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국공합작’의 상세 분석
2025. 8. 24.
1. 개요
제2차 국공합작(第二次國共合作)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국민당(國民黨)과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 간에 성립된 두 번째 정치적 연합이다. 일본의 전면적인 중국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형성된 이 합작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

이 합작은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지속된 제1차 국공합작과는 성격이 다른데, 첫 번째 합작이 국민당 내부로의 공산당 가입 형태였다면, 두 번째 합작은 양 정당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대일항전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연합한 형태였다.
이는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 중 하나로, 항일전쟁의 승리와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2. 발발 배경
2.1. 일본의 중국 침략 심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중국 동북지역을 점령하고 만주국을 수립했다. 1935년에는 화북분리공작을 통해 중국 북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고,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盧溝橋事件)을 계기로 전면적인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은 중국의 모든 정치 세력에게 공통의 위협이 되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은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대륙 지배 전략의 일환이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 구상 하에 중국을 자원 공급지와 시장으로 활용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괴뢰정권 수립, 경제적 착취, 문화적 동화 정책을 동시에 추진했다.
특히 화북분리 공작에서는 중국 관리들을 매수하고 친일 세력을 양성하여 중국 내부로부터 분열을 조장했으며, 이는 중국의 모든 정치 세력들로 하여금 일본의 위협이 단순한 외침이 아닌 국가 존립 자체에 대한 도전임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2.2. 시안사건의 촉매 역할
1936년 12월 12일 발생한 시안사건(西安事變)은 국공합작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장쉐량(張學良)과 양후청(楊虎城)이 항일전쟁보다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는 장제스(蔣介石)를 구금한 이 사건은 중국 공산당의 중재로 해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장제스는 내전 중지와 항일 통일전선 구축에 합의하게 되었다.
시안사건은 중국 현대사의 전환점이 된 극적인 사건이었다. 장쉐량은 만주의 실권자로서 고향을 잃은 설움과 함께 부친 장쭤린의 암살에 대한 일본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고, 양후청 역시 일본의 중국 침략에 강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인이 중국인과 싸우는" 상황을 중단하고 항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중국 공산당이 장제스를 처형하자는 일부의 주장을 물리치고 평화적 해결을 주도했다는 것인데, 이는 공산당이 개인적 원한보다 민족 대의를 우선시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치적 성숙함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2.3. 국제정세의 변화
소련의 대중국 정책 변화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코민테른은 1935년 제7차 대회에서 반파시즘 통일전선 정책을 채택했고, 이는 중국 공산당의 국민당과의 합작 정책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소련은 일본의 중국 침략이 자국에 대한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여 중국의 항일역량 강화를 지지했다.
1930년대 중반 국제정세는 파시즘 세력의 부상으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나치가 집권했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으며, 일본은 중국에서 침략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자국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파시즘 포위망에 대한 강한 위기감을 느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사회파시즘론'을 폐기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과도 연합하는 통일전선 전략을 채택했다.
특히 중국의 경우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후 소련 극동 지역에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은 중국의 분열보다는 통합된 항일 역량 구축을 더욱 절실히 필요로 했다.
2.4.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부 상황
국민당은 1927년 이후 공산당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정권의 정당성에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반면 중국 공산당은 1934년 대장정(長征) 이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으나, 항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회복할 기회로 보았다.
국민당의 경우 1928년 북벌 완료 후 형식적으로는 중국을 통일했지만, 각지 군벌들의 반발과 경제 위기,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인해 정권의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불저항 정책'으로 만주를 일본에 내주었다는 비판과 함께 지식인과 학생들 사이에서 반정부 감정이 고조되고 있었다.
반면 공산당은 1934년 대장정을 통해 지리적으로는 변방으로 밀려났지만, 이 과정에서 모택동의 지도체제가 확립되고 당의 결속력이 오히려 강화되었다. 또한 대장정 과정에서 보여준 영웅적 투쟁 정신과 민중과의 밀착은 공산당에게 새로운 정치적 자산이 되었으며, 항일이라는 명분을 통해 이러한 자산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3. 진행 경과
3.1. 초기 협상과 합의 (1936-1937)
시안사건 이후 국공 양당은 비공식적인 접촉을 시작했다. 1937년 2월부터 공식적인 협상이 진행되었으며, 주요 쟁점은 공산당군의 편제, 활동 지역, 정치적 지위 등이었다. 7월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협상이 가속화되어 같은 해 9월 국공합작이 공식 발표되었다.
