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11. 만만하게 시작했다 큰 코 다친 재수 시절

백조히프 2018. 7. 9. 00:08

11. 만만하게 시작했다 큰 코 다친 재수 시절


<1973년의 재수 시절>


1. 신촌 하숙집 입성


‘73년 3월초 모친과 함께 상경하여 미리 구해둔 신촌 연세대 정문 굴다리 옆 창천동 골목에 있는 한옥 하숙 전문집을 찾았다. 부친의 함안국교 동창이라는 강여사가 부친으로부터 부탁 받고 찾아준 집이었다. 주로 연세대생들이 하숙하고 있었고, 재수생은 나 하나 뿐인 듯 했다.


내가 지낼 방에 들어가니 룸메이트로써 부산고 출신이라는 연대법대생이 모친과 나를 맞아 주었다. 복학한 20대 중후반의 형이었는데 동향에다 경고 후배라고 잘 챙겨주었다. 첫 날이니 모친도 이 방에서 같이 묵고 가라고 자신은 다른 친구집을 찾아가는 배려심을 보여주었다.


<73년 무렵의 신촌 하숙촌 전경>


나는 큰 마음의 동요가 없는데 비해 연극적 신파 감정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흘러넘쳤던 모친은 내가 초등 고학년 때부터 감정선을 스스로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리도 자주 지적 했음에도, 아침에 돌아온 釜高 형(하정수로 기억됨)과 조반 겸상을 받는 순간부터 예의 눈물샘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형이 ‘모친, 걱정 마시소. 이 친구는 대가 야무져 보이니 지가 알아서 서울생활 충분히 잘 해 나갈낌다’ 하고 안심 시키는데도 못 미더운 듯 자기감상에 젖어 내내 훌쩍거렸다. 택시 타고 부산 내려가기 위해 같이 서울역으로 가는 도중부터 점점 울음소리가 높아지더니 새마을호 표 끊고 기차에 승차하는 순간에는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훗날 들은 얘기로는 수원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한다).


다 큰 아들을 앞에 놓고 젖먹이와 생이별 하는 양 오버하며 크게 슬퍼하니 참 난감하기도 했지만, 태어나서 처음 가족과 떨어지는 객지 생활을 하는데 대한 비감스러움도 모친의 통곡 속에 같이 전해져 왔다. 같이 전염되어 울적해진 마음으로 돌아오다 하형에게 룸메이트 신고라도 해야겠다 싶어 맥주 3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사서 방에 들어왔다.


그 형이 내 신고정신에 흡족해 ‘니 쫌 똘망져 보인다’ 하고 답례해 주며 내 족보와 자기 족보를 같이 교환하다 ‘저 앞 방에 정외과 다니는 너그 경고 선배 한 양반이 이 집 대표방장 대접받으며 있다’고 전해주는 게 아닌가. 다음 날 아침이 첫 주말이라 그런지 주인집 대청마루에 하숙생들 모두가 모여 아침 먹는 시간이었다.


그 선배 방장이 바로 19회 권철현 선배였다. 내가 막내 신입으로 본인 소개를 하자 권선배가 ‘오, 우리 이칠이가 왔구만’ 하며 친밀감을 바로 보여주었다. 그 당시도 이 양반은 걸쭉한 입담으로 식탁 좌중을 휘어잡는 것이었다. 주로 군대 선임생활에서의 다양한 에피소드들로 다른 복학생들과의 연대감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미필 후배들에까지 대표방장으로써의 카리스마를 행사했다.


2. 종로학원 생활


3월 둘째 주 종로2가에 있는 종로학원에 들어가 보니 우리 27회 친구들도 많이 보였다. 기억나는대로 읊어보면 이상조, 조군제, 지태성, 강성보, 유봉(한달 후 S공대 특차 시험합격), 하연호(경중 27회), 윤종락(경중 27회), 이철희 등이 있었다.


첫 수업을 들어보니 뭐 그리 특별한 수준이 있는 건 아니었다. 대신 반 분위기는 드물기는 하지만 빤질한 수도권 명문여고 출신 여학생들도 간간이 있었고, 남학생들도 각 명문고의 범생이 출신들이 제법 있어 보여 무슨 명문대 예비학교 같은 자유로움과 부드러움이 많이 배어 있었다. 그런데 휴식시간 보내기가 마뜩하지 않았다.


