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지막 고교생활을 보낸 고3 시절
<1972년의 고3 시절>
다사다난했던 1971년을 보내고 드디어 고3생이 되는 ‘72년을 맞았다. 3학년으로 올라가는 3월이 되기 전 1~2월은 2학년 시절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기간이라 서로 1년 간을 잘 보냈다는 이심전심들 속에 좀 더 친했던 친구들과는 돈독한 우애나눔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같은 반으로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리라 예상되니 이제 다가올 고3 전투를 맞이해 서로의 학운을 빌어주는 애잔함까지도 풍겼다. 2월부터는 여러 과목마다 ‘책걸이 파티’라는 종강기념 가요무대가, 반장 부반장이 사가져온 과자와 음료수 먹어가며, 교탁 앞에서 펼쳐졌는데 우리반에서는 이 시간 진행 사회를 김세곤군이 주로 맡은 것으로 기억된다.
항상 입담좋게 진행을 하던 이 키 큰 친구가 한번은 뉴페이스 싱어가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앞쪽을 두리번거리자 주위 친구들 사이에서 ‘김재미이 함 시켜봐라’ 하는 소리가 들리자 나를 바로 교단 무대로 불러내는 것이 아닌가. 멈칫하다 나갔는데 한번도 사람들 앞에서는 불러보지 않았던 CCR 그룹의 ‘Who'll Stop the Rain?'을 과감하게 선곡하고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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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R-Who'll Stop the Rain?>
중간에 가사가 까먹혀지면 바로 멈추고 내려오려 했지만, 첫 음 키 잘 잡고 한두 소절 그럴 듯 하게 나가자 뒷좌석에서부터 책상 두드리는 추임새와 간주 및 후렴 떼창이 쇄도하며 삽시간에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커다란 박수 속에 원곡을 얼추 소화해 내자 그 뒤로는 내 별명이 ‘후일 스탑’으로 불릴 정도였다. ‘요런 환호 맛에 딴따라 하는구나’ 싶었다.
드디어 3월이 되어 학교 최고학년이 되면서 새로 배정된 반에 가보니 3-6반으로 국어 담당 길창순 선생이 담임이었다. ‘와따, 담임 복은 그리 나쁘지 않네’ 하고 흐뭇해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낯익은 학우들도 꽤 보일 뿐 아니라 모르는 얼굴들도 다 인상들이 좋아 보였다. ‘이제 이 친구들과 같은 반의 한 배를 타고 대입 준비여정을 함께 헤쳐가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위의 학년은 사라지고 아래 학년이 둘이나 생기면서 학교 통학 길에서 마주치는 28회와 29회 후배들이 듬직하면서도 깍듯한 자세로 ‘반갑습니다!’ 하며 올리는 거수경례를 받아주며 다니는 맛도 최고학년으로써 꽤 삼삼했다. 마치 사관학교 4년차 생도들이 요런 기분이겠구나 하고 연상될 정도였다.
<덕형관 3층의 교무실과 붙은 3-6반 교실>
하지만 난 중학과 고교시절 내내 자유분망하고 열려있어야 할 우리나라 하이틴의 학창생활이 과도한 위계서열을 강조하는 일본군대식 학교문화의 잔재 속에서 선배 앞에서는 무조건 까빡 죽고 후배에게는 조직보스처럼 군림하는 패턴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좀처럼 이해 안될 때가 많았다. 왜 학교문화라는 게 꼭 이래야만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많이 들었다.
시니어에 대한 적당한 선배대접은 동서를 넘어선 사람사회의 미덕일 수도 있지만 한국사회의 지나친 듯한 선후배 상하관계 문화는 이런 중고교 시절의 위계서열적 강조에서부터 싹트는 듯 싶다. 결국 우리가 수평적이기 보다 수직적인 관계에 더 익숙하게 길들여져 다양한 개인성의 존중보다는 조직이나 국가의 이름으로 강요하는 지배층 가치를 훨씬 더 맹신하게 되어 기업형이나 국가주의적 인간들을 양산하는 배양풍토 촉진에 알게 모르게 기여하게 된다고 여긴다.
