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사

(5회) 영국 본토 항공전: 영국침공의 첨병이 된 독공군

백조히프 2022. 1. 29. 13:27

여러분, 2022년 신년맞이 잘 하고 계십니까? 저도 잘 보내고 있습니다. 간간이 2차대전사 두번째 편 '영국본토 항공전 1회분(전체 5회분) 원고 작성하면서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제가 중 2때인 '68년 부산 남포극장에서 가이 헤밀턴이라는 영국감독이 만든 '공군대전략'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알았네요..

 

영독 간에 영국과 도버해협의 하늘 위에서 펼쳐지던 격렬하고도 스펙타클한 항공전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이 장면에서 다시 한번 떠오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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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영국 본토 항공전

 

(5회) 영국침공의 첨병이 된 독공군

 

(영국본토 상륙의 문제: 독일의 고민과 강화회담에의 기대)

 

프랑스 전투는 전체 7주가 걸렸다지만 실제로는 단 3주 만에 영불 연합군이 패퇴를 거듭하다 덩케르크에서 절망적으로 내몰린 전광석화 같은 단기전이었다. 연합군은 이 암울한 시기에 히틀러의 갑작스런 신중함과 오판으로 토끼가 용궁탈출하듯 34만 대병력이 기적처럼 구사일생으로 영국 땅에 귀환했다. 모처럼 항전론자 처칠의 정치적·외교적 승리였다.

 

<대독항전을 선언하는 처칠의 ’40년 6/4일 의회연설>

 

하지만 전투는 영국정부가 독일과의 화평을 원하지 않는다면 유럽대륙을 넘어 섬나라 영국에서 상당히 불리하게 속개될 형상이었다. 불독같이 강인한 처칠이 전시내각 수반으로 건재하며 의회연설에서 히틀러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는 대독항전을 위해 자국민에게 ‘피와 땀, 그리고 눈물 감내’를 요구하자 강화회담은커녕 결사항전의 분위기가 내면 속 불안감 속에서도 영국민들 사이에 더 크게 팽배했다. ‘브리튼 전투’는 이제 불가피해졌다.

 

문제는 유럽 최강의 독일육군이 세계 최강의 영해군력을 뚫고 영국본토에 어떻게 상륙하는 가였다. 히틀러는 천년왕국의 ‘생활공간’(Lebensraum) 확보를 위한 필생의 과제로써 가슴에 품고 있는 대소련 공격을 1년 안에 집중하려면 고슴도치처럼 서쪽에서 웅크리고 있는 고립무원의 영국을 최종적으로 점령하던가 강화조약을 맺어 서부전선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에 먼저 후자에 기대를 걸었다.

 

당시 프랑스를 3주 만에 군사적으로 굴복시킨 독일육군의 전격전 수행능력에 전세계가 경악하며 감탄하던 차제에 처칠의 단독저항 의지는 어찌 보면 허세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처칠이 믿고 있던 구석은 막강한 해군력과 함께 덩케르크에서 탈주한 본토 방어에 단기적으로는 충분한 육군병력, 그리고 독일의 공군력에 필적하지는 못하지만 국내 항공방어전에서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자국 공군력에 있었다.

 

<도버해협에서의 공중전>

 

어떻게든 버텨내면 대공황의 경제불황 돌파에 여념없는 미국 루즈벨트의 참전의지를 고취시켜 세계최강의 동맹군을 얻게 될 터이고, 그리 되면 장기소모전에 약한 독일을 조만간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 속에 독일 측에서 타진해 오는 강화제안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특히 히틀러가 이전의 외교협상 무대에서 하나를 양보하면 두 개, 세 개를 또 요구하는 철면피형 양아치 정치가임을 익히 보아온 처칠로서는 당연한 의사결정이었다.

