 모타리는 좀 작았다. 하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고 모든 면에서 빠릿빠릿해 YB-SP 클란에 얼른 끼어들어 3총사를 이룬 후 90년대 초반 조선-항공 공학 전공으로 디플롬 인죄뇌어(Ingeneur)’ 학위를 건져 귀국하기까지 우리집 방문 단골로써 YB와 맞짱뜨는 입담을 구사하였다.

 

귀국해서는 몇 군데 거쳐 2000년대 초반 현대차에 경력으로 들어가 빼어난 독일어 실력으로 당시 유르겐 슈램프 회장의 벤츠와 협업 프로젝트를 시도할 때 저그 김모 최고경영자의 통역사와 가방모찌를 하며 눈에 들어 전성기를 한참 동안 누렸다. 2000년대 중후반에는 현대 상용차 팔러 쿠바 아바나에 들려 전설적인 카스트로와 인증사진도 여러 장 찍은 역사적 한국인이 되기도 했다.

 

다섯 번째 아재는 교육학 전공하러 온 소JY였다. 만능 스포츠맨이며 화끈한 성격에 매사 결단력 있는 카리스마를 구사하여 연배로는 우리 갑오생들보다 너댓살 어린 군번이었지만 종로 깡패대장 김두한의 이미지 위용을 과시하며 약간 오버성의 경계를 왔다갔다 하면서도 명석한 판단력으로 자신의 포지션 기반을 잘 확립했다.

 

이곳에서는 디플롬 페다고긱’(교육학 석사)만 획득한 뒤 90년대 초 한국으로 들어간 뒤 바그너 가극에 나오는 방랑하는 홀랜드인처럼 러시아, 몽골, 베트남, 캄보디아, 유럽국 등을 선점자의 이익을 얻기 위해 휘몰아치듯 진출했으나 먼저 떠난 자의 시행착오를 너무 심하게 겪어 많이 말아먹었다. 하지만 그 때의 실패자산을 발판으로 강남에서 학원사업을 크게 하는 부인의 최고 방패막이이자 조언자로써 두둑한 입지를 확보하니 이 또한 인생만사 새옹지마의 멋진 사례를 만들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서BS(별칭 쎄봉’)와의 오래된 끈끈한 인연의 시발을 ‘85년 봄 함부르크에서 맞이했다. 탤런트 서인석의 셋째 동생으로 함부르크 땅을 밟았을 때 인천출신 쎄봉의 꼬라지는 얌생이 수염에 꾸지레한 입성으로 저 인간이 공부하러 왔나 유학생 사회 물 흐리려 왔나 하고 여길 정도로 완전 개털의 원단을 보여주었다. 경력도 화려해 해군사관학교 2년을 다니다 모종의 사건으로 탈영하여 일반병으로 제대한 뒤 서울과 인천 거리에서 오기 전까지 대리기사나 가두 옷장사도 하다 어찌어찌 함부르크까지 흘러들어왔다 했다.

 

박애숙과 동갑으로 학교어학 코스에서 만나 우리집에 데려왔는데 그날 대학 멘자(학생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는 데도 애숙이 한식 한상을 약식으로 차려내자 무슨 걸신이라도 들린 듯 막 집어넣었다. ‘우리는 이런 한식을 하도 오랜만에 만나보기 때문에 기회가 오면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일단은 집어넣어야 한다고 씨익 쪼개면서.. 하지만 대화를 해보니 기본 내공기반은 좀 약했지만 거리에서 터득한 생존형 지식과 자유분망한 상상력의 소유자로 듣다보면 빠지게 되는 화려한 언변력이 있었다.

