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공내전과 붉은 중국의 탄생
2025. 8. 26.
1. 내전의 개요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은 1927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 국민당(國民黨)과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 간에 벌어진 거대한 정치적·군사적 충돌이다.

이 내전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는데, 제1차 국공내전(1927-1937)과 제2차 국공내전(1945-1949)으로 나뉜다. 그 사이에는 중일전쟁(1937-1945) 기간 동안 양측이 일시적으로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본에 맞서 싸웠다.
이 내전의 결과는 중국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고, 국민당은 대만으로 퇴각하여 중화민국 정부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중국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의미했으며, 동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의 냉전 구도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내전의 규모는 실로 거대했다. 수천만 명의 인구가 직간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중국 전 영토가 전장이 되었다. 특히 제2차 국공내전 시기에는 양측이 각각 수백만 명의 정규군을 동원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며, 이는 20세기 최대 규모의 내전 중 하나로 기록된다.
2. 발발 배경
국공내전의 발발 배경은 복합적이고 심층적이다. 우선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서구 열강의 침입과 불평등조약 체결로 인해 중국 전통 사회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의화단 운동 등을 거치면서 청조의 통치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2천여 년간 지속된 황제제가 무너졌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공화정을 도입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벌들이 각 지역을 분할 통치하는 혼란 상태에 빠졌다. 이 시기를 군벌시대라고 하는데, 각 군벌들은 자신의 세력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싸웠고, 중앙 정부의 권위는 명목상에 불과했다. 이러한 분열과 혼란 속에서 중국인들은 강력한 통일 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1919년 5·4운동은 중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독일이 중국에서 갖고 있던 권익을 일본에게 양도하기로 결정하자, 중국 전역에서 반일·반제국주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운동을 통해 중국인들의 민족의식이 크게 고양되었고, 서구 문물과 사상이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특히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많은 중국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되면서 중국 정치 지형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초기 중국공산당은 소수의 지식인 집단에 불과했지만,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한편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이 성사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시적으로 연합하여 군벌 타도와 국가 통일이라는 공동 목표를 추구했다.
그러나 이념적 차이와 권력 투쟁은 피할 수 없었다. 국민당은 삼민주의(민족·민권·민생)를 기반으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추구했고,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목표로 했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가 상하이에서 공산당원들을 대거 숙청하는 4·12사건을 일으키면서 제1차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3. 진행 경과
제1차 국공내전 (1927-1937)
4·12사건 이후 공산당은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난창봉기, 추수봉기 등이 모두 실패했다. 이후 공산당은 도시 중심의 투쟁에서 농촌 중심의 투쟁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정강산(井岡山)에서 혁명 근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농촌이 도시를 포위한다"는 독창적인 혁명 이론을 발전시켰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장제스는 5차례에 걸쳐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대규모 포위토벌전을 실시했다. 처음 4차례의 포위토벌전에서는 공산군이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여 국민당군을 물리쳤지만, 5차 포위토벌전에서는 국민당군이 독일 군사고문의 지도 하에 현대적 전략을 구사하여 공산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1934년 10월, 공산군은 대장정(大長征)을 시작했다. 약 10만 명의 공산군과 당원들이 장시성(江西省) 남부에서 출발하여 1년간 2만 5천 리(약 1만 2천 km)에 달하는 험난한 행군을 통해 섬서성(陝西省) 옌안(延安)에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 약 9만 명이 희생되었지만, 공산당은 조직을 보존할 수 있었고, 마오쩌둥의 지도력이 확립되었다.
항일전쟁 시기 (1937-1945)
1937년 7월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으로 일중전쟁이 전면화되자, 국공 양당은 다시 합작하여 일본에 맞서 싸우기로 합의했다.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된 것이다. 공산군은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편제되어 국민정부의 지휘 하에 항일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항일전쟁 기간에도 양당 간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국민당은 주로 일본군과 정면대결을 벌였고, 공산당은 적후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세력 기반을 확대했다.
