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면여행 제대로 한 삼수 시절
<1974년의 삼수 시절>
1. 대하소설 읽기
‘74년 2월부터 시작된 삼수생활은 세상과 거리를 둔 채 내 방에 칩거하며 그 헛헛한 심정을 잊고 견디려면 따로 몰두할 뭔가가 필요했다. 마침 둘러보니 부친이 사다놓은 야마오카 쇼하치의 ’대망‘ 전집 20권이 있었다. 당시 한국사회에서도 기업계를 중심으로 필독서 반열에 올라 꽤 많이 회자되던 대하소설이었다.
그 전 해에 아마 연고있는 도서판매 영업사원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사놓은 모양이던데 본인보다 허탈한 시름에 젖은 내가 읽어라고 정시도착 시킨 물건 같았다. 아무튼 여기에 나오는 15~16C 일본전국시대의 최종종결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경쟁자들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삼각구도 속에 도도하게 묘사한 내용이었다.
<2015년 판 '도쿠가와 이에야스' 전집>
2차대전 태평양전쟁에서의 패망으로 대다수 국민의 풀이 죽어 위축될데로 위축된 일본사회에 이 세 주역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 속에서도 가장 불리한 초기 포지션에서 출발한 이가 이에야스였다. 그런 그가 선두주자 노부나가와 중간주자 히데요시에게 머리를 숙이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 이들이 자만심으로 각각 실족하자 드디어 ‘최후에 웃는 자’로서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다는 스토리가 커다란 반향을 아니 받을 수가 없었다.
내게도 이 소설은 이에야스가 굴욕의 시기를 견디며 자신을 단련하다 중국 삼국지의 유방처럼 천하의 영웅으로 우뚝 서는 성장대업 묘사가 적지 않은 감정이입을 가져와 많은 위안과 용기를 준 고마운 물건이 되었다. 이 무렵에는 이에야스에 심취하여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하면 ‘이순신’ 보다도 더 앞 열에 세울 정도였다.
책 빨리 읽지 못하는 나는 보통 500페이지 정도의 1권을 3-4일에 걸쳐 읽어나가는 템포로 갔는데 중후반으로 넘어가는 하이라이트 권들은 말 그대로 하루 만에 독파할 때도 있었다. 스펙타클한 전투씬 묘사보다는, 인물들 간에 미묘하게 변하는 내면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여 일본인들의 겉다르고 속다른 ‘다테마에’적 속성을 엿보는 것도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저자 야마오카 쇼하치(1907~1974)
2차대전 당시 종군기자로 참전한 저자는 이 작품 다음에 ‘태평양 전쟁‘도 집필했는데 여기서는 자신의 캐릭터를 ’일본 국뽕작가‘로 완전 자리매김한 양 일본군부체제에 대한 본질적 비판보다는 한 끗빨 차이로 불운하여 태평양 초기판도의 건곤일척을 다툰 미해군과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아쉽게 패했다는 식의 역사관을 보자 아, 이 아재의 한계가 여기구나 싶었다.
2. 운전 면허증 따기
3월 말까지 한달 반 여 기간 방구석에서 칩거하며 책만 읽는 생활을 계속하다 만물이 소생한다는 4월이 오자 ‘나도 이제 바깥공기도 마셔보자’ 하는 생각이 일었다. 마침 국제신보 광고란에 나온 ‘천일자동차 운전학원’ 광고를 보자 ‘옳타구나, 이 기회에 운전면허증이나 따서 택시기사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연결 되었다.
민락동 구 수영비행장 옆에 있던 이 자동차 학원을 찾아가 면담한 뒤 비용과 합격난이도를 고려해 ‘1종대형’이 아닌 ‘2종보통’ 면허증 획득 코스에 바로 등록했고, 그 당시 갓 나온 포니차에 첫 실습차 올라탔다. 학원내 공간에서만 있은 첫 연습코스 주행이 얼마나 흥미롭고 뿌듯하던지 60년대 중반에 유명했던 글래머 가수 이금희의 ‘나는 운전수’라는 곡이 자동으로 떠오르며 흥얼거려지기 시작했다.