<73년도의 종로 2가 전경>


고교시절처럼 교정이라는 게 없어 휴식 10분은 고스란히 교실 복도에서 보내야 할 때가 많았다. 남학생들은 대부분이 그 시간에 담배 한대씩 맛있게 피우는데 나같은 비흡연자는 촌닭처럼 우두망찰 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한 며칠이 지나자 그렇게 시간 보내는 게 도저히 불편하여 ‘예라, 나도 담배질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 드디어 끽연계로 데뷔했다.


그 첫 담배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뽂음이 아닌, 연기를 제대로 깊숙이 삼키니 약간 뱅 도는 느낌이 있었지만, 드디어 나도 담배를 피워도 아무런 터치를 받지 않는 성인남자 세계에 제대로 합류했구나 하는 뿌듯함이 더했다. 며칠 안가 니코틴에 중독되어 담배가 끊어지면 안되는 담배쟁이가 되었다.


여름이 될 때까지 타교 출신들과는 별로 말도 트지 않은 채 아는 27 동기들과만 어울릴 뿐 그냥 버스 타고 학원과 하숙집을 오가는 생활만 했다. 주말에는 좋아하는 영화를 보러 다니거나, 하숙집 멤버들과 한잔 하는 모임에 끼어서 어울리곤 했다.

 

어느 주말인가에는 음전하게 보이는 30대 초중반의 여인이 하숙집에 찾아와서 한 때 우리 부친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던 직원이며 연락받고 달려왔다며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했다. 그 전에 빨래감 있으면 손빨래라도 해 주겠다고 무조건 다 내어놓으라는 게 아닌가. 빨래는 주인집에서 다 해주니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자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 했다. 근처에 있는 ‘형제갈비’ 집인가로 갔더니 갈비탕 한그릇만 해도 되는데 기어이 불고기까지 시켜 어쨌든 나를 한끼 제대로 먹이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나는 처음 보았을 때 딱 알아보았다. 한 때 우리부친의 신세를 크게 진 여인으로써 어떻게든 그 자식에게 옛 은혜를 갚으려 하려는 다짐 같은 것을 말이다. 뭐 서로 간에 정분을 나눈 사이라 하더라도 그 여인의 표정이나 행동거지에서 옛 은인이었거나 연인의 소생을 챙겨주려는 그 진정성은 정말이지 허투루가 아니었다. 우리아배 제법이네 하고 속으로 약간 감동먹었다.


<재수 시절에 어울린 친구들과 지인들>


창천동 첫 하숙집에서 한달이 지났을 때 하형이 ‘이화여대가 있는 대현동 쪽에 더 괜찮은 하숙집 봐 놓았으니 같이 옮기자’ 해서 별 생각없이 따라나섰다. 권철현 선배에게는 ‘룸메이트 하선배와 의리 지킨다고 나가게 됐심다’ 하니, 알았다며 ‘내년에 원하는 대학에 꼭 돼라’ 하고 학운을 빌어 주었다.


옮긴 집에서 한달 반인가 있으니 하선배가 이번에는 사시준비를 위해 절에 들어가겠다며 나갔다. 그럴 수도 있겠다 여기고 내 방에 한 일주일 간 혼자 지내게 되었는데, 학원에서 군제를 만나 내 방이 비었다 얘기하니 나와 같이 있고싶다 하여 자기 하숙집에서 짐을 빼와 내 방으로 들어왔다.

 

군제는 토성동 시절부터 동네친구로 초등과 중고교를 같이 다녔지만 한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종로학원과 하숙방을 같이 다니고 쓰게 된 것이다. 이 친구는 저그 한 살 위 형인 훈제(경중 27회)가 어린 시절 항상 ‘벅수’라고 부를 정도로 좀 되바라지지 못하고 ‘우직한 돌쇠’ 같은 캐릭터를 풍겼다. 하지만 힘이 장사고, 운동 신경도 뛰어나 축구할 때는 ‘조세비오’라고까지 불리었다.


한 두달 반인가 고만고만한 크기의 하숙방에서 책상 두 개 놓고 큰 문제없이 서로 잘 지냈다. 한번씩 지랄맞은 내 꼴통짓을 언제나 형빨처럼 받아주었고, 대신 내가 저그 부모님께 보내는 문안편지라도 대필해 주면 집에서 칭찬 크게 먹었다고 나를 한참 띄워주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군제 모친이 이 무렵 암으로 돌아가셨다. 이 말근육을 가진 친구가 어찌나 서럽게 상심에 빠지든지.