특히 공산당은 일본 점령지역에서 항일근거지를 건설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어 당원 수가 4만 명에서 120만 명으로, 군대는 3만 명에서 90만 명으로 증가했다.
제2차 국공내전 (1945-1949)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중국에는 다시 내전의 위기가 조성되었다. 미국의 중재로 충칭회담이 개최되어 쌍십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양측의 근본적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1946년 6월부터 전면적인 내전이 재개되었다.
초기에는 국민당군이 우세했다. 국민당은 430만 명의 정규군과 현대적 무기,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공산당 근거지를 공격했다. 반면 공산군(인민해방군)은 120만 명 규모로 상당히 열세였다. 1947년 3월에는 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마저 국민당군에게 점령당했다.

그러나 1947년 하반기부터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공산군은 기동성을 살린 운동전과 농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반격에 나섰다. 1948년 9월부터 1949년 1월까지 벌어진 3대 전역(랴오선 전역, 화이하이 전역, 핑진 전역)에서 공산군이 연달아 대승을 거두면서 국민당군의 주력이 궤멸되었다.
4. 홍군의 결정적 승인과 국부군의 결정적 패인
4.1. 공산군(홍군)의 승리 요인
농민들의 광범위한 지지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했고, 이는 중국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누가 우리에게 토지를 주었는가?라는 농민들의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했다. 반면 국민당 정부는 지주와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했기 때문에 농민들로부터 외면받았다.
효과적인 군사 전략과 전술
마오쩌둥의 "적이 진격하면 우리는 퇴각하고, 적이 주둔하면 우리는 교란하며,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공격하고, 적이 퇴각하면 우리는 추격한다"는 16자 방침은 열세한 장비와 병력으로도 강적을 물리칠 수 있는 게릴라전의 정수였다.
또한 린뱌오(林彪), 천이(陳毅), 쉬샹첸(徐向前) 등 뛰어난 군사 지휘관들이 각 전선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했다.
강력한 조직력과 규율
공산당은 엄격한 규율을 바탕으로 부패와 무질서를 근절했다. 인민해방군의 "삼대기율 팔항주의"는 군대와 민중 간의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민중의 바늘 한 개라도 가져가지 말라"는 원칙은 민심을 얻는 데 결정적이었다.
이데올로기적 우위
공산당은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라는 명확한 목표 하에 새로운 중국 건설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는 특히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 강한 호응을 얻었다. 반면 국민당은 부패와 전제주의로 인해 대의명분을 잃어가고 있었다.
국제적 지원
소련은 만주지역에서 일본군이 남긴 무기를 공산군에게 제공했고, 북한과 몽골을 통한 물자 지원도 이루어졌다. 특히 만주에서의 초기 기반 구축은 이후 공산군이 중국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교두보가 되었다.
4.2. 국민당군(국부군)의 패배 요인
부패와 무능
장제스를 비롯한 고위 지휘관들은 파벌 갈등에 매몰되어 있었고, 하급 장교들은 부패에 찌들어 있었다. 군대 내부에서는 무기와 군용품의 횡령이 만연했고, 병사들에 대한 임금 체불과 학대가 일상화되었다. 이로 인해 국민당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탈영병이 속출했다.
전략적 오판
국민당은 도시와 교통요지를 점령하는 데 집중했지만, 광활한 농촌 지역은 공산군의 손에 넘어갔다. 또한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각개격파당하는 우를 범했다. 특히 만주에서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가 전멸당한 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민심 이반
8년간의 항일전쟁으로 지친 중국 민중들은 평화를 갈망했지만, 국민당은 내전을 재개했다. 또한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부패로 인해 민생이 파탄에 이르렀다. 특히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국민당 정부에 등을 돌린 것은 큰 타격이었다.
국제적 지원의 한계
미국은 국민당을 지원했지만, 중국 내전에 직접 개입하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다. 특히 1948년 이후 미국 국내에서 국민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면서 지원이 축소되었다. 반면 소련은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지속했다.
