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사

(4회) 독일군의 전격전: 7주간의 프랑스전과 덩케르크의 탈주 기적

백조히프 2022. 1. 29. 13:22

동기 여러분,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독일군의 전격전' 편 중 마지막인 4회분을 박영철 대표에게 넘겼기에 여러분께 소개함미다. 애독해 주시기 바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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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독일군의 전격전

 

(4회) 7주간의 프랑스전과 덩케르크의 탈주 기적

 

(우왕좌왕한 프랑스군 총수뇌부)

 

독일의 A집단군의 기갑군단 주력이 아르덴 삼림을 사흘 만에 돌파하여 뫼즈강을 따라 스당 쪽에 나타나자 프랑스군 예비수비대 2개 사단은 소스라치게 놀라 변변한 저지 전투도 없이 그냥 전선을 이탈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모든 프랑스군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는 용감한 단위부대들도 있어 많지는 않았으나 요소요소에서 격렬한 저항전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보병 엄호없이 우회해 나가는 독일 탱크들을 뒤에서 물끄러미 쳐다 보기만 할 때가 더 자주 있었다.

 

<쾌속진공하는 독일 A집단군>

 

문제는 여전히 1차대전의 마인드에 젖은 프랑스 고위 군부가 전격전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독일군이 어떤 전략적 목표를 갖고 공세를 전개하는가에 대한 무능한 상황파악력으로 타성에 젖은 임시땜빵식 병력 용병술을 펼치는 데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영국원정군 역시 그리 자유롭지 못했다. 초전에서 독일군의 전략적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아르덴 전선이 뚫리자 자국의 유일한 정예 육군병력이 우왕좌왕하는 속에 마구잡이식 방어전에 투입되어 소모되는 것을 우려해 프랑스군과 일심동체적인 협력작전을 적극 펼치려 하지 않았다. 본토방어를 위해 영국 항공기가 과도하게 프랑스 땅에 투입되는 것도 꺼려했다.

 

영불 연합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을 비롯한 앙리 지로, 막심 베이강 같은 프랑스측 최고 지휘부는 모두 1차대전 때의 교착전 마인드로 당시 독일군보다 1.5배나 많은 총병력과 탱크 수를 남프랑스와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들에까지 분산배치하며 엷게 전전선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다보니 새로운 현대전 개념 속에 탱크들을 최대한 끌어모은 화력의 집중으로 상대의 가장 약한 곳을 송곳처럼 뚫고 나와 보병의 엄호도 없이 전선을 종심으로 가르며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독일군 기갑사단에 프랑스군 주력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가믈랭은 이들을 저지할 연합군 공군을 장기전을 위한 전력보호라는 명목 하에 출격을 억제하는 악수까지 연발했다. 게다가 프랑스 주력군 사령관인 앙리 지로와도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보다 못해 프랑스 총리 폴 레이노가 적전에서 가믈랭을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1차대전의 영웅이라는 막심 베이강에게 그 직위를 맡겼다. 급락한 군의 사기 제고를 위한 심기일전의 교체였으나 1차대전의 영웅에게도 총붕괴의 나락을 피할 별 뽀쪽한 저지수단이 없었다. 전차와 항공기가 합동으로 협력하며 속도전을 펼치는데 보병중심의 구태의연한 전술 마인드를 갖고 있던 베이강에게 역전의 한 수를 기대하는 것은 크게 무리였다.

 

이제 프랑스군의 빠른 총붕괴가 불가피해졌다고 낙담한 영국군의 고트 사령관은 영국본토 방어를 위해 25만 영국원정군을 철수시키겠다는 건의를 처칠에게 하여 이를 허락받는 지경에까지 다다랐다.

 

(간헐적인 연합군의 국지적 반격)

 

그런 와중에서도 프랑스 측의 열렬한 기갑전 주창자였던 샤를 드골의 탱크부대가 5/15일 랑 근처에서 질주하는 독일 기갑부대의 측면을 공격하며 관통하자 무주공산을 달리는 듯 하던 독일군은 비로소 그 역공에 처음으로 놀랐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일회성 공격이었을 뿐이었다. 드골부대의 탱크수가 너무 적었고, 연료를 다시 채워넣기 위해 당일 저녁에 전장터를 떠나 철군해야 했다. 잠깐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었을 뿐 쇄도공세를 막지는 못했다.

