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역사 이해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상세 분석

백조히프 2025. 8. 27. 10:29
반응형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상세 분석

 

2025. 8. 24.

 

1. 개요

 

일본의 중국 침략은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1945년 일본의 항복까지 약 14년간 지속된 근현대사의 중대한 사건이다. 이 침략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중국의 근현대사 전개 방향을 결정짓고,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재편하며, 현재까지도 한중일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일본의 중국 침략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된다. 첫째, 1931년 만주사변으로 시작된 만주 점령 단계, 둘째, 1937년 중일전쟁 전면 발발로 시작된 본격적 침략 단계, 셋째,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일부로 확대된 단계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중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괴뢰정권을 수립하며, 중국인들에게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가했다.

 

2. 발발 배경

 

2.1. 국제적 배경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각국이 보호무역주의를 채택하면서, 자원과 시장이 부족한 일본은 대외 팽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특히 베르사유 체제 하에서 기존 열강들이 식민지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 새로운 세력권 확보를 위해 아시아 대륙 진출을 추진했다.

 

또한 1920년대 이후 국제연맹 체제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었고,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 성공과 중국 내 공산주의 세력 확산에 대한 일본의 우려도 침략의 명분이 되었다. 일본은 이를 '적화 방지'라는 논리로 포장하며 침략을 정당화했다.

 

2.2. 일본 내부 요인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부국강병과 대외 팽창을 국가 목표로 설정했다. 1910년 한국 병합을 통해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일본은, 1차 대전 후 21개조 요구를 통해 중국에 대한 특수한 권익을 확보하려 했으나 중국의 저항과 국제사회의 반발로 좌절을 경험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 내에서는 군부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되었고, 특히 관동군을 중심으로 한 현지 군부의 독단적 행동이 잦아졌다. 이들은 정부의 온건 정책에 불만을 품고 기정사실화를 통한 대륙 정책 추진을 도모했다. 또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만주의 자원과 시장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2.3. 중국 내부 상황

 

1920년대 중국은 군벌 할거 상태로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는 일본의 침략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1928년 국민정부가 북벌을 완성하며 형식적 통일을 달성했으나, 여전히 각 지역 군벌들의 실질적 독립성은 유지되었다.

 

또한 1927년 이후 국공 분열로 중국 내부의 반일 역량이 분산되었고, 장제스 정부는 '안내양외(安內攘外)' 정책을 통해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며 일본에 대한 적극적 저항을 미루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의 내부 분열은 일본의 침략 의지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3. 진행 경과

 

3.1. 만주사변과 만주국 수립 (1931-1937)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류탸오후(柳條湖)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관동군이 남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조작한 것으로, 일본의 계획적 침략의 시작이었다. 관동군은 이를 구실로 만주 전역을 신속히 점령했다.

 

 

 

1932년 일본은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수립하고 괴뢰정권을 세웠다. 만주국은 표면적으로는 독립국가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었다. 일본은 만주국을 통해 만주의 풍부한 자원을 약탈하고 대륙 침략의 기지로 활용했다.

 

이 시기 중국 정부는 국제연맹에 호소했으나,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는 일본의 침략을 인정하면서도 실질적 제재는 가하지 못했다.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며 고립주의 정책을 선택했다.

 

3.2. 중일전쟁의 전면 확산 (1937-1941)

 

1937년 7월 7일 마르코 폴로 다리(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전면화되었다. 초기에는 국지적 충돌로 여겨졌으나, 양국의 강경 대응으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일본은 '사변'이라고 명명하며 전쟁 상태임을 부인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본격적인 침략 전쟁이었다.