 

(선뜻 상륙전을 펼치지 못하는 독일군의 현황)

 

대륙에서 경이로운 전격전 승리를 이끈 육군과 공군력에 비해 독일 해군력은 영국에 비해 크게 열세라 대규모 병력의 단독적 도하(바다사자) 작전은 수행불가하다고 해군지휘부는 히틀러에게 보고했다. 그나마 유지되었던 독해군의 전함, 순양함, 구축함이 노르웨이전에서 영해군에 상당수 피침되었기에 지금의 해군력만으로 독육군의 영불해협 단독 도하가 도저히 난감하다는 것이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히틀러에게 나치스 2인자이자 허세쟁이 공군장관 헤어만 괴링이 영국에 비해 압도적이라 믿는 루프트봐페(독공군)로 영본토를 융단폭격하면 영국의 항전의지를 꺾을 것이라고 건의해 왔다. 하지만 육군의 병행진격없이 공군력만으로는 영국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다는 반대의견에도 히틀러는 영국과의 강화를 기대하며 괴링의 단독 폭격안을 수용했다.

 

다만 괴링의 공중공격을 군사적 요충지로만 제한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영국이 단독항전할 것이라고는 결코 믿지 않았기에 영국이 공습발표에 굴복해 화평을 제안하면 빠른 독소전 개시를 위해 최대의 관대한 조건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전시수상 처칠은 항전을 단호히 선포했고, 영국민의 저항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 영국을 드나드는 연안해역에 민간상선들이 독일공군기들에 피폭당하기를 바라는 듯 자국 공군의 호위도 붙이지 않았다. 사실 방어용 항공전력을 소모하지 않으려 했기에 민간선 호위 여력이 없을 수도 있는 게 더 타당한 이유이었겠지만..

 

(해협 전투의 시작과 경과)

 

히틀러 역시 영국이 강화조약을 거부할 경우 플랜 B와 같은 다른 준비를 하고는 있었다. ‘40년 6/30일 그는 OKW(독일국방군 최고사령부)에 구체적인 침공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라이벌 사령부 조직인 OKH(독일육군 최고사령부)는 히틀러의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이제 막 프랑스를 점령했고, 별도 지시에 따라 대소련 침공계획에 착수한 마당에 다시 대영침공계획을 병행해서 세우라 하니 일관성 있고 스케일과 깊이있는 전략계획 수립을 히틀러 스스로가 그때그때의 임시변통적인 전략 마인드로 망가뜨리는 듯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개전 초에 독일이 영불연합군과 싸웠다면 영국본토에 대한 연결공격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 많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불확실성과 시행착오적 요인들을 개선해 나가는 공격계획을 세우는 게 맞았다.

 

하지만 히틀러가 영국과의 화평 안에 큰 기대를 거는 입장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치밀한 대영공격 계획수립에 대한 동기부여가 확 떨어져 막상 공격하는 쪽으로 전략 방향성이 선회하자 노출되는 허술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상륙병력을 태울 선박이 부족해 강을 운행하는 바지선까지 동원해야 할 만큼 독일군의 상륙전 능력은 한참 부족했다.

 

<시행되지 못한 독일측의 ‘바다사자’ 작전계획>

 

어쨌든 여러 불완전한 요인들이 뚜렷했지만 OKW가 주도하여 약 70만의 독일육군을 상륙시켜 영국본토를 점령하려고 수립한 계획이 바로 ‘바다사자 작전’이었다. 독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는 OKW의 침공계획안을 처음 접했을 때 ‘우리는 그저 하는 데까지 싸우다 죽는 수 밖에 없다’고 한탄할 만큼 상륙전을 주도할 독해군의 능력은 작전수행을 절반이라도 행할 수 있을까 의심할 정도로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작전계획을 짠 OKW가 해군의 과대평가된 능력을 내심 채워주리라 기대한 것은 독일공군력에 있었다. ‘30년대 중반 히틀러의 재무장 선언 후 독일국방군(Wehrmacht)에서 가장 큰 발전 드라이브를 건 것은 공군력 확장이었다. 그로 인해 개전 시 폴란드·노르웨이·프랑스에서 행해진 전격전에서 기갑부대와 합동작전을 펼쳐 가공할 적진 돌파력을 보여준 대활약으로 이어졌다.

 

OKW는 막강한 독일 루프트봐페(공군)가 영해군과 공군을 제압해 준다면 침공군이 조만간 영본토에 상륙해 교두보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이것은 당시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었다. 거기에다 덩케르크에서 연합군의 대탈주를 막는데 실패한 공군장관 괴링은 어떻게든 명예회복을 대영국 항공전에서 하리라 결심하고 OKW 보다 더 바싹 달려들었다.