초기 협상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정치적 줄다리기의 연속이었다. 국민당은 공산당군의 완전한 통합과 공산당의 정치적 활동 제한을 요구했고, 공산당은 군대의 독립성과 정치적 자율성 보장을 주장했다.
특히 홍군의 규모를 둘러싼 협상이 치열했는데, 국민당이 3개 사단 4만 5천명을 주장한 반면 공산당은 6개 사단 9만 6천명을 요구했다. 결국 타협점으로 3개 사단 4만 5천명으로 합의했지만, 실제로는 공산당이 더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활동 지역을 놓고도 공산당은 산시성 일대에 머물기를 원했지만 국민당은 더 넓은 지역에서의 활동을 허용했다. 이러한 협상 과정에서 양측의 전략적 계산과 상호 불신이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다.
3.2.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구축 (1937-1941)
합작 초기에는 비교적 원만한 협력이 이루어졌다. 중국 공산당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과 신4군으로 개편되었고, 국민정부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1937년 12월 난징 함락 후에는 공동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대표적인 공동작전으로는 1938년 타이얼좡 대첩과 평형관 대첩 등이 있다.
이 시기의 협력은 중국 근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정치적 화해의 모범 사례였다. 공산당은 토지개혁 중단, 소비에트 정부 해체, 홍군의 국민혁명군 편입이라는 중대한 양보를 했고, 국민당은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 인정과 연안 지역의 자치권 보장이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양측이 공동으로 항일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인데, 중국 공산당의 기관지 《신화일보》가 중경에서 공개 발행되고, 저우언라이, 동비우 등 공산당 지도자들이 국민정부의 요직에 참여하는 등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정치적 협력이 이루어졌다.
군사적으로도 8로군과 신4군은 화북과 화중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통해 일본군을 견제하며 정면 전장의 국민당군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3.3. 마찰과 갈등의 심화 (1939-1941)
1939년부터 국공 간 마찰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공산당이 화북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자 국민당이 경계심을 갖게 되었고, 쌍방 간 무력 충돌이 빈발했다. 1941년 1월 신4군 사건(皖南事變)은 합작의 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으로, 국민당군이 신4군을 기습 공격하여 군장 예팅(葉挺)을 체포하고 부군장 샹잉(項英)을 살해했다.
마찰의 심화는 필연적이었다. 공산당은 항일이라는 명분 하에 적극적인 민중 조직화를 통해 근거지를 확장했고, 이 과정에서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개혁도 은밀히 추진했다. 국민당으로서는 일본과의 전쟁 중에도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견제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1939년 국민당 5기 5중전회에서 채택된 '용공, 제공, 방공' 정책은 이러한 국민당의 복잡한 심경을 보여준다. 신4군 사건은 이러한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은 결과였다.
국민당은 신4군이 장강 이남에서 이북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신4군이 이를 지연시키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 사건으로 신4군 9천여 명 중 대부분이 사상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이는 합작 관계에 결정적인 균열을 가져왔다.
3.4. 형식적 유지와 실질적 분열 (1941-1945)
신4군 사건 이후 국공합작은 형식적으로만 유지되었다. 양측은 여전히 공동으로 일본과 싸웠지만, 상호 견제와 충돌이 계속되었다. 1944년부터는 미군이 중재 역할을 하며 국공 통일정부 수립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45년 일본 항복과 함께 국공합작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이 시기는 '동상이몽'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표면적으로는 항일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협력했지만, 실제로는 각자가 전후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준비에 더욱 집중했다. 국민당은 정면 전장에서 일본군과 대규모 회전을 벌이며 국제적 지원을 받는 데 주력했고, 공산당은 게릴라전을 통해 농촌 지역을 장악하며 민중 기반을 확대했다.
미국의 중재 노력도 결국 실패했는데, 이는 양측의 근본적인 정치 노선의 차이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를리 미션, 마셜 중재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은 일당 독재 체제의 유지를, 공산당은 연립정부를 통한 권력 분점을 각각 고집했다.
