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8. 의욕으로 가득 찬 고1 시절

백조히프 2018. 6. 17. 22:46


8. 의욕으로 가득 찬 고1 시절

 

 

<1970년의 고1 시절>

 

이 해 3월부터 꿈에 그리던 경남고 생활이 시작되었다. 중학 3년 동안 우리 부친은 자신의 내면에서는 무슨 동계진학교라고 이미 결정된 양 경남중 다니는 내게 경남고를 항상 너그 학교라 마에가리해 불렀다.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한 경남고에 대해 어제 너그 학교가 또 이겼더라하며 아예 세뇌의 못을 수시로 박는 것이었다.

 

사실 교명의 뿌리도 같고, 동일계로 지냈던 시절도 꽤 있었는지라 경남고는 경남중의 큰 형님집으로써 대부분의 경남중 재학생들은 받아들였지 싶다. 학우들 중 전국최고라는 경기고 진학을 희망하는 극소수를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우리 앞 수년 전 만 하더라도 경남중 석차 200등 내외만 하면 경남고를 모두 큰 문제없이 진학하는 학교로 여겼었다.



<70년대 초의 경남고 전경>

 

하지만 입시란 존재는 항상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친구들을 얼마나 많이도 양산했던가? 시험 치는 당일의 컨디션과 일진에 의해 상위 성적 안전권에 든 친구들이라 할지라도 불합격의 쓴 잔을 마시게 하는 경우가 참으로 비일비재하였다.

 

더군다나 경남지방의 수많은 준재들과 경남중에 불운의 한 끗발 차이로 떨어진 채 3년 간 칼을 갈던 후기 명문중 수재들, 그리고 유명학원에서 권토중래를 노리는 여러 성적우수 재수생 형들과 기량을 새롭게 겨뤄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동계진학률이 해마다 떨어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런 격심한 입학경쟁의 벽을 뚫고 들어온 학교이기에 그 뿌듯함은 아주 대단했다. 일단 학교의 풍광이 경남중과는 비교가 안되었다. 구덕산 바로 밑의 수목산림 속에 자리잡은 지세가 웬간한 대학들 캠퍼스보다 훨씬 나아보였다. 입학 후 한동안은 점심 먹고 혼자서 이 산림 속을 다양한 명상 속에 산책하는 코스가 너무 쏠쏠했다.

 

또 부산여고 담장 옆에 있던 서대신동 1가 집에서 경남고 교복을 입고 똥구두라 하기에는 너무 번쩍거리는 워커를 신은 채 구덕운동장으로 향하는 30여분의 통학로에서 만나는 그 수많은 중고교의 여학생들과 남학생들로부터 받는 선망의 눈길은 지금 생각해도 아주 괜찮았던, 아련한 추억거리로 남아있다.

 

1-4반 구거흥 담임선생반에 배정받아 교실에 들어가니 처음 만난 학우들의 1/3 정도만 경중 시절에 안면 있던 친구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뉴페이스들이었다. 차차 지내면서 보니 부산근교 지방 및 대신중과 서중 등 후기 명문중 출신과 26회 경중 선배들이 많이 합류했음을 알게 되었다.



<'68년에 신축했다는 3층 건물>

 

선배들 중에는 성대곤처럼 중학시절 형요, 형요!’하며 알고 지내던 사람도 있어 처음에는 선배 예우를 했지만, 내가 모르는 선배뻘도 하도 많아 여러 명이 같이 있을 때는 호칭 족보가 꼬일 때가 자주 있어 동급학년 간에는 이제 서로 편하게 말하는 관계로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정리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선배뻘 학우들의 마음 한 켠에 있었을 씁쓸한 심사를 내가 대학에 삼수하여 들어갔을 때 생각없는 현역 촌놈 후배들에 의해 동학년이라고 재민아, 재민아하고 불릴 때야 알았지 그 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재수삼수생 학우들과 생활을 많이 해본 듯한 서울 명문고 출신 친구들은 그런 면에서 좀 달랐다. 한 해 차이는 대충 서로 맞먹었지만 삼수생에 대해서는 깎듯한 형빨 대접을 해주었다.