 

일본군은 신속한 승리를 기대하며 '속전속결' 전략을 추진했다. 1937년 8월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경제 중심지를 공격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막대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1938년 일본은 우한과 광저우를 점령하며 중국 동부 지역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저항은 예상보다 완강했고, 특히 1938년 타이얼좡 전투에서 중국군이 승리하며 일본의 속전속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3.3. 태평양전쟁과 전쟁의 확대 (1941-1945)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중일전쟁은 더 큰 전쟁의 일부가 되었다. 중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의 저항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1944년부터 일본은 '이치고 작전(大陸打通作戰)'을 실시하여 중국 내륙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고 인도차이나와 중국 본토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확보하려 했다. 이 작전에서 일본군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태평양 전선에서의 연이은 패배로 전략적 의미는 제한적이었다.

 

1945년 8월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원자폭탄 투하, 그리고 일왕의 항복 선언으로 14년간의 침략 전쟁이 끝났다.

 

4. 난징 대학살의 전모

 

4.1. 난징 점령과 대학살의 시작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후, 약 6주간에 걸쳐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사건은 '난징 대학살' 또는 '난징 대도살'로 불리며, 일본군의 전쟁 범죄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일본군의 학살은 단순한 점령 과정에서의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성격을 띠었다. 마쓰이 이와네 사령관과 나카지마 케사고 사단장 등 고위 지휘관들의 명령 하에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군은 "포로를 잡지 말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이는 대규모 학살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4.2. 학살의 양상과 규모

 

학살의 대상은 중국군 포로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포함되었다. 일본군은 연령이나 성별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중국인들을 살해했다. 주요 학살 장소로는 양쯔강 연안, 중산부두, 샨시로드(山西路) 등이 있었으며, 집단 총살, 생매장, 참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학살이 자행되었다.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이 있으나, 중국 측은 30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동경재판에서 확인된 20만 명 이상이라는 수치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일본의 일부에서는 이 수치에 대해 논란을 제기하고 있으나,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4.3. 성폭력과 방화, 약탈

 

대학살과 함께 광범위한 성폭력이 자행되었다. 일본군은 연령을 불문하고 중국 여성들을 강간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이 살해되었다. 또한 시 전체의 3분의 1 가량이 방화로 파괴되었고, 문화재와 재산에 대한 약탈도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만행은 당시 난징에 거주하던 서양인들에 의해 상세히 기록되었다. 존 라베, 마이니 베이츠, 로버트 윌슨 등은 '난징 안전구'를 설치하여 중국인들을 보호하려 했고, 이들의 일기와 보고서는 난징 대학살의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

 

4.4. 국제적 반응과 은폐 시도

 

당시 서구 언론들은 난징에서 벌어진 참상을 상세히 보도했다. 뉴욕타임스, 시카고 데일리 뉴스 등은 현장 취재를 통해 일본군의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이로 인해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는 크게 실추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군부는 이러한 보도를 부인하고 언론 통제를 강화했다. 전후에도 일본은 난징 대학살의 규모를 축소하거나 부인하려는 시도를 지속하고 있어 한중일 관계의 지속적인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

 

5. 일본군과 중국군이 얻은 득실

 

5.1. 일본군의 득실

 

일본군이 얻은 것

 

일본은 침략을 통해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고 풍부한 자원을 확보했다. 만주의 철광석과 석탄, 중국 동부 지역의 농업 자원과 공업 기반을 장악함으로써 전시 경제를 뒷받침하는 물적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중국의 주요 항구와 교통로를 통제하여 동아시아에서의 전략적 우위를 확보했다.

 

특히 만주국을 통해 일본은 중국 진출의 거점을 마련했고, 관동군을 중심으로 한 대륙 정책의 기반을 구축했다. 경제적으로는 중국의 노동력과 시장을 활용하여 일본 경제의 활로를 찾으려 했다.

 

일본군이 잃은 것

 

그러나 일본의 침략은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예상했던 속전속결은 실패했고, 중국의 완강한 저항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의 국력은 크게 소모되었다. 인적 자원의 손실도 컸는데, 8년간의 중일전쟁에서 일본군 사상자는 약 70만 명에 달했다.

 

국제적으로는 국제연맹 탈퇴와 침략 전쟁으로 인해 고립되었고, 특히 미국과의 관계 악화는 결국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져 일본의 파멸을 초래했다. 경제적으로도 장기간의 전쟁으로 재정이 파탄나고 국민 생활이 궁핍해졌다.