그래서 나는 이 시절 나만이라도 학교가 군대사회처럼 부여한 최고학년이라는 권위로 하급생들을 똘만이 취급하지 말고, 어떤 경우에도 대등한 머리를 가진 인간으로써 열린 마음으로 후배들을 대하리라 마음 먹었다. 대신 대학에 들어가서는 고교 선배라 하여 무조건 딸랑이 후배임을 자처하며 밥값 술값 등을 당연히 떠넘기지 않고, 내가 낼 형편이 될 때는 먼저 내며 ‘내가 당신 밑밥은 아니요’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처신을 하려 항상 애썼다.
3학년이 되자 1, 2학년 때 수업 들어와서 애취급하며 좀 방약무인하게 우리를 대하던 선생들도 이제는 준성인임을 자각하듯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대하는 태도가 당연하면서도 약간 신기하기도 했다. 콧수염 김용권 선생이나 독일어 이종희 선생 등이 특히 그랬다. 사실 이 무렵에는 투표권이 있는 주민등록증 소지자도 나타날 정도로 학우들의 숙성스러움과 정신적 도약 발전상이 눈에 크게 띄었다. 이런 무리들로 성장함에 따라 반 분위기가 이미 벌써 대학교 수업이 펼쳐지는 듯한 분위기였다.
<덕형관의 내부 모습>
수업 내용들은 1, 2학년 때까지 다 배웠던 내용들을 S대의 예년 출제문제 유형에 맞추어 심화학습 하는 것이 대종을 이루었다. 그런데 수학, 물리, 독일어 같은 과목들에서는 부산 뿐만 아니라 경남권 타고교들의 모의고사 등에서 중요한 참고 문제들로 다루어진다 해서 해당과목 교사들이 자기가 가르친 수준보다 난이도를 더 높게 해 출제하는 경향이 짙어 중위권 이하 학우들의 학습의욕을 떨어지게 했다.
웬간히 공부해서는 쪼끔한 놈이나 전혀 안한 놈이나 문제가 어려워 시험 망치기는 매일반이니 공부하는 게 더 허망할 정도였다. 독일어 시험 같은 게 대표적이라서 독일어를 ‘毒語’라 표현하며 학습을 포기하는 학우들이 무슨 유행처럼 시간이 갈수록 속출했다. 우리 학년부터 한 반도 없게 되어 불어 배우는 공식학습자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대곤이라는 친구는 ‘여호와의 증인’처럼 독어수업 따라가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불어공부를 독학으로라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어렵게 가르치고 문제출제하는 독어 수업에 대한 단독항의의 표시였지만 그 당시 많은 학우들은 뭔가 선생을 믿고 따라가는 반의 학습 분위기를 해치는 돌출적 행위로써 여기고 시선이 곱지 않았다. 성적상위권 학우라면 또 모르겠는데 그렇지도 않은 친구가 그러는게 영 마뜩치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성대곤이의 이런 행위가 내심 맘에 들었다.
돌출성 보다는 스스로가 생각한 바를 의혹의 시선들 속에서도 개의치 않고 공식적으로 표출하려는 개인적 용기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독일어 시험 중에 불문학을 전공한 담임 길창순 선생이 자신이 출제한 불어시험 문제지를 독어시험장에는 나온 성대곤이에게 얼른 전해주고, 못마땅한 표정의 이종희 선생에게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게 나가던 일도 있었다.