 

<기억나는 이 시절의 은사와 학우>

 

1 시절에 가장 머리에 남는 양반은 독일어를 가르친 허민호 선생이었다. 폐 한쪽을 잘랐다는 소문처럼 항상 헐떡이는 듯한 목소리에도 카랑카랑한 이미지를 잃지 않았던 허선생은 또 한명의 독어 담당이었던 이종희 선생과는 여러면에서 달랐다.

 

이선생이 기계적인 암기를 강요하는 맹목적이고도 무작스러운 수업을 펼친데 비해, 허선생은 뭔가 이 파트는 이런 의미를 가지며 명사 성도 왜 구별해야 하는지를 지금은 설명할 수 없지만 진도를 나가다 보면 자연스레 깨치게 된다는 식으로 조망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수업방식이 내게는 상급학교 수업답게 꽤 고급스러워 보였다.

 

국어 담당인 구거흥 선생은 주로 세계문학 파트를 가르친 것으로 기억되는데, 수업 중에 괴테의 파우스트 부분에서 젊은 파우스트가 욕정에 눈이 멀어 청순녀 그레첸을 범하고 바로 버렸음에도, 그 그레첸이 메피스토펠레스의 꼬임 속에 악마의 길을 가던 파우스트를 회개의 천상 길로 인도하는 천사 역할을 하는 스토리라고 조곤조곤하면서도 귀를 쫑긋하게 하는 입담으로 설명했다. 이때 이 양반이 읊어준 영원한 여성은 우리를 구원한다라는 셰리프는 50년이 넘은 지금도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국어 파트를 병행하여 가르쳐준 이학윤 선생은 첫수업에서 행한 박목월 시인의 윤사월소개 수업으로 떠오른다. 부산여고에 오래 있다 전근해온 양반답게 연극조의 표정 속에 낭랑한 목소리로 이 시를 낭송하던 다정다감한 인상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3학년 정도의 대입준비생들에게는 좀 성이 안차는 실력을 가졌지만, 그래도 이런 감성이 충만한 선생을 만났던게 참 괜찮았다고 여겨진다.


<여전히 건재하는 늦가을의 덕형관 구름다리>

 

2~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우리를 무슨 ‘S대 합격물로 만드는 게 고교존립의 최종목표인양 광분하던 경남고의 입시준비 시스템에서 그래도 그 시스템에 막 들어가기 전 시절이라 그랬는지 이런 수업들도 존재할 수 있었던 듯 싶다.

 

내가 초중 시절부터 관심 있어 하던 사회탐구 쪽의 일반사회를 담당했던 권남술 선생은 좀 약장사같은 학원강사 풍의 수업진행을 했기에 흥미는 꽤 있었다. 하지만 조울증 환자처럼 감정자제를 못해 우울 커브시에 잘못 걸린 친구들을 모질게 구타하는 장면에서는 많이 실망했다.

 

한번은 부반장 하던 박치호가 들어갈 타임을 놓친 채 권선생이 뭔가 한참 썰을 풀며 얘기하는 중에 이번 시험 범위는 우찌 됩니까?’ 하고 생뚱맞게 불쑥 질문했다고, 안색이 순간 바뀌더니 불러내어 학우들이 민망할 정도로 손찌검을 하는 게 아닌가. 그래도 분이 안풀렸는지 수업 중에 또 불러내어 구타하고.. 참 어이가 없었다.

 

이런 방면에서 빠질 수가 없는 양반이 영어 한 파트를 가르쳤던 콧수염 김용건 선생이었다. 자그마한 단신이 열등감이었는지 이 아재는 수업 중에 맥락없는 시시콜콜한 질문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학우들이 있으면 불러내어 교단에서 점프해 내려오며 귓싸대기 올리는 것을 무슨 캐릭터 신공처럼 삼았다.

 

질문이라는 것도 단어 picture의 형용사형은? (picturesque)’ 하는 지극히 주변적이고 지엽적인 것이어서 이 사람이 학생들 패기 위한 질문감만 집에서 연구해 오나 할 정도였다. 안맞아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학우들이 이 양반 빰따귀의 희생양이 되었고 어떤 친구는 후일 그것을 그 시절의 정겨운 추억담으로 미화할 때도, 난 어찌 해 한번도 맞진 않았지만 그런 수업을 전전긍긍하며 겪은 게 수치스럽기만 했다.