 

YB-SP-YK 클란은 쎄봉을 좀 개털 날라리처럼 여겨 거리를 두며 대했으나, 김유찬과는 갑장으로 말을 터 서로 무시하면서도 떨어지지는 못하는 그런 사이였다. 나와 애숙은 이 친구를 자주 초대하여 본인의 살아온 생존 스토리를 신선하게 들어주면, 쎄봉은 그 답례로 자신의 경험담을 녹인 생활의 지혜 주머니를 많이 풀어 주었고. 함부르크 유학생 사회의 따끈따끈한 소식을 전해주는 메신저의 역할도 확실히 해주었기에 유학기간 내내 친동생과 같은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여튼 나는 지금 소개한 친구들을 주축으로 함부르크 중반기를 서서히 노는 시기로 변모시켜가는데, ‘8729회 신영주가 KBS-TV PD하다 한국방송언론재단의 지원으로 독일 땅에 떨어졌다. 이 친구는 처음 뮌헨에 떨어져 한 달 지내다가 내가 있는 함부르크로 올라와 함부르크 시내 ’Immenhof 13집에 둥지를 틀고는 여기 사교 클란들과 본격적으로 어울렸다. 그로 인해 ’88‘88서울올림픽으로 그해 9월 귀국할 때까지 내 유학시절 마지막 최극성기를 장식한 놀자시대를 구가했다.

 

이 인간 덕에 공부는 비록 한 1~2년 늦어졌지만 지금 와 생각하니 참 맘에 든 인간들과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든 좋았던 시절을 보냈다고 여겨졌다.

 

3. 부친 회사의 대형손해 사건 발생

 

‘85년 여름 어느 날 우리 집에 안부삼아 전화를 걸었더니 모친의 목소리가 침울하게 가라앉자 있었다. 어쩐지 예감이 안좋아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너그 아배가 얼마 전에 큰 사고를 쳐서 운영하던 화물회사가 넘어가게 되었다고 실토를 하는 게 아닌가.. 일단 우리회사 소속 화물차 한 대가 대우전자 제품을 가득 싣고 경부고속을 타던 도중 졸음 운전으로 전복하여 운전사가 큰 부상을 입고 실은 화물도 거의 대파되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부친회사가 항상 기간 내에 넣던 보험료를 이번에는 어쩌다가 기간을 넘겨버렸는데 그 보험커버가 안되는 기간에 대형사고가 터진데 있었다. 아무튼 이 사고를 보험이 막아주지 못한다면 부친은 회사를 처분해서라도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고 한숨을 휴우 하고 크게 내쉬었다.

 

나는 이 무슨 날벼락이냐 생각하며 어떤 방법이 없을까 며칠을 고민했지만 무슨 뾰족한 해결책이 떠오를 리 만무했다. 요즘 같으면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우리 동기 전문가들을 찾아 최적의 문제해결적 조언이라도 구했겠지만 그 당시는 독일에서 완전 고립무원이었다.

 

결국 부친은 자신의 물릴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로 보험금을 납기내에 못낸 스캔들의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한 채 회사를 처분해 자신이 뿌린 씨를 쓰라리게 거두어야만 했다. 그 이후 자신의 주체적 의사결정 행동시대는 날려보내고 2008년 세상을 타계할 때까지 식물인간 같은 뒷방 늙은이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 채 한 많은 퇴기같은 인생 후반기를 보내어야만 했다.

 

나 역시 어떻게든 빨리 공부를 끝내고 한국에 돌아가 기울어진 가세를 잡아야 한다고 관념적으로는 인식했으나 실제적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하고 그저 엉거주춤 학업이 끝날 때까지 지금까지의 생활패턴은 좀 많이 바뀌어야 할거라고 다짐만 할 뿐이었다. 애숙이에게도 이젠 위대한 개츠비처럼 좀 남들에게 과하게 퍼다 먹이는 생활은 어느 정도 절제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설득했다.

 

4. 덴마크 여행

 

부친의 대형사고로 의기소침한 분위기 속에 절제적 생활태도를 견지하며 한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후명이도 이제 보행기를 타고 제법 걸어다닐 수 있을 무렵 욀뮬렌벡 기숙사에 사는 이SH씨가 김형, 요즘 어째 지내시오? 방학도 되었는데 우리 가족과 한 가족 더 동원하여 김형네와 내가 보아둔 덴마크 쎄비 쪽에 가서 한 2주 정도 지내다 옵시다. 학생가족 처지에 맞는 저렴한 비용으로 말이요하고 기분전환을 위한 여행을 제의해 왔다.