나는 이 장면에서도 후일 길선생의 행위를 좀 더 이해하려는 쪽으로 해석했다. 독어시험장에서 독어시험을 거부하려는 친구에게 자신이 출제한 불어시험지를 단독으로 전해 주는 행위가 어떤 면에서는 동료교사에 대한 큰 결례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한 명의 개인이 담임선생인 자신과의 개인적인 면담을 통해 독어 대신 불어시험을 치겠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보였다면, 이 학생을 위한 최선의 배려책으로서 이종희 선생에게는 학생들 앞에서 많이 미안했겠지만 사전 양해를 구하고 행한 행동이었으리라 충분히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기억나는 이 시절의 은사와 학우들>
고3 시절에 내게 가장 떠오르던 은사는 뭐니뭐니 해도 방금 언급한 길창순 담임선생이었다. 세련된 수도권 말씨로 먹물스러운 안경까지 쓰고서 우리 현대문학과 프랑스 문학 전공자답게 불문학 작품들이 주가 된 세계문학사의 여러 배경지식들을 내공 풍부하게 소개해 주었다.
특히 인격적이고 인간적인 품성에서는 이 양반이 대입수험반 고교담임 하기에는 좀 결격일 정도로 체제추종성과는 거리가 먼, 고결성과 함께 사람을 대하는 다정다감함이 차고 넘치는 듯 했다. 학교의 앞뒤 가리지 않는 ‘S대 몰아넣기’ 시스템 속에서도 은연 중 그런 풍토를 회의적으로 여기며, 학생들에게 먼저 나서서 밀어넣는 것을 들어본 적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고2 시절에 만난 이원균 선생, 장여태 선생과 함께 내가 최고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3인 은사님 중 한 분이었다.
떠오르는 같은 반 학우로는 지금 LA 불교계의 거목 학자로써 여전히 연구와 집필을 활발히 하고 있는 이원익, 다정다감함과 꿋꿋한 심성을 동시에 갖춘 시애틀의 진보문화인 김의철, 본인에게 머리털 약 처방도 잘해주는 의료원 원장이자 희생정신 투철한 현 재경동기회 회장 김우진, 사회적 약자에게 남 모르게 손뻗치면서도 문화예술 풍류정신이 충만한 부산의료계의 거인 문두찬, 오랜 교육계 근무 후 우리 동기홈피지기로 마지막 봉사하는 백민호, 학창시절 축구 잘했고 반장한 뒤 한국원자력공학계의 거봉이 된 유봉, 감정선이 섬세하면서도 친구들에게는 한없이 호탕했던 故정현우 등이 가장 먼저 회상된다.
희미해져 가는 내 머리 속 기억회로를 우리 홈피지기 백민호가 올려준 3-6반 앨범 사진 보며 한번 더 스파크 시켜보니 다음 친구들이 또 떠오른다.
예비고사날 하필 맹장수술을 하게 되어 한 해 꿀렸지만 꿋꿋하게 학업에 증진하여 부산대 조선공학과 교수를 현재까지 역임하고 있는 권순홍, ‘변사또’ 선생 아들로써 기억되지만 군대사고로써 동기 중 가장 먼저 세상을 뜬 故변종철, 우스개 소리 잘하며 허세작렬했지만 인간미 따사했던 故배재홍, 전 부산동기회 회장을 역임한 故이판세, 건축설계 파트에서 여전히 현역으로 활약하는 인간미 만땅의 한상훈, 금융계의 거목으로 부산동기회 회장도 역임한 이종찬, 부산권에서 알아주는 치과의로 여전히 활약하는 과묵함의 원조 장인철 등의 친구들과도 같은 반에서 고교 마지막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이 참 반가왔다.
다음의 친구들은 이 글 봐주는 우리 동기들에게 내 개인적인 궁금증으로 최근의 좀 더 상세한 근황 소개를 부탁하려 언급한다. 내가 빛바랜 홈피 속 앨범사진에서 잘 안보이는 한자 이름들을 학창시절 인상 착의 속에 간신히 회상해 놓은 우리반 친구들이다. 물론 일부는 내가 다른 편에서 띄엄띄엄 소개했기에 중복소개를 생략한 친구들도 꽤 있다.
