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13. 독일사랑과 대학진입이 흐뭇했던 대1 시절

백조히프 2018. 7. 24. 15:12




13. 독일사랑과 대학진입이 흐뭇했던 대1 시절

 

 

<1975년의 대학 1년 시절>

 

1. 독일사랑과 호기심 및 험난함이 교차된 독일어과 수업

 

‘752월 외대 독일어과에 필기시험 합격 후 가진 면접에서 내게 던져진 질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아는 독일 작가들을 대보라는 것이었다. 대층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괴테, 쉴러, 토마스 만, 하인리히 뵐, 하이네, 릴케, 헤르만 헤세, 루이제 린저등등을 읊어대니 면접교수들이 어쭈 기본은 좀 되었구먼 하는 식으로 고개를 끄떡여 주었다. 첫 대면한 독일어과 이인웅, 오한진, 김광요 교수들이었다.


<외국어대 이문동 캠퍼스>

 

제법 애를 먹고 한 입학이라 입학식에는 부산에서 상경한 부친모친, 사촌이모에다 최태룡이가 먼 길에도 찾아와 주었다. 외대 상징물 앞에서 같이 기념사진도 찍었다.


교문 건너편에 있는 필다방 골목길을 따라내려가니 대문 앞에 하숙이라는 글들이 씌여져 있길래 그 중 맨 끝에 있는 집에 들어갔다. 다른 집들과는 달리 하숙집 아줌마가 비전형적으로 늘씬하고 인상이 좋아보여 방 한번 보자마자 바로 결정했다.

 

이 하숙집에서 졸업할 때까지 4년을 머물게 되리라곤 그때까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난 처음 들어간 대청마루 방에서 주인과 함께 수많은 룸메이트와 다른 방 기숙인들을 맞이하고 보내며 심덕과 인상이 같이 좋은 충남 보령출신의 여주인 배정례 여사 집에서 스토리도 꽤 많이 만들어 낸 이문동 시대를 보냈다.

 

이 시절 나는 내가 원했던 학과이기에 비록 삼수생으로 늦깎기 입학을 했지만 학교와 학과에 대한 자부심은 꽤 높았다. 근현대 유럽사에서 인상적인 존재감을 보인 독일이 1, 2차 대전에서는 비록 패전국었지만 당시 일본과 함께 덩치 큰 미국 끼워 세계경제를 이끌어가는 3대 기관차(Locomotive) 역할을 하는 유럽경제 최강국이었기에 이 나라 언어를 배우며 그 역사적 배경과 산업발전사를 통해 그 실체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거기다 한해 앞 뮌헨 월드컵대회 결승에서는 돌풍을 일으킨 요한 크루이프의 강호 네덜란드를 프란츠 베켄바우어, 게르트 뮬러, 파울 브라이트너로 구성된 팀으로 2:1로 꺾고 축구챔피언까지 등극한 서독이란 나라가 내 나라가 아닌 게 아쉬울 정도로 심취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국내 번역본> 

 

독일어과 에이스 이인웅 선생의 독일어 강독시간을 처음 맞아 다룬 첫 작품은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Die Toten Schweigen’(디 토텐 슈봐이겐, ’죽은 자는 말이 없다‘)이라는 단편이었다. 독일어 원어 작품을 처음 접해 보는 신입생들에게 안성마춤의 분량에다 번역연습하기에 딱이었다. 번역숙제가 할당된 아그들이 준비해 온 부분을 비교적 매끈하게 또는 더듬거리며 초벌 번역을 하면 이교수가 한번 더 정리해 줬는데 이 번역은 원문 비교를 확실히 할 수 있게 하는 깔끔한 문장 대 문장의 직역 번역이었다.

 

난 이런 원어작품을 대할 때 마다 고3 시절 허민호 선생이 독일 하이델베르크가 무대인 황태자의 첫사랑이란 원어 작품을 갖고와 번역해 주며 여기 독일어 학습을 포기한 친구들이 많은 것을 안다. 하지만 단 한 두 사람이라도 독일어와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을 위해 난 이 수업을 진행한다라고 하던 그 기억이 떠올랐다. 대부분이 그 시간에 딴 과목 책을 펴서 자습하며 이 수업을 철저히 외면하는 중에도 난 그 한 두 사람이 되어보면서 속으로 반골적인 희열을 느꼈다.

 

아마 그때부터도 세계사 공부를 통해 생성된 독일에 대한 애정이 그 밑바닥에 깔렸기 때문이리라 여겨진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작품의 개요는, 엠마라는 어느 사회적 명사의 부인이 프란츠라는 젊은 애인과 밀회하다 폭풍 속에 타고가던 마차가 전복되어 자신만 살게 되자 현장을 도망치듯 벗어나 아무 일도 없었든 듯 남편에게로 복귀하는 결말로 끝나는 내용이었다.

 

이인웅 교수는 번역강독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자, 당시 오스트리아 빈 사회 상류층에서 팽배했던 관습굴종적인 소시민적 심리를 비판적으로 묘사한 이러한 내면소설에 대한 독문학사에서의 위치와 의의, 작품성 같은 것보다는 정교한 원서번역 기법전수에만 치중했다. 이해는 하지만 좀 많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앞 부분 맛만 보다 끝도 못마칠 분량의 작품을 허세 속에 들고 나오는 다른 교수들에 비해 확실하게 한 편을 음미하며 완결지을 수 있는 작품을 엄선해 오는 이 양반의 강의 결말짓기 열정이 아주 아금받아 보여 맘에 꽤 들었다.