5. 미국의 중국대륙 포기 이유
미국이 중국대륙을 포기한 것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였다.
미국 국민들의 전쟁 피로감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진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미국 국민들은 또 다른 대규모 군사개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특히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에서의 지상전은 엄청난 인적·물적 비용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국민당 정부에 대한 신뢰 상실
미국은 1945년부터 1949년까지 국민당에게 약 3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군사·경제 원조를 제공했지만, 이는 대부분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했다. 미국 언론과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장제스에게 돈을 퍼주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이 높아졌다.
유럽 우선 정책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소련의 위협에 맞서 서유럽을 방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트루먼 독트린, 마셜 플랜, NATO 창설 등은 모두 유럽에 집중된 정책이었다. 제한된 자원을 가진 미국으로서는 유럽과 아시아 모두에서 대규모 개입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중국 상황에 대한 오판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초기에 국민당의 승리를 확신했고, 따라서 대규모 개입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1948년부터 전세가 급격히 역전되자, 이미 개입하기에는 늦은 상황이 되었다. 또한 중국공산당을 단순히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는데, 이는 중국공산당의 독자성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국내 정치적 고려사항
1948년 대선을 앞두고 트루먼 대통령은 국내 경제 회복과 사회보장 확대에 집중해야 했다. 중국에서의 대규모 군사개입은 막대한 예산을 요구했고, 이는 국내 정책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또한 공화당의 비판에 직면한 트루먼 정부는 "중국을 잃었다"는 책임론을 피하고자 했다.
6. 신중국의 성립 과정
1949년 1월 베이징이 해방되고, 4월에는 난징이 함락되면서 국민당 정부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장제스는 대만으로 피난을 떠났고, 중국 대륙은 공산당의 손에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신중국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1949년 3월 허베이성 시바이포(西柏坡)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7기 2중전회는 신중국 건설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마오쩌둥은 이 회의에서 "중국 혁명의 중심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다"고 선언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의 과제를 제시했다.
특히 "당내에서 교만과 조급함, 향락주의와 소극적 태도를 경계하라"는 경고를 통해 승리 후의 변질을 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베이징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중국공산당을 비롯하여 각 민주당파, 인민단체, 무당파 인사 등 662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조직법,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조직법 등 3개의 기본 문건이 통과되었다.
공동강령은 신중국의 국가성격을 "공인농민연맹을 기초로 하고 각 민주계급의 연합독재를 실시하는 인민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했다. 또한 경제 정책으로는 "국영경제를 주도로 하고 각종 경제 성분이 분업 협력하는 신민주주의 경제"를 제시했다. 이는 즉시 사회주의로 이행하지 않고 일정 기간 자본주의적 요소를 허용하겠다는 의미였다.
정치협상회의에서는 마오쩌둥을 중앙인민정부 주석으로,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정무원 총리로 선출했다. 또한 국가 상징물들도 결정되었는데, 국명은 중화인민공화국, 국기는 오성홍기, 국가(國歌)는 의용군 행진곡, 수도는 베이징으로 정해졌다.
10월 1일 오후 3시,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개국대전이 거행되었다. 마오쩌둥은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오늘 성립되었다!"고 선포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30만 명의 군중이 광장에 모여 신국가의 탄생을 축하했다. 이날 오후 54문의 예포가 28발씩 발사되었는데, 이는 중국공산당 창당부터 신중국 성립까지의 28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개국 직후 신정부는 국가 체제 구축에 착수했다. 정무원을 중심으로 한 행정기구가 설치되었고, 각 성·시·현에 인민정부가 설립되었다. 또한 인민해방군을 정규군화하고, 인민공안과 인민법원을 설치하여 치안과 사법 체계를 정비했다.
경제 면에서는 인플레이션 억제와 생산 회복이 최우선 과제였고, 토지개혁을 통해 봉건적 토지제도를 철폐했다.