운전대 옆에 붙은 기어변속장치도 그 시절 승용차들의 최신 유행이었는데 클러치 밟고 변속하는 타이밍을 못맞추어 시동을 자주 꺼버리자 일본군대 하사관 출신 같았던 50대 운전조교로부터 한심하다는 질책은 꽤나 받았지만 내가 차를 실제로 몰며 달려가던 기분을 크게 잡칠 정도는 아니었다.
구덕 운동장 정문 앞에서 출발하던 학원전용 통학 버스에 오르면 당시 유명했던 MBC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인기 MC 김세원의 가볍지 않으면서도 활력을 실어주는 목소리의 리드미컬한 멘트들과 장미화 등의 ‘헬로아 헬로아 봄날은~’ 하는 노래들을 들었다. 이런 좋은 기운을 심어주는 방송을 들으며 여인들의변화된 옷차림으로 화사해지는 거리 풍경들을 쳐다보면, ‘아, 이제 봄이 왔으니 나도 슬슬 어둠의 터널에서 벗어나와야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아침마다 버스를 몰아주는 운전사 양반이 60대 영감이었는데 다른 나이 든 통학생들에게는 다짜코짜 친숙한 반말투로 얘기하다가도, 아직 만으로는 스물도 안된 앳된 얼굴의 내게는 무슨 지체있는 부자집 도련님이라도 되는 양 깍듯한 존대어를 해주는게 좀 미묘하게 여겨졌다.
사실 지식 엘리트 코스에서는 한참 멀어진 생활권에 나를 던져 한번 아래로도 내려가 보려고 택시기사를 지망하는 운전교습생의 경로로 들어섰건만, 세상 사람들은 ‘자네는 아직 이 바닥에서 부딪쳐 놀 깜냥이 아니네’ 하고 애송이 책상물림파인 걸 바로 알아채는 듯 했다.
아무튼 6주 정도의 교통법규와 자동차 구조에 대한 필기교습과 함께 S자, T자, Z자의 곡선주행, 실제 거리주행의 과정을 다 거친지 교통경찰 입회하에 필기시험과 운전실습 시험을 다 통과하여 한번 만에 면허시험에 합격했다. 한해 앞부터 치는 데마다 다 떨어지다 모처럼 합격이라는 소식을 들으니 그 감회가 남달랐다.
아마 74년 5월에 발급받은 면허증이었으니 우리 동기들 중에서는 상당히 빠른 연식의 면허증 보유자로 기록될 법하다. 우리 부친과 모친도 이 면허증의 상징성을 바로 이해하고, 자신들도 제법 받았을 큰자식 농사 상처가 이를 계기로 아무는 반전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같이 크게 기뻐해 주었다.
난 이 면허증을 ‘78년 여름 부친이 하늘색의 포니차를 구입할 때까지 장롱면허증으로 묵혀놓았으나, 차를 사고부터는 실제 핸들을 잡기 시작하여 20년 후 독일 함부르크에서 호구지책으로 택시면허증을 따 한 2년 반 ’함부르크 탁시파아뤄(Taxifahrer)’로서 택시기사까지 해봤으니 74년의 목표는 마침내 이룬 셈이 되었다.
<삼수 시절의 홀로 놀기>
1. 국내작가 소설과 영화보기
운전면허 교습소를 다니면서 주말에는 부친과 바둑을 하루에 열 다섯판까지 둘 때도 있었다. 내 얼굴 본다는 내색을 감추며 나와 두는 바둑게임이 익사이팅해서 죽겠다는 듯이 틈만 나면 바둑 한판 두자고 보챘다. 그 당시 부친이 10급, 내가 한 9급 정도였던 전형적인 하수들의 게임이었지만 승부욕은 나보다 훨씬 커 꼭 자신이 백을 잡고 당연히 지면 ‘또 두자, 한판 더!’ 하며 내가 귀찮아 판 내어 줄 때까지 열판도 더 넘어서 두곤 했다.
이 무렵 나는 ‘대망’도 다 읽고 해서 국내작가 최인호, 조해일, 조선작의 중단편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그 앞 해에 최인호는 조선일보에 호스티스 소설 ‘별들의 고향’을 연재하여 공전의 히트 대중소설 작가로 떠올랐다. 난 단행본을 구입해 이 책을 찬찬히 읽었는데 이 인간 특유의 감각적인 도회적 문체가 신파성을 교묘하게 우회하여 봄바람이 솔솔 돌기 시작한 내 내면에 삶의 위안을 주는 듯이 비춰졌다.