 

43년이 지난 지금도 이교수 수업 속에 다룬 슈니츨러의 또 다른 작품 ‘Immensee(임멘)’,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Bahnwaerter Thiel(반붸어터 틸, 철도 건널목지기 틸)’, 프란츠 카프카의 ‘Hungerkuenstler(훙어퀸슈털러, 단식광대) 등의 작품명이 아직도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외대 미네르바 동산 전경> 

 

타대학 독문과들에 비해 독일어 강독시간 비중이 두 배 정도는 되는 학기당 80여 시간 배정의 교과과정은 과연 외국어대다왔다. 하지만 이 많은 강독수업들을 통해 처음에는 한 문단 해석하는데 모르는 단어 하나하나를 민중사 독한사전으로 일일이 찾고, 구문구조가 어떻게 되어있으며, 과거시제나 과거분사 형태의 동사 원형은 뭔지를, 지시대명사나 관계대명사가 뜻하는 선행사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러면서도 우리말 번역의 총체적인 매끈함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마지막 마무리 과정이었다.

 

이 초기 트레이닝에서 한학년 정원 30명 중 절반 이상이 한학기가 안되어 독일어 공부에 절망하거나 흥미를 잃어 그냥 독일어 학습을 하는 흉내만 건성건성 내며 전공자로서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이 학과에 어떻게 들어왔는데 하고 생각할 때마다 남들처럼 쉽게 포기할 형편이 못되었다.

 

가는 데까지는 삼수정신을 발휘하여 따라가 보자고 결심했다. 장학금을 따야 하기에 사람과의 관계맺기를 포기한 채 죽기살기로 공부만 해야 하는 친구들로 대부분 구성된 성적 선두그룹에는 들지 않더라도 독일어 학습끈을 놓치지는 않을 정도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꾸준히 추적해 갔다. 대신 학우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맺는데는 내가 먼저 마음을 여니까 별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이 시절 전공 외에 필수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외국어로는 잠깐 러시아어를 생각하다 스페인어를 택했다. 그 당시 유럽 송 컨테스트에서 스페인 모세 다다스 그룹의 ‘Eres Tu'(그건 너)라는 곡이 우승하며 국내 방송에도 자주 알려졌고, 그 노래에 빠져 스페인어에 대한 관심이 때마침 크게 일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스페인어 학습도 내게는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서 살아가며 두고두고 잔잔한 기쁨이 되었다.

 

2. 평생지기가 된 학우들과의 만남

 

75학번 독일어과에는 여학생이 3명 포함된 전체 30여명의 학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여학생은 붙임성 있는 성격은 좋으나 미모가 좀 빠졌고, 두 번째와 세번째는 외모의 무던함에도 남학생들과 크게 어울리려 하지 않는 소극적 배타성으로 인해 셋 다 모두 내게서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미네르바 동산 내부 길>

 

나는 첫 한 주간을 차별적 존재감을 내보이려 명동에서 작은 양복점을 운영하던 사촌이모가 입학기념으로 해준 양복 정장에다(넥타이까지 맨 채) 모친이 바꿔준 당시 유행한 10만원짜리 금테안경을 쓰고 강의실에 들어갔는데 후일 막역한 후배가 된 현역 친구들이 저 꼰대아재 뭐야하고 저그끼리 쑤근거리며 많이 비웃었다 했다.

 

그러던 중에 까까머리를 겨우 벗어난 앳된 용모의 한 친구가 다가와서 경고 선배님이죠, 29회 신영줍니다하고 자기 소개를 했다. ‘, 요 친구 봐라하고 반갑게 인사하고 첫 말문을 트니 외계인처럼 나를 쳐다보던 다른 현역 친구들과도 서서히 오고가는 눈맞춤이 친숙해져 갔다.

 

나중에 신영주(경남고, KBS-TV PD 역임)와 방송계 삼총사가 된 현역출신 윤석훈(제물포고, KBS 라이오센터장 역임), 최창영(중앙고, MBC-TV 주미특파원 역임)은 그때 이후 나와는 죽고 못사는 학연 속에 지금까지 세월을 잘 보내왔다. 물론 자기들 셋은 동갑내기에다 기질도 서로 잘 맞아 거의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인천과 서울 출신인 윤과 초이는 나의 강력한 부산 억양과 저그가 처음 접하는 사투리적 표현, 그리고 (자기들 기준에서) 비교양적 무식체 말투를 학창시절을 비롯해 지금까지도 패러디 하는 재미로 세상 사는 힘을 얻는 친구들 같았다. 아예 인간 김모 오빠 어록까지 작성해 만날 때 마다 우려먹는 것이 오랜기간 서로 축적된 인간관계적 신뢰감과 애정의 또 다른 표현임을 저그도 알고 나도 안다.

 

둘째 주부터 27회 박상국이가 독일어과에 나타나 내 주위 쪽수 범위가 더 확대되었다. 이 친구는 그 앞 해에 내가 떨어진 독일어과에 27회 양태종이와 같이 붙었지만, 성에 안찼는지 휴학하고 어디선가 3수했었지만 뜻을 못 이루고 다시 돌아왔는데 남도 아닌 중고교 동창 김재민이가 옆에서 버텨주니 꽤 든든했던 모양이었다.

 

이제 딴 맘 먹지 않고 그 다음 해부터는 내 하숙방 룸 메이트가 되어 독일어와 기타 교양과목들의 학점 따기는 내게 크게 의지했다. 다른 한편, 거의 파산한 집안에서 모친과 네 여동생의 가장 역할을 과외팀 선생으로 엮어가면서, 영어학습에만 몰빵 매진하여 4년 후 삼성그룹 공채에 합격하는 전략가적 반전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1학년 초여름에 허세적인 프로젝트에 물정 모르는 나를 코꿰어 끌여들여 왕창 물멕이는 저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재수생 출신 학우들에는 한만열(경기고, 교수), 김형민(경기고, LG그룹 임원 역임), 이승진(서울고, 교수), 임승하(부산고, 외환은 지점장 역임)가 있었고, 삼수생에는 신효식(경복고, 기업임원 역임), 신정수(경동고, 삼성전자 임원 역임) 등이 있었다.