 

5.2. 중국군의 득실

 

중국군이 잃은 것

 

중국은 일본의 침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인명 피해는 최소 2,000만 명에서 최대 3,500만 명으로 추정되며,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 피해 중 하나이다. 경제적 손실도 천문학적이었는데, 중국의 공업 시설과 교통망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문화재와 역사적 유물들이 대량으로 약탈당했다.

 

영토적으로도 중국 동부의 정치·경제 중심지를 모두 잃었고, 수도를 여러 차례 이전해야 했다. 이로 인해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국가 기반이 크게 훼손되었다.

 

중국군이 얻은 것

 

그러나 침략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중국은 민족적 단합을 이루었다.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어 분열되었던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합 전선을 구축했다. 이는 중국 근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국제적으로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며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특히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은 4대 강국 중 하나로 인정받았고, 전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확보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불평등 조약의 폐기와 치외법권 철폐 등 오랫동안 염원했던 주권 회복의 기회를 얻었다.

 

군사적으로도 8년간의 항일 전쟁을 통해 중국군은 실전 경험을 축적했고, 특히 공산당 군대는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국공 내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6. 중국 사회와 향후 역사 전개에 끼친 영향

 

6.1. 사회 구조의 변화

 

일본의 침략은 중국의 전통적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지주제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 농업 사회가 전쟁으로 인해 크게 동요했고, 많은 지주들이 몰락하거나 피난을 떠났다. 이는 전후 토지 개혁의 기반이 되었다.

 

도시 부르주아지도 일본의 점령과 전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많은 자본가들이 재산을 잃거나 내지로 피난을 떠났고, 이들의 공장과 상업 시설은 파괴되거나 일본에 의해 접수되었다. 반면 농민과 노동자들은 항일 투쟁에 적극 참여하며 정치적 각성을 이루었다.

 

6.2. 정치 세력의 재편

 

항일 전쟁은 중국 내 정치 세력 간의 역학 관계를 크게 변화시켰다. 국민당 정부는 일본의 공격으로 연해 지역의 기반을 잃고 내륙으로 후퇴하면서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공산당은 적후 활동을 통해 농촌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특히 공산당은 항일 투쟁을 통해 민족주의적 정당성을 확보했고, 이는 전후 국공 내전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또한 지방 군벌들의 세력도 전쟁 과정에서 크게 약화되어 중국의 정치적 통합에 기여했다.

 

6.3. 민족 의식의 각성

 

일본의 침략은 중국인들에게 강력한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이 구체화되었고, 한족뿐만 아니라 만주족, 몽골족, 위구르족, 티베트족 등 모든 민족이 항일에 참여하며 다민족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러한 민족 의식의 각성은 전후 중국의 근대화와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강화했다. '외세의 침입을 받지 않는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는 현재까지도 중국 정치의 핵심 이념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6.4. 국공 내전에 미친 영향

 

항일 전쟁의 경험은 이후 국공 내전의 결과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공산당은 항일 투쟁 과정에서 농민들의 지지를 확보했고, 게릴라전 경험을 축적했다. 또한 해방구를 통한 행정 경험과 토지 개혁을 통한 농민 동원 능력을 배양했다.

 

반면 국민당은 정면전에서의 막대한 손실과 부패, 그리고 인플레이션 등으로 민심을 잃었다. 특히 항일 과정에서 드러난 국민당 정부의 무능과 부패는 전후 공산당 승리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6.5. 경제 발전 전략에 미친 영향

 

일본 침략의 경험은 중국이 자립적 경제 발전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연해 지역의 공업 기반이 파괴되면서 내륙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는 전후 '3선 건설'과 같은 내륙 개발 정책의 배경이 되었다.