결국 혼자서 마음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는지 따로 나가겠다고 했다. 난 또 당분간 혼자 지내는 신세가 됐지만, 개성출신 주인 아줌마의 찾아오는 내 친구들에 대한 밥 인심이 크게 인색하여 이번에는 내가 나와 학원에서 멀지 않은 광화문 적선동 쪽에서 방을 하나 구했지만 독방용의 크기라 혼자 오래 있을 처지는 못되었다.


이런 와중에 학원 문과반에 있어 서로 못본 강성보를 학원 내에서 우연히 만나 학원수업 왕창 제끼고 명동으로 같이 놀러갔다. 성보는 최태룡이를 통해 이름은 전해 들었지만 중고교 때는 한번도 같은 반을 하지 않아 깊은 면식은 그동안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27동기로 만나니 전생부터 서로 잘 아는 지기처럼 바로 가까워졌다.


<73년 무렵의 명동 거리>


이 인간에게서 명동 코스모스 빌딩내 당구장에서 난생 처음 당구 큐대 잡는 법도 배우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서로의 거처에 대한 얘기까지 나왔다. 적선동 방을 같이 둘러보고는 여기보다 자기가 있는 돈암동 성신여대 근처 동선동 하숙집이 주인 아주머니의 하숙생 내방객에 대한 밥 인심이나 방 크기 면에서 월등하다고 주장해 이번에는 내가 그 방에 합류하기로 했다.


드디어 그해 가을부터 입시가 닥친 1월까지 강성보와의 ‘동선동 하숙방 동거시대’가 펼쳐졌다. 학원성적은 수학쪽 머리가 여전히 깨쳐지지 않은 채 고교 때보다 크게 나아진 것도 없이 이과반에서 100~150등 대를 맴돌며 좀처럼 100위권 안으로는 들어가지질 않았다.


더군다나 첫해 현역 때 S대 정외과를 쳤을 정도로 경남고 상위권 성적을 만들어준 고득점의 수학내공을 가진 친구가 설렁설렁 놀면서 공부한다고 치대 정도에도 한참 밑에서 떨어진 놈이 옆에서 저래도 되는가 싶어 같이 보조 맞춰주며 놀았으니 상황은 안봐도 뻔했다.


학원 수업 마치고는 거의 밤마다 출근하듯 집 근처 당구장에 당구치러 다녔으니 한번 더 S대에 지원할 수 있는 성적향상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그렇게 열심히 당구장 따라다니며 강성보 당구비 대어주었건만 큐대잡이를 거지같이 배운데다 집념과는 거리가 먼 대충대충의 성격으로 45년이 지난 지금도 80~100점 정도의 하수에 머무르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친구와 호연지기연 하며 학업보다는 잡기공부에 더 많이 빠진 시간을 크게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다. 그 당시 집안사정이 빠듯해 부모지원을 나보다 훨씬 덜 받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낙천적 전망과 자신에 대한 도도한 당당함이 대단했던 친구와 한 시절을 같이 보내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시험 코앞에 두고도 굴러들어온 미모의 여인과 연애를 마다하지 않고 널널하게 펼치던 그 똥배짱과 행운을 옆에 있으면 어째 내 삶에서도 좀 공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적과 같은 믿음이 있어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


<73년에 발생한 국내외 주요 사건>


1. 김대중 납치 사건


‘73년 여름 전년도 대선에서 패배한 김대중은 대선기간 중 입은 (살해음모용) 교통사고 후유증의 치료차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개헌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점점 높이자 박통의 분노도 같이 높아졌다. 8/8일 중앙정보부가 요원을 파견해 일본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김대중을 납치했지만 이를 알아챈 미CIA의 저지로 공해상에서 수장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채 8/13일 동교동 자택 앞에 내려다 놓고 도주했다.