 

이들은 위에 언급한 신영주 삼인방과 함께 나와 꽤 깊숙한 관계를 맺으며 독일어과 75학번의 실질적 주류로 행세했다. 특히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김형민이는 외대신문 기자를 하며 놀이판에는 잘 안 어울렸지만, 클래식 음악과 문학 등에 깊은 내공을 가진 듯 보여 고학년 들어 저그 집에 한번씩 가서 음악 들으며 나와는 따로 문화적 인연을 맺었다.

 

항상 비쁜 체하는 허세쟁이 신정수를 제외하고, 놀며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나머지 친구들과는 마이티 카드게임, MT, 개강종강 파티, 외대모의 올림픽에서의 구기게임 출전 등을 통해 가진 여러 회식들을 거듭하면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결속력이 점점 더 강해졌다.

 

3. 외대 경남고 동창회의 끈끈함

 

나는 사실 외대시절에서 건진 가장 큰 학연 수확이 외대 경남고 동창회와의 그것이었다고 여긴다. 학교 캠퍼스가 자그마하고, 학부도 외국어 학부비외국어학부로만 나눠져 있으니 고교 동창회 구성원들 간 교정에서의 눈맞춤 기회가 훨씬 많았다. 3월 중순이 되자 교내 경남고 동창 모임 공고가 뜨며 첫 상견례를 가진 이래 크고 작은 여러 행사들을 통해 안 그래도 타 고교에 비해 높다고 소문난 경남고의 결집성이 더 탄탄해져 갔다.

 

기억나는대로 기수별 분류를 해보면, 27: 박상국(독어과), 양태종(독어과), 김재민(독어과), 김홍수(중국어과), 이희수(터어키어과), 김선영(영어과), 황수영(행정학과), 박경효(행정학과), 김상용(마인어과), 고 정석기(마인어과), 26: 신성인(일어과), 고 옥달혁(영어과), 서경호(불어과), 이학기(러어과), 박복수(러어과), 김경익(불어과), 박중호(행정학과), 이상도(마인어과), 25: 김일태(영어과)

 

외대 경남고 출신 물건들이 많았던 후배 그룹에서는, 29: 이범익(포어과), 신영주(독어과), 신창호(중국어과), 최명룡(스페인어과, 27회 최태룡 동생), 정란(터어키어과), 28: 이창근(행정학과), 한명재(행정학과), 노문호(무역학과), 정영주(베트남어과), 똥물 후배(미상), 30: 천인식(일어과), 이동x(법학과), 31: 안민수(포어과), xx(포어과, 안민수 컴비)

 

26회 위의 선배그룹은 기수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직도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대로 기록해 보자면, 23: 최성욱(독어과, 27회 최성하 형), 김도살(불어과), 김강x(불어과), 하성윤(러어과), 24: 김대원(일어과), 정영석(행정학과), 배석규(러어과), 20: 해병대 출신 노짱 형(영어과)  

 

웬만한 경고 동문들은 위에처럼 정리될만큼 4년 간 동창회 회장단이 해마다 주최한 쌍쌍파티, 타고교 동문회와 돈따먹기 야구시합(대 부산고, 경북고, 서울고, 경동고 등), 봄가을 야유회 등으로 하도 자주 간 학교 앞 홍콩반점등에서의 뒤풀이 술자리를 통해 서로 얼굴과 행동거지를 익히고 또 익혔다. 난 이런 모임에 항상 붙박이인 양 거의 한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고 여겨진다.

 

특히 한 기수 위인 26회 옥달혁, 박복수, 이학기, 서경호, 김경익 형들과는 개인적으로도 아주 친했다. 또 두해 아래인 29회 신영주, 이범익, 신창호, 최명룡, 정란 등과도 무슨 특수관계인 것처럼 친동기 이상으로 가까웠다.

 

4. 박상국과의 27회 페스티발 개최와 대실패

 

5월 말부터인가 박상국이가 어딘가로 열심히 나다니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듯 하더니 어느 날 나를 잡고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27회 동기들을 대상으로 어딘 가에 장소 한곳 잡아 27회 워커스 밴드 불러놓고 70여 매 정도의 티켓을 발매하여 야외 디너공연 사업 한판 벌리자는 것이었다.

 

노트에 계획 개요와 상세 액션 플랜들도 오랜 기간 숙고하여 다 짜놓았으니 나를 비롯한 친한 친구들에게서 준비진행자금+밴드초청비+장소대여비+디너 식비(70인분) 계약금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터이니 나도 이 유망한 사업에 투자하면 원금 플러스 쏠쏠한 이익금을 보장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사업의 타당성과 수익성 검증 같은 것은 나도 모르고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약간 불안했지만 마침 그 때 올라온 하숙비+생활비’ 8만원인가를 다 주었다. 사업가적 안목이 있었다 하더라도 돈에 항상 궁한 인간이 바로 옆에서 사업이랍시고 일을 벌리는데 난 모르네 하고 버틸 게제도 아니었다.

 

장소는 강성보가 근무하던 MBC 정동빌딩 옥상 라운지를 빌렸고, 밴드는 조윤건이와 성욱조가 낀 워커스 밴드를 섭외했으며, 디너 메뉴도 최소 주문수를 한 60인분으로 정해 계약금까지 지불했다. 티켓은 쌍쌍 방문을 예상하고 12매를 기본으로 발매했지만, 많은 경우 현장에서 지불하겠다는 구두 약속만 믿고 티켓을 발매했으며 그 티켓 수와 희망 섞인 추가 예상판매 수를 기준으로 음식까지 결과적으로 과대주문했다.