7. 향후 세계사 전개에 끼친 영향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20세기 후반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냉전 구도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국이 사회주의 진영에 합류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 간의 대결 구도가 완성되었다. 특히 아시아에서는 한국전쟁(1950-1953)을 통해 이러한 대결이 본격화되었다.
중국의 공산화는 아시아 전역에서 탈식민지화 운동과 민족해방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중국의 성공 사례를 모델로 삼았다.
또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등지의 공산당들도 중국식 농촌 혁명론에 영향을 받았다. 이는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냉전이 열전으로 발전하는 배경이 되었다.
중소 관계의 변화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초기에는 중소 동맹이 형성되어 사회주의 진영의 결속이 강화되었지만, 1960년대부터 중소 분쟁이 표면화되면서 사회주의 진영에 균열이 생겼다. 마오쩌둥은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했으며, 이는 후에 중국이 미국과 데탕트를 추진하는 배경이 되었다.
제3세계 운동의 전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55년 반둥회의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는 평화공존 5원칙을 제시하여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중국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의 신생독립국들과 연대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했다. 이는 유엔에서 중국의 외교적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고,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으로 결실을 맺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계획경제 모델의 확산에 기여했다. 중국의 1차 5개년계획(1953-1957)의 성공은 많은 개발도상국들에게 계획경제의 유효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인민공사와 대약진운동 같은 실험들은 비록 실패했지만, 제3세계에서 급속한 근대화를 추구하는 모델로 주목받았다.
문화적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중국 혁명의 성공은 전 세계 좌익 지식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특히 서구의 68혁명 세대들은 마오쩌둥 사상에 매력을 느꼈고, 마오주의는 파리, 베를린, 도쿄 등지에서 학생 운동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붉은 책"으로 불린 『마오 주석 어록』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텍스트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중국의 공산화는 아시아 지역의 지정학적 균형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은 중국의 위협에 대응하여 미일안보조약을 강화했고, 대만 해협에서는 지속적인 긴장이 조성되었다. 또한 인도-중국 국경 분쟁, 중국-베트남 관계 등 새로운 갈등 요인들이 등장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부상은 장기적으로 세계 질서의 재편을 예고했다. 비록 초기에는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지만, 중국은 거대한 인구와 영토, 그리고 오랜 문명사를 바탕으로 잠재적 강국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걸친 중국의 급부상과 G2 시대 개막의 역사적 출발점이 되었다.
8. 마무리 결언
중국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선 역사적 대전환이었다. 2천여 년간 지속된 봉건제도가 완전히 철폐되고,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거듭났으며,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거대한 인구가 사회주의 체제 하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변화의 핵심에는 중국 공산당의 독창적인 혁명 전략이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의 실정에 맞게 변용한 마오쩌둥 사상은 "농촌이 도시를 포위한다"는 혁명론을 통해 서구적 혁명 모델과는 다른 길을 제시했다.
이는 후에 제3세계 많은 나라들에서 민족해방투쟁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고, 20세기 후반 탈식민지화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민당의 패배는 부패한 구체제의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외형적으로는 더 강력해 보였던 국민당 정부가 민심을 잃고 몰락한 것은, 정치 권력의 정당성이 궁극적으로 인민의 지지에서 나온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특히 토지 문제와 같은 근본적인 사회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권력 투쟁에만 매몰된 국민당의 실패는 개발도상국의 정치 발전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했다.