 

그동안 기분도 우울했는데 심기일전을 할 수 있는 기회겠다 싶어 수락했다. SH는 한양대 영문과를 졸업한 서울 토박이 출신으로 함부르크대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는데 사람이 참 사근사근하면서도 노는 것을 더럽게 좋아했다. 좀 먹고 사는 집 막내 출신이라 치열한 쟁취욕보다는, 다투는 것을 귀찮아 해 매사 남에게 양보하고 사는 다소 말캉말캉한 캐릭터의 소유자였다. 반면 자기부인은 음악 연주학을 공부했는데 성격이 거세어 남편을 아랫동생 다루듯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밀어붙이는 좀 튀는 타입이었다.

 

아무튼 덴마크행을 추진한 SH는 저그 한인교회에 다니는 송JS씨 가족과 독신녀이자 걸물인 부산출신 강KJ씨를 설득해 우리여행단에 합류시켰다. 그러다 보니 현지에서 머물 주거공간의 사용료 부담이 많이 분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며가며 누리는 여행의 재미는 더 증폭되었다.

 

우리는 차 3대로 갔는데 2호차인 우리 차에는 호텔경영학을 전공하는 말빨 센 독신녀 KJ가 동승하게 되어 고향까마귀인 나를 오빠로 모셔주며 여행내내 쿵짝이 잘 맞았다. 나이는 남자들보다 몇 살이나 아래였지만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때때로 여행대장과 주방장의 중책도 틈만 나면 꿰어차려 할 정도로 여장부다운 기질을 과시했다.

 

우리는 함부르크 북쪽으로 방향을 잡으며 국경도시인 플렌스부르크를 통과해 덴마크 땅으로 넘어갔다. 예나 지금이나 길치인 내가 이 도시를 옆으로 두고 계속 올라가야 하는데도 여기로 들어가는 바람에 휴대폰도 없던 시절 SH가 앞에서 맹렬히 달리는 나를 헤트라이트 키며 잡으려 쫓아오는 바람에 한 한시간 쯤 엉뚱한 곳에서 차 추격전을 벌려가며 시간을 날렸다.

 

덴마크에서는 유틀란트 반도에서만 머물고, 여기를 벗어난 다른 큰 섬인 제란트’ (Seeland)에 있는 수도 코펜하겐은 언젠가 재방문할 때 가보기로 하고 이번 여행은 그야말로 한적한 곳에 머물며 휴양만 하다 오자고 갈 때부터 약속을 했었다. 다만 귀행 길에 레고사가 있는 레고란트에는 꼭 들려보고 오자고 했다.

 

<오두막 채 거실에서>

 

쎄비에 있는 우리의 오두막 주거공간에 도착하니 해가 기울어가는 석양 무렵이었다. 방 배정을 끝내고 첫 식사요리는 KJ가 맡겠다고 자원했다, 그녀는 카레라이스를 만든다며 음식 좀 한다 소리를 들었던 박애숙에게도 당근, 감자와 다마네기만 까서 썰으라 하는 지시를 프로같은 위용으로 하는 바람에 박이 빡 돌 뻔했다고 내게 일러주었다. 내가 중간에 나서 내 말이 좀 먹히는 KJ에게 우리 와이프에게도 음식 만들 기회를 좀 주라고 부탁했더니 와이고, 그랬냐며 바로 다음 끼부터 그리 시행하겠다고 씨원하게 받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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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덴마크의 들판과 해변에서>

 

우리가 머물게 된 오두막채는 해외로 멀리 못나가는 개털 독일 관광객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황량한 갈대밭 같은 데다 무슨 캠프촌처럼 띄엄띄엄 지었는데 스산한 갈대 바람도 그럴 듯 했거니와 조금 더 걸어나가면 북해를 바라보는 해변가가 있었는데 뤼벡이나 트라베뮨데 등에서 보던 북독의 해변가와 비슷한 정취가 있었다. 데리고 온 아이는 우리집이 1, SH씨네가 1, 아이 좋아하는 송JS 부부 쪽은 3이나 되었다.