 

드디어 7월 첫주인가 둘째주 토요일 흐릿한 날씨의 저녁에 페스티벌은 막을 올렸다. 지붕이 없는 툭 터인 공간이 전체 공간에서 반 이상을 차지했기에 비가 올까봐 많이 조마조마 했다. 나는 그때 모처럼 미팅에서 건진 대만계 화교 여학생을 만나 이 친구와 함께 주최측의 일원으로서 이 파티에 참석했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고, 워커스 밴드의 음악들도 흥겨웠지만, 내 기억으로는 예상 참석자 수의 반 정도 밖에 안되는 30명 중반에 불과했다. 티켓비를 현장에서 지불하겠다던 친구들 상당수가 펑크를 낸데다, 취기어린 객기를 부리며 무임승차로 들어온 동기들도 꽤 있었다 했다. 참석한 친구들은 모처럼 분위기 좋게 잘 먹고 마시며 지내다 갔지만 주최측의 흥행손실은 상국이 말로는 거의 역대급이라 했다.

 

결국 내가 태운 돈은 돌려달라 하기가 민망할 정도라 그냥 날렸고, 급한 김에 모친이 베트남이 패망해 김일성이가 남침한다는 소문이 돌기에 여차하면 귀향길에 쓰라며 마련해준 한 돈짜리 금반지를 전당포에 맡겨 급전 생활비로 썼다. 최대한 내핍으로 버티다가 두 주가 넘어서야 모친에게 이 상황을 실토하고 하숙비와 생활비를 당겨 받을 수 있었다.

 

팍 야코 죽어 있는 상국이에게는 돈 들어오던 날 담배 한갑 사서 앵기며 내 돈과 나는 괜찮으니 니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지금도 75년 초여름을 생각하면 사업이랍시고 얼떨 결에 끼어 했다가 망해본 이 사건이 한번도 잊혀지지 않고 떠오를 정도이다.

 

<1 시절의 주요 추억들>

 

1. 밍밍했던 미팅들 끝에 건진 대만녀에의 짝사랑

 

입학 후 3월 말이던가 과대표가 숙명여대생들과의 미팅 건수를 외대 앞 필다방으로 물어왔다기에 첫미팅이라는 호기심 속에 나갔다. 여학생들이 주최측에 내어놓은 소지품을 잡으면 그 친구와 만나면 만남이 성사되는 식이었는데 내가 뭔가를 잡고 주인을 찾아 보니 영문학을 전공한다는 강릉출신의 여학생이었다.

 

기대하던 만큼의 미모는 아니었으나 발랑 까지지는 않은, 순수함이 묻어 있던 신입생이었다. 서로 이름과 전공, 고향, 장래 희망, 취미 등등을 교환하며 시간을 이어 갔지만 분위기는 그저 그랬다. 여학생도 내가 자기에게 까빡 가는 정도는 아니라고 여겼는지 그냥 체면치례적 대답만 하며 적당할 때 일어서려는 것 같았다.

 

이윽고 시간이 제법 되어 첫 번 만남은 끝나게 되었는데, 이때 보통 다음 번에 전화로 연락드리겠다고 애프터 신청을 하며 전화번호 교환을 하지만 보통 예의상 하는 행동이었다. 이번 만남이 어땠냐고 그 친구에게 물어 강원도 억양이 제법 세었던 친구가 재민씨의 경상도 억양과 낯설은 단어 구사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한 60% 밖에 못 알아들었다고 실토하는 게 아닌가.

 

, 내가 수도권이나 비경상도권 사람을 만나면 거의 외국어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나는 자기가 하는 말을 전혀 문제없이 다 알아 들었으니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려웠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에서 각 지역 사투리를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데 그런 방언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말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수도권 표준어만 사용하는 생활권에서만 살아왔기에 그런 지방색이 물씬 묻은 사투리는 잘 모른다면서 자신의 언어적 순정품 환경에 대한 자부심을 은근히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다른 한편 타 지방어에 아둔함은 글로벌 시대에 외국어나 외래어를 전혀 접해 보지 못했다는 지역 촌뜨기들처럼 세상을 좁게 산 우물안 개구리라는 방증일 수도 있는 것이기에 난 그런 친구가 가진 소통수단의 비개방적인 폐쇄성이 도리어 갑갑하게 여겨졌다.

 

첫 미팅의 실망이 제법 컸던지 그 다음에 있은 몇 번의 후속미팅에서도 매력을 보여주는 상대를 못만나게 되자 미팅이라는 이벤트에 대해 혹시나 했다가 역시라고 하는 공식이 내게서도 점점 고착화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성균관대에 다니는 27회 절친 이상조로부터 화교 여학생들과 미팅 한번 하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이국적 만남이 마음에 들었다. 부리나케 약속된 성대 앞 다방으로 나가니 상조가 데리고 온 두 명의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수더분한 인상에 몸매가 날씬한 친구가 무수영이었고, 가수 혜은이 타입의 자그마하고 귀여운 인상의 친구가 채염연(蔡念娟)이라 했다. 내가 채를 맘에 들어하는 것을 알아챈 상조가 채를 내 앞에 앉게 했다. 난 지금도 상조의 그때 순간상황 포착력과 순발력에 커다란 고마움과 함께 경의를 표하고 있다.

 

채는 자신의 이름을 중국식으로는 싸이 니에니에라 부른다면서 자신의 부모들은 산뚱성에서 왔으며, 자신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대만 국적을 갖고 있으며 한국학교와 화교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한국어 구사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내가 캥기는 데가 있어 내 부산 액센트가 강한 한국어가 이해되느냐고 물었더니 친구 중에 이쪽 출신 친구가 있어 거의 다 알아 듣겠다고 듣기 고마운 대답을 해주었다.

 

자신은 지금 중국음식점을 하는 부모님을 도와 카운터와 홀서빙 일도 하며 성대에서는 중문학을 전공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바짝 호기심이 당겨 이것저것 물어보다 세계사 실력을 살려 중국역사와 여러 유명인사들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끌어가려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나같으면 외국인이 한국역사나 문화에 대해 질문하면 바로 호감을 갖고 얘기를 끝없이 이끌고 갈 수 있었겠건만, 한국에서 더 오래 살아온 싸이에게는 이게 도리어 부담이었던 모양이었다. 중국사에 대해 좀 아는 척 하는 한국놈에게 자기가 도리어 자국역사에 대해 반대 심문을 당하는 상황으로 받아들였졌던 것이었다.

