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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운 라흐마니노프…"나의 가장 강력한 빌런은 나"

백조히프 2026. 5. 19.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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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운 라흐마니노프…"나의 가장 강력한 빌런은 나"

 

김수미 2026-05-19

[arte] 김수미의 최애의 최애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울 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나에게 가장 강력한 빌런인 나

과거의 경험과 선택을 후회하느라 지난한 20대를 보냈다. 몸은 방송국에 작가로 뒀지만 마음은 라디오 PD라는 꿈을 좇느라 온전히 업에 충실하지도, 취직 준비에 전념하지도 못했던 시절. 자려고 누우면 그거라도 해볼걸, 이렇게 할걸, 저렇게 하지 말걸 하면서 쓸모없는 나를 탓하느라 명치가 답답하고 눈물이 났다. 이제 더는 그러지 않는다. 지난 시간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고 현재의 행복과 행운에 감사할 줄 알게 됐다.

 

나이가 들면서 겪게 된 변화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이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는 자꾸만 움츠러든다. 과거의 시간은 극복했을지 몰라도, 또 다른 실패나 좌절이 닥친다면 내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을지 의심부터 하려고 든다.

한 번도 꿈에 도달해 보지 못한 사람이든, 성공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든 자기 증명의 위기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드라마 <에이티세븐: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20년째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지 못한 황동만 못지않게, 이미 수 편의 흥행작을 만든 감독들조차 늘 불안과 싸우는 것처럼 말이다. 내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사실 내가 나를 믿고 싶은 절박함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앞장서서 스스로를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발버둥 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불안감에서 벗어날 방법을 타인의 찬사와 인정에서 찾으려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 결국 바깥의 격려가 없거나 성에 차지 않아도 자신을 믿고 인정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는 수밖에 없다. 클래식 역사에는 자기 의심의 늪에서 빠져나와 스스로를 구원해 낸 치열한 투쟁의 기록이 남아 있다. 완벽히 실패했으며 더 이상 창조할 능력이 없다는 절망에 빠져 3년을 보낸 한 천재의 이야기.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손민수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나를 찌른 우상, 나를 다독인 우상

라흐마니노프는 스물세 살이던 1897년, 교향곡 1번 D단조를 발표했다. 촉망받던 젊은 음악가의 신작에 비평가들과 동료 작곡가들의 무자비한 혹평이 쏟아졌다. ‘러시아 5인조’ 중 한 명인 세자르 큐이는 그 작품을 두고 “지옥의 영혼들이나 환호할 음악”이라고까지 했다. 이 뼈아픈 참패의 여파로 라흐마니노프는 깊은 슬럼프에 빠졌고, 몇 시간씩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일할 의욕이 나지 않으며 창조적 능력이 없다는 생각에, 잘 알려진 피아니스트와 그저 그런 작곡가 이상의 존재는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괴롭다(피오나 매덕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고 지인들에게 토로했다. 자신에게 창조적 능력이 없다니! 2026년의 클래식 애호가는 라흐마니노프에게 이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인지 알려주고 싶을 지경이다. 인간은 이토록 자기 자신을 오해할 수 있는 존재다.

라흐마니노프 / 출처. getarchive.net



짧지 않은 침체기 동안, 그를 수렁에서 건져내려는 주변의 노력이 이어졌다. 지인들은 라흐마니노프가 평소 동경하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우상의 격려가 큰 힘이 되리라 기대한 것이다. 라흐마니노프 역시 ‘마치 신을 만나러 가는 양’ 부푼 마음으로 톨스토이의 자택 모임으로 향했고, 작가 앞에서 연주를 선보였다. 슬럼프 시기에 창작한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인 가곡 <운명(Op.21 No.1)>이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이런 음악을 정말 원하는 사람이 있소?”라는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훗날 라흐마니노프는 그때 자신이 얼마나 실망했는지 가까운 지인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한편, 라흐마니노프가 흠모하던 또 다른 작가 체호프가 그에게 따뜻한 지지를 보낸 일도 있다. 얄타에서 열린 연주회의 반주자로 출연한 라흐마니노프를 직접 찾아와 “연주회 내내 자네만 쳐다봤네.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네”라고 북돋운 것이다.

한 우상은 그의 아픈 곳에 또 하나의 생채기를 보탰고, 또 한 명의 우상은 그를 다독였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라흐마니노프를 더욱 무참히 파괴한 것도, 체호프가 그를 슬럼프에서 꺼낸 것도 아니다. 결국 자신을 무너뜨리고 일으켜 세우는 가장 막강한 존재는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1892년 모스크바 음악원 재학 중 발표한 <전주곡 C#단조>의 갑작스러웠던 큰 성공은 대실패와 맞물리며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뮤지컬 작곡가 데이브 말로이는 이 시기에 라흐마니노프가 겪은 내적 갈등을 뮤지컬 <프렐류드>로 옮겨왔다. 작품에는 19살에 큰 목표 없이 쓴 전주곡 하나가 자신의 전부로 기억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토로하는 대목이 나온다.