<영화-별들의 고향 포스터>
마침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이장호 감독, 안인숙, 신성일 주연으로 만들어졌는데 책 내용과 비교해 보려 부영극장이던가에 바로 찾아갔다. 그때까지 B급 탈렌트였던 안인숙이 제대로 물 만난 양 주인공 ‘오경아’ 역을 잘 소화했고, 전성기가 지난 신성일도 마지막 애인인, 인간미 쫌 있는 화가 아재 역할로 안인숙을 잘 받쳐주었다.
<'별들의 고향' 의 한 씬>
요즘 시각에서 보면 영화적 완성도가 한참 낮은 B급 영화임에 분명하나 호스티스라는 사회적 약자를 통해 ‘우리 삶의 질곡’을 감상적이나마 한번 비쳐 본 나름 시대정신이 묻어있었던 영화라 하겠다. 특히 이장희가 작곡해 이 영화의 유명도를 더했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나 ‘한 소녀가 울고 있네’, ‘난 정말 몰라요’ 등의 삽입곡은 지금 들어도 동시대적 아련함을 내게는 불러일으킨다.
최인호는 이때부터 대중소설 작가라는 타이틀을 떼기 위해 작품성 있는 작가로 변신하려 혼신의 노력을 하며 중단편집과 역사 및 종교소설을 쏟아내었다. 나는 이 시절 이 작가의 작품성 있는 ‘타인의 방’과 ‘처세술 개론’ 등을 접했고, 동시에 대중적인 ‘불새’, ‘바보들의 행진’, ‘고래사냥’. ‘지구인’ 등에서도 많은 흥미를 느꼈다.
조해일도 한 두해 뒤 ‘갈 수 없는 나라’와 ‘겨울여자’를, 조선작은 ‘영자들의 전성시대’를 써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군에 올랐지만, 나는 ‘74년 무렵에 발간된 이 양반들의 문학성 번뜩이는 중단편들에 더 끌리기도 했다.
<단두대에 끌려가는 알랑 들롱>
이 무렵 본 영화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알랑 들롱과 쟝 가방의 영화 ‘시칠리언’에 이어 또 같이 주연한 영화 ‘암흑가의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전과자로 출옥해 개과천선의 삶을 살려 무던히도 노력하던 알랑 들롱을 껀수 올리려고 깐죽거리며 과잉감시하던 형사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이 친구를 살리려 끝까지 애쓰며 변호하던 쟝 가방이 나온 영화를 말이다.
<마지막 담배 태우는 알랑 들롱의 허탈한 눈빛>
모든 탄원이 기각된 채 사형 단두대에 끌려나온 알랑 들롱이 마지막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입회인으로 나온 쟝 가방을 향해 고마움과 허망함이 교차된 눈빛으로 쳐다본 뒤 단두대 칼날에 목을 들여밀던 그 마지막 장면이 44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아, 억울한 인생의 부조리여. 프랑스 영화의 미학성이 제대로 발현된 명장면으로서 난 엔딩 크래딧이 오르고도 한참 자리에 앉아 있다 나와 복도에서 거울 보며 담배를 연속 두 대 피웠을 정도로 충격을 먹었다.
2. 부산의 명소 순회와 경남학원 등록
5월에 접어들어 날씨도 화창해지니 폐병환자처럼 방에서 책만 읽는 생활패턴을 바꾸고자 시내버스로 한나절에 도달할 수 있는 명소들인 금정산, 성지곡 수원지, 태종대, 해운대 등을 아침에 일어나 마음 내키는대로 정해 다니기 시작했다.
유치원과 초중 시절 소풍도 많아 갔던 금강원 동물원을 살펴보고는 금정산에 오르는 일일여정을 처음 정했다. 케이블카 타고 산정에 오를까 했으나 마침 운행일이 아니었기에 걸어서 올라갔다. 정상으로 하이킹 가는 사람들과 땀 좀 흘리며 올라가니 산정 막걸리를 팔았다.
반 주전자를 주문해 마셨는지 한 두 양푼을 사서 마셨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약간 알딸딸해진 기분으로 산아래를 훑어보니 차들이 조그맣게 지나가고 가옥과 건물들이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처럼 아늑하게 있을 자리에 잘 들어앉아 있었다.