 

1-4반에서 기억에 나는 친구 중에는 첫번 째가 내 바로 뒤에 앉은 박명준이었다. 지 입으로 자기는 교실 하나 지어주고 바이올린 음악 특기생으로 들어왔다고 하며 내 중2 때의 김영수 역할을 자청했다. 어제는 어떤 가시나 하고 놀았고, 어떤 때는 누구와 퍼킹도 해봤다며 꽤 구체적으로 상황 설명하며 이 방면에 항상 관심 많았던 내게 간접경험의 이바구 보시를 톡톡하게 해 주었다,

 

아마 이 무렵 초승달 눈썹과 가느다란 실눈 미소의 이길영이, 팝송 잘 부르며 구봉 출신으로 야구도 잘했던 한명철이, 내 초등 꼬붕 동문으로 머리 컸다고 대어들기도 한 김종성이, 싸움 한판 붙어 선방으로 내 코를 내려 앉힌 양봉철이, 중간 쯤에 앉아 돌발적 질문을 많이 해대던 김중철이와 이광남이, 꽤 친하게 이바구 자주 하며 지냈던 이정래, 기린같은 선한 눈매의 1번 키다리 오봉인이, 흰머리의 거제청년 김양화, YS와 동명으로 기억에 남는 또 한명의 백발 김영삼이, 힘장사로써 기억되지만 이미 타계한 신임성이, 최근 유명을 달리한 반장 박상훈 등이 같은 반을 한 것으로 지금도 내 추억판에 새겨져 있는 학우들이었다.

 

, 학기 중간에 우리 반에 합류한 임기대와 황수영이도 빼놓을 수 없는 학우들이다. 특히 황수영이는 경중 한해 선배이고, 다정다감한 용모 속에서도 한 칼하는 분위기를 자아내어 처음에는 약간 거리를 두는 사이였지만 야구시합 활동을 통해 친해지고, 나중에는 외대에서도 만나 비로소 동기처럼 스스럼 없이 지내는 친구가 되었다.

 

<70년에 발생한 국내외 주요 사건>

 

1. 의문의 정인숙 피살 사건

 

‘703월 한강 강변로에 정차되어 있던 승용차내에서 묘령의 젊은 미모 여인이 총상을 입고 사망해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 언론보도에서 죽은 여인이 20대 중반의 정인숙이고, 유명 요정의 스타급 호스티스이며, 그 차를 몰던 친오빠에 의해 저격되었다고 발표되었다.



<비운의 정인숙 여인>

 

다른 한편 시중 소문으로는 박통의 기쁨조 여인이었다고도 하고, 그 후 박통 딸랑이인 장수 총리 정일권의 애첩으로 물러나 둘 사이에 아들이 있다는 썰이 대종을 이루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정여인의 수첩에 박통을 비롯해 정일권, 김형욱, 박종규, 이후락 등 당대 정계 실력자들이 총망라 되면서 언젠가는 터질 정치계의 거대 시한폭탄화가 되어가자 저격수를 시켜 사전 제거했다는 음모설이 다시 나타났다.

 

이를 덮으려 여동생의 문란한 남자관계를 놓고 운전사 오빠(정종욱)가 나무라다 입씨름이 벌어지고 순간 격분하여 명예살인한 스토리라고 법정에서는 공식적으로 몰아가며 유야무야 처리됨으로써 결국 미궁에 빠져버렸다.

 

2. 멕시코 월드컵 대회

 

이 해 5/31~6/21일 사이 제9회 멕시코 월드컵이 벌어져 브라질의 펠레에 의한 펠레를 위한 대이태리 결승게임에서 4:1로 브라질이 승리해 줄리메컵 3번째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이루었다. 난 이 기간 MBC 방송에서 단독 녹화중계한 전 게임을 밤 1-2시까지 챙겨보며 미친 듯 축구열기에 빠졌다.