미국의 개입과 철수 과정은 초강대국이라 할지라도 타국의 내정에 개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막대한 군사·경제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을 구할 수 없었던 미국의 경험은, 후에 베트남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반복되는 교훈이 되었다. 이는 군사력만으로는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현지 정권의 정통성과 민심이 결정적이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20세기 세계사에서 러시아 혁명에 버금가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이는 냉전 체제의 완성, 아시아에서의 탈식민지화 가속화, 제3세계 운동의 활성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21세기 다극 체제로의 전환에 이르는 일련의 역사적 변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것도 1949년 10월 1일 천안문에서 시작된 역사적 여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결국 중국 국공내전은 한 국가의 내전을 넘어서, 근대 세계 체제의 형성과 변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분기점이었다. 이는 제국주의 시대의 종료, 민족국가 체제의 완성, 이데올로기 대립의 세계화, 그리고 새로운 국제 질서의 등장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는 20세기 최대의 역사적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
서진영, ‘중국혁명사 연구’, 나남, 2005
조영남, ‘중국의 개혁개방과 체제변화’, 오름, 2007
김승욱, ‘현대중국정치론’, 나남, 2010
왕단(송인재 옮김), ‘왕단의 중국현대사’, 동아시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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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닐라공
- 25.09.04 18:46
- 첫댓글 중국의 중남부에서는 국부군이 참패를 하였지만
- 항일전쟁의 중심지였던 사천지방에는 온전한 사단들이 있었지요.
- 장개석이 대만으로 철수를 하지 않고 사천에서 후일을 기약하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합니다만,
- 미국 등 연합군의 전쟁 피로감 때문에 군사적인 원조를 받기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이제는 중공에서 대만을 침공 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만
- 막상 양안을 건너 오는 것이 쉽지 않을 듯합니다.
- 대만을 해안 봉쇄를 하여 대만의 교역로를 끊든지
- 중공의 해안가에서 미사일로 대만을 공략을 하여 대만을 내부적으로 흔들 수도 있겠지만
- 이것도 미국이 대만이나 한국이나 일본으로 가는 통로를 포기하지 않는다면,중공의 뜻대로 되지 않을 듯합니다.
- 그리고 싼사 댐을 대만에서 미사일로 파괴할 수 있는 것도 중공 당국의 부담이 되겠습니다.
- 김재민작성자 25.09.06 11:39
- 당시 국민당이 자신들의 마지막 온거지인 쓰촨의 충칭에도 홍군의 군사적 압박이 조여오자 마침내 충칭을 포기하고 후일 도모차 대만으로 남은 병력을 이끌고 탈주를 하지요. 홍군이 탈주로는 열어주었기에 오랜기간 대륙의 정통 지배세력으로 군림했던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가까스로 대만에 도착해 '중화민주공화국(자유중국)' 정부를 선포합니다.
- 반대의 장면은 26년 뒤인 '75년 미국의 지원을 압도적으로 받던 남베트남이 미국이 철군을 결정한 뒤 불과 수개월을 못버티고 북베트남군에 흡수점령되는 베트남 통일로 한번 더 재현되지요. 당시 이 장면에 고무된 북의 김일성이 조국통일 최적기가 다시 도래했다며 방방 뜨고, 한국사회에 위기의식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박통정부는 유신철폐를 부르짖는 반대세력을 콱 누를 동력을 얻어 '79년 10.26때까지 가는 정권연장에 성공하지요. 그 당시의 기억이 다시 생생하게 떠오름다.
- 대륙을 접수한 마오의 공산당군은 기세등등하게 '49년 10월 대륙 해안 코 앞의 타이완령 금문도를 점령하려 시도했지만 적세를 가볍게 보는 우를 범해 독기를 품고 저항한 대만군에 의해 도리어 전멸을 당했지요. 대만으로 쫓겨온 장제스군이 마지막 체면유지는 했심다.
- 마닐라공
- 25.09.06 08:27
- @김재민 홍군이 퇴로를 열어 준 것이 어찌 보면 신의 한수였지요.
- 그러자 국부군은 저항을 하지 않고 고궁에 있는 보물 등을 안전하게
- 대만으로 옮겨 올 수가 있었습니다.
- 중국의 보물은 거의 대만으로 옮겨오고 ,문혁 때 그나마 남아 있는 문화재는 다 파괴되고
- 간혹에 외국의 경매장에서 중국의 유물들이 모습을 보입니다.
- 중공의 골동품은 99% 가짜로 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이 있습니다.