 

<연합군을 포위하는데 성공한 독일 A와 B집단군>

 

5/21일에는 영국군 2개 사단이 2개 전차대대의 지원을 받아 아라스에서 독일군 기갑부대의 측면을 들이박아 치고 나가는데 성공해 이를 수습하러 나온 독일의 롬멜이 5개사단의 공격을 받았다고 느낄만큼 그 타격력이 컸었다. 하지만 이 공격이 프랑스의 막심 베어강이 동원할 수 있는 마지막 부대의 성과였고 더는 없었다. 바야흐로 프랑스전의 승패는 결정되어졌다

 

(덩케르크의 수수께끼와 기적)

 

5/20일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사단들이 솜강 어귀에 있는 아르빌에 도달함으로써 연합군을 사실상 두 쪽으로 쪼개놓았다. 이렇게 프랑스 9군이 무너지자 쪼개진 전선 위쪽에 있던 프랑스군 1군과 영국원정군은 아래와 위에서 공격해 오는 독일군 사이에 끼여있게 된 신세였다.

 

도버해협이 보이는 덩케르크까지 간신히 집결했지만 종심이 10Km 밖에 안되는 좁은 해안지역에 운집한 연합군의 양 측면과 아래 쪽에는 공격하는 독일군이 포진하는 형세였다. 독일군의 탱크와 항공기, 대포 공세에 바다로 내몰려 빠져죽지 않으려면 33만8천명이라는 대군이 항복하여 사로잡히는 수 밖에 없었다.

 

<덩케르크 모래사장에 운집되어 있는 34만의 연합군>

 

바로 이 때 2차대전의 승패를 결정지을 만한 최초의 역사적 결정이 5/24일 히틀러에 의해 내려졌다. 내몰려져 있던 연합군에 대한 독일군의 총공격이 잠정 취소되어진 것이었다.

 

연합군은 내심 의아한 가운데서도 이 하늘이 준 탈출기회를 놓칠 수 없다하여 갓 출범한 처칠정부가 ‘다이나모(발전기)’라는 작전명 속에 영해군 및 민간 선박까지 총동원한 1,000여 척의 배로 갇혀있던 영국군, 프랑스군, 망명 동유럽군들을 공격이 없었던 첫 사흘을 비롯해 근 1주일에 걸쳐 치명적인 공격피해나 엄청난 병력손실없이 거의 대부분 인원을 영국본토로 이송할 수 있었다.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 병력의 기적같은 적전 대탈출이었다. 영국은 이 기적으로 독일군의 영국침공시 방어할 알토란 같은 부대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고, 후일 노르망디 상륙전(1944. 6)에 투입할 경험 많은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항전의지가 초전에서 약했던 대부분의 프랑스인들과는 달리 영국인들에게 그 어떤 두려운 적과 앞으로 다가올 어려운 난관들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 항전의지를 고취시키는 백신을 맞혀준 것이었다.

 

(너무 빠른 진격속도에 대한 히틀러의 불안감)

 

대체 왜 히틀러는 이처럼 수수께끼 같은 명령을 갑작스레 내렸던 것일까? 진격명령 정지의 첫 번째 이유는 예상을 뛰어넘는 빠른 진격 속도에 대한 히틀러의 불안감 때문이었다. 아르덴 삼림을 빠져나온 이후 기갑군 사령관 구데리안은 상급사령부의 소심한 진격속도 제한에 크게 좌절했지만, 그럼에도 예하 선발대 롬멜사단의 눈부신 쾌속진격과 연합군의 대혼란에 힘입어 주력 기갑부대는 큰 손실없이 5/20일에는 드디어 연합군을 양분할 수 있는 지점까지 진출했다.

 

그리되자 독일군 최고지휘부는 그때까지의 신중한 공격자세를 버리고 이렇게 된 마당에 프랑스 육군의 주력을 섬멸할 수도 있겠다 싶어 이를 염두에 둔 ‘적색작전’ 계획안을 검토하며 아르덴을 통과한 룬트슈테트 A집단군의 기갑부대에 해안 저지대로 돌진하게 명령했다.