<'70년 멕시코 월드컵 로고>

 

66년 런던대회에서 그 앞인 스웨덴(1958)과 칠레(1962) 대회2연패 우승국인 브라질이 에우제비오(유세비오)를 앞세운 포르투갈에 무너져 예상외 예선탈락 후 다시 출전했는데 펠레, 자일징요, 리벨리노, 토스타노라는 사상 최고의 무적 멤버들로 결승까지 무패로 올라가는 것을 다 지켜봤다.


중간에 런던대회 결승에서 잉글랜드에 석연치 않은 홈 어드벤티지 판정에 4:2로 패한 서독이 프란츠 베켄바우어, 게르트 뮬러, 우베 젤러(전설의 뒤통수 헤딩으로 결승골 기록) 등을 내세워 이번에는 영국에 3:2로 역전승하는 복수혈전 게임을 지켜봤다.


<브라질-이태리 결승게임의 마지막 골 장면>

 

준결승에 올라간 서독이 이번에는 이태리에게 만화같은 역전-재역전전을 거듭하다 3:4로 탈락하는 게임에서 완전히 한국이 역전패해 진 것만큼이나 액통해 했다. 이태리 역시 이 게임에서 모처럼 개 발에 땀난 듯 신들린 득점력을 과시했지만 기력을 다 빨린 듯 결승에서는 브라질에 무기력하게 1:4의 패배로 브라질 신화를 만들어 줬다.

 

3.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

 

11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22세 청년 전태일이 15시간 노동이 예사였던 비참한 노동현장 환경을 고발하기 위해 유명무실한 근로기준법(8시간 노동)을 지키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치하던 경찰들 앞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려 분신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날 저녁 10시 병원에 이송된 전태일이 사망하자 이 나라에도 본격적인 노동투쟁 사건들이 드디어 꿈틀거리며 벌어지기 시작했다.


<전태일 분신 사건을 다룬 영화속 장면>

 

온실 같은 환경에서 오직 ‘S대 입학만을 위한 폐쇄공간 속에서만 살던 나는 내 또래의 수많은 흙수저 청년세대가 사회적 복지라는 기본개념도 발아되지 못한 채 열악한 이 땅의 다른 한 켠 노동현장에서 산업역군, 수출역군이라는 미명하에 사람대접 못받으며 지옥같은 일상을 보내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며칠 간의 보도관제 끝에 띄엄띄엄 알려진 분신사건에 대해 그 구조적 배경이 어떤지는 스스로는 알 도리가 없는데다, 마침 이 해에 전국예비고사 제도가 처음 도입되어 시행된 그 파급효과에 대한 전망에 더 관심을 갖는 한심한 태도로 이 사건을 좀 쇼킹한 해프닝처럼 건성건성 접했다. 지나고 보니 아무런 사회의식도 없었던, 쪽팔리기 짝이 없는 나의 유아적 세계관에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4. 일본 극우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사건

 

‘70년이 저물어 가는 1125일 소설 설국으로 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수제자로 일본 문단계의 기대를 모았던 덴노주의지향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1925~1970)가 극우 '방패회' 멤버들과 동부 자위대 본부를 들러 재무장 선언의 궐기를 종용했지만 별 반응을 못얻었었다. 그러자 그 건물에서 전통적 사무라이의 자결 수법인 단검 할복(하라키리)과 긴칼 뒷목치기(가이샤쿠) 의식에 의해 실제 배를 가르고 목을 치게 하는 퍼포먼스를 펼침으로써 전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사건 벌이기 전의 미시마 유키오>

 

난 그때 처음 중앙일보와 국제신보의 기사 보도를 통해 이 일본식의 할복이라는 죽음의 의식을 처음 알았고, 막연하게나마 일본인들의 단호한 핫키리또는 앗사리정신이 이런 것인가 하고 추측하게 되었다. 죽음까지도 옥쇄같은 용어로 유미주의화하는 일본인의 집단적 심성에 대해 한참 놀라면서도 그 근원에 대한 호기심을 잔뜩 품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에서 미의 본질을 탐구하는 대상이 되었던 금각사 전경>

 