 

점점 대답이 짧아지고, 화제를 바꿨으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문디 가시나, 요럴 때 저그나라 공부 좀 해서 나같은 사람과 풍성한 대담 나누며 가까와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생각하니 참으로 아쉬웠다.

 

그날은 그 정도만 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전화번호는 저그 부모님 때문에 안된다기에 서로 우편주소만 교환한 채 헤어졌다. 이 친구가 머리에 든 중국사 지식은 약해도 외모상의 우월함과 약간 까칠한 성격은 지금까지 만나본 다른 어떤 미팅 파트너들과도 비교가 안되는 킹카성 매력을 발산했다.

 

난 그날부터 싸이앓이를 시작했다. 황진이를 사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은 옆집 총각놈처럼 계속 이 가스나 얼굴만 벽이고, 천장이고 눈만 감으면 나타나 비춰지는 게 아닌가. 태어나서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독일 극작가 B. 브레히트가 뇌까린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더 큰 사랑의 고통을 겪는다는 말처럼 그때 내가 딱 그 짝이었다.

 

급기야 내 전공과목 수업이 없는 날을 골라 성대로 무작정 달려갔다. 아침 10시경부터 중문과가 있다는 문과대 건물 앞에서 싸이가 나타날 때까지 무작정 뻗대기를 하며 특종 노리는 기자들처럼 지키고 있었다. 그런 내가 마치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베르의 슬픔에 나오는 무대뽀적 로맨티시즘의 주인공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4시간 여를 초여름 더위 속에 꼼짝않고 기다렸던가 싶었는데 드디어 저 앞에서 싸이가 무수영 등과 일행 속에 싸여 건물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실화로 내가 싸이!’ 하고 손짓하며 뛰어나가 이 친구 앞에서 멈췄다. 먼저 안면있는 무수영이 나를 발견하고 싸이에게 알리니 그제서야 상황을 알아채고 내게로 다가왔다.

 

좀 많이 놀란 중에도 평정심을 찾아 미소를 띄며 재민씨, 안녕하셨어요? 여기는 갑자기 웬일로?’ 하며 사람 애간장을 녹이는 게 아닌가. 니 보고 싶어서 왔다며 저기 다방 가서 차 한잔 나누며 얘기나 좀 하자했더니 이제 막 무수영, 다른 친구들과 식사하러 가는 중이니 지금은 안된다고 하고, 식사 후 또 수업이 있어 오늘은 아무래도 따로 얘기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대신 편지 주시면 바로 답신 보내겠다고 하며 나를 스무드하게 돌려보내려고 부드럽게 구슬리는 것이었다. ‘, 사랑을 얻으려면 이 정도 난관과 기다림은 겪어야제하며 얼굴 본 것으로 만족하고 남자답게 선선히 아듀하고 돌아섰다. 돌아오자마자 긴 편지를 써서 보냈다.

 

약속했던 답신이 빨리 안와 두 번, 세 번이나 추가 답신재촉 서신을 보냈다. 마침내 기다리던 답신이 왔다. 서울시를 한성시로 표기한 답신에서 외국인의 한글 글씨체치고는 상당히 정갈해 보였지만, 내용은 전형적인 형식적 안부 글 이외에 기대했던 나에 대한 본심을 담은 문귀들은 읽고 또 읽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억지춘향격으로 보채다시피 한번 더 약속을 잡아 불러내어 명동에서 저녁도 하고 피카디리 극장에서 인도영화 신상도 보곤 했지만 싸이가 크게 마음을 내어놓지 않는 안타까운 만남 뿐이었다. 마지막 만남이 될 것임을 암시하며 박상국 페스티벌이 열리는 정동모임에 초청하여 나로서는 서글픈 이별 파티를 행했다.

 

이 날 상국이에게도 처음이자 마지막인 싸이 소개를 했고, 상국이는 지 첫 애인 물소양을 옆에 두고는 김재미이, 웬 일로 이번에 킹카 건졌네하는 식으로 남 속도 모르고는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메리카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오랫동안 연모했지만 자기 여인이 되어주지 않으려 하는 첫사랑을 최종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값비싼 레스토랑을 단독 전세내어 전속밴드의 연주음악 속에 허망한 왈츠를 추며 애모의 정을 절망적으로 전달하는 장면처럼, 조윤건 악단의 블루스 연주타임에 싸이를 안고 마지막 작별의 블루스 스탭을 밟았다.

 

페스티벌 흥행도 개떡이었고, 첫 짝사랑 싸이 니에니에도 떠나면서 대학 들어와서 처음 다가왔던 첫사랑 격도 잠깐 사람만 달뜨게 한 뒤 현실의 쓰라림을 맛보여주며 순식 간에 휙 사라져 버렸다.

 

2. 독어과 학우들과 마이티 카드게임을 통한 우정 다지기

 

그 당시 대학가에는 마이티란 게임이 학생들 사이에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서울 출신 아그들은 고교시절부터 많이 해봤는지 윤, 초이, , 리 등은 게임 할 줄 아는 다른 학년 친구들을 끼워 넣어 독어과 사무실 옆에 있는 세미나실이란 공간에서 모여 틈만 나면 5인 마이티 판을 펼쳤다. 특히 윤과 초이가 잘하는 것 같았다. 상국이도 1년 먼저 다녀봤다고 이 게임을 아는 지 가끔씩 끼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미나실 공간 사용의 제약이 자주 있어 이 꾼들은 언제부터인가 교련시간에 교련복 갈아입으려 학교 앞 내 하숙방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슬슬 이 방을 마이티 게임의 주 장소로 삼으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신영주와 내게 기루다란 개념부터 알려주며 게임 방식을 가르쳐 마이티 게임 2군 멤버들을 양성하려 했다.