김광호(화학박사), 김종성(전 LG전자), 최휴진(영화-친구 1에서 형사역 출연), 이영환(법무사), 이정래(미상), 장기재(동아일보 해직기자), 김성주(사이클 체육인), 김양화(교수), 탁승주(2000년대 초반 옛날 홈피에서 누구와 러브 스토리 연적으로 회자되었지만 그당시 암투병 하는 것으로 알려졌음), 최해룡(미국에서 타계한 것으로 기억), 김학희(중고교 때 학생시인으로 날렸는데 졸업 후 뭐했으며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함), 오봉인(미상), 윤대수(미상), 전경진(미상), 유무근(10여년 전 타계한 것으로 기억), 정중진(목사), 정수화(의사), 황주현(나와 현대중공업에 오래 다니다 거의 같은 시기 함께 명퇴했는데 같은 반이었음을 이번에 알았음)
<72년에 발생한 국내외 주요 사건>
1. 닉슨의 중국 방문 데탕트
‘72년 2월 7년 여의 베트남전 경험을 통해 아시아에서의 과도한 군사적 개입을 축소하려 했던 닉슨행정부는 중국과의 관계개선(데탕트)으로 이를 실현하려 했다. 그리하여 그전 해인 ’71년 여름 국방장관 헨리 키신저가 중국을 비밀방문해 중국측의 의사타진을 한 뒤 양국 탁구선수단과의 ‘핑퐁외교’를 성사시켜 이를 매개로 사전 분위기를 닦았다.
<닉슨과 저우언라이의 건배>
중국 역시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고, 세계외교무대에서의 오랜 고립에서 탈피하려던 차에 미국이 먼저 접근해온 데탕트 정책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 72년 2월 전후 중국을 최초 방문한 닉슨 대통령은 내각총리 저우언라이(주은래)와 국가주석 마오쩌퉁(모택동)을 차례로 만난 뒤 2/21일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마오와 닉슨의 만남>
나는 이 세기의 미중 데탕트 접근을 당시 국내언론을 통해 접했을 때 유태계 단신에다 검은 뿔테안경 쓴 키신저란 아재가 참으로 대단하다 느꼈다. 닉슨보다 세계언론의 하이라이트를 훨씬 더 받은 이 양반은 ‘국제외교가 이런 것이다’란 것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 분위기는 같은 해 7월에 발표된 한반도의 ‘남북공동성명’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2. 남북한 ‘7.4 공동선언’ 발표
‘70년부터 미소 슈퍼파워 체제에서 다극화 체제로의 기운이 무르익어면서 미중 데탕트 회담의 영향으로 한반도에도 한국전쟁 이후 적대적 무력통일에서 상호공존을 모색하는 남북한 ’7.4 공동선언문‘이 양자 사이에 채택되었다.
<이후락-김일성의 만남>
‘72년 5/2~5/5일 기간에 박통의 특명을 받은 당시 중정부장 이후락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김영주와 회동하고, 5/29~6/1일 사이 부수상 박성철이 서울을 답방하여 박통을 만났다는 사실을 7/4일 ‘자주, 평화, 민족’을 키워드로 하는 공동선언문과 함께 서울(이후락)과 평양(김영주)에서 동시에 발표했다.
<박정희-박성철의 만남>
이 성명문을 학교 수업시간에 전해들은 나와 다른 학우들은 그렇게도 서로를 못잡아 먹어 안달하던 양측이 갑자기 화해무드에 들어가자 ‘이 뭔 안하던 짓거리냐?’ 하고 반신반의 하면서도 ‘그 참, 이러다 통일이라도 되는건가?’ 하고 신기해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발표문을 언론 프레스에서 낭독한 이후락은 하루 아침에 ‘혈혈단신으로 간 크게 敵地에 다녀온 사나이’로써 ‘최고의 인기 화제남’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남북 밀월선언 사건은 남북한 정권이 진정한 통일의지의 표명보다는 자신들의 새로운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계기로 활용했다는 역사적 비판을 받고 있다. 박통은 북한과의 통치시스템 경쟁에서 더 효율적이 되자면 ‘유신체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를 개발했고, 김일성은 기존 ‘북-중-소의 삼각 등거리 외교기반’이 허물어지는 차제에 ‘주체적 사회주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체제수호적 근거를 남북협상 과정에서 끌어내었던 것이었다.