 

저녁 먹고 각자 아그들 재운 뒤 어른들만 거실에 모여앉아 이야기 꽃을 피웠는데 요런 분위기 좋아하는 SH가 얼른 차몰고 근처 읍내로 나가 덴마크제 칼스버그 캔맥주와 현지 스낵류를 안주감으로 사가지고 왔다. 각자는 한국과 독일생활에서 겪은 일상사들을 무슨 데카메론회합처럼 초 몇 개 켜놓고 읆어댔는데 진행 사회는 당근빠로 KJ가 맡게 되었다.

 

여인네들은 KJ가 명색이 독신 처녀짜인데 너무 다라모시 오야 아줌씨 같은 태도와 어투로 좌중을 쥐고 흔들려고 해 좀 꼬롬함을 느끼는 인상들이었으나, 나를 비롯한 남정네들의 지지를 받는 입장이라 KJ는 전혀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남성적 캐릭터 내뿜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이빨도 다른 와이프들보다 별로 차이나지 않은 동년배급인데다 타고난 사람 다루기의 재능으로 여자 두목의 후광을 계속 내뿜었다.

 

외모는 당연히 내 스타일이 아니라 박애숙도 경계를 풀었겠지만 난 인간적으로 이 친구의 오버하는 개성이 꽤 맘에 들었다. 뭐 이리 자기존재감에 자신이 뻑가는 자기애적 나르시즘의 노출자가 있을꼬 하며.. 그러면서도 내게는 무슨 여자 호위무사처럼 깍듯한 품새로 대하는 자세까지도.. 하여튼 KJ의 존재로 우리의 덴마크 오두막채 생활은 매일이 무슨 드라마처럼 흥미롭게 흘러갔다,

 

한번은 한 밤중에 이SH가 부부싸움 한판 벌렸는지 고함소리를 뒤로 하고는 지 빨간 골프를 몰고 홱 나가버렸다. 모두 자다 일어나서 거실에 모였는데 KJ가 자신의 며칠 간 관찰기를 기반으로 왜 SH가 분노하며 나간 심리분석을 늘어 놓으면서 그 와이프인 이HB씨에게 남편 저리 바깥으로 내몰면 안된다고 예의 충고 훈수를 시작했다. 안 그래도 KJ에 대한 꼬롬함이 내재되어 있던 거센 성정의 HB당신이 뭔데 우리부부 사이의 일에 감놔라 배놔라 하느냐!’며 본격적으로 한판 뜰 상황이 벌어질 판이었다.

 

박애숙과 송JS의 와이프는 , 이 오밤중에 무슨 자다 떡받은 불구경이냐하고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려는데 나와 송JS가 중간에 끼어들어 말싸움이 에스컬레이트화 되기 전에 간신히 진화 차단했다. 열받고 나간 SH는 읍내 로칼()에 가서 4시까지 분노를 삭히는 맥주를 들이키다 들어왔다 했다. 내 짐작에 단기적 성깔은 좀 부리지만 기본적으로 한봉지 터진 평화주의자 SH는 차 시동을 거는 순간 와이프와의 싸움은 금방 잊어버리고, 요 기회에 덴마크 술집에서 현지 술꾼들과 노가리 푸는 맛에 들떠 새벽까지 노닐다 왔을거라 여겨졌다.

 

SH 역시 외국어 배우기의 귀재였다. 영문학과 언어학을 전공해서인지 1년이 넘자말자 듣기는 물론 고급독일어도 술술 구사하는 실력을 바로 갖추었다. 덴마크의 중년층 이상은 역사적으로 2차대전을 비롯해 독일인의 침공을 많이 받은 덕분인지 일정시대를 거친 우리 부모 세대의 일본어처럼 독일어를 대부분 구사했다. 덴마크어가 독일어와 영어의 혼성어처럼 들리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SH는 그날 밤 부부싸움을 빙자해 모처럼 자기 만의 괜찮은 시간을 현지 인간들과 가졌을거라 확신되었다.