 <마이티 카드게임에서 프렌드 하거나 방어하기 좋은 패>


마이티 게임은 가장 할만한 패를 가졌다 여기는 친구들이 자기가 방어할 수 있는 최고 점수를 경매장에서처럼 불러 당선되면 선이 되고 자기 패의 취약한 부분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아군인 프렌드를 마이티 카드 소유자, 또는 스페이드 K!’ 등으로 불러 호명하면 둘이서 나머지 셋을 적으로 돌려 2:3의 게임을 펼치는 것이다 (패가 아주 좋아 완벽패라 여겨지면 프렌드도 없이 1:4의 게임을 펼쳐 고액의 승리수당을 독식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이 정한 기루다(스페이드, 다이어몬드, 하트, 클로버 무늬 중 하나를 호명해서 삼는데 이 기루다를 이기는 것은 마이티와 조커 카드 밖에 없음)가 시중에 어떻게 분포되어 있으며, 게임이 진행되며 남아있는 기루다가 몇 장이며, 현재 가장 높은 계급의 카드가 무엇인지를 라운드가 지나면서 계속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당에서 혹시 숨겨놓았을 가장 높은 계급의 기루다를 프렌드의 힘을 빌어 끄집어 내는데 성공해 한패도 내어주지 않고 성공하면 호움런이라 불리며 2배의 승리배당을 선은 야당 2사람으로부터, 프렌드는 1사람에게 받아내는 게임이다. 이길 때의 이런 희열은 고스톱에서 따따블 고를 외쳐 이기는 기분 이상이었다.

 

간혹 선이 되어 이길 가능성이 낮은 패인데도 게임의 주도권을 잡는 맛에 프렌드의 사이드 패를 과도하게 기대하며 리스크가 높게 선공을 하는 수도 있는데 예상과 틀릴 때는 야당으로부터 역공을 당해 역홈런이라도 맞으면 죄없는 프렌드도 크게 털리게 하는 좀 무책임한 플레이를 하는 친구들이 있디. 박상국이가 이런 류 플레이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정도로 이 스타일의 게임을 아주 즐겼다. 

 

많은 경우 안전패보다는 한 두패 프렌드의 보조를 기대하고 선을 잡아 내주겠다는 점수 안에서 예상대로 아슬아슬하게 이길 경우의 도파민 분출을 기대하며 서울 아그들은 게임을 하는 반면, 우리의 상국이는 거의 똥패를 가지고도 내만 물묵나!’ 하며 무대뽀 선하기를 하도 좋아하니 프렌드가 될 확률이 많은 친구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오히려 자신이 선하겠다고 방어 카트라인 점수를 내려 야당으로서는 방어하기 유리한 게임이 되기 일쑤였다.

 

아무튼 우리는 이 마이티 게임을 이때부터 4년 내내 나와 경희대 근처에 있는 신영주의 하숙방을 돌아가며, 없는  틈을 만들어서라도 펼치면서 멤버들 간의 인성 파악과 가족사 얘기도 나누며 게임꾼들 특유의 유대감을 쌓았다. 게임 중에는 나이 계급장도 다 떼고 서로 간에 오고가는 적나라한 야지나 재담어린 멘트들을 듣는 맛도 이 게임에 빠지게 하는 별미였다.

특히 윤은 인천 인간들 특유의 다양하고도 거친 욕 용어 구사로 욕바리라는 별명을 하사받을 정도로 우리 마이티계의 1등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75년에 발생한 국내외 주요 사건>

 

1. 절정으로 치닫는 박통의 철권통치

 

‘7210월 초법적인 발상 속에 밀어부친 유신헌법에서 규정한 긴급조치권은 대통령의 권한으로 헌법으로 보장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유예시킬 수 있는특별 조치를 뜻했다.

 

박통은 이것을 전가의 보도마냥 74년부터 자신의 독재권력에 조금만 위협적인 시위나 소요사태가 날 기미가 보이면 예방 차원에서 이 권한을 남용하다시피 긴급조치라는 이름으로 총 9차례나 발동했다.



<긴급조치 9호 발동 기사>

 

‘754/8일에는 긴급조치 7를 발동하여 유신반대운동이 강렬했던 고려대에 군대를 진주시켜 휴교를 명하며, 집회와 시위를 엄금하는 폭거를 행한 이래 5/13일에는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비방하거나 개정을 청원하는 행위 등까지도 엄벌한다는 말도 안되는 9호를 발동했다.



<대학가의 유신독재 철폐시위>

 

9호는 ’7910.26 사태로 본인이 암살될 때까지 45개월 간이나 맹위를 떨치며 이 나라를 비판적 이성이 마비된 겨울 공화국으로 몰아갔다.

 

난 당시 대학가에서 노도처럼 치솟던 유신헌법 철폐운동에 대해 취지는 이해해도 삼수하여 대학을 이제사 갓 들어온 입장이라 앞장서서 나갈 처지는 아님을 잘 알았기에 직접참여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야권의 비상사태 철회요구 시위>

 

아마도 유럽의 진보적인 사회사상사 등을 제대로 학습할 기회가 없어 이상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는 식으로 공권력에 과격하게 대항해서는 안되며 어디까지나 점진적인 민주주의 노선이 가장 이상적인 정치노선일거라는 생각을 머리에 장착해 놓고 있었다.