 

또한 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깨닫게 되어, 자력갱생과 중공업 우선 발전 전략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개혁개방 이후에도 '핵심 기술의 자주 개발'을 강조하는 정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7. 역사적 의의와 평가

 

7.1. 중국사적 의의

 

일본의 중국 침략은 중국 근현대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 전쟁을 통해 중국은 반봉건, 반제국주의 투쟁의 경험을 축적했고, 근대적 민족국가로의 전환을 가속화했다. 특히 전통적 왕조 체제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공화정 체제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를 통해 중국은 서구 열강에 의해 강요된 불평등 조약 체제에서 벗어나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회복했다. 1943년 중미, 중영 신약 체결을 통한 치외법권 폐기는 아편전쟁 이후 100년간 지속된 반식민지 상태에서의 해방을 의미했다.

 

7.2. 동아시아사적 의의

 

일본의 중국 침략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 질서인 중화 질서를 완전히 해체시켰다. 중국 중심의 조공 체제가 무너지고 서구식 근대 국가 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이 전쟁은 동아시아에서 민족주의의 확산을 촉진했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반일 민족 해방 운동이 활발해졌고, 이는 전후 아시아 각국의 독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7.3. 세계사적 의의

 

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아시아 전선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중국의 저항으로 일본이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으로 전선을 확대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미국의 참전과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 전쟁을 통해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주요 국가로 부상했다. 유엔 창설 과정에서 중국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된 것은 항일 전쟁에서의 기여가 인정받은 결과였다.

 

7.4. 전쟁 범죄와 인도주의적 의의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 특히 난징 대학살은 국제법과 인도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동경재판에서 'A급 전범' 개념이 확립되었고, 이는 후에 국제형사법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여성에 대한 조직적 성폭력이 전쟁 범죄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현재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성범죄를 중대한 전쟁 범죄로 다루는 법적 근거가 되고 있다.

 

7.5. 현재적 의의와 한계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인식은 현재도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의 역사 인식 문제는 한중일 관계 발전의 지속적인 장애 요인이 되고 있으며, 이는 동아시아 지역 협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 중국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평화적 굴기'를 표방하면서도 강력한 국방력 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현재 중국의 국방 정책과 외교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8. 마무리 결언

 

일본의 중국 침략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규정한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4년간 지속된 이 침략 전쟁은 중국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했지만, 동시에 근대적 민족국가로 거듭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 전쟁을 통해 중국은 분열과 혼란에서 벗어나 민족적 단합을 이루었고, 국제사회에서 주요 국가로 부상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투쟁의 경험은 중국 공산당의 집권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로 이어지는 역사적 동력이 되었다.

 

특히 항일 전쟁 과정에서 형성된 민족 자존 의식과 자력갱생의 정신은 현재까지도 중국의 발전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에도 핵심 기술의 자주 개발을 강조하고, '중국몽(中國夢)'을 통해 민족 부흥을 추구하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이 침략 전쟁은 일본에게는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파멸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아시아 패권을 추구하던 일본은 결국 본토까지 폐허가 되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고, 전후 평화 헌법 하에서 새로운 국가 건설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7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 역사는 완전히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전쟁 책임에 대한 일본의 애매한 태도, 역사 교과서 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은 여전히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화해와 협력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진정한 역사 화해를 위해서는 가해자인 일본의 진정성 있는 반성과 함께, 피해국들도 미래 지향적 관계 구축을 위한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일본의 중국 침략사는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민족 간의 화해와 공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각국이 상호 존중과 협력을 통해 평화롭고 번영하는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이 비극적 역사에 대한 가장 의미 있는 응답이 될 것이다.