<납치에서 풀려난 후 인터뷰하는 김대중>


이해 4월 술좌석에서 ‘박통각하 다음에는 후락이 행님 차례임다’라고 한 당시 보안사령관 윤필용의 실언 사건에 크게 엮였지만, 간신히 실각을 면한 중정부장 이후락은 신임을 만회하기 위해 박통 눈에 가시같은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 유인해 제거하려는 공작을 모험적으로 꾀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수하 공작원 5명을 보내 납치에 성공했지만, 공해상 수장 계획은 미국당국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로 인해 '66년 동베를린 사건 때의 독일과의 관계에서처럼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수세에 몰리며 형편없이 헝클어졌지만, 이후락을 해임하고 (후일 록히드사 수뢰 스캔들로 구속된 다나카 일본수상에게 거액의 비공식 정치자금까지 건넨 뒤) 김종필을 신임 총리로 임명하여 사죄방문을 함으로써야 간신히 무마되었다.  


 

<당시의 납치 사건 기사>

나는 이 무렵 재수 공부도 심드렁하고 해 그간 좀 알게 된 학원내 서울 친구들과 제법 자주 술집 다니며 탱자탱자하던 때였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접했을 때 ‘아니, 김대중이란 인물이 (김영삼도 있고 한데) 뭐 그리 위협적인 정적이라고 박통이나 박통 딸랑이들이 저리도 모질게 해코지 할라 할꼬.’ 하며 저들의 오버스러운 대응으로 DJ를 정치적으로 더 크게 만든다고 여겼다.

 

2. 중동전쟁 재발과 1차 오일쇼크 파동

 

‘67년 3차 중동전(6일전쟁)에서 전격패배했던 데서 절치부심해 온 이집트의 사다트 정부는 시리아와 합작해 ’73년 10/6일 자신들은 시나이 반도쪽을, 시리아는 골란고원 쪽을 맡아 동시 침공전을 펼쳤다.




<4차 중동전쟁 전황 전도>


7년 전과는 달리 이집트군의 초반 전격전에 의해 이스라엘의 방어선이 무너져 시나이 반도의 상당 지역이 탈환되었지만, 골란고원전에서는 시리아군의 패퇴가 거듭되어 2주째부터는 전체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결국 10/22일 유엔안보리의 평화중재안을 받아 들여 양측은 종전에 합의하였다.

<1차 오일쇼크가 끼친 국내외경제 영향>


이 4차 중동전 재개와 함께 중동아랍국 중심의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감산과 유가인상을 통해 세계경제에 ’1차 오일쇼크‘를 불러일으키며 EC, 미국, 일본, 한국 등 석유수입국에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가했다. 이렇게 중동산 원유를 ’석유무기화‘ 하는 데 성공한 OPEC은 향후 수십년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며 미국을 비롯한 친이스라엘 세력의 분열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무렵이 내게는 강성보와의 당구장 순례에 정점을 찍던 시기였는데, 초반 이집트군의 기습전이 성공하여 무적신화를 자랑하던 이스라엘 수비군이 무너지는 것이 너무 안타까왔다. 우리 정부도 일본처럼 이스라엘과의 단독수교 관계를 내던지고, 친아랍 외교노선으로 돌아서는 것을 목도하고 ‘ 아, 이젠 석유 가진 아랍국 세상이 되는가보다’ 하는 상황을 제대로 음미했다.


<막판에 바꾼 입시지원 대학과 연속 불합격 쇼크>


찬바람이 불어오며 시험칠 날은 다가오는데 성적은 여전히 그런 선에서 계속 맴돌았다. 어차 싶어 고민을 하는 중에 어느 날 무슨 영감이 들 듯 ‘지금 상태에서 억지로 무리해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S대 하위권 과에 가면 뭐하냐, 그냥 (만만해 보이는) 연고대라도 가자’ 하는 생각이 들어 연고대반으로 급히 방향을 바꾸었다. 연대쪽을 훑어보니 최태룡이가 한해 전에 간 S대 사회학과가 그럴 듯해 보여 나도 연대쪽 그 과에 그냥 지원해 버렸다.


<연세대 문리대 건물>


하지만 기존출제 경향 파악도 없이 무엇에 씌인 양 충동적으로 지원한 결과는 또 한번 보기 좋은 불합격의 결과로 돌아왔다. 좋다, S대 못갈 바에야 성에 안차는 연대 정도는 떨어져도 큰 여한은 없다 하며 나름 자위를 했다. 뭐 그렇다면 이번에는 납작 엎드려 2차라도 가야겠다 싶어 후기대 중에는 우리 불합격 동기들이 많이 가는 한국외국어대를 꼽았다.