1945년 일본 항복 직후 중경에서 열린 국공 회담도 표면적 합의에 그쳤고, 결국 양측은 전후 중국의 주도권을 놓고 전면적인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4. 시안사건의 전모
4.1. 사건의 발단과 배경
시안사건(西安事變)은 1936년 12월 12일 새벽, 장쉐량(張學良)과 양후청(楊虎城)이 시안에서 장제스(蔣介石)를 감금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대응 방식을 둘러싼 근본적인 노선 갈등이 있었다.

장제스는 "양안필선공내(攘外必先安內)", 즉 외침을 막기 위해서는 먼저 내부를 평정해야 한다는 방침 하에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했다. 반면 장쉐량을 비롯한 동북군과 양후청의 서북군은 일본에게 고향을 잃은 상황에서 같은 중국인끼리 싸우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장쉐량은 만주사변으로 고향 동북지역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공산당 토벌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1935년부터 그는 비밀리에 공산당과 접촉을 시작했으며, 1936년에는 공산당과 정전 협정을 체결하고 항일 통일전선 구축에 합의했다.
4.2. 사건의 전개 과정
1936년 12월 7일 장제스가 시안을 방문하여 장쉐량과 양후청에게 공산당 토벌 작전을 독촉했다. 12월 9일에는 시안의 학생들이 항일 시위를 벌였는데, 장제스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장쉐량이 학생들을 설득하여 해산시켰지만, 장제스는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고집했다.
12월 12일 새벽 5시경, 장쉐량의 동북군과 양후청의 서북군이 화청지(華淸池)에 머물고 있던 장제스를 체포했다. 장제스는 잠옷 차림으로 뒷산으로 도주했지만 결국 붙잡혔다. 동시에 장제스를 수행했던 경위대장 등 주요 인물들도 체포되었다.
4.3. 중국 공산당의 대응과 중재 역할
사건 발생 초기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는 장제스를 처형해야 한다는 강경론과 석방해야 한다는 온건론이 대립했다. 장제스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해온 공산당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다. 하지만 모택동과 주은래 등 지도부는 신중한 접근을 택했다.
12월 13일 모택동은 정치국 회의에서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항일민족통일전선" 구축 방침을 제시했다. 이는 장제스의 개인적 제거보다는 정치적 전향을 통한 항일 연합 구축이 더 현실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소련의 스탈린 역시 장제스 석방을 지지했는데, 이는 일본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장제스가 살아있는 것이 유리하다고 본 것이었다.
주은래는 12월 17일 시안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중재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장쉐량, 양후청과 함께 장제스를 설득하여 내전 중지와 항일 통일전선 구축에 합의하도록 했다. 주은래의 탁월한 외교적 수완과 현실적 판단력이 사건 해결의 핵심 역할을 했다.
4.4. 사건의 해결과 결과
12월 25일, 장제스는 내전 중지, 공산당과의 합작, 항일 통일전선 구축 등에 구두로 합의하고 시안을 떠났다. 장쉐량은 장제스와 함께 난징으로 가서 자수했고, 이후 반세기 동안 연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시안사건의 해결은 중국 현대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장제스는 "양안필선공내" 정책을 포기하고 항일을 우선시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반장 항일"에서 "연장 항일"로 노선을 바꾸어 국공합작의 기초를 마련했다.
4.5. 시안사건의 역사적 의의
시안사건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첫째, 중국 내전을 중지시키고 항일민족통일전선 구축의 전환점이 되었다. 둘째, 중국 공산당이 민족 문제에 대한 정치적 성숙성을 보여준 계기였다. 셋째, 장쉐량과 같은 애국적 군벌들이 민족 대의를 위해 개인적 이익을 희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 없이는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기 어려웠을 것이며, 따라서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와 그 후의 역사 전개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시안사건은 "총구에서 나온 정치"가 아닌 "협상과 타협을 통한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5. 국민당과 공산측이 얻은 득실
5.1. 국민당의 득실
국민당이 얻은 이득(得)
국민당은 항일전쟁을 통해 항일의 명분과 정당성을 확보함으로써 국제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또한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공산당의 군사력을 일시적이나마 통제 하에 둘 수 있었으며, 전국적인 항일 역량을 결집하여 일본의 침략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연합국으로부터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제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국민당이 잃은 손실(失)
그러나 국민당은 8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군사력과 경제력이 크게 손상되는 타격을 입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항일전쟁 과정에서 공산당이 농촌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장기간에 걸친 항전으로 인해 민심의 피로가 누적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전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5.2. 공산당의 득실
공산당이 얻은 이득(得)
공산당은 항일이라는 민족적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군사적으로는 홍군 8,000명에서 시작하여 정규군 90만 명, 민병 220만 명으로 군사력을 대폭 확장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화북과 화중 지역에 19개의 해방구를 건설하여 실질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했으며, 농민층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민중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모택동의 지도력이 확고해지고 당의 조직이 체계화되면서 향후 집권의 토대를 다졌다.