금각사라는 소설로 일본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까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만만찮은 주제의식과 유려한 필체의 대표적 탐미주의 작가가 어떻게 이런 또라이같은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한국사회에서도 오랜 기간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전후 패전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이제 잘나가는 경제대국으로 막 올라타는 시기에 터진 사건이었기에 도대체 천황제 수호가 뭔데?’라는 의문이 한동안 내 머리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특히 기억나는 고1 생활>

 

나는 4~5월 경부터 기어없는 삼천리표 자전거 한 대 사 이 자전거로 서대신동 우리집에서 도청 앞을 지나 경남중, 토성교를 경유하며 남부민동 아랫길로 해 송도까지 가는 코스의 바이시클링을 일주일에 주말 빼고 거의 매일 통과의례처럼 했다. 이 덕분에 하체 근육도 좋아졌고, 심폐기능이 강화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3시간 여에 걸친 명상 속 ‘Wandering’(봔더링, 장 단거리 하이킹)으로 호연지기를 키우는 듯한 만족감이 컸다.

 

주말에는 경남고에서 매주 있었던 월요일 시험 준비 한다고, 중학 때부터 다니던 동네 독서실에 가서 머물곤 했다. 하지만 초등이나 중학시절처럼 스스로 밤 이슥할 때까지 애살있게 하는 공부 맛은 들이지 못하고 그저 의무감 속에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잡념에 빠질 때가 더 많았다. 그 때문에 일요일 밤은 항상 학습목표 계획량을 못채운 자책감과 자기혐오증에 자주 빠졌다.



  <70년대 뉴시네마 운동의 기수가 된 영화-내일을 향해 쏴라>  

 

잘쳤거나 못쳤거나 시험을 치룬 월요일 저녁은 누구나처럼 한 주 중 가장 행복할 때여서 이 날은 별렀던 개봉관 영화 순례에 거의 바쳤다. 이 시절에 A급과 B급 외화들 참 많이도 봤다. ‘내일을 향해 쏴라’, ‘헌팅파티’, ‘작은 거인’, ‘시실리안’, ‘블루 솔져’, ‘볼사리노’, ‘방문객’, ‘방랑객’, ‘스틸레토등등 나오는 개봉관 외화는 일단 다 본다는 원칙 속에 성지 순례하듯 열심히 다녔다.

 

가을부터는 팝송 LP판 매입에도 본격적으로 나서 영화 보고나서는 광복동과 남포동에 있는 레코드상을 순례하는 일정이 더 늘어났다. 당시에 접한 CCR과 사이먼&가펑클의 앨범들 수집은 그 후의 고교 전 시절을 통해 수행되었다.



 <70년대를 풍미한 CCR의 대표 앨범 표지>

 

CCR 곡 중 처음 들은 것이 ‘Cotten Fields’였는데 한명철이가 책걸이 시간에 잘 불러 나도 집에서 열심히 배워 내가 부를 줄 아는 팝넘버 중 크리스마스 캐롤 ‘Jingle Bells“, ’Edelweiss’ 다음의 3호가 되었다. 그 외에 ‘Proud Mary’는 다음 해 제주도 수학여행에서 행해진 우리 반 버스안 노래경연 타임 때 한번 잘 써먹었다.

 

그 다음 ‘Lodi’, ‘Looking Out My Backdoor’, ‘Bad Moon Rising’ 같은 노래도 익혔으나, 2학년 마지막 책걸이 시간에 부른 ‘Who’ll Stop the Rain?‘이 꽤 히트를 쳐서 내 평생의 18번 넘버가 되었다. 현재는 이 곡과 병행하여 ’Have You Ever Seen the Rain?‘18번으로 밀고 있는 중이다.

 

사이먼&가펑클의 앨범 중에서는 ‘El Condor Pasa’를 제일 먼저 익혔지만, ‘Bridge over Troubled Water’‘Sound of Silence’가 얼추 3/4 정도 가사를 외워 제법 많이 흥얼거렸던 곡들이었다. ‘Mrs. Robinson’, ‘The Boxer’, ‘Scabrough’s Fair’, ‘I’m a Rock’ 등 주옥같은 곡들에서 가사까지 외울 염은 없었지만 그 노래들에는 완전히 빠지게 되었다.


