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사

(3회) 독일군의 전격전: 서부전선 대공세-벨기에·네델란드·북프랑스 공략

백조히프 2022. 1. 29. 13:13

여러분, 오늘은 미디어빌에 3회분 원고 넘기고 나서 여기에 같이 소개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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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독일군의 전격전

 

(3회) 서부전선 대공세: 벨기에·네델란드·북프랑스 공략

 

<벨기에 돌파전: 영불연합군 주력 유인용 조공(助攻) 루트>

 

독일은 스칸디나비아전이 마무리지어지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면 연합국의 이 지역 영향력 행사를 일단 저지했다 보고, 공격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40년 5월 초에 들어서자 서부전선에서 총공세를 전개했다.

 

<독일군이 실제로 행한 서부전선 대공세 루트>

 

 

1차대전 때 독일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알프레드 폰 쉴리펜이 입안한 이 지역 공략계획(전쟁발발시 독일이 벨기에를 전광석화처럼 관통해 북프랑스를 낫질하듯 공격함)처럼 연합국측과 독일측 모두가 이 계획을 염두에 둔 서로 간의 공격과 방어 전략에 대해 약간의 변주는 있을지언정 전체 흐름은 대체로 그리 갈 것으로 양자 모두 믿고 있었다.

 

<1차대전 때 입안된 슐리펜 계획의 개념도>

 

 

독일측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초전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상대를 당혹케 하여 기선을 잡으려면 그 어떤 변칙적인 전략이 필요했다. 하지만 도박같은 모험공격을 결코 하지 않으려는 보수적 성향의 독일군 총지휘부 엘리트 최고사령관들은 이러한 변칙전략에 완강히 거부하는 의사를 표명했다.

 

(벨기에 전선 돌파)

 

영불연합군은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다면 1차대전 때처럼 벨기에를 통과해 올 것이라 확신하고, 영불의 정예사단들을 벨기에 영토로 투입해서 기다렸다.

 

’40년 5/10일 독일은 예상대로 벨기에와 네델란드에 낙하산병 공격과 공군기 폭격으로 침공을 개시하자 60만의 벨기에군은 1차대전 때 독일군에 나라가 정복 당해 거칠게 대우받은 원한으로 초기에 예상외 항전을 완강하게 행했다.

 

하지만 북쪽으로 올라가는 프랑스군과는 협력이 잘 되지 않은 채 곧 고립되어 주요 전략적 요충지들(에망에마엘 요새, 알베르 운하)에서 각개 격파 당하고 말았다. 결국 5/28일 벨기에군은 항복하고, 항복 반대파는 런던으로 건너가 망명정부를 세웠다.

 

(네델란드 항복)

 

히틀러는 초기에 네델란드를 침공대상에서 제외했으나 영불연합군에 벨기에 남부를 우회하는 A집단군의 주공 의도를 기만하고, B집단군이 주공임을 확신시켜 영불군 방어병력을 좀 더 분산시키기 위해 선택했다.

 

그 밖에 공군장관 헤어만 괴링도 영국 공격을 위한 전투비행기지가 필요하다며 네델란드의 접수를 종용했고, 독일 공업의 심장부인 루어(Ruhr) 지역의 안전을 위한 완충지로써의 역할도 네델란드 침공 주장을 정당화했다.

 

(네델란드전 진행 경과)

 

1차대전 때 독일의 지배를 받아본 벨기에와는 달리 네델란드인의 항전의지와 국방력 수준(30만 병력, 150여대의 항공기)은 이웃국에 비해 그리 높지 않았다.

 

<로테르담, 암스테르담, 덴 하그(헤이그)의 위치도>

 

<공습으로 대파된 로테르담 시가지>

 

독일은 침공 초기 네델란드 정부가 곧바로 비저항 선언을 하지 않고 항전 의도를 보이자, 루프트봐페(독공군)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출격하여 하루 만에 네델란드 공군기를 절반이나 파괴시키고, 시위용으로 5/14일 로테르담을 30여분 간 맹폭함으로써 시가지를 전소시키고 사망자만 1,000명 이상 발생시키자 네델란드 정부는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끝까지 저항의지를 지닌 빌헬미나 여왕은 하루 이틀 더 대독 항전을 불사했으나 영국정부가 보내준 전선에 옮겨타고 런던으로 망명해 네델란드 국민의 레지스탕스전을 독려했다.

 

(북프랑스 돌파를 위한 독일 신군부의 새로운 주공 루트 채택)

 

이 글 앞 부분에서 1차대전 때와 같은 방식으로 독일군의 주공이 벨기에를 관통한 뒤 북쪽에서 하향 우회해 북프랑스를 치겠다는 작전은 연합국도 알고 있었고 독일군 최고사령부의 최고 수뇌부 역시 그 수 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당연시했다.