 

아무튼 KJ 연출의 요런 단막 드라마도 간간이 펼치면서 우리는 갈 때가 되어 쎄비 휴양지를 떠났다. 귀행길에 유틀란트 반도 꼭대기까지 가 몇해 전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도피해 있던 올보르크 시도 방문해 덴마크의 소도시 풍경도 잠깐 접했다. 그리고는 남쪽으로 기수를 돌려 내려오다 중간 쯤에 위치한 세계적인 장난감 기업 레고사가 포진하고 있는 레고란트를 들렸다.

 

후명이 백일잔치 때 사람들이 많이 사준 레고 조립 장난감은 어른이 사용하기에도 흥미로운 구석이 많았는데 실제로 유럽이나 미국의 아그들이 이 조립 장남감을 가지고 놀면서 손을 많이 사용할 뿐만 아니라 공간개념도 크게 성장하게 해주는 멋진 두뇌 훈련 미니에이춰 고안물이었다. 30대 중반을 넘은 후명이는 지금도 유년의 그 조립시절이 떠오르는지 지 방에 고급용 레고용품들을 사서 조립, 전시해 놓았다.

 

 

<레고란트에서 우리 가족> 

 

레고란트에는 레고 본사와 제조공장, 그리고 다양한 미니에이춰 시스템 제품들의 전시공간들이 무슨 디즈니랜드처럼 늘어서 있었다. 우리 일행은 여기에 들어가 덴마크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망중한을 보내며 인증샷들을 팍팍 찍었다. 34년이 지난 지금 당시 사진들을 보니 모든 어른들은 젊음의 마지막 시대를 보내고 있었고, 등장한 아그들도 벌써 30대를 훌쩍 넘어 40대들 향해 가고 있다 생각하니 새삼 세월의 덧없음을 한번 더 느끼게 되었다.

 

<주군 아들 안고 있는 듯한 호위무사 KJ> 

 

우리 여행단을 가지고 놀았던 KJ는 그 후 함부르크에서는 자주 못봤는데 디플롬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가 서울 스위스 그랜드 호텔 등에서 유럽물 먹은 유능한 호텔리어로 활약한다는 소식을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나와는 2000년대 중후반 울산에서 덴마크인과 결혼한 자기 여동생을 외국인 선주감독들 가든 파티에 참석해 우연히 만나 KJ의 근황도 접하게 들었다.

 

호텔리어에서 은퇴한 후 대전에서 어느 목사 싸모님이 되어 신도들을 호령하는 생활을 한다 했는데 얼마 후 연락이 전해져 대전으로 와달라는 초대를 받아 거기에서 덴마크 여행 이래 처음 조우했다. 20년이 넘은 세월도 비껴간 듯 그 시절과 변한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1.4 후퇴 이후 헤어져 못본 오라배를 만난 여동생처럼 어찌나 살갑게 반가와 해주는지 나도 옛시절이 다시 생각나며 맘이 따뜻해졌다.

 

대전에서 유명하다는 육회집으로 데려가 육회와 함께 쇠고기를 다져 만든 쇠고기 케익 같은 것을 푸짐하게 시켜 주었다. 우리는 두어 시간 소맥과 함께 덴마크 여행의 추억담을 서로 되새기며 각별했던 인연을 여러번 음미했다.

 

5. 백의종군의 심정으로 독일대학의 경영학과 경제학 과정 따라가기

 

덴마크 여행을 다녀와서 우리가족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후명이를 킨더가르텐에 맡기고, 애숙이는 함부르크대 어학 코스를 다녔고, 나는 경영학(BWL)과 경제학(VWL) 과목들을 학점을 따며 이수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등록신청해 수업에 참가했다.