3. 뮌헨올림픽 대회와 검은 9월단 사건
‘72년 8/26~9/11일 나치스 시대의 ’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이어 서독 뮌헨에서 두 번째로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서독은 패전 후 경제강국으로서의 부활을 알리듯 당시로서는 최고수준의 건축공법을 동원하여 건립한 뮌헨 스타디움을 전세계에 과시했다.
<개막식이 펼쳐진 뮌헨 스타디움>
대회 중반까지 무난한 진행 속에 북한은 모처럼 참석하여 사격에서 리호준이 딴 금메달과 은 1, 동1(준결승에서 한국여자팀에 3-1 승리)의 성적으로 유도에서 재일동포 오승립이 거둔 은 1의 남한을 능가하는 호성적을 올렸다. 우리는 자주 안나오던 북한이 출전하여 한국선수가 올림픽에서 아직 한번도 매지 못한 금메달을 단번에 건져가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수 밖에 없었다. 또 남북한 여자배구 3~4위전에서 북한에 패한 것도 크게 아쉬웠고..
<'검은 9월단' 테러리스트들>
대회 막판인 9/5일 이 대회 최대의 흑역사인 팔레스타인 소속 ‘검은 9월단’ 단원 8명이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를 급습하여 9명 정도의 선수를 인질로 잡고 체포된 단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대치하다 독일경찰의 어설픈 대응으로 인질 전부를 사망하게 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스라엘 선수단은 서독정부를 비난하며 전원 퇴촌하여 귀국했으며, 초유의 34시간 대회중단 후 조기를 올려 이스라엘 선수단을 애도한 뒤에야 대회를 허둥지둥 마무리 지었다.
4. 박통의 ‘10월 유신’ 선포
‘72년 10/17일 박통은 국내외 기류들이 모두 자신의 정권유지를 강력하게 위협한다는 생각이 들자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정정지를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자신이 ’79년 10.26 사태로 타계할 때까지 유지된 ‘유신독재체제’를 펼쳤다.
<10월유신과 비상게엄 선포>
명목상으로는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 속에 미군의 부분적 철수가 논의되고, 국내적으로는 ‘70년부터 선포된 긴급조치들에 대한 체제반대자들의 저항이 높아지고, 김대중을 기점으로 하는 야권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날로 확대되자 ’한국적 민주주의 확립‘과 ’북한과의 효율적 체제경쟁력 확보‘라는 미명하에 종신집권 체제를 구축하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체육관 선거>
나는 당시 대입준비에 바쁜 와중에서도 대청독서실에서 접한 이 소식에 ‘이건 진짜 아니다’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아무리 공식 명목이 그렇다 해도, 국회를 해산하고 재적 1/3의 국회의원 임명권, 횟수제한 없는 6년 임기의 연임권, 직접선거제가 아닌 3,000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원에 의한 체육관 선거를 획책하는 것은 박정권이 두고두고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고 여겨졌다.
결국 ‘79년 부마항쟁 사건을 불러 일으키고, 그해 10/26일 심복 김재규에 의해 암살된 뒤 그 당시 유행하던 ’대한민국 대통령 임기는?‘ 하면 ’총맞아 죽을 때까지‘라던 블랙유머가 회자될 정도로 박통 스스로가 자신의 정치적 무덤을 판 우리 현대사의 필연적 귀착점을 야기했다.