 

그 결과 박통의 독재적 철권통치에 대한 분노와 저항성을 내면적으로는 상당부분 포기한 채 한국과 같은 개도국적 상황에서는 개발 독재가 어느 기간까지는 용인되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자기변명적이고 불의에 나약한 인텔리겐차의 전형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2. 사이공 함락과 베트남 통일


’72년 북베트남군과 베트공의 구정 대공세 이후 미국과 북베트남은 파리에서 협상을 벌여 ‘731월 키신저 국무장관과 레둑토 외상은 파리평화 협정에 서명하고 미군은 남베트남을 단계적으로 철군했다. 파병된 한국군도 이 시기에 같이 철군했다.



<키신저와 레둑토의 파리평화 협정 체결(1973. 1)>

 

평화협정 체결 후에도 하노이 정권은 사이공 함락을 위한 최후 공세 준비에 들어갔다. 본격적인 공격은 ‘751월부터 시작되어 중부 베트남이 유린되면서 3월 말까지는 중부의 요충지 다낭이 함락되었다. 베트남군은 붕괴를 거듭하며 한달만에 사이공 근교까지 바로 밀렸다.

 

사태가 돌이킬 수 없음을 직감한 대통령 티우는 4/21일 사임하고 트란반후옹 장군이 후계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티우와 부통령 키는 며칠 후 각각 영국과 미국으로 망명했다. 4/28일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코 앞까지 진군하자 트란 임시 대통령은 예비역 대장인 두옹반민에게 대통령직을 다시 위임했다.


<월맹군 탱크의 사이공 대통령궁 돌파(1975. 4)>

 

4/3010시 북베트남군이 마침내 3개 방면에서 사이공으로 쳐들어오자 1030분 바로 항복하고 TV 방송으로 전투종료를 선언했다. 11시 북베트남군의 소련제 T-54전차 한대가 대통령궁을 돌진하여 들어와 두옹반민을 체포하며 30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은 대단원을 맺었다.



<사이공 시민의 점령군 환영>

 

이 무렵 베트남 패망에의 과정이 연속으로 전해지고, 적화통일의 호기가 재도래 했다는 듯 김일성이 중국을 왔다갔다 하자 한국은 한 때 새로운 전쟁 공포에 빠지는 분위기였다. 우리 모친이 뭐야 하거든 피난 길에 비상용으로 써라고 한 돈짜리 금반지를 하나 만들어 보낼 정도였다.



   <표류하는 베트남 보트 피플> 

 

하지만 박정권은 이러한 위기 분위기를 고조시켜 유신독재의 저항세력들을 탄압하는데 더 잘 써먹었다. 사이공 함락 한 두달 전까지 사이공 시민들의 국가방위와 민생 챙기기에 무능한 정권에 대한 분노와 이를 활용하려 한 베트콩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티우정권 퇴진 데모 등을 적전분열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연일 보도했다.

 

아무튼 나는 이 사태를 지켜보며 아무리 민심을 잃었다 하더라도 미군이 남기고 간 50억불 상당의 군사장비를 갖고서도 남베트남 정부와 정부군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맥없이 무너지는 내부모순과 허약성에 대해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베트남의 일부 보트 피플들이 서대신동에 있는 구 부산여고 건물에까지 몰려와 수용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 박통정권이 아무리 밉더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데모 좀 중단하고 개발독재체제도 어느 기간까지는 허용하는 수 밖에 없겠다하고 내 생각을 한번 더 정리했다.

 

<가을 스산함에 홀로 고독에 빠지기>

 

10월이 되자 가을바람을 타는 듯 독어과 아그들과 마이티 게임에 자주 끼어들어 시간을 보내면서도 뭔가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이 자주 찾아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좋은 가을에 그럴 듯한 여자친구도 없이 또 한 계절을 보내나 싶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외대 쌍쌍파티에 데려갈 여학생 파트너를 별로 말도 섞지 않았던 우리 과 여학생 하나가 지난번 모의 올림픽 때 내가 독어과 명캐처로 맹활약한 데 대해 인상이 깊었다면서, 혹시 초대 파트너가 없다면 자기가 친구 한명 소개해 주겠다는 기특한 제안을 해왔다.

 

덕분에 당일 필다방에 나온 단국대 가정과에 다닌다는 친구를 만나 쌍쌍파티 교정속으로 데리고 다녔다. 외모는 싸이보다 좀 못했지만 그런대로 애련미가 있었고 성격도 싸이처럼 튕기는 것 없이 하자는대로 다해줄 듯이 다정다감하면서도 다소곳 했다. 옳다구나, 꿩 아니면 닭이라고 이번 가을은 이 친구와 연을 맺어 보내면 딱이겠구나 하고 혼자서 김치국물부터 들이켰다.

 

이 친구도 전화번호 교환 보다는 편지연락이나 하자며 먼저 편지 보내주면 답신 바로 드리겠다며 자기 과 주소를 알려줬다. 답신 받기를 자신하며 첫 편지를 띄웠건만 함흥차사였다. 뭔가 안되는 것 같다는 예감을 느끼면서 단국대 직접방문행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지난번 싸이 때와는 달리 학교 올라가는 중에 일행들과 내려오는 이 친구를 발견했다.

 

일수쟁이 아줌마에게 걸린 듯 화들짝 놀래는 친구가 좀 반갑고 귀엽기도 하고, 약속 잊기를 무슨 여자의 특권인 양 행사하는 게 약간 실망스러운 감정이 교차했다.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바로 연락 드리겠다는 확약을 반복했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연락이 오지 않는 ‘머피의 법칙이 여기서도 그대로 작동되었다.


<어린이 대공원의 늦가을 정취>

 

이번 가을은 어차피 홀로 보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팍 일었다. 그 앞 해에 금정산과 욕지도에 가듯 이번에도 혼자만의 버스 여행을 시작했다. 어느 시월 중순의 오후, 수업들을 다 제낀 채 이문동에서 버스타고 수도여사대(세종대) 앞 어린이 대공원에 내려 혼자 입장해 한나절을 동물들 구경하며 더 넓은 경내 부지를 이런저런 생각하며 한참 쏘다니다 돌아왔다.