공산당이 잃은 손실(失)
반면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지속적인 마찰로 인해 상당한 군사적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특히 신4군 사건과 같은 충돌에서 많은 간부들이 희생되는 인적 손실을 입었으며, 소련과의 관계에서도 국제정치적 제약을 받는 한계를 드러냈다.
6. 중국 사회와 향후 역사 전개에 끼친 영향
6.1. 중국 사회에 미친 영향
제2차 국공합작은 중국 사회에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항일이라는 민족적 과제가 계급 갈등을 일시적으로 완화시켰고, 전국적인 민족 의식을 고양시켰다. 공산당이 추진한 토지 개혁과 사회 정책이 농촌 사회에 널리 전파되면서 전통적인 사회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교육과 문화 방면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항일을 주제로 한 문학과 예술이 발달했고,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한 근대적 국민국가 관념이 확산되었다. 또한 여성의 사회 참여가 늘어나고 전통적인 유교 질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6.2. 정치 구조의 변화
합작 기간 동안 중국의 정치 지형이 크게 변화했다. 공산당은 무력 투쟁과 함께 정치 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통일전선 정책을 통해 다양한 정치 세력과의 연합을 추구했다. 이는 후에 인민민주독재 이론의 바탕이 되었다.
국민당 역시 일당독재 체제에서 벗어나 다양한 정치 세력과의 협력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민주적 정치 문화로 발전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권위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6.3. 향후 역사 전개에 미친 영향
제2차 국공합작의 경험은 1945년 이후의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공산당이 합작 기간 동안 축적한 군사력과 정치적 기반은 내전 승리의 핵심 요인이 되었다. 반면 국민당은 장기간의 항전으로 인한 피로와 부패로 인해 민심을 잃었다.
또한 합작의 경험은 중국 공산당의 통일전선 정책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건국 후 중국공산당이 추진한 인민정치협상회의, 다당합작제도 등은 모두 이 시기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7. 역사적 의의와 평가
7.1. 긍정적 의의
제2차 국공합작의 가장 큰 의의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중화민족의 단결을 이루어낸 것이다. 이는 중국이 반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국공 양당이 이념과 이해관계의 차이를 넘어서 협력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중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연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는 20세기 아시아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의 모델이 되었다. 베트남의 베트민,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 세력 등이 유사한 통일전선 전략을 채택한 것은 중국의 경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7.2. 한계와 문제점
하지만 제2차 국공합작에는 명확한 한계도 있었다. 우선 양당 간의 근본적인 이념적 대립과 권력투쟁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합작은 일시적인 전술적 제휴에 머물렀고, 항일이라는 공동 목표가 사라지자 즉시 내전으로 이어졌다.
또한 합작 과정에서 발생한 마찰과 충돌은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특히 신4군 사건과 같은 사태는 합작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고, 상호 불신을 심화시켰다.
7.3. 국제사적 관점에서의 평가
국제사적 관점에서 볼 때, 제2차 국공합작은 제2차 대전 중 반파시즘 투쟁의 일환이었다. 중국이 일본의 주력군을 자국 영토에 묶어둠으로써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국 승리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냉전의 관점에서 보면, 이 합작은 중국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동아시아 냉전 구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진영을 확대시켰고, 이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갈등의 배경이 되었다.