    <처음 소장한 사이먼과 가펑클의 히트 앨범 표지>

 

그 당시는 이런 곡들의 가사내용이나 작곡유래에 대한 배경지식을 알려하기 보다는 그저 레코드 열심히 듣고 판 표지 뒤에 표기되어 있는 가사들을 앵무새처럼 따라 부르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찌 그리 시도했을꼬 했지만 그 때는 그 정도의 무식한 집착과 암기하는 총기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또 하나 떠오른 기억은 여름방학 중에 우리 모친과 집에서 뭣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한판 크게 뜨고는 분기탱천해 집에 안들어가는 가출로 골탕 좀 먹이려던 추억이 있었다. 초등과 중학 시절에도 한나절이나 하루밤 이상을 넘기지는 못했지만 이런 자해성 가출작전으로 모친을 식겁시키는 오도코를 보인 적이 있어, 그때도 불만표시 수단으로 한번 더 애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서 떠날 때 경험에 의해 타올 2장을 가방에 미리 챙겨넣었다. 한 장은 책을 싸서 베게로, 다른 한 장은 배 위에 덮을 거리로 삼으려는 궁리였다. 오후에 학교에 올라 왔는데 마침 1-4반 교실에는 아무도 와 있지 않았고, 저녁 어스름이 지자 학교 전체에 거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 월장해 물흐르는 개울가를 따라 올라갔으나 곧 닥친 어둠 속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구덕운동장 앞 분식점 아케이드 쪽으로 다시 내려갔다.



 <당시 만복당이 있었던 지금의 구덕운동장 앞 대신문화 아파트>

 

만복당인가 하는데서 빵과 우동을 천천히 시켜 먹고 다시 교실로 올라오니 얼추 10시가 가까워졌다. 하루밤 취침할 요량으로 책상 몇 개를 모아 1-4반이 있는 2층 베란다 끝 복도 쪽에 침상을 만들었다. 책베게를 만들고, 타올이불을 배에 덮고 누운 채 밤하늘을 바라보니 어찌 그리도 별들이 총총하던지..

 

이학윤 선생에게서 배운 윤동주의 별하나 나하나, 별둘, 너둘..’ 하는 시귀가 절로 떠오르는 초여름 아늑한 밤의 고즈넉함이 아주아주 괜찮아 보였다. (참 이럴 때는 꼬치 차고 나온 게 이런 호연지기적 치기를 부리는데 두말할 것 없는 행운이라 여겨졌다). ‘, 오늘 백번 잘한거 같네.. 할망구, 내 코털 건드린 맛 좀 봐라..’ 하며 흐뭇해 한 채 혼자 꼴값 떨다가 살짝 잠이 들었다.

 

자는 중에 야간 후라쉬가 얼굴에 비쳐졌다. 누군가 했더니 수위 아저씨였다. 모친 짐작에 몇 번의 가출 편력으로 봐서 부산을 뜨지는 못한 채 지가 잘 수 있는 곳이라고는 학교가 바로 1차 후보지일거라고 집혔던 모양이었다. 휴대폰도 없던 그 시절에 경남고 대표 전화번호를 물어물어 찾아 수위실까지 연결되자 이 아재가 화급하게 출동한 것이었다.

 

아재가 타올과 함께 배에 올려진 푸른 하복 상의를 보고, 별 놀람도 없이 집에서 찾는 연락 왔으니 객기 그만 부리고 귀가하라는 권유가 있었다. 학교에서 맞는 새벽 먼동 어스름 속에 월장해 개울물에서 세면과 샤워 한판 하려는 계획은 무산된 채 책보따리를 접어야 했다.

 

집에 짐짓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장하니 동생들은 다 잠든 채 한밤중에 돌아온 탕아를 환영하듯 얼음 수박화채를 만들어 놓고 모친 혼자 반기는 게 아닌가. 한타임 더 불만인 척 쪼개다가 배시시한 미소로 화답하며 다시 좋은 아들 모드로 돌아왔다.

 

뭐 고 1때 떠오르는 추억의 단상들이 계속 연속으로 꼬리를 물고 있으나 지면상 이쯤에서 접어야 할 것 같다. 다음 해인 ‘71년 고2 때의 추억여행을 다시 준비하기 위해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