 

(영독 공군력과 항공전 전략 비교)

 

독일측 바다사자 작전의 결정적인 성공전제가 될 독공군의 영공군(RAF, 로열 에어포스) 궤멸과 런던을 제외한 영국 남부 주요 인프라들에 대한 맹폭이 초기의 독일 루프트봐페의 주요 전략적 목표였다. 그리하여 ‘40년 7/10~8월 초순까지의 기간에는 영독 양 공군의 상대전략 및 항공전 능력에 대한 타색전이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펼쳐졌다.

 

<영국의 레이더 방공망>

 

이를 통해 독공군은 이 해협전투들을 통해 자기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리라 여겼던 영공군이 생각보다 강한 방어능력을 가졌고, 그들의 주력 전투기였던 스핏파이어가 자신들의 메서슈밋-109에 못지 않은 성능을 가졌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더 나은 전투능력을 가졌음을 인정했다.

 

해협전투들의 전초전을 통해 양 공군의 전략적 방향성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먼저 영공군은 전투기 부문 총사령관 휴 다우딩의 냉철하고도 효율적인 본토 방어전략이 각 전략지역에 산포된 각 전투비행단들 간에 유기성과 통합성을 높이면서 펼쳐졌다.

 

이를 위해 다우딩은 ’30년대 초부터 레이더망과 통합중앙관제 시스템을 꾸준히 구축해 드디어 격화된 영국항공전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었다. 레이더망과 중앙관제시스템의 혁신성을 진작에 알아보고, 그것들의 실전적 숙련성을 끊임없이 연마해 온 덕분이었다.

 

<개전 직전 영국 전투비행단의 방어관할구역>

 

영국 내에서도 논란은 있었지만 주력 전투기의 낭비적 투입 금지를 통해 자국의 방공능력을 극대화했다. 그리하여 개전 초 총 500여기의 4개 전투비행단을 영불 및 북부 해변지역에만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본토영공 수호 외에는 스핏파이어의 투입을 단호하게 막았는데 독공군의 항공기 투입 물량전이 심화될수록 그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독일 항공함대의 소재지와 공격구역>

 

여기에 대한 독공군의 대영항공전은 영전투기의 1대1 교환소모 전략이 그 골격을 이루었다, 영공군이 보유하고 있는 주력 전투기의 수를 볼 때 자국기와 1대1의 비율로 격추해 간다면 영국 영공에서의 제공권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정확한 정보들로 인해 향후 전개될 상황들에 대한 독일측의 예상오산이었다는 점이 전투를 거듭하며 밝혀졌다.

 

독공군 사령부는 레이더의 존재와 영공군의 잔여 전력을 과소평가해 자국기 2,200여대로 최소 1대1의 격추 소모전이면 영 방공능력은 확실히 고갈되리라 과신했지만, 강화조약 기대로 한달 여 공격을 미룬 동안 영국은 전투기 월생산량을 독일보다 더 늘린데다 효율적인 방공시스템으로 강력한 방어능력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절정의 에이스기 맞수 스핏파이어와 메서슈밋-109)

 

영국 항공전에서 양측의 에이스 전투기로 끝까지 팽팽하게 맞짱을 뜬 영국의 스핏파이어와 독일의 메서슈밋-109의 접전들은 2차대전 초반 항공전에 숱한 화제를 몰고 온 백미라 아니할 수 없었다.

 

<영공군(RAF)의 에이스기 스핏파이어(Spitfire)>

 

고립무원의 영국을 지켜준 영공군의 에이스 전투기 스핏파이어는 1920년 중반 수퍼마린사의 천재 설계자 레지널드 미첼이 롤스로이스 엔진을 장착한 1호기를 우아한 타원형 날개설계로 선보이자말자 다우딩을 비롯한 고위 공군관계자들읗 매료시켜 곧바로 양산체계에 들어갔다.

 

’36년 처녀비행을 한 스핏파이어에서 가장 혁신적인 부분은 사각형 동심튜브를 서로 연결한 날개보로써 새의 날개와도 같은 유연성을 확보해 주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11분 내 7,500M 고도상승과 9,000M 고도에서 시속 563Km로 비행이 가능하게 했다.