8. 마무리 결언
제2차 국공합작은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 해방 투쟁의 성공 사례이자 정치적 대립 세력 간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준 역사적 실험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근본적인 이념 대립과 권력투쟁이 해결되지 않은 채 이루어진 불안정한 연합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이 합작이 중국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고 지속적이다. 항일전쟁의 승리는 중국이 근대적 민족국가로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고, 공산당의 정치적 성장은 1949년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또한 통일전선이라는 정치적 개념과 실천은 현재까지도 중국 공산당의 핵심적인 정치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
오늘날 중국이 '일국양제', '평화통일' 등의 개념을 통해 대만 문제 해결을 추진하는 것이나, 다양한 정치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국정을 운영하는 것도 모두 이 시기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제2차 국공합작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의미를 갖는 중요한 역사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합작의 경험은 정치적 대립과 갈등 상황에서도 공동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협력이 가능하다는 교훈을 준다.
비록 그 협력이 완전하지 못하고 일시적이었다 하더라도, 민족의 생존과 번영이라는 더 큰 가치 앞에서는 이념과 이해관계의 차이를 넘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분단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현재의 동아시아 상황에서도 여전히 의미 있는 역사적 교훈이라고 하겠다.
<참고 자료>
박한제 외,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 2007
서문당편집실, ’중국현대사 1~3“, 서문당, 2014
래너 미터(기세찬/권성욱 역), ‘중일전쟁’, 글항아리 2020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1~6’, 한길사, 2013
나무위키, ‘제2차 국공합작’, 2025
나무위키, ‘시안사건 ‘,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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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닐라공
- 25.09.03 06:52
- 첫댓글 서안에 구금된 장개석이 말을 듣지 않자 장학량은 장개석을 주은래의 홍군에게 넘긴후에 주은래도
- 장개석의 신병 처분을 두고 고심을 하지만, 결국 송미령에게 넘겨 줍니다.
- 장학량도 항명 사건에 책임을 지겠다고 하면서 같이 서안을 떠나고 이에 괸련된자는 장학량을 제외하고는
- 처형을 합니다.어디가다 유빽무사무빽유사입니다.
- 그후 장학량은 대만에까지 끌려가서 유폐생활울 합니다.
- 유페 생활 중 그는 명나라 역사 연구를 하여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됩니다.
- 그는 자신을 풀어줄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뜻으로 시계를 보내자 장개석은 더 세월이나 낚으라는 뜻으로 낚시대로 화답합니다.
- 결국 그는 자신을 구금한 장개석이나 송미령보다 더 오래 살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 시대의 호남아로 많은 염문을 남겼지요,심지어 무솔리니의 딸도 그를 흠모하여 남편을 상하이 공사로 부임하게 하였지요.
- 서토25.09.03 03:19
- 언젠가.. 무솔리니 딸이 장쉐량을 흠모했다는 내용을 듣거나 읽은
- 기억이 있는 바..
- 아마도.. 들었다면 미공께 들었거나..읽었다면 어떤 책에서 보앗겠지요.
- 그정도로 당시..장쉐량이란 사람의 인물/인품이 좋았던가 봅니다.
- 좀 다른 이야긴데..여성은 이성을 존경/흠모하게 되면 아울러 큰 성적인
- 도발심으로도 연결이 되는데 비해..
- 남성의 경우는 그 반대가 되는 수가 더 흔하다 하더군요.
- 오랜 진화의 역사 때문인지 아님 세월을 통한 권력변화로 인한 경향인지는 몰라도
- 남성은.. 여성이 좀 빤빤하게 생기고, 나긋, 만만해야 도발심이 생기고
- 그렇지 않고, 존경스럽거나 자신보다 똑똑하고 힘이 세다 여겨지면
- 왠지 성적 도발심이 잘 생기지 않고..발기력도 떨어지게 댄다는
- 학설/주장이 있더군요. 마공께서는 우찌 생각하시는지- ^^
- 김재민작성자 25.09.04 12:18
- 마공이 묘사한 얘기는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 1~6' 편에 상세하게 나와 있네요. 공산군 토벌 독려차 시안에 들린 장제스를 국부군 청년 장군 장쉐량은 대의를 위해 그를 체포하고 항일공동전선을 가지도록 위협성 호소를 합니다.