 

바로 이 무렵인 5/21일 앞서 말한 2개 전차대대의 지원을 받는 영국군 2개 사단이 우연히 아라스 근처에서 출몰하여 독일군 기갑부대 측면을 축차투입된 병력과 탱크대로 공격하는 바람에 각개 격파되긴 했지만 그 때까지 저항다운 저항을 받아보지 못한 롬멜에게는 깜짝 놀랄만한 위협으로 한 순간 다가왔다. 그의 조우전 보고는 히틀러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불안감을 새롭게 일깨웠다.

 

우리가 과연 이기고 있는가? 혹시 적이 쳐놓은 포위망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니 독일 탱크부대가 보병의 엄호없이 너무 빠른 속도로 너무 멀리 홀로 전진했음이 새삼 깨달아졌다. 영국군의 아라스 역공 같은 것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보병부대가 기갑부대 회랑을 따라 전진해 올 때까지 잠시 기갑부대는 숨을 고를 재정비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히틀러는 믿게 되었다.

 

갑자기 쾌속공격론자로 변신한 최고지휘부의 브라우히치 총사령관과 할더 총참모장이 합세해 연합군 섬멸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며 계속 같은 템포로 밀어부치자는 주장에 대해 히틀러는 자신의 1차대전시 이 지역에서의 참호전 경험을 들추어내며 이곳 해안 저지대는 탱크부대의 단독 작전 수행에 아주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퇴짜를 놓았다.

 

(영국과의 평화조약 기대)

 

정지 명령을 내려놓고 다른 한편 히틀러는 풍전등화의 궁지에 몰린 고립무원의 영국측에서 자국 영토 보전을 위한 화평안을 이쯤에서 내어놓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품고 있었다. 그는 이제 서부전선의 승패는 사실상 결정났다고 보고, 다가올 소련침공 준비를 위해 영국과는 최대한 관대한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리라 결심하였다.

 

더구나 영국군과 프랑스 일부 탱크대대의 간담 서늘케 했던 역습을 보고 그 결심을 더 굳혔다. 자신이 볼 때 미국도 유럽대륙의 전쟁에 개입하려 하지 않으려는 현 상황에서 영국정부가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내각요원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당연히 더 이상 승산없는 무모한 대독전쟁을 피하려는 의사결정을 내려줄 것이라 의심해 마지 않았다.

 

더우기 유화주의자였던 전임 체임벌린 수상의 후임자로 같은 온건주의자였던 헬리팩스 외상이 거론되고 있는 마당에 더 기대치가 높아갔다. 독일 외상 립벤트로프가 이태리 외상 치아노의 조언 속에 작성했고, 히틀러가 재가를 해 영국정부에 제시한 화평조약 초안의 주요 골자는 다음이었다. ‘영독 양국은 완전히 휴전하고 향후 10년 간의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면 독일은 영국에 상륙하지 않고, 덩케르크에 갇혀있는 영국원정군을 무사히 귀국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정도의 조건이라면 어찌 영국정부가 거부하랴 싶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귀족출신인 헬리팩스가 하원에서 수상 인준을 받지 못하고, 해군전쟁상이자 또 한 명의 수상후보자였던 윈스턴 처칠에게 수상이 될 기회가 돌아갔다. 뮌헨회담에서부터 히틀러의 속셈을 간파하고 유화파의 유약함을 맹렬히 비난했던 강경파 처칠이 전시수상으로 취임하자마자 결사항전을 독일측에 선언하고, 34만의 영불 연합군의 해상탈주전을 필사적으로 전개했다.

 

<필사적으로 탈출감행하는 영국군>

 

<독공군에 피격당하는 영국 호위함>

 

히틀러는 사흘 만인 5/26일에 진군정지 명령을 철회하고 공군장관 괴링이 장담한 독공군의 공격을 허락했다. 하지만 이 공격으로 연합군 탈주를 엄호하던 벨기에 수비군과 프랑스 식민지군의 항복 만을 이끌어냈을 뿐 도버해협을 건너가는 영국의 군민간 주력 호송선단들의 저지에는 영공군과 영해군의 격렬한 방어로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 연합군은 기적같은 대탈주에 성공하여 영국본토전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욱일승천하던 독일군의 불패 신화에 처음으로 오명이 드리워진 군사적 실패의 한 편이었다. 결과적으로 히틀러가 내린 3일 간의 진격정지 명령은 연합군의 초반 숨통을 끊어놓을 호기를 놓친 대실수로써 전쟁사에 기록되었다.