 

그리하여 영국 상공에 출현한 독일 측의 하인켈-111과 융커스-87(슈투카), 도르니에-17 폭격기의 천적같은 사냥꾼이었을 뿐만 아니라 맞수 전투기 메서슈밋-109를 전투기 간 공중전에 끌어들여 격추시키고 당하기도 했지만 자국 폭격기 호위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한 전략적 목표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다른 한편, 독공군이 자랑한 메서슈밋-109는 ’34년 설계자이긴 했지만 사업가적 속성이 더 강했던 빌리 메서슈밋이 바이에른항공기제작사를 통해 메르체데스 벤츠 엔진을 장착한 시제기를 개발한 뒤 개선을 거듭해 소개되어졌다. 이 메서슈밋-109는 공군관계자들 간 알력으로 인한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독항공부에 의해 양산전투기로 간택되어 독공군의 주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독공군(Luftwaffe)의 최강 전투기 Bf(메서슈밋)-109>

 

가장 얇은 날개와 가벼운 중량으로 최고속도의 기동성과 고도상승 및 고속 급강하가 가능해 고공전에서는 거의 무적이었지만, 날개항력을 줄이기 위해 2정의 기관포만 장착가능한 비좁은 무장 및 연료공간 문제로 영국항공전에서 커다란 약점으로 드러난 짧은 체공시간을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경합한 하인켈사의 He-112 전투기에 비해 거의 모든 측면에서 우세했기에 양산기종으로 낙점을 받은 것이었다.

 

스핏파이어에 비해 설계기술과 스펙면에서 약간 우세하거나 열세의 부분들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팽팽한 맞수라고 평가받는 가운데 실전에서는 ‘36~’38년 스페인 내전에 투입된 경험을 통해 보다 더 적합한 노하우로 장비와 조종사 생존률에 있어 우위적 요인을 점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공중전에서는 날개 기관총이 꼭 필요하고 가급적 빨리 기관총보다는 기관포로 대체해야 한다는 점과 조종사의 사망이나 부상을 줄여주는 ‘자동봉합식 연료탱크’ 및 급강하시 원활한 연료보급을 위해 기화기 대신 ‘연료직접분사’ 기술개발에서 영국보다 한발 앞서 눈뜰 수 있었던 점이었다.

 

(세컨 주력기 허리케인 vs. 메서슈밋-110)

 

전쟁 개시 전 영국에서는 독일과 달리 전투기 생산투자를 분리해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전투기를 만들고 있었다. 스핏파이어를 만드는 수퍼마린사의 경쟁사인 호커사의 설계기사 시드니 캠은 단일기종에 매달리지 않으려는 영항공성의 요청에 따라 허리케인을 양산 설계했다.

 

스핏파이어의 속도와 기동성에는 못미치나 제조 및 수리와 조종이 더 용이하고, 무장공간과 기체의 견고성, 생산비용에서 우수해 영국항공전 때 독폭격기의 주력 사냥꾼 역할을 톡톡히 했다. 스핏파이어와 같은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사용했지만, 기체외부의 일부는 금속이 아닌 천으로 입혀져 지상요원들에게 쉬운 개보수를 가능하게 했다.

 

<영공군의 허리케인 전투단>

 

양측의 에이스기들보다 얇지 않은 튼튼한 날개설계는 20밀리 기관포 4정이나 40밀리 기관포를 2정이나 장착할 수 있게 하여 북아프리카 사막전에서 대전차공격기로 이름을 날렸으며, 기체의 생존성이 우수해 적의 맹공을 받아도 조종사의 안전착륙률을 크게 높혔다.

 

영국항공전에서도 스피드와 고도상승은 스핏파이어에 못미쳤지만 제조와 수리의 용이함으로 양측의 초반 소모전에서 먼저 불리해진 영공군에 빠른 보충생산기들을 제공해줘 중반 무렵의 패전위기를 넘어가게 하는데 결정적인 버팀 역할을 수행했다.

 

<독공군의 장거리 2인승 쌍발전폭기 Bf(메서슈밋)-110>

 

한편 메서슈밋-110은 메서슈밋-109가 짧은 체공시간으로 영본토 폭격기들의 호위를 오래 할 수 없게 되자 체공시간도 늘리고 스스로가 빠른 폭격도 할 수 있는 늘씬한 장거리 쌍발 2인승의 전폭기 기종으로 개발되었다.

