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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입맞춤은 정말 황홀했을까? 벨베데레가 품은 클림트의 질문

백조히프 2026. 5. 14.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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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입맞춤은 정말 황홀했을까? 벨베데레가 품은 클림트의 질문

 

김선경 2026-05-14

[arte] 김선경의 미술관이 던지는 질문들

클림트 <키스>, 원제는 <연인들>이었다

사랑의 기쁨과 불안, 슬픔 담고 있어
 

해마다 발렌타인데이가 되면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벨베데레 궁전(Belvedere Palace)은 바빠진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이곳을 찾는다. 이 궁전의 이름은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전망’이라는 뜻이다. 사보이 공 외젠(Eugene of Savoy, 1663~1736)이 여름 별장으로 쓰려고 공들여 지은 곳이다. 이 궁전에 외젠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라도 깃들어 있어 연인들이 찾는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외젠은 평생 독신이었다.

 

그의 삶에도 남모를 사랑이 있었을까? 그가 연인이 있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외젠은 인생 내내 예술을 후원했다. 예술을 사랑하면서도 정작 연인은 없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금성 없는 화성’이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왜 연인들에게 벨베데레 궁전은 특별한 곳일까? 바로 그 유명한 그림,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키스>(1907~1908) 덕분이다. 이 궁전은 클림트의 다른 중요한 작품과 함께 <키스>를 소장하고 있다.

벨베데레 궁전이 미술관이 된 것은 어느새 100년도 넘었다. 이 궁전 전체를 공공 미술 전시 공간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18년 합스부르크 제국이 사라진 직후이다. 벨베데레 궁전은 상궁과 하궁으로 이뤄져 있다. 18세기에도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1717~1780)가 상궁을 제국의 회화 컬렉션을 전시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 전통을 이어서 지금도 상궁에는 주로 고전 작업을 전시한다. 하궁에는 동시대 감성을 보여주는 기획 전시를 주로 연다. <키스>는 상궁에서 볼 수 있다.

사진. © Belvedere, Vienna

 

벨베데레 궁전 상궁 전경. / 사진. © 김선경



<키스> 앞은 언제나 사랑꾼들로 가득하다. 벨베데레 궁전은 올해 발렌타인데이에 ‘벨베데레에서 <키스>와 함께 키스하세요’라는 홍보 문구를 내걸기도 했다. 명작 <키스> 앞에서 연인의 스냅 사진을 무료로 찍어주는 이벤트였다. 이벤트가 없을 때도 많은 연인이 클림트의 그림 앞에서 작품 속 인물과 비슷한 자세로 입을 맞춘다.

 

무척 익숙한 그림이지만 바로 눈앞에서 직접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왜 이토록 열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꺾어 열정적으로 입을 맞추는 사내와 황홀한 듯 눈을 감은 여인. 클림트의 ‘황금 시기’를 대표하는 눈부신 금장식과 발치에 흐드러진 꽃들은 내 시선을 단숨에 빼앗았다.

벨베데레 궁전 공식 사이트에 올라온 발렌타인데이 홍보 게시글. / 사진 출처. 벨베데레 궁전 홈페이지 캡처.

 

2026년 벨베데레 발렌타인 공식 홍보 이미지. / 사진. © Ivory Rose Photography / Belvedere, Vienna



이 황금빛 입맞춤은 실패 뒤에 등장한 작업이다. 클림트는 <키스>를 그리기 전에 큰 공공 프로젝트를 맡았다. 빈 대학의 강당을 장식할 천장화였다.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훈장을 받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화가였기에 받을 수 있었던 의뢰였다. 클림트는 각각 <철학>과 <의학> 그리고 <법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작품 세 점을 구상했다.

 

그는 학문을 숭고하게 그리는 대신 관능적이고 어둡게 표현했다. 작업 결과에 대해 세상은 차갑게 반응했다. 이따위의 외설적인 그림을 어떻게 대학에 거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클림트는 납품을 포기해야 했다. 의뢰받은 대가도 모두 돌려줘야 했고. 이런 참담한 실패 뒤에 한 작업이 바로 <키스>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빈 대학교 천장화(학부 회화) 연작: 철학>의 흑백사진, 1899~1907년(1900년 첫 공개). / 이미지 출처. 위키아트

 

구스타프 클림트, <빈 대학교 천장화(학부 회화) 연작: 의학>의 흑백사진, 1899~1907년(1901년 첫 공개). 원본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 이미지 출처. 위키아트

 

구스타프 클림트, <빈 대학교 천장화(학부 회화) 연작: 법학>의 흑백사진, 1899~1907년(1903년 첫 공개). 원본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 이미지 출처. 위키아트



<키스>에 대한 당대 반응은 빈 대학 프로젝트 때와 정반대였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클림트가 1908년에 그림을 대중에게 공개하자마자 거액을 주고 이 작품을 사들였다. 구입가는 2만 5천 크로네. 당시로선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였다. <키스> 이전까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된 가격은 500크로네였다고 한다. 최고 가격 보다 무려 50배나 높게 거래된 셈이다.