 

34만명의 탈주병 중에 프랑스군도 11만명이나 있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하루이틀 휴식하고서는 배를 갈아타고 노르망디와 브루타뉴에 있는 프랑스 항구로 되돌아가 아직도 독일군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군에 가세했다.

 

(프랑스군 주력의 치욕스러운 항전 의지)

 

이런 부대들과 드골 기갑부대 등 일부가 결사항전 결의를 보였지만, 대다수의 프랑스 군부 및 정부 고위 지도층은 포위된 1집단군에 망연자실해 자포자기하며 독일군의 쾌속 진군에 우왕좌왕하다 6/5일 베이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마침내 6/10일 파리의 ‘비무장 선언’을 하며 북프랑스에서의 항전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프랑스군이 이렇게 당나라군이 된 주요 이유는 프랑스군을 장악하고 있던 보수적이고 고루한 장군들이 폐쇄적인 관료문화를 고수하며 새로운 전술연구와 기존 군사교리의 문제점들을 파악해 군을 전투력이 뛰어난 강군으로 키우지 않고, 1차대전 후 ‘20년 간의 평화시대’에 자신들의 자리보전을 위한 관료적 군대로 전락시킨데 있었다. 물론 이런 폐습은 꼭 프랑스군에서만 만연된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복수심에 불타는 새로운 독일군을 만나 극적으로 노출되었다.

<전의를 상실해 독일군에 항복을 애원하는 프랑스 패잔병들>

 

사실 이 초전에서 점령당한 프랑스 영토는 전국토의 5% 남짓이고, 마지노선에 투입된 100만과 포위망 밖에 있는 병력이 여전히 100만이었지만, 초전 무대가 벨기에 땅이라 국토를 사수하겠다는 프랑스군의 방어의지도 취약했고, 가믈랭 총사령관 같은 이의 졸렬한 용병술과 현대군사 전략에 대한 무지가 겹쳐 독일군의 예봉에 제대로 된 저항도 한번 못해보고 그냥 무너져 버렸다. 레이노 정부는 결국 6/14일 파리를 독일군에 내어주는 결정을 내렸다.

 

다른 한편 독일군의 전격전 승리를 부러움과 시샘 속에 바라보던 이태리의 무솔리니가 자기도 한 몫 챙길 기회를 만들려 하이에나처럼 6/10일 대프랑스 선전포고를 하며 남불 접경지역을 넘어오고 있었다. 거기에다 런던에 망명한 드골이 처칠에게 프랑스와 영국 양국의 연방안을 제의하며 대독항전을 주문했다.

 

이 소식을 접한 파리의 레이노 정부는 이것은 프랑스가 영국의 자치령이 됨을 의미한다고 단박에 거절하며 1차대전의 영웅으로 대접받던 필리프 패탕에게 내각 임시수반이 되어 독일에 저항하며 좋은 조건으로 휴전조약을 맺어줄 것을 의뢰했다. 하지만 옛 사고의 보수주의자 페탕은 프랑스의 끈질긴 저항을 통한 명예로운 국체보전보다 전국의 전시상황 속 무질서와 좌파 세력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그리고 이태리의 준동을 더 못마땅해 하며 경계했기에 저항을 포기하고 6/25일 독일과 휴전조약을 맺으려 했다.

 

<파리 방문한 히틀러를 맞는 페탕>

<1차대전과 똑같은 장소에서 행해진 정전협정>

 

정전협정은 히틀러의 희망에 따라 1차대전 때 파리교외 콩피에뉴 숲 열차 식당칸에서 조인되었기에 그때와 같은 장소에 같은 기차를 끌고 와 동일한 식당칸을 연출해 승자와 패자만 바뀐 채 22년 만에 재연되는 정치 쇼로 진행되었다. 독일인들의 광분하는 환호작약 속에 프랑스인들에 복수심의 굴욕감을 깊게 아로새긴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었다.

 

<정전협정 후 탄생한 ‘비시 프랑스’>

 

정전협정에 따라 독일이 파리 포함 북프랑스와 중부 프랑스 일부를 포함한 프랑스 전국토의 2/3를 점령 통치하고, 중남부에 소재하는 지방도시 비시를 행정수도로 하는 친나치 성향의 비시 프랑스를 자치령으로 수립하여 페탕이 행정수반이 되어 독일 측에 전황이 급박해진 ‘42년 중반까지 형식적으로 통치하였다.