 

<독일군 총지휘부의 기존 공격도>

 

독일이 독불 접경의 마지노선을 돌파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기에 1차대전 때처럼 벨기에 북서부에서 남으로의 주공격로가 불가피하다는데 프랑스와 초기 독일군부는 생각이 일치했다. 이 경우 30만의 영국군이 포함된 최정예 프랑스 1집단군(150만)은 독일군이 남하하기 전에 벨기에령 다일-브레다 강 방어선까지 먼저 진공해 독일군 주공을 격파한다는 역공전략을 갖고 있었다.

 

독일 입장에서 기존 주공 루트라면 1차대전에서처럼 교착상태의 장기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이 작전의 전개에 히틀러는 불만이 컸다. 그 당시 끔찍한 참호전에서 부상까지 당한 경험 때문이었다. 이때 에리히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 같은 기갑군에 의한 전격전을 신봉하는 모험주의 성향의 신군부가 새로운 전략개념의 주공 루트를 제안하자 히틀러는 바로 매료되어 전격 수용했다.

 

<아르덴 삼림 돌파 후의 연합군 섬멸 공격도>

 

만슈타인 등의 제안은 연합군이 대규모 기갑부대의 통과가 불가하다 여기는 울창한 나무숲들로 우거진 아르덴 삼림을 연합군 사령부 수뇌들의 허를 찔러 집중된 기갑집단으로 최대한 신속히 돌파하여 최고의 전진속도로 영불해협까지 진군해 벨기에령에 있던 연합군을 포위섬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것은 위험변수도 만만찮은 도박적인 작전이었다.

 

그 때문에 프로이센 시절부터 유서깊은 정통파 군사명문 집안 출신이었던 브라우니치 육군총사령관과 할더 총참모장 같은 이들은 삼림 속에서 보병의 엄호도 없이 좁은 길로 진격하는 기갑군이 연합군의 측면공격이나 항공기 공격에 노출된다면 바로 끝장이라며 이 작전에 맹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이들의 군사전문 엘리트 의식에 일련의 열등감과 적개심을 가진 상병 출신 히틀러에게는 만슈타인 류의 비정통 독일육사 장교들의 리스크는 있어도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습전략이 더 구미에 맞았다.

 

<아르덴 삼림 속을 통과하는 독일군 전차 부대>

 

그리하여 만슈타인의 안대로 원래 조공의 임무를 부여받은 룬트슈테트 원수의 A집단군은 이제 주공의 역할로 바뀌며 연합군의 허를 찌르는 기갑집단들의 아르덴 삼림 돌파를 시도한 지 사흘 만인 5/13일에 해내었다. 그 기간 북부에서 B집단군의 선제 위장 공세에 연합군은 철저히 기만당해 만슈타인과 히틀러의 바램대로 아르덴을 돌파하는 독일 주공군에 측면역습도 항공기 공격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완벽한 돌파성공이었다.

 

후일 ‘사막의 여우’로 유명해진 에어뷘 롬멜도 클라이스트 기갑군 내에서 기갑사단 하나를 사단장으로 지휘하며 아르덴 삼림을 선두권으로 돌파하자마자 미친 듯한 진군속도로 북프랑스 전역을 휩쓸며 가공할 전공을 쌓았다.

 

아르덴 삼림을 통과해 출몰한 독일 주공 부대를 발견한 프랑스 수비군은 혼비백산해 전의를 상실하며 허겁지겁 도주하기에 바빴다. 원래 주공이었던 B집단군의 조공마저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호응하듯 매섭게 몰아치자 바야흐로 연합군 전선의 총붕괴가 임박해지며 독일군의 전격전 신화 역시 여기서 만개하게 되었다. 어쩌다 이런 도박이 통했으며 향후 프랑스 전은 어떻게 전개되어 마무리될 것인가?..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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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2.18 15:58

    첫댓글 독일은 역사적으로 항상 전선이 서부와 동부로 나누어진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전격 작전으로 서쪽을 빨리 제압하고,병력을 동부로 빼서 동쪽의 러시아를 막는 것이
    독일군 지휘부의 전통적인 아니 숙명적인 작전계획으로, 일이 그르쳐지면 首鼠兩端 의 입장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작전과 전장은 엄연히 수많은 변수가 많은 법입니다.
    더군다나 히틀러가 일일이 자신의 지시대로 병력을 움직이라는 명령으로 일선 지휘관들의 발을 묶어버리는 무모한 짓을 많이 하였지요.이게 먹힐 때도 있지만, 잘못된 결정인 경우가 많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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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09:52 새글

    길영공이 역시 1, 2차 세계대전사에 대해서도 해박하외다.. 1차대전 때 독일이 슐리펜 계획에 따라 질풍노도처럼 벨기에를 관통한 뒤 북프랑스와 동프랑스 양쪽에서 조프르 휘하의 영불 연합군을 압박해 공격해 왔지만 마른 전투에서 독일 우익군의 병력부족(2개군을 동부전선 대 러시아전에 돌림)과 연합군의 사력을 다한 저지선 방어를 뚫지 못해 교착전으로 가버렸지요.