 

정부가 나선 덕에 <키스>는 개인 소장가에게 넘어가지 않고 국가의 보물로 남았다. 과감한 결정이 현재 벨베데레를 상징하는 최고의 유산을 지켜낸 셈이다. 전시가 끝나기도 전에 정부가 파격적 가격으로 이 작품을 사들인 사실은 <키스>가 대중의 마음을 단숨에 녹였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7~1908년. / 이미지. © Belvedere, Vienna



<키스>는 정말 황홀한 순간을 담아낸 것일까? 신화 속 비극을 담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작품 속 인물을 아폴론과 다프네로 보는 입장이 있다. 에로스의 장난으로 사랑의 화살을 맞은 아폴론은 다프네에게 집착과도 같은 사랑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납의 화살을 맞은 다프네는 그를 혐오하게 된다.

 

아폴론은 다프네를 집요하게 쫓고 다프네는 그를 피해 끝없이 달아난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된 순간 다프네는 신에게 구원을 청했고 그녀의 몸은 서서히 나무로 굳어갔다. 클림트가 나무로 변해가는 다프네에게 아폴론이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는 절박한 찰나를 담았다는 주장이 있다.

<키스>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오르페우스는 세상을 떠난 아내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다시 데려오기 위해 저승까지 내려갔다. 오르페우스는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단서 조항을 지켜야만 아내를 무사히 데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해서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만다.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 해석은 바로 그 찰나에 주목한다. 아내가 연기처럼 사라지기 직전에 오르페우스가 그녀를 가까스로 붙잡고 입맞춤을 나누며 작별하는 장면을 클림트가 재해석했다고 본 것이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 아폴론과 다프네, 1622~1625. / 사진. © Alvesgasper

 

프랑수아 제라르,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붙잡다, 1791. / 이미지 출처. artvee 홈페이지



클림트는 <키스>의 뒷이야기에 대해 직접 밝히지 않았다. 그런 탓에 두 가지 해석이 진짜인지 아니면 제멋대로 한 추측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두 관점에서 그림을 다시 보면 조금 달라 보인다. 여인의 발 뒤로 놓인 아찔한 벼랑과 위태로운 자세가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이 장면이 두 신화처럼 영원한 이별을 하기 직전의 슬픈 키스일 수도 있지 않을까? 1908년 처음 전시할 당시 제목은 <키스>가 아닌 <연인들>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너나없이 <키스>라고 부르다 보니 굳어진 것이다.

 

작가가 붙인 제목이 후대에 의해 바뀐 사례는 드물지 않다.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의 <밤의 순찰>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역시도 작가가 붙인 제목이 아니다. 작가가 붙인 ‘연인들’이라는 제목이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관계 전반을 포괄한다면 ‘키스’라는 제목은 순간의 짜릿한 행위와 그 찰나의 절정에만 집중한다. 작품 이름을 바꿔 부르니 어느새 이 그림을 ‘로맨틱한 환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원래 제목인 ‘연인들’을 되새기면 감상이 사뭇 달라진다. 사랑 안에 깃든 기쁨뿐 아니라 불안과 슬픔까지 드러난다. 클림트 역시 벨베데레 궁전의 옛 주인처럼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물론 세상을 떠난 뒤에는 열네 명이 친자임을 인정해 달라는 소송을 낼 만큼 사생활은 복잡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뜨겁게 ‘키스’를 나누며 수많은 뮤즈를 탐닉했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을 약속할 ‘단 한 명의 연인’은 끝내 곁에 두지 않았다.

모리츠 네어가 찍은 클림트 사진, 1910. / 사진 출처.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키스>는 찰나의 황홀함 뒤에 가려진 관계의 위태로움과 결국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는 서늘한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그림 앞에서 입을 맞추며 사진을 남기는 연인들을 떠올려본다. 과연 그들은 이 눈부신 금빛이 끝내는 사라질 빛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적어도 자신들의 사랑은 그 비극적 운명을 피해 갈 거라 믿고 싶은 걸까?

벨베데레 궁전 <키스> 작품 전시 전경. / 사진. © 김선경



김선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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