- 김재민작성자 25.09.06 13:12
- @마닐라공 모든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다더니 만신창이가 되어 쫒겨났던 장제스군이 그래도 중국 국보는 챙겨나간 사카닷치(공중 제비돌기)는 했네요. 뭐 그리 중국 유물을 보존한다는 대의가 컸겠슴니까마는 그래도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제법 큰 일을 했었네요.
- 마오 역시 건국 후 자신의 대업에 도취되어 한국전쟁 참전 결정(이건 좀 괜찮은 의사결정이었심다마는) 후, '58년 '대약진 운동'이라는 망상적 똥플레이를 펼쳐 중국인민 2, 3천만을 2년만에 아사시켰심다. 그 후과로 본인의 퇴진이 확실시되자 음흉한 간계를 발휘해 '66년 친위쿠데타인 '문화혁명'을 홍위병 동원으로 행해, 중국의 실용주의자들과 인텔리들을 싹쓸이 숙청하는 엄청난 반동을 저질렀지요.
- '반공자 운동' 같은 것도 펼쳐 유구한 고대와 중세의 중국 문화를 말살하려는 택도 없는 시도도 마구잡이로 했심다. 마공 말처럼 당시에 귀중한 중국의 문화재와 유물들이 많이 파괴됐음은 명약관화하지요. 마오가 중국역사에 큰 죄업을 저질렀심다. 반대로 장제스는 중국문화의 수호자로 떠오르는 반대급부를 누렸고요.. 참 인생의 오묘한 반전같심다..
-
- 25.09.06 09:44
- @김재민 홍군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는 것에는
- 김원봉을 주축으로 조선족으로 이루어진 조선의용대의 팔로군이 중요한 역활을 하였습니다.
- 兎死狗烹인지 대륙을 차지한 모택동은 이들 조선족 부대가 향후의 정치적인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 이들을 조선으로 귀향을 시킵니다.물론 잔류 병력도 있었겠지요.
-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에 강력한 전력을 더한 주요 부대들은 중국 팔로군에서 귀환한 조선족 병사들로 편성된 인민군 5, 6, 12사단 등이었습니다. 이들 부대는 중국 동북3성 지역의 조선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실전 경험이 풍부한 조선의용군의 직계 후신으로서 북한군의 남침을 도운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6.25 때 중공군의 참전으로 우리는 통일을 목전에 두고 지금의 휴전선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 지금의 전승절의 전승은 항일전쟁의 승전인지,아니면 미군하고 승전인지..
- 이들 전승절에 우리의 고위 인사가 참석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리에 안 맞습니다.
- 김재민작성자 25.09.06 11:34
- @마닐라공 이 얘기는 마공 말이 다 맞아 보이네요. 조선족으로 이루어진 팔로군과 신사군이 신중국 건국 후 좀 계륵 같았을 마오에게 마침 한국전쟁이 터져줘 인민지원군으로 한반도에 파병하는데 딱 정시타임이라 여겨졌을겁니다. 무정이라는 지휘자가 한국전쟁에서 팔로군 내 사단장급으로 초기 전공 좀 세웠지요.
- 다음번에 올릴 글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이니 요 얘기들은 그 때 다시 한번 나누십시다. 한국전쟁을 중국사 관점에서 중국인의 시각으로 본 기술 부분이 많으니 마공이 핏대 세울 곳도 꽤 될 거라 짐작되네요. 그리고 어제의 적이 국익과 관련해 친구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외교사에서는 밥먹듯 허다한 사례들이니 시점을 정지한 정태적 관점에서 역사를 살펴보고 해석해서는 안될거라 여김다.
- 마닐라공25.09.06 12:02
- @김재민 핏대 올리봐야 지나간 세월을 돌릴 수도 없고 아쉬움만 남지요.
- 국제사회에서 어제의 적이 우군이 되고,그 반대의 일도 일어나지요.
- 적의 적은 우군이다는 것이 여러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나는데,모두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다보니
- 다시는 안 먹는다고 침 뱉은 우물을 찾는 경우도 생기고 말입니다.