    독일측은 그 때의 실패를 어떻게든 반복하지않으려 이번에는 아르덴 삼림을 전격 돌파하는 비수를 구사했는데 이게 연합군 총지휘부의 당황한 혼선과 무능에 의해 대치전선 총붕괴로 그냥 무너지게 했심다. 히틀러의 도박이 여기서는 어찌 한번 크게 통했지만 이 도박감으로 인해 '42~'43년 스탈린그라드전에서는 탈탈 털리는 대패로 돌아왔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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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2.18 18:16

    내용 중에..당시 독일도 한국처럼...육사출신과 3사출신들(?) 간의 은근한 경쟁이
    있었던듯한 내용이 눈에 띄는군요.^^

    인종이 달라도..사람들 사는 모습은 유사한 데가 있는 모양임미다.

    왜 당시 독일이 그러한 전쟁을 굳이 벌렸나 하는 생각이 늘 잇었는데..
    본 글을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유럽 자체가 애초부터 거의 한 나라였기에...어느 쪽이든...힘이 쎄어지거나
    그럴듯한 명분이 생기면 항시 이웃국가들을 복속시키는게.. 거의 당연한 처사로 여겻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해당지역 역사의 관성이라 할까요.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를 머라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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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09:48 새글

    어떤 때는 타성에 빠진 전문가연 하는 사람들보다는 비정통파지만 제3자적 시각에서 현상을 꿰뚫는 혜안을 가진 이들이 나타나는 법이지요.. 이럴 때 리더라는 사람들이 이런 창의성 있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촉각과 배포가 있어야 하는 데 전문가에 대한 열등감과 적개심을 품고 있던 히틀러가 이 장면에서는 그가 가진 과대망상조차 괜찮은 쪽으로 작용해 바로 받아들이게 된 운도 따랐는 듯 함다.

    하지만 만사 새옹지마라고 한번 재미봤던 운이 항상 자신과 함께 할거라는 그릇된 믿음속에 나중에는 대재앙으로 돌아왔으니 결국 '성공의 복수'를 제대로 당한 셈임다. 우리에게도 무릇 경계해야 할 장면이자 메세지라 아니할 수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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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2.18 18:16

    따라서 중국이 한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에 욕심을 내는 것은 이해할 수 잇어도..
    미국이 대양건너 나라들에 탐심을 내는 것은 상당부분 부적절 하다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됨미다.

    피가 섞인 것도 아니라...그 명분이 부재하고 오직 탐심만이 작용햇다는 뜻.

    그러나 한중간 전쟁, 또는 한일간 전쟁 등은..적절한 여건이 되면
    서로 한 판 붙어도(?) 머라하지 않아야겟다는 마음이- ^^

    물론 전쟁은..결코 하지않는 것이 최선이겟슴미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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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09:45 새글

    요 언설은 유럽이 원래 하나의 나라였다는 서토의 단언에 동의하기 어렵기에 아, 이런 생각도 있네 하고 그냥 패스 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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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53 새글

    약간 타이밍이 늦은 댓글이 되어버렸습니다만 -

    "April 9th" 라고 하는, 덴마크 군인들의 2차대전 개전 당시에 전투 상황을 영화한 것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한번 볼만 합니다.

    2차 대전시 독일의 침공 전후한 1,2일간에 덴마크 자전거 보병 1개분대원들이 겪은 실화로 추정이 되는 영화입니다. 영어자막이 나옵니다.

    https://youtu.be/Q9xHq7NmW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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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20:39 새글

    나도 이런 덴마크 영화가 있다는 걸 영화 다운로드 받는 곳 어디선가 스쳐가며 봤네요.. 그런데 이틀간이나 1개 분대원이 저항전투를 했다는 것은 하루 만에 행한 자기네 정부의 공식항복을 미처 알지 못했을 수도 있어 보임다.. 어쨌든 영화적으로는 어느 정도 공감가게 만들었는지 한번 살펴 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