<S대로 가기 위한 독서실 대입준비 장정>
‘72년 초의 닉슨 중국방문과 7월의 남북공동선언이라는 굵직한 국내외 사건들의 연속 속에서도 우리는 상징적인 하계방학 기간을 짧게 보낸 뒤 수업을 거의 바로 재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무렵 나는 중위권 성적권의 탈피를 위해 나름 특단의 대책으로 대청동 4거리에서 국제시장쪽으로 커브 트는 길목에 괜찮은 분위기의 독서실이 있다기에 한번 가서 둘러보고는 바로 등록했다.
가장 맘에 드는 것은 개인학습 공간이 기존 독서실들보다 2배 정도 넓고, 위에는 문짝이 달린 이층 서가가 있어 개인도서들을 충분히 비치 보관해 놓을 수 있는데다 그 당시는 드물었던 학습용 개인 형광등이 자리마다 다 설치되어 있는 것이었다. 무슨 고시원 같은 분위기였는데 자기공간 임대비용도 그리 높지 않아 꽤 만족하게 여기서 그해 12월 말까지 머물었던 것 같다. 도심 속에서 무슨 절간공부 하듯이..
항공기 비즈니스 석처럼 좀 고급화한 개인전용 학습장만 월단위로 임대하는 시스템이었고, 한 사람이 차지하는 개인공간이 넓으니까 인원들을 바글바글하게는 처음부터 수용할 수 없었다. 주변을 보니 대부분 공무원이나 사시 준비생들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여학생들은 꿈도 꾸지 말라고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는 듯한 고시원 중심의 독서실이었다.
난 학교수업 마치면, 집에 가서 잠깐 휴식한 뒤 여기로 찾아가 자율학습하고 통금 직전 40번 막차 버스 타고 서대신동 집으로 돌아오는 학습패턴을 유지했다. 그당시에도 그랬지만 난 지금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했지만, 무슨 ‘황야의 늑대’처럼 혼자만의 공간에서 호젓하게 책 보거나 다운받은 영화나 야동도 가끔 보며 이런저런 홀로놀기에 빠져드는 데도 못지 않게 익숙해 있다.
주말은 토요일 오후부터 머물다 집에 가서 숙박한 뒤 오전 중에 독서실에 다시 나와 일요일 한 밤중까지 공부도 하고, 점심 먹으러 나와 국제시장 산책도 하면서(많은 경우 광복동과 남포동까지 연결되는) 어찌 보면 좀 유유자적한 고3 생활을 했다. 중요한 시험이 있을 때는 말 그대로 밥만 먹고 바로 들어와 열공하였는데, 이때는 앉아만 있어도 때되면 배가 고픈 걸 봐서 정신적 노동도 운동이나 육체적 노동처럼 칼로리가 제대로 소모된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했다.
입실한 지 며칠이 안되어 26회 졸업 후 경남학원에서 재수 중인 이과계 김남수 형을 이 독서실에서 알게 되었다. 이 양반은 내가 서가에 제법 깔끔하게 진열해 놓은 여러 입시 참고서들과 사전류, 그리고 몇몇 권의 국내작가 소설책들을 보고, 굉장히 있어 보이는 서가라고 감탄을 하면서 같은 이과 지망인데도 문과지망생 자리같다고 했다.
우리는 바로 친해져서 서로 잘하는 과목들에 대한 질문과 답변들을 교환했다. 나는 주로 수학과 물리 및 화학 쪽을, 그 형은 국어와 사회 쪽을 내게 질문했다. 이렇게 그해 말까지 같이 밥도 먹고, S대의 과목별 출제경향을 서로 듣고 온 정보 보따리를 풀어가며 얘기도 많이 나눴다. 차차 알고보니 이 양반이 준수학도사급이었다.