- 서토25.09.05 11:08
-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자주 듣기로..장개석 쪽의 부패가 심하여
- 결국 내전에서 졌다는 류의 에피소드들을 많이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만..
- 실제 그게 사실이었던 모양이군요.
- 월남도.. 그런 내용들이, 월맹에 지게되는 큰 사유가 되었다 하는 바..
- 역시 일을 책임진 주요 간부들의 부패나 오류가..궁극에는 큰 패착의
- 원인이 된다 하겟으며.. 언제라도 반면교사 해야할 점으로 사료됨미다.
- 그래서인지 요즘 이곳에서는.. 우리도 자유만 주껠게 아니라.. 일부라도
- 중국식(?) 독재가 요구되는 시기가 되엇다는 식의 발상이 나오고 잇는듯 함미다.^^
- 모방이나 인식전환도..물심적 여유가 있을 때라야 그 단물을 받아낼 수가 잇는데..
- 특히나 무언가 꺼려지거나 두려움이 있을 때는 좀 더 차분함이 소요되는 것이라..
- 여러모로 우려되는 바가 잇네요.
- 하지만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는 시대적 필요성을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 매우 긍정적이라 하겟지요.
- 김재민
- 작성자 25.09.06 08:46
- 말마따나 장제스군 장군들의 부패하고 사적이익만 추구하는 국가관이 홍군에게 중국대륙을 갖다 바쳤다 할 수 있지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엄청난 전쟁물자를 받자말자 적군인 홍군에 헐값으로 팔아넘기거나, 홍군에 좋은 조건으로 투항하는 전리품처럼 챙겨 바쳤으니 말임다. 미국도 이런 만연된 군대 부패에 학을 떼 대륙에서 손을 떼는 전략적 결정을 내린거지요.
- 스스로를 돕지 않는 정부나 군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멸 속에 내팽겨쳐지기 마련임다. 장제스가 대만에 정착한 후 가리늦게 부정부패를 척결한다고 부패에 연루된 자기 며느리에게까지 권총자살을 강요하며 부정부패 쇄신에 온 힘을 쏟았지만 큰 버스는 이미 지나간 뒤였심다.
- 독기가 빠싹 오른 국민당 정부는 47년 대만 현지인들이 일으킨 민중 봉기를 50년 2월 28 일 우리나라 80년 5월 광주항쟁 때처럼 군대를 동원해 무작스레 진압한 2.28 사건이라는 스캔들도 펼쳤네요.
- 서토
- 25.09.05 11:45
- 아 그리고 요전 글에서의 나의 댓글에..김박사께서,
- "..문통을 빗댄 듯 한데 문통이 남북관계 짬짬이를 외교의 최선두에 세운 적이 없건만..."
- 이라며.. 너무 나갔다 하셨는데..그 지적이 맞긴 합니다.
- 다만, 제가 그 댓글에서는..노무현통을 빗대었던 것이라..김박사께서 잠시 착각하신듯- ^^
- 김재민
- 작성자 25.09.06 08:31
- 노통이라 해도 서거 후 국내에서 다시 재평가되는 노통의 치적 흐름과는 좀 결이 맞지않는 서토의 견해라 여겨집디다.
- 이법사
- 25.09.06 06:35
- 전편에서도 댓글을 달았듯이 국민당 군은 밑빠진 독이라 어차피 안 되는 군대고 정부였어요.
- 부패도 부패지만 명분도 홍군에 크게 밀리고 더군다나 인구의 절대다수인 농민의 인심을 잃은데다 지식층의 지지까지 잃었으니 빨리 망하느냐 천천히 망하느냐의 차이 밖에 앖었다고 봅니다.