 

<참고 자료>

 

박한제 외,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 2007

서문당편집실, ’중국현대사 1~3“, 서문당, 2014

래너 미터(기세찬/권성욱 역), ‘중일전쟁’, 글항아리 2020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1~6’, 한길사, 2013

나무위키, ‘중일전쟁’, 2025

나무위키, ‘’난징 대학살‘, 2025

 

===========

 

  • 마닐라공
  • 25.08.30 12:42
  • 첫댓글 본래 남만주의 철도 경비대의 성격으로 출발한 관동군은 일본국왕의 직할대의 의미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일본대본영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기구처럼 만행을 저질었습니다.
  • 대본영의 지휘부도 관동군을 불법적 군사행동을 눈감아 주는 풍조였지요.
  • 러시아군과의 전쟁도 처음에는 일본 대본영에서는 모르는 전쟁이었습니다.
  • 일본의 군부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죠수번과 가고시마번의 오래묵은 감정으로 육군과 해군이 서로 충돌하다보니 관동군의 작태도 별 일이 않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 만주국 건국도 관동군이 획책한 것이고,중국의 침략에 방해되는 군벌 장작림도 폭사시켰고,
  • 이는 그의 아들 장학령이 부사령관인 국부군과의 충돌은 이미 예견된 것입니다.
  • 중일전쟁의 일으킨 부대의 지휘자가 당시 연대장으로,후에 임팔에서 수만명의 병력을 몰살시킨
  • 태평양 전쟁의 오물인 무타구치 렌야였습니다.
  •  
  • 김재민
  • 작성자 04:00 새글
  •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해 랴오뚱 반도와 만주지역에 주둔하게 된 관동군은 러일전쟁 승리 후 한 때 50만명의 최정예군으로 힘자랑을 했네요. 자기들이 도오쿄에 있는 대본영 군사참모들보다 현지사정을 더 잘 안다고 자처하며 만주사변을 독자적 판단으로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슴미다. 대본영은 이들의 군사적 행동을 추후 승인하며 관동군에 휘둘리기 시작했네요.
  • 마공이 언급한 만주군벌 장쩌린을 폭사시켰고, 악명높은 731 생체실험 부대를 운영하며, 푸이의 괴뢰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군사적 파워를 과시했심다. 이 파워로 중일전쟁의 주력 첨병 역할을 했지만 1936년 소련군과 할힌골 전투(노몬한 사건)를 만만하게 벌이다 무참하게 깨지며 그 군사적 위용이 꺾이기 시작했지요. '41년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정예병력 상당수를 동남아 전장에 차출 당해 약체 부대로 전락했심다.
  • '45년 8월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원폭 두발 맞고 항복하기 직전, 승리 전리품을 챙기려 소만국경을 넘어 공격해온 소련군에 지리멸렬 패주하면서 주변국에 행한 수많았던 악행을 멈췄네요. 아무튼 일본 군국주의의 흥망성세를 제대로 보여준 군대였다 하겠심다.
  •  
  • 서토25.08.30 12:30
  • 본문글을 읽어가다 보니..
  • 사실 살아보니..100년이 그리 긴 세월이 아닌데..
  • 우리 인류가 불과 백년 전부터에도 이런 야만적 전쟁을 햇으니..참...
  • 유태인학살, 난징 대학살, 원폭투하, 보도연맹, 월남전,
  • 이라크, 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 문득 바로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착각되기도 하는군요.
  • 그러고 보면 지금도.. 언제다시 이런 전쟁이 금방이라도
  • 발생하게 될 지.. 예측키가 어렵다 새삼 여겨집니다.
  • 중학입시를 위해 재수를 할 때쯤인가..난징대학살에 대한
  • 책을 읽고..어린 마음에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 뱃때기가 불러 힘이 쫌 조아지거나, 아님 배가 쫌 마이 고파도..