<춘천 가는 길>

 

그 다음 주는 또 지난 해 가을처럼 마장동에서 시외버스 타고 춘천으로 갔다. 가는 길 굽이굽이 중에 펼쳐진 강원도의 멋진 단풍을 감상했고, 춘천에 내려서는 이디오피아 용사탑이 있는 춘천 호반을 한바퀴 걸어 둘러본 뒤 돌아왔다.

 

혼자서 아무런 계획없이 그냥 솟구치는 감이 떠오르면 그냥 몽유병 환자처럼 발길 내키는대로 한나절씩 하는 단거리 여행을 이 무렵 자주 했다. 이 과정에서 차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과 내면 상념의 숲을 서로 매치시키며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보내는 시간은 맘 속의 묵은 때들을 털어내는 데 언제나 그럴 듯 했다.

 

<첫경험과 저물어 가는 75>

 

드디어 ‘75년을 보내는 2학기 기말고사 시즌이 다가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부산고 출신의 룸메이트는 시험을 다 치룬 듯 먼저 내려갔기에 내 방에서 혼자 속닥하게 책 좀 보자고 돌아와 책상에 앉아 있었다. 밤이 제법 교교해지는 중에 옆 창문으로 누가 무슨 쪽지를 하나 톡 던져 넣는 것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올 한해 나와 이 집 아래 독방에서 3월부터 같이 생활해온 K대 무용 전공 여학생이었다. 서부경남 출신의 이 친구는 시쳇말로 내 스타일이 좀 아니어서 그동안 그리 큰 관심은 두지 않았다. 그래도 시험기에 한번씩 자기 공부 좀 도와달라 하면 저그 방에 가서 시험준비 텍스트들 내용을 요약해 주거나, 텍스트에 나오는 한자를 읽을 수가 없다기에 한글 토를 달아주며 같이 읽어주는 기사도 정도는 보여주었다.

 

이런 고마움이 쌓였던지, 자기에게 1년 간이나 한 집에 지내며 무심했던 나를 한번 어찌 해보려 했는지 교교한 달빛 분위기를 틈 타 내게 도발적 메시지 글을 일지매처럼 종이에 적어 날린 것이었다. 내용인즉슨, ‘재민씨, 여자를 아직 모르신다면 제 방으로 좀 와주세요라고 두 줄로 적혀 있었다. 이건 뭐 은유고 나발이고 없이 화끈한 원초적 직설화법으로 됐고?’ 였다.

 

일순간 나는 움찔했지만 자초지종을 알아본다는 알리바이를 세우며 지남철에 끌리는 자석처럼 이 친구 방으로 갔다. 불을 끈 채 이불로 몸과 얼굴을 덮고 있기에 예의상 이게 뭐요? X..’ 했지만 이제는 나도 모른다는 식으로 묵묵부답이었다. 쪼다가 되기 싫어서라도 이불 안에 아니 들어갈 수가 없었다.

 

뭐 이렇게 해서 난 오랜 기간 고대해 오던 첫경험을 어느 처녀의 육체공양적 도움으로 비교적 품위있게 치루게 되었다. 그 때 그 방 라디오에서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던 더 그레이티스트 무하마드 알리라는 빌보드 차트에도 오른 곡 음률이 40년이 넘은 지금도 귀에서 맴도는 듯 떠오른다.

 

내게는 기념비적인 세레모니를 치루게 해준 그 친구와 같은 이불 덮고 잠깐 얘기를 나눴다. 이 친구가 길이 기억에 남을 재민씨, 이제 제 마지막 남자가 되어주세요하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세리프를 날리는 게 아닌가.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보니 또 앞 해에 본 영화 별들의 고향에서 여주인공 오경아가 화가 아재 신성일에게 읊어대던 바로 그 대사였다.

 

하지만 난 그때 신파조라는 식으로 결코 킥킥거리지 않았다. 그 해 여름에는 성대에서, 가을에는 단대에서 날 물먹인 친구들에 비해 이 얼마나 고마운 여인인가 하고 생각하니 그냥 대견해서 꼭 껴안아 주었다. ‘그래,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리 해 줄거시..’ 하고 답례하면서 말이다. 역사가 이루어진 때는 1975125일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내 방으로 아침상을 들고 오면서 하숙집 주인 배여사는 얼레리꼴레리 하는 식으로 터지는 웃음을 꾹 참으며 나는 어제 니가 치룬 역사적 과업을 싸그리 다 알고 있다라는 미소로써 자신이 가장 챙기는 수석 하숙인의 첫 성인식 올린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듯 했다.

 

그 친구 덕분에 그해 12월은 잠깐 따사하게 보내었다. 영화도 같이 보러 다니고, 문화예술회관에선가 열리는 자기과 연말 학교 무용 작품 발표회에도 초대받아 이 친구가 출연하는 것도 보며 그리 보냈다.

 

하지만 서로 길게 갈 인연은 아니었든지 12월 중순에 저그 집에 내려간 뒤 나도 없는 방학 중에 하숙집 찾아와  한 해 휴학한다며 짐 챙겨 나간 이후로는 이 하숙집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해 여름방학 때 부산집에 있는 내게 전화가 한번 오기는 했다. 내가 보고 싶으니 XX 꼭 한번 들렸다 가라는 전언이었다.

 

난 웬지 그 쯤에서 그 관계는 괜찮은 추억으로 남기고 끝내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건이 되면 가겠다는 말은 했지만 더 이상 찾아가지는 않았다.

 

아무튼 이 친구가 마지막을 장식해준 ‘75년은 대학진입의 달콤함, 첫사랑의 쓰라림, 친구와의 사업실패, 우리시대의 암울함, 베트남 패망, 과 친구들과의 카드게임 우정 다지기, 그리고 명상적인 홀로 여행 다니기 등으로 꽤 추억거리가 풍성했던 한 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