 

교수들의 강의 내용은 들리다말다 했지만 그래도 전년도에 행한 그 교수 강의의 핵심내용들이 수록된 강의록들이 학교 앞 책방에서 인쇄되어 팔렸기에 그것들을 읽고 수업에 들어가면 전체 맥락을 따라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교수에게 수업 중간중간 질문하며 응답하는 시간에는 뭔가 중요한 논점들을 주고받고 한다는 감을 잡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상상력으로 복기하기에는 너무 빨리 대화들이 진행되어 늘 앙코빵에서 핵심 앙코를 버린 채 얻어먹는다는 결핍감을 지울 수 없었다.

 

조태영, 박윤성, 김유찬이는 나보다 눈치도 빨라 훨씬 잘 알아듣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나는 어찌 이리도 리스닝 캐치력이 늘지 않을꼬, 참 속이 타 죽을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독일 TV에서 방영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독일에 온지 1년이 갓넘은 박애숙이조차 나보다 내용캐치가 더 잘되는 듯 몰입하는 꼬라지를 보면 아, 하늘이 내게 많은 것을 줬으면서도 요놈의 말귀 알아듣는 능력은 요로콤 최하 등급을 줬을꼬 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각 과목 수강은 한국처럼 중간과 기말고사가 아니라 하우스아어바이트’(Hausarbeit)라 하는, 학기초에 제시된 수업관련 테마들 중 하나를 선택해 소논문 형식으로 작성제출해 평가받는 리포트 점수와 기말 클라주어’(Klasur) 시험을 통해 받는 평점을 평균해 1.0~5.0까지의 노테’(Note)를 받는 시스템이었다.

 

1.0~1.5점대는 아우스게차이히네트’(Ausgezeichnet, 엑셀런트), 1.6~2.5점대는 굿’(Gut, 우수), 2.6~3.8점대는 베프리디겐트’(Befriedigend, 약간 만족), 3.9~4.9점대는 아우스라이헨트’(Ausreichend, 그럭저럭 합격), 5점은 니히트 아우스라이헨트’(Nicht Ausreichend, 불합격)으로 평가되었다. 이 평가시스템은 전 독일의 교육기관과 행정기관에서 공통으로 적용되었다.

 

박사과정에 들어가려면 통상적으로 졸업시험 전체 Klasur 총평균 평점이 굿이상이 최소한 되어야 독토아파터를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이런 학제 시스템의 엄중함을 크게 실감하지 못한 채 신청한 수강과목들은 예열과정이라는 아전인수 격 해석 속에 아마추어적 자세로 대하며, 내라는 하우스아어바이트를 단독이나 그룹으로 작성해 내고, 기말 시험도 설렁설렁 쳐 굿이상의 학점은 구경도 못해 봤다. 기껏해야 베프리디겐트아우스라이헨트평점으로 도배하며 이 과정을 이수해 가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 사교계 인간들과 주말은 꼭 챙겨가며 놀았다.

 

이 과정에서도 내가 좋아했던 과목들은 경제학 쪽에서는 미시보다 거시쪽 경제이론과 경제정책론들이었다. 스페셜로는 국제경제학개도국 경제발전론을 특히 더 좋아했다. 경영학 쪽에서는 국제경영쪽이 있었으면 바로 파고 들었을 텐데 아직 90년대가 오기 전 독일 대학들에서는 붐이 일지 않아 개설되는 강좌가 함부르크대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꿩 아니면 닭이라는 식으로 마케팅전략경영쪽에는 제법 큰 관심을 쏟았는데 나중 졸업시험 클라주어에서 그나마 좋아했던 마케팅시험에 죽을 쒀 완전히 한국으로 보따리를 싸야하는 대위기를 맞기도 했다.

 

<1985년의 국내외 주요 사건>

 

1. 신생야당 신민당의 예상외 총선 대승

 

‘8412/11일 김영삼계와 김대중계의 강성야권 인사들로 결성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군사독재의 종식을 위해 새로운 야권정당을 창당하여 선거투쟁을 전개하기로 선언한 뒤 이민우를 소집책으로 12인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851/18일 민추협 및 각 민주세력을 중심으로 통합신당인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을 창당하고 민주화의 열망과 민주적 역량을 총집결하여 군사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앞장 서겠다는 대국민 선언문을 선포했다. 그리고 집권여당의 의도적인 2/11일 조기총선투표일 결정에도 창당 직후인 1/23일 선거대책본부를 구성하여 전국 91개 지역선거구에 93명을 전국구로 30명을 공천했다.