- 훤칠한 미남장군 장쉐량은 당시 많은 여성들의 흠모를 받았고, 장제스 부인 쑹메이링과는 연분에 가까운 오랜 인간관계를 맺었지요. 이 인연으로 장제스를 죽이지 않았고, 장제스의 황포군관학교 교장시절 교수부장을 역임한 저우언라이(주은래)가 장의 활용가치를 역설해 공산당 내부로부터도 살려주자는 여론을 끌어내었심다.
- 장제스도 구금에서 풀려난 후 항일공동전선을 펼치는 2차 국공합작 약속을 지켰지만, 자신을 그 지경으로 몬 장쉐량은 용서할 수 없었지요. 스스로 포박을 청한 장쉐량에게 장제스는 가택연금형을 명했는데 여기에는 쑹메이링의 간곡한 설득이 작용했심다. 장제스는 '49년 대만 퇴각시에 장쉐량을 같이 데려가 자기보다 더 오래 산 장쉐량을 끝까지 풀어주지 말라 아들 후계자 창칭궈(장경국) 총통에게 엄명하고 타계했네요.
- 덕분에 104세 타계까지 대만에서 연금되었던 장쉐량은 쑹메이링의 위로 방문과 서신교환 속에 자신의 말년 운명을 감내했심다.
- 김재민작성자 25.09.04 12:15
- @서토 서토도 장쉐량을 흠모한 많은 여인들 중 뭇솔리니 딸도 포함되었던 스토리를 어디서 들어 건진 모양이네요. 이제 그런 사이드 스토리들과 함께 중국현대사를 크게 바꾼 시안사건의 전모에 대해서도 본격으로 파악해 준다면 이 글 올린 보람을 느끼겠심다.
- 서토25.09.03 02:47
- 시안 사건이 계속 눈에 크게 들어오는군요.
- 장제스가 내부 평정을 주창하며 반대파를 척결하려한 데 비해..
- 장쉐량을 비롯한 일부 국민당 요원은 같은 민족끼리의 반목에
- 강한 불만감을 지녔던 것이 본 사건의 주요점인듯 하네요.
- 또한 그 뒤의 진행경과를 보아서도 결국 이 사건은 이후의
- 중국통일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됩니다.
- 물론 이 사건이 없었다는 가정에서는.. 국민당 중심으로 통일을
- 이루게 되엇을지도 모르지요.
- 하지만.. '역사는 가정을 필요치 않는다' 는 말이 있듯, 당시로는
- 필연적으로 그렇게 진행될 수 밖에 없는 계기나 도도한 흐름이
- 있었다 할 때..그래서 역사가 되는 것이겠지요.
- 김재민작성자 25.09.04 13:13
- 시안사건이 없었더라도 격렬해지는 일본군의 공격에 장제스군이 공산군과 항일공동전선을 펼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임다. 농촌과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 전을 펼치는 공산군을 단기간에 완전히 뿌리뽑을 능력을 갖추기는 불가능했을거라 여겨지니 말임다.
- 시안사건으로 공산군을 먼저 토벌하려는 장제스의 야망이 좀 많이 꺾인거라 사료됨다. 물론 공산세력에 회생의 시간을 벌게해줘 후일 벌어졌던 국공내전에서 승리할 기회를 더 크게 만들어준 빌미가 된 것은 확실함다.
- 서토가 마지막 부분에 언급했듯 역사에서 우연한 사건이 역사의 진행 속도를 잠시 지체시키기는 하겠지만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한다는 견해는 현대역사관 해석의 지존 E. H. 카아 아재의 핵심 지론이기에 거의 언제나 적용되는 듯 하네요.
- 서토25.09.03 03:02
- 저는 김박사의 국공합작 관련한 중국역사를 보며 새삼
- 남북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 어느 시기 한국의 어떤 정치인은..
- '남북관계만 잘 풀릴 수 있다면 다른 사안은 모두 깽판이 되도 좋다' 란 식의..
- 경상도 고유 '강조어법' 을 사용햇다가 거의 병신이 될 정도로 정치적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 한국은 현재 사방으로 외세의 무거운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
- 상기 정치인의 강조어법이 새삼 돌이켜지는 정황인 바..