-
- 말이 될 법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장개석이 공산군 토벌에 나서기 앞서 일찌감치 토지개혁부터 과단성 있게 하고 부하들의 비리를 엄벌하면서 미국의 도움도 받고 했으면 양상이 좀 달라졌겠지만 국민당의 후원자가 거의 지주층인데다 그렇게 하고 있었으면 미국이 또 어떤 시각으로 이들을 보았을지 모르지요. 죽은 애 부랄 만지기 같은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 김재민작성자 25.09.06 09:38
- 마오처럼 발가벗고 민중친화적으로 다가갈 수 없었던 장제스의 출신성분과 기득권 중심 사고가 마오에게 전 대륙을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던 숙명적 한계라 할 수 있겠네요.
- 이런 역사적 사례는 러시아 혁명 성공에서도 그대로 보여졌심다. 적백내전에서 백군이 국제적 군사지원을 제법 받았음에도 볼세비키 적군에 최종적으로 꺾인 사례가 농민층의 민심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후 러시아 혁명 지도층과 간부계급이 점점 '붉은 귀족화' 되면서 민중의 질시를 받게 되어 다시 몰락의 길로 들어선 것도 항상 반복되는 역사적 패턴이라 하겠네요.
- 서토25.09.06 09:23
- 장개석이 대만 현지인들을 무참히 진압한 내용은 오래전 이법사께서
- 관련 글을 한 번 올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대개 사람들..제버릇은 고치기가 쉽지않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닌듯 합니다.
- 그리고, 이건 다른 이야긴데..
- 김박사께서는 자칭 좌파성향임을 내보여 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 바..
- 우찌.. 노무현통에 대하여는 일말의 부정적 시각을 지니고 계신 모양이네요.
- 작고 이후 세월이 갈수록.. 이 분이 남긴 민주/자유 개념에 대한 영향력에 대하여
- 많은 한국인들이 가리늦게나마 그 공을 점차 인식해가고 있는데 말이지요.
- 행여 어떤 사유가 있어.. 그를 부정적으로 보시는지 알고 싶네요.^^
-
- 김재민
- 작성자 25.09.07 09:10 새글
- 노통이 집권했던 당시 대선에서 내게는 아직 중도 우파적인 시장자유주의 숭배 사상이 남아있었기에 뭔가 대선 주류에서 '듣보잡' 같았던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주저하고, DJ에게 석패한 이회창에게 한번 더 하는 마음으로 찍어주었심다. 그 앞에 선거에서 과격해 보인 김대중 대신 이회창이 온건보수 정통파처럼 여겨져 이 아재를 찍었는데 졌었지요. 두번의 대선에서 민심 장악에 우위를 보인 좌파진보의 힘을 실감했심다.
- 그런데 김대중과 노무현이 집권한 후 YS의 초중기 기간 못지않게 나라를 제법 비전있게 끌어가는 모습에서 내게 인물 본질에 대한 편파적 오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디다. 그리고 당시 독일 시절에서부터 많이 읽은 진보적 사상가들의 평전에 더욱 몰입해 소시민적 기득권 계급의 세계관이 점점 더 맘에 안들게 되었네요.
- 그럼에도 노무현 정권에 대해서는 중도적 거리 속에 지켜보는 스탠스를 유지했심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저작물을 정책자료로 도입하고, 시장의 힘을 인정하는 실용적 자세는 꽤 괜찮게 봐줬네요. 하지만 이라크 파병이나 제주 해군기지 결정, 그리고 공상가적인 주요보직 인사결정들은 좀 맘에 안들어했심다. 정지 가시나 기생된 것처럼 논다고 말임다.
- 그러나 그의 사후 이명박과 박근혜의 통치기를 보고는 우파친화적 사고를 완전히 거뒀심다.
- 서토25.09.06 13:07
- @김재민
- 자신의 정치적 성향 변화의 여로를 이처럼 솔직/담백/명쾌히
- 정리할 수 있는 경우를.. 김박사의 상기글에서 처음 느껴보는듯 합니다.
- 무언가..김박사를, 보다 훨씬 더 가까이 알게되는듯한 기분마저 드는군요.
- 성의담긴 댓글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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