 

 

<2.12 총선 유세장의 열기>

 

촉박한 선거유세기간에도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선거를 실질으로 주도하고, 2/8일 김대중이 귀국해 유세에 가담함으로써 삽시간에 신민당이 선거 아젠다를 장악해 선거돌풍을 일으켰다. 2/12일의 총선 결과 신민당은 서울 전원 당선전국 대도시 압승을 거두며 지역구 50, 전국구 17석으로 창당 3주만에 제1야당으로 등극하는 선거승리를 거두었다.

 <2.12 총선의 의석 분포>

 

나는 이 결과를 독일 TV뉴스와 전국지 신문들을 통해 알았는데 독일언론들은 한국의 유권자들이 군사독재에 그동안 체념한 듯 하다가 이번에 드디어 숨겨둔 강력한 민주화 열망을 보여준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이곳의 유럽판 한국일보와 한국에서 모친이 보내준 중앙일보를 통해 상세 보도를 접하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식사도 걸러가며 야당인사들이 민정당 거물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꺾었나를 현미경으로 살펴보듯 챙겨 보았다.

 

중선거구제로 개편하여 2명씩 당선되는 시스템이 아니었더라면 민정당의 당선자수도 뒤엎을 뻔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제대로 된 진짜 야당이 드디어 제도권에 진입하게 된 게 이제사 한국 정치판을 덜 냉소적으로 주시하게 될 계기가 되었다고 자평했다.

 

2. 본격적인 반체제 운동과정 속 미문화원 점거 농성

 

80년대 초중반에 축적된 조직역량과 투쟁성과로 자신감이 고조된 학생운동은 ‘85년 봄 전두환 정권의 아킬레스건으로 논의가 금기시되었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전면적 투쟁 이슈로 설정해 전정권의 집권기반에 심대한 타격을 주려 했다. 그리하여 그 선도투쟁의 일환으로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이 동년 4월부터 운동권에서 논의되다 5월 들어 그 구체안이 기획되었다.

 

서울대를 비롯한 연세대와 고려대, 그리고 성균관대 4개 대학의 비공개투쟁 조직의 위원장과 실무책임자들이 5/16일 성대 학생회관에서 모여 상징성이 크지만 보안이 철통같은 미대사관보다 비교적 점거가 쉬우면서도 치외법권 지역이라 공간적 안정성이 큰 미문화관 2층 도서관을 점거후 농성 장소로 택했다.

 

<미문화원 점거 시위> 

 

각 대학별로 차출된 전체 70~80명의 행동학생들이 계획보다 하루 연기된 5/23일 소규모로 나뉘어 문화관에 입장한 뒤 12시 도서관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전정권에 최대한 타격을 입히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고, 광주문제에 미국을 연관시키는 것은 부차적으로 여겼기에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내걸어 미국측의 유연한 대응을 이끌어 내었다. 그 결과 24시간 정도 버틸거라 예상했던 농성을 72시간이나 끌 수 있었다.

 

<농성 풀고  연행되려 나오는 장면>

 

이리하여 국내와 해외언론들의 주목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운동권의 정치적 저항의지를 확실히 우리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나 역시 이 사건을 독일에서 접했을 때, 그리고 한국신문들을 통해 그 상보를 확인했을 때 어린 후배들이 지략도 출중하고 자기 한 몸 독재정권 타도의 대의를 위해 초개처럼 버리는 기상에 전율을 감추지 못했다.

 

, 이리도 우리 열혈청년들이 자신을 민주제단에 내던지는 이 시기에 나란 놈은 제 입신을 위해 독일에 유학이나 와서 민주화 운동을 이역만리 먼발치에서 구경이나 하는게 어찌나 넘사스럽고 구차하게 여겨지던지 참, 맘이 많이 오그라 붙었다. 이런 죄책감은 그 후 전정권이 무너진 ‘87년까지 지속되었다.