<금정산 정상 근처>
난 모처럼 가슴이 시원하면서도 내가 평일에 왜 혼자 여기에 올라와 하릴없이 아래를 굽어보는 신세가 되었는가 하며 언뜻 내 포지션에 대해 한번 더 점검해 보는 타임에 빠져들었다. 이런 의식 속에 한 며칠 성지곡이나 태종대를 버스 타고 도착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홀로 나다니다 어느 날 마침내 ‘이제 상처 아픔을 치유하는 휴식기는 보낼만큼 보냈으니 입시준비 세계에 다시 천천히 복귀하자’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7월인가부터 경남학원에 등록하여 28회 재수생들과 함께 하는 입시공부 세계로 돌아왔다, 희안하게 여기서는 나처럼 27회로써 삼수하는 친구들이 아직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안면없는 28회 후배들에게도 내 입으로 내가 27회다 하고 밝히지는 않은 채 그냥 학업모드로 내 몸과 마음을 추스린다는 기분 속에 혼자서 그냥 왔다갔다만 했다.
7월 중순인가 어느 날 수업마치고 귀가하려는데 학원 문앞에 최태룡이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 모친에게 전화해 내가 여기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S대 뱃지달고 내 앞에 나타났다. 난 일순간 전혀 예상 않았던 일이라 ‘으잉!’ 했지만 27회 친구는 이 해 들어 처음 보는 것 같아 정말 반가왔다.
만나서 뭐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근처 다방에 가서 커피 한잔씩 나누면서 내가 지나쳐 온 몇 달을 요약해서 전하고, 근처에서 당구도 한두 게임 쳤던 것 같다. 저녁은 남포동 쪽으로 가서 소주 곁들여 같이 먹고 ‘로보’ 노래가 나오는 다방에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또 나누다 헤어졌다고 여긴다. 아무튼 태룡이와의 이 만남을 통해서 내가 지난 몇 달간 의식적으로 차단했던 일상의 세계로 다시 복귀했음을 실감했다.
3. 마지막 홀로 여행: 욕지도 탐방
경남학원 생활은 여전히 외톨배기라 그랬는지 그냥 익명의 아웃사이더처럼 지내다가 돌아오는 무슨 허깨비 놀음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8월 초에 한 1주일 간인가 단기방학이라 하기에 나는 혼자 어딘가에 선상여행이나 하루이틀 기분전환용으로 하고 오자며 짐을 가볍게 꾸려 여객선 터미널로 갔다.
중3 때 가을여행 다녀온 충무가 생각나 그때를 생각하며 여객선에 올라탔다. 참 한려수도는 절경임을 한번 더 느꼈다. 충무에서 용화사를 탐방하고 충무 시내를 돌아다니다 어딘가 외딴 섬 같은 곳은 없나하고 여객선 출발 스케줄을 보니 욕지도란 이름이 눈에 띄며 편도시간만 한 4시간여가 걸린다 했다.
오늘 밤은 여기서 1박해야겠다 하고 하루에 한번씩 들린다는 욕지도행 배에 올랐다. 무슨 바다가 이리 호수 같나 하고 여길 정도로 초록빛 고요한 물결이 계속 누워있듯이 펼쳐졌다. 바다 한가운데서는 무슨 태고적 침묵이 흐르는 듯 너무 조용해 여기가 현실계인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위에서 본 욕지도 전경>
욕지도에 도착하니 ‘74년 당시만 해도 그냥 한적한 고도(孤島)의 느낌만 들었다. 다행히 선착장 근처에 여관 같은 것이 눈에 띄어 바로 찾아가 1박할 방을 찾은 뒤 손에 든 여행가방을 풀었다. 간단한 샤워를 하고 근처를 둘러보니 시골다방도 눈에 띄어 찾아가 커피를 한잔 시켰다. 마담과 레지들이 약간의 호기심과 심드렁함을 같이 보이다 다른 손님들이 찾아오자 아예 내게서는 관심을 껐다.