  • 서토(?)를 비롯, 우리 인간들은 항시 싸움하기를 즐겨한다는
  • 각성이 문득 생겨나는듯 하네요.^^
  • 어찌보아.. 한국전쟁 직후 태어난 우리 세대들은...참으로 축복받은
  • 행운의 세월을 살앗다는 깨우침이 보다 깊어집니다.
  • 김재민
  • 작성자 21:56 새글
  • 아, 서토도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는 중학시절에 이미 알았는갑네요. 나도 그 무렵 중학 세계사 공부를 하며 일본군의 난징 학살 사건에 대해 한 두줄 기술된 것을 처음 접했심다. 고교 세계사 책에서도 객관적 사실로만 밋밋하게 접했기에 그 만행의 강도는 미처 몰랐네요.
  • 독일 유학 시절 우연히 만나게 된 고미가와 순페이의 반전소설 '인간의 조건'을 읽으며 난징 사건의 일본군 만행을 좀 더 실체적으로 알게 되었심다. 2000년대 초 중국 여류작가 아이리스 장이 쓴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라는 난징 학살을 기록한 책을 읽고는 그 실체의 전모를 전율스럽게 확인했심다. 10여년 전에는 2009년 작 영화 '난징! 난징!'이라는 흑백영화를 통해 이 만행을 영상물로 한번 더 살폈고요.
  • 전쟁 중 군인들의 야수성은 다른 전장터들에서도 표출되었지만 난징사건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민간인 대학살은 참으로 전무후무할 수준입디다. 그 부대 일본군 사령관은 전후 전범재판에서 사형당했지만, 실제 관여한 일본군 장교와 병사들은 지금도 생존해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애써 망각하려는 체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 서토 말마따나 이런 전화를 겪지 않은 우리 세대는 참 복받았다 여겨짐다.
  •   서토
  • 25.08.31 02:05
  • 일본이..한일합방 후 조선을 경유하여 만주를 차분히 먹어갔다 막연히
  • 여기고 있은 바..이제보니 그 이전부터 만주지역은 지속 공략되고 있었군요.
  • 굳이 옛 역사를 들먹이자면 끝이 없겠지만..
  • 고조선이나 고구려 등도..당시 영토가 그만큼 넓었다는 사실은
  • 힘을 이용한 상당한 지배복속의 역사라 상상할 수 있어..
  • 김박사의 본문을 통하여..
  • 갑작스런, 부처님의 업보와 관련한 법문이 상기됩니다.^^
  • 모두들.. 폭력이나 살생을 통한 죄업은 결코 짓지않도록
  • 최대한의 각성을 발휘해야 될텐데..참...
  • 하지만 또한편 다른 견지에서 살펴 보노라면..
  • 인류는..전쟁을 통하여 문명과 의식을 발전시켜온 경향 또한 있어
  • 적당한 시기마다 전쟁을 자주 쫌 일으키야(?) 되겟따는 도발적 생각도 - ^^
  •   김재민
  • 작성자 05:38 새글
  • 무고한 인명 살상을 최대한 줄이는 전쟁이라면 자본주의 경제적 공급과잉을 해소한다는 측면에서 서토의 망상적 생각이 먹혀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전쟁이 어디 있을 법이나 함니까. 그냥 치고받으며 에스컬레이트화 되어 비인간적인 인명 살상전으로 가게 마련이지요.
  • 작금의 우크라전만 봐도 우리가 모르는 부분에서 엄청난 비인간적 만행들이 숨겨져 있을거라 여김다.
  •  
  • 이법사25.08.31 04:24
  • 지금의 일본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의 일본은 완전히 개판이 아니었나 합니다.
  • 겉으로는 명치유신의 성공으로 아시아의 우등생으로 인식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 왜 개판인고 하니 명령계통에 죽고 사는 것이 군대인데
  • 일본의 관동군은 이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어마무시한 사건을 조작하여 일으키면
  • 정부는 이를 뒤늦게 인지하고 뒷감당에 허덕이니
  • 이것은 봉건시대에도 없던 아주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상태로
  • 당시 중국 군벌의 횡행과 같은 수준 아니면 그 이하였습니다.
  • 그런 군대에 천지를 모르는 일부 조선 아이들은 세뇌되어 혈서 쓰고 자원입대하고 말이지요.
  • 아무튼 군대가 이리 개판이니 나라가 안 망할 수 있겠습니까.