세계사와 문학 작품들을 통해 항상 호감을 가졌던 독일에 대한 애착심에 설마 또 떨어지겠나 하는 마음으로 독일어과를 지원하는 입학원서를 큰 고민없이 내었다. 시험 그 전날 외대 이문동 앞 어느 여관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우연히 이태리어과를 지원한 27회 홍상주군을 만나 둘이서 같이 잘 방을 확보했다.


<눈덮힌 외국어대 건물>

 

이 친구와 둘이서 저녁과 막걸리 한잔하는 타임을 꽤 오래 가진 뒤 숙소에 가서 바로 취침하지 않고, 무슨 오기가 발동했는지 내켜하지 않는 홍상주와, 내가 우겨 밤 1시까지인가 당구를 쳤다. 돌아와서는 사가지고 온 맥주를 마시며 모처럼 가까이서 만난 이 친구와 꽤 오래 얘기를 나누다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허겁지겁 일어나 컨디션이 당연히 서로 엉망인 상태에서 시험을 쳤는데 며칠 후 발표소식을 들으니 상주는 되었고, 나는 또 떨어졌다.


떨어질 위험을 오히려 자초하며 불러들인 내 책임이 한참 컸지만 막상 그 충격이 아주 컸다. 마침 시험날과 겹쳐 나는 못간 채 조부상을 치루고 마산에서 귀가 중이던 모친은 전화로 이 소식을 듣자 말문을 닫았고, 옆에서 같이 전해들은 부친도 만취 술이 확 깼다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친은 오자마자 ‘니는 너그 친구들 보다 1년 어리게 학교 들어갔으니 삼수가 이제야 재수나 마찬가지다’ 하며 그 와중에도 내가 혹시 극단적 선택을 할까봐 나를 얼리는 모드로 들어왔다. 참 일생 중 몇 번 맞지 않을 기분 더러운 순간들 중 한 때였다.


나는 내 존재의 하찮음에 너무 큰 자조와 자학감을 품은 채 ‘뭔가 일 칠 것 같다’고 직감하며 걱정하는 모친을 뒤로 하고는 그날 밤 집을 나와 비가 때맞춰 내려주는 광복동과 남포동 밤거리를 하염없이 혼자서 쏘다녔다. 돌아다니다가 어느 부침개 안주 파는 주점을 발견해 들어가 막걸리 한 주전자와 무슨 안주를 시켰다.


주위에는 데이트 족들이나 삼삼오오 친한 친구 그룹 또는 직장동료 그룹 모임들이 왁자지끌하게 펼쳐지는 한 귀퉁이에서 만감이 교차한 채 혼자서 눈물까지 쥐어짜는 신파극을 물리치지 않고 독작(獨酌)하게 되었다. 방금 대학입학 관문에서 파문당한 채 들이닥친 실존적 고독감에 어쩔 줄 모르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모드를 내 상황에 입혀서 말이다.


하지만 이 두어 시간의 독작 타임이 흘러가면서 이런 삶의 고비는 앞으로 펼쳐질 긴 인생에서 닥쳐올 여러 고비들 중 그 첫 번째일 뿐이니 오는대로 받아서 버텨가며 넘겨보자는 마음의 각오로 서서히 내면이 정리되어졌다. 많이 진정된 기분으로 집에 들어오니 모친이 대문 옆 도로에서 꽤 오래 서성이었던 듯 조바심 속에 맞아주었다.


난 이 날부터 5월 중순이 올 때까지 별채 내 방에 틀어박혀서 ‘大望’(도쿠가와 이에야스)이라는 야마오카 쇼하치의 대하소설과 최인호, 조해일, 조선작 등의 중단편집들, 탈주범 얘기인 ‘빠삐용’이나 마피아 얘기인 ‘바라키’ 등을 읽으며 식사 때만 윗채 방에 가서 식구들과 대면하는 생활을 했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책읽다 줄담배도 제법 하며 이 시기를 쓰라림에서 담금질의 시간으로 만들려 애썼다.

 

내 소식을 전해 들었던지 가까운 친구들조차 직접 전화는 하지 못했고, 나 역시 전해듣는 방식을 통해 내 하숙 룸메이트였던 조군제와 강성보는 1년 간의 재수기를 마감하고 각자가 원하던 S대 해당 계열에 무난히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 어쩌다가 나만 3수의 나락에 이리 빠졌는고 하며 그 씁쓰레함을 또 한 대의 담배로 달랬다.