<좀 더 근접한 욕지도 전경>
사실은 내가 도착한 섬 뒤쪽에 천황봉도 있고 깎아지른 절벽 절경들도 있었지만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뱃길여행만을 음미하고자 온 나로서는 다방을 나와 선착장 근교만을 돌아다니다 저녁밥 준다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대청마루에 다른 방 손님과 함께 식사하라는 듯 겸상이 차려져 있었다.
요것 또한 욕지도스러운 체험이라 여기고 다른 방에서 나온 중년의 아재와 밥을 먹고는 맥주도 한 두어병 사서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대입 준비하는 장수생이라 하니, 자신은 여자사람 찾아 각 섬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업주들에게 연결시켜주는 거간꾼이라 했다. 요즘으로 치면 인신매매단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 양반은 태평스러운 얼굴로 요즘은 사람 찾기가 예전만큼 쉽지 않다며 푸념까지 했다. 아까 다방에서 본 레지들도 이런 경로로 여기까지 오게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연결되었다. 내가 수사관처럼 보이지 않아 안심하고 태연히 자기 정체를 밝혔겠지만, ‘아, 먹고 살려면 이런 일도 직업이라고 삼아야 하는갑다’ 하고 이 아재가 처한 상황을 이해해 주려 애썼다.
욕지도에는 하루에 한번만 정기교통선이 들어온다기에 인터넷도 없는 당시에 섬에 대한 추가정보도 얻을 길이 마땅찮아 이번 방문은 여기까지 하고 그 다음 날 낮배로 나왔다. 충무항으로 가는 길은 올 때만큼이나 고요한 뱃길이었다. 녹색 바다 정취를 음미하면서도 나는 이 배가 혹시라도 난파를 당한다면 어떤 나무 판대기를 구명용으로 활용할까 하고 적당한 물건을 찾으려 배 안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런 기우는 필요없이 충무항에 무사히 닿은 나는 좀 더 돌아다닐까 하다가 뱃길유람과 욕지도 숙박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여기고 부산행 귀가를 서둘렀다, 버스편으로 오면서 이 욕지도는 다음에 꼭 한번 더 오리라 결심했다. 그리고는 가을부터 서울로 다시 올라가 몇 달간 바짝 공부해 이 삼수생활을 이번에는 끝내자는 구상을 했다.
<74년에 발생한 국내외 주요 사건>
1. 문세광 사건과 대일 갈등 최고조
‘74년 8/15일 세종회관에서 8.15 경축사를 낭독하던 박통에게 재일교포 청년 문세광이 식장에 미리 입장하여 뒷좌석에 앉아 대기하다 연설이 시작되자 뛰쳐나오며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박통의 연단을 향해 4발을 발사했다. 경호원들도 뛰어 나오며 대응사격을 하는 와중에 착석해 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한발을 맞고, 성동여상 합창단의 정봉화양이 유탄에 맞아 같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저격 당한 육영수 여사>
당시 정부는 재일조총련이 사주한 문세광이 일본 파출소에서 권총을 훔쳐 한국에 잠입한 사건이므로 일본당국이 철저한 수사를 통해 그 전모를 철저히 밝혀주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당국은 극좌사상을 가진 문세광의 단독범행으로 사건을 축소하며 한국정부가 바라는 수준의 수사협조에는 시종 소극적 자세로 일관했다.
이에 박정권은 커다란 불만을 품고 대일수교 파기도 불사하겠다는 외교적 초강경 자세를 취했다. 결국 미국의 중재로 박정권도 외교단절까지는 가지 않았고, 일본 다나카 정권도 형식적인 유감표명을 하여 갈등구도는 좀 누그려졌다.
<재판정에 출두하는 문세광>
문세광은 최근의 새로운 여러 증언들(우리 경호원들의 대응사격 중에 육여사가 오발탄을 맞았다는)을 통해, 자신이 발사한 총탄이 한 발도 육여사를 명중시키지 못했음에도 그 해 10월 사형선고를 받고 12/20일 교수형으로 세상을 마감했다.