  • 그리고 왜 쓸데없이 사람을 그리 많이 죽여요?
  • 그게 전쟁 승리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말이지요.
  • 얘들은 바보 천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  
  • 김재민작성자 04:50 새글
  • 법사의 생각이 내 생각과 거의 일치함다.
  • 일본군은 전국시대를 100년 이상 거쳤던 군사문화가 내재되어서 그런지 그 잔혹함이 인간 야수성의 극대치를 보여주었다고 하겠심다. 사무라이 칼 문화가 임진왜란 때 한국인들에게 행했던 온갖 만행들에서 가장 추하게 발현되었다 할 수 있네요.
  • 아무튼 할복문화로 칭하면서 죽음을 유미주의화한 일본인들의 정신세계 유전자는 우리에게 참 전율스럽게 다가옵니다.
  • 마닐라공
  • 25.08.31 21:33
  • 일본이 동학의거를 무자비히게 진압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하기는 했지만 조선을 강제로 합방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 일반 백성의 입장으로는 무능하고 백성의 등골을 파먹는 조선이나 일본의 통치는 별다름이 없음을 느꼈다고 봅니다.
  • 아마 일본의 통치가 조선의 통치보다 더 낫겠다고 대다수의 백성은 생각하지 않았겠나 봅니다.
  • 그러다보니 임진왜란 때는 승병이나 의병이 왜군에 대항하였으나,동학란 이후로는 왜군에 맞서서 의병의 활약은 미약하였지요.
  • 아마 당시의 중국의 인민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봅니다.
  • 즉 일본이 우리를 직접 무력을 강점한 것보다는 조선의 국왕과 그 대신들이 나라를 일본에 백성들과 도매금으로 넘긴 것이지요.
  • 어리석은 국민과 무능한 위정자가 합심을 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 역사가 되풀이 된다고 하지만 망국의 역사는 되플이 되면 안됩니다.
  •  
  • 이법사25.09.01 05:00 새글
  • 마공, 우찌 이런 견해를....
  •  
  • 김재민작성자 10:46 새글
  • 마공의 주장 논지는 19C 이후 조선의 위정자와 지배계급의 구조화된 약턀적 백성갈취로 인해 홧김에 서방질 한다는 격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지배를 별 반감없이 받아들였던 측면도 있다는 말이네요.
  • 아무리 마공의 소신이 반영된 주장이라지만 많은 비판을 야기하는 독단적 생각이라 여겨짐다. 내심 그런 생각을 품을 수는 있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토로할 사안은 아닐 것임다. 일본이 강력한 군사력으로 당시 국력이 밑바닥이었던 한국을 먹은 '한일병탄' 이 일어난 직후 을사오적과 극소수 왕족들만 이해타산적으로 그 지배를 받아들였지 대다수 한국인들은 즉각 반발하였지요.
  • 그 분출구가 19C 후반 외세에 대한 반발로 폭발한 동학혁명을 통해 축적된 민족정기가 서린 3.1 독립운동으로 나타났심다.. 그후 상해 임시망명정부가 결성되어 1945년 해방 때까지 줄창 일제에 저항한 사례를 마공은 크게 과소평가하는 듯 하네요. 납득하기 힘들어 동의할 수 없는 대목임다.
  •  
  • 마닐라공25.09.01 13:46 새글
  • 일본이 조선을 합병을 할 때는
  • 이미 일본은 스스로 개명된 나라로 자부심을 가지고
  • 일찍이 영국 등 유럽국가들이 인도,동남아시아를 어떻게 먹었는지를 잘 알고 연구도 많이 하고 있었고 ,국제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서구열강의 여론을 생각하여 대놓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 영국이 인도를 먹을 때도 동인도회사의 형식으로 인도의 각 제후국을 하나하나씩 넘겨 받았지요.
  • 지금의 동말레지아 사바주도 영국 회사가 필리핀의 술탄과의 애매한 계약으로 지금까지 년 3,000불 정도의 지대만 지급하다가 말레이지아가 이를 이어서 차지하고 있지요.
  • 당시 일본도 서구열강을 의식하여서 조선을 강화도 조약으로 시작하여,통감부 설치 등으로 실지적으로 조선의 주권을 다 뺏어갔지요.
  • 그러다가 고종의 대신들이 땅문서에 도장을 찍었지요.즉 통감부의 가등기에서 총독부의 본등기로 넘겼지요.