- 남북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오지 못한 그간의 세월이 참 아쉽다 하겠슴미다.
- 요전에 언급했던 바, 중국역사를 빗대어본 소위, '합작' 이 필요한 시절인데..
- '더국합작' 조차 안되는 터에 무슨 다른 정치적 합작이 가능할 수 잇을란지..참...
- 오직 요행수나...하늘이 주는 거대한 행운만을 기대하는 수 밖에-
-
- 김재민작성자 25.09.04 12:33
- 서토가 여기서 펼친 생각은 나는 크게 동의 못하니 따라 맞장구치지는 않겠심다. 앞 부분 얘기는 문통을 빗댄 듯 한데 문통이 남북관계 짬짬이를 외교의 최선두에 세운 적이 없건만 그랬다가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하니 쪼금 많이 나간 것 같소이다.
- 혹여 문통이 좀 시행작오한 부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보다 실용적인 꾀돌이 이재명은 충분히 우회할거라고 여김다. 남북문제는 우리가 갖고놀 수 있는 꽃놀이 패로 만들 외교적 수완이 여러 면에서 엿보이니 말이네요. 어디 한번 기다려 보십시다.
- 이법사25.09.04 13:21
- 장학량은 아버지 장작림이 일본군의 음모로 폭사한 것에 대한 원한에다가 대의를 앞세우는 큰 그릇이었다고 봅니다.
- 그 결과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결국 일본의 중국 정복은 실패하며 원자폭탄까지 두들겨 맞았으니
- 관동군의 불장난과 꼼수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불러왔는지를 알 수 있겠습니다.
- 이렇듯 꼼수나 잔재주보다는 먼저 대의명분을 얻는 것이 제1순위인데 조무래기 정객들은 뇌물이나 받아 먹으며 덜떨어진 마누라를 일시적으로 즐겁게 해 줄 뿐이지요.
- 잘 읽었습니다.
- 김재민작성자 25.09.04 12:11
- 법사가 장쉐량을 뚫어보는 혜안이 참 대단함다. 대의를 앞세워 자신의 영달을 스스로 포기했으니 거의 안중근급의 우국지사라고 봐도 큰 오류가 없을거라 여겨지네요. 운명이 그의 후반부 인생을 좀 더 위로해 주며 흘러갔더라면 하는 바램을 스토리를 접하며 품었심다.
- 저승에서는 진정으로 서로 사랑했던 쑹메이링과 더 가까이 맺어져 좋은 세월 가질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네요.
- 마닐라공 25.09.03 07:07
- 옛날에 열나게 장학량의 러브스토리를 올린 바가 있는데
- 홈페이지에서 동기카페로 옮겨오는 과정에 보관한 파일도 날라가고
- 날라가는 것은 새만이 아니더군요
- 언제 기회가 있으면 모 이치도! 아니 Once More!
- 이무래도 한번 더 !
- 김재민작성자 25.09.04 12:35
- 항상 중요한 글은 하드 디스크에 이중삼중으로 백업해 놓아야 함다. 하기사 그리 해도 사라질 물건들은 어떻게든 사라집디다마는..
- 서토25.09.04 12:19
- 김박사께서 이재명통에 대한 기대를 많이 하고 계신듯하여 일면 평안한
-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 어쨋던 한국은.. 현재의 경제여건 등 여러 난관을 잘 넘겨야 할 정황이니
- 더욱 그렇습니다.
-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그간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그에 대한 기대는 없고
- 상당한 수준의 불신감마저 지니고 있다보니..
- 김박사의 그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나 에너지가 큰 의지가 되네요.
- 지금은 누가 밉다하여.. 밀쳐낼 때가 아니고..함께 힘을 합해야 할 상황이니 말이지요.
-
- 김재민작성자 25.09.04 13:09
- 워낙 함량미달의 윤을 국가원수로 올려놓았다가 그 또라이 엽기적 행각에 대한 거센 국민적 비난을 윤이 계엄령으로 뭉개보려다 스스로 자멸하고, 선거로 뽑힌 이재명이 망가진 국가시스템을 바로잡겠다고 지금 뺑이치고 있는 중 아님니까. 국가관과 공인의식 1도 없는 윤부부는 자기들이 방약무인 후안무치하게 저지른 죄업들에 대해 지금 계산 지불하는 중이고요.