나는 이날 대영극장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더티 하리’ 시리즈 첫 번째편 영화를 보고 나오던 오후 4시 경 신문호외를 보고 육여사의 저격소식을 접했다. 제발 좀 소생했으면 하는 기원을 했으나 저녁 7시에 운명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때부터 국내언론들은 ‘북한 지령->조총련 사주->행동책 문세광’의 도식을 그려놓고 이러한 그림을 방치한 일본당국에 화풀이성 비난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충남의 어느 조폭 단원 100여명이 상경하여 일본대사관 앞에선가 항의의 표시로 단체 ‘손가락 자르기’를 시도했고, 그것을 뉴스매체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준 것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무슨 몬도가네형 세레모니가 ‘애국적 행위’이라는 미명 하에 공권력 앞에서 버젓이 펼쳐진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의 정치적 최대 수혜자는 박통 자신으로서 많은 국민들의 동정표를 얻어 유신독재에 대해 점점 고조되기 시작한 국민들의 반발 예봉을 상당기간 무디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경질된 박종규 경호실장의 후임으로 들어온 차지철이나 신직수 중정부장의 뒤를 이은 김재규의 등장은 다가올 ‘79년 10.26 사건의 주역들을 불러들인 원인과 결과가 되기도 했다.
2.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사임
’72년 6월 미국대선시 닉슨 공화당 선거캠프의 사주를 받은 전문털이범 5명이 민주당 후보였던 조지 맥거번의 선거캠프가 있는 워터게이트 호텔에 잠입해 선거전략 문건들을 빼오고, 도청장치를 하려다 들통이 나면서 ‘워터게이트 스캔들’이라는 세기의 정치추문 사건이 발생했다.
‘74년 8/8일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은 끝까지 모른다며 2년 간이나 잡아떼던 닉슨이 워싱턴포스트지 두 젊은 기자의 최초 문제제기와 함께 전국적인 언론들의 전방위적 폭로와 일부보좌관들의 양심선언에 의해 개입관여가 거의 확인이 되어 탄핵위기에 몰리자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사임 성명을 내었다.
<73년 3월 워터게이트 청문회에 출석한 닉슨>
현직 대통령의 특권과 수하 보좌관들의 끝간데 없는 육탄방어와 폭로자들에 대한 사적 스캔들 털기 등으로 2년이나 버텼지만 결정적 증거로써 ’스모킹 건‘인 대통령과 보좌관들과의 4,000 시간 짜리 대화내용이 수록된 녹음테입을 제출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몰리자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임기 중 자진사퇴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이 ‘73년 초여름 이래 국내언론에 별 사건 아닌 조그만 해프닝 사건으로 보도되다 점점 에스컬레이트화 되어 추가폭로들이 줄을 잇는 과정을 건성건성으로나마 지켜봤지만 설마 대통령 사임으로까지 갈 줄을 미처 예상 못했다. 아무리 미국이라지만 확연한 우세에 있는 공화당 선거캠프의 맹동분자들이 패배가 거의 확실한 민주당 캠프에 들어가 충성경쟁 차원에서 한 건하려 일으킨 듯한 사건을 미언론들이 저리 물고 늘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
<뉴욕 타임즈지의 닉슨 사임 보도>
국내 언론도 나와 비슷한 시각에서 보도를 하려 했던 듯(물론 내가 언론의 보도 시각에 의해 상호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닉슨이 곤욕은 치루겠지만 이것으로 대통령 사임 깜은 결코 안될 것이라는 전망 보도를 ‘74년 봄까지는 유지했다. 그런데 5~6월로 넘어가면서 상황이 급박해지는 듯 하더니 더위가 한 고비에 이른 8월 초 후임자인 포드 부통령과 자진사퇴시 완전사면 엠바고가 이루어져 전격사임이 이루어졌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은 미국이라서만 일어날 수 있는, 위대한 언론정신에 의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코멘트들을 쏟아놓음으로써 전혀 그렇지 못했던 박정권에 슬쩍 빗대어 한때나마 간접적인 비판기세를 올렸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가을에 다시 서울 오다>
욕지도 방문 건을 계기로 서울에서의 마지막 피치 작전을 다듬은 나는 재수시절처럼 방종의 유혹이 어른거리는 하숙생활은 좀 지양해 보자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래서 머리를 짜보니 서울 대방동 쪽에 모친쪽 사촌이모가 노부모 모시고 외삼촌들과 같이 사는 집이 생각났다.
대가족이 살아 북적거리기는 하나 모친과 절친처럼 지내온 사촌이모는 재수시절 외대 최종 불합격 통보를 내게 카산드라처럼 전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대입과 관련된 나의 불합격사를 항상 옆에 있으면서 꿰고 있었기에 나에 대한 안타까움은 모친보다 컸으면 컸지 결코 작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나만 원한다면 대방동 집에 머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연락해 왔다.