  • 조폭이 사채 주고 안 갚았다고 대놓고 신체포기약서를 쓰게 한 것도 아니고,대신들이 도장 찍어서 일본에 넘겼지요. 나라를 통째로 팔아먹었지요.
  • 이랬으니 안 망하면 오히려 이상한 조선의 정국이었지요.
  • 뜻있는 우국지사들이 만주땅에서 봉오동,청산리 전투도 일본에 항쟁은 했지만,이미 늦었지요.
  •  
  • 이법사25.09.01 14:10 새글
  • 서구 열강처럼, 마공도 일제가 대외적으로 잘 눈가림하면서 조선사람에게 수없이 행한 잔혹성과 기만성에 대해 알면서, 아니면 잘 몰라서 넘어가 주시는 듯합니다. 실상은, 디테일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식민지에서보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악랄했습니다. 어리석었던 지배층을 갖다댈 일이 아닙니다.
  •  
  • 마닐라공25.09.01 17:01 새글
  • @이법사 합방이후에 일본의 통치가 가혹한 것은 사실이지요,
  • 그래서 삼일운동도 일어났고,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된 것이고
  • 임정이나 다른 우국지사들의 폭탄테러도 있었지요.이에 일본이 무력으로 탄압을 하였지요.
  • 우리민족의 항일운동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방될 때의 과정이 지도층들이 그냥 돈받고 바쳤다는 말입니다.
  • 구한말에 일본애 대한 투쟁이 미약하고,우리 신식군대가 해산 될 때도 일부 소동이 있었지만
  • 무기력하게 무기를 내려 놓았지요.
  • 마닐라공25.09.01 14:06 새글
  • 중국은 떳떳하게 연합국의 승전국가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었지만,
  • 우리는 광복군이 뒤늦게 미군의 OSS부대의 배속 되어 조선에 잠입하는 계획을 세웠지만
  • 이미 일본이 항복을 한 후이고.. 결국 우리는 미국이 독립을 시켜준 것이지요.
  • 주권을 뺏긴 우리로서는 참으로 억울하고 할 말도 많겠지만, 이것 다 못나서 힘이 없어서 빼앗긴 것이고
  • 여기에 총칼로 강탈했다는 것은 약자의 푸념이고 변명 밖에 안됩니다.
  • 우리의 주권은 타국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국민이 지켜야 하는 것이요.
  • 즉 뽈따구 한대 얻어 맞고,그냥 뽈다구로 막았다는 말이 나오면 안되지요.
  •  
  • 김재민
  • 작성자 05:22 새글
  • 아무리 당시 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진솔하게 표명했다지만, 같은 한국인으로서 볼 때 자기비하적 역사관을 이렇게 공공연하게 표출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여김다. 거의 친일학자 이영훈급이네요. 부디 자중 좀 하면 좋겠심다...
  •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에 종전되어 전승국의 지위를 얻지 못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액통하네요. 그 오랜 세월 망명정부를 갖고 무장투쟁도 열심히 했음에도 말임다.
  •  
  • 마닐라공08:19 새글
  • @김재민 자기 비하적인 역사관이 아니라
  • 나름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얘기를 한 것 뿐이고
  •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볼 때 뭐 그렇게 자랑스런 일을 지도층이 한 것이 아니고
  • 대다수의 무지한 백성들이 꼭 일본의 무력에 의해서만 시류를 따른 것이 아니라
  • 일본은 나름대로 교묘하게 조선의 백성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고
  • 당시의 우리 선조들을 그렇게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지요.
  • 본인은 앞으로도 김 박사의 글에 가감없이 저의 견해를 뜻뜻이 표명하겠습니다.
  • 정 그게 불편하면 차라리 댓글을 삼가할까 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