“열아홉 살 때 썼어요. 그 이후로도 다른 걸 많이 썼는데, 그냥, 만약에, 만약에, 그게 하나였다면. 만약 그게 내가 평생 할 수 있는 최고의 한 가지였다면. 그리고 나머지 인생은 그냥 점점 더 나빠지면서 말라가는 거라면, 영감도 없이, 위대해지지도 못하고, 절대 이루지 못하면서—”
-뮤지컬 《프렐류드》 <전주곡> 중, 클로드&필자 번역

 

[“The Prelude” 가사 | 데이브 말로이의 뮤지컬 <Preludes> 중에서]


스스로를 내 편으로 만든 방법, “그저 시작하라”

이 끈질긴 침잠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에게 ‘최면 후 암시’ 치료를 받으면서부터다. 엄습하는 부정적 생각들 때문에 음악을 악보에 옮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는 숙면과 기분 개선, 작곡 의욕 재점화를 위해 1900년 1월부터 4월까지 매일 달을 찾아갔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오간 대화와 치료 과정을 세세히 알 길은 없지만,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 과정은 그에게 한 가지를 확실히 가르쳐주었다.

 

“용기를 가지고 자신을 믿으라는 것(리베카 미첼, 『라흐마니노프』)”이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다시 믿게 될까? 앞서 언급한 뮤지컬 <프렐류드>는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 여정을 구체적으로 그렸다.

달은 눈을 감은 라흐마니노프가 산꼭대기에 있는 장면을 상상하도록 한다. 정상에 서서 자랑스럽고 당당한 기분으로 발아래 풍경을 보면서, 그곳에 오르게 된 건 우연이나 마법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이 한 것임을 일깨운다. 그 등반을 위해 내디딘 모든 한 걸음이 얼마나 가볍고 단순했는지 기억하게 만든다. 이윽고 라흐마니노프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알아요?”라고 묻자 달은 이렇게 답한다.

“길이 있어요. 기억과 차분함과 열정과 본능과 어우러짐과 우연과 연습과 선생님들과 할머니들과 당신의 연필과 많은 종이와 커피와 토스트와 베이컨과 연극과 영화와 오페라와 교회들과 체스판들과 지하철들과 카페 테이블들과 젓가락 행진곡과 향과 돌고래와 선인장과 꿈과 키스와 습관과 피아노와 당신으로 이루어진 길이요.”
-뮤지컬 <프렐류드> <최면> 중, 클로드&필자 번역


달 박사의 대답은 스스로에게 확신을 갖지 못해 주저하는 모두를 향한 처방전이기도 하다. 길은 이미 내 안에 있다.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리던 시간, 체스판 앞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시간, 혹은 어릴 적 해맑게 웃었던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기억들이 실은 나를 믿게 할 가장 강력한 근거라는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 더 대단한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그저 지금 시작하면 된다.

 

라흐마니노프는 일단 펜을 들면 음악적 생각들이 자유롭게 떠오를 것이라는 달 박사의 암시처럼, 켜켜이 쌓아온 자신의 시간을 믿고 작곡을 재개했다. 그해 여름이 지날 무렵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한 그는 스스로를 믿도록 이끌어준 니콜라이 달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1901년 11월 모스크바 필하모닉 무대에서 초연된 이 곡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악보 표지 / 사진 출처.picryl



버티고 투쟁하는 여정의 찬란함

내면의 자신과 싸워 한 번 크게 이겼다고 해서 모든 의심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라흐마니노프 역시 이 대단한 성공 이후에도, 자신의 음악이 감상적이고 대중적이라 수준이 낮다는 세간의 혹평에 시달리며 반복해 자기 의심과 불안을 마주해야 했다. 누구든 하나의 슬럼프를 넘고 나면 또 다른 형태의 무가치함과 맞서 싸워야 하는 새로운 숙제를 마주하게 된다.

이 반복되는 의심의 굴레가 그저 가혹하기만 한 것일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스스로가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절망 속에서, 그럼에도 자신을 내 편으로 만들기로 한 과정이 이미 아름답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음악에 감동받는 이유가 성공작이기 때문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성패를 떠나, 나를 깎아내리는 내면의 목소리에 맞서 버티고 투쟁하는 여정 자체가 우리가 삶에서 찾을 수 있는 진정한 가치 아닐까.

 

대체 언제까지 나와의 지난한 싸움을 계속해야 할까, 그 물음표는 이제 이런 문장으로 바뀌었다. 내가 못마땅하고 미워서 괴롭다는 건, 내 안에 ‘나는 결코 무가치하지 않다’며 저항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나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 분투 자체가 충분히 눈부시다고 말이다.

김수미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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