 

기존 폭격기였던 도르니에, 하인켈스 및 급강하 폭격기 융커스 87에 비해서는 속도와 공격무장면에서 훨씬 앞섰고, 늘어난 체공시간으로 상황에 따라 이들의 호위기 역할도 했다.

 

하지만 강력한 무장을 한 기체중량에 비해 추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고, 기동성도 영 주력 전투기들에는 대적되지 않아 얼마 못가 이들의 만만한 사냥감이 되어 오히려 메사슈밋-109의 호위를 받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독공군에서 상당한 항공기수 비중을 차지했지만, 영국항공전에서는 상대의 세컨 에이스 허리케인의 활약에 크게 못미치는 ‘어정쩡한 오리’가 되었다.

 

(양측의 소규모 편대 공중전으로 상호 탐색 속에 격화로 돌입)

 

앞에서 언급한대로 처칠정부는 대국민 항전의지 고취를 위해 의도적이거나 불가피하게 자국 상선을 군사적 보호없이 해협을 다니게 했고, 독공군은 그 의도를 어느 정도 알아챘지만 영공군의 실력탐지와 항공기 소모를 유도하기 위해 이들 선박을 공격하는 태세를 취했다.

 

영공군사령부는 충분한 전투기 확보시까지 대규모 교전을 삼가하려 하며 자국민 사기 앙양과 조종사들의 경험확보, 그리고 레이더망 및 중앙통제관리 시스템의 가동 숙련도 연마를 위해 제한적인 소규모 편대의 대응출격만을 6월 내내 허용했다.

 

<소규모 편대로 저고도에 있는 독 폭격기대를 공격하려는 스핏파이어기>

 

7/11일 독공군이 해협의 영해군과 상선단을 본격 제거하기 위해 평소 5배인 70대의 항공기로 집중공격을 개시하자 영공군의 대응 항공기 투입 건수 역시 늘어나며 해협전투는 8/11일까지 격화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해협 전투들을 통해 독일은 예상보다 강한 영국의 대응에 꽤 놀랐지만, 그럼에도 이 상태로만 유지되면 영공군의 전력은 조만간 바닥날 것이라 낙관하게 되었다. 반면 영국측은 독일에 2배가 넘는 항공기 손실을 입혔지만, 대부분 저속 폭격기와 2선급인 Bf-110 전폭기류라 자국 전투기와 조종사 손실이 이런 1대1식이면 안된다고 여겨 독공군의 효율적인 전투기 편대대형을 벤치마킹하고 조종사 생존률과 재투입률을 높이는 방안들을 고안하게 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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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1.04 18:15

    첫댓글 만약에...
    독일이제트 비행기를 실전에 좀 더 일찍이 투입되었다면 전황의 전개도
    사뭇 달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영국의 레이더 시설을 비롯한 각지의 조기 경보체제도 독일의 항공 전력을 막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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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09:56 새글

    독일의 메서슈밋 제트기 버전은 전쟁 마지막 해에서나 시제기가 시험비행을 하게 되지요..길영공 상상대로 '40년 6월 영국항공전 개시 무렵에 실전화되었다면 바로 게임 끝이었으리라 여겨짐다. 하지만 그리 되었을 리가 없었지요.

    '44년 하반기에 개빌된 V-1, V-2 같은 초보적 미사일을 런던에 날려 연합군을 꽤 공포스럽게는 했지만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패전의 대세를 게임체인저로써 뒤집기에는 너무 늦었을 정도로 양산과는 거리가 멀었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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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1.04 18:35

    대단한 전쟁史 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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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22.01.05 17:21

    박대표가 원고 좋다는 립서비스는 해줍디다. 항상 이런 전쟁 스토리를 누군가는 정리해놔야 되겠다는 기록자의 심정으로 써가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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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1.05 04:10

    어디선가 보노라니..괴링의 공군 정보참모가 대영 항공전의 결과를 지속 독일측에
    유리하게 거짓 보고를 한 것이.. 괴링의 본 작전에 상당한 오류를 초래케 했다는 지적이 있더군요.