 

3. 미일 간 플라자 합의

 

80년대 초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전임 카터정부 시절부터 높아진 인플레를 억제할 요량으로 강력한 금리 인상책을 사용했다. 그 결과 달러가치가 높아져 인플레는 잡았으나 이번에는 달러 강세로 미산업들의 수출경쟁력이 떨어져 그간의 교역흑자가 적자세로 돌아설 정도로 미국 수출산업계의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과 서독에 대한 교역적자폭이 눈더미처럼 쌓여갔다.

 

금리인하책으로 달러가치를 내리고 싶지 않았던 레이건 정부는 일본과 서독을 겨냥해 환율을 조정하는 정치적 합의를 끌어내려 ‘859/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G5(미국, 일본, 서독, 영국, 프랑스)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참석한 플라자 합의를 도출하는 회담을 개최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들러리였고, 서독은 일본을 때리기 위한 중간 역으로 활용했다.

 

<뉴욕 플라자 호텔 전경>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는 미국의 대일적자에 대한 문제점을 들추며 일본을 어르고 위협하여 1년 안에 1불당 235엔의 환율을 120엔대로 상승시키도록 하는 엔고정책을 받아들이게끔 했다. 일본은 미국시장을 잃지 않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합의를 받아 들였지만 한동안은 환율변동이 교역구조를 바로 변화시키지 않고 평균 1년 이상이 걸려야 교역형태에 반응이 온다는 소위 ‘J-커브 효과에 의해 엔고 불황은 바로 오지 않아 금리인하도 늦추며 좀 안심했다.

 

<플라자 합의 모임에 참석한  G5 대표>

 

하지만 2년여가 다 되어 갈 무렵부터 엔고의 최대 수혜자였던 한국과 타이완 등이 해외수출시장에서 일본기업 점유율을 눈에 띄게 잠식해 가자 드디어 불황의 그늘을 인식하고 엔저를 겨냥한 금리인하책을 펼쳤다, 하지만 엔저효과보다 일본열도가 부동산 광풍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을 넘어 미국과 유럽의 부동산 매입까지 시도하는 부동산 인플레 거품이 터질 때까지 끝을 몰랐다.

 

결국 90년부터 일본경제가 근 20년간 복합장기불황에 빠지게 된 원조 뇌관은 ‘85년의 미일 플라자 합의사건이었다. 나는 ‘83~85년 기간 레이건 정부의 고금리에 의한 달러 강세 덕에 1불당 3마르크로 교환되는 환율 맛을 봤지만 플라자 합의 이후 2마르크로 내려가다 90년대 중반에는 1,5마르크로까지 달러화가 내려간 경험을 했다. 다른 한편, ’J-커브 효과라는 용어도 이 무렵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며 내게 다가왔다.

 

<1984~85년의 독일유학과 이 시절에 대한 단상>

 

‘84년과 ‘85년 기간에 첫아들도 보았고, 독토아파터 찾기를 포기하고 디플롬 과정부터 백의 종군의 심정으로 다시 겸허하게 밟겠다는 결심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함부르크 생활을 흥미롭게 해줄 양산박의 다양한 인물들과 교우관계를 맺는 계기도 얻었으며, 유럽생활에서 크게 기억남을 이웃국 여행도 기회가 와서 해보았다.

 

다른 한편, 국내에서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운동권의 반체제 저항에 먼곳에서나마 진심어린 성원을 보내면서, 이들 학생들이 새로운 민주화 사회 수립을 위해 자신의 안위는 헌신짝처럼 벗어던지는 결기에 충격과 함께 자괴감도 적지 않게 받았다.

 

그 때는 여전히 공부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가는데 더 큰 방점을 두었지만, 그 시절을 회상해 보면 한국 와서도 내가 얻고 쌓은 지식은 나 혼자 만의 것이 아닌 세상을 위해,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다듬게 된 여러 단초들을 발견하게 한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