 

(프랑스전의 의의)

 

독일의 프랑스 침공전은 군사적으로 새로운 의미가 있는 전쟁이었다. 바로 전격전이라는 현대적 개념의 군사전략이 새롭게 부상해 그 꽃봉오리를 만개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초기 독일내에서도 많은 의문과 비판을 받았던 이 ‘전격전’이 서로 간의 살상과 파괴를 최소화하는 혁신적인 공격 개념으로 이 전장에서 시험대에 올라 1차대전 때 양국이 모두 400만의 사망자를 낸 데 비해, 이번에는 프랑스가 12만, 독일이 4만명의 사망자만 내고 전쟁이 종결되었기에 그 ‘피해 최소화의 효과’를 제대로 입증했다.

 

<파리에 진군한 독일군 퍼레이드를 보며 굴욕감에 눈물짓는 시민들>

 

<5년 후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 파리에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는 히틀러>

 

하지만 히틀러에게는 이 전격전의 공격개념이 한 때 최고의 정치적·군사적 영광을 선사했지만 곧바로 ‘성공의 함정’으로 작용하는 양날의 칼이 되었다. 내포된 위험 속에서도 상당한 행운과 상대의 무능으로 이룬 성과였지만 히틀러는 자신의 전략적 판단능력을 과신하게 되어 더 이상 새로운 전쟁을 치루는데 망설이거나 주저함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이는 결국 향후 영국본토 항공전, 북아프리카 사막전,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을 비롯한 전체 독소전에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며 자신이 이루고자 꿈꿨던 천년왕국을 개전 후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패망과 절멸의 길로 떨어지게 했다.

 

(1편 '독일군의 전격전'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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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2.25 23:00

    첫댓글 당시의 프랑스의 탱크가 독일제보다 더 성능이 우수하고 육군의 병력수도 프랑스가 훨씬 더 많았고 여기에다 영국군 병력을 합하면 연합군 병력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사실 독일은 나름대로 전쟁 준비를 하였지만 1차 대전 승전국의 눈치를 보면서 제한적인 군비 확장을 해왔으며 전차도 소련에서 위탁 생산을 할 정도였습니다.


    히틀러도 예상보다 빠른 전선 장악에 보급이 미처 못 따라가고 독일군의 전쟁 피로도 격심해 갔기 때문에 이에 대한 후속조치와 영국과 프랑스의 전략과 외교적 대응에 오판을 한 것도 있지만,영국의 해군력 때문에 영국 본토 침공에는 부담을 느끼고 대신 괴링의 항공 전력에 기댈 수밖에 없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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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21.12.26 12:56

    길영공의 언급이 다 맞네요.. 본문에서도 제법 자세히 기술되어있듯이 프랑스군은 병력수와 무기장비에서 혼자서도 독일군을 능가했지만 구시대 장군들이 군대를 장악해 '우리 때는 하며..' 군대를 관료집단화해 주력군이 군기가 한참 빠진 군대로 떨어지게 했지요..

    프랑스제 소무아 탱크와 영국제 마틸다 중형탱크가 독일제 주력 2호 탱크보다 철갑이나 무장 화력은 좋았으나 기동력은 떨어졌고, 무엇보다 탱크를 모아서 집중화력을 내뿜는 전술운용 능력이 떨어져 독일 기갑대의 초전 적수가 되지 못했심다. 아무튼 나머지 코멘트 지적들도 뭐 하나 틀린 소리가 없네요.. 밀리터리 덕후로 인정하겠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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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2.26 04:02

    이러한 뒷 배경을 알고 덩케르크 탈출에 대한 작품들을 보았어야 했는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냥 영화만 보았으니..그 이해력이 부족해질 수 밖에- ^^

    현재까지의 문명에서는 여전히.. 군대의 유지가 중요하며, 군사력이 받침 되어야
    나라의 건전한 존립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지는군요.

    향후 1-20년 정도 후에는.. 이러한 약육강식의 문명이 자연스레 사그라들게 되고..대신에
    생명과 인본이 매우 강하게 전면적으로 대두되는 문명이 새롭게 대두할 수 잇을랑가 모리겟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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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21.12.27 08:57 새글

    이전에도 간간이 2차대전사에 대해 소개했지만 이번에 한번 더 총정리판을 내어놓는다는 기분으로 쓴 글 들이니 정독하면 이 전쟁사에 대해 많은 이해폭을 넓힐 수 있을 것임다.