    공중전에서 영국기의 손실이 50대 였음에도.. 150대 였다는 식의 보고로 부풀리는 등-

    물론 주된 요인은, 전반적으로 영국인들의 결사항전 의식이 주요했고..이런 분위기를 지속
    이끌어간 처칠의 탁월한 리더쉽이.. 각 주요 전장에서 승리하게된 가장 큰 핵심이었겟슴미다만-

    사실 처칠에 대하여는.. 그의 특이한 에피소드에 대해서만 그간 막연히 알아오고 잇엇던 바..
    김박사 덕분으로...그가 최소 2차대전 당시 난국의 시기에는..매우 걸출한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이엇다는 뒤늦은 감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도..이후로 다가올 난국을 훌륭히 타개해 나갈만한 뛰어난 리더가
    나타나 주야 댈낀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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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08:50 새글

    서토도 2차대전사 스토리들을 여러 채널을 통해 듣고 보고 하는 모양이구려. 괴링의 참모가 저그 보스에게 영공군에 대한 역정보를 흘려줬다는 이바구도 상당히 개연성이 있어보임다. 괴링이 딱 그리 믿고 싶은 확증편향의 상태에 자주 빠지는 성향을 잘 알아서 말임다.

    2차대전 때 영국이 독일보다 정보전에서는 여러 수 앞서갈 정도로 독일측 정보부대의 수집과 평가능력은 오판에 오판을 거듭한 사례가 많았지요..

    처칠도 히틀러에 대한 혐오감이 남달라 도박같은 대독 항전의지를 불태웠는데 어째 손님 실수와 행운으로 본 항공전을 무승부로 만들었지요. 하지만 처칠이 잘했던 점은 군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괴퍅한 아재였던 영전투기사령부 총사령관 휴 다우딩을 발탁한 뒤 위기 때에도 끝까지 밀어줘 독공군의 대규모 물량공격을 막아내 건곤일척의 승부를 움켜쥐게한 데 있었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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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1.05 17:43

    (중략) 나치의 부총통은 영국 본토 공방전 시기에는 눈에 띄게 불안감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1941년 5월 10일에 화평안을 전달한다는 이유로 직접 비행기를 조종해 영국으로 향했으나, 영국군에게 사로잡혀 종전 때까지 전쟁 포로로 억류당했다.

    헤스의 영국행은 많은 나치당 지도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으며, 결국 정신 이상으로 얼버무리며 그의 흔적을 제국 내에서 가능한 한 없애려고 했다. 헤스의 자리는 마르틴 보어만이 이어받았고, 독일에 남아 있던 헤스의 가족들은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지내야 했다. 종전 후에는 여타 고위층 인사들과 함께 뉘른베르크 재판에 기소되었으며,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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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09:51 새글

    히틀러의 졸개 중에서 헤어만 괴링, 파을 요젭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등과 초기 나치스당 개국공신 역할을 한 루돌프 헤스(Hess)를 말하네요.. 흔히 당서열 2위라 하지만 초창기 히틀러의 감방 동기로써 히틀러의 총애를 많이 받았을 때나 그리 대접받았심다. 나치스당이 집권하면서부터는 괴링이나 괴벨스에 밀려 한물 간 인사로 취급받던 중에 영국과의 강화안을 모색해 한 건해 보겠다는 의지를 품고 히틀러와도 별 교감없이 단독으로 노르웨이 비행장에서 메서슈밋-109를 타고 스코틀랜드 상공에서 기체는 버리고 낙하산으로 불시착했지요.

    현지경찰에 체포된 후 처칠수상에게 강화회담을 제의하려 왔다며 만나게 해달라 했지만 처칠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구금을 명했심다. '41년 봄부터 '45년 종전될 때까지는 영국에서, 그후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거쳐 종신형을 선고받고는 베를린 슈펜다우 감옥에서 70년대부터는 80이 다 된 고령에도 소련의 강력한 석방 반대로 혼자 이 감옥에서 복역했네요. 요양원 입소 치매 노인처럼 얌전하게 지냈지만 '87년 8월 93세 나이로 자살해 기구한 삶을 마친 비운의 아재라 하겠심다. 나치스 패당 중 인간적 동정을 만년에 꽤 받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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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1.06 12:43 새글