사실 나도 햇수는 3년차지만 고교 3년간처럼 입시과목들을 열심히 파본 적은 없이 갖고 있는 실력으로 그냥 1년 더 기다려 시험 한번 더 본다는 생각으로 생활해 왔다. 3수 째는 책을 다시 잡은 기간이 더 짧아졌기에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S대 환상은 지우고, 연대 정도의 상대나 문과대에 들어가서 이 지루한 입시낭인 생활을 빨리 걷어치우고 싶었다.
이런 상념 속에 모친과 상의하여 이 집에 시장가격의 하숙비를 전할테니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마음으로 나를 묵게 해주다면 가겠다고 했고, 이모는 두말 없이 오케이 했다. 9월 말에 올라와서 나와 동갑인 막내 외삼촌과 함께 쓰는 방을 배정 받고 마지막 대입준비 하숙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시 종로학원에 찾아가 등록하겠다 하니 접수처 여직원이 용케 나를 알아보고 ‘작년에 다니셨던 분이죠? 그런 분 꽤 돼요’ 하며 잘 찾아왔다는 식의 인사를 건넸다. 연고대 반에 등록했더니 입시준비 과목들이 확 줄어들어 공부하기는 널널했다. 익명의 섬 속에 들어앉은 셈이라 경남학원에서보다는 심적으로 많이 편했다.
선경에 다니는 큰 외삼촌과 함께 아침에는 그 회사 통근버스에 꼽사리 끼어 대방동에서 종로학원까지 오고 저녁에는 104번 버스나 지하철로 대방역에 내려 귀가하는 식으로 다녔다. 학원에서 어떻게 보냈는지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연고대 출제경향 문제들을 살펴보았지 싶다. 뭐 그리 죽기살기 식의 공부는 쪽팔려서라도 크게 하지 않았다. 그저 입시날짜만 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전기대 불합격과 가슴 졸인 외대 합격>
이 무렵 학원에서 27회 이철희를 만났는데 이 친구도 그 앞 해에 여기서 같이 재수한 걸로 기억이 났다. 서로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보다는 서로 어울려 명동 돌아다니기, 맥주호프집과 당구장 함께 다니기로 시간을 보내며 입시시즌을 같이 맞았다.
함께 연대를 지원했는데 난 상경계 응용통계학과를, 철희는 법대인가 정외과 쪽인가로 가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안전지원을 하자 싶어서 연대 상경계에서는 예년 커트라인 점수가 가장 낮은 응통과를 전략지원했는데 이뿔사, 나처럼 생각한 친구들이 많아 상대에서 가장 높은 4.1:1의 경쟁률을 보였다. 경제학과나 경영학과에 비해 두배나 높은 수치였으며 실제로 그해 상경계에서 가장 높은 커트라인을 기록했다 한다.
아무튼 나는 연세대와는 전생에 서로 편치 않은 관계였는지 또 고배를 마셨다. 이번에도 수학에서 좀 발목을 잡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다른 과목들은 다 생각했던 점수들이 나온 듯해 자그마한 기대라도 했었는데 말이다. 뭐 몇 번 떨어져 봤으니까 맷집이 생겼는지 크게 충격이 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올해는 어떻게든 장수생 생활을 종결짓고 싶었다. 그래서 후기인 외국어대의 지원 과 선정에서는 며칠 간 성지곡 수원지로 버스를 타고 왔다갔다 하며 제법 긴 장고를 했다. 모친은 어떻게 해서라도 전과를 시켜줄테니 베트남어과 같은 데로 안전지원을 하는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만 사실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대신 작년에 나를 떨어뜨린 독일어과 보다는 갑자기 러시아어과가 자꾸 다가왔다. 계속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니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체홉, 고골, 파스테르나크 등 기라성 같은 러시아 문학의 거봉들이 포진해 있는 러시아어과 지원으로 거의 마음이 넘어갔다.