    호기심과 만학 열정이 식지 않은 서토에게도 이 연재물이 적지 않은 마중물이 되어 전쟁사 세계에 들어와 같이 놀았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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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2.26 08:50

    프랑스군이 당나라군 처럼 묘사된 구절이 있는데
    당나라군대가 오합지졸 군대처럼
    들리는데
    중국에선 당나라를 고대국가중
    최고봉의 문화를 이룬 왕조로
    높이 평가 하는 국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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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21.12.27 08:53 새글

    당왕조가 618~907년 기간동안 289년을 유지했는데 한나라 이래 중국을 재통일해 중국인들에게 한 다음으로 인기있는 왕조인 것은 사실임다. 하지만 초기 당태종 이세민의 재위기간인 627~649년, 즉 '정관의 치'라는 22년 간을 넘어서고부터는 국력이 서서히 내리막을 달렸네요. 정관의 치 이후에도 한참동안은 문화적으로나 정치외교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극성기의 왕조로 대접을 받았지만..

    755년에는 투르크계 색목인 안록산의 난을 맞아 수도 장안까지 뺏기는 국가적 수모를 당하면서 그후 잠시 증흥기를 가졌다가 907년 주전충에 의해 멸망 당할 때까지 이민족들에게 국토 곳곳을 자주 유린 당해 '싸움 못하는 당나라군'이라는 멸칭이 생긴 듯 합디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도 뭐 좀 안되면 '심천포로 빠졌다!'라는 표현처럼 기강 빠진 군대를 '당나라 군대'라 칭하는 관용적 표현이 만들어진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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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2.26 10:22


    삼국지를 읽다보면 잘 나가던 제후들이 꼭 망하는 마지막 전쟁에서 충신과 현자들의 말을 안듣다가 망했다. 망할라면 자기 고집을 부리다 못해 충언을 하는 사람들은 끝내 목을치고 하는 것도 많이 나왔다.

    독일, 영불등의 전쟁 상황을 다시금 읽어보면 구시대의 아이디어를 벗어나지 못하는 쪽이 항상 망한다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구시대의 인물들은 자기자신을 돌아볼 줄을 모른다. 나는 한국의 지도층들도 이런 부분에 신경을 쓰고 자기 자신들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내 자신에에 대해 자꾸 의문을 품어보아야 된다 생각한다.

    서토도 옛날부터 말했지만 한국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다.
    비전도 없고 둘다 똑같이 표장사로 먹고 사는 기술만 연구한다.
    마 그러니 진보,보수라고 하지 말고 그냥 좌,우파로 불러주면 어떨까 싶다.

    하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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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21.12.26 13:52

    지박사의 역사의식에 공감이 많이 되네요..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현재의 기득권 세력이 누릴만큼 누렸으면서도 자신들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새로운 도전세력을 기존의 힘으로 억누르려 할 때 그 사회는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물안 개구리처럼 스스로가 만든 폐쇄적 늪에 빠져 고사하게 됩디다.

    이웃국 일본이 최근 그 늪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듯 보여지네요. 1955년에 시작된 자민당의 '55년체제'가 지금까지 존속되는데는 역사의식 없는 안주의 늪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는 대다수 일본 국민의 시민성도 한 몫 한다고 여겨짐다. 최근에 읽은 테가트 머피의 '일본의 굴레'라는 책을 접해보니 그런 성향이 더 많이 느껴지데요.

    역사란 토인비식으로 '도전과 응전'을 통해 발전해 가는데 이는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발전설'과도 일맥 상통한다고 믿어짐미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선정국도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려는 에너지들이 충돌하는 '갈등의 시기'라 보여지기에 이 몸은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네요.. 2차대전사 등을 살펴보면 더 그렇다는 생각이 듦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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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2.26 14:38

    재민박사 말대로
    역사는 민중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마련이지요.
    잠시 역방향으로 퇴행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민중의 뜻대로
    흐르게 될 것입니다.