    재민공의 남다른 일가견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전쟁사답게 잘 정리되고 핵심을 짚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 놈이 그 놈인 남의 일이라 치부하기엔 히틀러가 워낙 더 흉악한 놈이라 영국이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라 여기지만 글에 빠져들다 보니 독일 애들 하는 짓이 좀 답답해서 이것만 아니었으면 영국 점령했을 텐데, 이것만 잘했더라면 성공했을 텐데 하며 순간적으로 안타까워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서 쓴웃음을 짓습니다. 하하하.
    하여튼 제3자로서 중립적인 눈으로 볼 때 독일이 실패하고 영국이 끝내 버티고 성공한 것은, 소생의 생각이지만,

    1. 히틀러의 허튼 짓(본래 깡통인데 과포장 됐던 인물)
    2. 정보전에서의 승부(첩보전, 그리고 특히 레이더의 선점. 이 점은 미국과 일본의 대결에서도 마찬가지)
    3. 미국이라는 뒷배(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처음엔 심리적 뒷받침, 그리고 나중엔 엄청난 물질적 배려)
    4. 이도 저도 아닌 운(뭔가 일이 그리 흘러가도록 물꼬를 튼 과거의 어떤 알 수 없는 업장으로 인하여)

    같은 게 아니었나 합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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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09:22 새글

    법사같은 고수가 본 글이 제법 정돈되고 내용기술이 산빡하다고 격려해주니 글쓰는 보람을 느끼외다. 소생이 대학 4년 다닐 때 독일측 입장에 빙의되어 요런 것들만 실수하지 않고 잘 이겨나갔더라면 오늘날 독일어가 영어의 위치를 점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법사도 이 장면에서 비스무리하게 했다는 게 흥미롭심다.

    영국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이유들은 본 글 후속편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법사가 꼽은 4가지 이유들과도 맥락이 많이 닿네요..

    히틀러는 배움의 깊이가 옅어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많았기에 연극적 허세와 금욕적인 생활태도로 정치초년기에는 제법 대중적 카리스마와 매혹감을 획득했지만, 프랑스전 승리 이후는 군사적, 정치적 실패의 연속 속에 2차대전 중기부터는 약물복용으로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조절하려 했심다. 하지만 돌팔이 주치의에 의해 약물오남용과 과다복용으로 끝내는 정신파탄자의 지경으로까지 몰락하고 말았지요.

    정보전에서도 독일은 매번 영국의 밥이었심다. 스파이간 첩보전은 물론이고, 애니그마란 독일군의 암호체계도 영국의 천재 컴퓨터공학자 앨런 튜링에 의해 해독당해 '42년 말부터는 독일이 우세했던 U-보트 전단이 대서양 바다에서 거의 맥을 못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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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1.06 13:06 새글

    영국 침공을 앞두는 당시의 상황을 주제로 한 바늘 구멍(Eye Of The Needle)은 영국에서 제작된 리차드 마퀀드 감독의 1981년 스릴러 영화이다. 도날드 서덜랜드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스티븐 프리드먼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 영화는 켄 폴릿의 1978년 소설 아이 오브 더 니들(Eye of the Needle)에 기반을 둔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한 독일의 첩자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헨리 파버(도널드 서덜랜드)는 '바늘'이라는 이름으로 라디오 통신을 이용해 나치에 정보를 전달하는 스파이다. 연합군의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히틀러에게 가던 그는 배가 부서지는 바람에 외딴 섬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섬에 사는 사람은 등대지기와 젊은 부부, 그리고 부부의 어린 아들이 고작이다. 다리를 잃은 후 알코올 중독에 빠져 허송 세월을 보내는 남편에게 질린 여인(케이트 넬리건)은 새로운 인물 헨리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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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09:29 새글

    이 영화 나도 디기 좋아해 한국과 독일 TV에서 총 서너번은 봤네요. 미배우 도널드 서덜랜드가 '바늘'이라는 암호명의 독일 스파이로 영국에 잠입해 냉혹한 정보수집 스파이로 활약함미다. 그러다 독일로 가기위해 해상에 떠있는 독일 잠수함까지 가려고 노저어가던 보트가 폭풍 속에 난파되지요.