그런데 지원마감 당일이 되자 그래도 내가 고교시절부터 오랜 기간 사랑해 오던 나라 독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독일어과를 저버릴 수는 도저히 없겠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설사 떨어진다손 치더라도 나중에 더 후회가 없을 것 같아 하루 사이에 맘을 다시 바꿔 독일어과로 지원 방향을 틀었다. 대신 이번에는 작년처럼 객기어린 생각에 시험을 가소롭게 여기는 태도 같은 것은 일체 발붙이지 못하게 했다.
올해의 시험은 이게 진짜이고, 눈치작전으로 선택한 응용통계학과 보다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과는 독일어과라는 자기암시를 속으로 수없이 되뇌어가며 정신을 가다듬고 시험장에 갔다.
암만해도 외국어 학습소양을 중시하는 학교이다 보니 내쪽에서 볼 때 거추장스러운 자연과학 부문 과목은 아예 없앤 것도 맘에 들었고, 수학도 꽈배기 틀 듯 그리 꼬아놓은 부분 없이 모처럼 ‘요 정도는 알지?’ 하는 정도의 정직한 문제들만 나왔다.
오랜 만에 시험치고 나서 ‘이번에는 크게 떨어질 이유가 없다’는 맘이 들었다. 이런 자신감은 합격 발표일까지 유지되었다. 그런데 발표 당일이 왔고 예정시간인 저녁 6시가 넘어가는 데도 서울 이모로부터 아무런 확인 소식이 오지 않았다. 7시가 넘어 8시에 육박하는데도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작년의 불운이 연속으로 적용되는건가. 이모가 불합격 소식을 차마 전하지 못해 전화를 하지 못하는건가. 이번에도 떨어지면 4수는 어떻게 하지. 옴마 말 무시하고 베트남어과에 안전지원하지 않았는 게 또 저주로 돌아오는 건가.
참 그 한 시간 반 사이에 나는 다시 작년의 악몽 속으로 빠져드는 자유낙하를 제대로 해봤다. 8시 반이 넘어서야 따르릉 전화가 왔다. 모친이 잡아채듯 받는데 내 예감으로는 꼭 불합격 소식 같았다. 그런데 전화받고 5초도 안되어 모친의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뭐라고? 됐다고?’ 하는 소리를 옆에서 듣는 순간 눈에서 눈물이 절로 쏟아져 나왔다. ‘그럼 그렇지. 하늘이 날 요로콤 버릴 이유는 없지!’ 하고 가슴 졸아했던 순간이 머나먼 추억처럼 여겨졌다.
알고보니 이모는 대방동에서 이문동까지 가는데 승차시간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고, 휘경역에서 외대 안으로 걸어들어가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했다. 간신히 합격자 발표게시판을 보고도 이를 전해 주는데 필요한 공중전화 박스가 다른 사람들로 인해 도통 사용할 수가 없어 전달시간이 그리 지체되었다는 것이었다. 합격자 면접은 다음날 아침 9시까지이니 빨리 서둘러 상경하라고도 전했다.
말 그대로 용궁탈출한 토끼의 심정으로 버스를 타고 부산역에 가 밤차표를 알아보니 다행히 밤 11시 반 야간열차편이 있었다. 티케팅 하고 집에 다시 오니 무슨 S대 합격이라도 한 것처럼 집 전체가 경축 분위기로 가득 찼다. 부친도 전화로 ‘너무 잘 됐다. 내 3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갔다. 아들에게 축하한다고 전해라!’ 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했다.
난 짐이랄 것도 없이 검은 코트만 걸친 채 가방 하나 들고 부산역으로 다시 향했다. 밤차 안에서 흥분 속에 거의 잠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서울역에 내려 아침을 국밥 한그릇으로 먹고는 이문동을 향했다. 독일어과 사무실에 갔더니 나처럼 합격한 친구들이 면접을 위해 대기해 있었다. 이 중에서 1/3은 앞으로 나와 진한 학연을 맺으며 함께 게르마니스트의 길을 가게 될 친구들이었다.
삼수의 시간이 쉽지는 않은 기간이었지만 세월이 흘러보니 그 때 많은 정신적 자양분을 보충할 수 있었던 시기라 여겨진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는 말처럼 정해진 지식엘리트의 코스에서 일탈을 하다보니 다른 세계와 다른 계층의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으며, 세상을 풍성하게 살려면 롤러 코스터적 체험은 한두번 정도 하는 게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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