- 이재명은 윤부부의 행각을 반면교사로 잘 삼아도 제법 괜찮은 통치력을 행사할 것 같심다. 이가 꾀돌이들 툭유의 가벼움을 내포한 구석은 있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꾀돌스러운 정치적 영민함이 꼭 필요하다 여겨 나는 오랜 기간 정의당 지지 노선을 고수하다 지난 대선에서는 이재명 지지로 기수를 돌렷심다.
- 이번에 트럼프 X구녕 긁어주며 굴신도 자유자재로 하면서 국익을 챙기는 자세가 지금같은 난세에 가장 잘 부합하는 국가 리더라고 생각하네요. 딱 하나 유승준이에 대한 지나친 보수적 반응 태도는 좀 걸림다. 자기 임기 내에 한국 방문 정도는 풀어줬으면 하네요. 위에서 연금생활로 인생 중후반부를 다 보낸 장쉐량 스토리를 보며 오랜 기간 벌받은 유승준이를 이제는 풀어줄 법도 하다 여김다.
- 마닐라공25.09.04 15:15
- @김재민 폭주하는 이재명이 무능한 윤통보다 국정을 더 바르게 할 것이라는 근거가 있는가요?
- 성급한 추측이 아닐까요? 고기도 씹어 먹어봐야 하는데..
- 이 재명이 지은 죄가 무죄라면 지금 가막소에 있는 우리나라 수감자는 다 석방해야 합니다.
- 나는 괜찮고 너는 아니다?
- 글쎄요! 평가는 나중에 해봐야지요?
- 개그도 아니고 척 보면 안다?
- 잘못된 것은 다 전 정부의 탓으로 돌리고 하면 안되지요.
- 내가 소위 좌빨들을 극혐하는 것은 소위 내로남불식으로
- 상대방의 잘못된 행위를 비난하면서 그들은 잣대를 달리하여 그들이 더 혐오스러운 짓을 더 한다는 말입니다.
- 즉 功過를 공평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정치적으로 보면 국힘은 나약하고
- 민주당은 무지합니다.
- 김재민작성자 25.09.04 16:16
- @마닐라공 마공은 한국의 많은 태생적 우파성향 기득권적 집안에서 태어나 우파적 가치관속에 살아와서 그런지 좌파와 진보세력의 세계관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혐오하는 성향을 많이 발견합니다. 우리나라 나이든 70대 이상 기득권층의 90%는 마공 같은 우파적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으니 그게 일반적이라고 여겨지기는 합니다.
- 하지만 책 좀 읽는다는 마공이 막무가내로 좌파 사상을 극혐하는 것은 나로서는 좀 많이 의외라 여겨지네요. 도대체 무슨 책을 읽었는지 감이 잘 안잡힘니다. 책은 책이고 신봉하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면 계속 윤석열류의 정치인이나 극우 국힘당 지지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깨인 중장년층 시민들이나 최신 교육받아 사회비판적인 청년층의 대다수는 언제나 극우보수적 사고를 싫어하니 선거로 붙으면 극우파 정당이 단독 집권하는 것을 자주 보기가 쉽지 않을거라 여기네요.
- 하기사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면 보수가 되든 진보가 되든 우리 저물어가는 세대에게는 사실 뭐 큰 대수입니까. 그런데도 좌파 논객이나 정치인이라면 관성법칙처럼 싫어하는 우리 동기들이 적지 않으니 마 계속 그래왔듯 노년 여생 그리 사시구려 하는 마음으로 대하려 함다. 나도 내 쪼대로 살거고요.
- 마닐라공25.09.04 20:25
- @김재민 나를 극우라고 하는 사람은 오히려 극좌일지도 모르지요.
- 나는 좌파를 위장한 얼치기 좌파를 극혐하는 것이지
- 진정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타개하려고
- 사회 구조적인 모순점을 개선하고,진정한 기존 사회 질서의 변화를 추구하는 좌파 사상은
- 반대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지지 합니다.
- 그러나 우리나라에 진정한 우파도 찾아 보기 힘들지만, 사익추구를 하는 좌파라고 위장한 정치세력이나 사회단체는 극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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