    오합지졸의 군대를 당나라군대
    라 부르는 재민박사 지적이 맞습니다.
    중국의 대표하는 왕조가
    당욍조입니다.
    당왕조는 선비족 출신의 피가 섞인 관룡집단에 의해 성립된 왕조로 아시아 지역에 1,000여년 지속된 율령제 3성6부제 부병제
    등 군제 관제 세제를 완성한 왕조로 다양한 종교의 허용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왕조입니다.
    왕조 말기엔 군사력도 약화되는
    것은 어느 왕조나 마찬가지 입니다. 실제 중국 역사에서는
    북송의 군사력이 가장 허약 하였습니다.

    당군에 대한 비하는 고구려 멸망후 나당전쟁등으로
    중국에 대한 비하로 사용되었다는 설과 근대에
    와선 국민당군대에서 당군대
    란 말이 나왔다는 설도 있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역사적인 사실과는 다른 용어로
    보입니다.

    몇년전 신장 위구르 지역
    돈황석굴을 탐방 했을때
    북경대학 출신인 문화해설사가
    (돈황지역은 모두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해설사 임)
    당왕조를 중국 최고의 왕조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원 청왕조는 달갑지 않는 왕조로
    여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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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21.12.27 08:52 새글

    소프트웨어 문화가 발전한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약해지는 것이 불가피한 모양임미다. 어쩌면 군사력이 별로라는 평가는 그 사회의 문화적 자산이 풍요로움을 반증하는 지표일 수도 있겠네요..

    두보와 이태백은 물론이고 유종원 등 당송 팔대가가 나타난 것도 이 왕조 때부터이니 의식있고 문화를 사랑하는 중국인들이 당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과 애정을 품는 것이 당연하다 여겨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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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2.26 15:34

    어매 부끄러워 ㅎㅎ(사학과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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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21.12.27 08:50 새글

    수인공이 오늘날 정치 칼럼글을 잘 쓸 수 있는 게 다 사학과에 몸담았던 그 커리어 때문이라고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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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2.27 18:00 새글


    이거는 서부전선은 아니고 독일과 러시아 간의 탱크전 영화인데 - "White Tiger"라고...
    러시아 측에서 만든 영화임
    한번 볼만함미다.

    https://youtu.be/qiGDJ5-dX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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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09:59 새글

    이 영화 나도 수년 전에 다운 받아 본 적이 있네요..소련군이 당시 쿠르스크 탱크전 등에서 어째어째 물량으로 이기긴 했지만, 독일군의 T-4 , 즉 티거 4호전차에 너무 호되게 당한지라 그 두려움이 유령같은 존재로 형상화되어 본 영화에 나오는 '화이트 티거' 전차로 등장했지요..

    러시아 영화답지 않게 소련군의 영웅적 투쟁만을 그린 국뽕 영화가 아니라 전쟁에 대한 인간의 본성을 내비친, 다시 말해 '인간 내면의 야수성과 폭력성은 항상 전쟁을 필요로 한다'라는 메세지를 전하려는 영화라 사소한 허접스러움의 노출에도 불구하고 꽤 괜찮은 평가를 받은 영화라 햇심다. 나도 이번에 다시 한번 찾아 챙겨볼 맘이 생김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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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2.27 23:46 새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1년 12월19일로 당시 카사블랑카는 프랑스령으로서 공식적으로는 비시 프랑스(Vichy France) 정부의 통제하에 있었다. 파리 남쪽에 있는 비시를 수도로 삼았기에 그렇게 이름 지어진 비시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파리 등 북부를 제외한 남부 프랑스를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다스린 정권이다"(출처: 위키백과)

     

    사실상 나치 독일의 괴뢰국가이던 비시 프랑스 정부는 1942년 독일이 프랑스의 나머지 지역을 모두 점령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카사블랑카의 영화의 배경이 바로 비시 정부 통치하의 카사블랑카.
    그리고 나치 치하의 레마르크의 개선문도 생각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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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09:57 새글

    길영공 역시 2차대전사에 해박해 같이 대담 나누는게 즐겁소이다. 나도 비시 프랑스 정권의 등장을 통해 영화-카사블랑카의 시대적 배경이 확실히 이해가 됩디다. 처음에는 프랑스가 패배했는데도 어째 프랑스의 관헌이 카사블랑카 지역에서 치안을 담당하며 근무하는게 많이 이상했네요.. 전쟁 전인가 하고도 여겼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