    스코틀랜드 지역 해변에 정신을 잃은 채 표류된 것을 어느 부상퇴역 영공군 조종사 부부가 그들 구조해 돌봐주게 됨다. 몸을 추스릴 때까지 자기 집에도 머물게 해주는데 요놈 스파이가 그 부인과 눈이 맞아 은근슬쩍 몇 합을 나누기까지 하지요.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있던 남편이 눈치채자 절벽에서 떨어뜨려 살해하는 악행 본능을 다시 한번 드러냄미다. 마치 80년대 초 영화 '우편배달부는 문을 두번 두드린다'에서 배달부 잭 니콜슨이 방문집 부인 역의 제시카 랭과 눈이 맞아 그 남편을 살해해주는 것처럼..

    독일 간첩의 임무를 잘 수행하고 독일로 귀환하려 약속한 잠수함까지 가는 중에 무슨 맘이었는지 그 와이프를 죽이려하다 포기하고 그냥 보트타고 나가는 장면에 죽은 남편 복수를 하려는 여인에게 등짝 사격을 당해 허망한 끝을 당하는 게 본 영화의 기둥 스토리로 기억됨다. 끝까지 악인의 의지를 초지일관 펼쳐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의 메시지를 남기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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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1.06 18:11 새글


    만일 -

    독일이 영국을 점령했다면 후일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갑자기 상상을 해 보는데...
    결국 독일은 영국, 프랑스등 역사와 전통의 국가들을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인 통치는 불가능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뭐 시간이 좀 더 걸렸겠지만
    결국 지금 같이 되어있고
    다만 조금 더 돌아왔지 않았을까...
    역사의 거대한 강은 도도히 흐릅니다..
    2차 세계대전도 그 역사의 강 앞에서는
    그닥 큰 걸림돌이 아니었었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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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1.06 21:20 새글

    히틀러가 유럽의 천년왕국을 꿈꾸엇다는데..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영국이 덩게르크 철수에서 실패햇거나
    -북아프리가 전에서 수에즈 운하를 지키지 못햇거나
    -본토 항공전에서 밀려 독일 육군의 영국본토 상륙을 허락하게 되었다면....

    상당세월 유럽의 전체 판도에 큰 변화가 있었으리라 생각해 봄미다.

    해당지역에서..전쟁에 두 번이나 크게 패배햇음에도 ..지금도 독일이 유럽의 맹주국
    입지를 견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상상이 일부 됩디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니..결국은 지박사 말슴대로..그 흐름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고 도도히 흘렀겟슴미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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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09:34 새글

    독일은 영국을 직접 지배할 의지도 능력도 당시에는 없었심다.. 자신들의 '아리안 생활공간'을 열등민족이라 멸칭한 슬라브족과 유태인, 집시들이 점거하고 있는 동유럽과 러시아 지역에서 획득하려 한 때문이지요..

    영국왕조가 독일계 합스부르크 가문과도 혈통적으로 엮어있어 히틀러는 앵글로색슨족을 독일 게르만의 사촌 정도로 여길만큼 심정적으로는 우호적이었심다.

    사실 처칠만 아니었더라도 영독은 충분히 강화조약을 맺을 분위기가 무르익은 때도 꽤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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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09:44 새글

    @김의철 이런 류의 '만약... 했더라면' 하는 전제 속에 기존역사를 다르게 살펴보는 것을 '대체역사론'이라 하지요.. 서토가 좋아하는 음로론과는 달리 초기상황에서 다른 모든 조건은 일정하지만 몇가지 전제가 바뀌었을 때 그 역사는 어떻게 흘려갔을까를 최대한 합리적 관점을 유지하며 써내려가 보는 것임다.

    독일이 1, 2차대전의 패전국이었지만 여러 분야의 인재집단과 국가와 사회를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시스템 인프라가 그런대로 보존되었기에 전후 냉전상황을 잘 이용해 경제적으로, 나증에는 정치외교적으로도 EU의 맹주가 될 수 있었다고 여겨지네요..

    최근 한국이 한류라는 소프트웨어 문화로 세계에서 좀 많이 날리는 것도 삼국시대->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문화적 DNA가 글로벌화를 만나 각국인들이 공감하는 융합문화화를 성공시킨데 가장 큰 이유가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유추해 봄미다. '한국놈은 엽전 근성 때문에 도저히 안 돼..'하고 자기비하하던 때가 우리세대에게는 엊그제 같은 데 이런 상전벽해 같은 대반전을 살아생전 맞아 콧등이 다 찡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