그해 10월 중순 박통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유신혁명’이란 미명 하에 종신 대통령직을 하겠다는 유신헌법을 선포하며 헌정을 중단시켰다. 하지만 수험준비에 바쁜 나로서는 그 독재성에 대한 비판의식 보다는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제대로 승리하자면 남쪽도 어느 정도는 강력한 체제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 좀 마음 편하자는 기분으로 설득 당하기를 원해 ‘개발독재’를 중단기적으로는 인정해도 좋다는 쪽으로 내심 타협했다.
문제는 2달 밖에 안남은 S대 입시에 유신헌법의 내용이 과연 출제될까 여부였다. 주요 언론들은 바뀐 헌법 내용들이 결코 이번 입시에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였지만 당시 일반사회를 담당하던 홍성진 선생은 혹시라도 모르니 바뀐 내용들을 알아나 놓자며 정리해 와서 학우들에게 소개했다.
그때 밀양출신 김종도가 손을 들고 발언을 요구하더니 ‘샘요, 이건 아니지 않심니까? 이런 독재 악법을 비판하는 시간을 가져야지, 이걸 S대 문제에 나올지도 모른다꼬 우리에게 주입시키려 하다니요?’ 하며 울분을 토했다. 난 46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이 친구가 그런 대담한 발언을 한 사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마 자리를 같이 했던 우리반 학우들도 상당수가 그랬으리라.
평소 때 다정다감하고 온화한 성품의 홍선생은 얼굴이 벌개지며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름대로 민첩하게 내용을 요약정리해 오면 많은 학생들이 ‘와이고, 우리 선생 수고 많이 했구만’ 할 줄 알았는데 생각도 못한 본질적 문제에 대한 비판제기가 나오자 이 양반도 어찔했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코앞에 닥친 수험입시생의 입장에서 유신헌법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만에 하나 출제될 때를 해당과목 선생으로써 대비하자는 맘으로 소개한 것 뿐인데..’ 하며 참으로 섭섭하다는 반응을 끝내 내비췄다.
결국 그해 S대 시험에서는 유신헌법 내용 문제가 나오지 않았고, 난 그때 이후 까까머리 고교생의 신분으로도 그런 선견지명적이고도 비판적인 사고력을 선보이며 선생을 질타하던 김종도군에게 항상 경탄과 경외심을 품어왔다.
‘72년 2월 중순 졸업식이 끝나고 수도권 대학에 지원한 나와 다른 학우들은 상경해서 시험을 치뤘다. 대청독서실 동기인 남수 형은 예상대로 S대 공대 중상위권 학과에 널널하게 합격해 들어갔고, 나는 억지를 부려 S대 치대에 쳤지만 떨어졌다. 원래 내 성적으로는 농대 축산과 정도 밖에 선택대안이 없다 했지만 재수할 각오이니 치대 정도는 지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길창순 선생을 모친까지 동원해 졸라 OK 사인을 선선하게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미련없는 실력차로 시원하게 떨어졌다.
불합격을 안 연후에는 후기대에 원서도 넣지 않고, 이미 잘 계획되었던 듯 종로학원에 재수등록 시험치러 혼자 올라와 종로 2가 낙원동 여관에서 이틀인가 더 묶었다. 올라온 첫날에는 피카디리 극장에서 ‘쿼바디스’를 봤고, 그 다음날 학원에서 기본실력 테스트 시험을 본 뒤 근처 파고다 극장에서 알랑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란 영화를 보고는 경남고 출신이라면 다 붙여주는 합격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를 타고 담담하게 앞으로 펼쳐질 서울에서의 재수생활을 구상하며 부산집으로 내려왔다. 바야흐로 경남고 3년의 고교생활이 내 생애 첫 입시탈락이라는 사건과 함께 막을 내린 것이다. 이때만 해도 내게는 아직 기세가 쌩쌩 살아있었다. 앞으로 계속 펼쳐질 불합격의 퍼레이드는 결코 나하고는 상관없는 먼나라의 일일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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